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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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2-23 23:37:03, Hit : 371)
[퍼슨_펌]먼, 그런 연애.

연애의 대상과의 거리가 두시간 이상이라면, 그리고 그 연애가 심각하다면,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굉장히 지엽적인 이야기긴 하지만, 이야기해볼 만한 가치는 있다. 연애가 사회와 부딪는 지점이 어디인가를, 어렴풋 깨닫게도 해주는 대목이다. 아주 간단한 예를 들자면, 제주에서 서울은 정말 멀지만 대마도에 애인이 살고 있다면, 식이다. 무엇이 연인들을 거부하게 만드는가.


 
 
 
 
   
 
 
 

"경복궁, 독립문, 무악재, 홍제, ...그리고 녹번!
봐, 다 외우잖아..."

녹번으로 가는 지하철 안, 은희는 눈을 반짝거리며 노선표를 외워보인다.

"몇 번이나 갔었는데?"
"글쎄, 몇 번이나 갔을까? 다섯 번? 여섯 번? 일곱 번? 어쨌든 열 번은 안 넘어. 그게, 무지 멀잖아. 내가 분당에 살았고 지석이는 역촌동에 살았으니까, 3호선으로 쭉 타고 오다가 녹번역에서 버스로 갈아타고, 한 2시간 쯤 걸리겠다."

"근데 그걸 아직도 다 외우네?"
"그러게. 난 그 동네 잘 모르거든. 맨날 다니는 데는 지하철 역을 다 알아도, 안 다니는데는 절대로 모르는 거잖아. 지석이 만나기 전에는 그랬어. 그쪽으로는 가 본적도 없고, 들어 본 적도 없고. 근데, 지하철을 타고 지석이네 동네에 갈 때는, 빨리 가고 싶으니까, 계속 노선표를 들여다 보면서, 여기가 어디니까 몇 정거장 남았다, 한 정거장 지날 때마다, 여기가 어디니까 몇 정거장 남았다...계속 그랬거든. 그래서 외워진거야.
아니면, 아니면, 이런 것도 있다. 한참 지석이랑 사귈 때는, 전화하고 나서도 또 보고 싶어서, 내 방에 앉아서 눈을 감고 '나는 지금 지석이한테 간다' 고, 혼자 속으로 몇 번씩 왔다갔다 했다니까. 경복궁, 독립문, 무악재를 지나고....내가 아는 그 길을 밟아서."

 
 



 
 
"서부 소방서 있는 데로 나가야 돼. 일루 나가면, 버스 정류장이 두 개 있거든. 첫번째 거에는 지석이네 동네로 가는 게 안 와. 처음 갈 때는 거기서 한참 기다리다가, 전화했어. '버스가 왔는데도 안 서.' 그랬더니, '그 다음 정류장에서 타라고 그랬잖아!' 그러는 거야. 안 그랬거든. '니가 언제 그랬냐?' 나도 화나가지고 막 그 다음 정류장으로 갔지.
근데, 그냥 XX 번을 타랬는지, XX-1번을 타랬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야. 또 전화해서, XX번이 맞아, XX-1이 맞아?' 그랬더니, "다시 1번! 꼭 다시 1번을 타야 된다고 몇번 말했어! 그냥 XX번 타면 안돼. 다시 1번이야!' 기분 좋게 놀러가는데, 혼 나고, 애 취급 당하고, 기분 다 망쳤지, 뭐."

"야, 근데, 우리 몇 번 타야돼? XX번도 가는 거 같은데? 꼭 다시 1번을 타야 되는 거야?"
"다시 1번이라니까. 내가 몇번 말했어!"

"근데, 봐, XX번도 시립 병원 앞에 가잖아."
"어, 그러게. 이상하네. 꼭 다시 1번을 타랬는데."

우리는 그냥 XX번을 탔다. 다시 한번 지석이에게 전화해서 어떻게 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는 얼마 전 군대에 갔기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노선이 바뀌기라도 한걸까? 하긴, 은희가 마지막으로 그 동네에 간지가 3년은 넘었다니까.

 
 



 
 

 
 



우리는 녹번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역촌동 시립 병원 앞에 가고 있다. 이곳은 내 친구 김은희의 첫번째 남자 친구 윤지석이 살던 동네이다. 은희와 지석이는 대학 신입생 때 만나 4년 내내 사귀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연스럽게 헤어졌다.("사귈만큼 사귀었지, 뭐", 은희의 말.)
얼마전 지석이는 늦게 군대에 갔다. 그리고 나서 은희는 자주 지석이를 생각하게 된다고 했다.

"정말 헤어졌구나 하는 기분이 들더라. 우리는 헤어진 후에도 가끔가끔 만났거든. 서로 애인이 있어도 걔는 나한테 특별하니까. 사귈 때는 얘가 군대가면 어떻게 하지, 걱정 많이 했어. 다른 남자애들 군대 보내면서도 문득, 우리 지석이 군대갈 땐 어떡하지, 싶고. 근데 막상 이렇게 군대에 갈 때는, 내가 걔 여자친구도 아니고, 특별히 해줄 일이 없더라. 울면서 제일 섭섭해했을 사람은 걔 여자친군데. 나는 뭐, 눈물 한 방울이나 나니."

"다시 여기 와 보고 싶더라고. 지석이가 없으니까 올 이유도 없는데. 이 동네 좋아했거든. 지석이한테는 언제나 이해가 안 가는 데가 있었어. 따뜻하고, 관대하고, 낙천적이고, 느릿느릿 게으름뱅이에다 잠만 자고... 하여튼 나랑은 너무너무 다른 애였어. 근데, 여기 와 보고 나니까, 왜 얘가 나랑 이렇게 다른지, 왜 내가 얘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어."

"나는 쭉 아파트만 있는 동네에 살았어. 잠실, 분당... 아파트 풍경은 나한테 거의 자연적이야. 사람 사는 동네를 생각하면 딱 그런 게 떠올른다니까. 어디 시골 갔다가도 돌아오는 길에 아파트 숲이 보이면, 아 우리 동네에 다왔다, 이런 기분이 들어. 아파트들은 다 비슷비슷하니까.
근데, 지석이네 동네는 다르잖아. 건물들이 낮고, 하늘도 많이 보이고, 산도 보이고, 골목길이 있고, 골목길이 구불구불해서 끝이 안 보이면 꼭 끝까지 걸어가보고 싶어지고, 전봇대도 있고, 집 담 너머로 목련 꽃이랑 개나리 같은 거 피어있고, 개들도 어슬렁거리면서 돌아다니고. 그런 것들이 다 너무 좋았어. 이런 거 보고 자란 애구나. 그래서 다 이해했지, 뭐.
여기 가게 이름들도 봐. 독창적이지! 체인점 같은 게 아니라, 원래 주인 취향대로 만든 이름들 있잖아. 촌스럽고, 정겹고, 그렇지?"

 
 





 
 

 

 

 
 

버스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은희가 소리를 지른다.

"감자국, 감자국! 빨리 사진 찍어. 에이, 지나갔잖아. 올 때 꼭 저거 찍어야 돼. 이게 이 동네 지방 음식인 거야. 지석이가 그랬다니까. '춘천에 닭갈비, 전주에 비빔밥이면 우리 동네는 감자국이지. 친구들 오면 내가 데리고 가잖아.' 정말이냐구? 몰라. 근데 확실히 감자국집이 많기는 많지?"

과연 그랬다. 정말인가?

 
 


 
 

 

 

자자, 여기서부터는 다 알아. 저기 영화 마을은 지석이 제일 친한 친구가 아르바이트 해서 맨날 공짜로 빌려다 보던 데고... 저기 보이지, 지석이 거래 은행인 신한 은행. 이 교회 앞에서 지석이가 기다리고 있었어.

왜 있잖아, 자기 동네에 손님 찾아오면, 좋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그런 표정으로. 내가 손잡으려고 하면, '여긴 우리 동네 잖아. 동네 아줌마들이 본단 말야', 그러면서 막 뿌리쳤거든. 그럼 난 또 더 잡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슬며시 다시 잡고, 지석이는 뿌리치고, 그러고 놀았어."

"뭐 했냐고? 별 거 없어. 서로 기다리고, 걸어다니고, 까페에 가고, 돈까스 먹고, 소곤소곤 얘기하고. 저기 현대화 아케이드 있지. 저기 처음으로 문 여는 날 같이 갔었어. 백화점 지하처럼 음식점 즐비하고 맛은 별로 없고 그런 데야.
한번은 지석이가 잘 안다는 흑염소 집에 갔다. 나 자꾸 아프니까 아저씨한테 물어봐 준다고. 그 아저씨 무슨 한의사도 아닌데 아는 것도 많더라. 사주도 봐주고. 나 보고 지석이랑 결혼하면 봉 잡는 거라고 했어. 지석이 쪽은 안 그런데. 아무래도 사이비 같았어. 자기 동네라고 편들고.

 

 
 
  하도 평소에 이야기를 많이 들으니까 꼭 와 보고 싶잖아. 그런데, 막상 와서는 할 일이 없었어. 아줌마가 볼까봐 손도 못 잡고. 그래도 그 다음부터 자기 동네 이야기를 하면, 거기가 거기지, 하면서 그림이 그려져서 좋더라. 아는척 하면서 맞장구도 치고. 나도 그 동네에 속하는 것처럼.

아, 지석이네 집에 아무도 없을 때, 걔네 집에 놀러간 적 있어. 마당에 그네 있고, 나무 한 그루 큰 거 있고, 토토, 걔네 집 개. 생각한 거랑 똑같더라. 조그만 단층 집이었어. 집에 들어가면 지붕이 높고, 나무로 된 기둥이며 대들보며 그런 것들이 다 드러나 있고. 지석이가 비빔면 해줬거든. 자기는 비빔면을 꼭 우유랑 같이 먹는대. 너 그렇게 먹어봤니? 그럼 정말 맛있어. 맵지도 않고. 지석이는 매운 거 잘 못 먹거든.
그거 다 먹고, 얘 방에 무슨 책 있나 조사하고, 소파에 앉아서 씨디 듣고, 그러다가 지석이가 나한테 뽀뽀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내가 막 밀었어. 하지 말라고. 얘네 엄마가 들어올까봐 너무 가슴이 뛰는거야."

 
 
"한 번은, 사귈 때 왜 그런 거 있잖아. 서로 좋아하는데 나한테는 그래도 부족한거야. 뭔지 모르지만 불안하고, 우울하고, 놓칠 것 같고, 아무리 나 좋아하지, 다짐을 받아도 부족하고, 그런거야. 그래서 하루는, 지석이가 교회에 가는 일요일에, 혼자 이 동네에 왔어. 우연히라도 만날까 해서. 먼저 전화해서 만나자고 하기 싫었거든. 할 말도 없고. 여기서 조금 어슬렁 거리다가, 연신내에 갔다. 왜 그랬지? 만나고 싶으면서도 지석이네 집 앞에서 만나버리면 이상할 것 같았어. 비오는 날이었는데. 참, 나 이 근처 동네 지명들 너무 좋아해. 연신내, 수색, 이런 거. 너무 예쁘지 않니. 아른아른 거리고 물냄새 나고. 시내에서 버스타고 가다가 우연히 표지판에서 그런 지명 보면 막 설렌다. 어쨌든... 연신내 전철역 근처에서 무슨 중딩 노는 데 같은 까페에 들어가서, 이름이 블루인가 그랬는데, 담배 피우고 혼자 비오는 거 봤어. 내가 왜 이럴까, 우리 관계는 뭘까, 혼자 시름시름 하다가."
 


"집에 가려고 나오는데, 진짜 거짓말처럼 지석이가 지나가는 거야. 걔는 나를 못 봤지. 얼굴을 잔뜩 찌뿌리고, 여기까지 내려오는 비닐 잠바에, 주머니에 손 넣고, 앞에 일행인 것 같은 다른 사람들이랑... 가슴이 어찌나 뛰던지. 그 얼굴을 못 잊을 줄 알았어. 너무 슬프고. 왜 슬픈지는 모르는데, 너무 서글펐어. 못 볼 거 본 느낌있잖아. 우린 타인이다, 그런 느낌. 이상한 예감. 우린 언젠가 헤어질 거다, 미리 맛보는 기분. 날씨가 이상해서 그랬나?"

 
 

 

 

 
 
그 집 앞을 지나갔으면서도 사진을 못 찍었다. 대문이 열려 있고 누군가 나와서 차를 닦고 있었다. 차 안에서 놀고 있는 어린 아이. 은희가 가지 말자, 가지 말자, 그러면서 내 팔짱을 꼭 끼며 뒤로 숨었다.
 
 



 
 

"누나야. 사진으로는 많이 봤는데,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쟤는 평화, 지석이 조카. 나 지석이 조카가 왠지 좋아서 본 적도 없으면서 안부 묻곤 했다. 조카 얘기 듣는게 좋았어. 오늘은 뭐를 했고, 뭐를 했고. 누나가 일을 하니까 자주 지석이네 집에 조카를 맡겼거든. 늦도록 말을 못 한다고 해서 괜히 애틋하기도 하고."

"누나가 너 몰라?"
"알지도 몰라. 지석이가 책 사이에다 내 사진을 몰래 끼워놨는데, 어느날 누나가 책을 돌려주면서 '은희, 맞지?' 그러더래. 전화로는 많이 얘기했지. '저, 은희라고 하는데요, 지석이 있습니까?' 그러면서. '있어요?' 안 그러고, 꼭 '있습니까?' 그랬어, 목소리 깔고. 애기같이 들릴까봐."

누나 옆을 지나갈 때 은희는 내 어깨에 머리를 묻고
'평화야, 안녕? 지석이 누나, 안녕하세요?' 조그맣게 소근거렸다. 바보.

 

 
 
은희가 와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해서, 베니 굿맨이라고 하는 까페에 들어갔다. 베니 굿맨이 아니라, 빌 에반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제목을 물어보니 'How my heart sings'라는 곡이라고 했다. 우리는 (역시) 돈까스를 먹고, 커피를 마시면서, 노래하듯 가슴이 뛰던 첫번째 연애의 날들, 그 달콤함, 그 막막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랑이 거기 없는 줄 알면서도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하는, 첫번째 연애 이후의 이해못할 마음에 대해서도.
 
 
 


글: 보리(nanda@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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