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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1-22 21:32:39, Hit : 1608, Vote : 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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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論] 사진역사 기술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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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독만큼 경계해얄 것이 있을까.   읽기 쉬이 쓰인 글은 아니지만 혹여 이론에 흥미를 가진 이가 이곳을 살피잖을까 싶어 올린다.   적어도 스스로 의심이 가는 대목은 기술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p.s : 근자에 꽤 많이 포토플에서 자료를 가져오고 있어서... 이래저래 봉림님께 죄송한 마음 가눌 수 없는(__);;;   좋은 글월에 감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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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fotoful

사진역사의 기술의 방법론
최봉림

 

 

본 발표는 `사진 역사의 기술의 방법론`을 생산된 `사진의 역사`의 예들을 들어가면서 통시적으로 혹은 공시적으로 정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진 역사의 기술에 있어서 객관화 objectivation의 심각한 장애로 나타나는 몇몇 요소들을 제시함으로써 보다 객관적인 사진역사의 기술의 기본토대를 마련하는데 있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사진역사의 기술 방식을 동양화의 기법인 홍운탁월법(紅雲托月法) - 구름을 물들여 달을 드러내는 일종의 네거티브 방식으로 고려하는데 있다. 준수해야할 방법론적 원칙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야할 사항들을 검토함으로써, `사진 역사의 기술의 방법론`을 비판적으로 고려하는데 있다. 비판적 검토의 대상은 무엇보다도 뷰먼트 뉴홀 Beaumont Newhall의 「사진의 역사」가 드러낸 은밀한 국가주의 nationalism와 분류의 난맥상이며, 두 번째는 존 자코프스키 John Szarkowski 의 개리 위노그랜드 Garry Winogrand에 대한 실증적 작가론의 취약점이며, 마지막은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의 <<사진의 작은 역사>>가 범한 실증적 오류이다.

***

뉴홀의 「사진의 역사」는 1937년, 사진 발명 100주년과 관련하여 뉴욕 현대미술관이 기획한 대형 전시회, ‘Photography 1839-1937`의 전시회 카탈로그에서 발원한다. 당시 현대미술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었던 뉴홀이 기획한 이 전시회의 카탈로그는 90 페이지의 분량이었고, 시대순에 따라 90점의 사진을 인용하면서, 그것의 작가, 제목, 프로세스를 명기하는 것이었다. 시대구분은 초기사진 primitive photography (1839-1851), 근대사진 early photography (1851-1914), 현대사진 contemporary photography (1914- )으로 구획했는데, 1851년은 습판사진이 사진계에 도입된 해이며, 1914년은 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던 해이다. 그러니까 뉴홀의 시대구분은 한편으로 사진기술공정의 중요한 변화를 고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시대상황의 격변을 고려했다. 주1) 사진역사의 시대구분을 사진의 기술적 여건의 변모에 연동시키는 전자의 경우는 뉴홀 이전의 ‘사진의 역사`들이 일반적으로 채택하는 시대구분 방식이었다. 대표적인 예는 오스트리아인, 요셉 에더 Josef Maria Eder (1855-1944)가 1905년에 저술한 「사진의 역사 Geschichte der Photographie」이다. 이것은 1932년, 2권의 책으로 개정 증보되고, 뉴홀이 기획하는 전시회 1년 전인 1936년에 영어로 번역된다. 이 영어본은 1945년, 1976년 재판을 거듭한다.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 젤라틴 브로마이드로 이어지는 사진의 기술적 변모의 역사는 여전히 시효를 잃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불어로 된 사진기술 진화의 역사는 조르쥬 포토니에 Georges Potonnié가 1925년에 쓴「사진 발명의 역사 Histoire de la déouverte de la photographie」이며, 이것은 1935년, 영어로 번역됐다. 후자의 경우는 정치사를 시대구분을 위한 참조로 삼는 일반 미술사의 한 경향을 감안한 것으로 보인다. 주2)

1937년의 전시회와 전시회 카탈로그가 드러낸 폐단은 무엇보다도 국가주의적 감정이 전시 작가의 선정 뿐 아니라 도록에 실리는 작가의 선정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독일 사진가는 단지 15명만이 전시된다. 영국인은 27명이 전시에 선정되고 17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프랑스인은 87명이 전시되고 27명이 도록에 수록된다. 반면 미국인은 84명이 전시되고 52명이 카탈로그에 게재된다. 전시작가와 작품과의 접촉의 편의성, 작품대여의 가능성,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국가에 따른 `편파적` 선정의 불가피한 이유로 고려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국가주의적 편파성은  그리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 1949년에 출간되는 그의 「사진의 역사」의 인덱스에 나타난 독일인은 13명이며 그들의 대부분은 사진기술의 진보와 관련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었다. 주3)


1982년 개정판에서는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독일 사진가들이 보다 폭넓게 다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인덱스에 나타나는 총 515명의 인물 중 독일인은 43명으로 10%에도 미치지 못한다. 미국 사진이 차지하는 양은 결코 줄어들지 않았다. 제 9장 ‘회화주의 사진 Pictorial Photography`의 총 도판 22개 중, 스티글리츠가 유럽의 회화주의 운동의 사진모임을 본 따 1903년에 창설한 ‘사진분리파 Photo-Secession`의 회원들의 사진이 총 12장이 실림으로써 미국은 회화주의의 본산으로 탈바꿈한다. 에드워드 스타이켄 Edward Steichen의 사진은 3장 (사진 1), 클래런스 화이트 Clarence White 사진은 2장, 그리고 미국 회화주의 사진의 대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 Alfred Stieglitz의 사진은 무려 5장이 게재된다 (사진 2). 뉴홀의 미국 중심적 사진역사의 관점이 두드러지는 곳은 제 10장 ‘스트레이트 사진’이다. 총 31점의 수록 사진 중 26점이 스티글리츠 (사진 3), 폴 스트랜드 Paul Strand(사진 4), 에드워드 웨스톤 Edward Weston 등 미국 작가의 사진이며, 오직 5점만이 유럽의 사진이다. 놀라운 것은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과는 독립적으로 진행된 독일의 신객관주의 Neue Sachlichkeit의 사진은 그 주역인 알베르트 랭거-파츠Albert Renger-Patzsch의 사진을 끝물에 단 한 장 첨부함으로써 독일에서 폭넓고 깊이있게 진행된 사진의 독자성 획득을 위한 모색을 미국의 ‘스트레이트 사진’과 “다소 유사한” 사진경향으로 폄하했다 (사진 5). 인용하면, “스트레이트 사진에 다소 유사한 점이 유럽에서는 독일 사진가 랭거-파츠의 작품에서 발견된다.” 주4)

게다가 제 10장 ‘스트레이트 사진’은 분류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그는 으젠느 앗제 Eugène Atget 사진 3점 (사진 6)을 사진 매체의 독자성과 사진의 독특한 예술성을 추구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에 포함시킴으로써 베레니스 애보트 Berenice Abbott 이후 발터 벤야민을 거쳐 마리아 함부르그 Maria Morris Hambourg와 자코프스키에 이르는 앗제-사진 작가, 앗제-예술가의 신화를 뒷받침했다. 주5)뉴홀은 사진작가-예술가, 앗제라는 그의 선입견을 인증하기 위해 진술의 객관적 가치가 의심스러운 자료를 인용하기를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앗제의 친구인 연극 영화인 앙드레 칼메트 André Calmettes가 사진사, 앗제를 사진작가-예술가로 만들려는 애보트의 요청으로 쓴 편지의 한 구절이었다. “그는 (앗제) 언젠가 파리와 파리 주변의 멋지고 예술적인 모든 것을 사진콜렉션으로 창조하겠다는 야망을 갖고 있었다.”주6)

파리와 파리 근교의 역사적 자료, 지형학적 자료로써 어떠한 예술적 의도도 없이 생산된 앗제의 사진들은 필자의 견해로는 제 13장 ‘자료사진 Documentary Photography`에 귀속했어야 마땅했다. 파리의 거리의 사진사에게는 예술가의 “창조하겠다는 야망”도, 자코프스키가 말하는 “대단히 풍요롭고, 복잡다단한 그가 살고 있는 시대의 문화 정신을 시각적 언어로 설명하겠다는 목표”도 없었다. 앗제의 10,000여장이 넘는 네거티브 원판은 그가 산 시대의 문화적 환경이 필요로 한 혹은 필요로 한다고 여겨지는 시각적 자료 document를 주문과 있을 수 있는 수요를 예상해 ‘생산’한 결과이지 결코 ‘창조’의 산물들이 아니었다.

뉴홀의 「사진의 역사」의 분류의 난맥상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장 혼란스러운 부분은 14장, ‘보도사진 Photojournalism`이다. 언론매체에 실렸다는 이유만으로 윌리엄 와네크 William Warnecke의 <저격당한 순간의 뉴욕시장 윌리엄 게이너> (1910) (사진 7) 와 알프레드 아이젠슈태트 Alfred Eisenstaedt가 찍은 초상, <버트란트 러셀> (1952) (사진 8) 이 같이 다뤄진다. 인쇄매체가 다뤘다는 이유로 펠릭스 만 Felix Mann이 취재한 <뭇솔리니와의 하루> (1931) (사진 9) 가 「보그 Vigue」지의 수석 사진가 아돌프 드 메이너 Adolphe de Meyer가 찍은 패션사진 <웨딩 드레스, 모델 헬렌 리 워딩> (1920) (사진 10) 이  ‘보도사진`의 장에 병치된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937년 5월 10일자 「라이프 Life」지에 실린 마가렛 버크-화이트 Margaret Bourke-White의 포토 에세이 <인디아나주의 문시 Muncie 시>는 “사회학적 연구”의 일환이었고, “중요한 미국 자료”로 제시되었다는 이유로 ‘자료사진`의 장에 귀속된다 (사진 11).  그렇다면 ‘보도사진’ 장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유진 스미스 Eugene Smith의 <스페인 마을> (1951)에 관한 사진 취재는  여전히 근대 이전의 삶을 계속하는 한 스페인 마을의 “사회학적 연구”일 수 없으며, ‘중요한 스페인 자료`일 수 없단 말인가?

뉴홀의 국가주의적 편협성이 극단에 이르는 곳은「사진의 역사」의 마지막 장인 ‘새로운 방향들’이다. 2차 세계대전의 이후의 소위 ‘예술사진’을 다루는 장으로, 그는 18명의 사진작가를 다루고 있는데, 놀랍게도 미국인이 아닌 작가는 한 명도 다루지 않았다. 저술 지면의 한계라는 변명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마이너 화이트 Minor White (사진 12), 아론 시스킨드 Aaron Siskind, 해리 캘러한 Harry Callahan (사진 13),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사진 14) 의 경우에는 지면의 한계를 고려치 않고 각 2장의 ‘작품’들을 할당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배타적 독점의 무의식적 혹은 의식적 의도는 분명하다. 1940년, 세계 최초로 뉴욕 현대미술관에 창설된 사진부 Department of Photography의 초대 큐레이터였으며, 1949년에는 사진의 제국주의적 기업 코닥사의 조지 이스트먼 하우스의 국제 사진 박물관 International Museum of Photography at George Eastman House의 초대관장이 되는 뉴홀은 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미국의 사진역사가 곧 세계 사진의 역사임을 은연중에 그러나 분명하게 공표하고자 했던 것이다. 

1910년을 전후로 미국사진은 순수하게 사진적인 것을 추구한다고 생각하는 ‘순수 사진 pure photography’ 혹은 ‘스트레이트 사진’을 통해 유럽 사진의 종속성에서 벗어나 나름의 독자성을 확보한다. 사진의 특수성, 자율성을 통해 전통적인 소묘예술의 지위에 도달하려는 스트레이트 사진은 20년대 들어 유럽의 어느 나라보다도 활발하게 권위 있는 공공 미술관 Museum of Fine Arts의 컬렉션의 대상이 된다. 주7)1930년대에 들어서, ‘스트레이트 사진’의 특질을 극단적으로 지향하는 f. 64 그룹과 더불어 미국의 사진은 18세기 후반 서구 사회가 확립한 모더니즘 미학이 요구하는 예술의 두 조건, 즉 세속적 유용성과 경제적 이해추구의 산물이 아닌 고상한 정신성의 발현으로서의 예술작품, 그리고 다른 매체와는 구분되는, 자신의 특질을 구현하는 예술작품이라는 조건을 충족시키기 시작한다. 전자, 즉 정신성의 구현은 스티글리츠의 ‘사진 예술’, ‘예술 사진’을 위한 청교도적 엄격함을 계승함으로써 구현하며, 후자, 즉 사진의 자율성은 사진 매체에만 적용되고, 오직 사진적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사진 결과의 예시 previsualization 규범인 동시에 완벽한 촬영과 완벽한 프린트를 허용하는 존 시스템 Zone System이라는 사진적 규율체계를 통해 획득한다. 사진예술의 실현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거부하는 스티글리츠의 완벽주의는 사진가-예술가라는 이미지를 사회에 인지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으며, 존 시스템은 데생과 구도, 구성이라는 회화적 규범에 사진기예의 습득을 의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순수한 사진적 규범을 이론적으로 확립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1937년 뉴홀이 기획한 사진전시회, ‘Photography 1839-1937`은 미국 10개 도시 순회 전시회에 들어가 사진의 역사와 그 역사 속에 보전된 사진대가들의 예술적 면모를 알렸다. 1940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의 창설은 이러한 미국 사진이 획득한 사회적 승인을 대형 미술관이라는 제도가 다시 한번 추인하는 ‘사건’이었다. 더욱이 미국의 미술계는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으로 대변되는 ‘추상표현주의’를 통해 미국 미술의 독자성과 독창성을 세계에 공표한 터였고,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는 미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일반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이러한 역사적 문맥 속에서 역사와 전통이 일천한 사진에 관한 한, 미국이 사진의 ‘새로운 방향들’을 이끄는 리더라는 의식은 전혀 무리한 것이 아니었다. 

뉴홀의 「사진의 역사」는 영어로 쓰여진 사진 매체의 일반 역사에 대한 가장 영향력 있는 개괄서이지만 이미 살펴본 바대로 분류의 혼란, 국가주의적 편협함으로 객관화의 미덕이 크게 손상당한 ‘사진의 역사’이다. 그것의 결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4번에 걸친 개정과 증보에도 불구하고주8), 역사 기술 관점의 수미일관성의 결여는 여전히 두드러져 보인다. 뉴홀은 우선 여러 장에 걸쳐 새로운 사진공정의 발명이 야기한 사진 재현의 특질과 여파를 연대기식으로 나열한다. 다시 말해 사진에 고유한 공정기술 process의 발전 양상, 즉 다게레오타입, 칼로타입, 콜로디온타입, 젤라틴 브로마이드, 칼라사진의 발명을 시대순으로 좇는다. 제3장은 ‘다게레오타입’을, 제4장은 ‘칼로타입’을 다루며, 제5장, ‘모든 사람들의 초상’은 젤라틴 브로마이드의 상용화 이전, 19세기 후반부를 풍미한 콜로디온 타입의 사회적 결과로서의 초상을 다룬다. 제 12장, ‘순간의 영상’은 사진기, 렌즈, 필름, 인공광원의 질적 개선과 관련된 동작의 순간 포착을 그리고 15장, ‘칼라사진’은 색채사진의 기술 변천의 과정과 그것의 미학적 가능성을 조심스레 가늠한다. 다른 한편으로 뉴홀은 때로는 세분화된 분류를, 때로는 포괄적인 분류를 시도한다. 회화의 아카데미적 규범을 추구하는 서술적 사진 narrative photography을 (사진 15) 제6장, ‘예술사진’으로 설정하고, 회화의 예술적 지위에 도달하기 위해 1890년대에서 1910년대에 유럽과 미국에서 공히 일어난 ‘예술사진’ 운동은 제9장, ‘회화적 사진’으로 분리한다. 반면 제11장, ‘형상의 탐구’는 1920년대를 전후로 유럽에서 일어난 모든 전위적 사진 운동과 실험을 포괄한다. ‘뉴 비젼 New Vision’ (사진 16) 과 ‘러시아 구성주의 Russian Constructivism’ (사진 17), 존 하트필드의 John Heartfield의 포토몽타주 (사진 18), 다다이즘과 초현실주의 포토 콜라주가 (사진 19) 단지 17 페이지의 공간 속에 뒤섞인다. 
 사진의 기술적 진보에 관한 역사를 구성하는 사진과 일반 역사의 자료로서의 사진, 그리고 예술 매체로서의 사진을 연대기적으로 구획한 뉴홀의 「사진의 역사」는 ‘총체적 사진의 역사 The History of Photography’를 구성하려는 시도의 실패를 증언한다.  그러나 그 실패는 복잡다단한 사진의 생산과 소비를 적절하게 역사적으로 구획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예증이기도 하다. 사진의 역사의 어려움은 무엇보다도 일반역사와 함께 하는 사진의 엄청난 생산량과 ‘기록`과 ‘표현`을 넘나드는 그 생산과 소비의 다양성에 있다. 사진의 생산과 소비에 관련된 어떠한 분류체계도 사진 생산의 범주와 소비영역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못한다. 초상 장르 하나만을 고려한다하더라도 그 범주와 영역은 너무나 복잡하기 짝이 없다. 행정관서에 걸려있는 대통령의 초상에서 강력계 형사의 파일에 있는 범죄인의 얼굴에 이르는 사진초상의 복잡다단한 용도는 초상사진의 어떠한 분류 체계도 부적절하게 만든다. 미셸 프리조의 주도하에 1995년에 출간된 「사진의 새로운 역사」의 29장을 구성하는 피에르 베스 Pierre Vaisse의 에세이, <<초상과 사회, 무명인과 유명인>>은 분기하는 사진초상의 생산과 용도 앞에서 무력함을 드러내는 분류의 한 시도일 뿐이다. 주9)사회학적 관심의 산물인 ‘사회적 초상`에 포함시킬 수 없는 대통령의 초상과 범죄자의 증명사진은 그 사회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베스의 분류 어디에도 편입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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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관한 글들 중 역사적 historic 가치에 도달하여 사진의 역사적 historical 연구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글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사진의 역사’에 전념한 글들이 아니었다. ‘사진의 역사’에 대한 밀도 있고 폭넓은 이해의 기틀을 마련한 글들은 인간활동의 제 분야에 편재하는 사진의 속성에 따라 사진이 개입된 어떤 특정분야를 사진을 통해서, 사진과의 관계 속에서, 통시적으로 혹은 공시적으로 연구한 글들이었다.  
앙드레 루이예 André Rouillé의 「사진의 제국 1839-1870」(1982) (정진국 역)은 사진과 사회학과의 연계 속에서 생산된 프랑스 제2제정시대에 대한 탁월한 사회사이며 사진초상의 역사이다. 조르쥬 디디 위베르망 Georges Didi-Huberman의 「히스테리의 발명 Invention de l`hystérie」 (1982)은 정신병리학과 사진 기록과의 상호관계를 파헤친 훌륭한 의학의 역사이며 19세기 후반의 의학 다큐멘터리 사진의 연구서이다. 발터 벤야민의 에세이 <<사진의 작은 역사>> (1931)는 1920년대를 주변으로 일어난 사진 취향의 변화를 밝히는 사진역사의 1차 자료인 동시에,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의 특성을 규명한 미학론이다. 롤랑 바르트 Roland Barthes의 「카메라 루시다, 사진에 관한 노트」(1980) (조광희 역)는 사진에 관한 기호학적 사유의 대표적 저작인 동시에 사진초상의 숭배적 가치의 연구를 위한 1차 자료이다. 로잘린드 크라우스 Rosalind Krauss의 사진에 관한 여러 글들은 사진의 기호학적 지위에 관한, 사진의 역사에 관한 탁월한 비평적 시선인 동시에, 사진적인 것에 의거하여 현대미술의 주요 경향을 해독하려는 혜안이다. 이러한 성과물에도 불구하고, 사진역사에 대한 심도 깊은 객관화 objectivation를 거스르는 연구의 태도는 사진역사의 토대를 형성하는 작가론, 작품해석에 만연되어 있다. 그 예를 자코프스키의 위노그랜드와 발터 벤야민의 으젠느 앗제에서 찾아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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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코프스키는 위노그랜드에 관한 에세이에서 꼼꼼한 구성composition과 말끔한 마무리보다는 거친 절단을 선택하는 사진가의 프레이밍, 조화로운 세계의 가상보다는 혼돈의 힘에 이끌리는 그의 성향, 현실의 유위전변의 탐구, 필연성보다는 우연성에 역점을 두는 그의 사진적 태도 (사진 20, 21) 에 대한 원천으로 알렉세이 브로도비치 Alexey Brodovitch를 상정한다. 이러한 가정은 무엇보다도 위노그랜드가 브로도비치의 사진 워크숍에 참가했다는 전기적 사실에 근거한다. 즉 사진작가가 f. 64 그룹 사진의 정돈된 프레이밍과 정확한 촬영, 그리고 우연을 허용하지 않는 완벽한 기예를 거부하는 양상의 기원을 뉴욕 현대미술관의 사진부장은 ‘하퍼스 바자 Harper`s Bazaar`의 미술부장의 가르침에서 찾는다. 

"새로운 사진의 경향을 예시한 주요 인물은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였다. ‘하퍼스 바자’의 미술부장이었던 그는 50년대의 가장 훌륭한 사진들의 상당수를 사용하고 의뢰한 장본인이었다. 전설적인 워크숍을 통해 브로도비치는 독창적 사고의 중요성에 대해 불을 당겼는바, 위노그랜드는 1949년 그의 워크숍의 학생이었다. 브로도비치는 학생들에게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을 묘사한다면, 훌륭한 사진이 될 것이라고 설파했다. 1945년에 출간된 그의 사진집, 「발레 Ballet」는  사진 기예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기준을 무시하는 것으로 그의 제자들이 뒤따랐다. 브로도비치는 그의 사진과 강의를 통해, 좋은 사진은 기예와 구성에 대한 직관의 승리라고 주장했다."주10)

이렇게 전기적 사실과 예술 생산 사이의 인과율을 설정하는 실증주의적 관점은 전기적 사실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그러나 위노그랜드의 사진 생산과 수용의 마테시스 mathesis를 구성한 체계를 인지하지 못한다. 다시 말해 자코프스키는 위노그랜드 사진의 원천으로 브로도비치의 “전설적인 워크숍”을 상정하지만, 1940년대의 미국 사진계가 경험하는 새로운 사진의 생산과 수용에 관계된 일련의 규칙들의 성립과 취향의 변화를 보지 못한다. “사진 기예의 전범으로 여겨지던 기준을 무시하는 것”을 허용하는 일련의 구성체계가 블도비치의 탈구도적 사진, 탈기예적 사진과 그리고 그의 워크숍을 용인했다는 사실을 간과한다. 사실, 사진의 새로운 경향에 참여하는 브로도비치의 옆과 뒤에 그리고 앞에는 여러 사진가들이 구체적인 영향의 수수관계 없이 “기예와 구성에 대한 직관의 승리”를 주장하고 있었다. 위지 Weegee, 리젯 모델 Lisette Model (사진 22), 헬렌 레빗 Helen Levitt (사진 23), 윌리엄 클라인 William Klein, 로버트 프랭크 Robert Frank 모두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빈다면, 카메라의 시각적 무의식 optical unconscious의 포착능력에 재현의 주도권을 내맡기면서 반고전주의적, 탈미학적 성향의 스냅사진을 생산하고 있었다. 1910년대 이후 사진 생산과 수용의 체계로 자리잡은 스트레이트 사진 straight photography과 1930년대의 f. 64 그룹이 확립하는 순수사진의 청교도적 규범에 맞서면서, 그들은 “자기만의 고유한 인식”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셔터를 마구 누르고 있었다. 그러므로 균형, 조화의 고전적 개념, ‘순수 사진’의 완벽한 기예를 무시하는 위노그랜드의 사진은 브로도비치의 가르침 자체에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진결과의 예시 previsualization로 표방된 ‘순수사진’의 재현의 필연성을 거부하고 “기예와 구성에 대한 직관의 승리”를 주장하는 브로도비치의 마테시스에 빚지고 있는 것이었다 .
전기적 사실을 원인으로 사진 생산을 결과로 승인하는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장의 또 다른 실증주의적 관점의 진술을 인용하기로 하자.

위노그랜드는 두 번째 아내, 주디 텔러Judy Teller를 광고업자인 도일, 데인, 번바크의 사무실에서 만났는데, 그녀는 광고문안 작성자였다. 그녀의 격려와 아마도 그녀의 영향 때문에 그는 광고사진을 계속했지만, 1969년, 그러니까 결혼 2년만에 그들이 헤어졌을 즈음, 그는 광고 일에 한때 느꼈던 모든 흥미를 잃어버렸다. 그는 또한 보도사진에도 흥미를 잃었다. 그는 후에 1969년을 이렇게 회상했다. “고용된 총잡이와 같은 그런 일을 그만 둘 때까지는 적잖이 좋아헀었죠... 그런데 더 이상 그런 일을 하고싶지 않았어요.” 주11)

위노그랜드가 광고사진을 시작하고 그만두게 된 ‘사건’을 주디 텔러라는 두 번째 아내와의 관계에 연동시키는 이 해설은 작품 생산의 외재적 현실 즉, 작가가 연루된 가족사, 사회적 사건 혹은 그의 인생관, 사상이 작품의 생산에 선행하며, 따라서 작품의 생산은 이러한 작품 외적 현실의 결과라는 실증주의적 반영론의 전형적인 예이다. 그러나 이 실증주의적 해설을 작가의 한 실증적 자료는 반박한다. 위노그랜드가 죽기 일년 전 독일 텔레비젼과 갖은 인터뷰를 자코프스키는 인용했는데, 그것에 따르면,

"내가 사진을 하려했던 방식은 나 자신을 철저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나의 존재가 드러나지 않는 것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내가 생각하기엔, 그러한 사진이 최상이며, 매력적이다."주12)

작가의 개체성, 개인적 요소 즉 그의 개성, 그의 삶, 예술관 등이 제거되면 될수록, 다시 말해 작가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에 양도되면 될수록, 카메라의 기계적 포착이 작가의 개성을 압도하면 할수록, 위노그랜드의 사진이 최상이 된다면, 사진작가의 존재가 ‘철저히’ 개입되고 연루되는 외적 현실로 작품의 성향을 해석하려는 시도는 작가의 최하의, 매력적이지 못한 사진에만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자코프스키 역시 위노그랜드의 삶과 작품에 관한 글을 마감할 즈음 그의 “최상의 사진들”은 인생관, 예술관과 같은 “의지의 행위”의 산물이 아니라, “사진적 프로세스”가 가져다주는 “새로운 앎”과 관련되어 있음을 인정한다.

위노그랜드는 그의 최상의 사진들은 그가 알았던 것의 도해가 아니라, 새로운 앎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새로운 앎은 의지의 행위에 의해 소환되어 존재할 수 없었다. 그것은 실험과 직관 행위 그리고 운수를 통해 발견되어야 했다. 그는 “사진적 프로세스 내에서 사는 법을”배웠다. 주13)

위노그랜드가 말하는 “사진적 프로세스 내에서 사는 법”은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말하는 영화의 카메라 시선에 복종하는 것과 흡사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메라가 보여주는 자연과 사람의 눈에 비친 자연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다. 카메라는 무엇보다 의식적인 인간행동 대신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을 포착하기 때문이다. (...) 카메라는 우리에게 무의식의 경험을 시각적으로 열어 보인다. 마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충동의 경험을 드러내듯이 말이다." 주14)

언뜻 보면, 영화용 카메라의 시선에 관계된 발터 벤야민의 언급을 위노그랜드의 스틸 카메라에 적용하는 것이 억지일 듯싶지만 실은 조금의 비약도 아니다. 왜냐하면 위노그랜드는 “무의식적인 인간행동”의 “무의식의 경험”을 포착하기 위해, 영화를 찍듯 셔터를 눌러댔기 때문이다. 자코프스키의 진술을 들어보자.

"1984년 그가 죽었을 때, 2,500롤의 촬영 필름이 현상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 게다가 6,500롤은 현상됐지만, 밀착인화는 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3,000롤은 밀착인화됐지만, 거의 대부분 종잡을 수 없는 편집상태였다. 위노그랜드의 작업기록을 보면, 그는 L. A. 시절 동안 (1978에서 1981년), 8, 522롤을 현상했으며, 미현상 필름은 그 이상이었다. 미편집 필름의 일부가 텍사스에서 촬영된 것이라 할지라도, 그가 L. A. 시절 촬영하고, 거들떠보지 않은 양은 33만 컷 이상에 달한다."주15)


















































즉 위노그랜드의 사진작업 방식은 영화촬영 방식에 거의 근접했고, 결과적으로 그의 스틸사진은 일종의 영화의 포토그램인 셈이었다. 이 동영상 촬영의 기법을 통해 사진의 의미작용를 유예, 지연시키며, 더 나아가 의미의 부재 혹은 다의성을 자극하는 그의 사진은 고정되고 확정된 의미작용을 지향하는 광고사진, 보도사진과는 도저히 어울릴 수 없었다. 특히 완벽한 사진적 기예와 트릭을 동원하는 광고사진에 그의 마구잡이식 촬영은 더 더욱 부합할 수 없었다. 위노그랜드가 광고사진, 더 나아가 보도사진을 그만 두게된 본질적인 이유는 따라서  작가의 전기적 요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의 사진의 스타일에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삶과 작업에 관련된 실증적 자료가 작품의 생산과 의미를 기계적으로 규정할 수도, 규정해서도 안 된다. 즉 작가와 작품에 관련된 1차 자료는 작품의 생산과 의미를 규정하고 보장하는 객관적 실재 혹은 실체일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의 수집과 검토는 작품의 해석과 이해의 객관화 objectivation를 위한 필수 불가결한 작업이다. 1차 자료의 수집과 엄격한 검토는 실증주의적 역사 방법론의 인과율에 의거한 기계적 해석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주관성 subjectivity의 배제는 아닐지라도 시대와 장소, 개인의 주관성을 객관화하기 위한 기본작업으로 존재한다. 이 기본작업이 선행되지 않을 때 뒤따르는 해석의 오류는 발터 벤야민이 <<사진의 작은 역사>> (1931)에서 말하는 으젠느 앗제가 전형적인 예이다.

"(...) 사진에는 피아노의 명수 부조니 Busoni와 같은 명수가 존재한다. 앗제가 바로 그러한 명수이다. 두 사람은 다 명인이면서 또한 선구자였다. 누구도 따르지 못할 일에 대한 심취는 극도의 정확성과 더불어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이었다. 심지어 성격까지도 비슷한 데가 있었다. 앗제는 배우였지만, 그가 하는 일에 염증을 느껴 무대의 분장을 지워버리고 나서는 현실의 분장까지도 지워버리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는 가난하게 이름도 없이 파리에서 살았다. (...) 앗제의 파리사진들은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이자 또 초현실주의에 의해 다시 움직여지게 된 진정한 의미에서 유일하다고 할 수 있는 긴 대열의 전위대이다. 그는 타성에 젖은 쇠퇴기의 초상화 사진술이 퍼뜨린 질식할 듯한 아우라 aura를 최초로 소독한 사람이기도 하다. (...) 그는 최근의 사진술이 이룩한 의심할 나위 없이 분명한 공적이라 고 할 수 있는, 대상을 아우라로부터 해방시키는 일을 제일 먼저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주16)


벤야민은 누구보다도 베레니스 애보트가 꾸며낸 예술가로서의 앗제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고, 초현실주의의 기관지인, ‘초현실주의 혁명 La Révolution surréaliste`에 1926년 6월 15일, 12월 1일 두차례에 걸쳐 그의 사진들이 실렸다는 이유로 (사진24), 앗제를 “초현실주의 사진의 선구자”로 이상화시켰다. 사실, 앗제는 초현실주의 운동과는 어떠한 정신적 관련도 맺지 않은 채 “이름도 없이 파리에서 산” 사진사였다. 하급선원, 아주 보잘 것 없는 배우의 이력을 가진 앗제는 초현실주의가 목표로 한 인간과 세계의 ‘혁명’에 가담할 지적 역량도, 정열도 갖춘 예술가가 결코 아니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일상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한 ‘사진사’였다. 그의 사진을 싼 가격에 주문하고 편의에 따라 사들인 20세기 초엽의 프랑스 문화 환경은 그의 사진에서 현실을 미화시키고, “질식할 듯한 아우라”를 부르는 “현실의 분장”을 요구하지 않았다. 앗제의 파리와 파리 근교 사진을 문화재 보전과 보수를 위한 사진 자료, 화가의 스케치의 편의를 도모하는 자료사진, 건축의 실내와 실외를 보수하는 건축업자의 참고자료 (사진 25, 26)로서 요구했다. 어떠한 예술적 의지도 표방하지 않았던 그는 20세기 초엽의 프랑스의 문화체계의 이러한 요구에 아무런 심리적 갈등 없이 순응했다. 이렇게 해서 다량으로 생산된 앗제의 파리의 풍물 사진에서 만 레이 Man Ray를 비롯한 몇몇 초현실주의자들은 평범한 현실 속에 내재된 초현실주의적 양상을 발견했고 (사진 27), 애보트는 아우라가 말끔히 소독된, 객관적이고 차가운 앗제의 ‘기록’에서 자신의 사진적 방향을 시사받았다. 그리고 애보트는 미국의 사진화상, 쥘리앙 레비 Julien Levy의 요청으로 그의 사진구입을 담당하게 되면서 열정적으로 무명의 파리 사진사를 홍보하기 시작했다. <<사진의 작은 역사>>가 쓰여지기 4년전, 그러니까 1927년에 죽은 앗제에 대해 발터 벤야민은 만 레이의 조수였던 애보트의 손을 거친 자료, 평가 외에는 어떠한 다른 자료도 접할 수가 없었다. 벤야민의 앗제에 대한 해석의 오류는 실증적 자료수집와 엄정한 자료 검토를 위한 시간적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필연적인 결과였다.  










 제1차 사진사학회  학술세미나 발표 (2000년 5월 27일, 중앙대 예술대학원 멀티미디어실)

1) Cf. Martin Gasser, <<Histories of Photography 1839-1939>>, History of Photography, spring 1992, p. 57.

2) 뉴홀은 하버드 대학 미술사학과에서 박사논문을 준비하다가, 경제사정으로 학업을 포기한다. 따라서 그는 미술사의 시대구분을 정치사와 연동시키는 관례에 익숙해 있었다. 그의 지도교수인 폴 삭스 Paul Sachs는 뉴홀이 뉴욕 현대미술관 사서로 취직하던 1935년 당시 미술관의 상임이사였다.

3) Cf. Allison Bertrand, <<Beaumont Newhall`s `Photography 1839-1937`>>, History of Photography, summer 1997, p. 146, notes 70, 71, 76.

4) Beaumont Newhall,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 Day,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82, p. 192.

5) Cf. Berenice Abbott, <<Eugène Atget>>, Creative Art, September 1929, pp. 651-656. Beaumont Newhall, Photography : Essays & Images, London, Secker & Warburg, 1980, pp. 235-237에 재수록;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1931), in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반성완 역), 서울, 민음사, pp. 244-5; Maria Morris Hambourg, John Szarkowski, The Work of Atget : Volume I, Old France, New York : The Museum of Mofern Art, and Boston : New York Graphic Society, 1981, pp. 18-21.

6) Beaumont Newhall, The History of Photography, op. cit., p. 195에서 재인용.

7) 미국의 공공 미술관에 사진 컬렉션을 도모한 중심 인물은 판화상이자 예술서적상인, 칼 지그로서 Carl Zigrosser이며, 그를 통해 ‘예술의 전당’에 본격적으로 입성한 작가는 스티글리츠였다. 스티글리츠는 1923년에는 보스톤 미술관 Museum of Fine Arts (Boston)의 판화부 Print Department에 27점의 사진을 기증한다. 1928년에는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Metropolitan Museum of Art에 22점의 사진을 기증한다. Cf. Malcom Daniel, <<Photography at the Metropolitan - William M. Ivins and A. Hyatt Mayor>>, History of Photography, summer 1997, p. 111.

8) 1937년의 전시회 카탈로그는 이듬해 「Photography : A Short Critical History,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 1938」로 개정되고, 1949년에는「사진의 역사」의 초판본이라 할 수 있는 「The History of Photography from 1839 to the Present Day, New York, Museum of Modern Art」가 출판된다. 3,000부를 찍은 이 판본은 매진에 10년이 걸린다. 이것의 개정 증보판은 1964년에 출간되는데, 1판 3,000부가 수개월만에 매진된다. 최종 개정 증보판은 1982년 출판된다.

9) 피에르 베스의 분류를 열거하면, ‘스튜디오 초상`, ‘예술 초상`, ‘출판을 위한 초상`, ‘낭만적 초상`, ‘예술가의 초상`, ‘사회적 초상` 등이다. cf. Michel Frizot (dir.), Nouvelle histoire de la photographie, Paris, Bordas, 1995, pp. 494-513.

10) John Szarkowski, <<The Work of Garry Winogrand>>, in Winogrand, Figments from the Real World, New York, The Museum of Modern Art, 1988, p. 12.

11) Ibid. p. 18.

12) Ibid., p. 34.

13) Ibid., p. 40.

14) Walter Benjamin, <<L`OEuvre d`art à l`ère de sa reproductibilité technique>>  (1936), in Poésie et révolution (fr. tr.), Paris, Denoël, 1971, pp. 200-201.

15) Szarkowski, art. cit.,  pp. 35-36.

16) 발터 벤야민, <<사진의 작은 역사>>, art. cit., pp. 244-245. 필자의 필요에 의해 ‘아트제’를 ‘앗제’로 바꿨고, ‘아우라’는 우리말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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