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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08 02:25:20, Hit : 1591, Vote : 256
 http://gelatinemotel.byus.net/main
 CHRISTIAN BOLTANSKI -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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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작가를 소개해준 샘이 맘에 들어하신단 작가, 그에 관한 글이 많진 않은 것같아 일단 스크랩.   흠, 역시 질료는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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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 기억 되새긴 산 자의 고통 - 볼탕스키 | aesthetices 2005/05/15 22:15  


http://blog.naver.com/dayani/60012876629
http://www.tate.org.uk/magazine/issue2/boltanski.htm
http://www.artnet.com/artist/2737/Christian_Boltanski.html
http://www.chgs.umn.edu/Visual___Artistic_Resources/Public_Holocaust_Memorials/Berlin_Memorials/berlin_memorials.html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CHRISTIAN BOLTANSKI)의 작품에 나타난 사진성 - 신혜경

Ⅰ. 여는말
1960년대 이후 현대 미술 작가들은 모험심과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조형의 장을 열었다. 이 시기의 미술은 조형적 형태보다도 미술의 개념 자체를 중요시했고 작업의 결과물보다는 작업의 과정을 더욱 부각 시켰다. 형태보다는 내용을 중요시하던 풍조가 팽배했던 60년대에서부터 90년대의 미술은 여러 측면에서 사진 매체를 수용했다. 현대 미술은 사진의 기계적 특성뿐만 아니라 사진을 찍는 심리적 행위까지도 받아 들였다. 이런 관점에서 사진성을 개념화하고 그 사진적 개념으로부터 볼탕스키의 작품의 성격과 경향을 분석하고자한다. 우리는 이 논문에서 볼탕스키가 사진과 미술의 분기점에서 작업하면서 사진을 작업의 매체로 삼은 점과 사진성을 작품의 메커니즘으로 사용한 점에 비중을 두고 논의를 펴고자한다.
사진의 기계적, 행위적 특징을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사진은 실상을 정확하게 복제한다(사진의 복제성과 실상의 증거).
두 번째, 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욕구가 동반된다. 이 반복성은 최상의 사진을 소유하고자 하는 행위의 반복성과 사진을 반복해서 생산하는 복제의 반복성으로 볼 수 있다(사진의 반복적 행위와 생산)
세 번째, 사진은 이미지를 통해 우리의 실상을 수집하고 소유한다(사진을 통한 수집). 선택하고 전환하고 명명하는 단계는 현대 미술의 레디메이드와 똑같은 과정을 겪는다.
네 번째, 사진은 눈앞의 시간과 공간을 자르고, 눈앞의 실상을 멈추게 하면서, 죽음화시킨다(사진과 죽음).

Ⅱ. 본론
1. 사진의 복제성과 실상의 증거
사진은 실상을 정확하게 복제한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렌즈 앞에 있는 대상을 이차원적 평면에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다. 사진가가 선택한 공간과 시간은 사진의 기계적이고 화학적인 속성을 따라 그대로 복제된다. 여기서 사진과 실상은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실상을 모방하고 복제하고자 하는 다른 예술적 시도와는 달리 사진이 실상과 맺는 직접적이고도 찰나적인 관계는 사진에게 '진짜'라는 신빙성을 부여한다. 즉 사진은 현실이라는 믿음을 키우는 것이다. 그런데 맹신적인 증빙 서류로서의 사진은 현실을 왜곡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진은 실상이 아니라 실상의 복사품이고 이 복사품은 여러 기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진이 찍힌 상황을 알 수 없는 관객에게 사진은 실상의 과장된 파편을 제공 할 수도 있고, 다른 요소와 재구성되어 맥락이 다른 실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1. 1. 재구성
볼탕스키는 진실과 허위를 분간할 수 없는 재구성된 자전적 작품을 제작한다. "1948년과 1954년 사이에 크리스티앙 볼탕스키가 행했던 행동의 재구성"이란 작품은 유년시절의 행동을 성인이 된 볼탕스키가 재현한 사진이다. 이 작품에 대해 작가는 이 행동은 자신이 한 행동이 아니라 보편적인 프랑스 어린이의 행동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1969년과 1974년 사이에 그의 작품은 이런 시도를 주로 담고 있다. 마치 타자로서의 자신만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는 듯 작가는 허구적인 형태로만 자기 보이기에 열중한다. 실상과 허상을 공유하고 있는 사진의 속성은 허구성을 주요 모토로 삼고 있는 볼탕스키의 작업과 궤를 같이한다. 예를 들어 "코믹한 촌극" 이란 작품에서 볼탕스키는 엄마, 아빠, 볼탕스키 자신 역을 동시에 연기하고 있어 장면의 인위성을 피할 수 없이 드러낸다. 모자에 꽃을 단 볼탕스키-엄마, 모자를 쓴 볼탕스키-아빠, 머리 위에 윗도리를 뒤집어쓴 볼탕스키-어린이의 세 인물은 회화적인 배경을 뒤로 유년기 기억을 재현한다. "부당한 벌", "부끄러운 키스", "생일", "할아버지의 병", "숨어서하는 키스", "첫 영세"등 과 같은 재구성된 작품에서는 성인이 된 볼탕스키가 비현실적인 배경에서 어린 볼탕스키, 엄마, 아버지, 할아버지, 신부님의 역을 유머러스하게 연기한다.
"[...]나의 작품의 많은 부분은 자서전에 관한 것이다 : 그러나 이 자서전은 다양한 허위 증거물로 점철된 완전한 허위 자서전이다. 자서전에서 나의 부재는 늘 발견될 수 있다 : 볼탕스키에 대해서 많이 이야기하면 할수록 볼탕스키는 점점 부재한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파리, in Art Press, n 28, 1988, P. 6)
여기서 우리는 왜 볼탕스키가 자신의 허구적인 요소를 끊임없이 가미하면서 유년기를 재구성하기를 그치지 않는가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유년기의 창작은 자신의 유년기를 화려하게 꾸미기 위해서가 아니며 거짓 기억을 전하기 위해서는 더 더욱 아니다. 그것은 잃어버린 자신의 유년기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자 타자의 유년기를 찾아주기 위한 것이다. 집단적 기억을 재구성하기 위해 볼탕스키가 사용한 코드는 동시대의 한 집단에서 쉽게 이해되고 식별될 수 있는 상투적인 것이다. 재구성의 주 요소는 상투적인 이미지이고, 사진은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요소로 쓰인 것이 아니라 상투적인 위장 요소로 사용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에 입력된 상투적인 이미지의 형성에 일익을 담당한 사진은 실상과의 특별한 관계(롤랑 바르트의 '존재했다')를 유지하면서 그 실상의 맥락을 자유 자재로 왜곡하고 재편성하면서 동시에 실상의 위력을 간직한다. 일상 생활에 깊숙이 침투한 상투적인 이미지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사진은 볼탕스키가 말하고자하는 우리 각자의 유년기의 진짜 얼굴을 찾는데 가장 적절한 매체일 것이다.
이런 스테레오타이프한 이미지를 보다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작가는 신문이나 잡지에서 볼 수 있는 질 나쁜 이미지(해상도가 떨어지는 인쇄물)를 이용한다. '진짜'라는 효과를 극대화하면서, 작가는 역으로(허위적으로) 이용한다.
"베네치아를 여행하는 방문객은 베네치아의 실상을 갖고 있지 않다. 베네치아에 대한 상투적인 이미지를 너무 많이 본 방문객들은 기존에 있던 이미지와 비슷한 실상을 체험하려고만 하면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베네치아 이미지를 찾아서 집으로 가져간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카탈로그, 파리, 퐁피두센터, 1984, P. 76)
위에서 언급한대로 유년기의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우리 식의 설날, 추석)에 대한 기억은 거의 코드화되어 상투적인 이미지를 이루고 있다. 작가는 우리시대의 상투적인 이미지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이런 판에 박힌 이미지가 우리의 유년 시절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안다. 이런 점을 사진 매체를 통해 적절하게 표현한다.
작가는 보편적인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허위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진실의 증거로 이용한다. 작가 는 사진을 실상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어 자유 자재로 재구성하는데 그것은 또 다른 진실된 실상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그의 자서전은 허구이나 진실의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
"나의 사진 작품의 대부분은 실상의 증거라는 사진성을 이용하여 그 고유성을 왜곡하고 사진이 거짓말을 하고 있고, 현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코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데 있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카탈로그, 파리, 퐁피두센터, 1984, P. 75)
볼탕스키에 있어 사진은 실상의 증거를 넘어서서 관객의 해석에 따라 또 다른 실상을 드러내는 자기 배반적 매체로써 쓰이고 있다고 할 것이다. 볼탕스키의 작품은 허구성을 통해 사진이 갖는 이중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사진이 실상의 증거가 아닌 허상을 실상화 하는 적절한 매체임을 이야기한다. 이런 작업을 보다 구체화하고 확연하게 하는 요소로 사진과 설명문이 갖는 관계를 들 수 있다.

1.2. 사진과 설명문과의 간격
사진의 허구성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는 요소는 사진의 실상과 사진에 붙는 설명문사이의 간극이다. 이런 시도는 "5년 3개월 차의 볼탕스키"(1970)라는 작품에 나타난다. 이 사진이 진짜 볼탕스키인지, 이 두 사진이 찍힌 시기가 5년 3개월의 차이가 있는지 그 둘 중의 하나만이 진실인지 아닌지에 대한 어떤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 증명 사진 밑의 설명문은 의혹만 가중시킬 뿐이다. "1946년과 1964년 사이의 볼탕스키의 10개의 자화상"(1972)이란 작품 또한 위에 언급된 작품처럼 파리의 몽수리 공원에서 한나절동안 찍은 사진이다. 이 작품은 다른 작품보다 사진과 설명문의 불일치를 더욱 드러내는데, 예를 들면, 갈색 머리 소년 사진에는 '10살의 볼탕스키', 금발 머리 소년 사진에는 '14살의 볼탕스키', 사춘기의 소녀 사진에는 '11살의 볼탕스키', 나이를 알 수 없는 볼탕스키 사진에는 '20살의 볼탕스키'라고 쓰여있다. 같은 맥락의 작품인 "보지라르의 아파트"(1973)는 우리의 상상력을 더욱 자극한다. 빈 아파트의 부엌 사진 아래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한 여자가 고기를 준비하는 동안 소년은 야채를 다듬고 있고 부엌 안은 분주하다. 냉장고 위에 놓인 화초는 아보카드 식물임에 틀림없다.' 빈 식당 사진 밑에는 '식탁은 식당에 놓여있다. 식탁에는 포도주잔과 파란 꽃무늬의 하얀 접시가 놓여있고 벽난로 위에는 꽃병이 놓여있으며 모든 것이 공들여 장식된 것으로 보아 손님을 기다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작품은 아무도 살지 않는 빈 아파트 사진에 상상력을 동원한 묘사를 덧붙임으로써 사진(Representation)과 설명문의 근본적인 속성의 차이를 드러낸다.
"[...] 한편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흔적, 지표(Indice), 다른 한편에는 순수한 코드, 모든 거짓말이 가능한 장소, 언어." (디디에 스맹, "볼탕스키", 파리, Art Press 카탈로그, 1988, P. 35)
볼탕스키는 여기서 사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냐하면 두 개의 기호, 사진과 글의 고유성을 동시에 드러내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의 증거로 통용되는 사진과 글의 만남은 특별하다. 메커니즘 자체가 다른 두 개의 기호는 볼탕스키의 작품에서 서로의 허구성을 폭로하면서 각자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로잘린 크라우스에 의하면 이미지와 문자의 독해법은 다르나 둘은 모두 지시적 기능을 갖고 있다. 롤랑 바르트가 '존재했다'라고 지적했듯이 사진은 '사실'이란 힘을 갖고 있고 사진이 실상과 직접적인 관계를 갖는 만큼 그것은 '객관성'과 '진실'이란 맥락 속에서 파악된다.
시각 이미지와 비교해 볼 때 문자는 상상력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정보 위주의 글을 제외한다면 글은 독자의 상상력에 의해 자유롭게 이해될 수 있는 반면, 사진은 어떤 상황에서 찍힌 것인지 그 정보를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국 글은 사진의 객관성을 넘어서서 쓰일 수 있다. 동일 설명문이 제 3의 사진 이미지에도 잠정적으로 쓰일 수 있다는 것이 글의 아이러니이다.
볼탕스키가 사진과 설명문을 병렬하는 이유는 신문에서 볼 수 있듯이 각 기호를 보충적으로 서로 설명하기보다는 각 기호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가운데 그것들을 경쟁 관계 속에 두기 위함이다. 기록 사진에 붙은 설명문도 실상의 증거를 갖고 우리들의 시각을 왜곡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들은 어쩌면 허위에 가득한 세계에 속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작가의 의도는 우리들을 조롱하거나 우리로 하여금 오류를 범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난무하는 이미지 앞에서 우리가 얼마나 의식적인 독해를 하느냐를 질문하는데 있다.
'존재했던 것'의 증거물이란 이유로 우리가 사진 매체에 부여하는 '사실 효과'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자는 것이 볼탕스키 작품의 교훈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현대사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개인의 객관적인 시각은 혼미해지고 각 이미지는 본래의 객관성을 간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작가는 사진을 분해해서 사진의 허위성을 역으로 가시화 하여 사진의 고유성과 모순을 우리에게 의식하게 하고 있다. 대부분의 그의 작품은 사진의 이런 양상을 극대화해서 이미지를 실상과 착각사이, 진상과 허상사이에 자리잡게 하고 있다. 작가는 침묵하고있는 실상의 증거와 의혹감을 주는 수다스러운 설명문사이에서 작가적 유희를 계속하고 있다.

2. 사진의 반복적 행위와 생산
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결정적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셔터를 반복적으로 누르는 욕구가 동반된다. 이 반복성은 최상의 사진을 얻고자 하는데서 오는 행위의 반복성과 복제의 반복성으로 나눌 수 있다. 행위의 반복성은 소급 불가능한 순간들을 포착하기 위한 욕구에서 비롯된다. 지나가는 시간을 포착하기 위해 현재를 기록하면서 사진은 무한대로 복제 가능성을 획득하고 있다(사진의 반복적 생산 : 네거티브, 다게레오티프, 포토그램, 폴라로이드는 예외다).

2.1. 강박적인 반복
1969년, 볼탕스키는 편집적인 반복 행위를 통해 흙으로 된 3000개의 작은 공을 제작했고("3000개의 흙으로 만든 작은 공"), 1971년에는 작은 각 설탕을 자르고 다듬어서 900개의 설탕 조각을 만들었다("900개의 설탕 조각"). 그런데 작가는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인 흙이나 설탕으로 거대하고 수려한 조각 작품을 제작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도 쉽게 장난처럼 만들 수 있는 작은 흙공과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형태로 조각된 각설탕을 박물관의 전시대안에 우아하게 전시하면서 '예술품'의 자격을 주었다. 델핀 르나르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 작품을 '광인의 예술'과 관련해서 얘기한다.
"이 작업은 사실 편집광적인 활동이었고, '만들어야'하는 필요였고, 몇천 개의 작은 흙공을 만들면서 나 자신을 궁지에서 빠져 나오게 하기위한 시도였다. 이 작업은 결코 만들지 못한 완벽한 동그란 공을 만들고자하는 욕구를 쫓아가는 일이었다. 그러나 내가 만약 미쳤다면 예정된 시간 후에도 이 편집광적인 활동을 멈추지 않았을 것이고 그것을 전시하지도 않았을 것이며 더욱이나 이런 방법은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작업은 내 안에도 존재하는 어떤 광인의 발상이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 카탈로그, 파리, 퐁피두센터, 1984, p. 71)
여기서 '만든다'라는 행위는 병적인 일면을 갖고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동, '만든다'라는 행위는 행동 자체의 유용성외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작가는 멈추지 않는 이런 욕구를 실제적으로 행하면서 제한을 시간성에 두었다. 이런 류의 시도는 강박적이며 정신과 환자들에게 쉽게 볼 수 있다. 아마도 이런 작업은 볼탕스키가 스스로 의식하고 있는 광기를 길들이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볼탕스키 자신은 이런 모험이 만족을 주지 못할 것임을 자명하게 알면서도 이 행위를 시작했고 이런 불만족이 이런 행동의 원동력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볼탕스키는 몇천 개의 작은 흙공을 만들면서 무한이란 것에 대면했고 이런 '만드는' 행위의 순간 순간을 흙을 만지면서 잡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사소하고 유치할지도 모르지만 매 순간을 느끼고 소유하려는 존재론적인 욕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강렬한 순간은 물리적인 행위 곧 '만든다'에서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작업이 우리를 감동하게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극복할 수 없는 절망을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살고 시간은 우리를 과거 속에 설정하기를 그치지 않으면서 우리의 존재는 구체적인 증거물 없이 우리로부터 멀어져간다.
현대 사회의 예술가들이 이런 조롱조의 작업을 시도하거나 기계문명의 소비 사회에 대한 반항을 주제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볼탕스키가 그의 방식대로 드러내려는 것은 현대 사회의 결점을 직접적으로 반격하는 것이 아니나 '근본적인 필요'를 표현하고자 한다. 이런 종류의 신념을 '본질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볼탕스키가 행하는 이런 류의 '만들기'는 '생존'을 위한 간단한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만드는' 행위 안에는 흙과의 물리적인 접촉, 도피할 수 있는 반복적인 행동, 스쳐 가는 흩어진 생각과의 만남은 우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삶과 대문자 A로 시작되는 예술로부터의 탈피이다. 이런 '실존적인' 순간은 '만들기'의 순간처럼 사진을 찍는 행위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사진을 찍는 행위는 우선 놓칠 수 없는 그 순간을 찾아서, '실존적인' 순간을 느끼면서 셔터를 누른다. 적어도 찍는 그 순간은 존재하고, 그 증거물이 물리적으로 제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는 매 순간을 담으려는 제어할 수 없는 셔터 누르기 욕구 (존재하고자 하는 욕구)와 연결된다.
"반복적인 충동은 사진 행위에서 본질적인 것이다. 사진은 한 장 찍는 것이 아니라 찍고 나면 곧 욕구불만으로 인하여 한 시리즈의 사진을 찍는다. 사진을 찍는 행위에는 절대로 만족은 없다: 어떤 주제를 반복해서 찍는 것이 아니라 그 주제를 잡는 것, 곧 찍는 행위를 반복하는 것이며, 놀이에 대한 열정이나 성적 행위처럼 항상 다시 시작해야하고 되돌려 놓고 또 다시 시작해야한다." (드니 로쉬, "반딧불의 사라짐 : 사진 찍기에 대한 생각", 파리, Ed. de l'Etoile, 1982, P. 71)
사진 찍기는 볼탕스키의 작품처럼 반복적인 행위를 담고 있다. 거의 같은 상황의 주제를 몇 초 사이로 천 번 이상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는 볼탕스키의 작품과 같은 의미를 갖을까? 또한 하나의 네거티브에서 나온 거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는 천 개의 사진은 볼탕스키의 흙공과 같은 의미를 갖을까? 이런 의문점으로부터 사진성과 볼탕스키의 작품을 비교해서 반복의 개념을 발전시켜 보자. 볼탕스키의 흙공 만들기 작품에서는 반복적인 행위가 그 작품의 의미이다. 만들어진 흙공 자체는 제식적인 행위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그 의미망을 상실한다. 다시 말하면 이 작품에서 반복에 의한 제식적인 면을 감안하지 않는다면 단지 어린아이의 흙장난에 불과하다. 볼탕스키가 이런 간단하고 반복적인 행위를 강박적으로 해나간 이유는 실존적인 순간을 찾으려는데 있다.
"마치 승려들이 경전함을 돌리듯이, 보지도 않고 기관총을 발사하듯 찍어대는 사진 찍기는 회전적 기록 행위를 통해, 매 순간의 세상 모습을 지탱하면서 보장해 준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숑", 쟝 클래르의 서문, 파리, Photo Poche, n 2, 1985)
쟝 클래르의 용어에 따르면 '기관총을 발사하듯 찍어대기'는 사진 찍는 행위에 내재되어 있고 이 반복성은 제식적인 면을 갖고 있다. 마찬가지로 볼탕스키의 '만들기'와 매 순간을 기록하려는 사진 찍기는 보편적인 반복이 아니라 종교적인 면을 갖고 있다. 따라서 사진 현상소의 한 기술자가 하나의 네거티브로부터 천 개의 포지티브 이미지를 만드는 반복성과 다르다. 볼탕스키의 '만드는' 행위는 실존적인 의문에서 시작됐고 그 각 순간의 실존적인 의문은 각각의 흙공에서 발견할 수 있다. 흙공 자체가 작품이 아니라 그 행위에 작품의 본질이 들어 있다.
'반복'이란 개념에 대한 문제제기는 현대미술의 관심사중의 하나이다. 1986년 로잘린 크라우스는 '독창성과 같은 반복'이란 주제의 토론회를 열었고 이 심포지엄에서 벤자민 부크로흐는 반복은 네오 아방가르디스트들(이브 클랭, 루치오 폰타나, 로버트 라우센버그)에게 역사적인 합법성과 의미군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질 들러즈는 플라톤적인 반복성과 니체적인 반복성을 구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플라톤적인 반복은 처음 것과 동일한 것의 반복성이고 니체적인 반복은 피할 수 없는 차이 앞에서 유사함을 갖는 관계를 지속하는 반복성으로 설명된다. 이런 관점에서 사진의 복제성(실상의 복제, 네거티브에서 포지티브 인화)은 플라톤적이고 사진 찍기와 볼탕스키의 작품에서 나타난 반복적인 행위는 니체적이다.
사진에는 실상을 정확하게 복제하는 충실한 역할을 해내는 반복성(필름과 포지티브 이미지)과 앞에 놓인 지시대상과 밀접한 관계를 지속하는 반복성이 내재하고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탕스키의 강박적인 반복 행위는 후자에 속한다. 볼탕스키적인 반복은 삶의 은유이자 종교적인 의식처럼 절대성에대한 한 행위이자, 삶의 매 순간을 잡으려는 노력이다. 아마도 이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욕구일지도 모르지만, 사진성에도 이런 불멸성에 대한 욕구와 필명성에대한 의식이 동시에 내재되어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3. 사진을 통한 수집
앙드레 브르통은 사진 찍는 행위를 "어느 날의 아름다운 우연을 노획하는 것이다"라고 표현한다. 잡고 싶은 사냥감들 사이에서 어느 순간이 오면 원하는 사냥감을 향해 시선은 멈춘다. 이런 긴장의 순간은 셔터를 누르고자하는 욕구로 이어지고 이 욕구는 그 순간을 소유함으로서 채워진다. 사진가는 보이는 모든 것을 찍으려는 경향이 있다. 제 2장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포착하려는 욕구는 카메라 앞의 피사체를 수집해서 소유하려는 욕구로도 볼 수 있으며 오브제, 풍경, 인물을 이미지의 형태로 소유하려는 욕구의 발상이다. 모든 종류의 수집은 완벽하게 채워지지 않으며, 그 불완전성이 수집의 원동력이 된다. 마이너 화이트는 보이는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끊임없이 사진 찍으면서 소유한다고 얘기한다.
수집의 성격은 시대와 응용 분야에 따라 달라진다. 프랑스의 사진 작가 위젠느 아트제는 19세기말의 파리 이미지를 수 천장 남김으로써 그 시대의 파리를 수집했고 이 사진 이미지는 지금에 와서 수집의 대상이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사진은 수집의 수단이자 목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고전적인 개념의 수집가와 예술가-수집가는 근복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전자는 희귀하고 가치 있는 오브제를 선택하지만 후자는 전자의 척도와는 다른 오브제를 선택하여 그 오브제를 이용해서 작품화하여 유일 무이하고 가치 있는 오브제로 승격화 시킨다.
"수집하는 것은 열정을 가지고 축척하고 모으고 재산화하는 것이다. 또한 수집은 한 개와 무한 개 사이의 긴장의 관계임과 동시에 다수에 대한욕구이면서 특수한 것에 대한 제식이다. " ("사진 연구", N10, 앙드레 루이예, P. 6)
앙드레 루이예가 거론했듯이 수집은 유일무이성의 희귀함과 다수로써의 양의 가치를 가질 때 그 의미가 드러나는 양면성의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앞에서 제시했듯이 후자의 경우, 곧 예술가-수집가는 수집의 대상이 될만한 가치를 지니지 않은 것을 수집의 대상으로 승격화한다. 그 좋은 예가 볼탕스키의 작품 "1939년에서 1954년 사이의 D 가족의 사진 앨범(1971)"과 "목록 작성"시리즈이다. 1971년 여름, 볼탕스키는 친구 D에게 그의 가족 앨범을 빌려서 그 사진을 복사하고 작가의 가족 사진을 첨가해서 같은 크기의 사진으로 전시한다. 작가는 예술적인 의도나 자료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는 아마추어 가족사진을 수집해서 작가 세대의 프랑스 중류 가정의 가족상을 제시한다.
이런 류의 작품으로 "목록 작성" 시리즈를 들 수 있다. "목록 작성"은 일반적으로 슈퍼마켓의 점원이나 도서관의 사서가 하는 일이다. 볼탕스키의 "목록 작성은" 이러한 일반적인 "목록 작성"이 아니라 민속학자나 수집가처럼 전시나 출판의 의도를 갖고 특정한 오브제를 수집해서 정리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Bois-Colombes에 사는 한 부인에게 속했던 오브제의 목록 작성(1973)"이란 작품은 아들집과 자신의 집을 오가며 사는 부인이 아들집으로 이사갈 때 남겨진 물건들을 부인과 미술관의 동의하에서 수집한 오브제들을 전시한 것이다. 작가가 수집한 책, 옷, 가족사진, 가구들은 동등한 가치와 위상으로 미술관의 전시대에 설치되었다. "바덴바덴의 나이든 부인에게 속했던 오브제의 목록 작성(1973)"이란 작품 또한 부인의 죽음 후에 수집된 것이고 "옥스퍼드의 한 젊은이에게 속했던 오브제의 목록 작성(1973)"은 젊은이가 외국으로 가면서 남긴 오브제들이다. 수집된 오브제들은 기존 오브제의 역할을 상실하고 미술관의 진열대에 고대 유물이나 민속품처럼 시각적 대상으로 설치된다.
"현실에서 분리되고, 분류되고, 목록에 기입되어, 전시대나 미술관의 진열장안에 전시된 오브제들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연구의 대상이나 관람할 대상이 된다." (볼탕스키, 퐁피두 카탈로그, P. 23)
여기서 "Bois-Colombes의 한 부인에게 속한 오브제"가 어떤 의미를 우리에게 줄 수 있는지 자문해 볼 수 있다. 한 부인의 사실적인 초상화로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면 프랑스의 가족상으로 볼 수 있을까? 기존의 기능을 잃은 채 미술관이란 공간에 놓여진 오브제들은 속했던 인물의 초상화를 그릴뿐만 아니라 장소의 불일치에서 연유되는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긴장감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 메이드를 연상시킨다.

3.1 레디메이드
레디메이드는 선택되고, 맥락이 전환되고, 다른 위상으로 자리잡는 과정을 통해 작품화된다. 사진 또한 피사체를 선택해야하고, 선택된 피사체는 사진이라는 오브제로 전환되어, 가족 앨범용이나 상업적, 예술적인 기능에 따라 그 역할이 결정된다.
레디메이드에 대해 얘기하자면 마르셀 뒤샹의 "샘"을 거론치 않을 수 없다. 뒤샹은 남성 변기에 R Mutt라는 이름을 싸인하고 '샘(1919)'이라 명명하여 전시장에 설치했다. 작가마다 오브제를 선택하는데 있어 척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뒤샹의 선택 이유는 '시각적인 무관심'이나 '좋은 또는 나쁜 기호의 완전한 부재'라고 주장하면서 레디메이드의 신화를 심화 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택한 오브제, 남성변기가 특이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치 않을 수 없다. "샘"은 장소와 오브제간의 불일치에서 오는 긴장감을 선동할 뿐만 아니라 뒤샹의 다른 작품들과 같은 맥락에서 읽힐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볼탕스키의 "1939년에서 1954년 사이의 D가족의 가족 앨범"은 뒤샹의 레디 메이드 전통 안에서 읽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오브제가 사진 이이므로 선택, 전환, 명명의 과정이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볼탕스키는 아마추어 가족 사진, 곧 작가의 의도이전에 이미 있었던 사진들을 하나의 오브제처럼 선택한다. 선택된 사진들은 D 가족들에 의해 가족 사진이라는 오브제로 존재하다가 작가의 선택에 의해 가족 안에서의 의미망을 상실한 채 미술관의 예술 작품으로 전환된다.
"레디메이드의 모든 의미는 맥락과 상황의 변환에서 오는 것임에 불구하고 분석하기 불가능한 것처럼 다가오는 이 이미지들의 의미는 맥락에서 잘린 사실과 그들을 자른 행위에서 비롯된다."(로잘린 크라우스, p. 134-135)
레디메이드와 사진에서 나타난 전환은 실상의 오브제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우리는 매일의 실상을 바라보지도 느끼지도 않는 경우가 많은 반면 사진과 레디메이드를 통한 전환은 새로운 실상으로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런 맥락에서 "1939년에서 1954년 사이의 D가족의 사진 앨범"은 다른 가치를 제시한다. 가족 생일이나 크리스마스에나 바라볼 D가족의 사진 앨범은 그 고유성을 완전히 잃은 채 누구나 볼 수 있는 대중적인 오브제로 둔갑한다. 즉, 미술관에 전시된 "D 가족의 사진 앨범"은 '삶'의 장에서 '예술'의 장으로 전환되고 '가족'의 장에서 '대중'의 장으로 전환된다. 여기서 작가는 가족 사진을 예술화하면서 사진의 고유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려고 한다.
사실 사진 매체는 대중적인 요구와 공급에 의해 운영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일반 대중의 필름 소모량는 엄청나다. 정확한 의도 없이 생산되는 대다수의 사진 이미지는 소모의 기능만을 채우면서 우리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하고 있으며 매스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미지들은 우리들의 시지각 작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여기서 볼탕스키는 소모된 사진을 에술로 승격화시키면서 또 다른 의미군과 정체성을 수여한다.

4. 사진과 죽음
사진 찍는 행위는 흘러가는 시간과 살아 있는 세상을 자르고 파편화하는 동시에 화석화시킨다. 롤랑 바르트가 "사진은 살인 중개업자다"라도 '밝은 방'에서 밝힌 바 있듯이 각각의 사진은 죽음을 배태하고 있다. 카메라는 실상의 파편을 훔치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실상의 시공적인 운동성을 멈추고 얼어붙은 실상으로 변환시켜 우리에게 제시된다. 이런 사진은 죽음과 모순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하나는 화석화되서 죽음을 간직한다는 점과 또 다른 하나는 죽음을 넘어서서 영원한 오브제로 남는 점이다. 물론 사진 매체의 물질성에는 그 한계가 있음이 전제된다. 이런 맥락에서 사진은 살인 중개업자이자 죽음의 파수꾼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로잘린 크라우스에 따르면 미신적인 제식에서 반들거리는 표면은 죽은 자들의 귀환을 위해 쓰여졌고 이런 면에서 희고 반들거리는 인화지는 제식에서 쓰이는 반들거리는 표면과 그 용도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사실 사진은 '존재했던' 그러나 지금은 부재 하는 실상을 보여줌으로써 죽음과 실상을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진은 죽음을 이야기하기에 가장 적절한 매체일지도 모른다. 1985년 "기념비'시리즈를 시작한 볼탕스키는 사진 매체가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가장 적절한 매체임을 인지하고 있는 작가다. '기념비' 시리즈는 얼굴만이 확대된 어린이의 사진이 제단이나 토템적인 형태의 구조물 위에 걸려있고, 노란빛의 전구나 촛불은 어린이의 초상화를 어슴푸레 비추고 있다. 이런 형식의 설치는 장례식이나 고인을 기리는 자리를 연상케하며 죽음을 느낄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사진은 어린이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아니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극도로 확대되어 희미한 초상화다. 이 사진은 죽은 어린이의 사진이 아닐까 의혹을 주는데 사실 볼탕스키의 7살 때 같은 반 친구들의 사진을 복사하고 인화한 사진이며, 이 사진중의 하나는 볼탕스키-어린이 사진이다. 또한 액자 안에 반짝거리는 종이는 작가가 어릴 때 즐겨 먹었던 과자의 포장지라고 한다.
"내가 사진 매체를 쓰는데는 사진이 삶을 상실한 죽음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 사진을 찍자마자 3초 후에는 실상은 지나가 버리고, 운동감은 얼러붙어 그 순간은 죽어버린다. 어떤 사람, 어떤 주제는 죽었고 단지 한 장의 종이 위에 기록된다 : 그러므로 사진은 죽음을 얘기하기에 적절한 매체이다 " (카날 잡지, N 12/13, 유수코 나카하라와의 대담에서)
김벌트에 따르면 볼탕스키의 '기념비"는 죽은 어린이에 대한 사랑을 근거로 한 추모가 아니라 죽어서 없어진 우리 유년기에 대한 상실로 해석한다. 어른이 된 우리들은 우리 안의 어린이가 죽음으로써 어른이란 위치를 획득했고, 죽어 버린 그 어린이를 애통해하고 기억하는 기념비로 이 작품을 분석한다. 볼탕스키 자신도 어른이 되기 위해서 우리 속의 어린이는 죽을 수밖에 없음을 피력한 바 있다.
"바르트는 어머니의 죽음 후에 들춰본 사진 앨범에서 '본질적인' 이미지를 기적적으로 찾았는데 이는 그녀의 어릴 적 사진이었다고 기술한다. [...] 이 발견은 가장 근본적이고 아픈 충격이었는데 그 이유는 지나가 버린 존재로서, 죽도록 운명 지워진 상태에서 사진 매체로 영원화된 어머니를 만났기 때문이다." (로잘린 크라우스의 "사진성", P. 191)
'기념비' 시리즈는 보편적인 죽음에서부터 어린이의 죽음과 우리 안의 유년기의 죽음을 연상하게 할뿐만 아니라 어린이의 대학살을 상기시킨다. 집단적인 죽음에 대한 연상은 자연스레 아우츠비치의 대학살이라는 사건으로 접목되어지고 이 사건에 대한 연민과 비난은 '기념비' 시리즈에서도 나타나지만 그 후의 작품 "기록 보관소(Les archives : 1987)"와 "창고( La reserve : 1988-1991)"라는 시리즈에서 보다 확연하게 드러난다. 위에 언급된 작품들은 '기념비'와는 다른 보편적인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인위적인 계획에 의해 살해된 죽음을 연상케 한다. "기록 보관소'는 익명의 얼굴을 값싼 철사로 된 칸막이에 무작위적으로 걸은 작품으로 '기념비'에서 보여줬던 제식적인 면이나 '애정'을 가진 추모의 분위기가 아닌 익명으로 태어나서 익명으로 죽어간 사람들의 자료실을 상기시킨다. "창고"시리즈는 볼탕스키가 다양한 양식을 통해 보여준 작품들로 '기념비'와 '기록 보관소'가 적절하게 접목되면서 복합적인 죽음을 보여 주고 있다. "창고 : 형사(1988)"는 다양한 크기의 박스 위에 '형사'라는 특수 신문에서 복사한 사진들을 박스 위에 붙여서 창고 식으로 설치한 작품으로 아우츠비치의 죽음을 더욱이나 상기시킨다. 종이 박스 안에는 사진 속의 인물의 소지품이 보관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지만 그 안은 비어있다. 같은 맥락의 작품으로 "죽은 스위스 사람들의 창고"를 들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볼탕스키 특유의 냉소적인 유머가 첨가된 작품이다. 중립국가인 스위스에서의 죽음은 제 3국가나 소수 민족들보다는 희박하다는데서 이 작업의 착상을 한 작가는 스위스 신문의 사망자 난에 나온 얼굴을 복사하여 작가가 즐겨 먹던 과자 상자 위에 붙인 작품이다. 어린이의 욕구의 대상인 과자 상자와 죽을 가능성이 희박한 스위스 사람들의 죽음을 접목한 점은 볼탕스키적인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다. "창고"시리즈중의 다른 유형의 작품으로 '카나다(1988)'와 "창고 : 죽음의 호수 (1990)"을 들 수 있는데 수 백벌의 중고 옷을 벽에 걸거나 바닥에 뿌려두는 설치 작업이다. "창고 : 죽음의 호수"는 관객들이 그 옷을 밟도록 설치되어 있어 대학살의 이미지를 가장 물리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은 부재된 신체, 곧 죽움에 대한 직언이다. 왜냐하면 중고 옷은 옷의 주인을 잠재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신체의 부재를 느끼게 함과 동시에 그 신체의 현존을 의복의 냄새와 주름을 통해 강력하게 돌출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중고 옷과 사진은 존재했던 것에 대한 부재와 현존이라는 점에서 그 유사성을 찾을 수 있으며 "창고 ; 형사"의 빈 박스 또한 부재와 현존은 함축하고 있다.
"볼탕스키에게 중고 옷들은 사진과 유사하다. '그들의 공통점은 현존과 부재를 동시에 함축하고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중고 옷들은 하나의 오브제이자 한 주제의 기억이다. 마치 시체가 오브제이자 한 주제의 기억이듯이" (린 김페르,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여러 얼굴", 그르노블 카탈로그, P. 29)
Ⅲ. 닫는 말
우리는 위에 언급된 네 가지의 사진성이 볼탕스키 작품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현대 미술을 특정 지울 수 있는 언어나 행위와 직결되어있다고 본다. 현대미술과 사진이 역사적으로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그 만남을 지속해온 점을 유념하면서 사진성(Le Photographique)은 사진에서만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 현대 미술에서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음을 본다. 즉, 사진술의 발명 이후 사진의 고유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사진에서의 미술의 영향은 지대했고(픽토리알리스트), 역으로 사진성과 사진 매체는 현대 미술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진적인 특성은 사진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현대 미술)의 연구 대상처럼 이론적 주제가 되고 있다."(로잘린 크라우스, "사진적인 것(거리 두기 이론에 대해", 파리, Macula, 1990, P. 12)
로잘린 크라우스가 거론했듯이 사진성은 볼탕스키의 작품 말고도 현대 미술의 여러 작가들을 분석하고 이해하는데 적절한 이론적인 도구임을 이 논문을 통해 제시해 본다.

출처:  http://jsbs007.nacool.net  
    
  

미술  1997년04월03일 제 151호  

■ 볼탕스키의 겨울여행전
(사진/`저장고-죽은 스위스 사람들')

                                                                                                          이주헌/ 미술평론가
‘살아남음의 순간은 권력의 순간이다. 죽음을 보고 느끼는 공포감은 이 내 죽은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만족감으로 변한다. 죽은 자가 누워 있다면 살아남은 자는 서 있다. 그것은 마치 조금 전에 싸움이 일어나서 누군가가 죽은 자를 쓰러뜨린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것이 다. 살아남음에 있어서 개개의 인간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적이다.’
`군중과 권력'의 저자 엘리아스 카네티는 생존이 곧 권력이라고 설파한다 . 권력자는 삶과 죽음을 가르는 자이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죽음을 명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권력자이다. 다른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데 자신 만은 아직도 건재하다는 기분을 느끼기 위하여 권력자는 다른 사람을 쓰 러뜨리고 싶어한다. 죽임을 통해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살아남음 은 곧 승리로 정의된다. 살아남은 자는 승리자인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 인 학살을 통해 그의 승리를 극단적으로 장식하려 한 것은 그의 살아있음 을 좀더 즉물적으로 확인하고픈 욕망 탓이었다.
하지만 살아남음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오직 운이 좋았던 덕택에/ 나는 그 많은 친구들 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러나 지난 밤 꿈 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 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한 자는 살아남는다.”/ 그러자 나는 자신이 미워졌다.’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가 2차대전 당시 먼저 간 친구 발터 벤야민과 영화감독 코흐 등을 그리며 쓴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때로 살아남 음이 정서적으로 얼마나 큰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록 카 네티가 “본질적인 승리(살아남음)에 견주어볼 때 모든 슬픔은 하찮은 것 ”이라고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바로 그 슬픔에 근거해 비로소 인간은 자유와 정의, 휴머니즘을 부르짖을 수 있는 것이다.

홀로코스트 기억 되새긴 산 자의 고통
4월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볼탕스키-겨울여행’ 전은 바로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관한 전시다. 비록 브레히트만큼 슬 픔에 관해 구체적인 언급을 하고 있지는 않지만, 볼탕스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중립적 태도를 견지하며 동료 인간들에게 스스로에 대한 동정심을 회복함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운명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라고 이야기한다 . 영원한 권력자, 곧 승리자는 없으며 우리는 모두 죽는다는 사실을 늘 마음에 새기는 것이 진정한 삶의 길이라고 그는 이야기하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볼탕스키(53)는 유대계 프랑스인이다. 그의 작품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곧 홀로코스트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지 극히 당연한 일이다. 직접적으로 유대인 대학살을 주제화하고 있지는 않 지만, 홀로코스트의 기억이 작품마다 배어 있다.
`저장고-죽은 스위스 사람들'이라는 작품은 작은 금속상자들을 ㄷ자꼴로 사람키만큼 쌓아놓은 작품이다. 오래된 이 상자들의 안쪽 면에는 죽은 사 람의 흑백사진이 하나씩 붙어 있다. 남녀노소의 평범한 얼굴들을 대하다 보면 죽음의 보편성이 너무나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들은 사라졌다. 그들 은 부재한다. 하지만 그들의 자취와 흔적, 그들에 대한 기억은 파편처럼 세계 어딘가에 남아 있다. 납골당 같은 그 저장고가 흩어진 파편들에 대 해 언급한다. 인간의 존재라는 것은 결국 부재와 흔적, 기억, 시간의 흐 름 등이 모여 그 대상으로 기념하는 하나의 기념물에 불과한지 모른다. 때로는 여행 자체보다 여행지에서 찍은 사진이 더 소중하듯 인간의 진정 한 가치는 존재 너머에 존재하는지 모른다.
부재와 관련한 볼탕스키의 상념은 옷들을 벽에 촘촘히 매단 `의복으로 된 벽'에서도 무겁게 이어진다. 그 옷의 주인들이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든 그 옷들은 그들이 붙잡았던 인간의 육체를 지금은 다 놓친 채 묵묵히 벽 에 걸려 있다. 그 옷들은 인간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신체에 닿았 다는 점에서 그것들은 자연의 다른 사물과는 다른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기에 지금 그 옷들을 통해 인간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은 결국 인간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것이 된다. 인간의 땀이나 체액이 닿은 부 지깽이 등이 도깨비가 된다는 우리의 민간설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 인간 은 부재 속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그로 인해 인간은 삶과 존재 의 가치 및 윤리에 대해 반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흑백사진으로 구성… 정신대도 선보여
한편 볼탕스키의 설치작품들이 대부분 색바랜 흑백사진을 중심으로 구성 돼 있다는 점에서 사진이 갖는 이 시대의 독특한 마력을 다시 한번 생각 해보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죽은 이들 앞에 설 때보다 정직하고 냉정하 게 스스로를 돌아본 다음 그 앞에 설 것을 요구하는 것 같다. 죽은 사람 들의 사진은 이를테면 물화된 영혼처럼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런 사물이다 . 그것은 사진이 없던 시절, 예배당의 십자가나 절의 불상, 신목의 띠 같 은 것이 우리와 나누었던 관계와 느낌으로 다가온다. 전세계의 많은 독자 가 안네 프랑크의 일기에 끌린 것은 일기의 내용 못지 않게 안네의 얼굴 사진이 그들에게 호소하는 바를 거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얼 굴사진들이 `미키 클럽의 62명의 회원들', `뮌헨의 어린이들' 등에서도 유사한 구실을 하며 관객의 시선을 나꿔챈다. 죽음과 관련한 이미지들이 그림자로 나타나는 `그림자 극' 등의 그 흔들리는 그림자들도 얼굴 사진 들이 보여주는 울림과 한 주파수로 공명한다.
이번 전시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작품 `정신대'는 마땅한 사진을 구하지 못해 취소될 뻔했으나 작가가 사진없이 제작을 감행해 완성됐다. 텅 빈 검은 사진액자들과 소복처럼 늘어선 흰 천들이 그것인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아직 제대로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 서 그의 그런 처리 방식은 좀더 많은 반성의 필요성을 우리에게 시사하는 듯하다. <한겨레신문>



■ [ 볼탕스키: 겨울 여행展 ] ∼4.6 / 국립 현대 미술관. ...............................................................................................
'크리스티앙 볼탕스키'의 첫 개인전이 1968년 5월에 개최되었다 고 하니, 그가 작가로 데뷰한지 20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여기서 그의 작가경력을 새삼 거론하는 이유는, 그가 독학으로 공부를 한 프랑스 화가이기 때문이다. 정식 아카데미 교육없이 독학으로 성공한(* 전시 설명서에 나온 대로 라면...) 그의 작업은 언뜻 <네오 다다>나,<누보 레알리즘> 을 연상케한다. 혹은 '요셉 보이스'를 떠올리고 싶을런지도 모른 다. 이 처럼 섣부른 비교를 외면상(?) 가능케하는 것은 그의 일상품에 대한 오브제化와, 작품언어로 치환시키는 발상탓이다. 그의 작품이 진열된 전시장안은, 그의 작품성격을 고려한 탓인 지, 명도가 낮게 책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음습하고 어두침침한 전시장내 분위기는 그의 작품과 유기적으로 연대를 갖으며, 작품 에 개입/영향한다. 이번 볼탕스키의 국내초대전에는 그의 70년대초반 작업에서 부 터, 한국에 입국한후 제작한 듯한 97년 작 [기념물, 정신대 Monu ment Femmes de Comfort]까지 다양하다. 그의 작업하면 번뜩 떠 오르는, 일상적 오브제( 양철통,헌옷,낡은 사진등...)를 활용한 작업들 보다, 나는 개인적으로 80년대 중반에 제작된 그림자작업 들이 호감이 간다. '84년작,[ 그림자 연극 Theatre d'Ombres ]라던지, '86년작,[ 양초 Les Bangies ]같은 작업들 말이다.
[그림자 연극]의 경우 초와 양철조소작품을 둘러싸고, 선풍기를 가동해서, 선풍기 바람 을 타고, 양철조소의 그림자들이 벽위에서 연극같지 않은 연극(? )을 실연한다. 약간은 촌스러울지언정,그야 말로,무인극(無人劇)인 셈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른 키네틱아트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다. 움직 이는 팬(pan)과 기류를 타고 흔들리는 촛불과 그림자들의 역동은 보이는 물리적 실체(놋쇠로 만든 인형)의 정지에도 불구하고, 타 성에 의해 움직임이 조절되는 실체의 허울(놋쇠인형의 그림자)을 비교해주는 재미있는 작업이랄 수있다. 그리고 '86년작 [양초]의 경우는 바람을 조장하는'팬'이나 선풍 시설이 갖춰져있질 않다. 하지만, 촛불의 불안정한 흔들림 --그 것이 예측불가능한 기류의 흐름탓이건 짖궂은 관객들의 장난탓이 건--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흔들려대는 놋쇠인형의 분신(그림자) 는 유아기적 장난이상의 참신한 환기를 관객에게 불러일으킨다.
즉 [그림자 연극]에서처럼, 본연의 실체는 정지되어있고, 실체 의 반영(그림자)이 자의가 아닌,타의(바람)에 의해 운동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그림자인형의 사례는 비단 인형에만 국한 되는 문제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에게도 적용되지 않는가? 우리 인간들 또한 개개인의 개인의지를 통해서 보다는 외부적 영향력이나, 현세를 가늠하는 기류에 의해 자기의지를 박탈당한 다. 그리고 외부의 영향력(바람)이 거세면 거셀 수록 내부(그림자) 의 흔들림 또한 불안정하고, 과격해진다는 점에서 볼탕스키의 인 형들과 인간들은 흡사한 것이다. 이번 전시장엔 그의 상표가 되다시피한, 일상적 기록사진을 오 브제화한 여러 설치작업들이 있다. "직접 사진을 찍진 않지만 이미 제작된 사진을 종교적 서정성이 배어 있는 환경을 조성함으로써 일종의 제의적 분위기까지 자아 내는 한편 ...일반적인 개인사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의 주체인 평범한 사람들의 익명성을 통해 그들이 지닌 힘의 경건함을 일 깨워 주고 있다." ( 전시 설명문 중에서...)
그가 기존사진을 도용한 작업들, 요컨대 [학교의 아이들 Les En fants del'Ecole] 이나, [버팀대 Les Portants] 등은 전부 어딘 지 불명료하고, 흐릿한 전시장내 조명으로 인해 기괴스러움을 더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음습한 작업양상과 낡은 사진들이 부 여하는 이미지들은 사진속에 등장한 익명의 주인공들에 대해 관 람자 개개인의 유년에 대한 동경내지는, 이미 죽고 없을 지도 모 르는 사진속 주인공들에 대해 기묘한 감정(그것이 죽은자에 대한 애도이건, 죽음자체에 대한 두려움이건 간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러한 무정형의 감정은 작품을 보다 진지하게 대하게 끔 견인한다. 그밖에 [참고 진열장 Vitrine referece]이나, [의 복으로 된 벽 Mur d'habits]과 같은 일상용품을 십분활용한 작업 들은 익명화된 개인들이 갖는 의미나 가치--비록 역사나,사회가 그 가치를 소홀히 취급한다 할지라도--에 대해 재고/환기할 여유 를 제의하는 작업들이다.
* 정식교육을 통한 등단이 관례로서 굳어진 현 화단에서 독학 으로 작가의 위상을 득한 '볼탕스키'의 개념적 설치미술작 업들은 자칫 경색되고 타성화된 화랑의 풍경을 재설정하는 기폭이 될법도 하다.





  CHRISTIAN BOLTANSKI - text   2006/12/08 1591 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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