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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4-08-23 16:47:25, Hit : 1065, Vote :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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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 팔자의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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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전근대적 사진교육을 받은 나로서는 공감할 대목이 많은 글입니다만, 작금의 사태를 애널라이즈하기엔 역부족인 부분도 산재한...글같긴 합니다.
작업을 하는 이유가 반드시 누군가의 감동을 위한 것이 아닐 수도 있고, 객관/메카닉/철학 심지어 창작이라는 측면에서도 작업의 이유가 되지는 않거든요.
읽을 수록 안쓰러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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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진신문 2004.08.16
주동호의 '사진논단'
감동은 제삼자가 해야 합니다


워낙 아는 것이 없어서 글을 좀 쓰려고 하면 겁부터 나서 망설이게 됩니다. 그런데 더 없이 부족한 것이 많아 사진을 찍는다는 생각이라도 하면 얼굴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두근거려서 camera finder를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워지는 때가 자꾸 늘어나는 것만 같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면 겁부터 나니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어렵기는 어려운 것인가 봅니다. 사진을 촬영(撮影)한다고 하는 데에는 먼저 보여 주어야 한다는 전제(前提)가 깔려있어 촬영하는 것이 통상적(通常的)인 상황(狀況)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겁부터 나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왜냐 하면 사진을 찍어 내가 아닌, 나와는 아무런 이해관계(利害關係)가 없는, 제삼자(第三者)인 남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강박관념(强迫觀念)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것은 사실(事實)인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그 사진은 촬영한 당사자(當事者)의 사진(寫眞) 실력(實力)이 적나라(赤裸裸)하게 드러나게 되는 까닭에 웬만한 용기(勇氣)를 가지지 않고는 촬영(撮影) 그 자체(自體)가 두려워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하다 못해 하찮은 생각으로 가족의 기념사진(紀念寫眞)을 촬영한다고 하는 것도 촬영해 놓고 보면 부끄럽고 후회(後悔) 막심한 사진이 너무나 많이 보여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진을 촬영하는 겁쟁이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너무나 당당한 사진들이 많습니다. 당당한 사진들이 너무나 많다고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겠지만, 온통 보이는 것이 그렇다는 생각입니다. 촬영한 당사자가 감동(感動)을 해서인 지는 잘 모르겠으나 저질(低質)의 comedy*{희극(喜劇)이 아니라 소극(笑劇)}* 같은 사진을 내놓고도 당당하게 현대사진(現代寫眞) 운운(云云)하면서 주름을 잡는 근간(近間)의 모양새입니다.
어느 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예술작품(藝術作品)은 자기(自己) 본인(本人)에서부터 시작(始作)된다고 합니다.

먼저 작업(作業)하는 본인(本人) 스스로가 만든 작품(作品)을 보고 감동(感動)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가 자기 자신이 납득(納得)되어진다고 합니다. 자기 작품을 본인(本人) 스스로 감동(感動)한 것이 최고(最高) 좋은 자기(自己) 작품(作品)이라고 합니다. 그래야 남에게 좋다고 보여줄 수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자신(自身)도 감동하지 못하는 작품(作品)을 남에게 보이고 좋으냐? 고 물으면 그것은 사기(詐欺)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남에게 물어 볼 필연성(必然性)은 없습니다. 거실(居室)이나 응접실(應接室)에서 홀로 즐기면 되는 것이며, 아울러 쾌재(快哉)를 부르면 되는 것입니다.  

촬영한 당사자(當事者)가 감동을 하는 사진이 훌륭한 예술작품(藝術作品)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저질(低質)의 comedy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입니다. 당사자(當事者)가 아무리 감동(感動)을 한다고 해도 일단(一旦)은 작품(作品)을 발표하면 감상자(鑑賞者)가 주인(主人)이 되며, 감상자인 제삼자(第三者)는 냉혹하리만큼 객관적(客觀的)으로 평가(評價)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은 다른 예술(藝術) genre와는 달라서 주관적(主觀的)으로 창작(創作)을 한다고 해도 객관성(客觀性)을 전제(前提)로 한 주관적인 창작작업이어야 하겠습니다. 촬영한 당사자가 아무리 감동을 한다고 해도 그 사진작품(寫眞作品)을 보는 제삼자(第三者)인 감상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까닭에 제삼자인 감상자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찬사(讚辭)를 보내면서 감동(感動)을 해야만 훌륭한 작품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촬영한 당사자(當事者)가 아무리 감동을 하고,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자랑하고, 자신의 작품 앞으로 다가와서 감상하라고 외쳐도 감상자인 제삼자(第三者)는 냉담(冷痰)할 뿐입니다.

감상자인 제삼자의 시선(視線)을 흡인(吸引)하는 강렬한 용광로(鎔鑛爐)의 불길이 작품 속에 용해(溶解)되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진리(眞理) 같은 것이 있습니다. 때문에 작가인 당사자(當事者)의 예리한 성찰(省察)과 해박한 지식(知識)과 철학(哲學)과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인 사상(思想)을 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제(主題)를 설정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합니다. 주제가 진부(陳腐)하면 진부한 만큼 사진 형식(形式)에 있어서도 진부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이며 scale이 큰 주제(主題) 설정(設定)이 아니고는 사진가 나름의 독특한 표현형식(表現形式)은 적용(適用)이 불가능(不可能)해질 수밖에 없으며, 전술(前述)한 것과 마찬가지의 저질 comedy에 머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겠습니다.

어느 분처럼 강원도를 촬영했다고 하면서 차창(車窓)을 통해 일회용(一回用) camera로 함부로 찍어댄 것 같은 사진으로는 어불성설(語不成說)의 저질(低質) comedy로 전락(顚落)하는 양상을 연출시키게 되는 결과(結果)는 필연적(必然的)인 것입니다.

특히 사진은 mechanism의 결집(結集)입니다. 사진 mechanism과 더불어 camera mechanism을 통달(通達)하지 않고는 작가 자신(自身)의 독특(獨特)하고 개성적(個性的)인 표현형식은 구사할 수가 없으며 다양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련(一連)의 수련(修鍊)과정(過程)을 무시한 채 함부로 shutter button을 누르기만 하면 서둘러 전시회(展示會)를 하는 것이 근간(近間)의 양상(樣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사진가(寫眞家)라고 자처(自處)하면서도 mechanism은 뒷전으로 밀어 놓고 있으면서 독특(獨特)하고 개성적(個性的)인 표현이 불가능하니까 이상(異常)한 것을 이상(異常)하게 찍어서 보여주고 있으니 감상자인 제삼자는 웃긴다고 하면서 논의(論議)의 대상(對象)으로는 취급(取扱)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찍는 것도 한계(限界)에 이르게 되니까, 이번에는 이상하게 만들어 놓고 이상하게 찍는 지경(地境)에 와 있는 세태(世態)이기도 합니다. 어찌된 영문인지 사진을 창작하는 사진가라는 분들이 작품을 창작할 생각은 전혀 염두(念頭)에도 두지 않은 채 group을 만들어 세(勢)를 과시(誇示)하려는 모양새는 요즘 들어 부쩍 늘어가고 있는 추세(趨勢)로 비쳐지는 것은 과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라는 중론(衆論)이 지배적(支配的)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진(寫眞)창작(創作)은 어디까지나 개인적(個人的)인 활동(活動)이며 필생(畢生)의 작업이라는 신념(信念)을 가진 필자가 우둔(愚鈍)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후회(後悔)는 하지 않고 지내려는 자신(自信)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사진은 자신(自身)이 평가(評價)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제삼자인 타인(他人)들이 냉정하게 평가(評價)해 줍니다. 아무리 미사여구(美辭麗句)로 자랑을 해도 자랑한 만큼의 반대급부(反對給付)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까닭에 겸손(謙遜)한 철학이 우선되어져야 하며, 사진가로서의 양심(良心)이 투명(透明)한 사상(思想)과 이상(理想)을 펼칠 수 있게 한다는 생각입니다.  






zabel (2004-08-23 16:50:54)  
전근대 사진교육의 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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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진의 시작은
최광호 / 사진가


나는 집을 나서면 사진 찍는다.
안녕 하세요? 이 세상에 사진으로 신고 한다.
대문 앞에 서서 사진 찍는다. 우리 조상들이 들에 나가 식사할 때 먼저 준비한 도시락에서 조금 떼어 자연에 신고하며 고수레하듯이.. 그리고 산소에 제사 지낼 때도 산신이랄까 그 먼저 존재한 신에게 제사 지내듯, 내 앞에 보여 지는 사물들에게 내가 집을 나섬을 신고한다.
잘 있었니? 밤사이에 별고 없으신지요? 하고 사진 찍으며 신고한다.
나 자신이 밤사이 무사함에 감사하며 제사지내듯, 고수레하듯 사진 찍는다.

나에게 있어서 사진은 이렇게 되어 지고 있다.
왜? 이렇게? 무엇을 찍을까? 어떻게 찍을까? 잘 찍을까? 멋있게 찍을까?
그런 것은 이제 나에게 있어서는 아무 문제도 안 되며 의식되어 지지가 않는다. 심지어 사진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지, 다시 말하면 돈을 벌어야지, 그런 생각조차도 허울인 것 같아서... 왜냐면 돈과 사진이란 관계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것으로 돈을 번다는 것은 그릇된 생각임을 어느 때인가부터 알았기에 감히 사진으로 돈 벌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보다 사진으로 나 자신의 근본 문제를 해결해야겠기에, 아직도 사진으로 진실 되게 사는 방식을 찾고 있다.

사진으로 나의 진실 찾기, 그것이 과연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바라는 사진이란 과연 무엇일까?
내게 사진하면서 변하지 않은 고민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진실 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신구 전문학교 사진과를 다녔던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 생각을 가장 오래 끊임없이 하고 있다. 진실 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 나도 모른다. 아직도 사진을 통해 그 물음을 스스로에게 하면서 이렇게 사는데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항상, 사진으로 진실 되게 사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사진 잘 찍고, 못 찍고가 아닌 잘 사는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것에 대해 수 없이 고민에 고민을 하고 있다.
사진으로 진실 되는 그 방법을 생각하는 지금 뭉클 가슴이 북 받쳐 오르며 눈물이 난다. 왜 그럴까 무엇이 나를 뭉클하게 하는 것인가, 나도 모른다 하여간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면 나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진 찍는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사진 찍는 순간에는 그저 찍을 뿐이다. 찍는데 감동되어 찍을 뿐이다. 찍고 또 찍고, 찍기만 한다. 필름이 떨어질 때까지 그것뿐이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렇게 찍을 수 있는 것은 그 피사체와 나와의 공감대가 함께 형성되는 순간이며, 순간순간 나 자신을 촉발하고 반응하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간이 나서 한가하거나, 혹 힘들거나 괴로울 때는 더욱 진실 되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하고 고민한다. 왜 그런 고민을 할까, 나도 정말 모른다. 그런데 여기에 오래 전부터 한 가지 더 생긴 고민이 있다.
바르게 사는 것이 무엇인가 하고, 다시 말하면 진실 되고 바르게 사진하며 사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사진하며 사는 것 그것은 고민하는데, 나는 왜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돈 버는 고민은 안 할까?

돈 없어 힘들어하는 식구들이랑 나에게 있어서도 돈이 꼭 필요한데, 그 돈보다 내가 나답게 사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왜 일까? 하여간 진실이란 단어 앞에 모든 것이 무기력하고, 어떻게 바르게 사는가란 생각에 빠져들면 다시 처음의 원점으로 돌아가 스스로 배에 힘주고..... 그러기에 나는 사진하며 살수 밖에 없다.
하여 내게 있어 이제 사진은 쉽고 자유롭다. 그저 하면 된다. 내가 사는 것도 그와 같다. 다시 말하면 내 목숨도 그렇게 태어났으니, 내 엄마 아버지가 살다 보니 내가 태어났듯이, 그렇듯 자연스럽게....
생명이란 무엇인가 지금 살아 있음 그것이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있음에 살아있다고 한다. 다시 말하면 숨이 끊어지고 심장박동이 멈추면 죽음이라고 이야기하듯이, 나는 이제 이것만은 알았다. 살아있음 같이 사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그래서 오랜 전부터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지금처럼 이렇게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하자 그러면 후회는 안 할 자신이 생긴 것이다.
그렇게 꾸준히 사진하려면 사진이 쉬워야 하고 가까이 있어야한다. 그래서 나는 항상 사진기를 가지고 다닌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질문하기를 ‘장인어른 죽음을 어떻게 찍었느냐’고 하기에 ‘내가 사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니니 찍을 수 있었다’고 해도 납득이 제대로 안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정말 그렇다. 사진 잘 찍기 위해 내가하는 방법은 사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닌다는 것이다.

사진기를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좀 더 적극적이어야 되겠기에, 디지털 사진기가 내 손에 들어오고부터는 아예 목에 걸고 다니기로 했다. 지금까지 넥타이는 맨 적이 별로 없으나 사진기만큼은 목에 걸어야지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편했다. 전에는 사진기를 가방에 넣고만 다니던 내가 나 자신에게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할 필요를 느낀 것이다. 그랬더니 더 재미있었다.
마치 나를 위해 디지털사진기가 태어난 것 같았다. 찍고 또 찍어지는 그 디지털 사진기가 있어 가난한 나에게 필름값이 안 드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분명히 말하지만 사진은 쉬워야하고 재미있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 꾸준히 할 수 있다. 나는 때때로 이렇게 얘기한다. ‘이제 돈 없어 사진 못하는 사람들 디지털사진기를 쓰세요. 이제는 공짜로 사진 찍을 수 있잖아요. 그러면 꾸준히 오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면서 새롭게 다가오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진으로 스스로 거듭날 수 있는 그것이 바로 사진하는 의미일 것입니다.’하고...


77   전시 9.29  zabel 2005/09/29 1252 466
76   전시 _6.11  zabel 2004/06/11 1593 619
75   전시 _7.2 [7]  zabel 2004/06/21 1227 311
74   전시 모음. + 풍경이다 [4]  zabel 2003/11/04 1609 411
73   전시_ 4.26 [1]  zabel 2004/04/26 1465 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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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정선경 사진 - 담 낮은 동네 아줌마 [2]  zabel 2005/05/02 1128 245
68   정연두의 연두  zabel 2005/03/23 1168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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