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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4-08-26 21:35:53, Hit : 1130, Vote : 505) 
 http://gelatinemotel.byus.net
 파머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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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오바성 해석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시체놀이를 퍼포먼스로 해석하면, 군대축구는 인스톨레이션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
대뽀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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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놀이'에서 발견한 예술  
[무대뽀의 이미지읽기] "우리는 모두 작품이다"  
미디어오늘 media@mediatoday.co.kr



▲ 시체놀이 출처 도깨비뉴스

모 여학교, 휴식(?)시간. 모 여학생이 칠판 앞으로 다가가 분필로 칠판에 다음과 같은 문장을 써 놓았다.

선생님...
너무... 힘들었어요...
죄송해요...

그리고 그 반 여학생들은 그녀들의 신발을 창가에 가지런히 정열해 놓았다. 그리고 여학생들은...


이미 인터넷상에서 이 사진을 보신 네티즌들이 많으리라 생각된다. 흔히 이 사진은 네티즌 사이에 '시체놀이의 백미'로 불린다. 특히 이 사진은 시나리오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타의 '시체놀이'와 차이를 지닌다.

대뽀, 오늘 이 '시체놀이'를 아뜨의 한 종목(?)인 '퍼포먼스'로 명명하고자 한다. 조타! 결론부터 먼저 때려놓고 그걸 풀어나가도록 하자. '시체놀이'는 "우리는 모두 작가이다"를 넘어 "우리는 모두 작품"임을 천명한다. 머시라? 대뽀가 더위 먹은 것 같다고요?

살아있는 조각의 비하인드스토리

구약성서의 '창세기'를 보면 야훼 하나님이 인간(아담과 하와)과 동물을 진흙으로 만들었음을 읽을 수 있다. 그럼 야훼 하나님은 아뜨에서 말하는 일종의 '조각가'가 아닌가? 물론 야훼 하나님은 '그림의 떡'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조각을 제작했다.

살아있는 조각? 근데 야훼 하나님 말고도 (겁도 없이 신처럼) 살아있는 조각을 제작(?)한 아티스트가 있다. 이탈리아 작가인 피에로 만조니(Piero Manzoni)가 바로 그 인물. 만조니의 '살아있는 조각(sculpture vivante)'(1961)은 알몸의 여자 허리쯤에 작가 만조니가 검정 필기구로 자신의 사인을 한 것이다.  


▲ 살아있는 조각  Piero Manzoni [sculpture vivante] (1961)

아니, 작가가 사인만 하면 모든 사물이 곧 작품이 된단 말인가? 지난 연재에서 몇 차례 등장시킨 뒤샹의 '샘'을 기억해 보시라. 뒤샹은 소변기에 사인함으로써 그 소변기를 '작품'으로 변용시키지 않았는가. 물론 만조니와 마찬가지로 뒤샹도 사인만 하지는 않았다.

뒤샹이 일상의 오브제인 소변기에 사인하고 '샘'이란 이름을 명명하였듯이, 만조니는 한 술 더 떠 여성의 알몸에 사인하고 그녀를 '살아있는 조각'이라고 명명했다. 뒤샹과 만조니는 야훼하나님처럼 '노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이 선택한 오브제에 사인만 했을 뿐이다. 헉! 그럼 만조니는 인간을 일종의 '오브제'로 간주한 셈이 아닌가?

근데 '소변기'가 '샘'으로 여자가 '살아있는 조각'으로 변용되는 뒤샹과 만조니의 작업은 '명명행위'가 아닌가? 그럼 그 명명행위는 원조(?)는 뒤샹인가? 대뽀가 생각하기에 '아니올시다.' 그럼 누가 명명행위의 원조란 말인가? 야훼하나님이 진흙으로 제작한 살아있는 조각인 '그 사람', 즉 아담이 명명행위의 원조다.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냐고요?

구약성서의 '창세기'에서 야훼 하나님은 아담을 '그 사람'으로 불렀다.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야훼 하나님은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 근데 우리가 알고 있는 '아담'과 '하와'라는 이름은 다름 아닌 야훼 하나님이 '그 사람'이라고 부른 아담이 작명한 것이란 점이다. 따라서 최초의 작명인은 '그 사람(아담)'되는 셈이다.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그 사람'(아담)은 여자를 '하와'라고 명명했다. 그 사람이 여자를 '하와'로 명명함으로써 자신은 '아담'이라는 '남자'가 되었다. '아담'은 여자를 '하와'라고 작명함으로써 남자와 여자, 즉 동물과는 다른 야훼 하나님이 부른 그 사람인 '인간'이라는 범주에 귀속시켰다. 이를테면 '하와'는 아담 자신과 같은 집단으로 분류된다고 말이다. 따라서 '아담'은 '하와'에게 이름을 주어 '인간'이라는 집단에 귀속시킨다. 그건 그녀에게 그가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행위이다.

근데 '아담'이 자신으로부터 나온 여자를 '하와'라고 작명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도 확립시킨다는 점이다. 그럼 '아담'이나 '하와'라는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란 말인가? '아담'이 자기로부터 나온 여자에게 '하와'라고 부를 때 또는 '하와'가 '아담'을 부를 때 그들의 이름은 고유명사화되면서 동시에 그 고유명사를 말소한다. 그럼 '아담'이라는 이름은 원래 고유명사가 아니면서 이후에도 고유명사가 아니란 말인가?

자, 여기까지는 서구의 인간 탄생설이다. 그럼 우덜은 어떤가?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한민족의 시조(始祖)는 단군(檀君)이다. 단군은 어떻게 탄생했는가? 글타, 천제(天帝)인 환인(桓因)의 아들인 환웅(桓雄)과 웅녀(熊女) 사이에서 단군은 태어났다.

근데 웅녀는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곰이 인간으로 '변신'(변화)된 여자이다. 따라서 신의 아들(하늘/陽)과 동물(땅/陰)이 만나 우덜의 시조(인간)를 탄생시킨 셈이 된다. 이런 단편적인 정보를 통해 대뽀는 서구를 '존재론'으로 반면, 우덜을 '관계론'으로 상정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대뽀가 말하는 '관계론'은 삼재(天地人)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그리고 그 '관계론'은 열분들이 아시는 '인연론'과 문맥을 이룬다. 또한 곰이 인간으로 변신(변화)하는 것은 '윤회론' 뿐만 아니라 '(주)역'과도 문맥을 이룬다. 그럼 대뽀가 지난 연재에서 언급했던 '변화하는 사물/작품'은 바로 단군신화(檀君神話)에 그 모델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피를 벗은 비너스

대뽀는 지난 연재에서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극단적으로 몰고 간 작업으로 기윰의 '새로운 슈퍼마켓'(1990)을 그 사례로 들었다. 대뽀는 기윰의 '새로운 슈퍼마켓'을 일종의 '빌려쓰기'로 읽었다. 근데 기윰이 뒤샹의 뒤를 밟아 수퍼마켓의 물건들을 일정기간 빌려 쓴 반면, 만조니의 뒤를 따라 인간을 빌려 쓴 아티스트들이 있다. 궁금하지?


▲ Vanessa Beecroft

1969년 이탈리아에서 출생한 바네사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는 뉴욕에서 거주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위의 이미지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바네사의 작업은 일종의 '퍼포먼스'이다. 그녀는 미술관이나 화랑의 전시장에 조각한 사람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을 '전시'한다. 따라서 관객이 보는 작품은 다름 아닌 관객과 같은 사람이다. 단지 작품(의 사람)은 옷을 입은 관객과는 달리 '알몸'으로 있을 뿐이다.

물론 바네사의 초기 퍼포먼스는 작품이 '알몸'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1994년 독일 쾰른의 갤러리(Galerie Schipper & Krome, Koln)에서 열렸던 바네사의 첫 개인전은 30명의 젊은 여자를 전시장 안에 전시하고, 관객은 전시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전시장 밖에서 마치 핍쇼(peep show)를 보듯 구멍을 통해 볼 수 있도록 했다. 그리고 전시된 여자들은 검정 구두와 스타킹 그리고 회색 팬티, 검정색이나 회색 상의를 착용했다.


▲ Vanessa Beecroft "VB 45"(detalle) 2001

허나 바네사의 퍼포먼스는 이후 관객을 전시장 안으로 들어서게 하고, 작품(?)은 상의를 벗어던지고 급기야는 팬티까지 벗는 '알몸'으로 변화된다. 물론 그녀의 퍼포먼스에는 여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작품을 모조리 조회하면 남자(특히 군인)도 출현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녀의 퍼포먼스는 단수가 아닌 복수의 모델(?)을 전시한다는 점이다.

바네사의 조각은 일정 시간동안 마치 조각처럼 요동하지 않고 포즈를 취하는가 하면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다른 포즈를 취하기도 한다. 대뽀, 바네사의 퍼포먼스를 만조니의 '살아있는 조각'처럼 '살아있는 조각(living sculpture)'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바네사의 퍼포먼스는 전시가 끝나면 그녀의 '작품'은 '일상'(일반인)으로 돌아간다. (따라서 남는 것은 전시 당시 촬영한 이미지들이다) 이를테면 바네사의 작품은 일종의 '빌려쓰기'인 셈이다. (바네사는 초기에 자발적으로 '작품'에 참가한 사람들을 '전시'했으나 이후 모델을 고용했다고 한다)

단편적인 이미지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바네사의 퍼포먼스는 미술관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녀는 뒤샹이 소변기를 미술관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이용하여 작품('샘')으로 변용시켰던 것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작품'으로 변용시킨다. (만조니의 '살아있는 조각' 역시 전시장에서 행해진 작업이다)

수치심이란 옷을 벗어 던져라


▲ Spencer Tunick "Barcelona 1" 2003 / Institut de Cultra, Barcelna, Spain

버뜨, 미술관의 문턱을 넘어 생활영역에서 살아있는 사람들을 '작품'으로 변용시킨 아티스트가 있다. 이미 국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스펜스 튜닉(Spencer Tunick)이 바로 그 인물이다. 스펜스는 1967년 뉴욕에서 출생한 사진작가이다. 그의 홈피(http://www.spencertunick.com)를 방문해 보면 '인스톨레이션스(Installations)'이란 파트를 볼 수 있다. 그 파트를 클릭하면 1994년부터 2003년까지 세계 곳곳에서 행해진 일종의 '집단적 누드 퍼포먼스' 이미지를 단편적이나마 볼 수 있다.

스펜스의 '바르셀로나 1(Barcelona 1)'(2003)은 스페인 문화성 앞 차도에 수많은 알몸의 사람들이 누워있는 '인스톨레이션'이다. 스펜스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은 1994년 뉴욕을 시작으로 캐나다 · 칠레 · 아일랜드 · 러시아· 남아프리카 · 영국 · 아르헨티나 · 오스트리아 · 스위스 등 세계 곳곳의 공공장소에서 그 지역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다.

미술관 앞이나 문화성 앞 그리고 상파울로 비엔날레나 벨렌시아 비엔날레 또한 스위스 바젤 아트페어 등 문화예술과 관련된 장소만이 아니라 공원 혹은 지하철 입구나 차도 인도 등 일반 공공장소에서도 그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은 행해진다.

스펜스의 '바르셀로나 1'은 알몸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늘을 향하여 한 방향으로 길에 누워있다. 이를테면 스펜스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은 일정한 형식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허나 스펜스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을 모조리 조회한다면 우덜이 종종 즐기는 '시체놀이'처럼 카오스의 풍경도 볼 수 있다.


▲ Spencer Tunick "Barriers 3" 1998 / Delancey Street, NYC

스펜스의 '방해물들 3(Barriers 3)'(1998)은 뉴욕의 어느 지하철 입구를 진입하지 못하도록 일종의 '방해물'처럼 알몸의 사람들이 각기 다른 포즈로 누워있다. 마치 그 모습은 '시체놀이'를 방불케 한다. 그것도 알몸으로 말이다, 헐~.

흥미롭게도 바네사와 스펜스의 작업은 1994년에 시작했다. 그러나 바네사는 미술관이라는 '보호' 아래에서 알몸의 사람을 '작품'으로 변용시킨 반면, 스펜스는 미술관을 박차고 나가 햇빛을 받을 수 있는 공공영역에서 알몸의 사람을 '작품'으로 변용시켰다. 물론 바네사나 스펜스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일정시간이 지나면 일상(사람)으로 컴백한다.

하지만 그들의 작업은 한결같이 집단적 누드 퍼포먼스를 실행할 수 있도록 하는 작가를 필요로 한다. 이를테면 알몸의 사람들은 바네사나 스펜스라는 아티스트의 작품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따라서 알몸의 사람들은 바네사나 스펜스를 '작가'로 증명하는 증인이 되는 셈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만약 증인은 없다면, 바네사나 스펜서는 그들이 원하는 '작품'도 할 수 없으며 증인을 통한 '작가'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쵸?

우리는 모두 작품이면서 작가이다

자, 이제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원점? '시체놀이' 말이다. 스펜스 튜닉의 '인간 인스톨레이션'과 마찬가지로 '시체놀이'도 공공영역에서 행해진다. 그렇다고 그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단편적인 이미지를 보고 알 수 있듯이 스펜스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은 사람을 알몸으로 등장시키는 반면, 시체놀이에 참여하는 이들은 평상시 복장으로 출현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들 사이의 차이는 주체의 차이라는 점이다. 말하자면 '인간 인스톨레이션'이 어느 특정 작가(스펜스)의 아이디어로 행해지는 반면, '시체놀이'는 집단(단체)이 함께 행동하는 퍼포먼스라고 말이다. 글타! '시체놀이'는 어느 특정인, 즉 '작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작가'이면서 '작품'이 된다. 따라서 시체놀이는 아뜨의 생활화, 즉 '생활이 곧 아뜨'임을 알려준다. 아닌가?


▲ 사무실에서 시체놀이 www.zekook.com


▲ 운전기사(?)들의 시체놀이 blog.empas.com/outsider64


▲ 횡단보도에서의 시체놀이 blog.empas.com/plutoc

열분들도 아시다시피 시체놀이는 이제 학생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즐긴다. 직장 사무실에서 시체놀이가 행해지는가 하면 집안에서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 놀이하기도 한다. 물론 스펜스의 '인간 인스톨레이션'처럼 차도나 황단보도에서도 시체놀이는 등장한다. 이제 시체놀이는 어느 곳에서나 누구나에 의해 행해지는 일상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그 시체놀이는 집단적으로 행해지기도 하지만 개인이 행하기도 한다. 따라서 우리는 모두 작품이면서 동시에 작가인 셈이다. 그쵸?

사족 : 대뽀, "우리는 모두 작품이면서 작가이다"라는 진술을 하고나서 무슨 할 말이 더 있겠는가? 이제 논의될 사항은 대뽀의 진술에 대해 논쟁일 것이다. 따라서 네티즌의 능동적인 참여가 있다면 <무대뽀의 이미지 읽기>는 계속 될 수 있지만, 네티즌의 참여가 없다면 이 연재는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입력 : 2004.08.23 09:59:49 / 수정 : 2004.08.23 10:4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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