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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28 23:44:46, Hit : 1236, Vote :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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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강퇴의 추억 (2006-07-05 18:42:31)


몇가지의 문제들이 한꺼번에 섞인 듯 합니다..좀 찢어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n....;"저는 미술관 진입을 시도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전시를 했을 뿐인걸요. '전시 행위'와 '미술관 진입 시도행위'가 같은 것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겐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건 마치 제가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 "왜 사진촬영 시도 행위를 하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어색합니다."

<- 이건 일단 주체의 차이에서 비롯된 듯 보입니다..하나의 행위는 주체마다 다른 의미를 띨 수 있으니까요..작가 n....님의 입장에서는 '전시행위'일 수 있지만..밖에서 보는 입장에선..'미술관 진입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전시행위'와 '미술관 진입시도'는 크게 다르지 않은 듯 합니다..그러나 중요한 건..이 행위나 시도들이 생각보다..복잡한 의의를 가진다는 것입니다..미술관이란 언제나 자족적인 예술..모더니즘의 공간이었고..현재도 그런 듯 합니다..다큐멘타리가..이 모더니즘의 공간에 진입한다는 것은..결국 다큐멘타리의 현실준거성으로 말미암아..미술관의 작동을 지배하는 모던한 질서에 균열을 낼 것이냐..아니면..거꾸로..다큐멘타리의 현실적 준거성을 거세하고 오브제화할 것이냐의 복잡한 갈림길을 제공합니다..'저항성의 중화'란 다큐멘타리가 미술관 오브제로 전락하는 걸 의미합니다..노순택과 박진영의 '전시행위'..그리고 그것이 저에게 읽히는 '미술관진입시도'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 의 문제는 향후 10년 이내에 판가름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또 그 10년의 가능성은 또 다시 2-3년 이내에 노순택 박진영의 행위나 시도들이 또 다른 작가들의 시도들과 일련의 흐름..내지 유행..내지..보편화의 싹을 만들어 낼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물론..현재로선..가능성을 높게 볼 수 없지만..개인적인 사견임을 전제로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니라고 봅니다..

서울서 버티기; "2. 미술판 위계구조에 대한 실천적저항/무슨말인지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이를테면 전시행위보다..빈민촌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활동하란 것인지,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거리에서 전시를 하라는 것인지.."

<-빈민촌에서 활동하란 말씀은 전혀 아니고요..저는 사실 현재의 한국미술계를 지배하는 '예술계'가 맘에 들지 않습니다..아주 아주 소수의 실천가들이 자기 꼬붕들 데불고..자의적인 가치들에 상징자본을 부여하고..예술의 다른 가능성들을 체계적이고 폭력적으로 배제하고..삭제하면서 구조화시켜 왔고..현재의 '예술계'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은 듯 보입니다..예술계의 위계질서가 예술의 질서를 설립합니다..이 문제는 이런 댓글에 다 담을 수 있는 내용은 아니겠지요..한국 '예술계'의 이러한 폭력성은 지금까지 한국사진에 부여되어 온 부차적 위치에서도 발견되는 일들입니다..중요한 것은 이러한 예술계의 구조에서 핵심적인 장치들이 바로 아카데미와 미술관이란 것입니다..물론 학제에서는 최근 사진과의 제도화를 통해 변화를 가져온 것이 사실이지만..이 변화가 예술의 질서를 변화시킨 듯 보이지는 않습니다..미술관이 중요한 건 그것이 예술계의 질서가 예술의 질서로 전환되는 메카니즘의 핵이기 때문입니다..모더니스트들이 모더니즘을 예술의 지상가치로 설립한 곳이 바로 구겐하임이었지요..모더니즘의 신화가 지난 몇년간 의심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미술관의 작동은 여전히 보수적인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사진..더 나아가 다큐멘타리의 미술관 진입은 미술관의 폐쇄성과 보수성을 변화시킬 가능성이기도 합니다..미술관의 폐쇄성은 예술의 폐쇄성이기도 합니다..폐쇄된 미술관을 장악한 소수의 실천가들이 예술을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키고 배타적으로 전유하고..이러한 전유를 통해 경제적 자원들과 상징자본을 독점합니다..현재 한국의 예술상황이 이런 식이 아닐지요..거칠게 말해 다큐멘타리가 미술관에 진입하고..그 진입의 폭과 깊이를 더해 그것의 현실준거성이 미술관에 의해 설정되는 삶과 예술의 경계를 지워 나갈 때..예술의 외연은 확장될 수 있지 않을까..그래서 관객이나 독자 역시 예술활동에 주요한 실천자로 참여할 때..삶의 내용이 동시에 예술의 형식과 내용이 되는 그날이 되지 않을까..잠시..생각해 봅니다..빈민촌에 가서 사진을 가르치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그들의 빈민의 삶의 내용과 의미를 지금까지 해 오신대로..기록하는 것이 더 박진영답지 않을까 합니다..

아..쓰벌..배병우는 잠시..뒤에..




강퇴의 추억 (2006-07-05 19:08:38)


전..좀 의아스럽습니다..조용하던..이 게시물에 n.... 서울서버티기..평택맨..보이나님이 '낚인'^^ 이유가 "사회적인 저항가들이 왜 미술판에서는 배병우와 다를 바 없는지..아쉽습니다.." 이거 아니었나 싶기 때문입니다..

전 갠적으로 배병우를 좋아했고..여전히 좋아합니다..사실 두분들 보다..두분을 합친거 보다..배병우가 더 좋습니다..사진가로서 두분의 배병우에 대한 존경을 이해할수 있습니다..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배병우 따위에게 '다를바 없다'정도의 서술어를 허락하지 않는 건 좀 납득되지 않습니다..이 술어를 '곡해'이건..'야릇한 냉소'이건..어떻게 받아들이셔도 좋습니다..중요한 건..배병우가 아무리 좋고..그가 아무리 사진적 성공을 보였어도..그가 사진적으로 완전한 건 아니니까요..물론..배병우의 한계에도 불구하고..여전히 그가 뻐까소[피카소] 같은 씹새들이나..백남준같은 사기꾼들 보다는 낳다고 바요..

그러나 문제는 배병우 사진에 관한 성공과 한계에 관한 것 아니겠슴니꺄? 그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럽게..사진의 지형도 위에서 박진영 노순택 사진의 차별적 위치에 관한 논의로 이끌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그러나..배병우 사진에 관한 논의는 누군가 배병우 사진에 관한 글을 독립된 게시물로 올려 주시면 어떨까 합니다..저도 사실 아직은 내용적으로 확실히 준비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강퇴의 추억 (2006-07-05 19:21:46)


"낳다고 바요.."를 "낫다고 봐요"로 수정함이다..


가기 전에 배병우에 관해 한마디..'다를 바 없다'라는 술어가 '곡해'와 '냉소'라 해도..그것들이 배병우가 미술시장에서 잘나가기 때문은 결코 아닙니다..가설에 불과하지만..전 배병우를 한국에서 '사진의 모더니즘'의 가능성을 열었던 작가로 봅니다..모더니즘 사진이 아니라 사진의 모더니즘..그린버그의 회화의 자율성에 관한 어휘들을 차용하건데..'사진 그 자체의 효과에 충실했다'고나 할까..물론 사진기의 메카니즘을 잘 모르지만..피사체 그 자체가 아니라..빛과 피사체 '사이의 관계'..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것이지요..빛에 대한 사진기의 반응 그 자체가 너무나도 좋았고..그래서 십여년 전쯤 배병우 작품 한점을 실제로 사려고도 했었어요..[제가 얼마간의 돈을 들어먹기 전이지요] 지금도 망설이는 중임니다..사실 그의 작업이 '소나무'인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다만..사진 자체의 효과가 오히려 소나무에 대중들의 현실적 감성을 오히려 더 고양시키고..시장에서..그리고 미술관에서의 성공으로 이어졌겠지요..

다만 제 가설은..미술관에서 배병우의 성공은 그의 사진적 모더니즘의 한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먼말인가 하면..

나중에 하지여..휘리익~




평택맨 (2006-07-06 00:19:26)


n..님의 질문에 다시 답변을 해야 하는데 조금은 소통의 부재를 느낍니다.
저는 표현한다고 했는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시니 정말 톡 까놓고 얘기 해야 겠습니다.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시각인데, 노순택님은 구본창적 재능을 갖고 있는듯 합니다. 본인은 거리가 멀다라고 느끼시지만, 자아의 정체성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 합니다. 구본창적 재능을 정동석과 이갑철에게서 찾고 숙명이라고 부여하는 노력을 보고 있는 불편함이 저의 견해 입니다.
제가 잘못 판단하여 님을 어이없게 만들수도 있지만, 저의 시각은 그렇습니다. 물론 님께서 추적하고 계시는 "배병우와 구본창을 닮아가는 나쁜점이 무언가?" 라는 객관식의 답변은 별로 의미가 없을것 같습니다. 솔직히 그런 질문에 답하기에는 이런 토론에 김빠진 맥주와 딱딱하게 굳어 버린 오징어를 안주로 내어 놓는 형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박진영은 아이러니 하게도 이갑철과 정동석의 자질을 타고난 듯한데, 배병우를 욕망하고 있는듯 합니다. 이래서 님들은 사진계의 대안이자, 전략이 과하기도 하고 전술이 부재 하기도 합니다.
주재환에 대한 정보는 최근에 "일상의 연금술" 전에서 <즐거운 껌 댄스>국립현대미술관,2004, "당신은 나의 태양" 토탈미술관, 2004,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 2005, "이 유쾌한 씨를 보라" 아트선재센터 2000. 개인전 등에서 자료를 보실수 있습니다. 나중에 좀더 설명할 기회를 마련 하고 지금은 이만 즐잠 할까 합니다.




강퇴의 추억 (2006-07-06 03:18:48)


보이나 님의 글 나머지 부분

@전시와 사진작업. 은 별개. 인 것이 다큐멘터리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것은 밀린 숙제 발표.라는 작가의 변처럼 전시의 일차적 목적은 정리.이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전시'를 보다 풍성하게 해주는 또 다른 맥락. 아직 손에 잡혀지지 않은 판타지 '낌새'에 있다. @콧구멍 위로 1.5센티미터를 더듬어 올라가면 존재한다는 전설의 감각기. 야콥슨 기관. 시각과 시냅스에 그의 대부분의 지위를 물려주고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결정적인 역할을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여전히 호르몬의 낌새를 감지하며 그 속내를 형상화하여 꿈으로 보여준다. 예의 그 눈뜬 당달봉사에게. @메스꺼움. 역겨움. 아니꼬움까지. 직시하여 보여주지 못하는가. 혹은 보여주지 않는가. 와 같은. 작가의 환유를 악취를 향기로 전하는 일종의 기만이라 독해한 것은. 가차없다. 향수를 가장한 악취. 암내.를 얄읏한 공은. 낌새. 로 일관하고 있다. 사실 대부분의 속내는 낌새로 알아차릴수 밖에 없는데 대추리 사태로 본. TV 토론에서. 패널로 참가한. 그가 뭐랬더라. 미국은 땅이 에이커 단위지만 한국은 땅을 평으로 계산한다. 고 한 얄읏한 인상을 가진 한 패널.은 누군가 거짓을 말하고 있고 아무것도 모르는 측이 맡은 낌새를 부풀리는 것보다 정보를 가진 측이 정보를 감추는 것이 더 큰 거짓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은 이 야콥슨 기관으로 감지해낼수밖에 없는거라, 화두를 통해 선지식을 대물림하는데도 이 야콥슨기관이 그 몫을 수행하고 있다는 설이 있기도 한데, @다른 예술이 전시로 인해 맥이 이어지고 유지되는데 반해 사진에서 전시는 일부. 를 차지한다. 사진은 전시보다 더 큰 작업. 이 주를 이룬다. 그리고 그 작업의 한 가운데 작가가 놓이며 작업의 결과물들은 가족사진부터 사고현장까지 다양하게 드러난다. 작가는 작업을 일기. 라 표현하고 있고. 나도 그에 동의한다. 매일같이 카메라를 허리춤에 달고 다니는 작가에게 사진은 작업은 분명 일기.다. 전시는 그 일부를 포획하여 다양한 전시목적을 가지고 기획되어 포장된다. 이는 아마도 사진과 갤러리의 관계, 사진집이나 출판업계와의 관계, 미술품과 미술품과 동일하게 거래가 가능한 대형 사진 프린트물과의 관계 등에 의해 밝혀지고 정립될 것이지만. 들라로슈가 사진의 출현으로 오늘부터 회화는 죽었다라고 한 이후로 현대예술에서 사진의 지위.와 함께. 사진에서 전시가 갖는 의미는 다소 모호한것이 사실이다. @전시를 통해 실험의 결과를 발표하고 형식미학을 정립시킨다는 전시의 아우라는 좌대를 벗어던지고 전시장을 벗어나면서 이미 오래전에 깨어졌지만. 이동이 가능하며 펼쳐보일수 있는 갤러리를 들고다니며 자신의 예술을 증명해 보였지만. 전시라는 방식은 인터넷 시대의 신문처럼 여전히 자신의 판타지를 고집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새로운 환경과 그에 따른 전략.은. 틈에 끼워진 얄읏한 공을 통해 틈입.을 시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틈을 통해 들어가고자 하는 곳.에서 전시.의 다른 의미를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얄읏한 공으로 재정렬된 사진들이 일사불란하게. 벌리고 있는 틈.은 우리가 기대하는 판타지, 작가의 판타지 사진의 판타지 아울러 현실의 판타지인, 를 보여줄 틈.이다. 2. 틈과 판타지. 그리고 그 낌새

@우리, 분단의 현실이 너무 드라마틱하지 않은가.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하며 분단의 향기.로 내 아이들에게 폭탄을 물려주겠는가. 그러니 영화를 보라고 한 배우의 말처럼. 우리는 폐허 속에서 낭만을 찾는다.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폐허. 가 향기로 승화 되는 일은 허다하다. 그것은 사진에 딸린 한줄 글줄에서 드러나기도 하고 사진가의 일기에서 에세이에서 내적 고민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작가는 퍼포먼스의 연속이다. 대추리로 전입하여. 사진을 찍고 얄읏한 공으로 전시를 하는. 그것은 퍼포먼스라기 보다는 함. 행위. 보다와 하다.로 이루어진 삶에서 봄으로 그치는 삶에서 함으로 뛰어든 함. 그것이다. 그것은 말이 아니라 글이 아니라 행위를 통해서 전달되는 낌새를 차릴 수 밖에 없는. 진정성.이 담긴 환유이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말없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오리다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 와 같은. 정착에 대한 의지. 농민들의 정착을 위한 고된 행위들과 얄읏한 공의 정착을 위한 행위.의 대치. 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눈들. 카메라.와 레이다가 서로를 감시하는 형국으로. 대치한 그 사이에 끼인 현실.로 환유되기도 한다. 다큐멘터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역사성. 얄읏한 공을 통해 다르게 드러난 다큐멘터리 시각. 이 바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자 하는 그 부분이다. @사진은 틈을 찾는 작업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틈. 찰라. 결정적 순간. 그의 사진에선 틈으로 드러나는. 틈들. 얄읏한 공은 얄읏한 공으로 인하여 틈이 막히며 숨구멍을 틀어쥐인 사라질 이야기.들.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그 틈을 향해 돌진하는. 숨기는 보물찾기나 숨은 그림 찾기. 를 하는 이유와 같은. 은폐하고 은닉하고 위장하는. 환유.가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제대로 자리잡게 될런지.는. 현실의 판타지가 사진의 판타지로 제대로 전환될런지. 현실은 현실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작동할런지. 현실은 무엇이 되기를 바라고 사진은 무엇이 되기를 바랄런지. 얄읏한 공들은 그러한 점을 명확히 건들고 있다. 는 것이 그렇게 에둘러 라는 말이 어느날 갑자기 얄읏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던 이유였다.

얄읏한 공 사진작업을 위해서 그러한 사진만을 찍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는다. 수많은 컷 들 중에 한 두 컷 실소를 날리며 당겼던 이미지들이 전시를 앞둔 결과물로 최종 선정되었을텐데. 이러한 낌새를 짚어낸 이야기들로 전시가 한층 더 풍성해졌기를 바라며 시대가 이해하지 못한 몸짓이 어디 한둘이었나. 역사의 한 틈이 될. 판타지를 허구로 독해하지 말기를 바라며. @물론, 길바닥에 찌라시가 되어 뿌려지는 사진과,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종류도, 내용도, 크기도, 제시방법도 상당히 다릅니다. 전시행위를 통해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찌라시를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미지는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제게 전시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소통의 방법인데, 이것은 앞서 얘기한 다양한 소통, 혹은 제시행위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모르죠, 앞으로는 전시행위가 제게 가장 중요한 소통행위가 될지.... - 노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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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나 님의 내공이 물씬합니다..작업하시는 분 같기도 하고..문장 하나 마다 담긴 감수성을 보면..글을 쓰시는 분 같기도 하고..저처럼 천박한 따위의 글이 아닌 걸로 보면.. ..




강퇴의 추억 (2006-07-06 05:14:04)


평택맨의 지적은 상당히 의미심장 하군요..두분에게 유익한 참조가 되리라 생각함이다..이점을 저는 배병우의 성과와 한계와 더불어..좀더 나아가[혹은 물러서] 보려 합니다..

제가 배병우를 좋아하면서도..'다를바 없다'라는 술어가 '곡해'와 '냉소'로 읽혀지기를 부정하지 않는 이유는..그의 사진적 모더니즘이 결국 허위가 아니었나 싶기 때문입니다..혹은 미술관을 중심으로 배병우를 둘러싼 예술계의 주체들에 의해 그의 사진적 모더니즘이 왜곡된 것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그러나 그 허위가 타자에 의해 왜곡된 것이라 하더라도..결국 배병우가 그렇게 왜곡되어진 허위 속에 안주해 버린 이상..그리고 그러한 안주를 돌파할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한 이상..결국 타자의 왜곡마저 자신의 한계 속에 수렴한 꼴이 아닌가 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배병우의 사진적 모더니즘은 회화적 모더니즘의 사진적 재현이 아닐까..하는 판단입니다..그의 소나무들은 가장 사진적 효과에 충실하면서도..가장 드로잉적인 결과를 초래합니다..배병우가..미술관에서 생존할 수있었던 까닭..생존을 넘어 각광을 받고 인기작가로 부각될 수 있었던 것은 일면 '회화가 되고자 하는 사진'..'회화보다 더 회화적인 사진'을 생산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미술관은 여전히 회화의 공간입니다..다큐멘타리가 이곳에 진입하는 건 그래서 어렵고..어색합니다..물론..최근의 매체와 설치는 다큐멘타리의 미술관 진입을 위한 틈새를 벌려 두고 있기는 합니다..

배병우의 사진은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결국 사진적 효과를..회화적 효과로 변환합니다..배병우의 사진은 회화로 소통되고..회화의 값어치로 유통됩니다..사진가로선 유래없는 성공이지만..글쎄요..스스로 잘해야 유사회화..짝퉁회화 정도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지금껏 미술관에 안착한 사진들은 회화를 닮지 않으면 안되었지요..

물론..매우 주관적인 평가에 불과하지만..이런 식의 회화를 닮으려는 사진의 사례는..그 무수히 많은 풍경과 인체 사진들에서 발견되는 특징이기도 합니다..제가 노순택 사진을 두고..배병우와 다를 바 없지 않은가? 라고 의문하는 이유는 노순택 사진에 내포된 형식미학의 경도에서..머랄까 강한 회화성을 느꼈다고나 할까요..이점은 평택맨이 노순택 사진에서 '구본창적 재능'을 읽는 것과 유사한 맥락일 수 있습니다..전 노순택이 배병우와는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노순택 사진의 정체성'에 관한 평택맨의 지적과 관련해서도 좀더 진전되어야 할 문제들이 있습니다..물론..이 점은 노순택의 다음 전시쯤에서 제기되어야 할 듯 하지만..간략하게나마 지적해 두고 싶습니다..제가 사회적 실천가로서의 저항적 방향성과 사진가로서의 보수적 방향성이 역방향으로 작용한다고 지적한 것에 관한 것입니다..즉 사회공간에서는 변화를 지향하면서도..사회공간의 모순이 집약된 예술계에서는 그저 '부차적인 밀린숙제하기'라면서..'전시행위'와 연관된 제도적 관례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듯 보입니다..설사 사회공간의 변화를 성취하더라도..그건..예술공간의 변화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듯 보입니다..

사회적 저항을 토대로 미술계의 보수적 위계를 확보하고..이렇게 확보된 보수적 위계를 통해 또 다시 사회적 공간의 보수적 위계를 추구하는 예를 임옥상이나 김정헌..성완경 등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일면 이들의 한계는 사회공간의 변화를 예술계의 변화로 연동하지 못한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그들이 예술공간의 변화를 초래했다고 강변한다 하더라도..여전히..보수적 위계구조 자체를 바꾸지 못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것이었다는 생각입니다..전 노순택 사진의 성공이 예술계의 변화로 이어지길 희망합니다..그건..머랄까 보수적 예술계에 편입되지 않은 성공이랄까..

사회적 실천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은 머랄까 여전히 일치되지 않는다는 느낌입니다..대추리에서 노순택은 사진을 찍었습니다..시위에 동참했을 수도 있지만..여전히 노순택의 뷰파인더는 독자적인 시점을 확보하고 있습니다..즉 대추리에서 노순택은 사진가였지요..반면..전시장에서 노순택은 사진 그 자체에 관해서라기 보다.."이번 전시를 통해 평택 대추리의 문제를 (그것이 비록 에둘러 간 방식일지라도) 다시 한번 환기시킬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라고 말합니다..전시장에선 사회적 실천가로서 존재하는 것이지요..

'대추리의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진..그리고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요즘 전시를 찾는 관객의 숫자란 뻔하기 때문입니다..실천의 효과로 볼 때..전시장을 지키느니 절박한 상황에서 죽봉을 잡거나..거리에 찌라시를 뿌리거나..아니면..1인시위라도 하는 것이 낫습니다..이건..노순택 사진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사진과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사회적 실천가이기 보다 예술가로서 정체성이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건 한계라기 보다는 가능성일 수 있는데..운동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이 밀착하기 위해선..전시를 운동가로서의 '부차적' 소통방식으로 보기 보다..오히려 역방향에서 예술가로서 사진 그 자체에서 실천의 방향성을 찾는 쪽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합니다..거칠지만..예술계의 변화에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물론..그 구체적 방법이야..고스란히 작가의 몫으로 주어지는 것이겠지요..

횡설수설..이 새벽에 머하는 건지..낼 읽어 보고..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은 수정하거나..부연해 두겠습니다..즐잠..




n.... (2006-07-06 08:02:38)


평맨 님, 강퇴 님, 잘 읽었습니다. 아, 그리고 보이나 님의 글도 여러번에 걸쳐 읽었습니다.
따뜻한 관심과 토론 감사합니다. 이제는 정말 일을 해야 할 시간이어서, 긴 답글을 달기 어렵군요.
나중에 또 들르죠. ^^

아, 한 가지만.... 강퇴 님.... 말꼬리를 잡는 것 같아 죄송합니다만.

'대추리의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진..그리고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요즘 전시를 찾는 관객의 숫자란 뻔하기 때문입니다..실천의 효과로 볼 때..전시장을 지키느니 절박한 상황에서 죽봉을 잡거나..거리에 찌라시를 뿌리거나..아니면..1인시위라도 하는 것이 낫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님 말씀대로 "실천의 효과로 볼 때",

절박한 상황에서 죽봉도 잡아보고, 찌라시도 뿌려보고, 1인시위도 해보고, 전시행위까지 해본다면요?

한 가지 부연하자면, 님의 '사회적 실천가'라는 말은 정말 부담스럽군요.
네, 제가 '사회적 충돌' 또는 '사회적 실천'에 관한 장면들을 제시하고, 또 말을 걸고, 때론 직접 행동하거나, 행동을 촉구하는 경우가 자주 있긴 하지만, 제 스스로도 저를 '작가'라고 생각하지, '사회적 실천가'라고 생각하지는 않거든요. 작가로서 전시행위를 하는 것이지, '사회적 실천가'로서 다양한 실천행위의 '일환'으로 전시를 준비하지는 않습니다.


.......


저는 잠시, 노순택의 '전시행위'를, 님의 '미술비평행위'로 바꿔서, 님의 글을 다시 읽어 보았습니다. 잘 안 읽히는 부분도 있지만, 잘 읽히는 부분도 있군요.


일을 해야 해서..... 며칠 게시판 토론에 참여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




강퇴의 추억 (2006-07-06 14:06:36)


윽..무던히 잘 참으시더니..한방 날리시는 군요..언젠가 저의 '미술비평행위'에 관해..좋은 말씀[아픈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잘 다녀오시구요..다음 전시 기대하겠습니다..꼭 가봐야지요..




장쯔이 (2006-07-07 12:31:43)


"'대추리의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진..그리고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요즘 전시를 찾는 관객의 숫자란 뻔하기 때문입니다..실천의 효과로 볼 때..전시장을 지키느니 절박한 상황에서 죽봉을 잡거나..거리에 찌라시를 뿌리거나..아니면..1인시위라도 하는 것이 낫습니다..이건..노순택 사진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것이 아니라..그럼에도 불구하고..사진과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사회적 실천가이기 보다 예술가로서 정체성이 앞서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

"이건 한계라기 보다는 가능성일 수 있는데..운동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이 밀착하기 위해선..전시를 운동가로서의 '부차적' 소통방식으로 보기 보다..오히려 역방향에서 예술가로서 사진 그 자체에서 실천의 방향성을 찾는 쪽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합니다..거칠지만..예술계의 변화에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지요..물론..그 구체적 방법이야..고스란히 작가의 몫으로 주어지는 것이겠지요.. "

지난 3월과 4월 대전 BIBI SPACE에서 열린 "방아쇠를 당겨라"는
'급진적인 사진'이 무엇일까를 나름대로 제공하고자 기획했던 전시였습니다.

도대체 오늘날 '급진적인 사진'이란 어떤 형태를 띠고 있을까?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는 꾸준히 '아뜨 인 라이프'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생각하는 '급진적인 사진'이란 일종의 '포토 인 라이프'입니다

포토 인 라이프

그것은 '사진의 고향'이 어딜까?
라는 의문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사진의 고향은 다름아닌 인쇄매체입니다

"'대추리의 문제를 환기시키기 위해' 사진..그리고 전시라는 방법을 택하는 건 시간낭비일 뿐입니다..요즘 전시를 찾는 관객의 숫자란 뻔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사진'은 대추리의 문제를 환기시키기에 매우 훌륭한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사진을 어느 공간에서 어떻게 보여주냐, 즉 어떤 형태의 '전시'가 관건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한계라기 보다는 가능성일 수 있는데..운동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이 밀착하기 위해선..전시를 운동가로서의 '부차적' 소통방식으로 보기 보다..오히려 역방향에서 예술가로서 사진 그 자체에서 실천의 방향성을 찾는 쪽이 어떨까 생각되기도 합니다."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노순택의 사진은 일간지 기사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노순택의 사진은 단지 노순택 개인전에 관한 기사에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문제 기사에 삽입되어 '지면'에 '전시'된다는 점입니다

갤러리 전시장에 전시되는 노순택의 사진은 작품입니다
그렇다면 대중매체의 '지면'에 '전시'되는 노순택의 사진은?

강퇴의 추억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노순택은 (의도적이건 아니건) 이미
지면을 통해 "운동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이 밀착"된
실천의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아닌가여?




강퇴의 추억 (2006-07-08 02:24:08)


세상에나..다 날렸습니다..1시간 넘게 쓴걸..'사용권한이 없다'니..'게시판 이름을 지정하'라니..오..이런..




강퇴의 추억 (2006-07-08 20:02:47)


'급진적 사진'으로서 '포토 인 라이프'는 훌륭한 비평적 지평을 설정합니다..문제는 포토화 이전과 이후의 라이프가 얼마나 변형되면서 또 일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제 사견으로는 '라이프 인 포토'가 '포토 인 라이프'를 추상화시키는 문제들..그래서..두 '라이프'가 결국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노순택의 예를 들면..그의 사진에서 등장하는 대추리가..그의 의도와는 달리 대추리에 대한 참조를 오히려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점은 "운동가로서의 노순택과 사진가로서의 노순택 사이의 밀착"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한데..전 솔직히 전시장에서 그의 사진을 보면서 대추리를 거의 연상하지 않았습니다..[저만 그랬나요?] 머랄까 라이프 인 포토와 포토 인 라이프가 엇나간 느낌이랄까..사진 속 대추리와 사진 밖 대추리가 상호 준거하지 않는다고 할까..반면 동선의 마지막에 걸려 있는 텍스트는 ..그때까지 다른 방식으로 인식된 것을 사회문제적 지평에서 회고적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합니다..본인은 '사회적 실천가라는 말이 부담스럽다'지만..그의 텍스트가 작용하는 방식은 실제론 어쩔 수 없이 실천가로서의 정체성이 우선하는..

결국..'포토 인 라이프'의 가능성은 '라이프 인 포토'를 통해서 판명될 수 있고..이 두 표현에 등장하는 '라이프'들의 밀착 내지 상호참조는 결국 진부한 표현이지만..'포토화'에 대한 작가의 고민에 달려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힘든 일이겠지만..사진 속 대추리와 사진 밖 대추리가 노순택의 사진작업 속에서 보다 직접적으로 참조되었으면 합니다..

날린 부분에 대한 대략의 요약입니다..대중매체나 지면 속에서 노순택의 사진과 텍스트에 관해서는 좀더 생각해 보도록 하겠슴이다..
더운 여름입니다..바쁘시더라도..건강 챙기시구요..




Manager (2006-07-08 22:46:23)


"강퇴의 추억"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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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퇴의 추억 (2006-07-08 23:35:02)


무식해서 지송..사실 들어도 먼말인지..아..submit은 알겠네요..조오기 조 파랗고 예쁜 단추..음..즐잠..




장쯔이 (2006-07-09 10:16:36)


"'급진적 사진'으로서 '포토 인 라이프'는 훌륭한 비평적 지평을 설정합니다..문제는 포토화 이전과 이후의 라이프가 얼마나 변형되면서 또 일치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제 사견으로는 '라이프 인 포토'가 '포토 인 라이프'를 추상화시키는 문제들..그래서..두 '라이프'가 결국 완전히 다른 것이 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노순택의 예를 들면..그의 사진에서 등장하는 대추리가..그의 의도와는 달리 대추리에 대한 참조를 오히려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포토 인 라이프'와 '라이프 인 포토'

제가 생각하는 '포토 인 라이프'는
말 그대로 삶 속에 포토의 '영역' '범주'를 뜻합니다
이를테면 포토가 어떤 '영역' 혹은 '범주'에 속할때
급진적인 포토가 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에서 설정한 문구입니다

제가 생각한 '오늘날' 급진적 포토는
인쇄매체에 '전시'되는 포토입니다

흔히 '인쇄매체'에 실린 포토를 아트로 간주하지 않거든요
특히 노순택의 경우 그 점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죠

인쇄매체에 등장하는 노순택의 사진은
기존 '보도사진'의 '탈'을 쓴
기존 보도사진을 해체시킨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강추님께서
"그의 사진에서 등장하는 대추리가..
그의 의도와는 달리 대추리에 대한 참조를
오히려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

만약 제가 '라이프 인 포토'를 생각한다면
좀 포괄적인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게 2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군요

1) 대부분의 사진작가의 삶(생활)은
'라이프 인 포토'가 아닐까, 합니다

2) 포토 자체에서 '라이프'가 드러나는
'라이프 인 포토'




강퇴의 추억 (2006-07-11 18:04:42)


1) 대부분의 사진작가의 삶(생활)은 '라이프 인 포토'가 아닐까, 합니다
2) 포토 자체에서 '라이프'가 드러나는 '라이프 인 포토'

오래도록 '라이프 인 포토'와 '포토 인 라이프'에 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관건은 미술관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 아닌가 생각되는 군요..'아트 인 라이프'와 '아트 인 아트'를 구분하는 장치가 바로 미술관이니까요..'아트 인 라이프'의 한 세부적 형식으로서의 '포토 인 라이프'의 가능성을 노순택의 경우 '지면 위에서의 전시'에서 발견하려는 쯔이님의 의도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그런데 문제는 일단..노순택의 '지면'의 예술적 특성을 보기에 앞서..일단..'전시공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 '전시공간에서의 예술'..'전시공간에서의 사진' '전시공간에서 노순택의 사진'을 어떻게 볼것인가?의 문제가 논리적으로 해결되어야 할 듯 합니다..이건 또 비평에서 전시공간은 무엇인가?의 문제로도 연결되는군요..예컨데..노순택의 경우 '포토 인 라이프'의 가능성이 '지면'에 있다면..그것은 '아트 인 라이프'와 전시공간 사이에 반발작용을 고려한다는 것이고..만약 그렇다면 쯔이님의 '포토인라이프'라는 개념이 BIBI space라는 전시를 통해 제시된다는 것은 일면 모순적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합니다..부연하자면..미술관에 한정될 수 없는 '아트 인 라이프'가 여전히 미술관의 틀 내에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가? 그렇지 않다면..어떻 방식들이 가능할가? 이런 문제들은 어떻게 해결되는지..궁금하군요..




장쯔이 (2006-07-12 15:23:49)


강추님의 지적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우선 '전시공간'에 대한 저의 소견을 드리지요

60년대 이후 전시공간은 중성적 공간(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생활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이제 '전시공간'이 '중성공간'을 뜻하지 않게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성공간이 아닌 생활공간이라고 하더라도
전시를 하게 되면 그 생활공간 역시 '전시공간'으로 전이됩니다

물론 그 '전시공간'은 절대적, 그러니까 항상 전시공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활공간으로 돌아갈 수 있기도 합니다

마치 제가 예전에 '변화하는 사물'을 말씀드렸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를테면 사물이 작품으로, 그 작품이 '다시' 사물로...)

BIBI SPACE의 "방아쇠를 당겨라!"는 기존 전시공간에서
오늘날 급진적인 사진이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로 등장할 것인가?
에 대한 저 나름대로의 자료적 접근이었습니다

제가 BIBI SPACE 2층에 특히 방에 구본창의 '패션사진'과
노순택의 사진들을 설치놓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사진이 급진적인 사진의 형태를 가능케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구본창의 '패션사진'은 이미 패션지 '지면'을 통해 발표되었습니다
그리고 노순택의 사진은 일간지 '지면'에 전시될 수 있는 작품이지요

패션지나 일간지 지면에 수많은 사진들이 인쇄되는데
그 지면에 작품사진이 삽입된다면 어떤 반응이 발생할지 궁금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전시공간'의 형태가 변형되고
일상적으로 알고 있던 '지면'의 사진들과 차이가 있는
작품사진이 '전시'되었을때 독자/관객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합니다

강추님께서는 어케 생각하시는지요?




강퇴의 추억 (2006-07-20 03:27:04)


몇가지 신상의 이유로..답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샘께서 하신 말씀들이 제 안에서 조금씩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군요..아직 정리되지 않아..댓글 형식으로 달기 보다는 전시취재 형식으로 발전시켜 보고 싶군요..'전시의 게릴라적 전략'이랄까..조만간..안부 전하겠습니다..




장쯔이 (2006-07-20 15:57:30)


종종 이런 말을 우리는 합니다
인간은 환경에 잘 적응한다고...

만약 이 말을 전시/공간에 적용시킨다면
전시/공간이 어떤가에 따라 작품이 달라지게 된다고...

따라서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전시/공간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전시/공간에 어떻게 연출하느냐도
중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똑같은 작품이라도 어떻게 연출하느냐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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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   [펌] 눈물   2006/06/09 1168 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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