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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에 경도된다는 것이 이런 것을 일컬음인가. 기껏 거대자본들여서 한다는 것이 매트릭스 담론이라니. 허긴 이런 일이 귀한 일도 아니니 이럴 필욘.
암튼 마약과 테크놀러지는 공통점이 많다. 중독되는 것뿐 아니라 별 감흥없이 접근한다는 것이. 마약을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은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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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Dance Routine
덤 타입의 [여행]

일본이 자랑하는 복합장르 프로젝트 그룹 '덤 타입'은 Modafe 2003에 <메모랜덤 Memorandom>으로 참가하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설치미술의 세트미학, 영상과 공간의 새로운 창출, 고출력의 섬세한 음향 연출, 그리고 무엇보다 테크놀로지 과잉이 어우러져 국내의 아날로그 중심의 공연 경향에 일대 문제의식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난 <메모랜덤>을 가리켜 '소니주의'라고 할 만큼 최첨단 기계에 대한 낙관적 태도를 의문시했고, 테디베어쇼와 같은 동화적이고 소프트한 터치에 반감을 드러냈었다. 한마디로 최첨단 영상 기자재의 박람쇼 같았다. 그렇게 테크놀로지 자체에 의지하면서 인간의 감각을 변화시키는 테크노 문화, 즉 '하이 테크네'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 영 미덥지 않았다.
물론 많은 이들이 이 작품에서 건드려진 디지털과 하이 테크놀로지의 채용에 감탄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감탄이 우리의 무대가 가진 빈곤을 고백한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올해 Modafe 2005에 '덥 타임'이 새로운 작품 <여행>을 가져온다고 했을 때, 나는 재빨리 액션을 취해서 비디오를 봤다. 확실히 <메모랜덤>에서 기계에 대한 애상적이고 낙관적인 접근이 많이 지양된 것 같았다. 그래서 상당히 기대를 가졌었는데, 실제의 무대를 보고는 이렇게 쉽게 실망하게 될 줄이야.

<여행>은 디지털이 우리 삶을 집어삼키니까 우리의 몸과 자연 세계까지 디지털의 부호로 번역된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유기체도, 우거진 수풀도 모두 0과 1로 코드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 아닌가. 그렇다. <매트릭스>의 영향이 진하게 녹아 있다.
실제로 푸른 숲이 바람에 싱그럽게 흔들리던 영상이 삽시간에 숫자들로 가득찬 기호의 세계로 변하고 만다. 또한 풀밭에 누워 있던 여자의 몸에 어떤 검은 바가 스쳐 지나가면, 마치 디지털로 옮겨지는 스캐닝이 되는 느낌을 준다.
이처럼 <여행>은 디지털이 전면화되는 과정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도리어 중요한 것은 우리 몸이 가진 끈끈한 몸성이었던 것 같다. 일찌감치 희미하고 존재감이 뚜렷하지 않은 몸이 디지털로 번역되는 것은 별 느낌도 의미도 없다.
<공각기동대>에 나오는 쿠사나기 소령처럼 극도로 정체성과 몸에 대한 성찰을 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디지털 감각이 이미 관객들 사이에 보편화되어 있는 것처럼 전제해 버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이것은 디지털과 테크놀로지에 대한 이해도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거꾸로 테크노 문화 속에 처한 우리 몸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를 살피면서 나아가야 한다는 근본적인 차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우리 몸이 그렇게 쉽게 현실 세계에서 사라지고 복제물이 되어도 좋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일본 만화의 관습이나 코스프레 문화의 산물처럼 느껴지는 분화된 인물들은 존재의 감각이 너무 없다. 즉 흰 블라우스에 녹색 치마 그리고 빨간 스카프를 두른 배우들은 퍼포먼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허술하고 느낌없는 행위를 펼친다.
애초에 머리에 헤드램프를 달고 마치 탄광의 갱도에서 조난당한 사람들이 서로를 찾듯 헤매는 장면이나 'I wish...'로 시작하는 문장을 소녀 취향으로 소화하는 보이스오버 연출부터 대가 약하다. 이미 일본적인 로컬리티의 문화에 젖어 있었다.
최소한 <메모랜덤>은 보편적인 문제 제기의 수준에 있었지만, <여행>은 일본에서 통하는 협소한 문화적 관습을 늘어놓는 것에서부터 힘의 균형이 무너져 버린 것이다.

결국 '여행'의 의미를 살리는 장면들도 차례대로 어긋나 버린 것 같다.
마치 유도(流島)가 된 것처럼 무대에 누운 여인이 눈덮인 히말라야의 계곡을 따라 유유히 내려가는 식의 영상과 만나는 연출도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디지털의 슬픔이 저하되어 있었다. 저 험준한 산맥조차도 디지털의 환영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을 주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왜 그렇게 된 것일까. 먼저 몸 자체의 설정이 잘못된 것 같고, 둘째는 흘러가는 산맥의 영상의 러닝타임이 지나치게 짧았던 것 같다. 그래서 디지털의 언어로 구성된 시뮬라시옹의 완벽한 자연이 사람의 몸과 접촉할 때, 미처 감정의 끈질긴 지속이 안된 것이다.
내친 김에 시뮬라시옹 자체의 논리를 한껏 밀고 나아가 공항의 출발시각표가 전시되거나 거대한 지도가 서서히 운행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여행 대신에 여행을 암시하는 사물들이 원본으로서의 여행을 대신한다는 것이다.
이미 인간은 하찮을 정도로 퇴각 명령을 받았고, 디지털 그 자체가 부각되는 상황이었다. 물론 여행의 간접적인 느낌을 주기도 하고, '지도(기호)가 점점 대지(실재)를 덮는다'는 장 보드리야르의 전망이 엿보이기도 했다.
지도의 스펙터클은 디지털 시대의 여행이란 한 지점에서 다른 한 지점으로 이동하는 것이며, 그 사이의 인간적인 풍경들은 테크놀로지화된 문화의 관심권 밖이라는 것을 나타냈다. 천천히 지도 스스로 운행하는 질서가 반휴머니즘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이유라도 있는 것일까. 반휴머니즘은 인간적 관점에서 행해지는 '반성 이전의 반성'이라면 몰라도 인간을 몰아낸 지점에서 사물들의 질서가 지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확실히 '덤 타입'의 이번 <여행>은 뭔가 핀트가 안 맞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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