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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 되었건 물이 되었건, 혹은 콘크리트이건.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 스스로가 다루는 물질이 어떤 의미로 작가가 손에 쥘 수 있는가....인 것같다. 손톱만한 나무 두쪽을 붙여서 가능한 말이 어떤 것이 있었는지 상상이나 했겠느냐는 이야기.
미니멀리즘은 뻑큐나 먹으라고 해라. 어느 미니멀리즘이 저렇듯 불을 형상화해 낼 수 있었는지 말해 보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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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도 메이어레스(Cildo Meireles)의‘장님거울(Espelho Cego)’

장님거울_49x36x18cm_나무, 고무찰흙, 뒤집혀진 금속 글자 _1970
박찬경(작가, 평론가)
칠도 메이어레스는 헬리오 오이티시카와 리지아클락 보다 한세대 뒤의 생존하는 브라질 작가이다. 한국에서도 광주비엔날레에 초청된 적이 있고, 종이 포럼a 10호에서 ‘남쪽의 십자’라는 작품을 잠깐 소개한 적이 있다. (졸고 ‘비좁은 작업실, 텅 빈 미술관’을 볼 것)이 작품은 사변이 9mm로 된 정육면체의 나무 조각이다. 이 입방체의 반쪽은 소나무, 다른 반쪽은 떡갈나무로 되어있다. 브라질 원주민은 이 두 종류의 나무를 마찰해 불을 지핀다고 한다. 아마도 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작은 조각 작품이겠지만, 이 입방체가 품고 있는 거대한 에너지는 그 작은 크기와 극적으로 대비된다. 물론 그 극적인 대비는, 이 작품이 서구미니멀리즘 입방체의 거대함과 기념비성에 대한 비평으로 읽힐 때 더욱 풍부한 의미를 갖게 된다. 내가 이 작업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는, 원시문명의 근원으로서의 불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현대의 미니멀리즘을 제3세계 작가로서 ‘기능전환’하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어떻게 하나의 사물이 어떤 언어적 진술을 요약하는가에 대한 관심, 말하자면 ‘개념의 미니멀리즘’, 놀라운 함축 때문이다. 이런 면에서 ‘남쪽의 십자’만큼 성공적인 작업도 드물다. 우리의 동시대 미술에서 보자면, 언어적인 진술을 사물에 함축하는 작업들이 언어의 장난이나, 잘된 경우 형태의 기발한 전치에 머무는 경향이 있다면, 이 작업은 그에 그치지 않고 날카로운 비평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단순한 메시지의 복잡한 표현이 아니라, 성공적인 작업이 거의 그런 것처럼 그 반대인 것이다. 이러한 메시지는, 행위도 될 수 있고 언어도 될 수 있고 이치나 논설도 될 수 있는, 사물이 그 자체로는 갖고 있지 못한 여분의 것이나, 그 바깥의 것에 대한 연상에 의존한다.

남쪽의 십자_9x9x9mm_직육면체나무;소나무조각과 참나무조각_1969-70
비슷한 시기의 또 다른 작품인 ‘장님 거울’(Espelho Cego)은 사물을 행위나 개념으로 연결하고 있는 또 하나의 훌륭한 예이다. 우선 교과서적으로 설명해보자. 프레임 안에 유리가 있어야할 자리에 고무찰흙이 채워져 있어서, 이 거울은 보는 거울이 아니라 만지는 거울이다. 우리는 사물을 사물에 대한 사람의 작용이나 행위와 연관시킨다. 이것은 따라서 제목(제목은 영어로 Blind Glass이며, 프레임 아래쪽에 뒤집혀진 활자로 붙어있다.) 이 지시하는 것처럼 손으로 만져 대상의 형태를 알아내는 장님을 위한 거울이라고 할만하다. 우리는 즉각 시각중심주의에 대한 아방가르드의 유명한 저항의 방식이 갱신되는 것을 본다. 이제 사물은 하나의 명제에 이른다. 보는 것은 만지는 것을 통해서 반성된다.
여기서 모든 설명이 멈춘다면, 해석처럼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이며, 해석은 스스로 작품을 대신할 수 있는 것으로 은연중에 간주하게 된다. 문제는 그것(행위의 연상이나 언어의 상상, 또는 명제나 의미 등)이 어떻게 사물 자체로, 물질과 감각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는가이다. 물론 이것은 해석이 물질로 단순히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거울의 특별한 두께, 고무찰흙의 유동적인 형태, 끈적거리는 촉감 등을 ‘시각에 대한 반성’과 결합해야한다. 어윈 파놉스키가 도상학에서 말하는, ‘종합직관’을 조금 확대해석한다면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러한 피드백을 설명하는 것은 언제나 혼란을 초래한다. 왜냐하면 너무나 당연하게도, 언어는 물건으로서의 작품을 결코 완전하게 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무 원론적인 비평론을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장님 거울’은 이러한 비평론의 원론 자체를 주제로 떠올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손으로 만지는 것에 대해, 몸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업이 ‘말하는’ 바는, 단순히 보는 것이 만지는 것을 통해 반성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훨씬 복잡할 수밖에 없다. 우선 우리는 이 거울이 얼굴과 고무찰흙의 물리적인 접촉을 통해서 얼굴의 흔적을 남기며, 그렇게 남은 흔적이 얼굴과는 달리 안쪽으로 들어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몸의 (일부의) 안과 밖의 경계가 남는 것이지 몸이 남는 것이 아니다. 거울을 만지는 대상으로 바꾼 것은 의미의 하나의 차원이며, 두 번째 차원은 거울을 몸과 외부의 경계로 정의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 흔적을 다시 만져본다고 가정할 때, 우리는 물리적으로 몸의 외부를 만지는 것에 가깝지만, 공간적으로는 내부를 만지는 것처럼 된다. 이 작업에서, 촉각의 작용은 그러므로 보통 거울에서 시각의 작용과 정 반대가 된다. 실제 거울의 체험은 부재를 실재로 꾸미는 시각적인 외부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이라면, 장님거울은 부재를 통해 실재를 경험하는 몸 안의 체험에 가깝게 된다. 얼굴의 앞면은 마스크의 뒷면과 같아진다. 거울은 깊이가 있는 듯한 평면/앞면이지만, 장님 거울은 뒷면의 깊이이다.
우리는 이러한 체험을 이 작업을 보는 것을 통해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 행위를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작업은 경험되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사물로 돌아 가야한다. 나는 이 작품을 사진으로만 보았기 때문에 경험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어떤 경험일까? 내가 내 얼굴을 만질 때보다 이질적일 테고, 실제 거울의 매끄러운 표면을 만질 때 보다는 훨씬 친숙할까. 이것은 너무 ‘개념적’으로 경험을 유추한 것일까. 아마도 실제로는 이런 몇 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매우 복합적인 느낌일 것이다. 일부는 내 모습의 흔적을 잘 떠내고 있지만, 일부는 단순히 무정형의 끈끈한 고무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무정형성이 오히려 내 모습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혹은 전혀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느껴질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다시 사물로 돌아와 이 작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자면, 마치 내 몸 자체의 유동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거울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이것은 진짜 거울일 수 있다. 거울을 믿는 사람에게는 이것이 진짜 거울이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당신은 혼란스러운 표면, 진득진득한 덩어리와는 동일시될 수 없는가? 물론 이 경우, 우리는 이것을 더 이상 ‘동일시’라고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오히려 육체 외곽 이미지의 고정성과 몸의 내적 감각의 유동성 사이의 불일치가 남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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