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비슷한 연식의 사진가 중에서 가장 또렷한 노선을 가진 분이라 생각되는. 언론인
출신의 정치가이셨던 분을 따로이 진보/보수로 분리해 생각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겠다는.
쓰신 분의 소양이 쩜...-_-a 환경이 재능을 만드는 것은 아니지만,
한계점을 도출할 것도 자명한 일. 내 환경을 자득해내는 일이야 말로
만듦을 기꺼워하는 사람들이 가장 노력해얄 일이다. 내가 나를 첨부터 만들 순
없겠지만, 스스로를 개비할 수도 있는 일이니. .' ) + + +


 |
진보와 보수. 아마도 이번 총선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단어들일 것이다. 그런데 요즘의 사회 분위기인지 모르겠지만 진보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들리지만 보수하면 낡은 것 또는
퇴보적이란 느낌을 준다. 이에 우익까지 등장하면 혐오감마저 들기에 이른다.
선거에 나선 거의 모든 후보자들은 자신이야말로 진보이며 개혁이라 외쳤다. 지역색이
강한 몇몇의 인사들만이 '원조보수'란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이 진정한 보수일까? 내 생각에 진정한 보수는 우리 사회에
희귀동물만큼이나 드물다. 게다가 보수란 단어를 전혀 잘못 사용하고 있다. 국가보안법을 고수하고 북한을 적대하는 것이 보수가 아니다. 그들은
보수를 가장한 파쇼이거나 극우들이 뿐이다.
그렇다면 보수란 어떤 사람들일까? 의아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진정한 보수는 문익환 선생
같은 분을 두고 하는 말이다. 왜냐고? 그분이 운동권이자 반독재 투사지 어찌 보수냐고 물을지 모르겠다. 10년 전, 그분이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목사님은 평생을 하느님을 위해 사셨고 성경의 엄밀한 해석을 고수하신 분이었다. 나이
50이 넘어서도 사회 돌아가는 것과 무관한 신학자였다. 생활도 역시 엄격한 틀이 있었고 자신에게도 굉장히 엄한 분이셨다. 그런데 사회가 그를
진보로 만들었다. 한치의 타협도 없는 일관성과 고집, 상식을 파괴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그것이었다. 스스로는 보수주의자인데 진보의 역할을 한
것이다. 요즘에 문목사님처럼 보수적인 진보라는 이중적인 잣대에 어울릴 인물이라면 단연 단병호위원장(지금은 국회위원이지만 난 늘 그렇게 불렀다)이
아닐까?
사실 나는 윤주영선생을 잘 모른다. 워낙 나이드신 어른이기도 하거니와 직접 만나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를 나눈 것 역시 몇 번 되지 않는다. 하지만 사진과 이력을 통해 선생을 조금은 알 수 있다.
1928년생이시니 올해로 77세. 하지만 아직도 정정하다. 혈색은 붉고 풍채도 좋다.
그는 해방전후에 고려대를 다니고 전쟁 후에는 미국 컬럼비아대학을 다녔다. 그리고 27살 나이에 중앙대학교 교수가 됐다. 이쯤이면 그는 엘리트
중에서 엘리트였다. 그리고 30살에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그리고 5년 후에는 편집국장을 지냈다. 당시야 조선일보가 1등 신문도 지금처럼 극우적인
논조도 아니었으니 그리 허물을 탓할 필요 없다. 그리고 정계로 나가 공화당의 장관과 국회위원 등의 요직을 거쳤다. 당시 문공부장관을 역임해
요즘도 선생을 칭할 때는 '장관님'이라 부르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79년 정계를 은퇴해 전두환 아래서 '피'를 볼일도 없었으니 참 행복했다고
밖에는 표현할 길이 없다. 그리고 선생은 오늘까지 25년을 사진가로 살아왔다. 노 정객이자 언론인인 남재희선생이 "그분처럼 행복한 인생이
있을까? 이제는 예술가의 인생을 사니 말이다"라고 할 정도이다.
지금까지 열거한 선생의 삶은 정말 '인간적인 부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25년간의
사진가로서의 이력도 만만찮다. 지금까지 20번이 넘는 개인전과 15권의 개인 작품집을 냈다. 혹자들은 선생의 풍족한 삶이 그렇게 한 것 아니냐고
폄하한다. 하지만 돈 있는 안락한 삶에 왜 그렇게 부지런하게 힘든 세상을 다니며 사진을 찍는 것일까? "나는
사진을 통해서 보다 살기 좋은 내일을 만들고 싶다는 의욕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사진의 메시지는 현실에서
분명 실현되고 있습니다.
작은 예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몇 년 전 사할린에
남아있는 우리 교포들의 생활상을 찍은 사진들을 일본에서 전시한 적이 있었는데, 일본의 '마이니치(每日)신문'이 한 페이지 전면을 할애해서 그
문제에 대한 특집을 다룬 적이 있었습니다. 우연의 일치 일 수도 있지만, 그 이후 일본 외무성이 한국 정부에 공동조사를 나가자는 제의를 하고,
나중에는 일본 적십자를 통해서 사할린 동포들의 귀국 경비 등에 대한 지원까지 이루어지게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확고한 신념을 갖고 노력한다면 세상은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은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
나는 선생의 이야기에서 분명한 진실을 발견한다. 명확한 자기 확신! 다큐멘터리 사진의
힘! 그리고 분명한 자기 세계관. 선생의 세계관은 '보수'이다. 스스로 가치 있다고 믿는 것들. 그리고 그 것을 지켜내는 힘! 그와 동시대
살았을 '사할린 동포들'과 '어머니'들, 그리고 당신과 같은 가치관을 지녔을 법한 '일하는 부부들'과 '탄광촌의 사람들'이 관심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힘겹게 살아가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닌 남미와 인도, 중국의 사람들을 만난다. 결국 최종의 관심은 앞으로 미래를 열어갈 아이들이다.
베트남에 참전해 한국군의 씨앗이 비극적으로 잉태한 라이따이한을, 내전으로 무수히 뿌려진 지뢰에 의해 사지가 잘려진 캄보디아의 아이들을
주목한다.
"오래 전부터 나는 영상을 통해 평화 정착에 기여하고자
고심해 왔다. 남북으로 갈라진 휴전선을 서쪽 끝에서 동쪽 끝까지 두 차례나 답사했고, 근년에 전쟁을 겪은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여러 번 방문했지만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다만 그런 여행을 통해서 몇 가지 진실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상처가 의외로 크고 깊다는
사실과 전쟁이 끝난 지금도 아이들은 여전히 고통과 불행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진집은 그 아이들의 전쟁과 평화를 본 대로 느낀 대로 기록한 것이다. 그 기록이 충분한 것은 아니지만 50년 동안이나 평화분위기에
도취되어 살아온 우리들로 하여금 전쟁의 아픔을 깨닫게 하고 평화 유지의 당위성을 재인식시키는 계기가 된다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은 없을
것이다."사진집<그 아이들의 평화>머리말 중에서
이러한 선생의 생각에 대해 작가이자 저널리스트 김훈은 답한다.
"윤주영의 사진들은 폭력으로 훼손당한 아이들의 훼손되지 않는 존엄을 보여준다. 그의
사진은 전쟁의 폭력이 아니라, 그 폭력에 짓밟힌 아이들의 생명 속에서 여전히 살아서 작동하는 평화와 소생의 아름다움을 말한다. 그는 해야 할
말이 많은 작가다. 그의 사진은 끊어진 팔다리의 실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팔다리를 잘려서 빼앗기고 나서도 여전히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들을 보여준다. 빼앗기고 남은 것은 본래부터 온전히 지니고 있었던 것보다 더 귀하다. 그래서 이 아이들은 불구도 아니고 기형도
아니다. 윤주영의 사진들은 훼손된 자들의 생명의 아름다움을 드러냄으로써, 그 아름다움을 능멸하는 폭력의 의미를 가혹하게 묻고 있다.
인간에게 호소하는 것은 이미 부질없어 보이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인간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인간을 향해서 외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윤주영이 이 어쩔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
폭력을 부정하는 것! 그리고 미래에 대해 진정한 평화를 묻는 것! 이 것이야 말로
진정한 보수주의자 윤주영이 갖고 있는 질문인 것이다.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가치는 결코 이념일 수 없다. 그 것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파쇼와 그 변종들일 뿐인 것이다.윤주영선생의 사진전이 5월 4일에 열린다. 아마도 5월 5일 어린이날을 기념하려는 것이리라. 그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선생의 생이 아이들에게 바치는 헌사일 것이다. 더 이상 아이들을 괴롭히지 말라고. 그리고 평화롭게 살라고. 이 시대 진정한
보수가 사진으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출처 : 이상엽 /
이미지프레스 |
< 사진 평론가 김승곤씨와의 대화
>
김승곤: 첫 사진전을 펴내고 14년이 지났습니다. 지금도 쉬지 않고 국내외를 취재하고
계시는데 힘드시지요?
윤주영:사진을 시작한 것이 1979년 2월이었으니까
금년으로 21년째입니다. 아직은 힘드는 줄 모르고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70 고개를 넘어서고 보니 체력보다 두뇌의 회전이 둔해지는
듯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비근한 예로 최근에 사진집 한 권을 편집했는데 3개월이 걸렸어요. 짰다가는 고치고, 고친 것을 다시 짜기를 10여
차례. 옛날 같으면 하루 저녁에 해치울 수 있었던 일인데 …. 이럴 때 제일 힘들어요.
김: 첫 번째 사진집 「내가 만난 사람들」을 내셨을 때가 57세 되던 해였지요. 외국
사진가 가운데에 나이가 들어 사진을 시작한 사람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그 나이에 사진을 시작한 사람의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어떻게
사진을 시작하실 생각을 하신 겁니까?
윤:처음엔 누구나 그런 것처럼 취미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도록 고무해준 계기가 세 차례 있었습니다. 첫 번 째는 1982년 LA타임스의 사진부장이던키이스 씨를 만나
남미에서 찍은 나의 사진을 보여 주었을 때 그가 격찬해준 일. 두 번 째는 일본 오오사카 예술대학의 이와미야 다케지 교수가 「안데스의 사람들」과
같은 사진을 더 많이 찍으라며, 네팔과 이집트 등을 새로운 촬영지로 권해준 일.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1990년 일본에서 이나 노부오 상을
수상한 일입니다.
김 : 그 일로 해서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윤 :수상식에서 인사말을 할 때 '영상표현의 어려움
때문에 여러 차례 사진으로부터 도망치려고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이제는 도망가는 일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고 실토했던 것이 생각납니다.
이런저런 일들이 나로 하여금 사진의 길을 계속 걷도록 하게 만든 것 같습니다. 처음엔 정직하게 말해서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수동적으로
이용했다고 할까요? 그러나 수상한 다음부터는 그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 나가게 되었습니다. 사진가로서 자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지요.
김: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간'을 찍어오고 계신데, 다큐멘터리, 그것도 인간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윤:'사진의 사명은 인간에게 인간을 설명하며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라고 한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말을 항상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어떤 예술의 분야에서도 중심 주제입니다. 문학도
연극도 영화도 모두 인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사진도 인간의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통해서 그 시대를
기록하고, 또 그 기록을 통해서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기 위한 사진가의 메시지가 전달될 때 사진은 비로소 제구실을 하는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인간'을 찍어오고 있습니다.
김: 선생님 이전에도 이후에도 '인간'을 주제로 찍는 사진가는 많았는데, 우리가
겪어야 했던 역사적인 배경에도 원인이 있겠습니다만, 대부분이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주제로 한
사진', 하면 비참한 소외 계층의 사람들을 찍은 사진이나, 아니면 반대로 정치인이나 예술가 같은 유명인사들을 찍은 사진들을 연상하게 됩니다.
요컨데 '찍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서 보는 사람의 의식도 방향 지워지는 그런 사진이요. 선생님의 사진도 광부나 이국에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는 있지만, 그들은 모두 역경 속에서도 당당하게 인간의 존엄성과 긍지를 지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입니다.
윤: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사회에는 도시인, 농촌
사람,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늙은 사람, 젊은 사람 같은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사진의 중심
인물들은 거의 모두가 역사의 뒤안길에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지난 날 우리 나라를 잘살게 만드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어머니들, 한때 '검은
다이아몬드'로 불리던 석탄을 캐던 탄광촌 사람들, 또 50년 동안이나 남의 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사할린 동포들 …. 모두가
그들이 살아온 기록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그들은 비록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 있지만,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사람들입니다.
김: 선생님의 사진에서는 그들이 짊어지고 살아온 삶의 역사의 무게와 함께 무엇보다도
그들의 삶에 대한 공감이 느껴집니다.
윤: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좋은 역사에서는 좋은
점을 본받고 나쁜 역사는 되풀이하지 않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입니다. 길이 길이 칭송 받아야 할 사람들의 자취를 기록해서 그분들이 한 일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책무이기도 합니다. 사진에 담긴 메시지를 통해서 넓은 공감대가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김: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어떤 사진입니까?
윤:글쎄요. 굳이 고르라고 한다면「탄광촌 사람들」의
25쪽 사진의 낙탄부落炭婦 사진이라고 할까요. 석탄을 활차滑車에 실을 때 레일 위에 떨어진 분탄을 줍고 있는 어느 주부의 사진입니다. 이 사진
속에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당시 우리 나라 석탄산업이 운송시설 면에서 얼마나 열악했는지를 말해 주기도 하고, 선로 위에 떨어진 분탄을
알뜰하게 긁어모아 살림에 보태 쓰려는 주부의 간절한 소망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 여성의 강한 눈초리에서는 당시의 탄광촌의 생활상과 탄광촌
여인들의 절박한 심경의 일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김: 카메라나 필름 등 일본의 사진산업은 세계적인 수준입니다. 물론 사진의 층도
두텁고 수준도 높습니다. 그런 일본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주는 사장 권위 있는 상인 '이나 노부오伊奈信男' 상을 외국인 사진가로는 처음으로
수상하셨지요. 1990년이었던가요? 수상작인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어떤 작품입니까?
윤:네팔의 한 사회복지 시설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기록한 것입니다. 힌두교도들은 죽음을 인생의 마지막으로 생각하지 않고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음을
두렵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그마티 강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시신을 화장하고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악취 때문에 다가갈 수 없었지만 한 걸음씩 다가가서 나중에는 화장된 재가 강물에 쓸려나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요. 바로 그 작품들이 일본에서 '이나 노부오' 상의 수상대상이 되었습니다.
김: 1960년대 중반 우리 나라는 월남전에 참전했습니다. 외국에 군대를 보낸 것은
우리 한민족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는데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많은 종군사진가들이 이 전쟁을 취재했습니다. 종군 취재 중 희생당한 사진가도
한두 명이 아닙니다. 그런데 정작 많은 군인을 보낸 우리 나라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이 전쟁에 종군해서 취재했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사이공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진기자가 월남전 당시 유일하게 희생된 사진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이유가 어디 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일
선생님께서 그때 2, 30대의 사진가였다면 그 전장을 취재했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윤:'시대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는데 시대가
사진가를 만드는 것 같아요. 미국의 경우 포토저널리즘이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라이프LIFE지 같은 그래프잡지들이 그런 사진들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당시 사진을 게재할 잡지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문들도 외국 통신사의 전송사진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기 때문에 설사 사진가들이 생명을 걸고 좋은 사진을 찍었다 할지라도 발표의 장이 주어지지 않았던 겁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에게 있어서 그런
사정은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고, 자신의 뜻을 펼 수 있는 여지가 좁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지요. 훌륭한 매체가 있어서 사진가들의 활동할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2, 30대가 아닐지라도 그런 기회만 주어진다면 지금이라도 뛰어들고 싶은
마음입니다.
김: 물론 매체나 사회환경의 문제가 큰 부분이겠습니다만, 기록과 보존의 소중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도 그렇고, 기록자로서 사진가 자신의 사명감이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요? 선생님께서는 대학교수와 신문사 편집국장,
외교관 등 한국이 가장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을 체험했던 시대 그 힘의 중심에 계셨는데, 보통의 경우라면 '지금부터' 라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기에 권력의 중심에서 떠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사진가로서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후회는 없으십니까? 어떤
동기로 사진을 시작하시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1979년, 우리 나이로 53살 되던 때였습니다.
사진의 길을 택한 자신의 결정에 대해서 한 번도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견디기 힘들었던 적은 있었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만일 그것이 계획된 출발이었더라면 사진가가 되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적인 프로세스라도 거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 때문에 사진을
시작하고도 10년 가까이 마음의 방황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진을 찍는 쪽만을 생각하고 그것만 공부를 했는데, 다른 사람의 사진을 보는 일에도
시간을 썼더라면 지금쯤 결과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회는 아니고, 좀더 좋은 기대를 바라는 그런
욕심이랄까 아쉬움 같은 거지요.
김: 허지만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진을 보고, 많은 책을 읽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본 사진 가운데에서 특별히 감명을 받은 작품이나 사진집이 있습니까?
윤:옛날부터 책 욕심은 많았던 편입니다.
1981년인가요.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움에서 유진 스미스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 수작들만 모아서 꾸민 기획전을 보았습니다. 그 전시를 위해서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전시장 내부 전체를 검은 페인트로 칠을 했더군요. 그리고 깜깜한 전시장에 걸린, 스미스 자신의 메시지가 적힌 패널과
작품들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온 신경이 사진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그런 디스플레이였습니다. 사진을 보고 난 후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진전을 보았습니다만, 가장 인상적인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유진 스미스의 작품들은 이전부터 사진집을 통해서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만, 그의 오리지널 작품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김: 사진가의 작업은 역시 사진집이나 전시라는 형태로 완성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스미스는 일본에서 3년여를 체재하면서 미나마타병 환자들을 취재했지요. 그 가운데 토모코라고 하는 처녀를 어머니가 목욕시키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만, 사실은 그 몇 년 전에 구와바라 시세이가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미나마타병을 촬영해서 그래프
잡지에 발표하고 있습니다. 아주 작은 어촌마을이기 때문에 물론 같은 모델들이 등장하고 있지요. 스미스가 그 사진들을 보고 미나마타를 찍을 생각을
했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미스의 사진이 유명해진 것은 미국의 그래프저널리즘의 힘도 작용되었으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그보다도
대상에 접근하는 사진가의 태도 때문이 아닐까요? 보통은 목욕 - 그것도 젊은 처녀의 목욕하는 그런 장면은 찍어서는 안 되는 터부의 영역입니다.
손발이 뒤틀린 공해병 환자를 목욕시키는 곳에까지 따라 들어가서 카메라를 들여댄다는 것은 동양인에게 있어서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을 스미스는
해낸 거지요. 다큐멘터리, 특히 보도사진에서 사진가의 윤리문제가 거론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동토의 민들레」에서 주검을 촬영하고
계신데, 망설임 같은 것은 없으셨습니까?
윤:기록자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찍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발인하기 전에 시신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 두고 찍었는데, 유족들에게는 물론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지만 가족들의 애도하는 마음과,
역사에 짓밟힌 징용자의 최후의 모습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찍었습니다 어려운 경우라 할지라도 기록할 것은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 지난번 일본 미야자키에서 열린 제1회「다큐멘터리 포토 페스티벌」에 참가하신
작품이「동토의 민들레」였지요? 어떤 작품입니까?
윤:네. 「동토의 민들레」는 사할린에서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며 허망하게 일생을 보낸 한국인 징용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면서 석탄 증산에 박차를 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일본은
동조동선과 내선일체라는 강변을 앞세워 수많은 한국청년들을 사할린의 탄광지대로 투입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소위 성스러운 전쟁 완수라는 명분을 위해
한국의 젊은이들이 혈육과 헤어져서 징용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러나 전쟁이 끝나 사할린이 소련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고, 일본인들의
귀국문제가 제기되자 일본정부는 그때까지 창씨개명까지 강요하며 같은 일본인이라고 강조해 왔던 징용자들을 귀환자 명부에서 제외시켜버렸던 겁니다.
'제3국'인 한국인의 귀국문제에 일본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 기본입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할린에 내버려진 채, 가혹한 노동과
생활고에 신음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와야 했던 겁니다. 나는 1981년부터 세 차례 사할린을 방문해서 많은 한국인 노인들을 만났습니다. 2,
30대의 젊은 나이에 끌려갔던 청년들이 벌써 백발이 성성한 6, 70대의 노인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의 거친 손과 달아빠지고 일그러진 손톱은
바라보는 것조차 끔찍스러울 정도였습니다. 「동토의 민들레」는 그처럼 모진 운명의 손에 희롱되어 사랑하는 부모 처자와 헤어져서 일생을 허무하게
마감하게 된 불행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일본에서 전시했을 때 관람자나 매스컴에서의 반향을 보면서 새삼 사진의 힘을
느꼈습니다.
김: 숙연해지는 말씀입니다. 역사를 바꿀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역사의식을 갖고
현실을 기록하는 것이 사진가의 사명이 아닐까요? 유명한 사진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그림이나 음악으로부터 재능과 영감을 받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작품은 문학성에 특징이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어떻습니까?
윤:누구나 버릇 같은 것이 있지요. 나는 젊었을 때
소설을 쓴 경험이 있습니다.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그만 두게 되었습니다만, 1950년도에 신춘문예에 입선해서 작가인생을 꿈꾼 시기도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마 내 사진에도 문학적인 방법론이 버릇처럼 끼어 드는 일이 있을 겁니다. 전체 플롯을 구성하는 데에는 플러스가 되는 부분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런 것이 순수한 의미의 영상표현을 어렵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괴롭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서 보여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오히려 사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직 발표를 하지 못한 사진들의 경우에서도
그렇습니다.
김: 원래 정치학을 전공하셨던 것 아닙니까? 문학을 하셨다는 것은 의외입니다. 그런데
신춘문예에 입선하신 작품은 어떤 내용입니까?
윤:「향리鄕里」라는 제목의 소설이었습니다. 벌목을
둘러싸고 산골마을에서 일어난 갈등을 그린 작품입니다.
김: 지금까지 매년 한 차례도 거르지 않고 개인전과 사진집을 펴내셨지요? 사진집 만도
10여권이 넘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테마를 찾아 찍고 또 발표하고 계신데, 어디서 그런 활력이 나옵니까?
윤:그 동안 생각하고 찍어온 것을 묶어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손을 놓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김: 가령 이주자 가족을 찍은 도로디어 랭의 사진은 FSA의 수많은 사진 가운데서도
당시의 미국의 경제적 현실을 가장 웅변으로 말해주는 사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많은 사진가들이 단 한 장의 사진으로 이름이 알려진 경우가
많습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하나의 주제를 여러 장의 사진으로 보여주는 피쳐의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윤:내 경우는 파인 아트나 뉴스사진처럼 단 사진으로
찍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많은 장면들을 엮어서 하나의 메시지로 완성시키는 그런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문학 형식으로 말하자면 중편이나
장편소설 같은 것이라고 할까요.
김: 사할린 취재했을 때는 불면증과 복통에 시달려 무척 고생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작품 스타일의 문제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현실 가운데에서 어떤 문제를 찾아내고자 하는 태도 - 집념이 바로 선생님의 활력의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윤:좀 거창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사진가들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보다 낳은 가치를 찾아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겠다는 사명감을 갖아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오랜 시간에 견디어내는 그런 가치와 힘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김: 사진이 언어 이상의 힘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이나 현실을 사진이 실제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윤:물론이지요. 눈은 귀나 입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합니다. 20세기초 미국에서 열악한 근로조건 아래에서 노동하는 청소년들을 촬영한 루이스 하인의 사진은 법을 고쳐만들게 했습니다. 그밖에 한 장의
사진이 현실을 바꾸어놓은 경우도 많지요. 「동토의 민들레」를 일본에서 전시하기 전에 마이니치신문이 그 사진들을 특집으로 다룬 적이 있었는데, 그
기사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아 일본정부가 공식적으로 사할린 동포에 대한 공동조사를 한국정부에 제안했고 실제로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귀국문제도 해결되고 많은 동포들이 고국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사진이 어떠한 현실에 대해서 정치 이상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김: 「동토의 민들레」, 「내세를 기다리는 사람들」,「베트남 -전후 20년」,「탄광촌
사람들」…. 그 어느 것도 고통받는 사람들을 찍은 작품입니다. 그들의 절망적인 현실에 카메라를 겨누는 일에 망설임은 없었습니까? 그들을 찍은
후, 돌아오면 선생님에게는 전시와 사진집과 상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선생님께서 찍으신 그들은 그대로 그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자신이 현실을 바꿔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힘을 가진 정치를 떠나 카메라를 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혹시 무력감 같은 것을 느껴보신
적은 없으신가요?
윤:사진 찍으면서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갖고는
있지만, 사진 찍는 행위 자체에 대해서는 주저하거나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 정치의 힘으로 모순된 현실을 좀더 빠르게 바꾸어 놓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해 나가는 휴머니즘이라든지 인간이 가져야할 도덕적인 선善과 같은 그런 가치를 획득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사진 쪽이
훨씬 긴 생명력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를 긴 눈으로 바라본다면 어떤 문제에 대해서는 사진 쪽의 힘이 훨씬 크고 넓은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 얼마 전 한 시간 짜리 TV 인터뷰에 나오셨지요. 정치 문화 사회 경제 등 모든
분야의 석학들이 출연하는 프로그램에 사진가가 출연하는 것은 이례적이었는데요. 거기서 지금까지 자신이 찍은 사람들에 관해서 대부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것은 선생님께서 그들을 단지 사진적으로 '착취'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삶의 한 순간을 공유했고 그 순간들을
가슴에 담아두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선생님께서는 그들을 그곳에 버려 두고 온 것이 아니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한 사람의
인간으로써, 또는 사진가로서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신 적이 있습니까?
윤:지금까지 나는 지구상의 여러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다양한 분야에서 일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의 폭을 넓혀 주었고 사진을 하는데도 많은 도움이 된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날 일을 통해서 알게된 사람들로부터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그런 점에 있어서는 혜택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타고난
체력에는 지금도 웬만큼 자신이 있습니다.
김: 뛰어난 사진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갖고 있습니다만, 선생님께서도 선택하는 대상이나
주제, 표현 방법에 독자적인 스타일 같은 것을 갖고 계시지 않습니까?
윤:사진가로서 아직도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사진을 보는 눈과 귀가 조금 열렸을 뿐이지요.
김: 쉽게 '대가'가 되어버리는 것도 문제입니다만, 선생님의 경우는 '이나 노부오'
상으로 이미 작품수준이나 독자적인 표현 스타일이 평가된 것 아니겠습니까? 요즘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요.
윤:역사 가운데 여성이 맡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런
문제를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천착해 보고 싶습니다. 「일하는 부부들」이나 「어머니의 세월」같은 시리즈를 찍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그들의 근면과 절약, 강인한 생활력, 자신을 희생시키며 가족을 감싸는 숭고한 정신 같은 것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베트남 - 전후 20년」을 찍으면서도 월남 여성들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는 월남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 수많은 사진을 찌고 그 가운데에서 어떤 프레임을 선택하실 건데요, 그 기준은
무엇입니까?
윤:초기에는 사진 자체의 미학적인 요소들에 중점을
두었지만 지금은 그 사진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가, 그 피사체를 통해 얼마나 많은 메시지를 전달 할 수 있는 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소설적인 구성을 하는 버릇 때문에 사진을 고르는 과정에서 좋은 사진을 빠트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김: 촬영을 끝내고 나서 그때 이런 장면을 찍었더라면 하고 후회하신 적은
없으신가요?
윤:전체를 편집하면서 이런 장면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걸, 왜 그때 그런 생각을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촬영에 열중하다 보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분석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진가에는 두 가지 타입이 있다고 합니다. 그림을 만들고 셔터를 누르는 사람과 우선 돌진해서 찍어놓고 그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사람. 어느 쪽이냐 하면 나는 성격적으로 후자 쪽입니다.
김: 전에는 크로핑을 하셨는데 최근에는 스트레이트로 인화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
변화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윤:찍을 때 조금 더 프레이밍에 신경을 쓰기 때문이
아닐까요? 화질의 문제도 있었구요. 하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지금도 크로핑을 합니다. 어차피 한정된 시공간을 임의로 잘라내는 것 아닙니까.
크로핑에 관해서 극단적으로 금욕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사진가도 있지만, 내 경우에는 그 문제를 그다지 심각한 것으로 생각하진
않습니다.
김: 소위 스트레이트 사진을 하는 사람 가운데 경직된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은 최근
젊은 사진가들 사이에서 소위 만드는 사진이라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던 일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었습니다만, 그런 현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윤:예술표현에서 단 하나의 방법이나 가치는 있을 수
없지요. 다양할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사진 가운데에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사진들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사진을
모두 부정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사진이 어떤 목적에 봉사하는가에 따라 평가의 기준도 달라져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김: 유럽이나 일본과 같은 나라의 사진미술관들에 많은 사진이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보고
정말 부럽게 생각했습니다. 우리는 예술작품으로서는 물론이고 역사적인 사건을 사진으로 기록하거나 보존하는 일에 너무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지금 웬만큼 사는 나라에서 공립의 사진미술관 하나 갖고 있지 않은 나라도 흔치 않을 겁니다. 우리 나라에선 '사진영상의 해'라는
것도 있었고, 사진박물관을 건립한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그 일은 지금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혹시 들어보셨습니까? 지금까지 많은 사진을 찍어
오셨는데, 나중에 그 사진들을 어떻게 하실 건가요?
윤:사진박물관에 관해서는 그 뒤로 아무 얘기도 못
들었습니다. 사진미술관 건립을 위한 기초적인 연구장치를 만드는 일, 전국에 흩어져 있거나 묻혀있는 사진작품과 관련자료들을 수집하는 일, 그리고
이벤트로는 '사진 역사전' 하나면 충분했습니다. 모처럼 국가가 마련해준 기회를 보잘 것 없는 행사들로 끝내버린 것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만일
사진미술관이 건립된다면 내 사진을 모두 그곳에 기증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빨리 건립되기만을 바라고 있습니다. 작고하신 분들의 작품을 수집하는
일이나 보관하는 일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고, 지금으로서는 정부 당국도 사진의 역사자료나 문화적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제는 범국민적인 사진운동이라도 전개해야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결국은 그런 일은
민간보다는 정부가 나서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중앙보다는 지방정부에 더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김: 지금 전국 30여 개가 넘는 대학들이 사진학과를 두고 있고, 그 중 많은
학생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매체여건이나 사진환경 속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살아가는 일은 쉽지
않지요. 다큐멘터리를 지향하는 학생들에게 선배 사진가로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윤: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에 입각해서 사진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사관 자신의 가치관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반드시 역사에 남을 훌륭한 사진가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이전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세계가 좁아졌어요. 앞으로 사진은 세계성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맞게 세상을 넓고
멀리 바라보고 한 시대를 기록하는 사진가가 되겠다는 사명감과 자부심을 가져야 하겠지요. 요즘 사람들은 단기적인 결과를 챙기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데, 한가지 주제를 찾아 정하고 면 년이고 파고든다면 틀림없이 어떤 확실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람들의 관심을
끌만한 문제들이 널려있지 않습니까?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그런 문제들을 찾아야지요.
김: 정치의 중심에서 떠나신 것이 언제인가요?
윤:1979년, 사진을 시작하는 것과 같은 시기입니다.
우리 나이로 53살 되던 때였지요.
김: 3, 40대에 대학교수와 신문사 편집국장, 외교관 등을 지내셨지요? 한국이 가장
역동적인 변화와 발전을 체험한 시기에 그 격동의 중심에 계셨는데, 보통 경우라면 '지금부터' 라고 할 수 있는 시기에 권력의 중심에서 떠나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했던 사진가로서의 길을 선택하셨습니다. 지금 후회는 없으십니까? 언제부터, 어떤 동기로 사진을
시작하시게 되었는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윤:한번도 후회를 해 본적은 없습니다. 견디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되돌아 생각해보니 만약 내가 계획된 출발을 했더라면 사진가가 되기 위한 기초적인 프로세스를 짧게라고
준비했을 텐데 그렇지 못해 10년 정도 마음의 방황을 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진을 찍는 것만 생각하고 그것만 공부를 했었는데 보는 것에도 중점을
두었더라면 결과가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후회는 아니고 좀더 좋은 기대를 바라는 그런 욕심이랄까 그런
거지요.
김: 허지만 선생님께서는 누구보다도 많은 사진을 보고, 많은 책을 읽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본 사진 가운데에서 특별히 감명을 받은 작품이나 사진집이 있습니까?
윤:옛날부터 책 욕심은 많았던 편입니다.
1981년인가요.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움에서 유진 스미스가 찍은 사진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작품들만 모아서 꾸민 기획전을 보았습니다. 천정에서부터
벽면까지 전시장 내부 전체를 검은 페인트로 칠을 했더군요. 그리고 깜깜한 전시장에 스미스 자신의 메시지가 적힌 패널과 작품들에만 스포트라이트가
비추어지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온 신경이 사진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그런 디스플레이였습니다. 사진을 보고 난 후에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진을 시작하고 지금까지 많은 사진전을 보았습니다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시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이전부터 사진집을 통해서 감명 깊게 보았습니다만, 그의 오리지널 작품을 바로 눈앞에 두고 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습니다.
김: 사진가마다 자신의 스타일이 있지요. 선생님의 경우는 초기에 이미 평가를 받았고,
선택하는 대상이나 주제와 표현에 있어서 독자적인 스타일 같은 것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합니다만.
윤:사진가로서 완성시켜야할 목표 같은 것을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하는 데에 두고는 있습니다만, 이제 겨우 사진을 보는 눈과 귀가 열렸을 뿐입니다.
김: 요즘 어떤 일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윤:역사 가운데에서 여성이 맡은 역할이라고 할까요?
그런 것을 사진이라는 관점에서 천착해보고 싶습니다. 「일하는 부부들」이나「어머니의 세월」같은 시리즈들을 찍으면서 우리 어머니들의 희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그들의 근면과 절약, 자신을 희생시키며 가족과 세상을 사랑으로 감싸는 숭고한 정신 같은 것을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베트남- 전후 20년」을 찍으면서도 월남 여성들의 역사를 말하지 않고는 월남의 역사를 얘기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 지금 전국 30여 개가 넘는 대학들이 사진학과를 두고 있고, 그 중 많은
학생들이 다큐멘터리 사진을 전공으로 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과 같은 매체여건 속에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로 살아나가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다큐멘터리를 지향하는 학생들에게 선배 사진가로서 어떤 말씀을 들려주시겠습니까?
윤:다큐멘터리 사진가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경제적인 면에서 어려운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올바른 시대정신에 입각해서 사진가로서 사명감을 갖고 자신의 역사관 자신의 가치관으로 한 시대를
바라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놓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다면 반드시 역사가 기억할만한 사진을 남겨놓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의
사진은 세계성을 띠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국제화 시대에 맞게 세상을 넓고 멀리 바라보고 한 시대를 기록하는 사진가가 되겠다는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겠지요.
윤주영 홈페이지 :http://www.yoonchuyung.pe.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