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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게시물엔 부산에 있는 전시도 함 넣어봤다. 가기 힘드리란 것은 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이런 짓도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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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여행
박현주 회화展
2004_0427 ▶ 2004_0506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61×61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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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27_화요일_05:00pm
아트포럼 뉴게이트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1-38 내자빌딩1층
Tel. 02_737_9011
마음의 여행 ●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박현주의 회화는 묵화에 있어서 고대 동양 전통의 전승인 동시에 이탈이라고 할 수 있다. 과거의 많은 미술가와 마찬가지로 박현주는 자신의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서 갈아 쓰는 먹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먹은 그림에 있어서 흑과 백의 이분법을 조성하며 특히 박현주의 그림에서는 백이라기보다는 '밝은' 부분과 흑과의 이분법을 조성하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와 유사한 이분법은 그녀의 선배들의 회화에서도 볼 수 있다. ● 그러나 여기서 박현주의 차별성이 시작된다. 백색 종이에 붓으로 흑색 먹선을 사용하는 대신에 그녀는 먹으로 표면을 완전히 흑색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그녀는 작은 은빛 못과 머리털(실제 및 인조의)을 마치 자신의 붓인 양 흑색 표면에 사용하였다. 즉, 완전히 흑색의 면에 '백색'을 사용한 것이다. 과거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하여 박현주의 그림은 붓과의 순간적인 일체성 또는 삶의 순간적인 지남을 포착하려는 시도가 덜하다고 볼 수 있다. 그 대신에 박현주의 작품은 우주 안의 인간의 생명의 존재 그리고 인간과 자연세계와의 관계를 더욱 중시하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61×61cm_2004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61×61cm_2004
관람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박현주의 작품은 '은하수', '성운' 또는 '유기적인 허물'이라고 묘사되며 이는 작가가 단 하나의 작품 속에 인간 및 자연세계를 담고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머리털을 선택한 것은 초기 작품에서 자신을 개입시키고 나중에는 작품세계에 보편적 인간 요소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은빛 못은 그림에 있어 색다른 질감과 층뿐만 아니라, 빛과 어둠의 대조라는 또 하나의 차원을 부가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작가에게 이러한 것들은 자연에 내재하는 힘의 하나인 물의 요소를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61×121cm_2003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121×82cm_2004
작가는 자신의 모든 화폭 안에 동양의 전통적인 요소를 전부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요소들 즉, 금목수화토(金木水火土)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고 이러한 요소들이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좋다고 믿어진다. 표면은 목(나무)이고, 못은 화(불)와 금(금속)이며, 먹은 토(토양: 색소)와 수(물)가 혼합된 것이고, 불에 그을린 종이는 화(불)와 목(나무)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각기 작품을 물리적으로 구성할 뿐 만 아니라 전체적인 구성에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더해준다.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82×121cm_2003

박현주_무제_목판에 머리카락, 못, 인디아 잉크_61×183cm_2004
이번 전시회에 출품된 작품들은 매우 추상적인 것으로부터 형상을 연상시키는 것까지, 그리고 '화폭'의 전면을 덮고 있는 형태로부터 배경에만 단지 머물고 있는 형태에 이르기까지 박현주의 변형을 보여주고 있다. 이 작가는 이와 유사한 작품들을 이전에 뉴욕시의 치(氣)갤러리, 뉴욕의 엑싯 아트(Exit Art)갤러리, 뉴욕과 런던에서의 어포더블아트페어(The Affordable Art Fairs) 그리고 미국, 한국, 일본 등에서의 여러 전시회에서 출품한 바 있다. 그녀의 작품들은 어둠 속에서의 빛의 변화, 자연 속에서의 인간 존재의 변화, 그리고 이 두 가지 요소가 우주 내에서의 변화와 마찬가지로 변형하고 있다. ● 이번 전시회는 박현주의 고국인 한국에서 갖는 최초의 개인전이다. 뉴욕 미술계에서 그녀의 작품이 발전되는 모습을 지켜봐 온 한 사람으로서 본인이 그녀의 카탈로그의 서문에 글을 쓰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 트레이시 코세이-제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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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개 없는 영역-사물·그리기·체험
책임기획_부산시립미술관
2004_0427 ▶ 2004_0615

이태호_바람소리_먹, 목탄, 네모파스텔_150×215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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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4_0427_화요일_04:00pm
박승순_박영대_안희숙_윤은정_이강욱
이종목_이태호_정은유_최용석
부산시립미술관 2층 대전시실
부산 해운대구 우동 1413번지
Tel. 051_744_2602
말의 길이 끊어진 곳, 그곳에서 그림의 길이 열리고, 그림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 정교한 말의 장치와 나긋한 논리가 아니라 말이 들어설 수 없는 자리, 체감으로 와 닿는 세계, 그곳에 그림이 있는 게 아닌가. 사물들이 감각 자체로 말할 때, 그것을 몸으로 느끼는 것, 그런 것이 우리를 감동시키는 게 아닐까. 전화로, 편지로, 메일로, 영상으로 보내는 고백보다 골목길 어귀에서 가만히 손을 잡아보는, 손안 가득히 다가오는 그 체감,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그런 체감이 그림 그리기이고 그림 보기가 아닐까.

윤은정_무제_캔버스에 목탄, 유채_97×162.5cm_1999

정은유_Akt VI_캔버스에 유채_350×160cm_1997
형태에 얽매여 있는 사물이 아니라 '존재가 갑작스럽게 폭발해 나오는' 순간의 사물 즉 순전한 내용을 지닌 사물"을 드러내는 것, 이것이 매개 없는 그리기에서 나오는 것이다. 참여작가들의 작업에서 매개의 도움이 가장 적은 형태의 그림 그리기를 본다. 형태가 감성에 기초한 것이긴 하지만 사물이나 형태가 아니라 내용을 지닌 사물로서 스스로 드러나는 그런 힘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말하자면 그것은 작가의 의지나 보는 이의 감성적 만남보다 앞서서 질적으로 충만한 사물, 알 수 없는 깊이를 본원적으로 갖추고 있는 사물, 그것에서 형태와 공간과 양감과 장소성이 솟아오르고 있는 사물로 그려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사물을 재현하는 것, 빛에 드러난 덮개를 그리는 것이 아니라 깊이를 가진 사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그것도 매개 없이 순정한 그리기에 의해 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체취를 가장 가까이 느끼게 하면서 세계를 만나게 되는 그런 순간들을 우리에게 제시해주는 것이다.

최용석_더이상 내가 아니다 II_종이에 목탄_200×300cm_2003

이강욱_네개의 병_종이에 콘테_76×57cm_2004

박승순_자연의 장_혼합재료_130×130cm_2001
대상은 이제 더 이상 반사의 덮개가 아니고 대기와 다른 대상들과의 관계 속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대상은 내부에서부터 은근히 밝혀지는 것처럼, 그 자신에서 방출되는 빛처럼 존재한다. 거기에서 대상은 견고성과 물질성의 인상을 낳는다. 그림은 그림으로서 존재성을 가지고 자신의 빛을 가지는 것이다. 인간에 의해 구성된 것이지만 그 스스로 존재하는 깊이에 의해 인간을 만나는 것이고 그림 스스로가 인간의 눈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것이 대상과 주체가 공존하는 매개 없는 영역에 새삼 주목하는 이유이다.

박영대_2004년 1월 9일 안성_한지에 수묵_150×210cm_2004

안희숙_淸溪行_장지에 먹_150×212cm_2004

이종목_Enterance of Mountain_한지에 수묵_150×105cm_2002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절묘한 떨림, 이것이 메를리 퐁티가 말하는 절대적인 지각의 모습이라면 가시성과 비가시성의 절묘한 떨림 속에 우리를 넣는 것,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매개 없는 영역으로서 그리기이다. ● 이것은 결국 그림을 세계와 삶을 펼쳐 보이는 시원으로 화면이 내게 와서 말하고 그가 사유하고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게 매개 없는 그리기의 체험이다. ■ 부산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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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만한 공간
OUT THE WINDOW展 ④ 일본
2004_0330 ▶ 2004_0513

타나카 코기_Tanaka Koki_by chance(2 ducks)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30:00_2003_일본
한국_권오상_김창겸_이형구_이용백_조이수_한계륜_전준호_김기라_구자영_김준_김용경_노재운_박혜성_박지훈_박준범_류비호_서보형_신용식_윤미연 ● 일본_Nakanosai Toshihiro_Pol Malo_Sasagushi Kazz_Tanaka Koki_Bowda Katsushi_Furukawa Koichi_Goshima Kazuhiro_Hayashi Yuki_Hino Keiko_Ise Shoko_Kimura Mayumi_Kobayashi Kohei_Koizumi Meiro_Okado Mikio_Saito Masakazu_Sato Yoshinao_Shimada Masamichi ● 중국_Li Yongbin_Shi Qing_Zheng Yunhan_8gg_Cao Fei_Fao Kai_Chen Dili_Cui Xiuwen_Du Jie_Ou Ning_Wang Ning_Wu Ershan_Wu Quan_Yang Fudong_Zhang Dan & Chen Man_Zhao Liang_Zhou Xiaohu
기획_리 젠화 Li Zhenhua_서진석 Suh Jinsuk_스미토모 후미히코 Sumitomo Fumihiko
주최_The Japan Foundation_Darling art Foundation
프로젝트 스페이스 집
서울 강남구 신사동 534-13
Tel. 02_3446_1828
흔들리는 (창)의 경치 ● 오늘날 새삼스레 사진이 없는 세계에 대해서 당신은 상상할 수 있는가?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어디에 사진이 있는가 라는 것을 의식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들의 사회에 깊이 침투하고 있으므로 그 부재를 상상하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가족이나 친구와 찍은 여행사진이나 신분증명서는 말할 것도 없이 신문이나 잡지의 기사나 깡통의 라벨, 사건현장의 검증, 미술사 연구의 비교자료, 자연조사의 관측 결과 등 사진은 그 어떤 공간에건 넘쳐 있다. ● 이러한 사진이 현대의 우리들 생활에 있어서 커다란 편리성을 가져다 주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무엇인가를 지각한다는 경험이 사진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바뀌어 지고 말았다면 사진의 어떤 역할에 의해서 일까. 그것은 아마도 과거의 사건이나 먼 장소에서의 사건에 대해 의심을 제거할 수 있는 증거이기 때문이 아닐까? 즉 단순히 무엇인가를 전달하는 역할보다는(전에-있었던) 무엇인가의 물리적 흔적으로서의 역할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사진의 탄생이래 인화지에 찍혀있는 것은 물리적인 흔적이기 때문에 십분 믿을 수 있는 사실이라는, 그 명증성이 뒷받침된 정보가 일거에 증대했다. 19세기 이후에 일어난 과학이나 군사 면의 비약적인 기술발전에 대해 사진이 발휘한 명증성은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사진을 믿는다는 것은 19세기 당시의 사람에겐 그렇게 쉽사리 받아 들여졌던 것은 아니었다. 사진이 아직 움직이는 대상을 포착하기가 어려웠던 시절 가장 완벽하게 촬영되었던 건 초상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록으로서의 촬영을 희망한 것이 아니라 보다 아름답고 늠름하게 보이기 위해 수정을 가하기를 원했었다. 있는 그대로의 자기의 신체를 그대로 보기에는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새로운 미디어의 탄생과 그것을 수용하는 지각간에 겉도는 차이가 발견된다. 또 동시에 사진은 직접 갈 수 없는 원격지나 과거의 이미지를 명명백백하게 현존시켰다. 여행자가 얘기하는 말로서나 문헌 속에 기술된 것으로 밖에 알 수 없었던 때에는 멀리 우러러 볼 대상 이였던 것이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 세부까지 손에 잡듯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 실로 당연한 노릇이지만 세계는 자기가 존재하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직접적인 경험으로서 알게 되었다.

시마다 마사미치_Shimada Masamichi_Untitled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4:23_2002_일본

오카도 미키오_Okado Mikio_hierophanie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9:00_2002_일본

사토 요시나오_Sato Yoshinao_THE BOOKS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6:00_2001_일본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볼 수 없었던 스스로의 신체나 시간이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현실감을 가지고 수용하기가 어려웠던 대상-두개의 양극이 단숨에 같은 지평에서 혼합하여 지각되는 경험에 의해 그때까지의 안정된 지각의 질서는 크게 흔들리게 되었던 것이다. 지각하는 인간을 소실점의 접점에 둔 원근법적 공간에 의해서 서구사회에 있어서는 안정된 인식의 질서를 지켜 왔다. 이 인식방법을 밑바탕에 깐 세계의 재현을 지향했던 게 르네상스기의 회화이며 Leon Battista Alberti는 회화를 세계를 바라보는 창(Window)이라 칭했다. 이 창이라는 인터페이스는 부동의 한 점에서 합리적인 공간을 형성하는 것으로서 사람들에게 인식의 틀을 주고 그림자가 되어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겹쳐지는 주름살, 움직임이 있는 것이나 변용하는 것, 그리고 창틀의 바깥쪽의 영역을 지각의 주변으로 내몰았다. 깊이가 있는 3차원의 세계를 2차원의 평면으로 치환하는 수단은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인식을 고정화시키고 있다. 영화의 스크린도 텔레비전의 화면도 창을 본뜬 형태를 보유하고 더 나아가 컴퓨터의 디스플레이 상에 나타나는 화면도 창(Window)라 불려지고 있다. 디지털화한 정보에 있어선 창의 모습을 한 인터페이스가 본래 필요했던 건 아니다. 자기의 초상사진에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같이 새로운 테크놀러지가 가져다주는 정보에 대해 사람들은 지각을 즉각 대응시켜 나갈 수가 없다. 1990년 이후 비약적으로 사회에 침투하고 있는 디지털 기술을 바탕으로 한 뉴미디어를 둘러싸고도 우리들은 많은 경우 과거의 미디어에 의해 습관 지어진 동작으로 대응하고 있다.

보다 카수시_Bowda Katsusi_Bowda Works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5:00_2002_일본

기무라 마유미_Kimura Mayumi_Virtual Sanctuary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18:00_2002_일본

고시마 카스히로_Goshima Kazuhiro_FADE into WHITE #4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19:00_2003_일본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인다. ● 1930년대에 구미 각국은 레이더의 기초기술을 개발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실제로 그 사용이 가능해졌다. 레이더는 그 감시하는 대상의 위치를 리얼타임으로 알리는 장치이다. 그것은 이제 흔적이 아니라 동시에 일어나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사건인 것이다. 레이더가 점멸하는 신호와 실제의 대상을 동시에 보고 비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그것이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일이란 것을 그 자체가 나타내주지 않기 때문에 외적 요인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재 우리들이 매일같이 눈으로 대하는 컴퓨터가 생산해 내는 정보도 이런 흔적 없는 이미지이다. ● 구체적이며 좀 더 친근한 예를 들자. 웹 브라우저를 사용하고 있으면 온갖 종류의 정보에의 액세스가 가능한 듯한 착각에 쉽사리 빠지게 되지만 때로 신용할 수 있는 내용인지 의문이 드는 웹사이트에 가 닿게 될 것이다. 자본이나 권력의 차를 최소한으로 하고 무명의 개인이 대등하게 정보를 발신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실제로 큰 건물을 가지고 있는 회사라든가 신문에 게재되고 있기 때문이라든가, 외적요인을 신용의 뒷받침으로 삼을 필요가 생겨 날 것이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거기에는 무수한 쓰레기 같은 정보 사이를 누비면서 믿을만한 정보, 진정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자기가 판단해 가는 가능성도 크게 열려져 있다. ● 「The Language of New Media」를 서술한 Lev manovic 은 일반사람들에게 표현의 제작과 발표, 유통까지를 가능케 하는 컴퓨터의 등장과 이를 바탕으로 한 뉴-미디어가 기존의 사회를 크게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이유로서 오픈소스라는 수단을 들고 있다. 특정의 조직이나 국가, 직능에 패쇄 되어져 있던 '소스'가 열려지는 것은 기존의 인식을 위해서의 하이어라키(hierarchy)를 해체시키고 말 것이다. 보이지 않는 부분을 밝힘으로써 특정의 기업이나 조직이 아니라 더욱 많은 사람들이 보다 좋은, 보다 개별적인 이용에 상응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해 간다. 사진도 세계를 회화로서 그릴 수가 없는 일반인에게 재현-표상의 수단을 주었다. 그리하여 축적된 방대한 수의 이미지가 여기저기에 있다. 그것들을 일일이 촬영자나 촬영의 의도를 참조하면서 감상하기보다 우리들은 ‘이미지의 아카이브를 어떻게 사용 할 것인가’ 라는 쪽에 관심을 깊이 갖고 있다. ● 즉 과거의 미디어에 속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사진에 의해서 우리들은 이미 그것을 위해서의 훈련을 경험하고 있다 사진의 이미지는 외부에 설명의 캡션을 갖지 않는 한 사실 무엇을 찍고 있는지 명확하지 않다. 한 장의 사진 속에 찍혀 지는 갖가지 요소, 의자에 고개 숙이고 있는 여성인지 그 양복인지 혹은 비극의 한 장면인지 또는 진귀한 벽의 장식을 거기에서 보게 되는지 등 세부까지 실로 많은 정보를 보는 사람에게 주면서 해석을 기다린다. 때로는 흔히 보는 익숙한 풍경이 이상스럽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침묵하고 있던 것들이 얘기하기 시작한다. 보여 지고 있는 듯 싶었던 것들이 이쪽으로 시선을 돌려온다. 자연은 단일의 논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복수의 논리에 의해서 구성된다. 보는 것과 아는 것이 겹쳐진 인식론적 공간은 붕괴했다.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것들 쪽이 우리들을 되 쳐다보고 있다.

고이즈미 메이로_Koizumi Meiro_jap No. 2-Human Rights_단채널 비디오 영상_2003_일본

하야시 유키_Hayashi Yuki_Landscape Movie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15:00_2001_일본

고바야시 코헤이_Kobayashi Kohei_2-1-1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5:00_2001_일본
허허로워 지는 '나' ● 기억이란 인간의 밖에 있는 어떤 것이며 듣고 받아들이고자 할 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 무엇인가이다. 본질적인 것은 마음의 내부로부터가 아니고 글, 서적, 컴퓨터 등 외부로부터 유래한다. ● 뉴미디어의 특징을 큰 테두리에서 두 가지 정도로 기술하면 물질적인 것을 전자신호로 치환하여 끝없는 반복이 가능하고 방대해진 기억 창고를 검색/선택할 수 있다는 점, 하나의 환경(머신)으로 제작 발표 발신이 가능하며 프로/아마의 수직 방향과 갖가지 장르의 수평방향의 경계선이 더불어 무화된 점이 있다. 지금까지 기술한 바와 같이 이러한 특징은 테크놀로지의 단계적 진전에 의해서 전혀 새로이 초래 된 셈은 아니고 선행하는 미디어의 보급에 의해서 준비되어 왔던 것이라면 그 변화는 과거의 예술 속에서도 발견될 수 있을 터이다. 예컨대 플럭서스라고 하는 1960년대에 뉴욕을 주 활동 무대로 했던 그룹에 대해서 돌이켜 볼 것을 권할 수 있다. 플럭서스는 스스로의 작품이나 퍼포먼스나 이벤트에 있어서 물건으로 남는 작품이 아니고 행위를 위해서 컨셉을 특히 중시했다. 또 그들이 행한 일견 맥락이 없는 방대한 수의 이벤트나 작품, 전람회 등은 정연하게 알파벳순으로 진열된 두터운 데이터베이스 『FLOXUS CODEX』에 수록되어 있다. 중심적 역할을 담당한 George Maciunas는 이벤트의 구성, 각종 인쇄물부터 디자인이나 제작까지 혼자서 하며 그 어떤 역할도 해냈다. 퍼포먼스는 인스트럭션이 정해져 그것에 따라 실시된다. 그것을 밑천으로 삼으면 어디서든 누구나 플럭서스의 퍼포먼스를 행할 수가 있었다. 확연하게 존재하고 있었던 작자와 감상자의 차이도 애매해 졌다. 이러한 특색 속에서 뉴미디어가 재구성한 인간의 교감하는 점을 몇 가지 지적할 수 있다. 비물질적인 것을 중시하는 일, 나아가 하이어라키(hierarchy)가 없는 모든 것을 등가(대등하는 것)로 포함하는 데이터베이스의 지향, 또 보수의 아이덴터티로 찢겨지면서 상이한 영역간을 이동하는 것이나 도시의 군중 속에 파묻히는 것 같은 익명성의 댄디즘을 갖고 있는 점도 주목할 대목이다. ● 전통적인 미술의 역사로부터가 아니라 1960년대의 뉴욕이 구가하고 있었던 미디어와 산업이 만들어 내는 소비사회로부터 플럭서스의 활동이 육성되어 왔던 것은 그들이 리투아니아, 독일, 네덜란드, 일본, 한국, 이탈리아 등 다양한 민족 구성을 이루고 이른바 미국에서 주류였
던
포멀리즘의 계보로부터 자유스러운 주변적인 입장에서 창작을 시도한데서 이유를 구해도 좋을 것이다. ● 미디어와 산업이 가속화시키는 카피의 증식은 '나'의 경계선마저 위협하고 있다. 장기이식이나 인공수정 복제기술 등은 생 그 자체를 직접적으로 컨트롤한다. 그 결과 유일한 것이었던 '나'까지도 교환가 능해져 간다. ● 자기가 아닌 자기를 알게 되는 경험, 이것은 예전에 허식을 시행하고 싶었던 초기의 사진에 떠오르는 자기와 상대하게 되는 경험과 겹쳐진다. 카메라의 렌즈, 필름, 자기테이프이나 기억디스크는 소음이나 쓰레기 같은 온갖 정보를 극히 균질적으로 기록해 나간다. ● 그때까지 주변에 내쫓겨 있었던 것이나 그림자 속에 감추어져 있었던 것, 변화하고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들을 붙잡고 만다. 그러나 첨언해야 한다. 새로운 미디어는 우리들에게 그동안 고정적이었던 의미를 유동화 시키는, 교환 가능성이라는 경험을 초래하는 한편에서 이동이라는 또 하나의 수단을 초래한다. 이미 원근법적 공간의 소실점에 안주하지 않고 우리들은 움직이면서 숨겨진 의미를 찾아내고 사라져 없어지는 것을 머물러 두게 해야 할 것이다.

히노 케이코_Hino Keiko_.501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3:04_2001_일본

후루카와 고이치_Furukawa Koichi_Shinojima_단채널 비디오 영상_00:03:25_2002_일본
Let's get lost ● 어떤 전망 좋은 장소에 앉아 있을 때엔 자기를 둘러쌓고 있는 것은 단지 아무것도 없는 공간으로, 거기에는 실체가 없다고 느껴지는 것은 흔한 감각 일 것이다. 그러나 남쪽 섬에서 한밤중 혼자 어둠 속에 서 있다 보면 습한 공기 속에 옴직거리는 갖가지 것들이 예민하게 지각되고, 아무것도 있을 리가 없는 주위가 농밀한 검은 덩어리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손앞에 있는 나무와 저쪽 깊은 숲속이 전후 관계도 판단 불능한 정도로 깊은 어둠 속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서걱서걱 움직이는 동물이나 곤충의 소리가, 처음에는 듣기 힘드나 서서히 예민함을 띤 음성이 되어 들려온다. 또 활발한 빛 합성을 끝마친 식물들로부터 나오는 냄새가 은근히 떠올라 온다. 전적인 어둠이 확실한 볼륨을 갖춘 무엇인가로 떠올라 온다. 그/그녀에 있어서 거기 떠오르고 있는 것은 어떤 이미지 같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미지란 결코 시각적인 것일 뿐만이 아니라 청각 촉각 취각 등을 포함한 이른바 공감각적인 경험이다. 똑바로 어둠을 직시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자기의 신체의 경계가 녹아 내리는 것 같은 기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어둠에는 의식을 집중시키는 대상이 없다. 그 산만함 속을 헤집듯, 이미지를 전신으로 파악하게 되는 듯 싶은 것은 감지하는 그/그녀 쪽이 지각을 환경에 순응시켜 예민해져가기 때문이다. ● 이미지가 인간의 지각을 능가하고 있어서 대상과의 거리를 유지할 수 없는 근접함의 시대에, 그것을 찾아 헤매듯 해서 무엇인가를 파악하는 몸부림은 현기증이 일어나는 듯 싶은 수의 웹사이트간을 오갈 때나 작자나 타이틀이 불분명한 음악이나 영상을 넘쳐나듯 받게 될 때에는 우리들이 이미 몸에 지녀나가기 시작하고 있는 습관이다 이 때 루츠가 정해져 의미를 충만 되게 한 것들은 인간의 일방적인 인식의 창틀로부터 자유스럽게 해방되고 있다. ● 사진의 탄생에 발단한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인간의 인식하는 세계에 '불안'을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모습을 변모시키고 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새로운 진화를 대망하는 것도 예전의 안정을 재 소환하는 일도 필요치 않을 것이다. 미디어와 우리들의 지각사이에 놓여있는 틈새는 세계의 모습을 다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풍부한 경험을 가능하게 해준다. 적극적으로 현기증이 일어날 정도인 이미지의 홍수 속에 몸을 잠겨, 자기를 잃어버릴 정도의 경험을 거침으로써만이
습관화된 지각을 밖으로 던져 버릴 수가 있을지도 모른다. ■ 스미도모 후미히고_Sumitomo Fumihi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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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연금술
책임기획_국립현대미술관
2004_0424 ▶ 2004_0627 / 월요일 휴관

최두수_A Sign for Short Sweet Magical Time_혼합재료_설치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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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우_권재홍_김범_김수진_김시하_김홍주_노상균_박계훈
박불똥_안규철_안윤모_이동욱_이인희_이재효_정경연_정소연
조병왕_조성묵_주재환_차경화_최두수_최정현_함진
전시 설명회_2004_0424~0627_제2전시실 / 토요일_02:00pm / 일요일_01:00pm/04:00pm
관람료_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미술ㆍ밖ㆍ미술』展 동시관람
일반_2,000원 / 할인_7세~18세_1,000원
무료_65세 이상 및 7세미만 / 유아는 보호자 동반시 관람허용
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산 58-1 국립현대미술관
Tel. 02_2188_6000
20세기의 벽두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은 일상 속에서 만나고 이용하게 되는 하찮은 사물들을 아주 다양한 방식으로 미술에 도입해왔다. 입체파의 콜라주에서부터, 미래주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다다, 초현실주의, 추상표현주의, 누보 레알리즘, 팝 아트, 아르테 포베라,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일상 속의 사물과 미술이 만나왔던 양상을 추적하다보면, 우리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고스란히 되밟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미술 속에 등장하는 일상의 사물이 보여준 변전의 모습은 그 자체가 바로 현대미술의 역사인 것이다. ● 『일상의 연금술』전의 핵심을 이루는 개념은 제목에 드러나듯, '일상'과 '연금술'의 두 가지 주요어이다. '일상'은 앞서 제시하였듯, 본 전시가 미술 속에 끌어들여진 일상의 사물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나타낸다. '연금술'은 이미 마르셀 뒤샹, 요셉 보이스 등 현대미술의 주요 거장들을 익히 사로잡았던 개념인 바, 예술가들의 작업과 상상력을 통해 범상한 사물이 비범한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는 현상에 주목한 용어이다. ● 20세기의 현대사회는 산업사회로 불리는 만큼, 오늘날 우리가 일상 속에서 흔히 접하게 되는 사물들은 대부분 산업생산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이 전시에서도 이러한 현대사회의 대량생산물들에 주로 주목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사회는 이제 산업사회로부터 정보화사회로 옮아가고 있기에, 산업적으로 대량생산된 사물에 관심을 갖는다는 사실이 철지난 것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삼스러이 사물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이러한 이행의 와중에 미술에 있어서 '사물'의 문제에, 마침표는 아니라 하더라도 쉼표정도는 찍어주고 넘어가야 할 때가 오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먼 미래의 미술사에서, 지금 우리의 시대는 사물로서의 예술에서 정보로서의 예술로 옮아가는 전환기로 기록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조성묵_커뮤니케이션_식용국수, 전등_설치_2003

노상균_부처의 장갑_폴리에스터 레진과 유리섬유 위 시퀸_가변크기_2002~2003
한국의 작가들이 반예술의 의도를 가지고 집단적인 움직임을 통해 일상적 사물을 도입한 것은 1967년에 이르러서였다. 이 해에 「무동인」, 「오리진」, 「신전(新展)」이 연합하여 개최한 『청년작가연립전』은 한국현대미술에서 일상의 사물이 차지하는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에 「AG」, 「ST」, 「앙데팡당」 등의 집단으로 이어지던 이 흐름은 그러나 사회의 몰이해 속에서 잊혀지게 되고, 미술시장에서도 확고히 자리잡지 못한다. ● 당시의 미술에서 일상적인 사물이 대거 등장하는 현상은 한편으로 고도성장을 통해 산업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의 당시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강소, 이건용, 이승택과 같은 작가들의 작업에서 드러나듯, 당시 한국의 미술에서는 인공적인 사물보다 자연의 사물들을 활용하는 비중이 매우 크다. 이 점이 서구의 팝 아트나 누보 레알리즘과 크게 다른 점이라 하겠다. 이 시기 우리의 미술을 아르테 포베라나 모노하의 작품들과 더욱 가까워 보이게 만드는 이런 특질은 산업사회로 이행하는 단계의 모습과 전근대적인 환경이 혼재하고 있었던 사회상황과 일정 부분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 한국에서는 1960-70년대의 실험미술이 한때의 열기로 사라진 이후 단색회화가 주류를 형성하고, 80년대에 들어 미술계의 상황이 제도권 미술과 민중미술의 대립구도로 요약되면서 미술에 일상의 사물을 도입하는 것은 중심적인 문제로 떠오르지 못하는 상황이 전개된다. 다만 「TARA」, 「메타복스」, 「난지도」 등의 소집단들을 통해 조금씩 탐구되던 일상적 사물의 문제는 1990년대 들어 전면에 부각된다. 이러한 현상은 권영우, 조성묵과 같은 원로급 작가의 90년대 작품들이나, 임옥상, 박불똥 등 평면작업을 주로 하던 작가들이 오브제 작업으로 뛰어든 양상, 80년대의 소그룹 활동과 90년대의 소위 신세대미술운동을 통해 성장한 노상균, 이불, 최정화 같은 작가들의 급부상 등으로 드러난다. ● 우리의 미술사에서, 3ㆍ1 고가도로가 놓이던(1969) 시기의 관심사가 이제 철거되는(2003) 시대에 다시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은 우연이라고 하기엔 지나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박정희 집권기의 경제정책은 1979-80년의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변화하기 시작하였고, 1997-8년의 경제위기를 맞으면서 운명을 다하였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산업사회가 지식정보화사회로 변화
하고,
우리의 환경과 생태의 문제에 관심을 돌리게 되면서 '사물'에 대한 관심을 다시 한번 재고해 보아야 할 시점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 한국은 1980년대 후반에 3저호황기를 맞아 마침내 외채위기를 극복하고 무역흑자를 실현하게 되었으며, 80년대 전반의 구조조정과 그 후반의 누적된 무역흑자가 거품잔치의 재료를 넉넉히 제공하여, 1990년대의 한국사회는 꽤 오랫동안 거품경제의 단꿈에 젖어있게 되었다. 1980년대 이후 극소전자(Micro-Electronics)기술에 기초를 둔 반도체, 컴퓨터, 통신기기공업을 중심으로 첨단산업이 빠르게 성장하였다. 인터넷 이용과 전자상거래는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경제위기 이후 급성장하였다. 새로운 물결로서 대두한 지식정보화시대에서 한국은 출발이 늦었지만, 선진국과의 격차를 축소하여 21세기로 전환하는 시점에서는 선진국과 거의 동시대적으로 발전하고 있다. ● 이러한 상황은 고도소비사회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압구정 문화로 대표되는 소비문화가 사회에 자리잡게 되었다. 이들 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현실은 예술가들에게 새롭게 변화한 일상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한편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상징되는 동구권 몰락 이후,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종말은 거대담론/서사의 죽음을 이끌어내었고, 학계에서도 그 관심을 일상성으로 돌리게 만들었다.

최정현_네티즌_키보드, 마우스_80×80×50cm_2004

주재환_즐거운 껌 댄스_껌, 종이, 컬러보드_90×60cm_2004
한편 시야를 좀더 좁혀 미술계의 상황을 살펴보자면, 1988년 올림픽 개최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는 미술시장도 앞서 언급한 거품경제의 수혜를 입어 상당한 활황을 누렸다. 시장의 활발한 움직임은 생산자 측에서도 공급을 다양화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따라서 시장에서 여전히 회화나 조각이 거래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긴 했지만,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주류로부터 비껴나 있던 오브제 미술의 비중이 높아진 데에는 이런 상황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 한편 1995년에는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한국관을 개관하였고 전수천이 특별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에 광주 비엔날레가 창설되어 1백60만 명이 넘는 관람객을 동원하였다. 비엔날레와 관련한 활발한 움직임에서 감지되듯, 90년대 우리 미술의 발전은 미술계의 국제적인 흐름과 거의 동시대적으로 발맞추어 이루어졌다. 이는 특히 설치작업의 방법이 널리 확산된 것으로도 드러났는데, 화랑에서도 역시 설치작업들을 빈번하게 만나볼 수 있었다. 쿠르트 슈비터스 이래의 전통을 돌이켜 볼 때도 확인되는 바, 설치작업의 번성은 필연적으로 일상적 사물의 도입을 수반하게 된다. ● 또한 최근에 여러 전시공간들에서 교육과 연계된 각종 특별기획전들이 열리고 있는 점 또한 오브제 미술의 번성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방학기간들을 자주 겨냥하여 열리고, 마케팅의 측면이 매우 강해 보이는 이 특별전들 속에서, 대중적 친화력을 높이려는 의도와 결합된 오브제 작업들이 많이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의 한국미술에서 일상의 사물이 주요한 논점으로 떠오르게 된 데에는 대략 이와 같은 배경이 자리하고 있다. ● 1969-70년에 200달러 대이던 1인당 국민총생산이 5000달러를 넘어 10,000달러를 향해 달려가던 90년대에 우리는 어느 정도 안정된 생활 속에서 주변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게 되었고, 따라서 자연히 환경과 생태에 대한 관심을 높여갈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91년 낙동강 페놀 오염사건, 1996년 시화호 사건 등과 같은 사례를 통해 대표된다. 미술분야에서도 이러한 주제가 부각되었으며, 1993년에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열린 리사이클링 특별미술전이 주요한 실례라 할 수 있다. 산업쓰레기의 자원재활용을 주요 주제로 내건 이 전시에는 플라스틱 폐기물을 사용하는 토니 크랙이 참여했으며, 한국의 작가 중에서 조성묵, 임옥상 등이 참가했다. 산업사회의 부산물인 평범한 사물들을 예술작
품으로
재탄생시키는 정크 아트 류의 작업활동은 이런 배경 속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를 띠게 되기도 하였다. ● 현재의 시점에서 재탄생은 매우 중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재탄생은 죽음을 상정하고 있다. 이미 본래의 기능을 떠난 사물은 일단 그 생명력을 잃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사물로 제작한 미술은 우리 시대의 나튀르 모르트가 아닐까? 먼 훗날의 미술사에서, 우리 시대의 미술이 보여주고 있는 일상의 사물들은 산업사회가 저물어 가는 시기를 맞아, 서서히 죽음을 맞이해 가는 사물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향수를 담아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었던 것으로 해석될지도 모른다. ● 아니면, '재탄생'이 시사하듯, 죽음 이후의 부활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전개될까? 이 시대는 이전까지의 사물과는 다른, 새로운 사물이 등장하는 새로운 시대의 첫 장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회화나 조각이 여전히 굳건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듯이, 평범한 사물로 만든 미술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며 여전히 미술의 중요한 부분으로 자리하고 있을 것이란 전망도 가능하다. ● 어느 쪽이든 간에, 정보화사회로 이행하고 있는 와중에, 미술분야에서도 사물의 문제를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시점이라고 생각된다.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지켜보아야 하겠지만, 이제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 사물의 생과 사, 부활의 긴박한 드라마가 펼쳐질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재효_무제_고물, 용접_35×45×10cm_1992

이동욱_그린 자이언트_깡통, 혼합재료_15×8×8cm_2003
이 전시를 통해 펼쳐질 드라마는 작품제작의 방법론에 따라 조합/변형, 반복/집적 그리고 모조/가상의 3막으로 구성된다. 물론 이 세 가지 각각의 것이 칼로 잘라 나누듯 확연히 구분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며, 작가와 작품에 따라 두 가지 이상의 방법이 혼용되기도 한다. 작가와 작품의 분류는 상대적으로 그 성격이 두드러진 것에 따라 판단하여 묶은 결과일 뿐, 언제나 그래왔듯, 결코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 조합/변형_피카소 작 「황소의 머리」에서 자전거 손잡이는 황소의 뿔이 되고 안장은 머리가 된다. 생각지도 못했던 두 사물의 간단한 만남은 그 시각적 재치를 뽐내며 관람객을 미소짓게 만들고, 거장의 재기 발랄한 상상력을 느끼게 한다. 콜라주를 통해 일상의 사물들을 조합하고 변형시켜 신선한 조형적 체험의 세계를 열었던 장본인은 이렇듯 유희적인 조각적 결합에도 뛰어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사물, 이미지, 텍스트를 조합하고 변형시키는 이 같은 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작가들을 매료시키고 있다. ● 반복/집적_1960년대 프랑스의 작가들은 사물들을 그저 쌓아올리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미적 체험을 이끌어낼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후 많은 작가들은 일정의 단위를 반복함으로써 전체형태를 구성하는 방식의 작업들을 다양하게 탐구하였다. 특히 인위적 흔적을 최소화하는 미니멀리즘에서 기계적 반복은 창작의 중요방법론으로 자리잡았다. 규격화된 상품의 대량생산과 소비를 특징으로 하는 현대사회는 반복과 집적이라는 조형적 방법에 의해 은유 될 수 있다. ● 모조/가상_오늘날엔 현실보다는 가상의 세계가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진짜 곤충보다 문구점에서 파는 플라스틱 곤충이, 살아있는 쥐보다 미키마우스와 미니마우스가 훨씬 더 익숙하다. 이 사물들은 진실을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들의 일상임에는 분명하다. 최근에 많은 작가들이 이런 식의 일상과 이것이 주는 독특한 감성에 주목한다. 특히 오늘날의 환경은 젊은 작가들로 하여금 간접적인 체험과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현실에 관심을 갖도록 만들고 있다. ● 우리는『일상의 연금술』을 통해서, 사소하고 평범한 물건들이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상상력의 소산이 되어 귀중한 예술작품으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목격하게 된다. 이 과정은 20세기의 벽두부터 산업사회 속에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체제가 갖추어져 가는 모습을 반영해온 것이기도 했?
?
본 전시는 현대미술의 역사를 통하여 중요한 단계마다 개발된 혁신적 방법론들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변화와 맞물려 어떠한 방식으로 운용되어 우리 미술의 모습을 일구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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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ㆍ밖ㆍ미술
책임기획_국립현대미술관
2004_0424 ▶ 2004_0627 / 월요일 휴관

윤형문_효자동 이발사_컬러인화_140×12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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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수_권영호_권혁_구본창_금누리_김문생_김용호_김준섭_김중만_류재하
박명천_박영민_박재동_안상수_양영순_오형근_윤정섭_윤형문_이경진
이병복_정연식_조세현_최호철_피터정_한태호_홍승우
전시 설명회_2004_0424~0627_제1전시실 / 토요일_03:00pm / 일요일_02:00/05:00pm
관람료_국립현대미술관 제2전시실『일상의 연금술』展 동시관람
일반_2,000원 / 할인_7세~18세_1,000원
무료_65세 이상 및 7세미만 / 유아는 보호자 동반시 관람허용
국립현대미술관 제1전시실
경기도 과천시 막계동 산 58-1
Tel. 02_2188_6032
융통성 있는 경계 ●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에서 순수와 상업ㆍ응용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언급한다. 실제로 사회 전반에서 우리는 전통적인 의미의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개념의, 새로운 유행들을 끊임없이 접하고 수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 전시와 관련하여 필자는 경계(‘경계’는 『미술ㆍ밖ㆍ미술』이라는 전시명의 대전제가 되는 개념으로 전시의 성격을 이 지점에서부터 짚어가고자 하며 경계의 양분야는 순수와 상업, 응용을 말한다.)가 ‘사라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허물어지는 경계’ 보다는 기본적인 경계를 인정하는 ‘융통성 있는 경계’라는 표현을 쓰고자 한다. 이는 대도시, 거대국가, 대량 소비의 모더니즘 사회에서 이동하여 다양성, 유동성, 탈중심, 커뮤니케이션, 해체주의 등으로 논의되는 포스트 모더니즘이 한창 진행된 바로 이 시점에서조차도 순수와 상업 영역간의 분명한 경계와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의 차이와 경계는 과거 모더니즘에서의 상하개념과는 엄연히 구별되는 것으로 동시대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양상에서 보여 질 수 있는 횡적인 개념에서의 차이와 변별성을 의미한다. 이처럼 모더니즘과 같은 연계성을 가지면서도 차이점을 보이는 또 다른 하나는 상호간의 긍정적이고 장점인 측면을 수용하고 공유하는데 거침이 없으며 융통성을 발휘하여 적극적인 대처를 하는 경계선상의 특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는 딱딱한 철책이 아닌 마치 고무줄과도 같은 경계로 필요시 서로의 영역을 넓혀주는데 적극 도움을 준다는 말이다. 그러나 후기(여기서 후기라 함은 'late'의 의미이다.) 산업자본주의가 지속되는 한 결코 경계 자체가 사라질 수는 없다. 최소한 이 시대 만큼은 계속 존립할 것이라는 예측이다.(포스트 모더니즘을 모더니즘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인 통합이나 해체에 의해 전체를 규명할 수 없고,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개념은 그 자체로서 부문간의 경계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형근_스캔들_디지털 프린트_160×112cm_2003

권혁_장화, 홍련_웹 커뮤니케이션_2003

김중만_썅딸 KIM_캔버스에 디지털 프린트_120×180cm_1976
전시목적 ● 그렇다면 본 전시 『미술ㆍ밖ㆍ미술』의 의의와 목적은 무엇인가? 왜 광고사진과 만화와 그리고, 무대미술 타이포그래피가 한 공간에서 그것도 보수적인 미술관에서 전시되어 있는가? 왜 상업과 순수 영역간의 분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미술관에서 이러한 작품을 가져와 전시를 하는가? 에 대한 의문을 가질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여기에 대한 답은 이 시대 전체의 문화를 수용하기 위함이며 대중시각문화의 현주소를 진단해 봄으로써 새로운 문화의 발전 가능성을 탐색한다는 매우 기초적이고 근본적인 맥락에서부터 시작된다. 상업, 응용미술 분야는 이 시대의 또 다른 얼굴로서 대중에 대한 영향과 파급효과가 새로운 미적 기준을 제시하기에 충분할만큼 변화와 발달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에 본장에서는 대중시각문화의 특성을 이해하고 이를 통해 전시와 전시 작품에 대해 체계적인 접근을 시도하고자 한다.

권기수_동구리-매화초옥/설중방문 test버전_플래쉬 애니매이션_00:01:00_2003

최호철_코리아 판타지_종이에 잉크와 색연필_37.2×46.2cm_2003
대중시각문화의 위상과 속성 ● 본 전시의 작품들은 순수영역 외의 상업이나 응용미술 분야를 지칭하기보다는 이 두 영역간의 경계선상에 있는 작품들을 포괄하는 의미로 기획되었다. 이 말은 곧 필요에 따라 상업미술이 될 수도 있고, 순수미술이 될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현대는 이러한 애매모호함을 거부하지 않는다.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이는 같은 만화라 할지라도 저급하고 비교육적인 시각으로 받아들이던 8,90년대와는 완전히 다른 시각인 것이다. 오늘날의 세대는 마치 오랫동안 그런 형식으로 있어왔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대중미술도 대중미술로서 보수적인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으며, 한 시대의 문화 양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순수영역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또 다른 얼굴로서 대중문화의 위치와 그 중요성을 점검해 볼 필요성이 있다. 이는 미술관의 역할 변화에도 주목할 수 있는 측면으로 ‘융통성 있는 경계’라는 앞서 언급한 동시대 문화적 특성을 반증한다. 또한 상업 응용미술을 바탕으로 하는 대중시각문화는 순수미술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오늘날의 문화를 언급하는데 결코 제외될 수 없음을 나타내며 상호 융통성을 가진다. 예를들면 권기수(權寄秀,1972- )는 만화와 같은 기호적인 캐릭터를 사용하여 자신의 작품세계를 알리고, 최호철(崔晧喆, 1965- )은 사실적인 묘사로 회화적인 분위기의 만화 혹은 일러스트로 보다 고상한 취미의 느낌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외에도 사진작가 구본창(具本昌, 1953-)은 굳이 순수와 상업 영역에 분간을 두지 않으며, 오형근(吳亨根, 1963- ) 은 상업적인 사진에 자신의 독특한 분위기와 결합하여 그 차원을 높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작품은 철저히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피터정_매트리큐레이티드_2D, 3D 애니메이션_2003_still

한태호_아프리카 아프리카 포스터_애니메이션_2003

김문생_원더풀 데이즈 중_3D 애니메이션_01:27:00_2003_still

박영민_에그콜라_3D 애니메이션&비주얼 이펙트_00:15:00_2004_still

박명천ㆍ이경진_서태지 뮤직 비디오 중_DVD_2004_still
대중매체와 커뮤니케이션 ● 상업과 응용미술 분야는 대중문화와 직결되는 시각문화에 속하며 그런 만큼 일반 대중의 흥미와 취미가 반영되고,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한다. 영화, 텔레비전, 신문, 잡지, 사진과 같은 매체의 기술적인 발달은 대중문화에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여 왔다. 본 전시에 출품된 작품은 인쇄술, 영상, 컴퓨터 등 그 밖의 모든 과학적 기술의 발달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분야들로 커뮤니케이션을 보다 용이하게 하는 대중문화의 대표적인 속성들을 안고 있다. 상품의 질보다는 광고에 의해 상품판매고가 올라가며, 인쇄에 의해 발표된 수많은 잡지와 광고들은 대중을 둘러싸고 대중과 가까이서 그들과 숨쉬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이러한 대중매체를 통해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작품들로서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한 이미지들을 포함한다. 만화, 광고사진 등은 신문, 잡지와 같은 수많은 인쇄매체를 통해서, cf 광고와 애니메이션은 TV 컴퓨터 등 각종 영상매체에 의해서 이미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 피터정의 『애니 매트릭스』, 김문생의 『원더풀데이즈』, 박명천의 『TTL 광고』 등은 이제 거의 알려져 아마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외에도 박재동, 홍승우, 양영순, 정연식, 최호철 등의 만화에서 정보를 보다 쉽게 습득하고, 권영호, 김용호, 김중만, 윤형문, 조세현 등의 수많은 광고사진의 연예인 모델은 상품명을 대신한다. 우리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미술관이라는 보수적인 성향의 공간에서 감상함으로써 대중의 심미안을 색다른 시각으로 검증해 보는 기회를 가지게 될 것이며, 향후 대중시각 문화의 발전 가능성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금누리_금누리덩이 하늘땅사랑_혼합재료_2004

안상수_알파에서 히읗까지_혼합재료_2003

윤정섭_물질적인 남자 연극장면 중_설치_2003
시각문화의 다양성 ● 포스트 모더니즘을 배경으로 한 현대 대중문화의 특성은 ‘다양성’이다. 이 전시는 만화, 타이포그래피, 사진, 영상, 웹디자인, 무대미술 등의 작품들을 하나의 공간에서 전시함으로써 대중문화의 다양성과 특성을 알리고, 각각의 분야들이 어떻게 순수미술과의 차이 혹은 연계성을 가지는가? 에 대한 역학적인 분석을 위한 잠재적인 목적을 가진다. 다시 말해 모더니즘의 대량생산에 의한 획일화를 지양하고 자율적인 개개인에 대한 존중, 그리고 다양한 형태의 가치관과 유행을 낳은 이 시대의 문화양상을 동시에 접해 봄으로써 이 시대의 문화를 입체적인 시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곧 전체적인 맥락에서 ‘대중매체의 이용’이라는 공통성으로 연결될 수 있으며, 대중 자신들은 자신들의 흥미와 관심이 어느 방향으로 집중되어 있는가에 대한 자아성찰의 장이 될 것이다. 물론 대중시각 문화를 앞에서 언급한 부문들로만 설명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인테리어, 동화 등 더 많은 대중 시각문화 부문을 물리적, 공간적인 제약으로 수용할 수 없었음을 미리 밝혀둔다.(뿐만 아니라 각각의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접근에서도 아쉬움을 갖는다.) ● 금누리, 안상수 등의 타이포 그래픽을 통해 관람객은 일상에 스며있는 글자에 대한 조형성에 자극받으면서, 인쇄, 영상과 같은 매체에 의한 상품광고사진, TV 광고, 애니메이션, 만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병복의 무대의상, 설치 미술에 가까운 윤정섭의 『물질적 남자』, 그리고 인터랙티브한 설치작품인 김준섭의 『맥베드』등의 무대미술로 이어져 관람객들은 스스로 부문들간에 연결되는 매개를 찾고자 노력하게 될 것이다. 아니 자연스럽게 스스로 체득하게 될 것이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의 문화가 이렇게 다양하게 쏟아져 있다는 것을!

양영순_아색기가 시리즈 중_디지털 프린트_28×20cm_2000-2002

정연식_또디_포스터_디지털 프린트_2004

홍승우_비빔툰 시리즈 중_디지털 프린트_2003~2004

박재동_한겨레그림판_종이에 펜_1990년대
마케팅과 유희 ● 이 전시에 출품되는 부문들은 시각미술에 의한 마케팅에 기저를 두고 있는 작품들이다. 그들의 작품이 상품성을 가지고 마케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관심과 취미가 반영되어야 하며, 최소한 대중의 관심을 유도할 수 있는 전략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마케팅 전략의 기본은 ‘유희’와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즐거움이 있는 곳에 대중은 모이게 되며 대중이 모인 곳에는 시장이 형성된다. 수요와 공급이 원활히 이루어지면 그 시장은 번창하게 된다. 수요를 촉진시키기 위해 공급 측에서는 대중을 자극하는 수많은 광고를 만들어내고 광고에 투자를 아끼지 않게 되었다. ● 광고는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많은 전략들을 쓰는데 연예인을 모델로 한 과감한 성의 노출도 마다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출발은 광고로부터 시작되었다고는 할 수 없으나, 기여한 바가 크다. 상당부분 대중의 오락 문화는 급속도의 진전을 보여왔다. 전통적인 관습에서 탈피한 성은 과감하게 노출되었고, 대중은 더 이상 기존의 것과 같은 형태로는 자극 받지 않는 정도에까지 이르렀다. 대중은 광고를 통해 상품을 접하고 상품의 질을 가늠한다. 이러한 광고를 통한 마케팅 전략은 거의 환상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대중문화는 또 다른 변모를 하게 된 것이다. 모든 시각문화가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해선 철저한 대중의 흥미와 관심을 유발할 수 있는 ‘시각적인 즐거움’을 위한 ‘유희’가 바탕을 이룬다. ■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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