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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12-10 19:15:37, Hit : 778, Vote : 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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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評] 최민식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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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최민식 사진전이 한다길래 업데하는 관련 글.(보고싶진 않지만)   확실히 기계문명의 수혜자 답게 정확한 정황을 개진해 주어서 고맙다.   최민식에 관한 글중 가장 명징한 텍스트로 보이며 글쓴이가 말미에 맘에 안든다고 하는 대목도 이해가 가는바이다.   제작된 이미지의 시간과 함의/서사가 기어이 드러나는 시점에서, 작금 시대와 핀트가 맞지 않는 상황에서의 평론이란 것이 쉽잖을 것은 당연할 터.
님의 홈에서 로긴하지 않아도 볼 수 있는 글이라 퍼오는데 문제가 없을 것같지만, 암래도 죄송스런 마음은 당근이다.   혹여 항의가 있음 내릴터이니 참고들 하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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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영준

근대화가 내쫓은 것, 최민식이 사진으로 다시 끌어들인 것, 그러나 아직도 미완인 것


   한국의 근대화는 많은 상처 속에 진행된 프로젝트였는데, 그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인간을 내쫓은 것이다. 서구의 근대화가 인간을 이 세계의 가운데에 주체로 놓는 과정이었다면, 한국의 근대화에서 인간은 단 한명, 박정희 뿐이었다. 그는 ‘자주적 근대화’의 유일한 주체였으며, 그만이 유일한 역사의 저자였다. “각하, 제2의 세종대왕이 되십시오”라며 당시 역사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준 노산 이은상이나 월탄 박종화 같은 문인들, 나중에 일제의 황국신민의 칙어를 베낀 것이 들통 나 슬그머니 교실에서 사라진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고, 역시 일본말을 베낀 ‘10월 유신’이란 말을 만든 철학자 박종홍 같은 이들이 박정희의 보조저자였지만, 박정희 만이 유일하게 지존한(sovereign) 저자였다. 그 만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낭랑하고 칼칼한 목소리로 “친애하는 국민여러분”으로 시작하는 그의 근엄한 연설은 언제나 모든 의미의 끝막음(closure)이었으니, 당시에 대안적이라거나 비판적이라는 것은 곧 곤경에 처해짐을 의미했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은 주체의 반열에 끼고 싶어도 낄 수가 없었다. 권력이 없거나 반항할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을 주체로 만들어줄 사회적 틀거리가 없었던 것이다. 근대사회에서 주체가 되려면 시민이 되야 하는데, 시민이란 혼자서 주먹 불끈 쥔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교육도 받아야 하고, 의료혜택도 받아야 하고, 신분도 보장받아야 하고, 정당한 자기주장의 기회도 있어야 하고, 위생상태도 좋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1960년대 초까지 한국에는 그런 것이 없었거나, 있다고 해도 매우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당시의 사회제도는 사람들을 시민으로 끌어올려줄 만한 힘이 없었던 것이다. 분명히, 박정희가 말한 “국민 여러분”은 시민은 아니었다. 차라리 백성에 가까웠다.

   한국에 시민이 탄생한 것은 대략 주민등록증이 생겨난 1967년 정도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때부터 입시제도를 정비한다고 난리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그 시민조차 근대화를 위한 개혁이나 혁명을 통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불순분자를 색출하기 위한 주민감시수단으로 주민등록증이 생겨나고 나서 생긴 것이니, 한국에는 시민의 기원이란 타율적으로 생겨난, 매우 이율배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시민주체가 생겨나긴 했는데 자기 힘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독재정권의 관리대상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율적 시민주체가 된다는 것은 불순하고 불온한 것이었다.

    근대의 유일저자 박정희가 쓴 인간의 표상이란 새마을 운동 선전용으로 나오는 밝고 건전한,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도 살벌하게 대치하고 있었던 북괴의 선전 이미지와 너무도 닮은 가식적 표정의 인간들이다. 그들은 밝은 얼굴만 있고 존재는 없는 환영들이다. 최민식이 낸 수많은 『人間』이라는 타이틀이 붙은 사진책들이 암시하듯이, 그는 그런 이미지에 맞서, 혹은 그것을 회피하여, 진짜 인간을 불러내려 했다. 그러나 부산 자갈치 시장을 매일 같이 출근하듯이 충실하게 찍은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찍은 빈민계급의 인간들은 그의 사진을 통해 주체로 태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사진노력은 모든 것을 빼앗긴 그들을 주체로 설정해주기에는 너무나 범주적으로 부족했다. 그가 사진을 못 찍었다거나 게을렀다는 얘기가 아니다. 한국의 근대가 박탈해버린 인간의 무게는 한 사람의 사진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그의 사진 속의 피사체들이 근대적 주체가 되려면 플러스 알파가 있어야 했는데, 그것은 사진을 자신을 표상하는 수단으로 삼을 수 있는 능력이었다. 사진을 즐길 수 있는 경제적 능력도, 문화적 관습도, 기회도 없었던 그들이 사진을 자기표상의 수단으로 삼을 능력이 없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빈민계급을 포함한 일반인들이 사진을 시민주체를 표상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은 1970년대가 한참 지나서였으나, 최민식의 사진의 피사체가 된 인간들에게는 그런 권한마저도 주어져 있지 않았다. 1970년대까지 많이 쓰던 ‘독사진’이라는 말이 그때까지만 해도 사진이란 마음껏 소비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아끼며 다뤄야 했던 어떤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사진 프레임 속에 혼자서만 들어간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럭셔리였던 것이다. 그래서 ‘독사진’을 박는다는 것은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고, 뭔가 기념할 일이 있을 때, 아니면 옷을 아주 잘 입었을 때, 날씨가 아주 좋을 때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런 시절에 최민식 사진 속에 들어가 있는 ‘독사진’의 주체들은 자신들 스스로 그런 권리를 즐길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사진 프레임의 관찰기록능력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최민식이 1950년대 말부터 사진 속에 불러들인 빈민계급은 부분적인 주체(partial subject)이다. 렌즈 저쪽에서 인간의 형상이라고만 인정되어 있을 뿐이지, 스스로를 렌즈 이쪽에서 인간으로 내세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부분적인 것이다. 사실은 아주 많이 부분적이다. 주체성의 끄트머리 만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민식은 사진의 여러 가지 수사들에 힘 입어 그런 파편적 주체로서의 인간을 다시 시대에 등장시키려 했다. 그의 수사에는 살롱사진풍도 있고, 임응식에서 흘러나온 생활주의 리얼리즘도 있고, 프랑스의 1950년대 이후 나타난 휴머니즘적 사진의 수사도 있다. 그것은 또한 영국과 미국에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사회개혁을 위해 빈민가를 관찰하고 기록한 토마스 아난과 제이콥 리스 같은 관찰자적 시선도 들어 있다.

   물론 아무리 실감 나게 찍은 사진이라도 진짜 인간을 살려낼 수는 없다. 사진은 존재의 부재를 표상한다는 사실은 롤랑 바르트에서 존 버거에 이르는 수 많은 이론가들이 충분히 설파한 사실이다. ‘진짜 인간’이란 차라리 정권이 창출해낸 가짜 인간의 수사에 맞선 카운터 인간 수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란 담론의 공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최민식은 자신이 배운 위의 사진적 수사들을 그러모아 ‘진짜 인간’의 수사들을 만들어 냈다. 그게 주름진 노인네의 얼굴이고 무거운 해머를 진 노동자의 등이고 단속반에 끌려가는 노점상 아주머니의 겁에 질린 얼굴이고 땅바닥에서 국수를 먹는 어린 아이의 힘겨운 젓가락질이다. 특히 1957년 용산옆 앞에서 찍은, 이 어린 여자 아이가 땅바닥에 놓인 그릇에서 국수를 먹는 사진은 두고두고 보아도 가슴 아픈 사진이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그것들은 수사(rhetoric)가 아니라 사진의 내용인데, 최민식이 그런 내용의 반복에 강하게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은 내용의 차원을 벗어나 형식으로 전환되고, 형식은 전형화되어 말 하는 방식으로 설정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 수사가 70년대 초부터 ‘달동네’라는 말의 유행과 더불어 불어온 서민풍 드라마의 멜로적 감성과 맞닿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당시만 해도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이 묘사하는 ‘국민’과는 다른 정치적이고 감각적인 층위에서 존재하는 서민적인 것에 대한 연민을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최민식의 작업 중 일반에게 잘 안 알려져 있는 것이 있는데, 어쩌면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핵심은 거기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인간』 시리즈는 경북 왜관에 있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것들인데, 이 출판사는 매우 흥미롭고 사상 유례가 없는 사진 표상을 만들어 냈으니, 그것은 여러 장의 사진으로 된 카드모음집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 알려주는 교육용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트럼프만한 카드에는 이 세상의 온갖 추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담은 사진들이 붙어 있고, 한 세트는 백여장 정도의 카드로 되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 중 최민식의 사진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모습인데, 수영복 입은 미스코리아의 옷이 너무 짝 달라붙은 나머지 신체의 민망한 선이 드러난 사진이었다. 그 한 장으로 성의 상품화니, 요즘 말 하는 시선의 권력이니, 페티쉬니 하는 개념들을 설명할 수 있을 만큼 함의가 풍부한 사진이었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사진카드 세트가 1980년대 당시 문화공보부의 판매금지품목이었다는 점이다. 그것이 최민식의 민망한 사진 때문인지, 당시 사회의 적나라한 모습을 너무 보여주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하여간 중요한 것은, 그 교육용 카드 세트에는 정권이 보여주기 싫어하는 어떤 천기누설의 비밀이 들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카드사진을 말하는 이유는 최민식이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사태의 전체를 말 하는 시각적 아이러니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다. 그의 시각적 아이러니의 절정은 선거벽보 앞에서 잠들은 노숙자 사진(1974, 부산 선창가)이다. 아무렇게나 널부러져 잠든 노숙자 뒤로 투표해서 번영 하고 살 길 찾고 하여간 화려한 문구들이 붙어 있다. 사진의 앵글은 그런 화려한 문구들이 피곤한 노숙자의 삶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쪽으로 잡혀 있다. 여기서 대조를 이루는 것은 문자와 시각이미지, 문자의 내용으로 나와 있는 행복과 번영의 메시지와 이미지로서의 헐벗은 노숙자의 모습이다. 그것들은 2×2의 대조를 이루어, 시대적 아이러니의 극을 이룬다. 이는 마가렛 버크 화이트가 공황기에 찍은, 길게 줄 서서 구호식량을 기다리는 흑인들 위로 미국식 생활방식이 최고라며 뽀얀 얼굴로 만족해하는 백인 가족 그림을 담은 대형간판이 있는 사진의 아이러니에 필적할 만한 아이러니다.  

   최민식이 자주 쓴 아이러니의 수사 중에는 신문배달부의 수사가 있는데, 배달 아주머니가 들고 있는 신문에는 “레이건 49개주 휩쓸어 재선”이라는 글씨가 주먹만한 활자로 찍혀 있다. 1984년에 찍은 이 사진 속의 아주머니는 레이건의 힘찬 재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가난하고 불쌍한 대한민국의 서민일 뿐이다. 아웃포커스된 배경 속의 등이 굽은 노인네의 모습과 힘없이 신문을 들고 있는 아주머니의 표정과 대조되는 문자와 그 메시지는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대조를 이루고 있는 시각적 아이러니를 완성시킨다. 사실 아무런 조작도 가하지 않은 스트레이트 사진이지만 상당히 정교하게 짜여진 시각적 내러티브의 장이다. 그는 후에도 이런 수사를 몇 번 더 썼다.

   이제 최민식의 사진은 많이 알려졌고,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하고 처절했던 1960,70년대의 가장 진솔한 이야기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진에서 인간을 읽는다. 그런 최민식의 노력에 대해 출판사와 미술관들이 21세기가 되서야 주목을 한다는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것이다. 훌륭한 작가를 뒤늦게 서야 알아봤다는 상대적인 차원에서 늦은 것이 아니라, 범주적으로 늦은 것이다. 즉 그의 사진이 한참 시대의 결을 거스르고 빛을 발할 때는 못 본 척 하다가, 시절이 좋아지고, 뭐든지 표상가능하고, 따라서 그의 사진의 힘이 상대화되어 흐물흐물해지고 나서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최민식의 사진은 너무 일찍 나타났거나 너무 늦게 나타났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사진으로부터 더 이상 얻는 것이 없을까? 최민식이 사진으로 불러낸 인간들이란 과연 무엇인가? 나는 감히 그것을 ‘빈곤의 역사적 도상’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도상이란 말을 통해 최민식의 사진이 가진 현실적 효과와 비현실적 효과를 모두 아우르고자 한다. 분명히 그의 카메라 앞에는 그런 인간들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것은 그의 사진을 통해서 도상화된 모습이지, 피사체 자체는 아니다. 우리는 그의 카메라와 그의 작가적 태도를 통해 형성된 빈곤의 도상을 보는 것이다. 그 도상들은 앞에서 서술한 그런 수사들에 의해 내용을 제공받는다. 최민식의 사진을 ‘역사적’ 도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빈곤이 인간적인 문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조건 지워지고 정치적으로 제약 받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분명히 19세기의 빈곤은 20세기의 빈곤과 다르고, 각 10년 마다 또 다르다. 1980년대의 빈곤과 1990년대의 빈곤은 다른 것이다. 최민식의 사진에서도 1980년대 이후에 그 전과 같은 얼굴들이 잘 안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다. 그러므로 최민식의 사진을 말 할 때 초점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특정한 도상을 통해서 보게끔 만든 역사적 조건들로 옮겨져야 한다.

   분명히 그의 사진은 1950년대에서 80년대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근대화가 흘려버린, 혹은 강제로 발전의 뒤안길로 차 내던져버린 빈민계급에 대한 증언이다. 그리고 그런 계급에 대한 표상을 끌어냈다는 점에서 빈곤퇴치를 모토로 삼은 당시 정권으로서는 실재의 귀환(return of the real) 만큼이나 달갑지 않은 일일 것이다. 즉 억눌러 놓은 것이 튀어 나올 때의 그 달갑지 않음이다. 그 ‘실재’라는 것이 빈곤이라는 내용 자체인지, 그것을 말하는 최민식 자신의 사진적 어법인지는 딱 구분해서 말하기 어렵다. 왜냐면 그의 사진어법은 빈곤이 만연하던 시대에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여러 사진가들과의 조응관계 속에서 말이다. 우리가 최민식의 사진을 통해 인간을 본다면 단순히 피사체의 얼굴이 아니라, 그의 사진을 만들어낸 인간관계를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사진을 보며 그 속에 묘사된 것에 대해 놀라는 시대는 아주 오래 전에 지나갔다. 오히려, 사람 얼굴을 그렇게 묘사하게 만들어낸 시대적 정황의 함의까지 읽어내는 것이 최민식의 사진을 단순히 물질증거에 머물지 않게 하는 일일 것이다.

(결론이 신통치 않아 고칠 것으로 보임. 이 글이 안 보이면 그건 고쳐졌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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