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을 시작하기전에 접한 사진가. 가장 정공법으로 기억에
남아있다는. 작법에서 들고 남이 없이 딱.이란 느낌. 카메라
스트립 고리가 헐어 없어질 때까지 메고 다니셨다는, 역시 정공의 방법만을 추구한
사진가.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을 생각하며 열심히 하느냐이다.
근거없는 노력은 때로 독이되기도 하더란. .' ) +
+ + 출처 : 문마담
정범태 (鄭範泰. 1928~)
‘온몸에 훈장처럼 자물쇠를 주렁주렁 달고 굵은 뿔테 돋보기 안경을 쓴 노인이
안경너머로 렌즈 저쪽을 물끄러미 응시한다. 깊게 팬 이마의 주름과삐죽삐죽 텁수룩이 자란 수염이 세월의 신산함을 느끼게도 한다. 그러나 멋스럽게
비스듬히 빼어문 파이프 담배와 고급스런 체크무늬 빵떡모자, 또 열쇠조끼 안으로 보이는 넥타이는 결코 초라하지 않은 자존심의 한자락이
내비친다.’(1956년작 ‘열쇠장수’)

新線會(신선회)와 살롱아루스의 주축멤버로 50년대중반 리얼리즘 사진으로 자기작업의
첫단추를 끼운 작가 鄭範泰(정범태.)
1960년 일본 국제사진 살롱 입선작이기도 한 ‘열쇠장수’는 휴머니즘에 바탕한 자연적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그의 초기 작품 스타일의 전형을 보여준다.
1928년 평북 선천 출생의 鄭範泰는 40년 외삼촌을 따라 일본 오사카(大阪)로
건너가 상선중학교에 입학했다. 45년 해방후 귀국해 당시 외삼촌이 쓰던 일제카메라 ‘웰미’를 만진 것이 사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됐다. 그는
한국전쟁중 사진담당 군속으로 근무하며 전장을 누비기도 했다. 마거릿 버크 화이트,칼 마이단스,더글러스 던컨,행크 워커,버트 하디 등 세계적
사진작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한국전쟁을종군하며 참혹한 전쟁의 진상을 기록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당시 우리에게는 그같이 프로페셔널한 작가를
찾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식민지의 소년으로 사춘기를 보낸 뒤 태평양전쟁을 목격하고 해방후의 어지러운 좌·우익
대립에 이어 터진 동족상쟁의 와중에서 감수성이 예민한청년 鄭範泰는 카메라만 들었을 뿐 ‘보통사진작가’에 머물러 있었다. 1.4후퇴 등
한국전쟁의 최전선과 지리산 빨치산 토벌 등 역사적 현장에 있었지만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도 못했다. 휴전후 54년 그는 서울로
돌아온다. 거기서 전쟁의 폐허를 본다. 풍경은 전쟁때 본 것과 큰 차이는 없었다. 그러나 폐허를 딛고 살려는 사람들의 건강한 모습은 그에게
작가적 정신을 일깨운 충격이었다.
“그 참혹한 전쟁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남은 이들이 이렇게 건강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작가를 자처하는 나는 무엇을 했는가. 작가로서 그 귀한 현장에 있으면서도 시대상과 사회상을 기록하지 않고 뭐했는가.” 자책이
가슴을 쳤고 이때의 자책은 후에 사진기자로서 무모하다고 할 정도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현장에 부딪치는 그의 고집과 맥이 닿는다. 그는 다시
카메라를 고쳐잡고 전후의 참혹한 현장을 찾았다. 그리고 죽음의 그림자는 비켜섰지만 아직 신산한 배경에서 빛나는 건강한 인간의 삶의 의지를
잡아내기 시작했다.
이것이 그의 초기 작품을 지배한 인본주의적 리얼리즘의 씨앗이었고 여기서 아직
현재진행형이지만,전생애에 걸친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열쇠장수’‘말과 마부’(56년작), ‘피리부는 소년’(57년작),‘생과
사’(57년작)등의 초기 대표작들이 탄생한다.
‘열쇠장수’의 주인공은 50년대 후반 그가 해방촌에서 자취할 시절 옆방에 살던
‘열쇠장수’ 신씨다. 같은 이북출신인 신씨는 항상 말끔한 복장으로 열쇠가 주렁주렁 달린 조끼를 입고 아침마다 “당(장)마당에 가자우요”하고
사람들을 깨워 남대문시장으로 나간다. 그의 가슴에 매달린 미제 자물쇠들은 그에게 시대의 아픔을 채워놓는 훈장같았다. 그리고
‘열쇠장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댄디한 차림새는 가혹한 시대에 저항하는 의연한 인간의 몸짓처럼 느껴졌다. 그 표정을 잡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말과 마부’는 기하학적인 벽돌담을 배경으로 나무뿌리같은 손가락 사이에 꽁초를 끼고
있는 마부와 말의 나른한 표정을 통해 삶의 고달픔을 초월한, 허탈한슬픔을 전한다.

‘피리부는 소년’은 화면의 양과 관계없이 소년의 피리소리를 따라 어린 양들이 암울한
곳으로부터 밝고 자유로운 곳으로 해방돼 나오는 함축성을느끼게 하고 있다.

초기 대표작들에서 보이는 서정미란 ‘살롱사진’의 그릇에 리얼리즘의 내용물을 담은
결과물로 해석된다.
털이 뽑혀 죽어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닭과 줄에 매여 있으면서도 당당한 삶의 품위를
잃지 않은 장닭의 모습을 대조시킨 ‘생과 사’ 역시 같은 맥락의 가혹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이 작품은 피사체에 어떠한 작용도 가하지 않았던
그의 다른 작품과는 달리 의도적인 연출을 가한 것이 특이하다.

이들 초기작품들은 기록성을 중시한 자생적 리얼리즘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한편 일본,
미국, 파리, 런던 등의 국제사진전에서 수상함으로써 우리사진어법의 세계와의 활발한 교류를 여는 작품들이기도 하다. 또 “사진은 사진일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고 정력적으로 밀어붙인 그 이전세대의 감각적 예술사진의 결정이기도 하다.
그의 뒤를 이은 주명덕 강운구등 사진이론으로 무장한 신진들에 의해 우리 사진은 새로운
비약을 준비하게된다. 56년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한 그는 59년까지 예술작업과 보도사진 취재를 겸하는 작업을 하다 이후 보도사진에
전념한다.
“출근전과 퇴근후에 개인적인 작업에 매달렸다. 그러한 작업들의 결과가 59년 세계
각국의 사진전에서의 수상이었다. 무언가를 이루고 나니 목표를 잃어버린 격이 됐고 또 신문일과 병행하는 것이 정말 어렵기도 해 보도사진에 매진하게
됐다.”
그는 무모하다시피한 과감성과 동물적인 감각으로 보도사진에 있어 일정한 업적을 남긴다.
한국철도사상 최악의 사건으로 꼽히는 60년 서울역 귀성객 압사사건을 특종취재한다. 설을 맞아 귀성객이 몰리는데 뭐가 없을까하고 갔다가 생생한
현장을 잡게 된 것이다. 4.19 당시 계엄령이 내려진 서울시내로 진입했다가 경찰의 총탄세례를 받기도 했다. 다행히 옷만 뚫고 나갔을 뿐
다친데는 없었으나 운전기사가 총에 맞아 숨졌다. 이때 AP통신은 그가 취재도중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타전하기도 했다.
그의 보도사진중 백미는 61년 군사법정에 서있는 여인과 그녀의 어린 아들을 포착한
‘결정적 순간’이다. 여기에는 그의 초기작품에서부터 일관해온 휴머니즘이 짙게 배어있다. 이 사진은 그해 일본 아사히신문사가 주최한
국제사진살롱에서 10걸상을 수상했으며 67년 일본 평범사가 발행한 ‘세계사진연감’에서 56년부터 66년사이의 최고 걸작 37점 가운데 하나로
선정됐다.

초기 리얼리즘사진을 장식한 작가인 鄭範泰의 사진에는 약점도 없지 않다. ‘직선적인
포착’이 용감하고 때론 성공적이지만,‘작가의 눈’은 대부분의 경우 찾아보기 어렵다는 한계가 그것이다. 그 약점은 후배작가들에 의해
‘리얼리즘 또는 사진 자체에 대한 이해부족’으로까지 지적되기도 한다. 가장 정력적인 현역작가로 활동하고 있으면서도 50년대 이후 주요 대표작들이
없다는 점도 그런 까닭때문이다.
사진기자로 주간지부문으로 자리를 옮겨 조금 한가해지면서 鄭範泰는 자기 사진의 새로운
광맥을 발견한다. 춤사진이 그것이다. 그의 춤사진에 대해 형태미나 구도 등과 관련한 작품의 완성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도 없지
않지만,특히 민속춤에 처음으로 초점을 맞춘 작가임에는 틀림없다. 그가 춤에 대해 빠지게 된 것은 지리산 빨치산토벌대에 종군하면서다. 예향
남원에 자리잡고 종군하다 우리춤의 정신에 흠뻑 빠져든다.
특히 재인이나 세습무 출신의 춤꾼들이 사회적으로 받아온 천대를 예술혼으로 끌어올린
것은 鄭範泰 특유의 휴머니즘에 입각한 리얼리즘 정신과도 맥이 닿는다. 그는 명무가 있다고 하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지금도
춤공연에 가보면 으레 앞쪽 또는 뒤쪽에 자리해 셔터를 눌러대는 그의 모습을 찾기가 어렵지 않다. 그 결과가 85년 10권의 ‘한국의
명무’(열화당)라는 책으로 나왔고 앞으로 또 10권의 책으로 나올 예정이다.
“춤은 마음으로 추는 것이다. 마음이 몸을 흔들어 춤이 나온다. 몸은 사진으로 찍을
수 있지만 춤은 찍을 수 없다. 나의 작업은 춤을 추는 사람의 몸을 사진기라는 바구니로 주워 담을 뿐이다. 이와 관련, 작품의 완성도에 대해
비판이 없지 않으나 나의 작품관과는 맞지 않는다. 사진은 기록이다.
사진은 사진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40년 이상을 현역으로 활동하였고
최고령 작가이지만 아직도 정력적인 그는 앞으로 현대춤과 아시아춤으로 장르와 장소를 넓힐 것을 구상중이다.
<金承炫기자>(98년 0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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