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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07-28 23:16:23, Hit : 1256, Vote :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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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론] 얄읏한 공 리뷰

(
'.
순택님 사진이야 넷상에 많이 퍼져있으니 알아서들 보시고.--;
어렵다-꾸민다-속인다의 연관관계를 생각하는 요즘이라는.   밥말리 말마따나, 선동의 이유를 선명히 해야하는 요즘이다.   더불어, 일정의 사진에 관한 너무나 다양한 한국 미술계들의 인식을 읽을 수 있는 아주 좋은 텍스트들이다. 핫. 그들의 기준을 찾아보라.
.'
)
  + + +
출처 : 공사공구일삼




평택맨 (2006-05-29 00:04:33, Hit : 295, Vote : 3)  

노순택의 얄읏한 풍경이 남긴것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그 요상한 공을 보러 마지막날에 전시장을 방문했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에 노순택이 이 전시회에 임하는 각오랄지, 자세랄지... 뭐 말로 표현하기 거시기한 느낌을 받게 됬다. 우선, 현장에서 참여 작업을 실천에 옮긴 작가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하면서 '공'이 남긴 것에 대하여 두서없이 몇자 적에 볼까 한다.

전시는 역시 전시장에 가서 보아야 한다는 진리를 다시 깨닭게 된다.
내가 만약에 인터넷에 올라온 이미지들만 가지고 감상문을 썼다면, 칭찬과 덕담 일색으로 써내려 갔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기대에 조금은 아쉽다 라는 것이 나의 전시회를 보고 느낀 소감이다.
이번 전시 사진들의 면면을 보면, 한가지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조형적, 미학적인 접근은 너무나 다양해서 백화점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얄읏한 공을 퍼올리는 포크레인 부터 달밤을 연상시키는 공까지..정말 다양한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는 공은 좌우당간에 구조물일 뿐 이었다. 결국에 그곳 사람들의 실상을 보여 주는 다큐멘타리적 주제를 포장 하는 상징적 존재에 불과했다.
나는 내심 작가가 주민들이건, 얄읏한 공이건 한가지만을 선택했으면 했다.
다큐적 요소와 미학적 요소가 비슷한 비중으로 공존하는 전시장에서 감상자가 느낄 수 있는 판단은 무딤과 약간의 모호함일 것이다. 주민들의 근접촬영과 소개는 얄읏한 공을 전혀 얄읏하게 만들지 못했고, 주민 들의 처해 있는 상황을 여과없이 보여주고자 했다면, 전략적으로 탈조형과 탈미학을 감행 했어야 했다.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기는 했지만, 허무한 대목이 아닐수 없다.

그리고, 전시장에 작품수가 너무 많았다.
작품을 많이 거는 것도 전략이 느껴져야 한다. 작품들의 내용을 한번 보자.
당면한 현실에 비하면, 너무나 아름다운 시골의 풍경이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낭만적인 찰라를 많이 연출했다. 그런 작품들은 약간 부족한듯 걸어야 작품들이 생기가 느껴진다. 그러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얄읏한 풍경을 배제하고, 주민들에게 촛점이 맞추어 졌다면, 많이 걸면 많이 걸수록, 그것도 도식적으로 걸수록 전략과 컨셉이 느껴 졌을 것이다. 이 지점이 내가 느끼는 아쉬운 점이다.
나는 이 전시회는 얄읏한 풍경이 내포하는 암시 정도로 연출되고 그 컨셉에 의하여 작품수가 절제된 디스플레이 였다면, 아주 괜찮고 새로운 변신이자, 진일보한 전시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작품을 지지하고 있는 자석들은 작품감상에 작지만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자석에서 발생되는 빛은 분명히 시야를 방해 한다.

쓰고 나서 보니, 덕담이 아니라, 악담을 한듯 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진 않지만, 그래도 전시에는 제대로된  전략은 필수적이고, 과도한 의욕에는 자신의 신체를 처내는 고통과 절제가 필요하다. 나는 노순택이 좀더 능력을 발휘 할수 있는 작가가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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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순택 리뷰 : 21세기 초판옵티콘의 실체, 대추리 레이돔

21세기 초판옵티콘의 실체, 대추리 레이돔

‘사람들, 곡식, 새, 꽃, 나무, 풀, 기러기, 가창오리, 똥개, 황소, 고양이, 물, 철조망, 집, 트랙터, 자동차, 달, 구름, 깃발’. 이 모든 것들이 노순택의 카메라 ‘필름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햐얀 공과 함께. 노순택은 이 공을 ‘얄읏한 공’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지난 3년간 평택 팽성읍 대추리의 황새울 들녘의 풍경과 일상과 사건을 흑백사진으로 담았다. 그 모든 컷들은 하나같이 들판 한가운데 자리잡은 30미터 높이의 레이돔을 동시에 담고 있다. 레이돔. radar+dome=radome. 아메리카 군대의 최첨단 정보통신망이다. 노순택은 평택 들판을 지배하고 있는 가시적 구조물을 통해서 한반도와 그 너머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초판옵티콘으로써의 레이다돔을 편집증적인 집요함으로 카메라에 담아냈다. 그는 얄읏한 공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전시명 타이포에 ‘o’ 네 개가 나란히 자리 잡도록 함으로써 야릇함을 보다 야릇하게 만들고 있다. ‘에둘러’ 담았다고 말하고 있듯이, 그는 자신의 카메라가 레이돔을 향하고 있으되 언제나 대추리의 풍경과 일상과 사건을 포착한 장면을 통해서만 그렇게 하겠다는 계획으로 초지일관하고 있다.

노순택의 간접화법은 ‘분단의 향기’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다큐멘타리 사진이라는 것이 피사체를 리얼하게 포착해내는 데 집중했던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에둘러’ 대추리의 풍경을 담았다. 캠프 험프리 전경 속을 담는 건 기본이다. 물론 그 풍경 속에는 레이돔, 그놈이 들어 있다. 관객입장에서는 노순택의 풍경이 그냥 풍경이 아님을 간파한 이후에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놈을 다루고 있는지에 관해 관심이 쏠린다. 마른 논바닥의 성긴 풀잎 사이로 야릇한 공이 선명하다. 최병수의 미사일 솟대 뒤로도, 몰려오는 먹구름 아래에도, 줄지어 날아가는 기러기들의 행렬 뒤에도 여지없이 야릇한 공은 대추리를 지켜보고 있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위에 떠있는 녀석과 부식되어가는 경운기 뒷부분 사이로 보이는 녀석은 초저녁 보름달을 보는듯하다. 논바닥의 볏그루에 포커스를 맞춘 풍경은 놈을 포커스 아웃된 상태로 만들어 버린다. 여물 먹는 황소의 검은 눈망울 속에 하얀 공 하나와 외양간 너머 야릇한 공 하나가 동시패션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나뭇잎 사이로 두둥실 보름달처럼 떠오르는가 하면, 고요한 달빛 아래 또 하나의 달이 떠있다. 농수로 바닥아래에 비친 녀석은 가증스럽게도 영락없는 월인(月印)이다.

일상과 사건 속에 담긴 레이돔은 더욱 절묘하다. 그는 일상 속에 사건을 담아냄으로써 객체를 포착하는 예술가 주체의 자리를 확인하게 한다. 철조망 앞에서 농사짓는 농부의 머리 위에 덩그러니 하얀 공이 떠있다. 들녘에서 괭이질하는 농부의 동선 끝에도 하얀 공이 있다. 마른 논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불꽃은 레이돔과 중첩하며 묘한 메타포를 전달하고 있다. 정태춘의 시노래 ‘저 들에 불을 놓아’를 연상하게 하는 들불 장면은 대추리의 일상이자 사건이다. 포크레인 삽질로 레이돔을 떠내기도 한다. 노순택이 잡아낸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들녘의 전투이다. 들녘을 가로지르는 전투경찰의 대오 뒤로 레이돔이 떠있다. 들판 한가운데서 경찰 무리와 시위대 무리가 진압봉과 쇠파이프를 들고 얽혀있는 바로 그 사건의 장면 뒤에서도 레이돔은 변함없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 이 무슨 희극적인 비극인가. 전투경찰과 시위대의 비극적인 전투장면은 ‘아메리칸 아미의 레이돔’에 의해 더욱 증폭하여 콧등을 시리게 한다.

노순택의 대추리 레이돔 작업은 우리가 예술작품과 실재의 사이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기호의 삼각형 한가운데 놓여있음을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한다. 머잖아 한국사회는 대추리와 대추리 사람들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노순택은, 또는 노순택의 사진은 그들을 깊이 담아두었다. 대추리 사람들과 레이돔을 섞어서 또 다른 공을 만든 혼성사진 속에는 동일인이 두 가지 모습으로 대비되어있다. 꽃단장한 주민과 투쟁하는 모습의 주민이 그것이다. 지난 5월 4일 대추리 분교는 피로 물들었다. 노순택은 분노와 슬픔을 삼키며 전시를 준비했다. 피로 물든 실재의 대추리와 노순택 사진 속의 대추리는 어떤 관계인가. 5월이 지나는 마당에 노순택의 얄읏한 공이 긴 여운을 남긴다.

김준기(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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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퇴의 추억 (2006-06-11 04:01:57, Hit : 972, Vote : 14)  

야릇한 공, 혹은 현실의 사진적 자기화 방식에 관한 비판적 독해




1.

피사체의 내용적 부담을 형식을 통해 중화하는 힘. 노순택 사진의 매력 가운데 하나. 예컨대, [분단의 향기 36-06]는 끝도 없이 펼쳐진 하늘을 찍는다. 그러나 이곳은 낭만적인 폐허가 아니다. 총탄의 흔적으로 난도질당한 물건들. 이곳은 아마도 미군 전투기의 공대지 사격장이었을지도 모른다. ‘분단’. 노순택의 사진은 그것이 내뿜는 화약냄새와 악취를 ‘향기’로 전달한다. 일종의 기만이다. 노순택은 이런 식의 기만을 전략적으로 선택한다. 아무리 ‘향기’로 치장해도 여전히 악취는 숨겨지지 않는다. 향수에 섞여 코 끝까지 파고든 암내와도 같이. 혐오를 향기로 위장하는 건, 처음부터 눈돌리지 말라는 것. 외면하지 말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분단. 한반도의 본질적 모순구조의 한 축. 우리는 그것이 뿜어내는 악취를 명분으로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것들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노순택은 분단을 향기로 위장한 채, 코 밑까지 조심스레 들여 밀고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거리에서, 그것의 악취를 갑작스레 노출한다. 관객들이 외면하지 못하도록. 노순택이 전략적 기만을 선택한 목적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혐오를 향기로 위장하는 것이 노순택 사진의 전략적 기만이라면, 그 구체적 위장술의 하나는 형식미학이다. 형식미학은 그것의 미적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대중에겐 미감의 보편적 상식으로 작용해 왔다. 잘 짜여진 화면, 공간, 절묘한 피사체의 배열, 형태, 정지와 운동. 노순택은 사진의 모든 형식미를 다 보여주려는 듯하다. 여기에 또 다른 위장술 하나가 첨가된다. 유머(Humour)이다. 현실을 우회하면서 그것의 무게를 덜어내는 전략. 유머는 현실의 실재성을 뒤틀며, 현실의 ‘신화’를 의심한다. 중무장한 전경 사이를 태연히 걸어가는 캐주얼한 차림의 미국인[분단의 향기 015]. 한국사회에서 미국의 의미와 존재감을 한없이 조롱하는 사진이다. 노순택 사진에 있어서, ‘분단’이 현실적 지평 위에서 일정한 운동성을 획득하는 ‘다큐써클’의 방향성을 제공한다면, 형식미학과 유머는 카메라라는 매체 자체의 본질적 효과을 지향하는 ‘미디어써클’에 방향성을 제공한다. ‘다큐써클 vs. 미디어써클’의 대립은 언젠가 040913에서 “허구의 불경건한 해체”라는 제목으로 올린 게시물에서 노순택론을 위한 가설적 개념틀이기도 하다.
http://www.040913.com/bbs/view.php?id=mudaeppo&page=8&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723 [새창에서 열기]

노순택 사진에서 유머를 미디어써클의 운동논리 속에 두려는 것은, 결국 형식미학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진기 뷰파인더의 위치와 관련되기 때문. 레이돔을 굴삭기 위[sb011], 혹은 집합한 전경들의 머리 위에 올려두는 것[sb006]은 뷰파인더의 존재와 작동의 효과를 증명한다. 이건 [sb004] 혹은 [sb009]를 찍을 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2.

이건 모든 사진에서 마찬가지이겠지만, 노순택 사진에서 뷰파인더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다큐써클을 회절할 때, 뷰파인더는 대체로 피사체에 복무한다. 그것은 피사체가 파생하는 의미를 가장 잘 받아내는 위치에 고정된다. 반면, 미디어써클을 따라 회절할 때, 뷰파인더는 피사체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고정된 피사체 주변을 탐색하다가, 그것이 특정한 형식미학의 요건을 충족하거나, 피사체들이 서로 중첩되면서 특정한 대립적 의미의 아이러니를 생산할 때, 뷰파인더는 만족한다.

[분단의 향기전]은 여러모로 의미있는 전시였다. 왜냐하면, 동일한 논리로 환원될 수 없는 다큐와 미디어의 회절이 절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을 능란하게 잡아냈기 때문이다. 이건 의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피사체를 존중하면서도 뷰파인더를 정확히 의식하는 지점 가운데 하나가 [분단의 향기 010]였을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듯 함께 늘어서 선 남과 북의 군인들. 그 중 몇몇은 수다를 떨고 있다. 처음엔 허접한 연출로만 알았다. 고작해야 신파극에 동원된 엑스트라 정도였겠지.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은 상황들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건 나의 믿음이었다. 이 믿음은 또 편견이었다. 그들은 적이어야 한다는. 서로 총을 겨누어야 한다는. 그들이 서로 그렇게 어울려서는 안된다는. 하지만, 그들은 분명 서로 적이 아닐 수도 있었던 것이다. 단순한 가정이 아니라, 분명 현실 속에서. 그들을 서로 적으로 만드는 것은 어쩌면 믿음, 즉 편견이었다. 물론, 그 편견을 강요하고 ‘신화’화하는 이데올로기 장치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아야겠지만, 그건 논외의 내용이다. 어쨋거나, 노순택은 별다른 기교 없이, 피사체들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의미가 고착된 의식에 균열을 내는 지점을 충실히 접근해 가고 있다.


3.

[얄읏한 공]전에 나온 사진들은 특히 좋다. 잘 찍었기 때문. 잘 찍었다는 건, 여전히 매체의 미학적 효과와 다큐의 내용적 문제의식이 공명한다는 것이다. 피사체를 사진적 형식미학으로 재현하는 방식이나, 레이돔을 굴삭기 버킷 위에 올려놓는 등의 유머감각은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미디어와 다큐의 공명은 [분단의 향기]에 비해 울림이 크지 않다. 절정의 형식미와 유머를 떠받는 한 다큐가 무너져 버린 느낌. 미디어와 다큐 사이의 불균형. 그러나 이 불균형이 노순택 사진의 한계로 직접 번역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사진에 관한, 다큐에 관한 여러 화두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깨져버린 공명. 레이돔은 한껏 미학화된다. 레이돔의 미학화는 노순택 사진의 특징인 전략적 기만의 한 양상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만이 성공하려면, 좀더 깊고 넓은 다큐의 지평을 설정해야 한다. 좀더 자질구레한 현실의 수다를 좀더 공유해야 한다. 레이돔의 미학화는 평택의 삶과 문제에 대한 좀더 포괄적인 이해와 맞물려야 하지 않았을까? 이 문제는 장황하지만, 단편적일 수밖에 없는 작업노트만으로 충족되지 않는다. 평택의 삶과 유리된 레이돔의 미학화는 자칫, 그것의 추상화를 초래할 수 있다. 이상한 레이돔. 기괴한 레이돔. 형이상학적 레이돔.

물론, [얄읏한 공]에서 노순택이 시도하는 다큐는 실험적이다. 특별하고 신선하다. 수동적인 기록이 아니라, 좀 더 역동적인 다큐. 예컨대, [너른 못 049]처럼, 농민이 내리치는 괭이와 멀리 보이는 미군기지를 중첩시키는 방식이다. [sb 014]처럼, 한 농민이 휘두르는 쥐불의 연장선상에 레이돔둔다. 찰나의 순간에 우연히 잡힌 모양새. 그러나 그가 의도하는 주제를 전달하기에는 충분하다. 그러나 그의 역동적 다큐는 이미 구성되어진 것이다. 여기서 새삼 다큐의 '리얼 미러링(real mirroring)'에 관한 순진한 믿음을 염두에 두는 것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은 ‘미러링 vs 구성’의 대립이 아니다. 결국 대상을 보는 태도와 다큐멘타리스트의 진정성에 있는 것이다. 노순택 사진에서 다큐의 진정성을 문제 삼는 것은 그가 사실을 조작했다거나, 왜곡했다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상을 사진적으로 자기화하려 한다는 것이다.


4.

물론 굳이, 현실의 사진적 자기화를 비난할 이유는 없다. 그건 오히려, 사진가로서의 자의식의 발현일 수 있다. 노순택의 사진은 기자의 사진이 아니라, 예술작가에 의한 사진작품이다. 그의 사진을 정보가 아니라,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그러한 자의식이다. 하지만 그러한 자의식이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확장하는 토대로 작용한다면, 거기에는 몇 가지 문제가 동반된다. 우선 현실에 대한 작가적 전유의 문제. 현실은 의미의 지평 속에 위치한다. 모든 딜레마는 현실을 둘러싼 의미구조들의 다층성에서 기인한다. 현실을 구성하는 의미들은, 소수의 쌍방 대립의 백터들에 의해 설명되어질 수 없다. 무한히 미분되는 시공간의 세팅(setting) 속에서 행위자의 실천에 따라 무한히 잘게 쪼개질 수 있는 의미들. 이것들은 소위 현실을 부유하면서, 현실을 떠받는 힘들이다.

이 힘들이 만들어 낸 현실은 단지 소수의 시공간 구간단위로 적분한 총합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큐가 사건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이유이다. 이건 동시에 다큐의 수동성이 때로 현실에 대한 최소한의 진정성과 관련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순택이 뷰파인더의 위치를 달리함으로써 현실의 의미를 특정한 방식으로 구성하는 지점은 현실에 대한 사진적 자기화를 성취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구축하는 수많은 다른 의미들이 삭제될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둘째, 현실에 대한 사진의 급진적 자기화는 소통에 있어서 현실에 대한 부정 가능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뷰파인더의 위치를 과도하게 노출하는 것은 소통의 의미를 자의적으로 일방화, 단순화한다. 이런 식의 일방화에 동의할 수 없는 독자들은 사진이 소통하려는 내용을 의심한다. 사진이 산출한 의미에 대한 관객의 의심은, 사진에 대한 의심이 아니라, 사진의 대상인 현실에 대한 불신으로 작용한다. 또 이 불신은 현실에 대한 외면과 회피의 명분이 될 수 있다. 평택의 현실을 구축하는 미세한 의미들의 망들은 어떻게 짜여져 있을까? 미군기지를 향해 한 농부가 괭이를 휘둘렀다면, 왜 일까? 들불의 화염과 오버레핑되는 아주머니, 레이돔을 태워버릴 듯 쥐불을 휘두르는 농부는 왜 미군을 거부하는 걸까? 이들의 거부는 모든 평택 사람들을 대표하는 걸까? 만약 대표하지 못한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들은 어떤 면에서 좌절했고, 갈등했으며, 떠나야했으며, 또 왜 남아야 했을까? 남은 사람들을 대신해, 경찰과 대치하는 젊은이들은 어디서 왔으며, 어떤 경험을 갖으며, 왜 나섰으며, 왜 피 흘리는 걸까? 평택 사람들과 젊은이들의 산출하는 의미의 망은 완전히 같은 것일까? 또 노순택은 농부들이나 젊은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사진기를 들었을까? 노순택이 만들어내는 의미의 지평은 남아 있는 평택사람들과 외지의 젊은이들의 의미지평과 어떻게 스며들며, 어떻게 분리되는가? 물론, 이러한 문제들에 노순택의 사진이 답해야 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다면, 좀더 다양한 의미들이 복원될 가능성을 좀더 열어 두었으면 어땠을까?


5.

셋째, 해묵은 이분법이긴 하지만, 모더니즘 사진과 어떤 식으로 전선을 그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사건의 단순한 기록이 아니다. 그건 사건에 대한 자기화된 해석이다. 자기화된 해석을 추동하는 것은 작가의 의식. 그런 점에서 소위 ‘작가주의 다큐’는 본질적으로 모더니즘 사진과 그리 다르지 않다. 이 문제는 민중미술의 지평에서 논의될 수 있을 듯 하다. 민중미이 추상미술을 넘어서려 했지만, 결국 큰 틀에서 모더니즘이라는 한 배 속에 편입될 수밖에 없는 것은 작가의 의식을 토대로 의미의 자의성을 필연화하려 했기 때문이다. 물론, 민중미술이 모더니즘과 분기하는 지점은 사회적 문제의식과 참여정신이다. 민중미술의 사회의식은 미술의 정당성 주장을 윤리적 차원으로 치환하고, 미술에서 자의적인 도덕적 위계구조를 만들어 낸다. 이 위계의 꼭지점에 선 민중미술가들은 사회에 대한 자기화된 해석을 배타적으로 정당화하려 한다. 물론, 이 정당화는 또 슬며시 미학적 정당화로 번역된다.

민중미술이 모더니즘과 만나는 지점은 민중미술의 사회의식이 고양된 개인의 의식이라는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민중미술가의 도덕적 우월성이나 정치적 선도성은 사실 정치적 반동이 아니라, 민중에 대해 작용하는 것이며, 이는 결국 각성된 천재로서의 모더니스트 의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순택의 사진에 관해 논하면서, 민중미술의 성공과 실패를 운운하는 것은, 그가 민중미술이 노정했던 한계를 뛰어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노순택이 평택에 관한 사진을 찍었다면, 먼가 다른 것들을 보고 싶다는 것이다. 레이돔이 평택문제의 근저에 흐르는 모순의 기본축일 수 있다는 시각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그것은 레이돔으로 환원되지 않는, 레이돔에 의해 파괴되면서, 또 그것을 극복해 내며, 그것과 공존해 왔던, 평택사람들의 삶의 다양한 의미와 힘을 보았으면 싶다는 것이다.


6.

[얄읏한 공] 에는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의 벡터가 작용하고 있다. 물론 이 두 힘은 노순택이 두 개의 상이한 장들이 중첩되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이 중첩되는 지점에서 노순택의 사진은 상이한 방향으로 운동하려는 것 같다. 첫째 장은 물론 미술장이다. 이 장에서 작가는 사진가이며, 예술가이다. 두 번째 장은 정치적 사회공간이다. 이 공간에서 노순택은 운동가이며, 저항적 실천가로 활동한다. 이 두 장이 중첩된 공간에서 노순택은 사진을 통해 저항적 실천의 과제를 수행하려 한다. 여기서 감히 [분단의 향기]에서 보였던 미디어써클과 다큐써클의 공명이 [얄읏한 공]에서 깨졌다고 평가하는 것은, 예술가로서 미술장의 운동방향과 정치적 사회공간에서 실천가로서의 운동논리가 역방향으로 작용한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정치적으로는 저항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면서도, 표현적으로는 보수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사회적 권력 관계에선 맹렬히 중심에서 이탈하면서도, 미술 장에서는 중심에 진입하고자 시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 괴리는 ‘에둘러 간다’는 의도로는 완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노순택의 실천가로서의 저항은 미술 장에서 등가의 저항으로 변환되지 않는다. 역방향의 변환도 그리 녹녹하지 않다. 그러기엔 뷰파인더가 과도하게 의식되어 있다. 추상화, 사물화, 오브제화된 레이돔. 과잉 의식된 뷰파인더가 생산하는 미학적 이미지들의 정치적 효과는 노순택의 장황한 텍스트를 끊임없이 참조하지 않고서 쉽지 않아 보인다. 노순택의 사진을 계속해서 추적하는 입장에서, 나는 그의 의식된 뷰파인더가 솔직히 두렵다. 뷰파인더를 통해 현실을 재배열하려는 보이지 않는 의지가 두렵다. 그는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성공할 작가임에 틀림없지만, 그가 구가하게 될 성공이 어떤 궤적을 그릴 것이며, 또 어디에 도달하게 될 것인지 아주 조심스럽게 보아야 할 듯 하다. 이건 노순택의 관객으로서 또 다른 실험이자, 흥미이기도 하다.







hoho (2006-07-02 11:17:46)


* <아트인컬쳐> 2006.06월호 '문제의 전시' 평론원고


노순택展 신한갤러리 5. 12~23

정착하지 못하는 땅에 발 쭉 뻗고 정착한 ‘얄읏한 공’

글|이대범 (미술평론가)


<분단의 향기>전 이후 노순택을 만난 것은 한 시사주간지 지면에서다. 그 주간지는 평택 미군기지 이전에 반대하는 ‘대추리를 평화촌으로!’라는 캠페인을 하고 있었다. 노순택이 지난 1월 11일 대추리 주민이 되었다는 그 기사에는 한 차 가득 한 이삿짐을 운반하는데 여념이 없는 그의 사진이 있었다. 그간 노순택은 수시로 대추리를 드나들면서 농민들과 그들의 생활 터인 황새울 들녘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곳에 카메라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덧붙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몇 개월 후 대추리·도두리에 대한 국방부의 강제토지수용 정책에 반대하는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 개입을 결정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자연스럽게 내 생각은 노순택에게 다다랐으며, 그가 자신의 삶까지도 부여하며 찍은 그곳의 사진이 궁금해졌다.

8살 난 거대하고 반짝이는, 너는 도대체 누구냐?

평택 팽성읍 대추리 황새울 들녘에는 농민들이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일견 고즈넉해 보이는 이러한 풍경의 이면에는 한국현대사의 파란만장한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대추리 주민들에게 안정적인 정착은 낯선 것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군의 활주로를 건설한다는 명목으로, 해방 이후에는 미군들의 대규모 기지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그들은 집과 땅을 고스란히 내줘야 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또 다시 정착하지 못하고 쫓겨나야 하는 처지다.

그간 노순택의 작업(<애국의 길 연작> <아이들은 열네 살이었다 연작> <잠시 멈춘 전쟁 연작> 등)은 당대에 놓인 가장 시의적절한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가 대추리에 카메라뿐만 아니라 자신 삶을 던진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번 작업은 그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에둘러’갔다. 그것도 한참을 ‘에둘러’갔다. 성조기와 태극기의 펄럭이는 모습, 전경과 시위대의 대치 현장, 당당하게 한국 땅을 행군하고 있는 미군들 등 정치․사회적 이슈들을 직접 화법으로 드러내던 방식에서 ‘에둘러’ 갔다. (그렇다고 노순택의 이전 작업이 ‘다큐적’ 측면만이 강조된 것은 아니다. 그의 사진에는 여타 다른 사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흔이 자욱한 시위대의 모습 등은 찾을 수 없다. 그의 사진에는 이미지의 선동성을 뒤덮을 만한 이미지의 조형성이 자리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 매개체가 된 것은 황새울 들녘에 버젓이 자리하고 있는 ‘얄읏한 공’이다. 저 멀리에서도 마을의 존재를 알려주기에 반가운 마음마저 드는 저 공의 나이는 8살이고, 크기는 30m에 육박한 거구이다. 그리고 스스로 빛을 내는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것의 정체를 모른다. 심지어 수년을 함께한 대추리 주민들조차도 모른다. 그냥 사람들은 “그냥 큰 공이다 생각하믄 맴 편한 것 아녀?”라고 말할 뿐이다.

왜 저 구조물이 거기에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에 대해서 알지 못할까? 그것이 무엇 이길래, 이곳 주민들이 애써 정착하려 했지만 그러지 못한 저곳에 버젓이 두 다리 쭉 벋고 정착해 버렸단 말인가. 이것이 이번 전시에서 노순택이 ‘얄읏한 공’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유다. 그것을 처음 접한 노순택에게도 수년간 함께한 주민들에게도 그것은 텅 빈 기표이다(이것은 이들 뿐만 아니라, 이 구조물을 처음 본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형태상으로는 기름 탱크 또는 물탱크로 보이지만, 노순택이 추적해 본 결과 그것의 정체는 레이돔(radome)이다. 그것은 정보 기술력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현대전에서 필수적인 군사 시설이다. 기이하지 않는가. ‘사람을 먹여 살려온 너른 들녘에, 사람을 죽이는 군사시설 이라니…’

‘얄읏한 공’을 가지고 하는 신명난 블랙코미디

황새울 들녘에서 아무 것도 아닌 척 빛나는 ‘얄읏한 공’은 자신이 지닌 본연의 의무를 충실히 행하고 있다. 여전히 주민들을 감시하고 있으며, 이 나라를 감시하고 있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는 텅 빈 기표였을 때, 그것은 아무런 존재도 아니었다. 그저 저 멀리에서 마을을 지칭하는 이정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의 이름(레이돔)을 알게 되고, 그것이 하는 역할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를 억압하기 시작한다. 마치 한국에서 주한미군의 존재처럼 말이다. 노순택은 레이돔의 실체와 그것에 대한 정보를 단순히 보여주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우리를 감시하고 억압하는 이러한 기이한 현실에 대한 각인이 노순택이 택한 첫 번째 지향점이라면, 그는 거기서 더 나아가 우리를 기만했던 ‘얄읏한 공’을 가지고 제 멋대로 놀기 시작한다. 이 공놀이는 앞에서 말한 ‘에둘러’가기의 절정이다.

이번 전시 작품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구조가 있다. 사진의 전경에는 대추리의 삶(들녘에 쥐불을 놓는 농민, 농민과 전투 경찰이 대치하는 현장, 쌀과 보리가 무성히 자란 논밭, 허물어진 가옥, 소가 여물을 씹고 있는 한가로워 보이는 외양간, 총총 걷고 있는 강아지, 꽃을 따고 있는 소녀, 밭을 매고 있는 할머니 등)이 있다. 때로는 정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긴장감으로 가득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후경에는 어김없이 ‘얄읏한 공’이 자리하고 있다. 후경에 자리하고 있는 ‘얄읏한 공’은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이 마을 어디에서보이는 존재로 사진에 나타난다. 즉 레이돔에 의한 감시는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전경에 자리한 이미지와 관계를 맺으면서 ‘얄읏한 공’은 새로운 의미(블랙코미디)가 생성된다. 티샷을 날리기 위해 티펙 위에 올려둔 ‘골프공’ 같기도 하고, 무성한 나뭇가지에 가려 희망을 안고 떠오르는 ‘보름달’이 되기도 하며, 대치하고 있는 전경들 틈새에서 떠오른 ‘에드벌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땅을 파고 있는 전경에 위치한 포클레인과 어울려 레이돔이 해체되는 모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간 대추리의 주민들이 그렇게도 정착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던 그 땅에 두 발 쭉 뻗고 정착했던 레이돔. 그것이 우리의 인식체계를 교란했던 것처럼 노순택은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통해 그것을 냉소적으로 기만하고 있다. ‘얄읏한 공’이 ‘레이돔’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때, 그것은 더 이상 ‘얄읏한 공’이 아니다. 그러나 노순택은 이번 전시를 통해 ‘레이돔’을 ‘얄읏한 공’으로 바꿔 놓고 있다. 블랙코미디로 가득한 거대하고 흰색의 ‘얄읏한 공’으로.

(끝으로 한마디만 하자면, 이번 전시에는 많은 작품들이 걸리면서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블랙코미디로 가득한 작품들이 대다수를 이루고 있지만, 때로는 ‘레이돔’의 실체가 전면에 부각시키는 작업들도 있다. 후자는 ‘얄읏한 공’을 가지고 놀 때의 신명남이 없다. 그저 황새울 들녘에 이미 이름을 알아버린 ‘레이돔’이라는 구조물의 존재를 확인 했을 뿐이다.)




hoho (2006-07-02 11:21:24)


<월간 포토넷> 6월호

감시․통제․지배에 대한 상징과 은유
노순택 개인전 <얄읏한 공>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가르쳐 주세요."
"그건 네가 어디를 가고 싶으냐에 따라 다르지." 고양이가 대답했다.
"어디든 상관없어요." 엘리스가 말했다.
"그렇다면 어느 쪽으로 갈지도 중요하지 않겠네."

"혹시 나는 갈 곳이 없는 건 아닐까?" 그러자 벽이 말했지.
"지도만 보면 뭘 해? 남이 만들어 놓은 지도에 네가 가고 싶은 곳이 있을 것 같니?"
"그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어디 나와 있는데?"
"넌 너만의 지도를 만들어야지."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전시장에서 길을 잃다

광화문 네거리에 위치한 ‘신한 갤러리’.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흥 갤러리’라 불렸으나 21세기에 불어 닥친 거센 자본의 세계화로 100년 전통의 은행이 신생 은행에 흡수 통합되어 이름마저 사라져 버렸다. 건물 밖에는 큰 현수막에 붙어있다. 노순택 개인전 ‘얄읏한 공’. 이름도 참 야릇하다. 혹시나 내가 국어실력이 모자란 것일까? 이 글을 보시는 독자 역시 이런 형용사가 있는지 의아해 할 지 모른다. 허나 고민하지는 말자. 얄밉고 야릇하게 생긴 공이 있어 작가가 만든 말이라고 한다.

사진가 노순택은 개인적으로 매우 잘 아는 사이다. 대학 시절 같은 과 후배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와 나는 정치학을 전공한 한국 사진판에서 희귀한 존재들이다. 당시로서는 한참 후배이기도 했고 학보사를 다녔던 그와는 볼 기회도 별로 없었다. 그러다 <오마이뉴스>를 창간 준비 중이던 오연호씨에게 노순택을 소개했다. 창간멤버로 <오마이뉴스>의 사진기자가 된 그는 3년 동안 아스팔트를 출입처 삼아 참 열심히도 돌아다녔다. 그리고는 어느 날 회사를 나왔다. 한참 잘나가는 회사를 그만두고 돈벌 가능성이 거의 희박한 전업작가의 길을 갔다.

오늘은 전시 첫날이고 아직 오프닝을 하기까지 두어시간의 여유가 있다. 텅빈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롤지와 전시 크기의 큼지막한 사진들이 액자도 없이 벽에 걸려있다. 질감이 느껴지는 종이위에 잉크로 뿌린 흑백 디지털 프린트가 꽤 큰 공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사진부터 둘러보기 시작했다. 이곳이 작년 가족을 이끌고 입주까지 하며 작업했다는 평택 팽성읍 대추리의 모습인가? 얼마 전 전경과 철거반원․군인 1만 5000명 대 주민․반전운동가 1000명이 혈전을 벌였던 그 대추리인가? 현실 보다 훨씬 어두워 보이고 핀홀처럼 비네팅까지 뚜렷한 사진 속에는 텅 빈 들과 유난히 밝은 공이 보인다. 가끔 사진 속에는 사람들도 보이지만 그들은 누구인지 명확치 않다. 여기가 어디일까? 그리고 사진마다 ‘숨은그림찾기’ 하듯 숨어 있는 저 공은 무엇인가? 나는 방금 토끼굴로 들어온 앨리스가 되어 길을 잃고 말았다.

이 사진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노순택이 작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2004년 ‘분단의 향기’라는 전시와 동 사진집을 펴내면서부터 인 듯하다. 제목에서도 느껴지듯 분단의 악취가 아니라 향기라는 묘한 비꼼이 내장되어 있다. 그는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일상의 분단을 수집하고 다녔다. 미선이 효순이 사망 사건이 후 거리곳곳에서 벌어진 반미시위와 그 반대쪽의 우익들이 벌이는 미국찬양 집회, 미군들의 군사훈련과 매향리 폭격장을 돌아다니며 분단의 이미지들을 수집했다. 그리고는 그 사진 밑에 장황하고 냉소적인 코멘트를 단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이것이 간첩이다. 일정한 직업 없이 새벽이나 밤늦게 출입이 잦은 자 / 은연중 정부시책을 00하고 00를 찬양하는 자 / 출처불명의 돈을 잘 쓴 자 / 기타 000 또는 00이 수상한자. 부모에게 빌붙어 지내는 백수는 간첩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이 같은 작업은 사진과 텍스트가 결합하면서 묘한 제3의 효과를 연출한다. 역시 대학시절 변증법적 유물론을 상당히 공부한(!) 흔적이 나타난다. 그렇다면 이번 ‘얄읏한 공’은 전작과 어떤 연관성을 갖고 있나? 당연히 분단과 미국이다. 평택은 미국이 선택한 전략적 유연성이라는 군사정책의 희생양이다. 미국기지를 한강 이남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선택된 곳이 바로 평택 대추리이다. 노순택은 전작의 주제와 동일한 연장선에서 평택을 선택했고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은 전작에 비해 당혹스러울 만큼 전혀 다른 방식을 취한다. 그 촌천살인의 텍스트도 사라졌고, 다양한 기법을 통한 콜렉터적 이미지 수집 방식도 사라졌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덩그러니 허연 공이 놓여있다.

사진캡션이 사라진 대신 장장 70매의 작업노트가 감상자를 위해 제공된다. 그는 이 글에서 이 허연 공이 무엇인지 미스터리 기법으로 추적해 나간다. 논과 밭으로 드넓게 펼쳐진 평택에서 30미터 높이로 세워진 이 공은 물탱크 같기도 하고 액화가스 탱크 같기도 하다. 하지만 ‘구글 어스’에도 드러나지 않는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의 소유 장비라는 점에서 군사장비라는 의심이 간다. 그는 이 공이 레이돔Radome 라고 추정한다. 레이돔은 레이더를 감싸고 있는 돔이다. 그 돔은 클수록 강력하다. 이 돔은 위성과 인터넷 등을 이용한 전화 팩스, 이메일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키워드가 들어간 정보를 전 지구적으로 감청하는 에셜론 기지가 있는 곳에 존재한다. 이쯤 되면 노순택이 주목한 허연 공이 어떤 존재인지 드러난다. 한반도를 감시하고 통제하며 지배하려는 미국의 정책이 물화된 형태로서의 공인 것이다. 그의 이번 전시작 중에 가장 끔직한 사진이 있다. 우사에서 태연히 여물을 먹는 소의 머리 위로 그 허연 공이 보인다. “소! 너도 감시당하고 있어!"

다큐멘터리가 진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순택이 레이돔의 정체를 폭로하기 위해 이 사진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폭로는커녕 이 공은 신비감만 더하고 있다. 무성하게 벼들이 자란 논 위로 경찰과 시위대가 경찰봉과 죽봉으로 대결을 벌이고 그 위로 공이 보인다. 사진은 소리를 들려주지 않으니 마치 호금전의 우아한 무협영화의 스틸사진을 보는 듯하다. 또 미군의 철조망 안쪽으로 우람하게 서있는 레이돔 사진은 베허부부의 급수탑을 연상시킨다. 어떤 가치판단도 유보한다는 즉물주의 사진이다. 그는 또 농수로에서 작업하는 포크레인의 강철 주걱에 살짝 공을 올려놓음으로써 유머가 있는 풍경까지 구사한다. 분단의 모순을 폭로하기 위한 정치적인 도구로서의 사진을 구사하던 전작과는 판이한게 다른 형식을 취하고 있는 노순택의 사진은 보면 볼수록 난감해지는 구석이 있다. 이는 우리가 가진 기존의 다큐멘터리사진에 대한 고정된 편견에 대해 강력한 똥침(!)을 날리는 것은 아닌지 해서 기분이 ‘얄읏’하다. 최근에 다큐멘터리사진도 6X17 파노라마의 대형이미지로 보여준다며 돌아다니는 에이리어 박 때문에 허 찔린 듯한 기분이었는데 노순택의 작업 또한 그에 못지않다. 이것이 21세기 형 다큐멘터리사진인가?

이 같은 현상은 최근 다큐멘터리사진이 갖고 있는 사정과 연관이 있다. 과거 다큐멘터리사진은 인쇄매체와 전시장이 연결되어 있었다. 인쇄매체에 소개된 작품의 일부가 큐레이터나 작가에 의해 선택되어 전시장에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인쇄매체의 몰락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제 그 둘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제작된다. 최근 몇몇 다큐멘터리는 전시장에 걸기위해 제작되며 이러한 사진이 인쇄매체에서 기사의 일부로 소개된 예를 본 일이 없다. 인쇄매체용 사진과 전시장 용 사진이 따로 제작되며 사진가들 역시 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인쇄매체에 실리는 사진은 정치적도구로서의 사진이고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예술로서의 사진이라는 속내가 읽힌다. 나는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려는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전략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보가 아니라 진화라는 점은 명확하다. 진화는 꼭 발전을 전제하지 않은 점에서 그렇다. 사진사를 들춰봐도 형식적인 반복은 시기마다 있어왔다. 다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꾸준히 변화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에둘러 간 것일까. 암튼 나는 에둘러 갔다. 애달픈 농민으로 가지 않고, 빛나는 흰공으로 갔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으로 가지 않고, 전쟁광들이 쏘아올린 큰 공으로 갔다. 흰공으로 먼저 갔지만, 흰공과 함께 고단한 삶을 살아온 황새울의 농민들에게로 이야기가 흘러가길 바랐다. 따지고 보면, 황새울의 농민에게 흰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황새울은 지금 공타령을 할 때가 아니다. 나는 다만 저 흰공이 미군기지를 상징하는 대리물이라고 상상했을 뿐이다.” (노순택의 작업 노트 중에서)

이처럼 작가 노순택의 진정성과 현장성이 담보되지 않았다면 이 전시작품들은 매우 위험 할 수도 있는 사진적 유희로 읽혔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바로 옆에서 그 작업을 지켜봐 왔기에 최근 우리 다큐멘터리사진의 괄목할 만한 성과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P․S 그나저나 수십 년 세월이 흘러 사진에 담겼던 치열한 고민은 증발하고 사진의 아우라만 높아진 채로 그 어떤 전시장에 걸린다면 누가 있어 오늘의 평택을 이야기할까? 사진 캡션이 없어 노파심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글 이상엽




강퇴의 추억 (2006-07-03 02:38:11)


이대범의 "블랙코메디"는 일반적인 '유머'보다는 훨씬 적절한 표현이었고..이상엽의 "인쇄매체용 사진과 전시장 용 사진이 따로 제작되며 사진가들 역시 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인쇄매체에 실리는 사진은 정치적도구로서의 사진이고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예술로서의 사진이라는 속내가 읽힌다. 나는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려는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전략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는 지적 역시 시의 적절하네요..

기존의 다큐멘타리가..미술관이라는 전혀 다른 공간에 적응하기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노순택과 Area Park은 최근 사진계의 두드러진 아방가르드인 건 사실입니다[이 바닥을 잘 모르지만]..그들의 구체적인 방법론은 서로 다르겠지만요..이러한 관점에서 이 두 작가들을 주시하는 건 중요한 포인트일 듯 합니다..

다만..이들 다큐멘타리 작가들의 미술관 진입시도가..어쩌면..이들의 사진이 갖는 저항성을 중화시키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그런 걱정아닌 걱정입니다..전 이들이 좀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활동을 보여주길 희망합니다..이들이 사회적 권력에 저항하듯이..미술판의 위계구조에 대해서도 실천적인 저항을 보여주었으면..하는 것이지요..지금 보다 훨씬..

사회적인 저항가들이 왜 미술판에서는 배병우와 다를 바 없는지..아쉽습니다..




평택맨 (2006-07-03 10:11:48)


강퇴님! 안녕하시지요?
좋은 의견을 주셔서 저도 한몫 거들려고 합니다. 노순택과 Area Park의 작업이 사진계의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크고 작은 접근방식이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입니다. 업계에서의 인정과 성공은 그만큼 절실함과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어쩔수없는 현실일 겁니다. 이 경계놀이를 잘 즐겨야 좋은 작가로 남게 되는것 같습니다.
노순택과 Area Park의 작업이 약간은 모호한 지점을 벗어나려면, 적절한 비유 일지는 모르지만, 주재환을 보면 저항을 넘어 즐기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강퇴의 추억 (2006-07-04 03:59:23)


평맨님도..안녕? 잘 지내고 있습니다..이렇게 잘 지내도 될지 불안할만큼..때로 혼란한 시대에 잘 지낸다는 건 일종의 죄악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잠시 해본적 있습니다..미술관에 진입한 다큐멘타리 사진가들이 배병우와 다를 바 없다는 건..오해의 여지가 있지만..엄밀히 "배병우와 구본창을 닮아가고" 있다는 말씀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그러나..평택맨의 말씀을 그대로..받아 들일때..즉 노순택의 '얄읏한 공'이 배병우의 '소나무'와 본질적으로 다르냐하고 묻는다면..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분기하는지..오직 사진만으로 판단할 때..구체적으로 답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노순택을 좋아 하면서도..그가 사회공간에서의 저항을 예술계 내에서의 성공을 위한 자신의 희소한 상품가치로 삼는 것은 아닌지 하는 노파심이..그가 미술판에서도..좀 더 파괴적이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 주셨으면..합니다..주재환을 사실 잘 모릅니다..그저 민중미술의 숨겨진 거인 정도라는 외에는..관객들에겐 지금까지..임옥상이나 김정헌 같은 썰래빨들 외엔 잘 알려져 있지 않지요..언제 평택맨님이 주재환에 관해 썰해 주시면 어떨까요..이 게으른 관객을 위해서 말입니다..




서울서버티기 (2006-07-04 04:58:38)


일단 접수..

근처에 새벽촬영을 다녀왔어요. 물론 도로위에 휘발유만 기화시킨 꼴이 되어버렸지만..우선 눈꺼풀이 무거우니, 한 잠 때리고 주저리를 풀어볼까 하는데..
강퇴님,평택님은 어떠신지..?




n.... (2006-07-04 10:21:38)


이런, 귀가 간지럽더라니....

먼저 강퇴의 추억 님....

지난번 분단의 향기를 비롯하여, 얄읏한 공까지 세심하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글을 통해 내 안에 있는 나, 내가 알지 못하는 나, 내가 알면서도 굳이 외면한 나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 내 작업, 내가 진정 하고 싶은 작업, 내가 진정 보여주고 싶은 작업, 어쩔 수 없이 보여주고 있는 작업에 대해서도 짧지 않은 시간 생각해 보았습니다. 특히, '현실의 사진적 자기화'에 대해서는 숱한 날을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자신을 돌아보는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진작에 짧은 답글이라도 달고 싶었지만, 생각하는 시간이 길었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더 긴 생각을 해야 할 듯하여 긴 얘기를 드리지는 못할 듯합니다.

일단 님께서 후반부에 제기한 미술판에 대해 짧게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님께서는

"다만..이들 다큐멘타리 작가들의 미술관 진입시도가..어쩌면..이들의 사진이 갖는 저항성을 중화시키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그런 걱정아닌 걱정입니다..전 이들이 좀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활동을 보여주길 희망합니다..이들이 사회적 권력에 저항하듯이..미술판의 위계구조에 대해서도 실천적인 저항을 보여주었으면..하는 것이지요..지금 보다 훨씬..
사회적인 저항가들이 왜 미술판에서는 배병우와 다를 바 없는지..아쉽습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요.

글쎄요. 저는 미술관 진입을 시도했다는 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전시를 했을 뿐인걸요. '전시 행위'와 '미술관 진입 시도행위'가 같은 것 아니냐고 하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겐 다르게 다가옵니다. 그건 마치 제가 사진을 찍을 때 누군가 "왜 사진촬영 시도 행위를 하느냐"고 묻는 것과 비슷하게 어색합니다.

"미술관의 전시행위가 사진의 저항성을 중화시키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하는 우려는 공감합니다. 미술관이라고 하는 공간 자체가 가지는 다양한 제도적, 심리적 측면들이 이미지를 전시하는 작가에게나, 그것을 대하는 관람객에게 변화를 요구하니까요. 심지어 이미지가 건네려고 하는 메시지마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려보내곤 합니다.

이른바 '화이트 큐브'가 강제하는 변화는 부정적인 측면도,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긍정적인 측면을 찾으려 애쓰죠.

제가 미술관의 전시행위에 '올인'하고 있다면, 이러한 문제를 대단히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텐데요. 글쎄요. 아직까지 제게 전시행위는 조금은 부차적인 일입니다. 진지한 고민을 필요로 하고, 나름의 역량을 제한된 시간 안에 최대한 제시해야 한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그래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하지만, 제게 전시는 그냥 '밀린 숙제 발표' 정도입니다. 일기장 한 권을 다쓰고, 한번 쓰윽 훑어 본 후에 잘 된 놈만 골라 숙제발표 시간에 들여미는.....

제게 숙제발표는 대단히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일기'입니다.

아이러니컬 하게도 그 일기가 개인적이지 못하고, 사회적인 것이어서 그 일기의 공유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제가 '내일의 전시'보다 '오늘의 찌라시'에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이는 이유입니다. '찌라시'는 당장의 공유를 촉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하필이면 제가 주워담고 있는 사회의 장면들이 대개 다급한 관심과 참여가 절실한 문제들인 경우가 많아서 더 그러합니다.

제게 '오늘의 찌라시'는 매체기고, 출판, 포스터, 엽서, 길바닥에 뿌리는 찌라시를 모두 포함합니다. (미래에는 어떨지 모르지만) 아직은 이런 현장 속의 행위가 제 활동의 대부분인데, 잠시동안의 전시행위로 그게 중화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물론, 길바닥에 찌라시가 되어 뿌려지는 사진과, 전시장에 걸리는 사진은 종류도, 내용도, 크기도, 제시방법도 상당히 다릅니다. 전시행위를 통해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이미지와, 찌라시를 통해 극대화시킬 수 있는 이미지는 같은 경우도 있지만, 다른 경우도 많습니다.

제게 전시행위는 대단히 중요한 소통의 방법인데, 이것은 앞서 얘기한 다양한 소통, 혹은 제시행위의 한 방법일 뿐입니다. 모르죠, 앞으로는 전시행위가 제게 가장 중요한 소통행위가 될지....

'저항성의 중화'에 대해서는 이쯤으로 횡설수설을 마칩니다.

(한가지 더, 이른바 '저항성'이 내게 굴레가 되지 않기를 나 자신에게 바랍니다. 오늘의 정치사회적 현상은 내가 집중해서 보고 제시하고, 발언하고 있는 장면이지,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리고, 미술의 장....

안타까운 일이지만, 제가 가진 '미술판에 관한'의 정보가 너무 없습니다. 뭔가 잘못된 게 많다는 건 알고 있지만, 제가 보기에 미술판은 정책적인 측면에만 돋보기를 가져다 댄다고 해서 잘잘못을 따져 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얽히고 설킨 사람관계를 알아야 하는데, 그건 책이나 게시판에 쉽게 오르내리는 얘기가 아니거든요. 미술판 안에 있는 사람이어야 겨우 정보를 알 텐데, 저는 미술판 '안'에 있는 사람도 아니거니와,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런 복잡미묘한 관계와 갈등이 두렵습니다.

게다가 전시장을 잘 다니지도 않고, 오프닝에는 더더욱 가질 않아서 미술판 사람들 만날 일이 거의 없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인 곳에서 '뒷담화'를 들어야 동네사정을 알텐데, 그런 '정교한' 얘기는 제게까지 흘러오는 일이 거의 없습니다.

우리의 정치사회적 측면에 대한 정보는 애당초 제 관심영역이기도 하거니와 공개되어 있는 양이 많아서(물론 그 양적 측면을 질적인 측면으로 전환시키는 분석과 분류의 수고가 필요하죠) 접근하기가 쉽지만, 미술동네 사정은 '공개된 사정' 보다는 '공개되지 않은 사정'이 사태를 이해하는데 핵심단서가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암튼 간단치 않은 '장'입니다. 미술사나 미학이론에 대해 독서하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장입니다.

그리고 배병우를 언급하셨는데, 배병우의 작업을 알고는 있지만, 그가 미술판에서 어떠한지를 알지는 못합니다. 제가 "왜 미술판에서 배병우와 다를 바 없는지" 이해가 잘 안되는군요. 별로 좋은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런 거죠?

제 가장 큰 걱정거리가 뭔지 말씀드리는 게 좋겠군요.

필름값 걱정 없이, 맘대로 작업해 보는 것이 제겐 당면한 소망이자, 과제입니다. 일견 소박해 보이지만, 필름없이는 아무 작업도 할 수 없으므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그 어떤 생명체의 활동도 '물적 토대'가 매우 중요할 텐데, 배병우 선생과 저는 너무나 다른 물적 토대 위에서 놀고 있어서 "배병우와 다를 바 없다"는 말이 잘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배병우와 다를 바 없이" 필름값, 렌즈값 걱정 없이, 원없이 작업할 수 있다면 좋긴 할텐데요.... ^^)

다를 바 없다면, '사진으로 전시행위를 한다'는 것 쯤일텐데 세상에 사진으로 전시행위를 하는 작가가 한 둘인가요? 대체 무엇이 같은지 정말 궁금합니다.


그리고 평택맨 님....

"노순택과 Area Park의 작업이 사진계의 대안이라는 것을 인정"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제가 사진계의 대안으로 부상했으며, 왜 제가 대안인지 좀 설명해 주십시오. 그런 말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서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이유를 알려주시지 않으니 궁금합니다.

또 "그들의 크고 작은 접근방식이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 닮아가고 있다"고도 하셨는데, 큰 접근방식은 무엇이며, 작은 접근방식은 무엇인지, 그리고 '어떤' 크고 작은 접근방식이 제가 무의식적으로 닮아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야 괜찮지만, 배병우 구본창 이 두분이 기분 상하지는 않으실까 모르겠습니다.

제 짧은 생각으로는 배병우와 구본창을 닮는 것이 문제인 것처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배병우와 구본창이 어떤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는 말씀인가요? 평택맨님께서 지적하신 그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제가 알아야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을 듯합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먼나라 왕자님'(그분들도 갖은 고생을 하신 끝에 그 자리에 올랐겠지만, 여튼....)과 '불만투성이 육두품'을 같은 의자에 앉힌 것만 같아 좀 당혹스럽습니다.

아울러, 강퇴의 추억 님이 요청하신 것과 같이, 주재환 선생의 작업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별로 없습니다. 그 분의 경계놀이가 어떤 것인지 설명을 부탁드리고자 합니다.

휴~ 게시판 위에서 직접 긴 답글을 다는 게 만만치 않네요.




강퇴의 추억 (2006-07-04 16:50:01)


오..좋은 글 감사합니다..서버님도 안늉? 이따 밤에 다시 찬찬히 읽어보고 답글 달겠습니다..




보이나 (2006-07-04 17:35:02)


오~ 흥미진진 ^ ^ 저도 일단 접슈~ㅇ




평택맨 (2006-07-04 18:39:10)


n....님의 질문에 대하여 답변을 해드릴까...말까.. 고민중 입니다.
너무나 주관적인 저의 시각을 설파하는 것에 요즘 들어 부담을 느끼고 있습니다.
밤에 집에서 생각해 보고 답변 하겠습니다.




평택맨 (2006-07-04 23:54:00)


n.....님, Area Park님에 대하여 무심코 던진 말에 책임있는 답변이 있어야 될것 같습니다.
단, 저의 매우 주관적인 시각이란 점은 이해해 주십시요. 직절적인 화법도요. ^ ^

1. n...님, Area Park님이 사진계의 대안?

저는 한국사진계의 정서와 지형에 매우 익숙치 않습니다. 그런 인사가 사진에 대하여 이렇코,저렇코 하는 것이 좀 뭣 하지만, 오히려 잘 모르기 때문에 정형화되고 보편타당한 시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가 판단하는 사진작업은 미술계 사진, 사진계 사진, 그리고 노순택, 박진영, 양철모의 사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술계의 사진은, 예를들어 이강우,정연두,강홍구 등 미술이 갖고 있는 회화적인 요소와 환타지를 느끼게 하는 사진들 입니다. 차가운 매체로 마치, 그림의 정치학을 실행하는 듯한 그들의 사진들은 오히려 회화를 무력하게 만듭니다.(때론, 그들의 사진이 무장해제 되기도 함.)

사진계의 사진은, 그것도 예를들어 강상훈,윤정미,김옥선,인효진 등 사진이 가지고 있는 시선을 피사체에 최대한 근접 시키고 가장 자연스러운 현상 인듯 보이지만, 전체가 인위적으로 가공된 사진들입니다. 물론, 지나치게 풍경적이거나, 기념사진같은 한계는 내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노순택,박진영,양철모의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의 사진은 크고 넓게 보면, 관심사와 정서 면에서 같은 부류로 보일 수 있지만, 자세히 보면, 3인3색이라고 할수있습니다. 위의 세사람을 자세하게 언급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다만, 제가 세사람의 사진이 사진계의 대안이라고 말할수 있는 이유는 사회를 응시하는 각기 다른 시선과 그에 따르는 행동의 실천에 있습니다. 그들이 아방스러워 지는 대목이 아닐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도 훌륭한 전략 밑에서 전술이 미약하거나 너무 완벽한 것은 아쉬운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2. 크고 작은 접근 방식이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닮고 있어서 나쁘다 ??

결론 부터 말하자면, 나쁘다 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리고, 배병우와 구본창은 사진계에서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고 있는 몇 않되는 사진작가 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인정 받는 작품을 매매하여 좋은 집에 살고 부를 누린다는 것은 좋은 일 입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 다 좋은 것 만은 아닙니다.
장수의 칼끝이 무뎌지듯이 성공한 작품이 가지고 있는 신화와 오리지낼리티는 작품세계를 안주하게 만들고 고착화로 치닫게 합니다. 배병우는 시각중심주의 사진의 틀에 있으면서도 찰라를 담아내는 놀라운 능력과 여운을 갖고 있는 훌륭한 사진작가 입니다. 그러나, 너무 일찍 배병우가 되는 것을 경계해야 된다는 우려 정도로 받아 들이면 좋겠습니다.

구본창의 사진은 설명이 약간 곤란한데 역학적 이중구조에서 오버랩된 시선의 허무함, 내지는 낫설은 시공에 봉착한 당혹감, 파편화된 신체들, 추상적이지만 확장된 이미지들의 심볼리즘 등등..(어렵다.) 약간은 랠프깁슨 같기도 하고, 김기덕의 영화에 깔려 있는 냉소와 소외....상징주의 회화의 형식과 초현실주의의 감수성이 혼재되어 내면은 복잡하지만, 표현은 아주 단순한 사진들 입니다.
구본창에게서 느낄수 있는 교훈은 렌즈의 대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 변하며 자유롭다는 것 입니다. 이런 성향은 좀더 일찍 구본창이 되어도 좋치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제 n님의 사진 앞으로 돌아 오겠습니다.
제가 님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아쉬운 점은 한가지 입니다. 작업을 이끌어 가는 장점이자, 약점인데, 엄숙한 전략 앞에서 행해지는 전술들이 너무나 완벽 하다는 것 입니다. 시의 적절한 때를 알고 뛰어드는 작가적인 순발력, 냄새를 아는 감각, 뛰어난 연출력, 버티는 힘, 자신의 논리를 정연하게 표현하는 글.. 개별적인 것은 모두 뛰어난데, 작품으로 나오는 힘은 반감 된다는 사실 입니다.

3. 주재환에 대하여 궁금하다 ?

주재환은 사진계에서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 같은 존재 입니다. 물론 물리적인 나이와 작품스타일로 말씀드리는 것은 아니구요. 경계놀이를 자연스럽게 잘하는 60세가 다 되어 늦게 인정 받은 훌륭한 작가 입니다. 해답이 주재환에게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울서버티기 (2006-07-05 00:46:21)


어머나!!
n....님이 먼저 선방을 던졌군요. 쩐을 아끼기위한 주차전쟁과 변덕스런 장마비의 겐세이를 뒤로하고,전 방금 자유로를 달려 집으로 왔답니다.

노형의 짧지 않은 위의 글에서.. 두분에게 던지는 진솔한 감정과 애정어린 의문이 느껴집니다.
글의 말미에 가서는 순간 울컥해 지기도 하더군요.

어찌되었건.. 장쯔이님의 부재로 허전한 이곳 게시판에 불이 붙으니, 이밤 술없이 즐겁군요.


강퇴의 추억님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지금 쯤이면 종강을 하셨겠군요.
대단할 것도 없는 젊은 작가에게 특강의 기회를 주어, 학생들과의 즐거운 소통과 제 작업에 대한 주저리를 흔쾌히 받아주신점 잊지 않겠습니다. 아울러 간간히 발표하는 저의 작업들을, 잊지 않고 보여주는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흔히 하는말로 '좋은게 좋은거다'란 말이 있죠. 저도 흡사 성경책의 한 페이지처럼 얇고 무수한 일상을 살며 실제로 많이 겪고 체험하고 때론 실천도 하는 말입니다. 하지만 윗글에서 언급하신 단락중 이해가 가지않는 부분이 있어서 오늘 새벽 약속 드린것처럼 저도 몇자 긁적입니다. 이는 아마도 서로의 전공분야는 물론 살아온 환경, 몸에 벤 관습, 개인적인 시선의 잣대에서 오는 이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는 n...님과는 약간 관점에서의 주저리를 풀어볼까 합니다.


<다만..이들 다큐멘타리 작가들의 미술관 진입시도가..어쩌면..이들의 사진이 갖는 저항성을 중화시키는 결과를 내지 않을까..그런 걱정아닌 걱정입니다..전 이들이 좀더 파격적이고 급진적인 활동을 보여주길 희망합니다..이들이 사회적 권력에 저항하듯이..미술판의 위계구조에 대해서도 실천적인 저항을 보여주었으면..하는 것이지요..지금 보다 훨씬..

사회적인 저항가들이 왜 미술판에서는 배병우와 다를 바 없는지..아쉽습니다.. >

- 우선



1. '미술관진입시도'

저는 전업사진가입니다.(이런말이 있나?)
n...님처럼 매체나 그 밖의 활동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몇가지(소질,적성,생계등..)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한국의 언론 미디어 매체에서 바라는 스타일의 사진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 아시겠지만 그런곳에서 일을 하기엔 저의 작업형태와 속도가 너무 느립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이나 이곳저곳의 이슈만을 추적하기에는 저의 대형카메라가 너무 무겁고 불편합니다. 매체는 주로 그날 그날의 이슈나 일주일, 길게는 한두달 정도의 호흡으로 진행을 해야하는데, 저는 그 시간이면 겨우 작업에 대한 고민이나 리서치 그리고 섭외의 시작단계에 불과한 시간입니다. 특히 요즘하는 작업은 촬영협조공문을 보내고 기다리다 지쳐 있을때쯤(평균 한달정도)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곤 합니다. 사실 이럴땐 공신력(?)있는 매체 사진 기자가 훨씬 유리할 겁니다. 그야말로 모든 걸 혼자 꾸미고, 조달하고, 진행하고 해결해야 하는 것이 이땅의 무명사진가들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가장 큰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저에게 카메라를 세우게 하는 것. 바로 <자유관점>입니다. 저는 그 어떠한 지배이데올로기나 특정권력 혹은 자본의 감시를 받을 필요가 없이 이른바 꼴리는대로 방아쇠를 당길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주관적 선택과 개인적 양심이 작동할 때 겠지만요.

음식을 삼켰으면 소화를 해야 하는건, 당연지사..저는 그동안의 작업들을 선별에 선별을 거듭. 전시장에 들고 나가는 것입니다. 사진찍기란 태생적으로 타자에게 보여 주기위한 행위입니다. 자신의 까까머리 중학교 시절, 배낭여행때 보았던 에펠탑, 부부가 됨을 증명했던 결혼사진, 심지어는 암세포를 확인하는 엑스레이 사진까지..
제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적지않는 노력들을 동원한 작업들을 미술관이라는 공간에서 보여주고 사진집으로 엮어 가는 행위는 'n...님의 숙제' 와는 조금 다른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환원' 쯤이라고 여겨 주십시오.



2. 미술판 위계구조에 대한 실천적저항

무슨말인지 좀 구체적으로 말해주세요.
이를테면 전시행위보다..빈민촌에서 사진을 가르치며 활동하란 것인지, 아니면 보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게 거리에서 전시를 하라는 것인지..



3. 작가 배병우와의 비교(이하 배병우)

사실 n...(정치학과출신)님과는 다르게, 저처럼 한국사진계의 제도권 전공교육(사진학과출신)을 받은 사람으로선 졸라 두려운 언급이군요. 하지만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강퇴님께서 왠지 모르게 배병우를 곡해한다는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공언하건데 배병우는 가장 작업량이 많은 작가중의 한명입니다. 게다가 감투나 헤게모니에는 그닥 관심도 없어 꿋꿋이 20년 넘게 소나무(바다,섬 풍경도 있지만..)만을 찍어 온 작가입니다. 아마 지금껏 가르치는 일외에는 거의 모든 시간을 전국 도처의 아름다운 소나무만을 찍어 이제서야 빛을 보기 시작한 노력형 작가란 걸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강퇴님의 야릇한 냉소에는 최근의 상황이 적절히 오버랩 되어있겠죠. 컬렉터가 작업을 기다릴 정도의 인기있는 작가, 미술품 판매뉴스만 나오면 배병우가 가장 먼저 나오니까요..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요? 지금은 뉴욕에서 전시를 준비중인 김아타가 처음 미술판에 뜨기 시작했을때 주체못할 인기와 더불어 반감을 느끼는 소문들도 미술계에 숭숭했었지요. 20년 무명사진가 김석중(김아타의 본명)의 피나는 노력과 처절한 도전은 결국, 뜨고나면 인정하기 싫어하는 범인들의 시선이 그를 많이 힘들게 했었지요. 마찬가지 이치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솔직하게 깨놓고 말한다면, 저처럼 젊은 작가들의 대부분은 배병우는 시기의 대상이 아니라 벤치마킹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작품이 잘 팔리면 저처럼 알바로 대리운전에 예비군대리출석..(한때 별명이 박대리였죠..)뛰어다닐 필요 없고, 각종 기금 신청에 필요한 페이퍼 작성과 자료취합..걱정없이 작업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여튼 전 세계유수의 미술계에서 성공한 배병우가 눈물이 쏙 나올 정도로 부럽습니다.
강퇴님이 저를 속물이라고 하셔도, 전 제발 엘튼 존이 제 작품앞으로 지나갈 지도 모른다는 꿈을 꿉니다. 맨정신으론 안 살테니까 대취한 상태로..내일부터 톱가지고 다니며 소나무를 다 베어버릴까요?




평택맨님께..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국수 한그릇..어찌보면 별것 아닌 국수 한그릇을 맛있게 비우며 저보다 더 기뻐하셨던 그날의 런치를 잊을 수 가 없군요.
그저 사사로운 감정과 인연이 작동하여.. 묻고 싶은 것을 묻지 아니하고, 답하고 싶은 것을 답하지 안는다면 그건 이너넷 토론문화의 매너가 아니겠지요?
몇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 궁금한 점 3가지를 묻습니다.

1. 노순택과 Area.Park의 어떤 부분이 구본창, 배병우를 닮아간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핵심만 집어 200자 이내로 답변해 주세요)

2. 님이 생각하는 좋은 작가란 어떤 것을 지칭하는 말입니까?
작가로서, 큐레이터로서, (둘다 30자이내 단순서술형)

3. '저항을 넘어 즐긴다.' 말은 좋지만, 도저히 구체적인 방법이 떠오르지를 않는군요. 주재환식 즐김의 방법과 그 작가가 떠오르게 된 에피소드가 있다면 알려주세요.





좀 쉬었다 하죠...산적한 일들도 남아있고, 담배도 사와야하고




서울서버티기 (2006-07-05 00:47:45)


뒷북친 꼴이군.

평택님도 나랑 같은 시간에 주저리 풀고 있었군요...

음..분하다




강퇴의 추억 (2006-07-05 02:45:18)


오..이분들..증말..쌕씨한 분들이란 말얐!!




강퇴의 추억 (2006-07-05 02:49:55)


오늘 밤 좀 쉬어가시는 게 어떠실지요..쉬운 내용이 아니군요..낼 밤 안주를 위해 오후까진 대략적인 견해를 올려 놓을께요..


다만..다큐멘타리의 미술관 진입 문제에 관해서는 잠정적으로 "박진영론, 혹은 의미가 팩트가 되는 지점"을 올려 두도록 하겠습니다..멀리 가진 마시길..




n.... (2006-07-05 10:23:12)


오~ 밤새 서로 글을 주고 받았군요.

서울서버티기 님, 재미있는 글 잘 읽었어요. 뭐, 소나무를 다 베어버린다고? 역시 재치가 있단 말야.... ^^
(헌데, 잘 생각해 보세요. 소나무 다 베어버리면, 누가 제일 좋아할까? 그거 '남' 좋은 일 하는 거예요. 도끼대신 그냥 사진기 드세요. ^^)

버티기 님께서는 이른바 전시행위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사회환원"이라고 하셨는데, 이 또한 재미있는 표현인 것 같아요. 저는 그럼 제 전시행위를, 제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말걸기'의 한 방법이라고 표현하고 싶군요. 뭐 버티기 님도 마찬가지 겠지만....

향후(?)에는 모르겠지만, 현재까지는 전시를 통해 아무런 경제적 소득이 발생한 바 없으므로, 제가 전시행위를 통해 얻는 것은, 배병우 구본창 선생이 전시행위를 통해 얻는 것과 질과 양 모두가 다를 것입니다. 말을 걸고자 하는 내용과 그 방법도 분명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강퇴의 추억 님 께서는 평택 맨 님의 글에 답글을 달면서,

"평택맨의 말씀을 그대로..받아 들일때..즉 노순택의 '얄읏한 공'이 배병우의 '소나무'와 본질적으로 다르냐하고 묻는다면..정확히 어디서 어떻게 분기하는지..오직 사진만으로 판단할 때..구체적으로 답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는데,

'사진'이라고 하는 물리적인 인화지를 전시장에 걸었던 행위만을 본다면 배병우와 노순택은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얄읏한 공을 제 방식으로 재배치하고, 시점(時點과 視點 모두)과 노출을 조정한 행위나, 소나무를 배병우의 방식으로 재배치하고, 시점과 노출을 조정한 행위는 서로 '분기'되지 않을 것입니다.

헌데, 그러한 행위는 세상의 (거의) 모든 사진가들이 어제도, 오늘도 반복하고 있는 짓이거든요. 그런 관점에서 님의 말씀대로 "오직 사진만으로 판단할 때" 서로 다를 수 있는 사진가는 별로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제겐 "사진만으로"가 "사진적 행위만으로"로 읽히거든요. 그런 차원에서 "오직 사진만으로 판단할 때" 제가 배병우와 달라지려면, 둘 중 하나가 사진을 접고 다른 방식의 시각이미지를 제시해야 할 겁니다.

( 아.... 머리 아프다.... 어제 하루 종일 머릿속이 복잡해서.... 일을 못했어요. 암튼 강퇴의 추억 님께서 제게 간단치 않은 고민거리를 던져주셨습니다. ^^ )

그리고 평택 맨 님...

답글에서 "크고 작은 접근 방식이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닮고 있어서 나쁘다 ?"라고 의문을 달아주셨는데, 저는 "나쁘다"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문제다"와 "나쁘다"는 미묘하게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여쭈어 본 것입니다. 평택맨 님께서는 "노순택과 박진영의 크고 작은 접근방식이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 닮아가고 있다는 것은 우려할 만한 일"이라고 하셨는데, 그건 분명 문제를 제기하신 거라 여겨집니다.

헌데, 평택 맨 님의 답글은 배병우와 구본창을 간략 설명할 뿐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려주시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구본창에 대한 언급에서는 "좀더 일찍 구본창이 되어도 좋치 않을까 생각한다"고까지 말씀하시니 저는 좀 혼란스럽군요.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야, '배병우와 구본창을 무의식적으로 닮아가는 우려할만한 일'을 피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게다가 서울서버티기 님의 의견에 따르면, 그건 오히려 밴치마킹해야 할 일이지, 우려할 일이 아니라고 해서요. 일견 평택맨 님의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다가,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잘 모르겠고, 한편으론 서울서버티기 님의 말도 분명 옳은 구석이 있고, 헌데 배병우와 구본창은 나의 '이상향(?)'이 아니고.....

제가 잘 모르는 구석이 너무 많습니다.
어쩌다 서울서버티기 님을 만나서 얘기를 나누어 봐도 '아, 난 참 세상돌아가는 것 모르는구나' 싶으니까요.

친절한 답변 부탁드립니다. ^^




n.... (2006-07-05 12:49:34)


다시 읽다 보니, 또 궁금해지는군요.....

평택맨 님.... 주재환에 대해 좀 더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사진계에서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 같은 존재'라니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아리송하기도 합니다. 해답이 주재환에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하시면서 주재환에 대해 그리 짧은 설명만 달아 놓으시면 어찌 합니까.

정보를 찾으려고 해도 쉽지가 않아서요.

주재환을 잘 모르겠으면, 그와 비슷한 존재라고 거명하신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을 들여다보면 되는 것인지. 그렇다면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은 '배병우 내지는 구본창'과 어떻게 다른 행보를 걷고 있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그분들의 작업이야 익히 알고 있지만, 그 작업에 관한 정보만으로 의문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좀 거칠게 얘기하면,

"노순택, 당신은 지금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을 닮아가고 있어. 그건 우려스러운 일이야. 배병우 내지는 구본창이 해답이 될 수 있을꺼야"라고 하면 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 것인지 쬐금 이해가 될 것 같은데,

"노순택, 당신은 지금 배병우 내지는 구본창을 닮아가고 있어. 그건 우려스러운 일이야. 정동석 내지는 이갑철이 해답이 될 수 있을꺼야"라고 하면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정동석과 이갑철은 오래전부터 그 작업을 주목해 보아왔고, 상대적으로 배병우와 구본창은 (작업의 성향이랄까) 저와는 좀 먼 분들이라고 생각해 왔거든요. 헌데 거꾸로 질문을 하시니 이해하기가 어려워서요.

그것이 되레 '허를 찌르는' 화두가 될 지도 모르겠지만.




보이나 (2006-07-05 15:23:59)


뒷북 추가합니다 두둥~



@어디로 가고자 했던가. 사진인가 여행인가 삶인가. 여행은 둘러가는 것이다. 결국 삶도 여기저기 들리며 둘러가는 것 아닌가. 태어나서 바로 죽어버리면. 집 문앞을 나서자마자 가고자 했던 목적지에 다다라 있다면 여행은 삶은 지금과는 분명 다른 것일텐데. @사람은 여기저기 다니게 되어 있는것 같아요. 동물이면 자기 세력권이 있어서 거기서만 평생을 살텐데 자기 집 놔두고 먼데 다니는 것 사람밖에 없지 않겠어요? 나가면 고생일게 뻔한데. 그럼에도 주말이면 산으로 들로 몸을 끌고 나가는 시냅스와 호르몬은 또 뭘까요. 바람한번? 쐬고 올까? 하는 바람 같은거? 호기심? 어떤 욕구? 어렸을때부터 좋은건 전부 무지개 너머 있곤 했지 않아요? 그리하여 철새도 아니면서 경계를 지우며 가는 노마드는 아마도 인간에겐 필수적일수 밖에 없는 한 속성일런지도 모르죠. 그렇게 @에둘러 가고자 했던 곳. 에둘러 가며 가고자 했던 곳. 에 대한 얘기가 없이는. 얄읏한 공은 신화로만 남게 될지도 모를일이다. 그렇게 에둘러 라는 말이 어느날 갑자기 얄읏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것이 새로운 환경에서 생존하려는 다큐멘터리사진가들의 전략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그것이 진보가 아니라 진화라는 점은 명확하다. 진화는 꼭 발전을 전제하지 않은 점에서 그렇다. - 인쇄매체의 몰락도 한 이유가 되겠지만 이제 그 둘은 철저하게 분리되어 제작된다.고 새로운 환경과 그에 따른 전략.을 작가와 막역한 사이라는 이상엽은 밝히고 있다. 에둘러 간 그 곳에 놓인 단어는 '진보가 아닌 진화'. '새로운 환경과 그에 따른 전략' 같은 것들이 놓여져 있었다. @진보가 아닌 진화. 잘 되었다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뒤에 따라온 말로 보아 잘 되었다는 말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진화는 생존을 위한 전략이자 환경에의 적응이다. 사람은 긍정적으로 진화되어 왔나. 볼라치면 나쁜놈이 대개 오래살지 않던가. 보면 분명 진화는 독한놈들만 살아남는 쪽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수가 없다. 풀도 독한 놈만, 바람을 이기고 바람보다 먼저 발딱 섰다. 그러한 진화를 예측하고는 워렌버핏 같은 놈이 한 놈 밖에 나오지 않는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는 대안으로 섹스는 하되 결혼은 하지 말고 아이는 놓되 사회가 책임지면 재산이 필요없게 되어 삶은 굳이 소유하지 않아도 행복해질것이라는 이상주의 국가관을 펼친 플라톤의 판타지대로 삶의 절대선 살아있음은 그저 살아있으면 아름다울 것을 아이를 가지면서 아이를 위한 생존으로 소유로 경쟁으로 모든 것이 치열하게 변하게 되었지 않은가 절간에 드나드는 마누라가 열이라는 어느 스님 얘기에 왕이 따로 없네 허긴 손만 내밀면 될것을 붙잡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하긴 했지만 현자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이유가 그리도 궁금했었는데. 바로 그것이 우리가 판타지를 현실과 맞바꾸게된 이유이기도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지. 이상은 여담이었고. @현실의 사진적 자기화.는 진보가 아닌 진화와 함께. 현실의 판타지 작가의 판타지.가 꼴라지 되며 사진의 판타지를 향해 믹서되고 있는 것이라. 사진이 에둘러 가고자 하는 곳. 그곳에 사진의 판타지가 있었다.

내가 나라는 판타지를 갖고 있듯 사진도 사진의 판타지를 지니고 있다. 나의 판타지가 내가 되듯 사진의 판타지도 사진이 되는 것이다. 나의 판타지는 굳이 말하지 않으면 드러나지 않지만 사진은 자신의 판타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으나 우리는 보거나 보지 못한다. 존 버거가 About Looking에서 동물은 특별히 인간의 몫으로 돌려질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했듯이 사진의 고유하고 특별한 판타지도 인간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겨져 있다. 사진의 판타지를 사진에게 안겨주는 것은 사진가 뿐만 아니라 사진을 보고 소비하는 이들 모두의 몫이다. 사진을 찍은 사진가라 하더라도, 우리가 물건을 온전히 소유하지 못하듯 심지어는 자신의 몸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듯, 사진이 지닌 판타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점유할수 없다. 사진을 내게 속한 것으로 묶어두기보다 그 자체로 내어 놓을때, 그것은 우리에게 보다 특별한 것으로 다가올 것이다. 사진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구심적인 물음과 함께 무엇이 사진이어야 하는가와 같은 원심적인 물음에 의해 사진은 깊어지고 넓혀진다. 사진이어야 하는 사진을 찍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여 이게 사진이 될까나 이걸 왜 찍지와 같은 허름한 의문은 사라진다. 나는 사진이 아니다. 사진도 내가 아니다.

나는 사진이다.

이 말은, 사진이 내게 한 말임이 분명했다.

그러고 보니 저 얄읏한 공이 드라마틱하게 판타지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지와의 조우에 나왔던 알흠다훈 우주선처럼 E.T.에 나오던 예의 그 알혹달혹한 우주선처럼 얄읏한 공이. 왜 저리 보이는지 알 듯 말 듯 다가오기 시작한다. 에두르지 말고 바로가게 되기를 바랬던 작가의 바람과는 달리 그가 에둘러 갔던 길을 똑같이 답습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하며 나즈막히 읇조리면서도 몽롱하게 빨려들어감을 굳이 거부하고 싶지 않은 까닭은 꿈은 판타지는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으므로. 1. 다큐멘터리와 판타지. 그 불온전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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