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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드뎌 섭웹을 보고 왔단 ^^V
대부분의 모던한 작업들이 그렇지만, 새초롬한 매력은 별로, 였다만. 미국의 모던한 컬러 다큐멘터리의 정점임에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 처음엔 생각보다 내부 노출이 좀 들쑥날쑥하다 생각되었는데 가만보니, 어둡게 만들 것은 그리하고 정상치로 갈 것은 그리했던 것이란.(__)b 스냅을 구사하는 그 순식간의 찰라에 내/외부 노출에 촛점, 거기에 셔터 찬스까지 구사해놓은 가공할 만한 내공의 소유자. 사진한장을 십분이상 보기 힘들긴 하지만, 혀를 내두를 기술력은 사실인듯.
자료 삼아 퍼온자료, 유료 자료임으로 삭제 압박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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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보시려면 카시미론 검색에서 Bruce Davidson 를 서치하시길.
Bruce Davidson's Subway / 글: 진동선
내 인생은 사진을 발견하게 된 날로부터 변했다. - Bruce Davidson
모던 정신과 모던 포토
브루스 데이빗슨(Bruce Davidson, 1933)을 말할 때 20세기 마지막 로맨틱 포토저널리스트라는 말을 한다.(1) 그것은 사실인 것 같다. 60년대를 최고의 전성기로 맞이했던 그가 혼란스럽고 과격했던 시대적 정황 앞에서도 감성적인 사진의 길을 걸었던 것은 분명하다. 어떤 이론가는 그런 말도 한다. 그가 근대사진의 마지막 주자(走者)였으며, 그에 의해 근대 사진이 끝났다고. 이 말도 설득력이 있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서 시작된 근대사진(Modern Photo)이 브루스 데이빗슨을 끝으로 신디 셔먼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렇다. 사진의 역사가 브루스 데이빗슨에게 내린 훈장이라고 할까, 평가라고 할까, 전환기에 서 있었던 그는 완결자의 모습을 보인다. 1965년부터 1975년까지, 전후사진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에 브루스 데이빗슨은 모던 포토의 완결자의 모습으로, 그리고 정리자의 모습으로 있다.
브루스 데이빗슨은 전후사진의 개혁기 60년대를 살았다. 그때 사진은 “퍼스널 다큐멘터리 사진(Personal Documentary Photography)”이었다. 이 말 속에는 몇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데 예컨대 정통 스트레이트 사진의 종말을 내포하기도 하고, 전통적 사진미학의 와해를 내포하기도 하고, 또 새로운 개념의 사진미학과 방법론의 출현을 내포하기도 한다. 세계사진은 음으로 양으로 오랫동안 계보를 이끌어왔다. 유럽은 으젠 앗제에서 에릭 잘로몽, 앙드레 케르테츠, 브랏사이, 빌 브란트에서 카르티에 브레송으로 이어지는 유럽의 정서, 빛깔, 음색에 기대는 정감 위주의 스트레이트 포토가 계보로서 형성되었고, 미국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에서 폴 스트렌드, 워커 에반스, 로버트 프랭크, 리 프리랜더로 이어지는 미국의 정서, 빛깔, 음색에 기대는 현실감 넘치는 스트레이트 포토를 계보로 형성했다. 이와는 조금 다르게 시대성과 매체 때문에 또 하나의 계보가 형성되었는데 루이스 하인에서 시작하여 위지, 마가렛 버크 화이트,유진 스미스, 로버트 카파, 필립 존스 그리피스로 이어지는 『LIFE』 스타일의 스트레이트 포토가 그것이다.
스트레이트 포토의 세 가지 계보가 통합을 이룬 시점이 60년대이다. 그런데 역사가 묻기를 누가 이것들을 하나로 통합했느냐고 말한다면 브루스 데이빗슨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우선 모던 포토의 세 가지 특징들, 예컨대 카르티에-브레송의 지극히 사진다운 구성과 로버트 프랭크의 아웃사이더의 멜랑콜리, 그리고 유진 스미스의 정직의 휴머니티를 본다면 이를 극복하려 했던 사람이 브루스 데이빗슨이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동시대이 작가 리 프리드랜더, 게리 위노그랜드, 다이안 아버스, 데니 라이온과는 다른 사진가이다. 대표 주자로서 서로 미학과 형식을 주도하고 시대에 부합한 표현과 스타일을 찾지만 근대사진의 큰 등줄인 순수사진, 다큐멘터리 사진, 저널리즘 사진, 광고사진을 다루거나 섭렵한 사진가는 브루스 데이빗슨뿐이었다.
브레송처럼, 유진 스미스처럼
나는 생전 처음으로 카르티에-브레송의 <결정적 순간>을 사랑하는 소녀와 브레송에 대한 사랑에 빠졌다. 나는 그녀가 또한 나를 사랑하기를 바랬다. 그래서 나는 브레송의 사진만큼이나 훌륭한 결정적 순간을 만들기 위해 콘탁스 카메라를 구입했다. 그러나 내가 만든 사진을 그녀에게 보여주었을 때는 때가 늦었다. 그녀는 이미 영어 선생을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카르티에-브레송하고만 외롭게 남았다. Bruce Davidson
브루스 데이빗슨은 50년대 초반에 사진의 길을 걷는다. 그때는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시대였다. 사람들은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The Decisive Moment)》(1953)에 매료되었으며, 그렇게 멋진 사진을 찍고 싶었다. 더구나 사진 한 장에 목숨을 건 포토저널리즘 시기였기 때문에 라이카를 쥔 사진가라면 긴장된 마음으로 왼손은 포커스 링을, 오른손은 셔터 버튼에 올려놓고 결정적 순간을 기다렸다. 브루스 데이빗슨도 그런 사람이었다. 결정적 순간 때문에 첫 사랑의 상처가 있었고, 또 결정적 순간 때문에 『LIFE』 사진기자가 되고, 「매그넘(Magnum)」 회원이 되었다. 모든 것이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때문이었다.
브루스 데이빗슨은 마침내 1955년 파리에서 카르티에-브레송과 만난다. 하찮은 사진인생마저 바꾸는 브레송이었기에 브루스 데이빗슨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는 새로 태어났다. 목표도 생기고 꿈도 생겼다. 브레송과 같은 사진가가 되고, 브레송과 같은 매그넘 회원이 되는 것이었다. 자신도 브레송처럼 삶의 미세한 질서와 균형을 보고 찰나적으로 그것들을 카메라 속으로 이끄는 인식의 결정적 순간과 만나고 싶었다. 인상파 화가 레옹 포셰의 미망인을 몽마르트에서 만나 찍은 <몽마르트 미망인(Window of Monmartre)> 은 그렇게 찍혀졌다. 그리고 이 사진으로 다시 브레송과 만난다. 마침내 그의 추천으로 1958년 준회원으로, 이듬해 고대했던 매그넘 정회원이 된다. 『LIFE』에서 시작하여 『Du』, 『Look』, 『Esquire』, 『Vogue』까지 그는 청춘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리 오래지 않은 시간. 또 다른 존경하는 사진가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유진 스미스이다. 유진 스미스는 브루스 데이빗슨에게 인간으로서의 감성, 특히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감성과 사랑, 정직과 진실이 어떤 것인지를 깨닫게 했다. 그가 휴머니스트로서 그리고 로맨티스트로서 이후 남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유진 스미스 때문이었다.
로버트 프랭크와 퍼스널 비전
시대는 이 열정적인 사진가를 변화시켰다. 60년대. 매그넘에 청춘을 걸었던 브루스 데이빗슨에게 또 하나 격발을 유도한 사진가가 있었다. 바로 로버트 프랭크였다. 로버트 프랭크는 60년대 사진가들에게 영웅이었다. 전통적 사진의 근간을 뿌리째 흔들 만큼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그의 사진집《미국인The Americans》(1959)은 현대사진의 교과서였다. 『라이프』 스타일을 젖은 브루스 데이빗슨에게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충격적이었다. 이때부터 로버트 프랭크 사진의 실체를 보고자 했다. 그리고 마침내 3가지 영역에서 표현형식과 접근방법이 다름을 발견한다. 하나는 자유로운 시선. 브루스 데이빗슨이 맨 처음 본 것은 퍼스널 비전(Personal Vision)이었다. 공적(public) 시선이 아닌 사적(private) 시선. 로버트 프랭크의 사진은 공적인 시선이 아니라 한 사진가의 내밀한 사적인 시선으로 찍혀진 사진이었다. 또 하나는 전혀 다른 다큐멘터리 사진. 정치적, 사회적 뉴스거리가 아니면서 새로운 세상을 보게 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이었다. 그러니까 세상 곳곳에 드러나지 않은 삶의 이야기가 마치 사적인 일기처럼 적나라하게 표현된 사진이었다.
깨달음은 당장 그가 잡지에 기고하는 사진들, 특히 최근 『Vogue』와 손잡고 찍은 패션사진에 심각한 회의감이 들게 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사진을 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장비를 챙겨 떠난다. 버지니아, 미시시피, 앨라배마를 비롯한 남부 전역을 돈 긴 여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과거 로버트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흑인들의 삶, 소시민들의 일상과 만난다. 또 로버트 프랭크가 그랬던 것처럼 구겐하임 지원금을 받아 흑인들의 비참한 삶을 담고, 멀리 웨일즈 탄광으로 날아가 광부들의 삶을 퍼스널 비전으로 찍어낸다. 이때 그를 주목한 사람이 있었다. 한 사람은 뉴욕근대미술관(MoMA) 사진 디렉터 존 자코우스키(John Szarkowski)였고, 다른 한 사람은 독립전시기획자 나탄 라이온(Nathan Lyons)이었다.
퍼스널 다큐멘터리로서 East 100th Street
간혹 나는 파렴치해야만 했다. 또 그들의 비참의 문을 억지로 열고 들어가는 괴로움을 맛보기도 했다. 그러나 일단 접촉이 이루어지자 나는 다시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마치 텔레비전 수선공처럼 이 동네에 소속되어 있었다. Bruce Davidson
1966년은 브루스 데이빗슨에게 중요한 해였다. 물론 현대사진에서도 중요한 해였다. 나탄 라이온에 의해 조지이스트먼 하우스(GEH)에서 <컨템퍼러리 사진가: 사회적 풍경을 향하여(Contemporary Photographers: Toward a Social Landscape)>라는 제목의 전시가 열린다. 브루스 데이빗슨이 초대된 전시. 그런데 놀랍게도 그해 뉴욕 MoMA에서 일생일대 가장 성대하고 화제 만발한 <동 100번가(East 100th Street)>를 초대받는다. 두 전시 모두 역사적으로 의미를 지닌다. 먼저 조지이스트먼 하우스의 전시는 이듬해 열린 뉴욕 MoMA의 <새로운 도큐멘트(New Documents)>전과 더불어 60년대 가장 중요한 전시로 꼽힌다. 두 전시는 퍼스널 비전이 어떻게 동시대 사회 속에서 새로운 사진의 모습으로 자리하는지를 보여주려한 전시였다. 아울러 사회적 풍경이란 무엇이며, 새로운 도큐멘트란 무엇이며, 이를 아우르는 컨템퍼러리 포토란 또 무엇인지를 말하려 했던 전시였다.
존 자코우스키가 브루스 데이빗슨을 초대한 것은 같은 맥락이었다. 사회적 풍경이 새롭게 취해야 할 사진의 주요 소재라는 것을 보게 하고, 뉴 도큐멘트가 사진가의 사적인 일기와 같은 것을 보게 하고, 컨템퍼러리 사진이 종래의 형식과 스타일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프레임 워크라는 것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존 자코우스키가 <동 100번가>에서 본 것은 이것이다. 할렘 중에서도 가장 취약지구인 동 100가 지역에서 브루스 데이빗슨이 자아와 타자를 중재하는 퍼스널 비전을 보고, 아웃사이더의 시선으로서 삶의 이면을 보듬는 모습을 보고, 그리고 새로운 도큐먼트의 형식으로서 이전에 보지 못한 날 것 같은 투명한 느낌, 절제된 프레임, 정면을 지향하면서도 상징적인 메타포와 내러티브를 보았던 것이다.
Subway, 지하철에서 본 인생극장
나는 지하철이 가축을 실어 나르는 기차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들의 운명에 짓눌려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 굳어져 있고 상심한 표정들, 흉측하고 무표정한 인상들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Bruce Davidson
브루스 데이빗슨은 <동 100번가> 전시를 끝으로 영화로 건너간다. 사진에서 영화로 전향한 것은 이상할 게 없는 당시의 유행과 같았다. 그런 그가 사진으로 돌아온 것은 1983년 뉴욕 ICP(국제사진센터)의 전시였다. <뉴욕지하철(Subway)>을 들고 왔다. 대번에 강력한 컬러로 사람들을 휘어잡았다. 이 시리즈는 1980년 봄에 시작하여 2년이나 걸린 야심작이었다. 그는 위험천만하게도 스트로보를 터트렸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낙서들을 원색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입자가 곱고 색상이 선명한 코닥크롬64이 요구되었고 저감도 필름에는 어쩔 수 없이 스트로보가 필수적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하철 안과 밖의 노출차가 심해 적절한 조명비를 얻기 위해서도 스트로보는 필수적이었다.
삶은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
나는 비참과 명예, 아름다운 사람들과 심술궂은 사람들, 관용과 증오 등등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눈에 보이는 이상의 것, 즉 나와 타인들의 삶의 심장부까지 갔었던 것이라 믿고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내가 해낸 가장 중요한 부분일 것이다. Bruce Davidson
ICP에서 전시는 대성공이었다. 사진은 스스로 말했다. 빈곤한 삶 앞에서 사진가들이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또 밑바닥 인생들에게 카메라를 들이댈 때 어떤 진실과 정직의 태도여야 하는지를 말했다. 브루스 데이빗슨의 <Subway>를 단순히 퍼스널 다큐멘터리로 돌리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관되게 유지해왔던 휴머니즘의 정신, 또 지극히 인간적 영혼에서 나온 로맨티시즘. 그는 진실하고 정직했다. 무엇보다 말과 글이 정직했다. 사진가라기보다는 에세이스트에 가까웠고, 보도 및 다큐멘터리 사진가라기보다는 순수사진가에 가까웠다. 늘 미학 안에서 순수주의자였고, 사진 안에서 다큐멘터리언이었으며, 그리고 삶 안에서 로맨티스트였다. 물론 궤적을 보면 사진학과를 이끄는 행정가로서 수완도 있었고, 광고와 패션까지 찍어내는 커머셜 사진가로서도 수완이 있었다. 그러나 삶의 풍경 앞에서는 휴머니스트였고 로맨티스트였다.
브루스 데이빗슨이 동시대 사진가들과 구별되는 모습이 이것이다. 오늘, 세월이 한참 지난 오늘 브루스 데이빗슨이 출현한다면 그것은 시대의 호출일 것이다. 그를 부르게 한 것은 휴머니즘과 로맨티시즘이 아닐까. 그게 아니라면 진정 아름다운 삶의 존재들과 만나고자 함이 아닐까. 언젠가 그는 학생들에게 그런 말을 했다. 삶의 근간은 다큐멘터리이고, 다큐멘터리야 사진이야말로 정신과 영혼이라고. 그 말에 나도《Subway》를 다시 펴본 적이 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거칠고 어지러운 삶의 형상 속에 낭만과 사랑과 영혼이 있었다. 흑인 여자아이의 낡은 치마에서, 반백의 할머니의 머플러에서 시대정신의 패션도 보았다. 지하철 사진은 위대한 패션사진이었다. 또 지저분한 낙서들은 반달리즘(Vandalism)이 아니라 익명의 존재가 익명의 존재들에게 건네는 편지였다. 흘러간 브루스 데이빗슨의 <Subway>가 다시금 우리 앞에 선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삶의 형상 때문일 것이다. 정신없이 달리는 시대의 속도에서 그나마 삶이 여전히 아름다운 존재라는 사실을 깨우칠 수 있는 사진이 있다면 아마도 그의 사진일 것이기 때문이다.
주1. Jonathan Green, <A Critical History American Photography>, Harry N. Abrams, Inc., 1984, p. 127)
<월간미술>(2005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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