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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08-25 12:35:25, Hit : 404)
[기사] 조우석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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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이분의 연재물도 오늘로서 끝맺지 않을까 싶다. 이런 케이스 때문에 역사는 반복된단 이야기를 하지만 당시 현실의 매개를 무시할 수는 없을터. 아래에 이야기한 것관 반대되는 생각이기도 한데, 콘서트 홀 문화가 발전되는 이유도 있지 않을까 싶다. 고급문화 취향의 속물절 발달이란 측면이 아니라 어떤 폐쇠의 자궁같은 측면에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권력이나 계층의 상위에 머무르고 싶어하는 이유중 하나가 안락함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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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abc paper



[조우석의 Culture Map] 초기 음악회는 왕년의 극장무대 분위기?(2)
---'사교 우선, 음악 나중'의 1940년대 재즈 바, 18세기 콘서트홀
Vol. 75   2007.8.23~8.29

지금 콘서트홀 매너로 통하는 것은 음악 감상 행위의 보편적인 모델이기는커녕 매우 이상한 종류의 것이다. 사실 세상 모든 종류의 음악은 그렇게 온실에 갇힌 채 유통되는 법이 없다는 게 상식이다. 그걸 가볍게 확인하기 위해서 재즈음악이 가장 활발하게 불타오르던 시기인 1940년대의 풍경을 잠시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40년대 재즈의 현장이 유별난 것이 아니고, 초창기 클래식 음악 현장의 또 다른 형태의 재현이라는 점도 새삼 확인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본디 한 장르의 음악이 전성기에 근접해 에너지로 꽉 들어찼을 때와, 썰물 현상의 퇴조기에는 그 음악의 생산과 유통현장의 분위기까지 천양지차로 바뀔 수도 있는 법인데, 재wm는 당시 막 전성기로 진입하던 국면이었다. 즉 40년대 재즈 음악의 현장은 시장바닥을 방불케 했다. 쇼 비즈니스에 가까운 환경, 즉 대중적 환경이야말로 새로운 음악이 탄생하고 뜨겁게 받아들여지는 생산성 넘치는 용광로였다. 그 광경을 보여주는 게 재즈 역사의 걸출한 이름인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1926-1991)의 증언이다. 

 
Miles Davis


Charlie Paker


트럼펫 연주자 마일스는 '재즈사의 제갈량'이다. 그 이전 춤곡 위주의 스윙 시대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비밥 시대로 들어가는 빅뱅시대에서 막 재즈 음악의 눈을 떴고, 이후 쿨 재즈(Cool Jazz), 모달 재즈(Modal Jazz), 록 재즈(Rock Jazz)로 발전시키는데 공헌했던 그는 자서전 『마일스』(전3권)를 남겼다. 무지막지한 시장바닥 언어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판을 치기 때문에 당대의 분위기가 리얼한 텍스트다. 세상 모든 음악이 어떤 구조 속에서 형성되고 당대의 애호가들과 교감하는가에 관한 증언으로 손색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당시 세인트루이스의 링컨고교에서 학생 신분이던 그는 어느 날 미주리의 한 극장에서 연주하던 걸출한 알토 색소폰 연주자 찰리파커(Charlie Paker, 1920-1955)와 트럼펫의 귀신 디지 길레스피(Dizzy Gillespie, 1917-1993)가 이끄는 밴드를 보고 뻑 간다. 새끼 무당의 접신(接神) 경험이었다. 그게 1944년의 일이다. 당시 이미 아마추어 트럼펫 연주를 하고 있던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랍쇼? 이게 뭐지?'하는 말이 저절로 나오는 빼어난 기막힌 연주를 덜커덩 만난 것이다. 파커와 디지는 '몸 속에 확 타오르게 만드는' 무엇인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의사출신 아버지 밑에서 중산층 흑인으로 자란 그는 클래식 교육의 1번지 줄리아드에 입학했지만, 마음은 내내 콩밭에서 따로 놀았다. 그의 고백대로 '너무 백인적인' 클래식 음악 보다는 재즈 음악이 펼쳐지던 현장에 끌렸고 하지만, 그건 파커와 디지의 신들린 연주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었다. 뉴욕에 올라온 것 자체가 담배연기 자욱하고 술잔이 돌고 도는 왁자지껄한 분위기의 재즈 바에 마일스가 끌렸기 때문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재즈가 연주되던 재즈 클럽들이 몰려있던 뉴욕 52번가 일대야말로 10대 소년 마일스를 낚아챈 곳이었다. 지금도 애호가들에게 '뉴욕 52번가'는 20세기 초 뉴올리언즈, 시카고와 함께 재즈 음악의 자궁으로 추앙받는다. 재즈연주자 아르노 메를랭(Arnaud Merlin)과 프랑크 베르제로(Frank Bergerot)의 말대로 전위예술의 본거지이자, 지적 자극의 중심이기도 했다.
걸출한 재즈 편곡가인 길 에반스(Gil Evans, 1912-1988)만 해도 그랬다. 바로 직전에서 뉴욕에 끌려 52번가에 둥지를 튼 그의 집은 단칸방. 거실도 없는 그곳에 그의 음악친구들이 몰려들어 시도 때도 없이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Lester Young, 1909-1959) 과, 앨토 섹소폰의 찰리 파커 레코드를 들어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재즈와 친연성이 높은 인상주의 음악의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이나 클로드 드비시(Claude Debussy, 1862~1918) 혹은 알벤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의 동시대 음악을 듣고 또 들었다. 


Maurice Ravel 


Claude Debussy

하지만 바로 그 시기 마일스의 직감으로 볼 때 훨씬 화끈한 재즈의 용광로는 52번가에 조금 떨어져 있던 민턴스 플레이하우스였다. 레스토랑 겸 재즈클럽인 민턴스는 100% 흑인 뮤지션들이 활동하던 공간이었다. 즉 재즈사에서는 52번가가 프로야구 메이저리그 1군이라면, 민턴스는 세상 기준으로는 2군 소속의 야구팀에 불과했다. 하지만 열기는 정말 화끈했다. 마일스의 표현대로 "52번가에서 소리가 아무리 근사하게 나더라도 민턴스에서 만큼 뜨겁고 혁신적이지는 못했다. 52번가에서서는 백인 청중들을 위해 혁신적인 사운드를 조금은 억눌러야 했다"(『마일스』, 1권 87쪽)는 것이다.
파커와 디지는 물론이고 '역시 뿅 가게 만드는 사람들'인 테너 색소폰의 에디 록조 데이비스(Eddie Lockjaw Davis, 1922-1986) 같은 재즈의 귀신들이 제 분수도 모르고 기어든 3류 연주자들과 연주를 한판 겨뤄보는 즉석 경합 끝에 그들의 엉덩이를 발로 걷어차 내쫓아 버리던 시험장이기도 했다. 마일스의 표현대로 "무대에 올라가 대차게 불어 성공하던가, 아니면 찌그러져 있든가 둘 중의 하나이지 어중간한 중간은 없는" 곳이 민턴스였고, 재즈 음악의 화끈한 현장 학교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민턴스는 기본적으로 쇼 비즈니스의 현장, 즉 시장바닥이었다는 점이다. 마약 거래의 핵심 공간이기도 했다.
민턴스의 분위기는 1970년대 한국의 중소도시 극장식 무대였던 셈이고, 규모는 지금의 카바레라고 보면 딱이다. 마일스의 증언에 따르면 하얀 린넨 테이블보 위에 꽃병이 놓여 있던  그곳에서는 술과 저녁 식사가 나왔다. 100명에서 125명 정도를 수용하는 규모였다. 그 레스토랑 겸 연주회장의 주된 고객은 말쑥한 신사복에 넥타이 차림의 비교적 잘 나가는 흑인 중산층 남성들. 당시 최고의 빅밴드를 이끌던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1899-1974)의 패션을 본 딴 그들은 모처럼 한 번 거들먹거리면서 자기네 음악을 듣기 위해서 그곳을 즐겨 찾곤 했다. 

민턴스 주변에는 세실 호텔로 불리며 주로 외지에서 온 재즈 뮤지션들이 묵던 곳이 있고, 그 주변에는 일급 창녀들과 삐끼들이 득시글거렸다. 사람 냄새 물씬하던 재즈클럽이야말로 재즈 음악의 꽃이 흐드러지던 현장이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음악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든 제2의 민턴스, 제3의 민턴스는 있는 법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1917- )의 증언도 바로 그 점을 다른 사례를 들어가며 증언하고 있다. 당시 영국 런던에서 자랐던 그는 어떤 음악학자 못지않은 음악사회학 분야의 글로 손색없는 증언을 하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홉스봄이 듀크 엘링톤이 이끄는 빅밴드 공연을 본 뒤 "완전히 마음이 빼앗겼다"고 고백한 것은 그의 10대 시절이던 1930년대 중반 런던. 지금의 댄스홀 내지 카바레 분위기의 무도회장이라는 점에서 민턴스와는 구조가 비슷했다. 
"필자는 열여섯 살 때 런던 교외의 한 무도장에서 소위 모닝 댄스를 위해 연주하던 엘링톤 밴드의 너무도 당당한 모습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그때 그들 앞에서 몸을 흔들며 춤을 추던 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청중들은 음악에 관심이 없었고 이해하지도 못했다. 물론 그런 가운데서도 최고의 청중들은 그들의 음악을 기꺼이 받아들였고 거기에 도취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음악을 방해하지 않았다. 반면 (나중 정식 콘서트홀 공연장에 앉은 채) '감정순화에 호소하는 연주'를 기대하던 청중들은 엘링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됐다. (그런) 공연장에서 엘링톤 밴드는 최상의 연주를 들려준 적이 거의 없다."(『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 420쪽) 춤곡에 충실했던 스윙시대의 재즈, 따라서 이후 발달한 비밥 재즈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고 친근하던 재즈의 초기에 대한 증언이 놀라운 점은 이 대목이다. 시끌벅적한 무도회장 연주가 이후 콘서트홀에서 정장차림의 연주보다 더 생생한 것은 물론이고 연주의 수준 역시 뛰어났다는 지적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1917년생으로 재즈 음악의 초기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봤고, 또 '대중을 위한 음악' 재즈에 그중 열렬한 팬이기도 했던 '황금 귀' 홉스봄의 증언은 그 점에서 특기할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세상이 다 아시듯 1960년대를 기점으로 재즈는 스윙시대와 비밥시대 고유의 활력을 잃었다. 대신 유럽과 비서구의 다양한 지역의 로컬음악들과 합쳐지면서 보다 넓어지는 음악적 변신 단계를 밟아오고 있다. 그런 모습이란 좀 더 지켜볼 일이지만, 어쨌든 간에 반세기 전의 뜨거움이 사라진 지금 시끌벅적하던 재즈클럽 대신 적막강산의 콘서트홀에서 격식을 차려가며 연주된다. '재즈=아메리칸 클래식'이라고 하는 근사한 문패까지 얻은 것도 그 이후의 일이다.
하지만 이 과정이야말로 일정하게는 피할 수 없는 박제화의 길인지도 모른다. 지금 콘서트홀에서 반복해 연주되는 재즈란 홉스봄의 지적대로 1930년대 카바레의 스윙재즈 보다 살갑고 뜨겁지는 않다. 그런 홉스봄의 증언은 실은 재즈에 국한되지 않는다. 클래식을 포함한 세상의 모든 음악의 성장과 퇴보에 관한 일반이론으로 유감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결코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거의 모든 음악 역사의 현장이 바로 그러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18세기 중반 클래식 음악도 그런 분위기, '먹고 마시고 떠들면서' 연주가 되고 감상행위가 이뤄졌다. 

즉 무대와 객석을 칼로 두부모 자르듯 갈라놓은 근대적 콘서트홀이 등장하기 이전에 대중들은 꼭 20세기 카바레 분위기에서 클래식을 즐겼는데, '객석에 인질로 잡힌 채 부동자세로 경건하게 음악을 듣기는커녕' 지금의 팝 콘서트 장과 어찌 그리 닮은꼴인지 모른다. 그 물증이 바로 지금은 없어진 라넬라그 플레져 원형극장이다. 지금 그 모습은 지금 런던의 한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 모사도에서 확인할 수 있는 데 지금의 콘서트홀과는 공간 자체가 천양지차다. 

우선 공간 자체가 높이 3층 높이에 지름 46m인데 둥근 건물 외벽을 따라 객석이 위, 아래  층으로 나뉘어져 있다. 많아야 100여명 정도를 수용할까 말까한 작은 규모의 객석이 중요한 게 아니고, 주무대는 당연히 가운데다. 텅 빈 로비 같은 바로 이곳에 자리 잡은 오케스트라가 연주를 할 수도 있고, 그 주변의 넓은 공간을 청중들은 마치 산보하듯 걷거나 담소를 나누면서 음악을 감상했다. 열린 구조이네 뭐하네라고 말하기 이전에 그저 툭 트여버린 시장바닥 같은 공간이다. 당연히 이 로비에 쭈그리고 앉아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의자 따위는 없었다. 


Duke Ellington


Gil Evans

크리스토퍼 스몰의 말에 주목하자. 그에 따르면 이곳에서의 연주란 "경건한 제의가 아니라 먹고 마시고 거닐며 때로는 불꽃놀이도 보는 흥겨운 광경"이다. 또 "현대식 연주회장의 로비에서 사람들이 행동하듯 했기 때문에 사교하는 것과 즐기는 것을 분리된 활동으로 나누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로비를 겸한 '열린 객석'에서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밥을 시켜 먹거나 이곳을 관리하는 웨이터에게 빵을 주문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주먹다짐을 하는 장면도 포착됐을 정도이니 거의 무제한 자유에 가까웠다. 

지금은 감히 생각지도 못 할 일이지만, 사적인 살롱모임을 전제로 한 초기 콘서트도 실은 그랬고 오페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청중들은 오페라 연주 내내 웃고 떠들며 자기네들 사이의 사교에 일단 충실했다. 음악과 무대란 중심이기는커녕 되레 사교 모임의 배경에 충실했다. 그러다가 특별히 흥미를 끄는 대목이나 유명한 아리아가 나올 경우 장내는 조용해지면서 사람들은 무대를 주목했다.
지금 클래식이라고 하는 음악이란 19세기 이전에 생산됐던 작품들이다. 그것도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청중들과의 교감을 거치면서 즉흥연주 위주로 불꽃 튕기는 진정 살아있는 음악이라고 해야 한다. 지금 불멸의 고전으로 추앙되는 작품들이란 그때의 연주회의 열기가 식어버린 뒤 남아있는 흔적이자 화석일지도 모른다. 그런 앙금만을 단순히 좋은 작품이라는 신앙을 가진 채 퇴행적으로 무한 반복만을 해보라. 그 경우 생생한 느낌 대신 의례만이 남는다. 지루함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일 것이다. 



| 조우석 _ 《중앙일보》 기자 wowow@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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