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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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10-24 18:55:59, Hit : 452)
전시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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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적인 시각과 감성적인 수묵의 조화

이창희 수묵展

2007_1024 ▶ 2007_1030



이창희_홍도1_장지에 수묵_540×1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인사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24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6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이성적인 시각과 감성적인 수묵의 조화 ● 비록 수묵이 동양회화의 전통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재료이자 표현 방식이라 할지라도 오늘에 있어서 역시 그러한가는 다분히 회의적인 것이 사실이다. 이는 시대 변화에 따른 새로운 심미관, 감상관의 요구에 수묵이 부합하거나 조화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자는 수묵이 이미 오랜 역사적 발전 과정을 통하여 충분한 조형적 경험을 축적한 것으로 이미 하나의 완성된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그렇듯 많은 경험이 축적되어 있기에 더욱 풍부한 재해석, 재발견의 여지가 있는 것이라 강변하기도 한다. 수묵에 대한 다양한 의견과 논란 속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이 여전히 수묵을 표현의 기저로 삼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 회화의 학습 역시 수묵에 그 출발점을 두고 있는 것을 보면 수묵의 생명력은 참으로 유장한 것이라 아니할 수 없을 것이다.




이창희_홍도2_장지에 수묵_106×38cm_2007



이창희_궁평리_장지에 수묵_163×130cm_2007


작가 이창희 역시 수묵을 작업의 기저로 삼고 있다. 겉으로 드러나는 작업의 양태를 통해 미루어 볼 때 작가는 수묵이 여전히 유효한 표현 수단이며, 이의 재해석을 통해 부단히 수묵의 새로운 표정을 모색하는 경우라 할 것이다. 전통적인 수묵 조형은 중봉을 원칙으로 한 선의 표현이라 한다면, 그의 수묵은 모필 고유의 유려하고 깊이 있는 선들을 짧고 둔탁한 묵점(墨點)들로 대체하고 있다. 이러한 묵점들의 축적은 면을 형성하고 형상을 구축한다. 마치 점묘를 연상시키는 듯 한 그의 표현 방식은 분명 수묵이 지니고 있는 전형적인 표정과 양태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그가 굳이 이러한 형식과 내용을 취하게 된 것은 앞서 지적과 같이 고전적인 수묵 표현이 필연적으로 당면하게 될 전통과 현대에 대한 문제를 나름대로의 진단을 거쳐 얻어진 결과를 바탕으로 그 대안을 모색하고 추구한 결과일 것이다.




이창희_불암산_장지에 수묵_130×82cm_2007



이창희_채석강1_장지에 수묵_53×41cm_2007


작가 이창희의 작업들은 실경이라는 커다란 틀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전의 도시 풍경들의 묘사와 표현에서 보여 주었던 작가의 독특한 시각과 조형 방식은 단연 돋보이는 것이었다. 예의 묵점들을 잇대어 집적하는 반복적인 과정을 통하여 원근을 구분하고 형상을 드러내었던 당시의 작업들은 일단 산수라는 전형적인 조형의 틀에서 벗어나 도시를 또 하나의 자연으로 인식하고, 이에 부합하는 수묵의 새로운 표현 방식을 모색하였던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인 실경 작업들이 대상이 지니고 있는 객관적인 상황을 근간으로 하여 생동하는 자연의 기운을 표출하고자 하는 것이라 한다면, 작가의 도시 풍경들에서 나타나는 것은 오히려 수묵의 깊이와 감성적인 운용이었다라고 정의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도시라는 새로운 대상에 대한 시각을 단순히 그것이 지니고 있는 형식적 전형을 재현하는데 관심을 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사물들의 표현을 통하여 여하히 수묵의 새로운 표정을 발현할 것인가에 대해 주목한 것이다. 현재 작가의 작업 전반을 아우르고 있는 짧고 둔탁한 묵점들의 집적은 바로 이러한 과정과 실험을 통해 획득되어진 것인 셈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작가가 새롭게 수용한 대상은 바로 자연 풍경이다. 특히 바다, 혹은 하늘이 뚜렷한 대비를 이루는 특징적인 자연 풍광들을 예의 독특한 필치로 포착하고 표현해 낸 것이다. 홍도, 혹은 채석강 등의 기경(奇景)들을 두루 답사한 그의 시각은 여전히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것이다. 여백으로 설정된 하늘이나 바다의 공간 역시 소극적인 여백의 역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설정된 공간으로 화면에 적극적인 작용을 한다. 예전에 수묵 표현이 묵점들의 집적을 통해 이루어지는 점진적이고 층차적인 것이었다면, 새로운 작업들은 중봉이 아닌 편필(偏筆)의 운용이 두드러진다. 중봉이 준(?)으로 대표되는 선의 표현이라면, 편필의 구사는 찰(擦)에 의한 면의 구축이 특징이다. 작가는 반복적인 찰의 방법을 통하여 수묵을 집적하고, 이를 통하여 풍부하고 다양한 수묵의 새로운 표정들을 발굴해 내고 있다. 짙고 강한 수묵의 집적은 양감을 형성할 뿐 아니라 음영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명암을 표현해 내고 있다. 수묵 자체에서 일어나는 농담의 대비와 여백과의 병치를 통해 발현되는 이러한 수묵의 심미는 이전의 교조적인 수묵화론에서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이는 대상에 대한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관찰과 표현을 전제로 수묵 고유의 심미를 수용해 낸 것이라 할 것이다.




이창희_채석강2_장지에 수묵_53×41cm_2007



이창희_채석강3_장지에 수묵_53×41cm_2007


사실 수묵 자체는 그 시발을 비가시적이고 비정형적인 것에 두고 있다. 즉 일종의 관념과 사상에 의해 설정된 조형 방식인 셈이다. 이는 전적으로 작가의 주관에 의한 사물, 혹은 상황의 인식과 표현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객관적인 묘사와 표현과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작가가 추구하는 객관과 주관의 조화는 서로 상이한 심미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치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이를 한 화면 안에 수용함으로써 발생하는 모순과 충돌의 상황을 의도적으로 경영하고 있다 할 것이다. 사실(寫實)과 사의(寫)意, 객관과 주관, 상징과 표현 등으로 대변되는 이러한 가치의 병열과 융합은 바로 작가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새로운 수묵 표현의 접점인 셈이다. 이러한 민감한 내용들을 다루는 작가의 필촉들은 대단히 예민하고 섬세한 것이다. 대상에 대한 관찰과 표현에서 드러나는 합리적인 시각과 이를 수묵이라는 전통적인 조형 방식으로 수렴해 내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작가의 수묵에 대한 이해는 이미 일정한 단계와 수준을 확보한 것임이 여실하다. 이는 작가가 지향하는 궁극적인 심미 단계를 담보해 줄 수 있는 유력한 내용들일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작가의 실험을 통해서 전통의 묵은 관념을 뒤집어쓰고 있는 수묵의 새로운 표정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게 하는 것 역시 이러한 전제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의 조형 방식은 단순히 상충하는 두 가지 조형 체계의 물리적인 합병에 머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다 높은 차원에서의 사색과 사유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내용들을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이 구비되어 있기 때문에 이러한 기대는 더욱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 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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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을 꿈꾸다

고찬규 개인展

2007_1024 ▶ 2007_1030



고찬규_12월_한지에 채색_72.7×6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고찬규 블로그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장은선갤러리
서울 종로구 경운동 66-11
Tel. 02_730_3533
www.galleryjang.com






삶의 진정성이 담긴 우리들의 초상화 ● 서양미술사의 주인공은 인물화이다. 물론 풍경이나 정물도 한 부분을 차지하지만 인물화에 비하면 그 비중은 현저히 낮다. 영웅주의적인 서양의 인물화는 인간 삶의 역사를 반영한다. 현실, 즉 실상을 반영하는 초상화 형식은 물론이려니와, 서사시적인 기록화 형식에서도 인물은 그림의 주인공이 되고 세계의 중심이 된다. 세계를 움직이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당연한 자긍심의 발로이다. 그러나 개인중심으로 가는 현대사회에서 그림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외양보다는 내면에 집중된다.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의미를 두는 것이다. 따라서 실제보다 미화하거나 차가운 느낌의 사실성을 부각시키는 인물화와는 다른 형태해석, 즉 변형 왜곡 따위와 같은 조형어법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찬규의 인물화에서도 볼 수 있듯이 영웅주의적인 이미지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왜소하고 나약하게만 보이는 현대인의 일상적인 모습이 있을 따름이다. 사회구조가 전문화 세분화되고 있는 거대한 현대사회에서 인간은 그 공동체를 존재케 하는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림에서 인간 개개인의 존재에 대한 영웅주의적인 설정방식은 이제 하나의 전설에 불과하다. 물론 현대사회에서도 영웅이 존재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쇼비니즘적인 허상일 따름이다. 그는 현대인물화는 무엇을 표현해야 할 것인가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다. 영웅주의적인 삶의 모습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생활하는 소시민의 일상을 대상으로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자신의 주변이나 오며가며 만나는 평범한 시민들이다. 어떤 특정인을 모델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한마디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바로 우리 자신이거나 우리 이웃들일 가능성이 높다.




고찬규_낙화_한지에 채색_72.7×60_2007



고찬규_상심_한지에 채색_53×45cm_2007


그 인물들은 반복적이고 연속적이며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분주한 현대사회의 한 일원으로 살아가는 소박한 우리들 초상인 것이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변함없는 일상적인 삶에 버거워하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해 가는 인간상이다. 영웅적인 존재성을 드러내는 특정의 직업으로 사회적인 위치를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 익명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인간의 역사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지도 않고, 그런데 신경 쓸 겨를도 없이 그저 주어진 삶에 충실할 따름이다. 그가 이처럼 하찮은 풀잎처럼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적어도 그들에게는 자신을 포장하거나 과시할 필요가 없다. 자신의 일에 충실함으로써 그로부터 얻어지는 대가에 고마워하는 소심한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꿈과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결코 자신의 능력 밖의 터무니없는 망상으로 꿈을 부풀리는 짓 따윈 부끄러워하는 윤리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들이다. 다만 현실적인 삶보다 좀 더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의 꿈을 부둥켜안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을 포함하여 그러한 소시민적인 삶의 풍경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애정의 눈길을 보낸다. 애정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시민들에게서는 진정한 삶의 애환과 그 체취가 느껴지는 까닭이다. 위선이나 가식, 또는 자기과시가 없는 사람들은 속내를 외면에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일상적인 삶에서 비롯되는 희로애락의 감정이 표정과 몸짓에 자연스럽게 배어나오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바로 여기에 머문다. 예술로서의 가치는 영웅들이 아니라, 이 사회의 밑바닥을 형성하는 평범한 소시민의 내면세계를 탐조하는 데 있다는 판단인지 모른다. 실제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보여주는 캐릭터의 방향은 명쾌하다. 굳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인지, 사회적인 지위는 무언지, 생활수준은 어떤지 따위의 질문과는 상관없이, 한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지 않는 개개인의 일상사에서 묻어나는 내면을 선명하게 드러낼 따름이다. ‘환승’ ‘겨울날’ ‘불면도시’ ‘다시 혼자’ ‘혼자’ ‘봄비 그치다’ ‘무지개’ ‘첫눈’ ‘동행’이라는 명제가 시사하듯이 일상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소시민들의 감정 및 행위를 낱낱이 드러낸다. 그렇다. 자신의 존재, 아니 내면을 숨길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그 소박한 삶의 방정식이 우리에게 새삼 뜨거운 감동으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는 현대도시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상사와 마주치면서 그때마다 거기에 솔직히 반응하는 소시민의 모습에서 진정한 삶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감정세계를 그대로 묻혀내는 표정 및 몸짓은 현란한 색깔과 모양으로 치장한 꽃보다도 더 아름답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 표정 및 몸짓은 단지 시각적인 이미지에 그치지 않는 짙은 삶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찬규_As spring goes by..._한지에 채색_163×132cm_2007


그의 그림에 흐르는 정서는 잿빛 현대도시에서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이미지에 맞닿아 있다.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저마다 다른 직업과 환경 속에서 살지만 소시민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쩌면 그리도 하나같이 웃음을 잃은 굳은 표정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잿빛 도시를 덮는 우울한 그림자처럼 웃음이 가신 눈빛은 현대인의 고뇌를 상징한다. 그러나 그 눈빛은 아주 강렬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많은 얘기를 은폐하고 있을 법한 미묘한 표정이다. 그들의 강렬한 눈빛은 누군가 특정인을 향한 시선이 아니라, 차가운 경쟁사회 그 심장을 관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익명의 존재들은 감정의 과잉을 허용하지 않는다. 존귀한 존재로서의 자존을 중시하는 까닭이다. 비록 현실이야 고달플지언정 사회를 향해 항변하거나 존귀한 자아를 울리는 자해행위는 하지 않는다. 어쩌면 이 부분이야말로 그의 그림이 숨기고 있는 메시지인지 모른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지표는 일상에의 충실함에 있다. 설령 생활이 순탄치 않아 고되고 외롭더라도 그 아픔을 함께 나눌 대상이 있다면 큰 위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기에 아픔을 공유할 대상을 찾는 일마저 힘이 부친다. 진정한 소시민적인 사고 및 태도는 타인에게 부담이 되거나 짐을 지우지 않는데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혼자이기 일쑤다. 더러 부부나 애인으로 설정되는 복수의 인물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그 복수의 인물들조차 서로 간의 결속을 확신하지 못하는 듯싶다. 다시 말해 조건에 의해 맺어진 관계일지라도 결국은 혼자일 수밖에 없다는 자각이 팽배하다. 결코 기쁨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처럼 저마다 스산하고 망연한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다. 치열한 경쟁을 유도하는 현대사회는 함께 있어도 마음을 공유할 수 없는 그런 외로움을 강권하기 때문이리라. 그는 현대도시인의 일상사와 거기에 반응하는 감정세계를 서정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구태여 상황설명을 하지 않더라도 표정과 몸짓만으로도 능히 거기에 공감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이 이룬 조형적인 성과는 독자적인 형식미의 인물상을 확립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형태의 변형 및 왜곡을 통해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그리하여 그 캐릭터의 이미지만으로도 거뜬히 그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됐다. 이는 개별적인 형식미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고찬규_하루_한지에 채색_116×97cm_2007



고찬규_Rainy day_한지에 채색_53×45cm_2007


어느 인물이든지 거식증 환자처럼 깡마른 체구이다. 피골이 상접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마른 형의 인물의 캐릭터를 제시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각박한 현실에서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는 소시민을 상징하는 이미지에 걸맞다. 그다지 생활의 여유도 없을뿐더러 사회적인 힘도 없는 평범한 샐러리맨을 포함하여, 노동자 장사꾼 등의 사회저변 계층의 인물들을 아우르는 이미지로서는 아주 절묘하다. 그렇다고 해서 신체적인 힘이 없는 병약한 모습은 아니다. 신체보다 큰 두상과 굳건한 골격은 오히려 강건한 인상을 준다. 어떤 어려운 상황에서도 너끈히 견딜 수 있는 잡초 같은 성격을 상징하는 것이다. 여기에다가 툭 튀어나온 광대뼈, 벌어진 미간, 조그만 눈, 명료한 눈동자, 치켜 오른 눈썹, 움푹 들어간 콧잔등, 하늘이 보이는 콧구멍, 갸름한 턱, 그리고 기다란 목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전형적인 몽골계통의 황색인종이고, 또 한국인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인 가운데 이와 같은 얼굴형을 가진 사람을 그다지 많지 않으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인의 얼굴의 특징을 요약하면 결코 이와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은 얼굴의 모양은 모든 인물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단지 얼굴을 구성하는 이들 요소가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개개인의 특징이 나타날 뿐, 그 나머지는 공통적이다. 이처럼 그의 미적 감각에 의해 재해석된 인물의 조형적인 특징은 개별적인 형식미를 떠받치는 힘이다. 그림이란 내용에 앞서 시각적인 이미지 예술이다. 형식이 온전하면 내용이 부실하더라고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반면에 아무리 내용이 좋더라도 형식미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그림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산출해낸 인물의 형식미는 독립적인 한 작가로서의 당당한 자기주장이자 설득력인 것이다.




고찬규_다른선택_한지에 채색_91×73cm_2007


독자적인 인물의 형식미는 10여년 가까운 세월동안 조금씩 진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마침내 최근에 완성되었다. 이미 10여년 전에 지금과 같은 새로운 해석의 인물상을 제시했었음에도 어딘가 미흡하고 안정되지 못했다. 지난 번 개인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그러다가 이번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세련된 형식미로 발전시킨 것이다. 더구나 아주 세련된 색채이미지를 구사함으로써 인물이 가지고 있는 다소 경직된 이미지를 상쇄한다. 단지 인물만이 화면에 존재하는 데도 고상한 색채이미지로 인해 작품에 격조가 깃들이고 있다. 단색평면이라는 화면구조의 단조로움이 전혀 거슬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되레 고상한 색채이미지를 통해 탐미적인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이렇듯 인물과 고상한 색채이미지가 조화를 모색하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은 눈 밝은 이들을 능히 매료시킬만한 지경에 이르렀다. 흔히 보기 힘든 미묘한 중간색조의 아름다움은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아니면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는 새삼 분채라는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가진 은은한 깊이와 아름다움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색채의 아름다움은 유채나 아크릴 물감으로는 결코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작업은 새삼 전통적인 채색재료가 가지고 있는 색채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다. 인물화에 대한 공부가 척박한 한국 화단에서 그의 작품은 미점과 같은 존재로 떠오른다. 자기만의 형식미를 갖춘 인물의 캐릭터를 만들어내기란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 그는 마침내 누구나의 가슴을 울릴 수 있는 친근한 이미지의 한국인상을 구현했다. 그 인물들의 표정과 몸짓에 깃들인 삶의 정서는 왠지 가슴을 아리게 만든다. 그야말로 삶의 진정성이 묻어나는, 우리들 초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 신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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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손혜진 개인展

2007_1026 ▶ 2007_1108 / 월요일 휴관



손혜진_미친 질주_자석, 바늘, 실, 아크릴릭_70×200×70㎝_2000




초대일시_2007_1026_금요일_06:30pm

2007 GALLERY NV 작가 공모 선정전




갤러리 NV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6번지 3층
Tel. 02_736_8802






바늘과 자석의 오락적인 유희와 심리 사회적 확장 ● 손혜진의 〈인력〉연작의 모든 형태는 직선으로 이루어져 있고, 작품에서 가장 큰 부피를 차지하는 아크릴은 기계적으로 마감되어 있다. 그리고 바늘과 실 그리고 바늘을 끌어당겨서 실을 팽팽하게 하는 자석의 힘 사이의 평형상태는 줄타기와 같은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조금의 흐트러짐이나 균형의 이탈도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을 무너뜨릴 것이다. 반면에 너무나 가볍고 밝고 투명한 아크릴과 그것을 부각시키는 조명은 작품이 엄격한 형식과 긴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밝고 명랑하고 재미있는 분위기를 선사한다. 작품이 형식이 기계적이고 딱딱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이러한 명랑함을 유지하고 있다. 〈인력〉연작에서 작가는 바늘과 실, 그리고 바늘을 잡아당기는 자석의 힘이라는 단순한 소재를 작업의 일관성을 가지고 몇 가지 변주를 보여준다. 작업에서 바늘은 나침반에서와 같이 방향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자석의 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자석을 향하여 일사불란하게 늘어선 바늘은 그대로 자석의 인력을 표시한다. 작품 구성의 요점은 이러하다. 실이 매어진 바늘을 자석이 당기고 있다. 그리고 그 실은 규칙적인 간격으로 배열되고 바늘은 자력의 영향권 안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것에 붙어 있지도 않다. 작업의 구성은 중력으로 인해 아래로 떨어질 바늘을 공중에 떠 있게 하는 자석의 인력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인력〉이라는 중립적인 단어도 작품의 그러한 특성을 나타낸다. 그것은 작품의 의미에 대해서 무언가를 말해주기 보다는 단지 작품의 구성을 위한 기본적인 요소인 자석의 힘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손혜진_정신과 몸사이의 간극_자석, 바늘, 실, 아크릴릭_25×5×110㎝_2006



손혜진_공간 밖으로 향하다_자석, 바늘, 실, 캔바스_46×5×53㎝_2007


작업의 구성은 간단히 말해서 미니멀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구성은 미술의 재현적 심리 표현적 기능을 제거하는 효과를 가진다. 바늘과 자석 사이의 긴장이 보는 이에게 어떤 심리적인 반향을 일으킬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작가의 내면에 있는 심리적 요소는 아니다. 자력이라는 단순한 물리현상을 나타내는 데 집중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인력〉연작은 어떠한 재현적 심리적 요소도 제거되었고 그러한 점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작품을 미니멀아트와 연관시키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작품의 미니멀적인 형식은 자력을 드러내기 위한 구성의 부차적인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손혜진의 다른 작업에서는 그러한 미니멀한 형태를 완전히 버린다는 점을 보면 미니멀한 형태에 작가가 천착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인력〉 연작은 작업의 기계적인 마감이나 자력의 힘을 사용하는 점에서 키네틱 아트와 연관을 지을 수 있다. 다만 〈인력〉 연작을 키네틱 아트라고 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작품이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관성은 살펴볼 수 있고 또 그것은 작품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키네틱 아트에서 움직임의 요소와 같이 자력이라는 것은 예술에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작품에서 알아볼 수 있고, 또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다른 미술작품과 비교하거나 기억을 회상하거나 감정이입, 혹은 사회적인 이슈에 대한 연결이 없이도 감상이 가능하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비밀스럽거나 어떤 해석을 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작품은 결과적으로 누구나 접근 가능한 쉬운 것이 되었다. 그래서 작품 내의 조형 요소 외에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거나 은유 혹은 상징의 방식으로 다른 것과 연결되지 않기 때문에 관람자의 생각과 관심은 작품 밖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게다가 작품의 분위기가 가볍고 밝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람자는 작품을 가벼운 마음으로 즐기게 된다.




손혜진_그만큼의 힘_바늘, 아크릴릭_85×10×20㎝_2007



손혜진_색시의 항변_자석, 바늘, 실, 아크릴릭_30×30×100㎝_2007


그러나 작품이 여기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하다. 〈인력〉 연작 같은 비구상 미술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작품에서 자력 외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얼마나 공허하겠는가? 우리가 작품을 가치 있는 어떤 것으로 상정하고 유심히 들여다보는 까닭은 그것이 기술적으로 정교하게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술이 그것에 그칠 수는 없다. 이러한 기술적인 정교함을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어떤 이념으로 승화시키지 못한다면 단지 오락적인 실험에 그칠 위험이 있다. 〈인력〉연작에서 부닥치는 문제는 작품이 오락적인 실험, 혹은 기계적인 정교함 외에 무엇을 전달할 수 있는가이다. 작품의 외연이 더 이상 확장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작업의 한계일 수 있다. 기계적으로 마감된 정사각형의 아크릴 판과 일정한 간격으로 매어진 실은 그 정교함이 탄성을 자아내지만 그러한 조형 요소들을 경탄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바늘과 실이라는 소재와 자석에 의한 긴장감은 오락적인 실험을 넘어서서 다른 무언가가 더해지지 않는다면 작업은 공허해질 것이다.




손혜진_Kiss me_컵, 실핀_15×15×9㎝_2007



손혜진_쏘다_자석, 바늘, 실, 아크릴릭_70×200×140㎝_2007


손혜진의 작업에서 〈인력〉 연작 외의 어떤 작업은 심리적이거나 사회적인 해석이 필요한 지점으로 넘어갔다. 〈손(정확한 작품 제목필요)〉과 〈거주자 우선〉 같은 작업은 작품의 의미가 충분히 외연을 갖는 경우이다. 〈손〉같은 경우에 손의 형태로 모델링된 바늘은 직접적인 촉감적 감각을 시각적으로 부여한다. 이것은 인간 사이의 접촉 혹은 관계가 얼마나 아픈 것이 될 수 있는가를 나타낼 수 있다. “조심하세요. 나의 손을 잡으면 당신이 상처를 입을지도 몰라요”라고 경고하는 듯하다. 〈거주자 우선〉은 주차구역을 나타내는 직사각형의 박스 선 안의 바닥에서 갈라진 틈 사이로 바늘을 세움으로써 밀집한 도시의 주거공간에서 주차를 위해 벌이는 날카로운 신경전을 재치 있게 묘사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바늘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심리적 사회적으로 의미를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바늘은 독특한 개성을 가진 소재이다. 그것은 옷을 꿰매듯이 우리의 마음을 치유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상처를 줄 수도 있다. 작업이 단지 자력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외에 인간의 심리와 사회적인 이슈를 건드릴 무언가가 필요하다. 손혜진의 위트 있는 작업들은 그러한 가능성을 보여준다. ■ 강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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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단·상·채·집-복제된 일상

김형무 회화展

2007_1031 ▶ 2007_1106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13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형무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31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2007키워드 “단상채집과 복제” ● 사오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전면이 유리창으로 된 이층 작업실에서 무심히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한쪽에선 아이들이 뛰어 놀고 있었고 그 옆 벤치에선 삶에 지쳐 자신의 일상을 길거리에 던져놓은, 노숙자처럼 보이는 한사람이 서너 개의 흐트러진 소주병과 함께 쓰러져 잠들어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늦은 오후 따사롭고 나른하게 스며드는 햇살과 함께, 파릇파릇한 삶을 영위하는 아이들의 모습과 그 옆에 나 뒹그러진 체 찌그러진 일상을 가진 한 노숙자의 모습, 그리고 유리벽 뒤에 서서 멍하니 정신을 놓은 체 바라보던 나는, 순간 안 과 밖 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묘하게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들어 가는 몽환적인 느낌을 깊숙이 받은 적이 있다. 이렇듯 일상 속에서 누구나 한번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바깥으로 드러난 풍경이나 사물들을 한 발 자욱 비켜서서 관찰하듯 바라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때의 유리벽 은 안과 바깥의 공간을 -어느 쪽이 진실로 바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서로 다른 이질성으로 차단시켜 버림으로써 별도의 공간을 내어 보이는 듯 하지만 기실 그것은 하나의 연장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는 나와 세상 속에서 일정한 거리와 이질성을 담보로 한 세상 엿보기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07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07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162cm_2007


우리가 일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공간인 도시는 우리의 눈과 귀를 현란하게 어지럽히는 온갖 물상들로 빼곡 들어차 있다 이것들은 지배와 통제 관리와 조작 등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여러 인위적 기제들과 뒤섞여 욕망과 억압의 기호들을 낳아 끊임없이 그것들을 확대 재생산 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그것들을 소비하게 하는 ,생산과 소비의 사이클을 만들어낸다 이따금 그러한 도시의 생활세계 안에서 느닷없이 세계가 낯설어짐을 느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무심히 눈길을 보내다가 문득 삶이 그 실체를 갖지 않은 다만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어떤 것 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빠져들기도 한다. 가벼운, 너무나도 가벼운 우리들의 삶과 문명에 대한 나의 대응은 지극히 차갑고 싸늘하다. 통렬한 풍자도 격렬한 투쟁도 열렬한 이의제기도 없다. 다만 싸늘하고 냉소적인 바라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바라봄은 관찰자와의 소통을 통해 새롭게 변주되기도 하는데 그러한 바라봄은 다시 관찰자의 몫으로 남겨진다. 미술가는 바라보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 바라봄은 가려진 본질을 집요하게 꿰뚫고자 하는 것이다. 바라봄은 필연적으로 되씹음을 낳는다. 그런 의미에서 미술가는 반성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35×150cm_2007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캔버스에 혼합재료_170×257cm_2007



김형무_단상채집-복제된 일상_보드에 혼합재료_60×90×10cm_2007


들여다보기,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른 대상으로 객관화시킨 자아, 혹은 그 일상적 삶을 들여다 본 다는 것은 그 대상의 본질을 자각 하고자 하는 행위이다. 형식적 복제를 통해 대상을 객관화시키고 비로소 나는 관찰자의 입장을 취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나의 선택은 사진 콜라주와 디지털 복제이다. 복제와 복제의 대상사이의 존재하는 자의성은 서로 다르게 해석되어 질 수밖에 없는데 이는 찍혀진 존재와 그 결과물(복제품)의 관계도 유사하기 때문이다. 선택된 사진 콜라주들은 디지털 복제를 통해 다양하게 변주되고 작가의 의도에 따라 또는 관객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삶을 부여 받게된다. 복제는 결국 그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복제의 형식을 선택한 출발점이다. 또한 이는 앞서 말한 일정한 거리 두기와 들여다보기의 또 다른 형식인 것이다. ■ 김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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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The Gaze

윤정선 개인展

2007_1031 ▶ 2007_1109



윤정선_Illusion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65×65×6.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 050426a | 윤정선 도예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31_수요일_06:00pm




담 갤러리
서울 종로구 안국동 7-1번지
Tel. 02_738_2745
cafe.daum.net/gallerydam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나와 또 다른 나의 모습들 / 그들은 서로 어긋나면서도 평행선을 달린다. 이 무심한 단자적 개인들은 당신들에게 집착하고, 때론 소통의 단절을 정직하게 시인하기도 한다. 인내와 수동의 자세는 이런 나의 모습을 점점 습관화시키고 있다. / 하지만 나와 너 사이에 있는 공기 속에서 어떤 진정한 삶이 스며 나오는 건 아닐까? / 중요한 것은 내가 너에게 다가서려는 시도, 단지 그 시선 속에 있는 것이리라.




윤정선_침묵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75×47×10cm_2007



윤정선_표류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140×70×14cm_2006



윤정선_The gaze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91×73×11.5cm_2007


두 손에 잡히지도 않는 너의 영혼을 혹여 육체로 표현하면 그 형상은 언어가 되어 우리의 대화를 표면화하지는 안을는지...... 그저 반죽하고 주물럭거리고 불 속에 구워져 나온 인물들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웅크리고 있다. ● 지난 시간 동안 부단히 내 안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나 자신만을 만지작거렸다면 최근 일련의 작업들은 내 의지를 버리지도 못하고 타인에게 다가서지도 못하는 상반된 속성이 이중적으로 혼합되어버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허공에 떠돌거나 구석진 공간에 의도적으로 연출되어 있고 누군가를 향해 시선을 보내지만 뭉개진 붓 자국은 여인의 자리를 더욱 공허하게 만든다.




윤정선_Interval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60×90×15cm_2007



윤정선_Stare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47×75×12cm_2007



윤정선_Illusion_자기토, 판넬에 아크릴채색_91×73×9.5cm_2007


모든 것들이 멀겋게 순화되어가고 이젠 담담히 견디어 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 시대의 외로운 나르시스트들은 그래서 반은 포기하고 반은 그러질 못하는 반만 식어버린 열정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 윤정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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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역습

유영운 개인展

2007_1031 ▶ 2007_1110 / 일요일, 공휴일 휴관



유영운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신한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31_수요일_05:00pm




신한갤러리
서울 중구 태평로 1가 61-12 4층
Tel. 02_722_8493
www.shinhanmuseum.co.kr






이미지는 인간을 좌지우지한다. 모든 시선은 이미 정해져 있는 이미지를 지각하고 그 이미지와 기표가 동일할 때 안정을 찾는다. 그것은 우리가 문명이라는 공간 속에 속해 있을 때 안정을 찾는 것과 동일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지는 이미 실질적인 공간으로써의 기능뿐 만 아니라 우리가 만든 이미지들이 범람하고 있는 추상적 공간도 포함하고 있다. 그것은 미디어가 만들어가는 힘일 것이다. 이미지는 저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위상과 힘은 기술혁명과 집단적 신념에 따라 다양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미디어의 힘이다. 하나의 이미지가 형성되기 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치고 거듭나고 진화한다. 예를 들어 슈퍼맨 이라는 이미지는 힘을 상징하고 정의를 상징한다.




유영운



유영운


이제 우리는 슈퍼맨이라는 ‘이미지’(기표)를 통해서 ‘기의’를 이해한다. 슈퍼맨 옷을 입은 코미디언이나 만화 캐릭터를 보면 그 캐릭터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인식하게 되고, 그 인식 속에는 슈퍼맨이라는 이미지가 고착화되어 이해된다. 이렇게 우리는 이미지를 통해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렇게 시선을 통해 형상을 인지하고 지각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감각의 자극이나 기표에서 기의로 흘러가는 것은 반복적으로 교육되고 쇠뇌된 것이다.




유영운


정보의 공유화, 대중화의 시발점이 된 인쇄술의 발전 이후 현대 정보사회의 주요 구성 요인인 매스미디어는 끊임없이 이미지를 뿜어내고 있다. 본인 작업은 이러한 매스미디어의 수용 통로인 (시청각기기사용과 같은) 미디어나 문자 또는 캐릭터화 된 이미지가 인간을 어떻게 교육하고 길들이는지 표현해 보았고 이로 인한 인간의 공감각의 변화 양상을 표현하는 것에 작업의 목적이 있다. ■ 유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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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n Sung-Ha

안성하 회화展

2007_1031 ▶ 2007_1113



안성하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97×194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인사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031_수요일_05:00pm

가나아트갤러리 기획전 The Contemporary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사탕과 담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그림으로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 안성하의 세 번째 국내 개인전 ● 가나아트갤러리는 담배와 사탕이라는 일상적인 소재를 사실적인 화법으로 그리는 작가 안성하(1977-)의 세 번째 국내개인전을 연다. 홍 익대학교 회화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중앙미술대전 우수상(2002)과 대한민국 미술대전(2002, 2001)에서 수상한 안성하는 스페인 아르코(ARCO)등 아트페어와 소더비, 크리스트의 해외 경매, 올해 초 스페인 마드리드에서의 개인전(Gallery My Name 's Lolita Art) 등을 통 해 국내외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이다. - 안성하 작품세계를 100-200호의 대작들로 경험해 볼 수 있는 기회 ● 2004년 개인전에서는 ‘담배’, 2005년 개인전에서 ‘사탕’를 소재로 한 작업을 발표했던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담배와 사탕 그림을 함께 선보인다. 투명한 그릇 속에 놓인 담배와 사탕 등의 오브제를 구체적으로 그려낸 그림에는 사실주의적 경향과 신비스런 환상성이 공존한다. 실제 사물의 형상을 묘사한 듯 보이지만 유리를 통해 대상을 굴절시켜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이러한 이중적인 매력은 대상의 표면과 본질의 속성을 아우르는 것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100-200호 크기의 대작들 10여점이 출품되어, 그의 대표적인 오브제들이 큰 스케일로 클로즈업된 화면과 표면 속에 감추어진 추상적인 감성들을 공감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안성하_담배_캔버스에 유채_97×194cm_2007



안성하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3×133cm_2007



안성하_담배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7


사실적인 화면에서 배어나오는 추상성 : 안성하 그림의 이중성 ● 안성하의 그림은 대상을 크게 확대하여 실제처럼 묘사해내는 특성 때문에 종종 극사실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일견 사진처럼 보 일 수 있는 그녀의 그림은 형상을 치밀하게 재현해내는 포토리얼리즘과는 다른 속성을 내포한다. ● 사탕과 담배가 놓여있는 유리 용기는 그 투명성으로 인해 오브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투과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형상을 굴절시키거나 왜곡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사실적인 재현의 방식을 택하면서도 투명 유리라는 소재를 통해 여과된 형태가 시각적으로 변형되는 장면을 담아낸다. 따라서 먼 거리에서 그림을 바라볼 때는 그 안의 사물이 실재하는 것처럼 인식되지만, 캔버스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관찰할수록 큰 사이즈로 확대된 오브제는 마치 초점을 잃은 듯 형태의 윤곽선이 희미해지고 몽환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또한 형상을 구분 짓는 붓질의 밀도는 결코 촘촘하지 않아서 가까운 거리에서 바라볼 때 화면은 색채의 흔적들로 이루어진 추상화의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치밀하지 않은 묘사의 특성들 때문에 안성하의 그림은 완벽하게 재현되기 이전의 단계에 멈춰져 회화의 경계 안에 교묘히 남게 되는 것이며, 구상적인 화면 속에서도 모호한 추상의 느낌을 발산하는 이중의 느낌을 간직할 수 있다.




안성하_Untitled(왼쪽)와 담배_캔버스에 유채_각 91×116.7cm_2007



안성하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130.3×162cm_2007


삶의 양면을 닮은 담배와 사탕“담배는 독이며 아름답지 않지만 그것이 가져다주는 정신적 위안은 아름답고, 사탕은 달콤하고 유혹적이지만 결국 독이 되고 만다.” - 작가노트 중에서 ● 사탕과 담배는 매우 사소하고 일상적인 소재이지만, 작가는 오브제가 담고 있는 개인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들에 주목한다. 수북하게 쌓여있는 담배꽁초는 누군가의 고민의 찌꺼기나 고단함의 그림자이며, 각양각색의 사탕에는 어린 시절 먹지 않고 담아두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던 그 추억의 달콤함이 녹아있다. 공허한 마음을 채워주거나 심리적인 위안이 되어주기도 하는 담배와 사탕은 또한 건강에 해로운 기호품으로서 현대인들에게 터부시되기도 한다. 그것들이 지닌 ‘독성’과 ‘감미로움’이라는 두 가지 가치는 현대인들이 인생에서 경험하는 희노애락의 동반자로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일상 속 감정들과 그 무수한 감정의 고리들로 연결되는 삶의 두 가지 모습을 상징한다. 사탕과 담배의 표면적인 재현을 넘어, 그 유혹적인 독성과 잔인하게 달콤한 양면성이 사람들 속에서 만들어내는 의미들까지 담아내고 있다.




안성하_Untitled_캔버스에 유채_200×145cm_2007


클로즈업(close-up)을 통한 일상적 소재의 재발견“가끔씩 영화의 클로즈업된 장면을 바라볼 때면 그 화면 안에 드러나는 대상에게서 발견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느낌을 발견하게 되고 때로는 그것과 감정을 공유하게 된다. 비본질적이면서도 사소하게 여겨지는 일상의 미미한 존재들이 일상의 의미를 벗어난 곳에서 또 다른 의미의 제 위치를 가지게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나는 지겹도록 그 의미를 찾는 과정을 되풀이 하고 있다.” - 작가노트 중에서 ● 캔버스 위의 이미지는 실물의 크기보다 수십배 확대된 스케일로 그려진다. 작가는 일상적인 소재인 담배와 사탕을 거대한 사이즈로 클로즈업하여 화면 안에 보존함으로써 쉽게 쓰이고 버려지는 존재들이 익숙한 의미를 벗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지점에서 다시 존재하도록 한다. 익숙하고 평범한 것들이 그림 안에서 다른 무언가로 다시 인식 될 수 있기를 바라며, 형상의 모방을 넘어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가치까지 수용하는 의미로서의 오브제의 재현을 보여주고 있다. ■ 가나아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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