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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상에서의 전시를 보면서, 시를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일인가를 생각했었다는.
무언가를 말하는 일이란 것이, 주변의 데코레이션에 따라 얼마나 진의가 갈릴 수 있는 가를 생각해본사람이라면. 이미지를 만듦에 있어 두려워해얄 것이 뭣인가는 집어낼 수 있다.
인생은 고통이고 환희이며 혹은.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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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미술
당신을 위한, 사이코드라마
글|최지영 객원기자 ·사진|정대웅 기자
[시놉시스〕‘나’는 이십대 중반의 평범한 직장여성이다. 중산층 가정에 태어나 춥고 배고픈 줄 모르고 자랐지만, 늘 관심에 목말라 해야 했던 외로운 성장기를 보냈다. 한번의 이별과 또 한번의 등 돌림 이후 철저한 홀로서기를 시작한 ‘나’는 서서히 거짓웃음과 속으로 우는 법을 배워나간다.
번듯한 직장에 쪼들림 없는 생활, 구김살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모습으로 재탄생한 ‘나’, 그러나 우연히 들어선 전시장에서 그간 잊고 지낸 또 다른 ‘나’와 마주한다. 희끗한 눈발이 날리는 어느 휴일 오후, 어둑한 전시장 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목 놓아 울기 시작한다. (등장인물: 나, 천성명, 꿈속의 소녀, 토끼광대, 장난감말 탄 사내, 줄무늬 티셔츠 남자)

#1 수많은 ‘나’들의 숨바꼭질
나는 지하철이 싫다. 폐쇄공포증을 앓고 있다거나 특별히 지상이 좋아서, 혹은 최근 부쩍 잦아진 지하철 방화사건에 따른 공포심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사람들이다. 조금의 표정변화도 없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등을 곧추세우고 앉은 그 모습들을 보고 있노라면, 뒤에서 누가
목을 조르는 것 마냥 숨이 턱턱 막혀온다. 지퍼를 지른 듯 꾹 앙다문 입, 평화로운 표정 뒤에 숨은 그 끔찍한 비명을, 나는 들을 수 있기때문이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나는 너와 달라”하며 애달픈 내 시선을 차갑게 외면해버리는 그들이 차라리 안쓰럽다. “애쓰지마, 꼭 그러지 않아도 되잖아!” 멱살을 잡고 낯짝을 후려갈기고 싶은 충동도 일지만, 조용히 두 손을 맞잡고 있을 뿐이다.
세상은 원래 그런 거니까. 아프면서 괜찮은 척, 약하면서 강한 척, 모두 다 잊어버린 척…. 그래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천성명이란 작가를 만나기 전에는. 몸은 자라지 못하고 머리만 거대해진 무채색 인형들, 그들은 밖으론 드러나지 않는 또 다른 ‘천성명’의 작은 분신들이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갈 수 없는 무기력한 장난감말, 등짝을 부숴버린 육중한 날개, 날카롭게 그어진 가녀린 손목과 움찔움찔 새나오는 새파란 핏방울, 휑한 달빛 아래 잔잔히 흐르는 수면, 그 위로 피어난 나르시시즘. 째깍째깍 초침소리에 맞춰 산산이 부서져온 수많은 ‘나’들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금세 사라지곤 하는 또 다른 ‘나’들이 거기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다 안다”고, 고개를 주억거리는 대신 난 한 바가지 눈물을 쏟아냈다. 수많은 ‘나’들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2 사도마조히즘적 自愛
나약한 그 눈물이 역겨워, 혹시라도 남에게 들킬까 모른 척 등을 돌렸던 어두운 ‘나’들. 우리가 일찍이 폐기해버린 누추하고 남루한 인간 본연의 모습들을 그는 작품으로 형상화해내고 있었다. 수없는 채찍질이었다. 자신의 몸뚱아리에, 발가벗겨진 맨살에 철썩철썩 가하는 모진 매질이었다. 끔찍한 용기였고, 무서운 사랑이었다.
“이렇게 대책 없이 추락해버리면 안되는데….” 그가 말했다. 과거의 무거운 그림자 따위 훌훌 털어버리고 남들처럼 쉽게 웃어낼 수 없는 자신이, 무리의 대열에 끼어 함께 발맞춰 나갈 수 없는 자신이, 그는 걱정스러웠다.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깜깜한 현실 속에서 방황하던 나날 끝에 그는 결국 결심했다. ‘망각’을 염원하는 대신, ‘가장’을 택하는 대신, 오히려 똑똑히 지켜보기로. 빽빽한 대나무 숲 사이 장난감말을 타고 옴짝달싹 못한 채 난처해하는 사내와 그를 향해 “어서 오라”고 깃발을 흔들어대는 또 다른 사내. 천장에 매달린 소녀와 그녀의 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받아먹는 토끼광대, 그리고 다시 물끄러미 그 모습을 관조하는 줄무늬 티셔츠의 남자. 스스로 제 몸에 상채기를 내고, 쓰라린 아픔에 울부짖고, 그런 자신을 묵묵히 지켜보는 천성명 자신의 1인극이었다. 시나리오 작성도, 연기도, 연출도, 감독도 모두 그의 몫이었다.
#3 ‘예술’을 뛰어넘은, 生의 드라마
‘100% 희망도, 100% 절망도 없는’, 꿈도 현실도 아닌 무채색의 공간에 서 그는 상처를 상처 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그날 그 앞에 납죽 엎드려 눈물을 쏟은 건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난 들을 수 있었다. 가슴 속 깊이 파놓은 우물 아래, 꾹꾹 처박아두었던 서러운 울음들이 하나 둘 제 주인을 찾아가는 소리를. 쉬이 전시장을 떠나지 못하고, 회색 인형들 주위를 맴도는 무거운 발걸음과 들릴 듯 말듯 새나오는 한숨소리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의 자작극은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몸과 마음이 바짝바짝 타오르는 고통스런 순간마다, 끊임없이 막을 올릴 것이다. 상처 많은 우리네 가슴 한 복판 위에서 펼쳐지는 ‘나’를 위한 심리극, 당신을 위한 사이코드라마다.

막이 내리고…
어떤 의미에서 그는 실패한 작가일는지도 모른다. 우선 다루고 있는 주제부터 지극히 보편적이어서 작가를 돋보이게 할 강렬한 색채가 부재할뿐더러, 그의 설치작업 특유의 서사적 구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작품’이라는 시각적 대상에 집중하기에 앞서,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그 배후에 깔려있는 ‘이야기’를 따라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억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는 딱 한 가지 요소! 바로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는 작가적 관점에서 탈피, 배우, 연출, 감독 3인 역할을 동시 병행함으로서 전시에서의 ‘연출’의 맛을 살려냈다는 점이다. 이는 작가 자신이나 작품보다 ‘감상자’를 우위에 두고 있다는 점을 반증하는 것으로, 대부분의 작가들이 ‘미술’전시에 대한 선입견으로 인해 간과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관람객의 동선을 고려한 치밀한 공간분할(전시가 열린 갤러리상 2층 중간에 놓인 기둥 하나 때문에 그는 자그마치 6개월간 매일 전시장에 나와 골머리를 썩였다고 한다)과 적절한 위치와 조도의 조명 설치, 몰입과 긴장감을 극대화하는 음향효과 등을 통해 보는 이의 감정선을 예민하게 자극하는 것이다. 관객을 포획하라! ‘감동’을 통해 작품을 기억하게 만들어라. 이제 미술도 ‘움직이는 것’이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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