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http://없음 | |||
|
[번역글] 1. 상호작용(Interactivity)의 전략들 | |||
|
![]() |
||
|
||
| 다시읽어보니 완전 외계어 수준의 번역이군요. 이곳이 [날것]이니 만큼 일단은 올려 넣고 본.. 슬슬 문맥과 글을 부드럽게 만들어 보겠음.. | ||
![]() |
||
![]() |
||
|
||
|
전 번역이 수술실의 신체로부터 뜯어내겨진 혈액(내용)을 -interval- 타 신체에 재부여되하는 냉동(얼리고)팩(방어시키는)에 밀폐시킨 혈성의 플롯위에서 놔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팩과 신체로부터 찢겨내어진 그 혈성과 질료를 해부대위에서 살갑게 조우하는 채 신화의 창유리를 낯설게 직면해 볼 수 있는 영감의 여건이라는 생각이 듬니다. 위의 텍스트에선 한국말의 단어와 표현선택에 있어 루커님의 고심이곳곳 발견되는 데-루커님 고맙습니다- 말의 의미란 말의 사용에서 나타나기 때문이며(wittgenstein) 고심되어진 단어가 오히려 의미의 파악을 제약하는 경우도 있기에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는 오직 우리들 사이의 다양한 실제 의사소통과 활발하게 교류함과 소통함을 통해서만 싹트고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이라 하더군요 때문에 번역, 새로운 글쓰기> 라는 작업은 관객들의 언어문화의 문맥을 참고하고 또한 차용하기 위해서 대질을 요구하고, 상호이해를 통한 새로운 언어의 개발 개념의 발견 의미의 재합의의 과정을 요구하기 때문에 루커님의 머리글과 자기답글은 강요하는 닫힌 텍스트로서 또 방어적 자기해명을 양산하는 주로 텍스트들과 구별되서 상큼하게 읽게 되었습니다. 이는 중요한 자세라 생각하게 합니다 번역에대해말하기.이건 위생적일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긴장감있게 중요한 부위와 뿌리를 건드릴수 있고 진단할 수 있는 실천일 거라는 기대에서 혈액의 비유를 들었는데 나는 내 몸에서 구멍나 빠져나가죽을 피를 본 적있지만 학습받은 피에 대한 개념으로부터 여행나와 내피에 내몸을 실컷 굴려본적은 없습니다. 암튼 저도 겨울무르익으며 텍스트를 정독해보겠습니다.집이 붕 떠 있으니 사고가 잡히지 않는군요 실로 우리는 관전을 할 뿐 내 스스로가 언어 의 발견하며 창작하는자라는 것을 의식함을 의식하는 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문득바르트형이 그러는 데 딱 하나 주어진 게 있는 데 그건 붙잡는 방식뿐이래요 |
||
![]() |
||
![]() |
||
|
||
|
위의 글중 예술-계수라는 뒤샹의 개념 즉, 어떤 문장도 작품도 전달자의 의미를 온전히 전달 할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신의 말씀을 전한 천사들 혹은 망자의 넋을 전하는 무당은 인간에게 그 말씀과 영혼의 넋을 전하기 이전에 천사와 무당이 스스로 신과 망자의 언어를 완전히 이해 하냐는 것이다. 아니면 천사와 무당은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혹은, 게이치 않는 단지 기계적 전달자 인가? 즉, 언어 사용(비트겐슈타인)과 의미 전달은 결국 별개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보학의 출발임.. 그러기에 일상일수록 non-verbal(비언어적 소통, 몸짓등등)이 많아지고 관청일 수록 verbal(언어적 소통)이 많아진 다는... 몸과 신음 만으로 나를 달구는 포르노는 바로 반정보과 반언어의 대표적인 기술매체의 실천임.. 우리의 숙고는 언어의 사용뿐이 아닌 그 언어의 숙명 [의도되지 않은 표현된 것]과 [표현되지 않은 의도된 것]의 메울수 없는간극을 숙고 해야 된다는 바로 그 것이 언어가 아닌 기술매체에서도 유효하다는 것이 위의 텍스트의 요지라고 생각됨. 도덕경(道德經)의 첫문장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 도로불려 졌을때 도는 도가 아니고 이름이 이름으로 불려 졌을때 이름이 아니다) 라는 이 비극적인 자기 부정이 실은 열린사상의 출발점이 아닐까 생각 해보는 즉, 진보로의 변증법(관점)이 아닌 회귀로의 자기부정(실천). |
||
![]() |
||
![]() |
||
|
||
|
__게리 힐(gary hill)의 1994년 싱글채널 비디오 작업 그의 딸이 비트겐슈아타인의 색에 관한 논평(remarks on color)을 읽는다. 그녀가 그 텍스트를 이해했을리는 전무하나 아주 또박 또박한 그녀의 발음은 너무도 건조하게 원텍스를 어떠한 이입없이 전달하는 메신저의 역활을 한다. 그의 대표적인 메타미디어와 메타언어작업... 여기서도 위의 글의 요지처럼 관람자가 개념적 참여를 통해 작업을 완성 시킴. |
||
![]() |
||
![]() |
||
|
||
|
아마도 관객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작업자들의 양태도 다양성을 띠게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입니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이요. 일전에 프로그밍된 로봇을 이용해서 추상 페인팅 작업을 하는 프랑스 사람을 보면서, 결국 작업자가 미디어/필터로서 기능할 날이 멀지 않았겠단 예상이 되었었습니다. 혹은 미디어를 이종교매하는 브릿지로서의 역활 정도가 남지 않겠냔. 관람 의미의 확대가 결국에 작업자들을 연예인스런 행동양식/대중 아이콘으로 변화시켜버리는 측면도 없잖겠습니다만, 말씀대로 작업 발언의 방식에 있어 새로운 시점을 생성 가능케했음도 분명하겠지요. 어쩌면 이젠 관람의 영역을 작업자들이 어떻게 다루어 분파해나가느냐가 관건일 수도 있단 생각입니다. 자신 작업의 유통까지 책임져야할 시기가 언젠간 도래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자본으로의 맹진이든 저항의식의 발로이든. 윗 작업은 굉장히 인상적이네요. 내용/언어를 다루는 작업이 독일에서 많이 나오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
||
![]() |
||
![]() |
||
|
||
|
<img src="http://www.medienkunstnetz.de/assets/img/data/2125/bild.jpg"> -그림이안불려지는이유를궁금중 xp독일어시스템이라서?카시미론에선불리워지는데날것에서는되지않는군요 Gary Hill,«Viewer», 1996 모마MOMA에서 본 작업.남미이주노동자들은 1:1전신으로 떼로 줄지어 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정지한 스틸사진영사인듯 하다가 곧 미동하고 있는 떼의 멀티채널비디오임을 알게 된다 dead point에서 내러티브를 기다리던 관성은 두려운 질문이 되고 나는 떼앞에 당황처럼서있다-내가두려워하고나를미혹시키는저율동- "어두운 방'을 나간다 불편한상호응시.일상적으로 마주치지만 순간 거기, 그 장소에서 배재되어있는 떼를 발견한다 떼는 개별수의합보다크다 |
||
![]() |
||
![]() |
||
|
||
![]() ;src="에 따옴표를 제거..끝의 따옴표도.. |
||
![]() |
||
![]() |
||
|
||
|
자벨님 >>아마도 관객의 영역이 확대되면서 작업자들의 양태도 다양성을 >>띠게 되지 않았을까란 생각입니다. 좋은 의미든 아니든이요. 감상자의 참여로 작품이 완성된다는 것은 작업의 살해(작품을 거부하는)까지도 감상자의 몫에 포함된다는 얘기입니다. 즉, 작업이 열려있을 수록(예술-계수가 커질 수록) 오해의 폭은 커진다는 것이지요.(소음으로 끝날 수 있다는..) >>일전에 프로그밍된 로봇을 이용해서 추상 페인팅 작업을 하는 프 >>랑스 사람을 보면서, 로보트에 의한 드로잉은 아마도 영국의 harold cohen을 얘기 하고 싶은듯.. 이 로보트(AARON이라고 불림)의 드로잉을 예술로 볼것이냐 아니냐의 담론은 아직도 뜨거움.. 언제 한번 집중적으로 얘기 해보지요. ![]() ![]() 1974년 >>결국 작업자가 미디어/필터로서 기능할 날이 멀지 않았겠단 >>예상이 되었었습니다. 혹은 미디어를 이종교배하는 브릿지로서의 >>역활 정도가 남지 않겠냔. 예, 멀티미디어의 아주 딱 맞는 지적이신.. 핸드폰의 기능의 추가는 아주 좋은 예입니다. 그러나 작가의 미디어(매체)의 기능으로서의 역활은 아마 요셉 보이스와 백 남준 이후 거의 사라지고 있는,, 아마 예술시장의 권력이 그렇게 작동 되게 한다고 생각함... 작가를 팔 수 는 없으니.. 한 예로 자신의 몸을 매체로 그리고 연장된 기계 기관과 이종교배(?)한 사이보그아트(cyborg art) 호주 작가 stelarc의 작업입니다. 그의 말로 [제 삼의 팔] ![]() ![]() >>자신 작업의 유통까지 책임져야할 시기가 언젠간 도래하지 않을 >>까?요. 그것이 자본으로의 맹진이든 저항의식의 발로이든. 작가가 작업의 배포방식을 가장 명확히 한것은 아마 넷아트(net-art)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태생이후 멀지않아 moma의 컬렉션으로 들어 가버리게 된후로 애초의 넷을 뿌리로한 정신은 없어 진 듯 합니다. 장영혜의 작업도 그렇지만 온라인이 아닌 시디롬으로 쌈지의 아트 선제의 벽에 프로젝션되었을땐 더 이상 넷아트는 아니지요. 유통의 문제 또한 엄청난 어려운 그러나 중요한 의식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작가가 유통에대한 의식을 갖는것 만큼 건강한 기획자들의 출현이 필요하지 않을 까요? 음악은 연주되어져야하고 영화는 상영되어져야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은 결국 어떻게 먹고 사냐의 문제 이기도 하니....님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군요 어떤 시각으로 유통을 말씀하시는지 |
||
![]() |
||
![]() |
||
|
||
|
. . . 옷... 일전에 티비에서 봤을때 프랑스쪽에 무슨 교수라고 들었는데 잘못됐었나 보군욥. 아마도 프로그래밍으로 만들어진 저작물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퍼포먼스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선사이래 로봇의 첫 그림작업이라는 면에서 어느 정도는 갤러리에서 받아들이지 않을까란 상상을.-_-a 그나저나 딘따 짱이시란, 대체 어서 자료들을 글케 바리바리 갈무리해두셨는지 존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닷. b(-_-)d 참, 질문하신 것에 대해 간략하게 나마 말씀을 드리지요. 나중에 본격적으로 함 쓸 생각이 있습니다만, 물론 언제가 될지는-_- 일단 기획자의 출현은 필수적이라 봅니다. 작가 개인의 작업이 가지는 포스나 자본적 영향력은 항상 상존할테고 그에 따른 시장의 동작은 계속 일테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기획에 의해 개별작가들이 연계되어 발현되는 이미지들도 대단히 중요한 지점이 될것 같습니다. 개개인이 불가능했던 다변성이 중층된 담론/이미지가 생산 가능치않을까하는 거죠. 작금의 한국에선 이론/비평의 영역에서 작가들 줄세워서하는 기획이 많아 보이는데... 그것보단 좀더 작업자들의 섹터에서 기획이 이뤄져야지 않을까 싶고요. 유통에 대한 제 생각은, 일단 먹고 사는 방편으로서 작업은 배제하는 방식입니다. 소수의 전업작가들을 위주로 작업들이 유통되는 것보다는, 좀더 다양한 작가들의 작업이 발현되도록 비전업작가들 위주로 유통이 셋업되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라는. 또한 만들어진 작업들이 (아직까진)갤러리를 위주로 이뤄지고 있는 것에 대해 심한 거부감이 있는 편이어서요. 그랴서 전시를 하지 않고 있는 것도 있지만, 것보단 생산된 작업들이 좀더 자본/시스템의 영역에서 벗어나 외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이 발언을 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이유가 더 큽니다. 그럼으로서 작업들이 일정의 권위를 획득하는(원한다면) 곳이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아니었으면 하는 것이죠. 물론 그 대안으로서 1인출판이나 인터넷을 생각하기도 했었습니다만, 그것보다는 좀더 작가들 사이의 연계가 단단히 이뤄질 수 있고 일정의 시스템으로서도 작용 가능한 구조였으면 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제 생각입니다. 일단 여기까지. 부연할 생각이 떠오르면 바로 덧깁도록 하지요.^0^ 일하러 가야해서리. . . . |
||
![]() |
||
|
|
|
[이전 10개] [1]..[31][32][33][34][35][36][37][38][39] 40 |
| Copyright 1999-2026 Zeroboard / skin by zero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