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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4-10-29 20:17:23, Hit : 1185, Vote :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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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 11.1 up!




서쪽 바다

정주하 사진展

2004_1030 ▶ 2004_1211



정주하_흑백인화_127×110cm_2004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10516 | 정주하 사진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4_1030_토요일_05:00pm

작가와의 만남_2004_1106_토요일_03:00pm




한미사진미술관
서울 송파구 방이동 45 한미타워 20층
Tel. 02_418_1315






서쪽바다 ● 바다. / 다시 바다로 돌아왔다. / 바다에 연해 있는 도시에서 태어나 성장한 나는 젊은 시절 그 도시를 / 떠나려 먼 여행을 하였다. 본디 정신에는 고향이 없는 법. / 누가 태어난 곳을 정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 그렇게 떠났던 바다다. / 바다는 내게 근본적이다. 나는 언제나 그곳에서 마음을 얻으며, / 바람과 사람과 하늘을 함께 만난다. / 저 멀리 수평선이 끊임없이 다가오고, 때로 격노하는 변화는 내게 / 근본을 돌아보는 여유를 준다. / 이곳과 저 먼 어느 곳을 연결해 주는 바다는 그래서 둥글다. / 바다는 땅과 하늘의 사이이며, 이곳과 저곳의 사이이며, / 공기를 머금고도 공기를 일궈낸다.




정주하_흑백인화_60×50cm_2004



정주하_흑백인화_60×50cm_2004


더욱이 이곳 서쪽의 바다는 우리에게는 희망이자 희망이다. / 동이 높고 서가 낮은 우리의 땅은 모든 오물을 서쪽으로 털어 내고, / 그래서 서쪽의 바다는 정화의 의무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 또, 검은빛의 갯벌은 그 정화함의 전위이며, 자양분이 넘치는 / 벌의 의미가 다시 우리에게 자양으로 다가온다. ● 모든 것을 담아서 재생하는 바다는 내게 있어서 사진이다. / 무엇을 바라보고 의식에 담아 다시금 생명을 부여해 보고자 하는 / 나의 사진 작업은 분명 그 자체가 바다다. / 물론 땅이기도 하고, 바람이기도 하고, / 또 불이기도 하다. ● 지금은 바다다. ■ 정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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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장소 : 충무로 그린포토갤러리
▣ 전시일정 : 2004년 11월 1일(월) - 11월 13일(토)
▣ 전시초대 : 2004년 11월 1일(월) 오후 6시
 


| 전시서문 |

타자의 주검을 통한 공감의 미학

진혼(鎭魂), 망자의 넋을 달래다.

방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달처럼 둥근 전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 등의 가운데 부분을 자세히 보면 거뭇거뭇한 점들이 보인다. 그것들 대개는 흐릿하지만 개중에는 꽤 크고 진한 점들도 있다. 저 죽는 줄도 모르고 빛을 찾아 날아든 하루살이와 나방들이다. 저들의 주검을 맞아들인 저 등은 그러므로 저들의 무덤인 셈이다. 그래서인가 빛을 향해 날아든 그것들의 무질서한 유영이 마치 죽음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하면, 축제와 향연으로써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처럼도 보인다. 저들은 왜 죽음으로 유인하는 빛을 향해 저토록 맹목적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저들은 빛이 다름 아닌 죽음의 메신저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저들로 하여금 빛을 향해 모여들게 하는 동기는 필연일까 우연일까. 본성일까 관성일까.

차를 타고 가다 보면 도로 위에 죽어 있는 고양이나 개의 주검들을 곧잘 보게 된다. 인간과 더불어 살거나 인간 가까이 사는 탓에 더 자주 더 쉽게 목격되는 주검들이다. 거의 인간화되리만치 인간과 삶을 함께 해온 저들의 잦은 죽음은 그러므로 모순이고 아이러니다. 저들의 죽음은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저들의 죽음은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진실일까. 만약 누군가가 저들의 죽음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저들의 주검을 일일이 수거하여 사람이 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망자를 달래기 위한 장례의식을 치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모든 죽음이 경이롭다는 말은 다름 아닌 그의 몫일 것이다. 단지 하루살이의 죽음에서 나의 죽음을 보고, 고양이와 개의 죽음에서 나의 삶을 보고, 타자의 죽음에서 내가 존재하는 이유를 보는 공감의 소유자에게만 모든 죽! 음이 경이롭다.

법정 스님의 수필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스님이 마련해준 헌식(獻食)을 꼬박꼬박 먹어치워서 꽤 면을 익힌 큰 쥐 한 마리가 있었다. 어느 날 스님이 작정하고 그 쥐에게 말했다. ‘이제 청정한 수도장에서 나와 같이 지낸 이 인연으로 그 탈을 벗어버리고 내생에는 좋은 몸 받아 해탈을 하거라’ 라고. 기이하게도 다음날 그 쥐는 헌식돌 아래에 죽어 있었다. 쥐가 스님의 말을 알아들은 것일까. 여하튼 스님은 그 주검을 수습하여 염불을 하고 그 자리에 묻어주었다는 이야기다. 마치 우화와도 같은 이 이야기는 모든 죽음, 삶, 존재가 경이롭다는 공감의 진리를 그 속에 내장하고 있다. 주검들을 수습하고, 장사지내고, 그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여락의 작업은 이런 타자의 죽음을 매개로 한 공감의 존재론적 인식에 그 맥이 닿아 있다.


화장(火葬), 하늘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여락은 도로에서 차에 치여 죽은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한다. 그리고 마른 잡목들을 모으고, 한적한 자연의 한 장소를 정하여 잡목들을 쌓는다. 그리고 잡목 위에다가 순백의 하얀 종이나 흰 천으로 수습해온 짐승의 사체를 올려놓고 태운다. 잡목과 함께 사체가 다 타고나면 재만 남겨지는데, 그 재를 뒤적여 미처 산화하지 못한 잔뼈들을 수습한다. 화장을 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일들을 직접 수행하고 그 과정을 낱낱이 사진으로 기록한다. 이름 모를 짐승들의 주검을 수습하고 화장하고 기록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담은 사진들 속에는 어김없이 그가 들어 있다. 사진 속에서 그와 함께 있는 짐승의 사체는 한갓 미물의 주검이 아니라, 각각 짐승과 사람의 허울을 벗어 던진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개념 이전의 존재, 의미 이전의 존재와 존재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 존재와 존재가 만나는 이 관계 속에서 작가는 존재의 주검을 증언하는 목격자로서, 그리고 존재의 주검을 위로하는 무당으로서 등장한다. 레비나스(E.Levinas)는 타자의 상처를 통해 자신을 보는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공감이다. 나와 너는 보이지 않는 공감의 끈으로 연속돼 있고, 우주는 들리지 않는 타자들의 목소리로 가득 차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 ! 목소리를 듣는다. 존재의 주검을 추스르는 여락의 작업은 다름 아닌 이런 공감의 논리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화장은 존재가 변하고, 정체성이 변하고, 차원이 바뀌는 연금술적인 장례방식이다. 그러므로 정화의식과 통과의례를 가장 원형적인 모습으로 보존하고 있는 장례방식이다. 화장을 통해서 유기체는 불과 공기가 만나는 화학작용 속으로 산화하고, 한줌의 재로 남겨진다. 그 화학작용의 한가운데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남겨진 재와 함께 육신의 탈을 벗어버린 순수한 존재, 영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연기와 재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붙잡을 수 없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아간 존재의 한 형태인 것으로서, 이를 그저 육신의 흔적으로만 치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짐승의 사체를 화장하는 작가의 행위는 존재가 원래 유래한 하늘로 그 넋을 되돌려주는 주술적 행위이며, 이때 사체를 화장한 자리는 그대로 세계의 중심과 세계의 배꼽을, 그리고 성소(신성한 장소)를 상징한다.


토장(土葬), 땅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작가는 짐승의 사체를 수습하여 화장하기도 하고, 땅에 묻어주기도 한다. 여기서 화장이 영적인 장례방식이라면, 토장은 인간적인 장례방식이다. 화장이 일순간에 존재의 전이가 이뤄지는 고도로 추상적인 장례방식이라면, 토장은 여전히 몸의 탈을 벗어나지 못한 물질적인 장례방식이다. 토장에서 유기체의 몸은 썩고 부패하며, 헤아릴 수도 없는 낱낱의 조각들로 해체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유기물로 전화된다. 그리고 그 자체 또 다른 생명체로 연장된다는 점에서 토장은 삶과 죽음이 서로 맞물려 있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그 속에다가 내장하고 있다.

여락은 흰 천에다가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한 이후에 대개는 큰 나무 몇 그루가 있는 곳에 터를 잡아서 그 사체를 묻어준다. 여기서 그 터를 지키고 있는 나무는 세계수(世界樹, 또 다른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를 암시한다. 실제로 작가는 그 곳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임을 암시하기라도 하듯 그 터 위에다가 가상의 둥근 원형을 그리고, 그 원형의 가장자리를 따라 짐승들의 사체를 묻어준다(이런 가상의 원형은 나무보다는 밭을 배경으로 한 작업에 더 뚜렷하게 반영돼 있다). 짐승들의 넋을 그가 유래한 세계의 기원, 세계의 시점에다가 되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주검들 위로 시간이 흘러간다. 무성하게 자란 풀들이 주검들 위에 이불처럼 덮이고, 장마 때 그 터는 물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다시 드러난 그 터 위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차양을 치고 자리를 편다. 이처럼 땅에? ?산 자의 시간과 죽은 자의 시간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하나의 층위에서 만난다.

또한 작가는 갈아엎은 밭에다가도 역시 가상의 원형을 그리고, 그 가장자리를 따라 짐승들의 사체를 묻어준다. 그리고 그 밭 위로 채소들이 자라고, 사람들에 의해 그 채소들이 수확되고, 밭에는 또 다른 골이 만들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은 모든 생명이 타자의 죽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존재의 진리를 거의 직설적으로 암시한다. 그렇게 죽음은 시간과 더불어 재차 삶으로 순환하고, 이로써 삶과 죽음이 물려 있다는 자연의 순환원리를 암시해준다. 토장은 몸을 입고 태어난 모든 존재가 비롯된 땅으로 그 넋을 되돌려준다.


풍장(風葬), 바람에게 넋을 되돌려주다.

또한 작가는 흰 천으로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하여 이를 자연 상태 그대로 방치하기도 한다. 이는 말하자면 풍장의 한 형태로서, 장례방법 중 가장 자연의 속성에 가까운 것이다. 어떠한 인위적인 과정도 수반하지 않는 이 장례방식에서는 존재를 낳은 것도 자연이요 존재를 거둬들이는 것도 자연이다. 유기체가 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겨 풍화하게 하는 것이다.

여락은 흰 천 대신에 꽤 두툼한 순모(이불 속)를 가지고 사체를 수습하기도 하는데, 이때 그 표면에는 유기체의 주검이 부패되고, 해체되고, 마침내는 최소한의 흔적으로만 남는 점진적인 과정이 기록돼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구더기가 태어난다. 적당한 쿠션과 따뜻한 온도, 그리고 여기에다가 유기체의 자양분마저 더해져서 구더기가 생겨나기에는 최적의 조건이 갖춰진 셈이다. 유기체의 사체에 기생하는 구더기는 곧 주검으로부터 태어난 종족이다. 주검으로부터 곧장 기어 나와 자기의 존재를 완성하는 구더기는 그러므로 모든 인과의 법칙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고도로 진화된 종족이다.

작가는 이렇게 생겨난 구더기들을 수습하여 먹물에 담갔다가 끄집어낸 후, 이를 판화지에다가 흩어놓고 그 표면 위를 지나가게 한다. 이 방식으로써 작가는 화면 안쪽으로부터 화면의 가장자리를 향해 연이어진 비정형의 드로잉을 얻는다. 이렇게 얻어진 일련의 평면작업들, 곧 사체의 흔적을 각인하고 있는 천 조각이나 구더기가 그린 드로잉에서는 일말의 서정적인 아우라마저 느껴진다. 산화하거나 풍화한 주검의 자리에는 얼룩과 흔적만이 남아 원래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그리고 존재가 지나가면서 그려낸 길은 그대로 추상적인 회화를 닮았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짐승들의 사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털이나 살점 그리고 피와 같은 그 주검의 일부를 따로 채집해둔다. 일종의 존재의 증명으로도 볼 수 있는 이 행위는 짐승의 사체를 찍은 사진 속에 어김없이 작가 자신을 등장시키는 행위와도 통하는 것이다(말하자면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식으로). 작가의 작업을 단순히 짐승의 사체를 수습하고 채집하는 과정을 사진으로써 기록한 것으로 본다면 유사 생물학이나 박물학의 한 실천으로 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작가의 작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는 죽음일 것이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모든 존재에 대한 생명에의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 고충환(미술평론)

| 전시작품 중 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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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미술공간 기획초대전 2004-19
송상희 개인전 - 푸른 희망 Blue Hope
2004. 11. 5 - 11. 21
초대일시 : 2004. 11. 5 금요일 오후 5시






어느 날 갑자기 부상한 이 30대 중반 작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정치적으로 오랜 군사정권을 겪었으며, 정신적으로는 그 보다 더 오랜 유교적 가부장제 그늘 아래에서 생활해야 했던 한국 사회의 기묘한 생리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내가 송상희를 만난 건 아마 새천년(뉴 밀레니엄)을 맞이하기 바로 몇 해 전, 즉 1990년대 말이었다. 그녀는 한국의 여러 대안공간 중 하나인 ‘대안공간 풀’에서 일하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주축이 된 세미나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와 동갑이던 그녀를 나는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그저 대학 시절 실기를 전공했으나 대안공간 사무실에서 사무를 보며 그곳 사람들과 친한 뭐 그런 부류의 사람으로 생각했다. 되돌이켜 보건데 우선 모임을 통해, 드러나는 그녀의 소극적인 태도가 내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는 데에 실패한 것이 내가 그녀를 주목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였던 걸로 사료된다. 그리고 사실 그러한 그녀의 과도할 정도의 겸손과 소심함은 지금도 여전하다.



그 후 수년이 지났다. 우연한 계기로 송상희의 작품 포트폴리오를, 낮은 화질의 이미지 파일을 통해 관찰할 기회가 왔다. 불과 작년의 일이다. 나는 작품을 보고나서 놀랐기 보다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평소 쑥맥 같던 친구의 결과물이라곤 상상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송상희의 작업은 엄청난 유머의 힘을 갖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정치적이다. 그리고 상상력 면에서 대단히 독창적이었다. 어쩌면 나로 하여금 송상희를 좌시하게 만들었던 그녀의 면모(소심하고 지나치게 겸손한 인품)가 평소 억압되어 있다가 미술품이라는 적절한 매체를 빌어 거침없이 솟구쳐 나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뒤늦게 발견된 송상희를 국내 주요 전국 일간지에 작은 코너를 빌어 소개한 적이 있다(2003년). 그리고 이후 한국의 작은 미술 비엔날레에 출품작가로 추천한 적도 있다(2004년). 외부 관객의 반응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고 자평한다.




모두(冒頭)에서 나는 송상희를 이해하려면 한국사의 일부를 이해해야 할 거라는 어마어마한 요구를 한 바 있다.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아주 오랜 기간 군사정권 지배 하에 있었고, 또한 그에 못지않은 가부장적인 가풍 속에서 인생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형성하도록 강요받아왔다. 한국의 정치사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된 것은 불과 15년도 채 되지 않았다. 군사정권 속 한국 미술은 순수미술과 참여미술로 구별되어 상극을 이루었고 이 시대의 참여 미술은 정치적으로 극단적인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메시지는 선명해야 했고, 한 치의 물러남도 없어보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당시 전선(戰線)에서 투쟁했던 미술계의 투사들은 미술관으로 모셔져 화석이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후예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변화한 시대 정세를 맞추지 못하고 여전히 강성 노선을 걷거나, 정반대에 있었던 순수미술을 하기도 했다. 이런 미술계의 지형도로 볼 적에 송상희는 가장 적절한 포스트 군사정권 세대의 여자 화가이다. 송상희가 그(he)가 아닌 그녀(she) 인 점이 여기서 대단히 중요하다.



그녀는 착한 딸로 훈육되어온 그녀 또래 보통의 한국 여성들의 인생 역정을, 그녀의 선배 세대 작가들의 과격한 방법이 아니라, 너무도 코믹한 유희를 빌어 작품화 했다. 그녀의 ‘착한 딸’ 연작이 그것이다. 거기에는 군사정권 하의 선언적 태도가 아니라, 포스트 군사정권 하의 포스트 선언적 태도가 드러나고 있다. 페미니즘 적 입장은 견지하되 무겁지 않게 가는 것이다. 그녀는 한국처럼 특이한 정치적 계절 변화를 경험한 젊은 세대들의 보편 정서를 군더더기 없이 작업으로 드러낼 줄 아는 몇 안 되는 미술 작가이다. 나는 그녀의 작품이 어깨에 힘을 넣지 않고, 할 말은 다 하고 있는 점이 좋다. 그런 당찬 작품에 비해 작가인 그녀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소심하고 여성스러운 것이 또한 흥미롭다. 초기 작업이 작가 본인을 기준점으로 또래의 여성들이 겪을 법한 어떤 현상을 일반화 시키는 데에 주력했다면, 이번 부산비엔날레에서 선보인 근작은 한국에서 실제 했던 어떤 역사적 사건을 불러온다. 이 사건은 오로지 한국 사람만이 알고 있는 역사 경험이다. 그 경험을 통해 한국의 국모(國母)의 불의의 시해사건을 통해, 한국을 지배하는 어떤 가부장의 상징(당시의 군인 대통령)을 대신해서 희생된 어떤 한국 여성 일반을 대변하고 있다.

반이정 미술평론가 │ 인사미술공간 큐레이터

문의 : 02) 760 - 47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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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사진작가 김영수씨 ‘떠도는 섬’展
[동아일보 2004-11-09 22:41]



[동아일보]

섬은 몽상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단어다. 섬은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픈 욕망을 자극한다. 바다 한가운데 고립된 특수한 공간이 갖는 막막함, 고립감, 신비감…. 이것을 사진으로 표현하는 작가가 있다. 사진작가 김영수씨(58)가 바로 그다.

작가가 1996년 정물을 소재로 한 개인전 이후 8년 만에 갖는 ‘떠도는 섬’ 전에는 10여년 동안 80여개 섬을 떠돌며 촬영한 한려수도와 전남 신안군, 인천 옹진군의 섬들을 비롯해 강화도 울릉도 완도 진도 제주도 등 풍경 50여점이 나온다.

그가 카메라 앵글로 잡은 작품에는 바닷바람을 타고 비상하는 갈매기, 해무(海霧)에 잠긴 섬, 섬으로 가는 길, 하얀 구름과 파도, 갯벌 속에서 조개와 하나 된 어부, 안개와 어둠으로 검게 물든 선창가, 출렁이는 배에서 올려다 본 검은 절벽, 젖은 햇빛과 마른 햇빛, 그리고 한쪽 어깨를 내려뜨린 채 수평선을 바라보는 젊은 여인의 뒷모습이 있다.

비 오는 날 아니면 흐린 날, 새벽과 해질 무렵, 배 위에서 혹은 높은 벼랑 끝, 물과 뭍의 경계지점에서 찍은 사진들에는 정적인 차분함과 동적인 역동성이 주는 긴장감이 서려 있다.

부산이 고향이고 어린시절 통영 앞바다 연화도에서 산 적이 있는 작가에게 섬은 추억의 공간이지만, 이번 작품들에선 섬을 이탈한 외부자로서 섬을 기록한 ‘거리두기’가 느껴진다.

얼핏 보면 고요한 섬과 바다 풍경 같지만, 바다 물결의 일렁거림과 한쪽으로 기울어진 수평선, 하늘로 치솟아 오르는 갈매기의 재빠른 움직임들에는 섬 출신 작가가 갖는 내면의 따뜻한 추억과 함께 이탈자로서 지니고 있는 차가운 시선도 겹쳐진다. 그리하여 풍경의 깊이뿐 아니라 인간의 심연까지도 표현된 듯하다.

그의 사진은 곧잘 수묵화에 비유된다. 사진이라는 차가운 장르에 체온을 싣기 위해 수작업으로 촬영한 대상을 흑백 인화지에 옮긴 후 스캔이라는 디지털작업을 거쳐 판화지나 한지에 잉크젯 프린터로 뽑는다. 디지털작업이라고는 하지만 전체적인 톤의 조절과 화면의 크기를 정하는 일 외에는 아무런 인위적 수정이나 변형을 가하지 않기 때문에 수묵화의 농담이 두드러진다.

최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는 전시도록에서 그의 작품을 이렇게 평했다.

‘그는 눈앞에 있는 것과 대결하지 않고 화해를 청한다. 그리하여 보이는 세계에 몸과 마음을 맡기려 하는 것처럼 보인다.…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그리고 꿈을 꾸듯 그 외로움에 도취하는 것이다. 김영수의 사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경험했을 이 평범한 사실을 일깨워 준다. 인간적인 어떤 시도도 자연의 질서 앞에서는 허망하다는 체념, 결국 주어진 것을 있는 그대로 포용해야 한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12∼30일. 서울 종로구 평창동 가나포럼스페이스. 02-720-1020





zabel (2004-11-03 18:35:45)  
로버트 프랭크 사진을... 주옥이라고 표현한 것이 많이 찝찝하네.
차라리 유산슬같은 섹스.란 말이 더 어울리는 표현같다는.
zabel (2004-11-04 14:34:28)  
호스트 허만 사진전 다녀왔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매우 그렇고 그런 이미지를 보여줌. 핫.... 그러나!!
역시 프린트는. ToT 아주 맑은 날 빌딩 틈바구니에서 촬영을 하면서 뭍히거나 날라긴 부분이 거의 없는(두어군데 발견) 놀라운 프린트. 더해서 상상을 넘어서는 계조 콘트롤에 쓰러짐. 흐윽. 사실 촬영시에 그닥 노출 조절 잘 한것같지는 않음.
아아... 이제 진짜 어디가서 프린트해서 밥먹었단 이야기하지 마라야지....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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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8   자웅동체 혹은 커플트윈스  zabel 2004/06/24 1147 288
557   자 [6]  psyvenus 2005/09/28 1139 249
556   잉크젯 프린트 참고자료   2006/03/23 1296 334
555   이희섭사진  zabel 2003/04/17 1202 295
554   이지누 사진 [1]   2006/01/15 1279 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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