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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31 01:45:12, Hit : 3508, Vote : 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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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評] Jim and Tom, Sausalito,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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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것이든 내세에 대한 것이든 어떤 일정의 욕망을 투사해서 만들어진 이미지들의 연관성을 탐구했다는 측면에서는 대단한 글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메이플소프는 개인 취향/관심의 측면에서 저 작업들을 했음에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작업에 관련된 프로세스를 너무 상징적으로 해석하지 않았나 싶다.   이론가들이야 이미지를 생산한 사람들의 숙고들이 어떤 영향과 관련으로 배태되었는지 죽어라고 연구하고 발언하고 싶겠지만, 실상 만든 사람들은 걍 별 상관하지 않고 만드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결과에 스미는 경우가 많겠지만, 그들의 말처럼 그렇게 체계화된 경우는 이론가가 작업하는 경우가 아닌 담에야 별 없다.
억압을 피하기 위해 작업하는 작가들이 많겠지만, 맨 마지막 단락의 자화상처럼 그럼 마찰의 고뇌에 의해 나오는 경우는 글쎄.  난 그냥 양복입고 하는 편이 더 쾌감스러운 탓이라고 생각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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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포토플


로버트 메이플소프의 동성애 사진에 관한 고찰 : `Jim and Tom, Sausalito, 1977`을 중심으로
최봉림

 

I

캘리포니아 주의 금문교 북단에 위치한 조그만 해안 도시, 소살리토에서 찍은 이 사진은(사진1) 1989년 워싱턴의 코코란 갤러리 오브 아트 Corcoran Gallery of Art의 전시 취소로 불거진 로버트 메이플소프 Robert Mapplethorpe (1946-1989)의 순회전, <<완벽한 순간 The Perfect Moment>>의 큰 부스럼이었다. 한 편의 주장에 따르면, 트립틱 triptych으로으로 전시된 <짐과 톰>은 (사진 2) 메이플소프의 게이 사도마조히즘의 순간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음란한 obscene" 포르노그라피였고, 다른 한 편의 주장에 의하면, 이 사진은 ‘완벽한’ 형태미를 탐구하는 작가의 “고전주의적 구성 classical compositions", “조형 연구 figure studies"의 일환이었다. 이 두 해석은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을 바라보는 극단적으로 상반된 관점이지만, 내용/형식이라는 대립적 이분법에 의거하면 어느 하나 그릇됐다고 부정할 수 없는 견해들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진은 분명 내용적
인면에는 1990년을 전후한 다수 미국인의 성 윤리, 성행위 코드를 위반하는 변태적인 성도착 행위인 동시에,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작가의 빛의 대한 명민한 감각, 모델들의 절도 있는 포즈, 엄격한 프레임으로 조화, 균형, 통일성을 지향하는 고전주의 미학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디오니소스적 성적 일탈행위를 냉정하고 엄격한 아폴로적 규범으로 통제하는 메이플소프의 작업 특징을 드러내는 사진이기 때문에, 작품의 내용을 보느냐 형식을 보느냐에 따라, 그리고 관람객의 윤리관 혹은 예술관에 따라, <짐과 톰>은 ‘포르노그라피’일 수도, 훌륭한 ‘작품’일 수도 있는 셈이었다.

그러나 <짐과 톰>에 대해 윤리적 관점에서, 혹은 미학적 관점에서 일방적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는 대부분의 견해들은 메이플소프의 작품의 상당수를 규정짓는 고전주의적 조형성 탐구와 일탈적 성적 욕망의 성공적인 결합으로 보는 통합적 관점의 우월성을 보장하는데 기여했을 뿐이다. 내용/형식의 이원론적 관점의 편협함을 드러내면서, 내용과 형식을 총체적 관점에서 파악하려는 비평적 태도의 효율성을 돋보이게 했을 뿐이다.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은 위에서 말한 코코란 갤러리의 전시 취소사태와 1990년 신시내티 시의 외설 법정소송의 중심에 있었던 까닭에 떠들썩하게 문제가 된 작품이지만, 논쟁의 강도만큼 그 의미작용이 깊이 있게 연구되지는 않았다. 이 사진을 ‘작품’으로 옹호한 미술비평가,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은 형식적 차원에서 그 예술성을 탐색할 뿐이었다. 또는 메이플소프에 대한 아서 단토의 탁월한 비평에 의거하여, “고급 예술의 심장부에 도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는 내용을 주입시키려는 ‘위험한 극단적 유희 play with the edge` 결정” 주1)이라는 관점, 즉 엄정한 고전주의적 형식에 디오니소스적 변태행위를 위험스럽게, 그러나 성공적으로 융합시킨 예로서 <짐과 톰>을 반복 해설할 뿐이었다. 훌륭한 ‘작품’으로 규정하려는 미학적 의지는 게이들의 사도마조히즘과 배뇨행위가 어떤 관련 속에서 연출될 수 있었는지 해석해보려 하지 않았다. 미학적 해석은 배뇨행위와 오줌을 입으로 받는 일탈적 성행위가 왜 그렇게 도덕주의자들의 반감과 저항을 초래했는지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델들의 복장의 기호학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게 했다.        


II

우선 메이플소프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해설자인 아서 단토가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을 서구 미술사의 도상전통에 연결시키는 문단을 인용하면서, 우리의 논의를 진전시키기로 하자.

“그의 작품의 초월적 차원을 언급하기로 하자. (...) 그가 행한 것은  (짐과 톰의) 행위와  빛이 와 닿는 그 조야한 행위 장소에 거의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광채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마치 바로크 회화에서 빛이 갇혀 있는 죄수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감옥 창살을 통해 들어오듯이 말이다. 사실 톰의 자세는 바로크 미술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주제를 연상케 한다. ‘로마의 사랑 Roman Charity`이 그것인데, 여기에서 딸은 사슬에 묶인 아버지가 굶어 죽지 않도록 젖을 먹인다. 의심할 여지없이 ‘로마의 사랑’을 주제로 한 그림에서 화가는 부모에 대한 자녀의 헌신이라는 구실 아래 작은 젖가슴이 드러나도록 그렸고, 관객은 이를 즐겼다는 점에서 음란한 생각들에 영합했다. 도덕성이 음탕함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다. 반면 <짐과 톰, 소살리토>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험은 그 반대다. 그것은 관대하게 베풀고 헌신 devotion하는 행위의 묘사다 (...) 대다수의 사람들이 역겨워하여, 전적으로 혹은 조금은 이를 받아들이기는 힘들겠지만, 짐은 어떤 점에서 톰에게 호의를 베풀고 있는 셈이다. (...) 두 사람은 이 기이하고 도덕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의식 ritual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사진은 그들의 굴절된 정념의 어두운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찬양한다. 사다리는 상승 ascent의 상징이며, 빛은 은총 grace의 상징이다. (...) 이 이미지는 인물의 이름, 촬영장소를 간직하고 있지만, 예술의 수준으로 승격되었다. 이 이미지가 트립틱 triptych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조차 어떤 영적인 spiritual 의미를 내포한다. 결국 이것은 제단화 altarpiece의 진화된 형태였다.” 주2 )

포르노그라피로 규정짓는 비방에서 <짐과 톰>을 구원하려는 단토의 의지는 이 문제작을 종교화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가 소살리토에 거주하는 게이들의 사도마조히즘에, 종교와 관련을 맺는 용어들 즉, ‘헌신 devotion`, ‘의식 ritual`, ‘상승 ascent`, ‘은총 grace`, ‘영적인 spiritual`, ‘제단화 altarpiece`등과 같은 어사들을 동원한 것은 변태적 외설행위를 담은 이미지를 예술이라는 종교로 성화(聖化)시키려는 의도의 표현이다. 사실 <짐과 톰>을 종교화의 지위에 올려놓으려는 단토의 시도는, 메이플소프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설득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차례에 걸쳐 섹스를 신성시하는 발언을 행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S&M은 사도마조히즘이 아니라 sex와 magic을 의미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신뢰 trust에 관한 것이었다.”주3) “삶은 오직 섹스를 위해서만 살만한 가치가 있다.”주4)

섹스가 마법과 관련을 맺고 사도마조히즘이 세속적인 형태든, 마술적 형태든 ‘전적으로 신뢰에 관한 것’이라면, 그리고 섹스가 메이플소프의 삶의 궁극적 의미 그리고 존재이유라면, S&M 시리즈의 중심에 있는 <짐과 톰>이 초월적이고 신비주의적인 해석을 마다할 리가 없겠다. 메이플소프의 전기작가도 <짐과 톰>의 기이한 사도마조히즘 장면에서 종교적 의미를 떠올렸다.

“메이플소프는 두 인물을 방치된 해군 지하벙커에 자리잡게 했는데, 그 우중충한 공간에는 가까운 창문으로부터 종교적 광채 religious glow를 띤 빛이 흘러들었다. 그 골방에는 천사가 나타나는 대신, 톰과 가죽 복면을 한 짐이 오줌을 포도주와 같은 것으로 바꾸고 있을 뿐이다.”주5)

사진비평가인 전기작가는 <짐과 톰>의 변태적 행위를 일종의 성찬의례로 바꾸는 빛의 신비적 기능을, 게이들의 사도마조히즘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메이플소프의 빛의 미학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에는 아서 단토와 파트리샤 모리스로가 언급한 종교화의 도상학적 측면, 포르노그라피의 주제를 예술로 변화시키는 사진 미학만이 구현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한때 게이를 지칭했던 단어가 불러일으키는 일련의 메타포, 금기와 위반의 사회학, 짐과 톰의 가죽 복장의 심리학이 내재돼 있다.

메이플소프는 <짐과 톰, 소살리토, 1977>를 위해, 완벽한 형태미를 탐구했던 스튜디오 작업에서 벗어났다. 다시 말해 언제나 인공광원을 통해 원하는 빛의 조건을 만들고, 촬영배경과 모델의 포즈를 꼼꼼히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는 스튜디오 촬영 (사진 3) 대신, 빛의 가변성과 우발적인 촬영조건에 종속된  현지 로케를 시도했다. 조화롭고, 절도 있는 고전주의적 형식미의 탐구를 용이하게 하는 스튜디오를 떠나 그는 순간적인 빛의 변화와 임의적인 무대조건에 임기응변적으로 대처해야 하는 현장촬영을 택했다. 다시 말해 완벽한 조화로움과 균형, 절도에 도달하려는 그의 고전주의적 작업 성향에 부합하는 스튜디오작업에서 예외적으로 벗어나, 특정한 빛의 조건과 장소의 특성과 미학적으로 타협하는 현지 촬영을 행했다. 따라서 고전주의적 연출사진이 일반적으로 제거하게 마련인 사회적 실재성, 구체적 현실성이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에는 부여되었다. 구체적인 모델이름, 촬영도시, 촬영 연도의 명기는 구체적 사실성을 어느 정도 보장했다. 따라서 S&M 시리즈의 문제작인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은 지금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메이플소프의 미학에 치우친 연구에서 벗어나 역사적, 사회학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우선, <짐과 톰>의 엽기적 행위는 20세기 초엽에 영어권 남성 동성애자들이 일종의 암호처럼 사용했던 게이 gay라는 명칭이 일반화되기 이전에 통용됐던 그들의 명칭의 의미작용을 구체화한다. 19세기 후반의 게이 작가들이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지칭하는 단어로 ‘uranian`과 ‘urning`을 즐겨 썼다. ‘uranian`은 플라톤의 『향연 Symposium』에서 파에드루스 Phaedrus가 행한 발언에서 유래했는데, 여기에서 그는 게이의 사랑은 ‘하늘같으며, 정신적인 ouranios-heavenly, spiritual` 사랑인 반면, 이성애는 ‘속된 vulgar` 것으로 묘사했다.주6) 그리스 신화에서 하늘의 의인화인 ‘우라노스 Ouranos`에서 파생한 형용사, ‘ouranios`가 남성 동성애자들의 사랑의 속성을 의미하자, ‘uranian`은 천상의 사랑을 하는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하게 되었다. ‘urning`은 ‘uranian`에 대한 의도적인 혹은 비의도적인 정서법의 실수, 혹은 한 문자나 음을 다른 문자나 음으로 대체하는 패러그램 paragram주7)의 산물로 나타난다. 

‘uranian`의 변질된 언어 형태인 남성 동성애자, ‘urning`은 발음 혹은 철자법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편으로 남성의 고환부위와 형태적 유사성을 지닌 ‘urn 항아리’를 상기시키며, 또 다른 한편으로 ‘urine 오줌, 소변’을 연상시킨다. 따라서 19세기 후반에 남성 동성애자를 지칭했던 ‘urning`이라는 단어는 ‘오줌 urine’을 붓고 받아들이는 용기, ‘항아리 urn’으로서의 남성 동성애자, <짐과 톰>의 변태적 행위를 연출한 잠재적 근거로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성 동성애자 ‘urning`의 기표 signifiant가 불러일으키는 연상 이미지를 게이들의 사도마조히즘을 통해 연출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메이플소프는 1980년대 중반부터 이질적 사물들의 형태적 유사성, 다시 말해 상이한 사물들이 보여주는 형태적 상응성에 관심을 보이면서, ‘난 orchid`의 어원에 깊은 관심을 표한바 있다. ‘orchid`의 어원인 그리스어 ‘orchis`는 남성의 ‘고환`인 까닭에, 그는 난의 형상에 내재된 고환의 이미지를 찾아내려 애썼다. (사진 4) 따라서 ‘오줌 urine`을 배설하고, 그것을 입이라는 ‘항아리 urn`에 받아 마시는 ‘동성애자 urning` <짐과 톰>은 한 작업 대상의 어휘와 관련된 기표의 기의 signifié를 사진 이미지로 본격화하는 난 시리즈 작업의 기원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짐과 톰>이 전시회, <<완벽한 순간>>에 대한 외설 논쟁과 포르노그라피 법정 소송의 중심에 놓인 것은, 이것이 기존 질서체계에 대한 이중의 위반을 행했기 때문이다. 우선 생물학적 성 sex의 구분에 의거한 성행위 질서를 게이 사도마조히즘을 통해 위반했고, 둘째로는 음식물의 섭취와 배설의 문화적 구분을 지워버리고 그 경계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성행위에 대한 일반적 관념은 남녀간의 ‘생물학적, 사회적’ 차이 difference에 근거한다고 여겨진다. 남성은 능동적이고 삽입적 insertive이며, 여성은 수동적이고 수용적 receptive이다. 사회는 언제나 남녀의 이 성적 차이에 근거한 경계를 유지, 강화하려는 이데올로기를 그 구성원들에게 유포하고 제도화시킴으로써, 같은 종(種)의 반대 성sex과 성 관계를 맺는 것만이 ‘자연스럽다는 natural`는 의식을 내면화시켰다. 그리하여 동종(同種) 이성(異性)의 성 관계만이 자연의 질서에 부합하는 ‘정상적’ 행위라고 훈육하면서, 성의 질서를 유지했다. 따라서 동성애는 ‘정상’ 혹은 ‘자연스럽다’라고 여겨지는 동종이성의 성관계 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남자 동성애는 한 남성이 다른 한 남성을 수동적이고 수용적인 여성처럼 대한다는 점에서 성의 정체성과 차이를 부정하는 것이며 그 경계를 넘어서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동성애는 성의 차이를 혼합하고 성의 정체성을 왜곡시키는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 “이는 차이의 사라짐이요, 차이의 체계로 이루어진 질서의 파괴, 즉 동일성의 교란”을 의미하며, “또한 양성애와는 달리 동성애의 궁극적인 혼돈은 ‘생산’이 없다는 것이다.”주8)

<짐과 톰>이 성에 대한 일반적 관념을 혼란에 빠뜨리는 또 다른 요소는 그들의 용모와 복장이다. 짐과 톰 모두는 스스로를 남성 호모섹슈얼로 알리는 복장을 하고 있다. 즉 그들은 ‘정상적인’ 남성이지만 성행위의 대상으로 여성이 아닌 남성을 선택한 자라는 자의식을 그들의 복장과 용모의 기호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남성 동성애를 여성화된 소수 남성의 행위로 간주하는 일반의 편견을 남성적 의복과 치장을 통해 부정한다. 남성 동성애자는 여성화된 남성으로, 여성이 되기를 원하는 남자라는 통념을 거부하는 것이다. 짐의 가죽 바지, 가죽복면 zipped eye slits, 부츠, 가죽 장갑 그리고 상반신을 덮은 체모는 ‘정상적인’ 남성으로서, 성적 대상을 남성으로 삼은 게이임을 알리는 기호들이다. 아울러 수동적이고 수용적이며, 마조히스트의 역할을 행하고 있는 톰 역시 그의 가죽 재킷, 카우보이 바지 그리고 덥수룩한 수염을 통해 ‘pansy`, ‘sissy`, ‘fairy`라고 불리는 여성화된 남성 호모섹슈얼의 이미지를 부인한다. 그는 가장 남성적이라 여겨지는 웨스턴 활극배우의 복장과 치장을 통해 남성의 육체와 정체성을 가지고 여성의 성적 역할을 행하는 존재임을 알린다.  

많은 게이들이 이렇게 사내다운 외모를 애호하게 된 현상은 한 연구자에 따르면, 1940년대에 일반화된 게이들의 자의식 변모와 관련을 맺는다. 그들은 남성으로서의 생물학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인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여성의 성적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작업복 바지, 티 셔츠, 가죽 재킷 그리고 부츠는 1940년대에 보다 일반화되었다. 그것은 청년 동성애자들의 ‘새로운 남성적 용모 유행’의  일부분이었다. 전통적인 남성의 규정에 부합하는 많은 사람들이 점진적으로 스스로를 게이로 규정했는데, 그것은 부분적으로, 그렇게 하더라도 그들의 남성적 정체성을 더 이상 포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게이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여성화된 남자 sissy로 여겼지만, 남성적 정체성을 포기할 필요성을 더 이상 느끼지 않았고, 그 결과 점점 더 많은 숫자가 의식적으로 남성적 외모 스타일을 선택했다.”주9) 분명 남성으로서의 성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고, 여성의 성 역할을 맡는 남성은 보수적인 성의 구분, 전통적인 성의 질서에 일종의 균열을 만드는 존재임에 틀림없다.

대단히 부르주아적인 장식으로 치장된 실내 공간에서, 다시 말해 보수적이고, 정상적인 거주공간 속에서 게이 사도마히즘의 의식을 보여주는 <브라이언 리들리와 라일 히터, 1979> (사진 5)는 <짐과 톰>이 보여주는 복장의 기호학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지휘봉, 사슬을 든 게이 새디스트의 복장은 물론이고, 사슬에 묶인 게이 마조히스트 역시 남성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단정한 두발상태, 가죽 재킷, 바지, 부스를 착용하고 있으며, 대단히 무미건조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표정이나 복장 어느 곳에서도 여성화된 남성의 기호, 여성적 취향의 기호를 찾을 수 없다. 그는 남성으로서의 성적 정체성을 강조하면서, 여성-마조히스트의 성적 역할을 수행하는 ‘톰’의 변이형으로 보여진다.

게이 <짐과 톰>의 사도마조히즘은 또 다른 차이의 경계를 지워버리고, 동일성을 파괴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교란한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입의 정체성이다.

문명의 진화와 더불어, 인간 입의 기능은 억압적으로 축소되었다. 문명과 더불어 인간의 입은 음식물 섭취와 의사소통을 위한 발설 기관으로 그 기능이 제한되었다. “문명화된 인간의 입은 야만인의 입이 여전히 갖고 있는 두드러진 특성을 잃어버렸다.”주10) 즉 공격적인 무기로서의 입의 기능, 동물처럼 울부짖고 손의 역할을 대신하는 입의 기능은 문명의 진화와 함께 잠재적 상태로 유보되었다. 위기의 순간, 격렬한 심리상태,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문명화된 인간은 입이 잠재적으로 지니고 있는 야만적 기능을 드러내지 않는다. 입으로 물어뜯지 않으며, 포효하거나   고성을 지르지 않는다. 입으로 음식을 수취하거나 사물을 전이시키지 않는다. 또한 수유의 단계를 지난 인간의 입은 인간의 동물성을 배제하기 위해, 위생의 목적을 위해, 체액, 배설물과 접촉하지 않는다. 문명의 인간은 짐승처럼 새끼의 배설물을 핥거나 ‘못 배운’ 할머니처럼 입으로 음식물을 손자에게 건네지 않는다. 입은 어느 다른 기관 못지 않게 인간과 짐승을 구분하는 신체기관이며, 문명과 야만을 가르는 좌표다. 바로 짐과 톰이 벌이는 게이 사도마조히즘이 스캔들을 불러일으킨 것은 톰의 입이 인간과 짐승의 경계, 문명과 야만의 경계를 부인하고 허물었기 때문이다. 문명화된 인간의 입은 음식물을 처음으로 섭취하는 기관이지, 체액과 배설물을 재순환시키는 신체부위가 아니다. 인간의 음식물은 반드시 선조적 linear 유통경로를 따라야 한다. 깨끗한 것은 입에서 섭취되고 더러운 것은 항문 혹은 요도로 배출되어야 한다. 항문이나 요도로 배설된 체액, 물질이 다시 인간의 입으로 들어오는 것은 위생학의 이름으로 명기한 금기를 위반하는 것이다. 더러운 것이 깨끗한 것을 오염시키는 것이고, 깨끗함과 더러움이 뒤섞이는 것이다. 순수와 불순이 혼합되는 것은 동일성을 교란하는 것이며, 깨끗함/더러움에 의거한 가치 체계를 전복하는 것이다. 펠라티오 fellatio, 오랄 섹스가 일면 금기의 위반처럼 여겨지고, 포르노그라피의 일탈 욕망으로 치부되는 것은 그것이 입에서 성기 혹은 입에서 항문으로 하강하는 인간 신체에 고유한 수직구조를 역행하기 때문이다. 깨끗함/더러움의 이분법에 의거한 사회질서, 문화체계를 오염시킬 수 있다는 환상 때문이다.

IV

<짐과 톰, 소살리토, 1977>를 기독교 종교화의 전통에 연결시키는 기존의 미학적 해석에 보충을 가하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이 일탈적인 사진 트립틱이 제단화의 성격을 띠는 것은 아서 단토나 파트리샤 모리스로가 보았던 대로, 오직 ‘종교적 광채를 띤 빛’ 때문만이 아니다. ‘상승’의 메타포인 사다리 덕분에 이 변태적 행위의 사진이 포르노그라피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바로크 시대의 ‘로마의 사랑’이나 제단화의 도상학적 연상만이 이 분뇨담 scatology 이미지를 성화(聖化)시키는 않는다. 이 사진으로 된 트립틱이 제단화의 성격을 띠고, 짐과 톰의 사도마조히즘이 성찬세례의 의미를 띠는 데에는 그 반대급부가 연루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빛을 에워싼 짙은 어둠이, 상승이 아닌 하강의 이미지로서의 사다리가 이 불경스런 이미지를 승화시킨다. 성화(聖畵)의 도상학적 전통만이 아니라 포르노그라피의 엽기도 이 사진을 성과 속(俗), 미와 추, 욕망과 금기의 경계를 전복하는 ‘현대’ 

예술의 차원으로 격상시키는데 기여한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어둠과 빛이 갈마들고, 사다리를 매개로 상승과 하강의 욕망이 교차하면서, <짐과 톰>은 포르노그라피의 오명에서 벗어난다.
 
이 사진의 촬영장소가 해군의 버려진 지하 벙커라는 사실은 게이들의 사도마조히즘이 일반의 시선에서 격리되고 유리되어 있음을 상징한다. 그들의 성의 공간은 빛이 없는 일종의 유폐 공간임을 암시한다. 사회 규범에서 일탈한 성적 욕망이 <짐과 톰>을 하강의 도구인 사다리를 통해 규범의 세계와 분리된 지하세계로 끌어내린 것이다. 창으로 혹은 사다리의 통로로 들어오는 빛은 ‘남성 동성애자 uranian` 혹은 ‘urning`의 ‘하늘같은 heavenly` 성적 행복을 상징할 수도 있지만, 게이들의 쾌락을 방해하는 사회적 금기체계 혹은 동성 연애를 죄악시하는 종교의 메타포일 수도 있다. 즉 그들의 성적 유희를 어둠 속으로만 몰고 가는 잔인한 ‘종교적 광채’일 수도 있다. 따라서 짐과 톰이 가죽 복면을 쓰고, 눈을 감는 것은 우연 만이 아닐 것이다. 빛의 계율을 피하려는 변태적 욕망, 빛의 세계로 인도하는 사다리를 보지 않으려는 죄의식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메이플소프는 같은 장소에서 사디스트 게이인 ‘짐’만을 촬영했는데(사진 6) , 여기에서 그는 양손으로 사다리를 붙들고 그의 왼편을 응시하고 있다.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의 장면을 염두에 둔다면, 그는 마조히스트 게이인 ‘톰’을 응시하고 있다. 사다리에서 내려와 그의 섹스 파트너인 톰을 가해하려는 동작의 단계인지, 혹은 그에게 방뇨를 마치고 사다리에 오르려는 자세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갈마드는 그 지하 벙커와 사다리에 양손을 놓고 톰을 응시하는 자세는 욕망과 금기 사이에서 방황하는 짐의 내면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빛과 어둠 사이에서 분열된 한 존재가 빛으로 대변되는 윤리와 규범의 세계로 오를 것인지, 지하 벙커로 대변되는 욕망의 세계에 계속 머물지를 갈등하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의미론적으로 유사한 다른 사진 하나를 예로 들면서 글을 맺기로 하자. 메이플소프는 1981년의 <자화상>에서도 동성애의 쾌락과 도덕적 규범 사이에서 갈등하는 자신을 연출한 바 있다. (사진 7) 정장을 한 그는 벌거벗은 흑인 남성의 성기에 입을 대면서 양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다. 클로즈업 형태로 보이는 와이셔츠의 오른쪽 소매는 가지런히 단추가 채워져 있고, 왼손에는 사회의 일상적 규율을 지시하는 시계를 차고 있다. 그의 가지런한 복장, 사각형 시계는 사회적 규범을 존중하는 징표로 보여지며, 알몸으로 누워 있는 흑인의 발기한 성기는 성적 욕망의 표상으로 여겨진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리는 동작이 정장으로 표상되는 기성 윤리와 시계로 암시되는 일상의 규율에 눈을 감은 채, 금지된 쾌락에 몰두하려는 자세인지, 혹은 그의 동성애의 욕망을 질타하는 가부장적 권위를 임시방편적으로 회피하려는 제스처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동성애의 욕망과 규범적 기성윤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메이플소프의 심리적 양상은 분명한 듯하다. 바로 이 갈등, 대립이 <짐, 소살리토, 1977>처럼, <자화상, 1981>을 성적 욕망과 행위만을 과장적으로 보여주는 포르노그라피의  규정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고 일탈의 욕망과 규율의 억압을 ‘정상적’ 정욕을 통해서가 아니라, 포르노그라피의 ‘변태적’ 주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 메이플소프의 파격적인 새로움일 것이다. 

 

각주

1) Arthur S. Danto, <>, in Mapplethorpe, New York, Random House, 1992, p. 328.
2) Ibid., p. 330.
3) Ibid., p. 315에서 재인용.
4) Patricia Morrisroe, Mapplethorpe - A Biography, London, Macmillan, 1995, p. 125에서 재인용.
5) Ibid., p. 191.
6)  Cf. John Boswell,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 G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p. 43. n.4와 n.6.
7) 불어 구문에서 패러그램의 예를 들면, 1) ‘나의 사랑스런 엄마 Ma petite maman`의 형용사, petite의 모음 e와 i를 a로 바꾼 ‘나의 얼간이 엄마 Ma patate maman`, 2) ‘폐하 영국 여왕 Sa majesté la reine d`Angleterre의 여왕, reine의 모음 e를 u로 바꾼 ‘폐하 영국의 폐허 Sa majesté la ruine d`Angleterre’ 등이다.
8) 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서울, 한길사, 2003, p. 208.
9) George Chauncey, Gay New York - Gender, Urban Culture and the Making of the Gay Male World, 1890-1940, New York, 1994, p. 358.
10)  Georges Bataille, <>, in Œuvres complètes I - Premiers Ecrits 1922-40, Paris, Gallimard, 1970, p. 237.

 

사진 목록

(사진 1) R. Mapplethorpe,
(사진 2) R. Mapplethorpe, , triptych
(사진 3) R. Mapplethorpe,
(사진 4) R. Mapplethorpe,
(사진 5) R. Mapplethorpe,
(사진 6) R. Mapplethorpe,
(사진 7) R. Mapplethorpe,


참고문헌

 
1) Bataille (Georges), <>, in Œuvres complètes I - Premiers Ecrits 1922-40, Paris, Gallimard, 1970.
2) Boswell (John), Christianity, Social Tolerance, and Homosexuality - Gay People in Western Europe from the Beginning of the Christian Era to the Fourteenth Century, Chicago and London,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0.
3) Chauncey (George), Gay New York - Gender, Urban Culture and the Making of the Gay Male World, 1890-1940, New York, 1994.
4) Danto (Arthur), <>, in Mapplethorpe, New York, Random House, 1992.
5) Morrisroe (Patricia), Mapplethorpe - A Biography, London, Macmillan, 1995.
6) 최창모, 『금기의 수수께끼 - 성서 속의 금기와 인간의 지혜』, 서울, 한길사, 2003.
 

Résumé
 
Une étude  sur la photographies homosexuelle de R. Mapplethorpe
à partir de  

Le triptyque photographique, est considéré en grande partie au niveau formel, ou au point de vue esthétique. Pour le sauver des condamnations à pornographie, nombre de critiques d`art et de conservateurs des musées d`art contemporain ne l`ont ananlysé que comme une étude de figure, ou comme une composition classique. Leur analyse a néglisé la sémiologie de la physionomie de ‘Jim et Tom`; leur étude n`a pas porté de l`intérêt sur le rapport associatif entre l`homosexualité et l`acte de l`évacuation de l`urine. Ils ont ignoré la recherche sociologique du shock que le sadomosochisme de ‘Jim et Tom` provoquait au public moraliste; ils ont fermé les yeux au dispositif anthropologique de l`interdiction morale que la photographie concernée a touché violemment.
Donc, notre etude a visé d`abord d`élucider la relation des signifiants associatifs de ‘the urning`, mot anglais qui désignait l`homosexuel à la seconde moitié du 19ème siècle et de l`acte sadomasochiste de ‘Jim et Tom`, c`est-à-dire l`évacuation de l`urine et la réception orale. Ensuite, notre analyse a essayé d`expliciter l`etat psychologique des homosuels à partir des costumes de ‘Jim et Tom`. En s`habillant à la manière virile, même ‘Tom`, homosexuel masochiste a voulu manifester à la fois son identité de sexe masculin et leur orientation sexuelle pour les hommes. Enfin, nous envisageons des significations des interdictions morales que ‘Jim et Tom` ont violées à travers leur sadomosochisme bizarre.


질의와 응답

이 : 윤리적 관점은 작품에 대해 사후에 족쇄를 채우는 장애 요소가 아니라 작품을 성립하게 하는 그라운드로 봐야 한다. 그것은 사후에 작품을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라 작품 이전에 존재하는 초자아 super ego로서, 작품과 맞서고 있는 벽이며, 작품이 다른 곳으로 비약하게 하는 도약대이다. 한 마디로 윤리성은 예술작품의 토대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궁극적인 판단 근거는 아니다. 그러므로 윤리적 기준을 가지고 어떤 작품을 판단하는 것은 옳지 못하며, 그에 대한 방어로서 “이 작품은 이러 이러해서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것도 옳지 못하다. 차라리, “이 작품이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을 바꿔 놓았는가”를 묻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최 : 윤리적 관점은 분명 “작품을 성립하게 하는 그라운드,  작품 이전에 존재하는  초자아이다.” 그러나 또한 작품에 대해 사후에 족쇄를 채우는 장애 요소일 수도 있다. 메이플소프의 순회전 <<완벽한 순간 The Perfect Moment>>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윤리적 관점은 작품 이전은 물론이고 작품과 함께, 작품 이후에도 존재한다. 도덕주의를 견지하는 관람객들에게 윤리적 기준은 “궁극적인 판단 근거”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윤리적 관점은 예술의 생산의 차원에만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유통, 수용, 평가의 차원에도 개입할 수 있다. 윤리적 관점은 예술의 앞, 뒤, 곁, 위, 아래 모든 곳에 존재한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질문을 답하기 위해서는 우선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정의를 공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얼마간 합의된 정의가 있어야 “우리의 선입관을 바꿔 놓았는지를” 토론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정의는 은폐된 성적 욕망 혹은 알려진 성행위를 과장되게 재현하는 이미지 상품이다. 거기에는 “족쇄를 채우는 윤리 의식도”, 욕망과 억압의 갈등도 없다. 더욱이 메이플소프 사진의 핵심사안인 냉정하고 엄정한 미학은 없다. 메이플소프의 <짐과 톰, 소살리토, 1977>은 “이러해서 포르노그라피가 아니다.” 그리고 그의 포르노그라피 주제에는 언제나 엄정한 고전적 미학이, 그리고 종종 욕망과 억압의 갈등이 내재하기 때문에,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우리의 선입관을 바꿔 놓았다.”

이 : “포르노그라피의 오명을 벗어났다”. “불경스런 이미지의 승화”라는 구절에 대한 문제 제기는 다음과 같이 나타난다. 메이플소프의 사진이 예술과 관련하여 의미를 가진다면,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예술을 오염시킨 바로 그 지점이 아닐까. 그가 가장 섬세한 예술의 언어를 적극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을 상기하면, 그가 한 것은 포르노그라피의 형식을 빈 예술을 한 것이 아니라, 예술을 가지고 포르노그래피를 오염시킨 것이다.

최 : 전적으로 동의한다. ‘승화’라는 용어는 메이플소프의 S&M 시리즈를 해설하는데 온당치 못한 용어다. 승화는 포르노그라픽적 욕망의 순수화를 의미하면서, 지나치게 이상주의적 미학의 냄새를 풍긴다. 메이플소프가 적나라하게 기획한 동성애 시리즈에 ‘승화’라는 전통적이고 고답적인 미학개념은 넌센스다. 역설적이지만 이 선생님의 표현대로 그의 S&M 시리즈는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예술을 오염시켰거나”, “예술을 가지고 포르노그라피를 오염시켰다고” 말하는 것이 적절해 보인다.

  <현대미술사연구> 제15집, 현대미술사학회, 2003, pp.331-350에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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