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1360  5/68   회원가입 회원로그인
  View Articles
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2-19 22:42:35, Hit : 373)
신화의 혁명

어느 치과 의사의...홈피에서 가져왔습니다. 롤랑 바르트의 그것을 그대로 옮기거나...축약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에 관한 자료가 없는 고로. 흐미. 다시 한번 치과의사의 다양함에 감복하는 바입니다.



저자의 죽음

 

 

 

발자크는 그의 중편소설 <사라진느>에서 여자로 가장한 한 거세된 자에 대해 말하며, 이런 문장을 쓰고 있다. 『그녀의 갑작스런 두려움, 그녀의 이유 없는 변덕, 그녀의 본능적인 불안, 그녀의 까닭 모를 대담함, 그녀의 허세, 그녀의 섬세하고도 부드러운 감수성, 그것은 분명 여자였다. 』[1] 누가 이렇게 말하는가? 그것은 여자 아래 감추어진 그 거세된 자를 모르는 척하고자 하는 소설의 주인공인가? 아니면 자신의 개인적 체험에 의해 여성에 대한 한 철학을 가지게 된 개인 발자크인가? 또는 여성성에 대하 문학적 관념을 언명하는 저자 발자크인가? 보편적 지혜인가? 낭만적 심리학인가? 그것을 안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글쓰기란 모든 목소리, 모든 기원의 파괴이기 때문이다. 글쓰기는 우리의 주체가 도주해 버린 그 중성, 그 복합체, 그 간접적인 것, 즉 글을 쓰는 육체의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모든 정체성이 상실되는 음화negative[2]이다.

아마도 그것은 항상 그래왔던 것 같다. 하나의 사실이 현실에 직접 작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동사적인 목적으로 이야기되기만 하면, 다시 말해 상징을 실천하는 것 외에 다른 어떤 기능도 가지지 아니하면, 그때 이런 분리가 나타난다. 목소리는 그 기원을 상실하고, 저자는 그 자신의 죽음으로 들어가며, 글쓰기가 시작된다. 그렇지만 이런 현상에 대한 감정은 매우 다양하게 나타났다. 민속학적인 사회에서의 이야기는 어떤 인간이 아닌, 엄밀히 말해 우리가 결코 그 <천재성>을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껏해야 그 <언어 수행>(즉 서술적 약호의 지배)을 찬미하는 매개자, 샤먼, 낭송자에 의해 담당되어 왔다. 저자란 중세를 벗어나자마자 영국의 경험주의와 프랑스의 합리주의, 종교 개혁의 개인적인 신앙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개인의 명성을, 좀더 고상하게 말한다면 인격이라는 것을 발견한 후에 생산된 현대적인 인물이다. 그러므로 문학 안에서 저자의 <인간>에 대해 최대의 중요성을 부여한 것이,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요약이자 귀결인 실증주의라는 것은 지극히 논리적이다. 저자는 아직도 문학사의 교과서나 작가의 전기, 잡지의 대담, 그리고 자신의 내적 일기에 의해 그들의 인간과 작품을 연결시키려는 문학가들의 의식 속에서도 여전히 지배적이다. 일반적인 문화 안에서 발견되는 문학의 이미지는 가차없이 저자, 그 인간· 생애· 취향· 정념에 집중되어 있다. 비평 또한 대부분의 경우, 보들레르의 작품은 인간 보들레르의 실패이며, 고흐의 작품은 곧 그의 광기이며, 차이코프스키의 작품은 그의 악덕이라고 말한다. 이렇듯 작품의 설명은 언제나 작품을 만들어 낸 사람 쪽에서 모색되어 왔다. 마치 다소간에 투명한 허구의 알레고리를 통하여 거기에는 결국 언제나 하나의 유일하고도 동일한 사람의 목소리가, 자신의 <속내이야기>를 털어 놓는 저자가 존재한다는 것처럼.

 

비록 저자의 제국이 아직도 무척 강력하기는 하지만(신비평은 자주 그 제국을 공고히 했을 뿐이다), 벌써 오래 전부터 몇몇 작가들이 그것을 붕괴하려고 시도해 온 것은 자명하다. 프랑스에서는 아마도 말라르메가 그 첫번째일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언어의 소유주라고 여겨져 왔던 자를 언어 자체로 대체할 필요성을 광범위하게 인식하고 예견했다. 그에게서 또 우리에게서도 마찬가지이지만, 말하는 것은 언어이지 저자가 아니다. 쓴다는 것은 선행적인 몰개성impersonnalite – 사실주의 소설가들의 그 거세적인 객관성[3]과는 결코 혼돈될 수 없는 – 을 통하여 자아가 아닌, 오직 언어만이 작업하고 수행하는 바로 그 지점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말라르메의 모든 시학은 글쓰기를 위해 저자를 제거하는 데에 있었다(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이것은 독자의 자리를 회복시키고자 함이다). 발레리는 자아의 심리학으로 인해 조금은 혼란한 상태에서 말라르메의 이론을 약화시키기는 하였지만, 그의 고전주의적 취향에 의해 수사학의 가르침을 준수하면서도 계속해서 저자를 의문시하고 조롱하였고, 자신의 활동의 언어학적이고도 모험적인 성격을 강조하였으며, 전 산문 저술을 통하여 문학의 본질적인 언술적 조건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 조건 앞에서 작가의 내재성에 대한 모든 의뢰는 순전히 미신적인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프루스트 자신도 그의 분석이라 불리는 것의 외관상 심리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작가와 작중인물의 관계를 지극히 정교한 수법으로 가차없이 뒤섞어 놓는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화자를 보고 느끼고 쓰는 자가 아니라, 이제 글을 쓰려고 하는 자로 만들었다(소설의 그 젊은이, 그런데 사실 그는 몇 살일까? 누구일까? 글을 쓰고 싶어하지만, 글을 쓸 수 없는 그, 그리고 소설은 드디어 글쓰기가 가능해질 때 끝이 난다). 프루스트는 현대적인 글쓰기에 그 서사시를 부여했다. 근본적인 뒤집음에 의해 그는 사람들이 자주 말하는 것처럼 그의 삶을 소설 속에 투여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삶을 작품으로 그가 쓰는 책이 그 작품의 모델이 되는 그러한 작품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샤를뤼가 몽테스키외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일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실 속에서의 몽테스키외가 샤를뤼에서 파생된 2차적인 단편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4]. 그리고 현대성의 선사시대라 할 수 있는 초현실주의에 국한시켜 생각해 보다오, 그것은 분명 언어에 최상의 자리를 부여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언어는 체계이나 이 운동이 목표로 하는 것은 낭만적이게도 – 게다가 환상적인, 왜냐하면 약호는 파괴될 수 없으며, 단지 유희하는 것만이 가능하므로 – 약호의 직접적인 전복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초현실주의는 기대하던 의미를 갑작스레 좌절시킬 것을 권유하면서(이것이 초현실주의의 저 유명한 돌발 비약saccade이다), 머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손에게 되도록 빨리 쓰게 하는 임무를 맡김으로써(이것이 자동기술이다), 또 여러 사람이 함께 쓰는 글쓰기의 체험과 원칙을 인정함으로써 저자의 이미지를 탈신성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문학 밖에서도(사실 이런 구별은 이제 낡은 것이다), 언어학이 언술행위 전체가 대화자들이라는 인간에 의해 채워지지 않고서도 완벽하게 기능하는 하나의 텅 빈 과정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저자의 파괴에 귀중한 분석 도구를 제공하기에 이른다. 언어학적으로 말한다면, 저자는 마치 나가 나라고 말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글을 쓰는 사람 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언어는 인간이 아닌 주어를 알 뿐이다. 그리고 이 주어는 그것을 명시하는 언술행위 자체를 떠나서는 텅 빈 것으로서, 언어를 말하는 데에, 다시 말애 언어를 고갈시키는 데에 그친다.

 

저자의 멀어짐은(브레히트와 더불어 우리는 그것이 진정한 거리두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문학적 무대 저 끝에 있는 단역 배우처럼 축소된다) 하나의 역사적 사실, 혹은 글쓰기의 행위만이 아니다. 그것은 현대적인 글쓰기를 완전히 변모시킨다(혹은 같은 말이기는 하지만 텍스트는 그 속에서, 그 모든 층 위에서 저자가 부재하도록 만들어지고 읽혀진다). 우선 시간도 더 이상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저자의 존재를 믿는 한 저자는 항상 그의 책의 과거로 간주되어 왔다. 책과 저자는 <전>과 <후>로 배열된 채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저자는 책을 부양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다시 말해 책 이전에 존재하고, 책을 위해 생각하고, 괴로워하고, 살아가는 것으로, 그는 아버지와 자식의 관계에서처럼 자신의 작품과 선행적인 관계를 가진다. 이와 반대로 현대적인 필사자scripteur[5]는 자신의 텍스트와 동시에 태어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선행하거나 초과하는 존재를 어떤 방식으로든 갖고 있지 아니하며, 자신의 책이 술어가 되는 그런 책의 주어가 아니다. 거기에는 단지 언술행위의 시간만이 존재하며, 모든 텍스트는 영원히 지금 어기서 씌어진다. 사실인즉(혹은 그 결과), 쓴다는 것은 더 이상 기록, 확인, 재현, 묘사(고전주의자들이 말하는)의 조작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옥스퍼드 철학의 영향을 받은 언어학자들이 수행동사[6]라고 부르는 것, 정화기 말해 언술행위가 발화하는 행위 외에 어떤 내용(어떤 언표)도 가지지 아니하는, 그런 진귀한 언술적인 형태를 가리킨다(전적으로 1인칭과 현재 시제로 주어지는). 그것은 뭔가 왕들의 <짐은 선언하노니>, 혹은 고대 시인의 <나는 노래한다>와도 같다. 이렇게 저자를 매장하고 난 현대의 필사자는, 선배들의 비장한 관점에 따라 손이 사상이나 정념을 표현하기에는 너무 느리며, 그 결과 필요의 법칙을 만들어 이 느림을 감조하고, 또 자신의 형식을 무한히 가다듬어야 한다고는 믿을 수 없게 되었다. 반대로 그에게서 손은 모든 목소리로부터 차단된 채 단순한 기재(inscription 표현이 아닌)의 몸짓에 이끌려 기원이 없는 장을 그려 나간다. 또는 적어도 언어라는 기원 외에는, 다시 말해 모든 기원을 끊임없이 문제시하는 언어 외에는 다는 어떤 기원도 가지지 아니한다.

 

우리는 이제 텍스트가 하나의 유일한 의미, 즉 <신학적인>(저자 – 신의 메시지인) 의미를 드러내는 단어들의 행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중 어느것도 근원적이지 않은 여러 다양한 글쓰기들이 서로 결합하며 반박하는 다차원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의 온상에서 온 인용들의 짜임이다. 위대하고, 동시에 희극적인 저 영원한 필경사 부바르와 페퀴셰[7]처럼 – 그 우스꽝스런 심오함이 바로 글스기의 진실을 말해 주는 – 작가는 결코 근원적인 몸짓이 아닌 다만 이전의 몸짓을 모방할 뿐이다. 그의 유일한 권한은 글쓰기를 뒤섞거나 대립하게 하여, 그 중 어느 하나에도 의존하지 앟게 하는 데에 있다. 그가 자신을 표현하고 싶다면, 적어도 그가 번역하고자 하는 내적인 것은 그 자체로서 이미 만들어진 사전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전 안에서 낱말들은 다른 낱말을 통해서만 설명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은 무한하다는 것을. 우리는 이런 모험의 대표적인 사례를 청년 토머스 드 퀸시[8]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어에 능통한 그가 지극히 현대적인 사상과 이미지들을 그 죽은 언어로 번역하기 위해서는 보들레르의 지적처럼(‘인공 천국’에서), ‘그는 순전히 문학적인 주제에 대한 일반적 연구에서 유래하는 사전보다 훨신 더 복합적이고 확대된 항상 준비된 사전을 그 자신을 위해 창조해 냈던 것이다’ 저자를 계승한 필사자는 이제 더 이상 그의 마음속에 정념이나 기분, 감정, 인상을 가지고 있지 않고, 다만 하나의 거대한 사전을 가지고 있어, 거기서부터 결코 멈출 줄 모르는 글쓰기를 길어올린다. 삶은 책을 모방할 뿐이며, 그리고 이 책 자체도 기호들의 자임, 상실되고 무한히 지연된 모방일 뿐이다.

 

이렇게 저자가 멀어지면, 텍스트를 해독한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쓸모 없는 것이 된다. 텍스트에 저자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에 안전장치를 부과하고, 최종적인 기의를 제공하고 글쓰기를 봉쇄하는 것이다. 이러한 개념은 비평에 아주 걸맞는 것이다. 비평은 작품 아래에서 저자(혹은 그 위격에 해당하는 사회, 역사, 심리, 자유 등)를 발견하는 것을 주요 임무로 삼는다. 그리하여 저자가 발견되면, 텍스트는 설명되고, 비평은 승리한다. 따라서 저자의 통치는 역사적으로 곧 비평의 통치였으며, 그리고 이런 비평이(비록 신비평이라 할지라도) 오늘날 저자와 더불어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이다. 글쓰기의 복수태 안에서 모든 것은 풀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해독해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구조는 연속적이며, 그 모든 이음새나 모든 단계에서 풀려 나갈 수 있지만(마치 스타킹 올이 나갔다고 말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바닥이 없다. 글쓰기의 공간은 답사하는 것이지 꿰뚫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끝없이 의미를 상정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의미를 증발하기 위해서이다. 글쓰기 의미를 체계적으로 비워 나간다. 이렇게 해서 문학은(이제부터는 글쓰기라고 부르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텍스트에 (그리고 텍스트로서의 세계에) 하나의 비밀을, 최종적인 의미를 부여하기를 거부하면서, 이른바 반신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활동을, 진정으로 혁명적인 그런 활동을 분출시킨다. 왜냐하면 의미를 고정시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신과 그 삼위일체 위격인 이성, 과학, 법칙을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발자크의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아무도(어떤 인간도) 그 문장을 말하지 않는다. 그 근원이며 목소리는 글쓰기의 진정한 장소가 아니다. 그 진정한 장소는 바로 글읽기이다. 하나의 정확한 사례가 이 사실을 보다 분명히 해줄 것이다. 최근의 한 연구는 그리스 비극의 구성상의 모호성을 밝혀 주었는데, 그 텍스트는 이중적인 의미의 단어들로 짜여져 있어 각각의 인물들은 그 말들을 일방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이 지속적인 오해가 바로 지극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각각의 말들을 그 이중성 속에서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다시 말해 자기 앞에서 말하는 인물들의 귀먹음까지 이해하는 누군가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독자라는 것이다(혹은 이 경우에는 청자). 이렇게 해서 글쓰기의 총체적 존재가 드러난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기에는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가지 말해 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독자는 역사도 전기도 심리도 없는 사람이다. 그는 씌어진 것들을 구성하는 모든 흔적들을 하나의 동일한 장 안에 모으는 누군가일 뿐이다. 그러므로 위선적으로 독자의 권리의 대변자인 양 자처해 온 인본주의라는 이름하에 이 새로운 글쓰기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가소로운 일일 터이다. 고전 비평은 결코 독자를 다룬 적이 없다. 고전 비평에서는 글을 쓰는 자 외에 문학에서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상류사회 자체가 배척하고 무시하고 은폐하고 파괴해 온 것을 이제서야 마치 위하는 양 뻔뻔스럽게 글쓰기를 비판하고 나선다면, 우리는 그런 반어적인 수법에 더 이상 속아 넘어갈 수 없다. 이제 우리는 글쓰기에 그 미래를 되돌려 주기 위해 글쓰기의 신화를 전복시켜야 한다는 것을 안다.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1] 여기에 나오는 일련의 수식어들은 전부 여성명사들로서, 그것을 한정하는 소유형용사 또한 여성이다. 따라서 소유형용사는 단순히 <> 혹은 <그것의> 풀이될 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이런 여성 형용사의 사용은 여성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따라서 글에서는 <그녀의> 옮기고자 한다.

[2] 여기서 바르트는 명암, 흑백 등이 피사체와는 반대가 되는 음화의 이미지를 통하여, 글쓰기 안에서의 주체의 부재와 전복적인 양상을 말하고 있다.

[3] 여기서 거세적이라고 옮긴 프랑스어의 castratrice, 거세라는 1차적 의미에서 확대되어 신체의 다른 부위를 절단하거나 훼손시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거세적인 객관성>이란 모든 반응이나 다양한 해석을 차단시키는 불구의, 풍요롭지 않은 그런 직접적인 객관성으로 해석될 있을 것이다.

[4] 샤를뤼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오는 동성연애자의 대표적인 인물로, 당시 시인이자 귀족이며 오만함으로 사교계에서 명성이 드높았던 몽테스키외라는 실제 인물에서 차용한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5] 전기적이고 심리적인 주체로서의 저자의 개념은, 바르트의 후기 문학 실천에 이르면 필사자의 개념으로 대체된다. 저자의 개념이 무엇보다도 실증주의적이고도 합리주의적인 정신에 의거한 것이라면, 필사자는 자신의 텍스트를 결코 초월할 없는 언술행위 안에서만 자신을 소모하는 자이다. 원래 프랑스어의 scripteur라는 말은 작가, 저자의 동의어로, 글을 쓰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scribere에서 나온 말로, 같은 어원에서 파생된 필경사, 서사, 서생을 의미하는 scribe와는 구별된다. 그러나 바르트는 어원의 이러한 가지 의미를 수용하여, 작가란 심리적인 주체가 아닌 선해하는 글쓰기를 베끼며 변형하는 자라는 점에서 말을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글에서는 필사자로 옮기고자 않다. 스기를 실천하는 자로서의 필사자는 말하는 , 화자와 대립된다.

[6] 수행동사는 명령하다, 선언하다, 약속하다라는 동사처럼 말하는 동시에 하나의 행동을 수행하는 동사를 가리킨다. 수행동사 혹은 언어 수행이라고 불리는 언어학 용어는 언어능력에 대립되는 것으로 구체적인 언어의 실제적인 사용을 의미한다. 언어 능력은 추상적이고도 이상적인 것이지만, … 언어 수행은 구체적이며, 기억의 한계, 고쳐 말하는 , 부주의등 언어 이외의 요소에서 오는 불완전한 형식까지도 포함한다

[7] 플로베르의 미완의 작품 부바르와 페퀴셰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그대로 실생활에 적용하려는 우스꽝스럽고 회화적인 인물의 이야기이다. 바르트는 작품을 페러디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문학에 있어 모방이나 표절의 문제는 어쩌면 문학 언어의 특성이기도 하다는 견해를 표명하고 있다.

[8] 영국 작가로서 영국인 아편장이의 고배’, ‘살인의 예술적 고찰등의 작품을 남겼으며, 보들레르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번호별로 보기
여러개의 게시물 정리 제목별로 보기 이름별로 보기 날짜별로 보기 조회별로 보기
1280   [펌] 자조적 부적응 혹은 자멸의 발라드 zabel 2002/12/16 282
1279   [기사] 라이브 데드 zabel 2002/12/16 251
1278   [전시]베를린 도시의 변화 zabel 2002/12/16 284
1277   [키노]박찬욱 인터뷰 zabel 2002/12/17 342
1276   [펌]포럼A 주재환 인터뷰 zabel 2002/12/17 444
1275   [펌] 신해철 인터뷰 中 zabel 2002/12/19 263
1274   [전시]한기창 개인전 zabel 2002/12/19 288
  신화의 혁명 zabel 2002/12/19 373
1272     [re] [펌]포럼A 주재환 인터뷰(잘린 것 나머지) [1] zabel 2002/12/20 7765
1271   [뒷북]아라키 기사로 쓰여진 이우환 인터뷰 [1] zabel 2002/12/21 258
1270   [펌]모래사장위의 사장님 zabel 2002/12/21 253
1269   [퍼슨_펌]먼, 그런 연애. zabel 2002/12/23 372
1268   Diego Alvarez zabel 2002/12/24 288
1267   [전시]김영길 사진전 zabel 2002/12/26 334
1266   안경잡이 zabel 2002/12/26 293
1265   [펌]사진드러내기 zabel 2002/12/29 263
1264   레지스탕스 zabel 2002/12/29 339
1263   RaySoda 사진 zabel 2002/12/30 295
1262   [기사]뉴질 네버 랜드 zabel 2002/12/31 352
1261   싱거운 질문 [2] mimi 2002/12/31 297
  [1][2][3][4] 5 [6][7][8][9][10]..[68]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u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