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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4-10-27 21:06:07, Hit : 1265, Vote :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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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화와 권력’ - 재생산의 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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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으로 점철된 글에 대해 매우 뜨악한 심성을 가진 나로서는, 인용/독서에 대한 자신의 글에서 글쓴이의 심중 혹은 문제성까지 언급하는 것을(정확성에 관계없이) 무.척.이.나(혹은 반드시) 올바른 일이라고 생각한다.

갑작, 고위 정치인 혹은 고위 문화인(ex_앙드레 김) 들이 왜 한결같은 비줠을 고수하고 사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올랐다는.    자신이 사회변동의 주체라는 의식이 있는 사람일 수록 그렇지 않을까.   시스템의 움직임에 따라 변화하는 시민일 수록 주위 상황에 민감하고 따라서 아비투스의 한 예가 될 수 있다면, 권력층위(라고 생각하는)의 사람들은 뭔가 "영향력에 무관한 비주얼"을 생산해얀다는 강박에 시달리는 것은 아닐런지.

자신이 사회에 속한 것이 아닌, 사회가 자기 삶의 한 도구일뿐이라는 자각/착각이 드는 순간 분명, 자신 내부에서 밖으로 표출되는 변화는 있을 것같다는 생각.   하여 당연하게, 내/외부의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이같은 사람이라면 아주 일정부분은 부르디외 개념에서 멀어지게 되리란 예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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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 작가의 요구에 따라 차후에 수정될 수 있음을 알려드리는 바입니다.




피에르 부르디외 ‘문화와 권력’ -재생산의 전략 [작성_2002.봄]

                                                                                                    written by sia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기존 구조주의적 입장과 현상학적 입장사이에 걸쳐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계급구분의 문제에 있어 맑시즘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구조주의적 시각은 인류학자인 레비-스트로스로부터 비롯된 것으로서(물론 그 근원을 좀 더 거슬러 올라간다면 기호학자인 소쉬르가 언급되어야 할 것이다.) 사회구성원의 생활양식은 그 사회구조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에 종속되어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반면 현상학은 구조보다는 주체의 자율성을 옹호하는데 이는 철학의 실존주의와 맞닿아있다. 부르디외는 이와 같은 기존 사회학으로부터의 ‘인식론적 단절’을 꾀하면서-이로 인해 그의 사회학은 메타사회학적인 성격을 갖는다.-구조주의와 현상학을 종합해내고 있다. 그의 이론중에서 핵심적인 개념은 아비튀스와 상징자본이다. 아비튀스는 무의식적인 가치판단이 내재된 개인의 성향, 취향등을 일컫는다. 즉 취미, 직업선택, 여가의 활용, 소비생활등 우리의 일상전반에 틈틈이 개입하는 의식, 그 바탕에 깔린 무의식적 체계가 ‘아비튀스’이다. 바로 이 ‘아비튀스’ 개념으로 인해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기존 구조주의와 일정한 선을 긋는다. 주체의 형성에 그가 속한 사회구조가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고 보는 구조주의의 일방통행적 관점에 비해 부르디외는 그 역의 과정, 즉 주체가 어떻게 구조를 만들어내는지에 주목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부르디외가 탈 구조적이라 단정짓기는 어렵다. 부르디외의 사회학과 구조주의의 개인은 결국 그 사회구조의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르디외가 공격하는 것은 구조주의가 아니라 구조주의적 방법론이다. 주체가 없는 선험적 구조라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부르디외가 제안하는 것은 그러한 구조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또 유지되는지 귀납적으로 추적해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구조가 주체의 형성에 관여한다는 구조주의적 관점은 여전히 중요한 전제이다. 문제는 방법론의 차이다. ‘사회학의 사회학’, 즉 메타사회학이라 평가받는 부르디외 사회학의 특성은 바로 위와 같은 이유에 기인한다.


1. 아비튀스

부르디외 사회학의 핵심개념인 ‘아비튀스’는 개별주체의 모습으로 육화된 사회구조를 뜻한다. 그리고 이 ‘아비튀스’가 주체의 몸을 빌어, 또는 그의 의식적 선택에 힘입어 구조를 재생산해내는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프랑스인들의 생활양식분석을 통해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부르디외의 분석에 따르면 나뉘어진 계급에 따라-이 때의 계급구분은 맑시즘에 그 기준을 두고 있지만 그가 새로이 도입한 ‘상징자본’의 개념으로 인해 그 기준이 정통 맑시즘에서처럼 물적 자본의 소유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상징자본’에 대한 논의는 뒤에서 상세하게 이어질 것이다.-그 구체적인 생활양식은 상당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기본적으로 소유의 차이 때문에 그러한 소비행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전제하고라도 상층계급은 단순히 값비싼 것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희소성을 기준으로 소비재화를 선택하고 그것을 하층계급과의 차별화의 전략으로 삼는다. 물론 그것이-즉 차별화의 전략이-온전히 의식적으로 선택되는 것은 아니다. ‘아비튀스’는 무의식적 체계라는 것을 기억하자. 개인의 몸가짐, 취미, 성향 등은 어릴 때부터의 사회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며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무의식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를 유지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상층계급의 경우 가정교육, 사립학교에서의 교육 따위를 통하여 그 기제는 세습화된다. 과거의 귀족들이 그에 걸맞는 소양을 갖추기 위해 어릴 때부터 불어를 배우고 피아노교육을 받았던 것이나 영국의 이튼스쿨같은 것이 그 예가 될 수 있다. 한편 하층계급의 경우에도 이와 같은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층계급은 그들 계급 나름대로 자기들만의 하위문화와 언어습관-비속어, 은어따위-, 생활양식을 가진다. 이 때 하층계급의 문화는 상층계급과 달리 차별화의 전략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빈곤한 경제사정 탓이 크다. 즉 상층계급이 옷이나 화장품 따위의 소비재화의 선택에 있어-그들에게 비용은 그리 중요치 않다. 이미 충분하다- 심미성과 희소성을 우선한다면 하층계급에 있어서 선택의 기준은 비용의 경제성과 더불어 실용성이 첫째가 된다. 이러한 차이로 말미암아 상층계급은 외모의 치장에 막대한 비용을 들인다고 부르디외는 지적한다.(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비교우위인 것이다.) 한편 이러한 차별화의 전략은 하층계급으로 하여금 상층계급의 문화를 향유하고 모방하게끔 만든다. 하층계급은 상층계급과 같은 재화를 소비함으로써 계급상승에 대한 무의식적 열망을 드러낸다. 샤넬이나 루이비통, 프라다와 같은 고급외제품의 모조가 서민들 사이에 유행하는 것이나 젊은 여성들 사이에서 명품중독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위와 같은 맥락에서 그 원인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 때 품질이나 심미성보다는 상표가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러한 차별화의 전략은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불리는 광고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일례로 이동통신회사인 011의 광고전략을 보면 계급상승에 대한 무의식적 욕망을 잘 이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동전화 시장에서 011이라는 번호는 중, 장년층이 애용하는 번호라는 기존이미지에서 탈피, 타 통신과는 다른 셀룰러방식에 기인한 높은 통화료를 고급화 전략으로 연결시키고 있다. 최근의 미술관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011의 광고는 이 점을 확인시켜주고 있는데 화랑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의 번호를 ‘011이시죠?’ 라고 당연한 듯 확인하는 것이 이 광고의 내용이다. 여기서 ‘화랑’이란 장소의 상징성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먹고 살기에 빠듯한 서민들로서는 주말에나 시간을 낼 수 있는 여가활동이란 것이 주중에 밀린 잠을 자거나 그나마 값싸고 손쉽게 즐길 수 있는 텔레비전이나 영화, 즉 대중매체에 국한되어 있는 실정이다. 반면 그림감상이라는 취미활동은 통상 고급함의 이미지를 환기시킨다. 이 광고는 기존 011가입자들에게는 광고 속의 인물이 표상하는 상층계급이 된 듯한 심리적 만족감, 자긍심을 주는 동시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저것, 011이라는 번호를 소유함으로써 그들 무리에 끼고 싶다는 상승욕망을 부추긴다. 하층계급이 상층계급의 문화를 지향하고 여러 가지 혼합문화, 변종장르를 만들어내는 것과는 달리 그 역전현상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것은 차별화의 기능을 수행하기는커녕 외려 그 경계를 없애는 까닭이다. 예외적인 경우가 없지는 않다. 판소리와 같은 것들은 하위문화가 상위로 거슬러 올라간 것인데 한문어구의 사용, 고사의 삽입 등이 더해져 상층의 취향에 맞게 수정되었다. (이러한 수정은 거꾸로 상층문화가 하층문화와 결합되는 과정에서도 동일하게 이루어진다. 문화의 이동에서 텍스트의 고유성은 그것의 제대로 된 적용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변질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의 향유도 역시 대단히 선택적이고 배타적으로 이루어져 결국 그들만의 문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민중들의 노래인 고려가요가 조선시대에 들어 유교이념에 맞는 것만이 선택되고 또 애초의 그 내용이 변질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양반이 판소리를 즐기기 위하여 장터를 찾은 것이 아니라 소리꾼이 그들을 찾아야 했고 때로 양반이 가난한 예술가를 후원하는 패트론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위와 같은 예에서도 하층계급과 같은 신분의 이동, 즉 더불어 낮아지겠다(?)는 욕망은 찾아 볼 수 없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런 장면을 볼 수 있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귀족인 여주인공이 애인을 따라 서민들의 파티에 참가하여 군무를 추며 그들의 습속을 익히는 것은 정확히 그녀가 속한 귀족사회에 대한 반발의 의미를 띠고 있다.  
아비튀스는 무의식적 체계이기 때문에 의식과 모순되는 경우가 없지 않다. 입으로는 페미니즘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의 애인으로는 전통적이고 순종적인 여인상을 찾는다거나 불평등한 계급구조에는 분노하면서 상층계급임을 드러내주는 장식들-비싼 옷, 화장, 악세사리 등-에 관심을 보이는 예등을 들 수 있다. 위의 것들은 단순히 개인의 취향 문제라고도 할 수 있지만 부르디외의 ‘아비튀스’이론에 따르면 비록 의도한 것은 아니더라도 일상의 행위양식 하나 하나에는 사회 정치적 함의가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가 좇는 신념이 진정성을 얻으려면 구호가 아니라 생활에서 그 원칙이 관철되어야 할 것이다. 정말로 그것을 추구한다면 그에 반할지도 모르는 자신의 정치적 무의식에 대한 점검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라는 물음을 부르디외는 제기하고 있는 셈이다. 부르디외의 말대로 구조를 이루는 것이 몸짓과 관습화된 생활양식으로 그것을 재생산해내는 주체라면 작은, 깨어있는 실천으로 새로운 꿈의 구조를 이루어낼 수 있는 것도 또한 주체가 아니겠는가?


2. 상징자본

‘아비튀스’는 일상의식의 모태로서 문화에서뿐만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 걸쳐 그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학문의 영역에서도 이는 예외가 아니다. 부르디외에 따르면 어떠한 관점에 대한 지지는 엄밀한 사고에 따라 이루어지기 보다는 그 자신의 ‘아비튀스’에 기반한다는 것이다. 드러내놓고 말하자면 어떤 선택도 기본적으로는-자신은 비록 의식하지 못한다해도-자신의 사회 계급적 이해에 일차적으로 종속된다. 여기서 ‘상징자본’이란 말이 거론되는데 상징자본이란 자본(생산수단)의 소유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명예, 평판, 또는 학위와 같은 지적능력의 인증까지 덧붙여진 포괄적 개념이다. 사회적 명망이라든가 지적 능력 따위는 당장의 재화로 기능할 수 없지만 실제적인 재화의 소유를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무형적 자산이 되는 동시에 그러한 소유를 정당화해주는 권력의 바탕이 된다. 도덕성에 대한 좋은 평판, 우월한 지적 능력 등을 인정받음으로써 지배-피지배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혹은 그러한 지배구조의 은폐를 기도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부르디외는 이러한 상징자본의 역할을 과거 봉건 사회에 적용하여 설명한다. 지주는 흉년에 곡물을 나눈다거나 도지세를 감해주거나 하는 관용을 베풂으로써 지주-소작관계를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고 그 안의 부당함은 감추어왔다는 것이다. 지주의 관용과 베풂은 어떠한 대가도 바라지 않는 아름다운 나눔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를 도덕적, 관습적으로 강화하려는 고도의 계산된 저의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잠깐 부르디외의 관점에 따라 박경리의 소설 ‘토지’를 분석해보자. 평사리의 지주인 최참판 댁은 일제의 강점을 거쳐 815해방에 이르는 부침의 세월동안 평사리의 정신적 지주노릇까지 겸하게 된다. 중간에 잠시 조준구가 간교한 책략을 통해 원주인인 최서희 대신 평사리의 토지를 차지하게 되지만 소작농들 사이에서 덕망을 쌓는데 실패함으로써 그 전 최참판 댁이 누렸던 마을공동체의 수장이라는 상징적 지위에까지는 오르지 못한다. 소설 ‘토지’가 훌륭한 민족문학의 전범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그러한 봉건적 공동체의 모습을 이상화할 뿐 그것의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적 지배구조의 모순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은 일정한 한계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온전히 작가의 역량이 미흡한 탓이었다고 만은 할 수 없다. 한국의 경우 일제의 지배과 근대 자본주의로의 이행이 동시에 이루어진 탓에 ‘민족’의 문제에 우선 마음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역사적 조건에서 비롯한 한계랄 수도 있겠다.    


3. 사회학의 사회학

부르디외는 학문연구에 있어서의 ‘인식론적 단절’을 강조하는데 그 까닭은 뚜렷한 학문적 입장의 견지에 엄밀한 사고 대신 앞서 얘기한 바와 같이 자기 이해에 기반한 아비튀스의 장안에서 그러한 지지가 이루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안에서 각자는 자신의 학문적 이론을 정전으로 만듦으로써 상징자본을 확보하려하고 이는 권력다툼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부르디외의 사회학을 ‘사회학의 사회학’이라고 규정짓게 하는 것은 비단 기존 학문연구방법에 대한 회의에서뿐만 아니라 바로 이와 같은 분석에서도 기인한다. 부르디외는 으레 ‘객관적’이라 여겨지기 마련인 학문에 과연 개인의 욕망에 바탕을 둔 ‘주관성’의 혐의는 없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부르디외가 구조주의와 현상학, 양자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두면서 이의 성과들만을 종합하고 있긴 하지만 ‘아비튀스’개념이 사회구조의 재생산으로 귀결된다는 점에서 처음에서 밝혔듯 결정론적 구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비튀스’ 라는 개념으로는 사회의 변동을 적절히 설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부르디외는 사회변동이 ‘가치관의 전도’에 있다고 설명하지만 그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그의 설명은 간략하고 모호하기 짝이 없다. 이는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대로 그의 관심사가 사회구조의 재생산과정에 모아져 있는 탓이다. 따라서 부르디외의 이론은 하위문화의 저항적 성격이랄지 그것이 불러오는 사회변동의 서술에는 매우 취약하다. 하지만 부르디외의 이론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현실에 마주해있는 우리에게 유용한 깨달음을 준다. Big brother는 어떤 가시적인 권력의 모습만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주어진 상태에 대한 묵종이 아니라 끊임없는 깨어있음이 인간됨의 조건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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