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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2-12-03 14:51:44, Hit : 956, Vote : 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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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다르


펠릭스 나다르(Nadar, 1820 ~1910)

20세기의 위대한 초상 사진가를 꼽으라면 서슴없이 말할 수 있는 사진가가 바로 나다르다. 
그는 사진이 발명된 이후 초상사진이 상업적으로 급증하던 1880년대 중기에 초상사진의 예술성을 최고조로 보여 주었던 인물이다. 물론 그의 사진이 나다르 자신이 직접 찍었다고 분명히 말할 수 는 없지만, 그가 경영하는 ‘나다르 사진관’에서 제작된 일련의 초상사진은 현대에 와서도 그 가치를 잃고 있지 않다.

나다르의 사진관은 분업체계에 의해서 경영되어 졌다. 여기에는 사진사, 암실기술자, 음화 수정 화공, 조명연출, 배경장식, 등으로 일을 분담하고 있었다. 나다르 자신은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사진에 서명을 하거나, 사진 찍히는 사람의 포즈를 잡아주는 일 이외에는 거의 하는 일이 없었으며, 그나마 항상 포즈를 잡아 주는 것도 아니었다.

‘나다르사진관’의 사진의 대부분은 사실 그가 고용한 벨기에 출신인 발터 담리(Walter Damry)가 찍었다. 나다르는 차라리 고도로 훈련된 스텝진을 거느리는 기획자이자 연출가였다는 측면이 더 가깝다 

나다르가 직접 찍었는지 아니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 영화의 시스템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영화는 감독의 예술이다. 영화 한편이 제작 되기 까지는 많은 스텝이 필요하다. 이들 스텝진을 유기적으로 조율하여 한편의 영화를 훌륭히 만들어 내는 일은 일차적으로 감독의 몪이다. 즉 나다르는 그 당시 오늘날 감독이 역할을 한 셈이다. 
당시의 사진관의 이러한 집단적인 창작 형태는 고객들이 화가에게서 자신의 초상화를 의례 할 때와는 다른 성향이었다. 초상사진을 찍을 때는 오히려 어떤 사진관의 이름 때문에 그곳으로 몰려 들었다. 

실 예로 저 머나먼 페루에서도 사진가 먼로이는 자신이 ‘파리, 나다르 사진관의 특파원’ 이라 속이면서 자신이 찍은 명함판 사진 앞에 나다르의 머리 글자 ‘N’을 주홍빛깔로 새겨 넣곤 했다. 

그 밖에도 지방의 많은 사진관들에도 나다르의 사진관을 흉내내고 있었는데 이후 나다르는 자신의 이름 특허출현을 내고 자신의 상표를 도용한 여러 사진관들에 소송을 걸기도 하였다. 이는 곧 고객들이 특정 사진가 앞에서 찍는 일보다는 믿을만한 제작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사진관을 더 선호 했다는 뜻이다. 

나다르의 이와 같은 사진관 시스템은 이후 세계주요 도시의 사진 관계 기업의 한 전형이 되었다. 급증하는 초상사진의 수요와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서 이러한 시스템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당시 사진가들은 초상사진에 수정을 가하는 문제를 으레 해야 하는 사항으로 되어 있었다. 고객들은 자신의 용모가 카메라에 의해 생긴 그대로 거칠게 기록되기보다는 보다 멋있고 부드럽게 수정되어 흠집이나 주름살 따위가 지워지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진가들 에게는 진저리 쳐지게 고생스러운 것이 였기 때문에 소문난 대형 사진관들은 흔히 음화에 수정을 가하거나, 혹은 인화된 상태에서 채색을 하는 일을 별도로 맡아서 하는 화공들을 고용하곤 했다. 나다르는 가능하면,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고이 적으로 수정하려 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잘 아는 예술가 친구들의 얼굴을 찍을 때에 그러했다. 상업사진관을 꾸리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는 예술가를 자처 했기 때문이다.

[Beno-Hermogaste Molin 1858]

[Jean-Fransis Millet 1856]
그의 본명은 가스파르 펠릭스 뚜르나숑(Gaspard Felix Tournachon)이지만, 오래 전부터 사용해오던 나다르(Nadar)라는 필명을 그대로 자신의 사진관 이름으로 부르고 그의 사진관은 곧 그와 친분이 있는 지식인과 예술가, 사회 각 계층의 유명 인사들의 모임을 가지는 회합장소 역할 까지 했다. 실재로 살롱전에 출품할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했던 인상파 화가들은 그들의 첫번째 전시회를 1874년 4월15일부터 한달 동안 마들렌느 성당 근처에 있던 나다르의 사진관에서 열었다.  

초상사진이 본격화되어 대중적 인기를 누리게 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신흥 부르주아 계급이 급성장하면서 자신의 신분을 과시하고자 초상화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고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다량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는데 공급이 따라가 주질 못했다. 결국 사진은 이러한 사회적인 수요에 매우 적절한 매체로 자리 잡았고, 화가에서 초상사진가로 전향 해서 큰돈을 버는 예가 많아 졌다. 


[Dore 1854]

[Auguste Vitu 1860]
그러나, 여전히 초상화는 값비싼 고급 상품 이였고, 평민들 중에서도 재정적으로 부유했던 사람들이 초상화를 소유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이제 막 등장한 현대적인 발명품인 값싼 초상사진에 자신들의 욕망을 투사한다. 대중들은 현재 신분에서 한단계라도 끌어올리려는 열망에 사로잡혀 초상사진의 새로운 고객으로 등장하였다. 

이와 더불어 당시 유아사망 율이 증가하고 전쟁터에 나간 가족, 친지, 친구들과 오랜 시간 헤어져 있어 죽음에 대한 공포감이 엄습하고 있었기 때문에 초상사진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증가하였다. 

1854년 프랑스의 앙드레 아돌프-으제느 디스데리(Andre Adolphe-Eugene Disderi)에 의해서 특허를 받은 명함판 사진(Carte-de-Vistite)은 급증하는 대중의 수요에 매우 적합한 것 이었다. 

사진의 주요 고객으로 이제 대중들이 되었다. 더 이상 지식인, 예술인, 부르주아들의 장식품으로서의 초상사진에서 벗어나 명함판 사진으로 고객 층이 바뀌었다. 

따라서 명함판 사진은 여러 분야의 사진가 들로 하여금 우선적으로 이익 추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그러나 한편 초상사진의 대중화는 저질의 초상사진이 다량으로 유포되는 결과를 낳았다. 상업적으로 사진이 성공하자, 초상사진으로서의 예술적인 심미적 가치는 찾아볼 수 없었다. 

조명의 효과와 모델이 되는 사람의 자세나 표정 등은 천편 일류적 이였고, 그로 인해 그 사람의 성격을 보여주는 노력 없이 단지 기록적 목적으로 사용되어졌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 한 장에 주의를 기울일 틈 없이 단지 찍기에 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에 비해서 나다르는 예술적 향기가 있는 초상사진을 제작하려 하였다. 이는 대중 보다는 오히려 지식인과 상류사회의 취향에 맞는 고품질의 사진을 제작하려는 그의 의도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사진관에서 제작된 사진은 유명 인사들이 대분분이었으며, 가격 또한 비싼 편이였다. 


[Baudelaire 1856-58]
본래 그의 직업은 신문 풍자 만화가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3세때 풍자 만화가 금지되어 사진가로 전업하였다. 풍자 만화가로 활약할 당시 인물의 성격을 집약적으로 들어내는 얼굴의 특징을 포착해야 했기 때문에 풍자 만화가였던 때의 솜씨를 발휘하여 사진을 찍을 때에도 모델이 되는 사람들의 개성을 한껏 살려 창조적인 목적으로 초상사진을 제작하였다. 

[Sarah Bernhardt 1865]

[Sarah Bernhardt 1861]

[Self-Portrait as an Aeronaut  1863]
당시 초상사진은 자신을 과시하려는 생각에 귀족 풍의 화려한 장식이 천편일률적으로 적용되고 있었지만 그의 사진 스타일은 단순하고 솔직했다. 보통 자신의 친구들을 단일한 색의 배경으로 깔고 높은 천정 아래 세워 신체의 4분에 3의 크기로 인물을 찍었다. 포즈는 좀 억제되고 얼굴은 개성이 잘 드러나도록 직접적으로 표현했다. 그것은 그가 대부분의 모델을 친하게 알고 있었다는 데에도 연유하지만, 그보다도 그의 관찰력의 예민함과 예술적인 가치관에 힘입은 바 컸다. 

다음의 글은 나다르의 사진촬영에 대한 생각이다 잘 나타나 있다.    

"사진이론은 단 한시간이면 배울 수 있고 기술적 기술은 단 하루면 익힐 수 있다. 그렇지만 가르쳐서 될 수 없는 것은 빛을 읽는 감각이다 누구도 사진 찍히는 사람의 개성을 어떻게 포착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지는 않는다. 한 인간의 보다 내면적이고 심오한 차원에서 담은 사진을 제작하려면 즉시 그의 정신세계로 뛰어들어가 그의 기질을 파악해야 한다." 

이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감각을 중요시 여기고 이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중요시 하였다. 이는 당시의 낭만주의 예술관과 이제 막 시작 되는 현대화의 출현 즉 인상주의 회화정신에 영향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다르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적인 일꾼 이였다. 

초상사진을 찍는 가운데도 여전히 삽화와 소설 집필을 

그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실험을 거듭했다. 

그는 전기 조명으로 촬영하는 최초의 사진가들 중 

한 사람이었고, 파리시의 지하묘지 즉 카타콤

(catacomb)과 하수도를 사진으로 기록했고, 

게다가 1858년에는 기구를 타고 올라가 사상 최초로 

공중에서 촬영하기도 했다. 


[Charles Baudelaire in an armchair 1855.]

[Mme Marie Jamet 1860]
그는 항공술에 광적으로 사로잡혔다. 

세계에서 가장 큰 비행선을 제작하여 

‘거인(Le Ge’ant)이라 이름 붙이고, 

2층 객실을 갖출 정도로 대형인 이 기구를 

타고 독일 하노버 상공을 누비다가 조종에 

실패하여 크게 다쳐 죽을 고비까지 넘겼으나, 

여전히 친구들과 25마일 상공으로 탁트인 

교외를 누비고 다녔다. 그는 비행선의 미래는 

동력으로 추진하는 비행장치에 달렸음을 깨달아 

그 실험을 장려하는 협회를 조직했다. 

그 회원 가운데 한 사람은 소형 증기기관으로 

비행하는 헬리곱터를, 1860년 유행의 거리 카퓌신 

대로에 새로 문을 연 나다르의 넓은 사진관에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Georges Sand 1877]
사진관 건물 전면을 가로질러, 밤마다 가스등으로 빛나는 나다르(NADAR)라는 글씨 모양의 조명이 설치되었다. 이 사진관의 안팎은 붉은색으로 도장 되어 있었다. 그는 항상 붉은색 옷을 입고 다녔는데, 이것은 자유주의적 공화 좌파에 대한 자신의 공감을 표명하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자유주의자로서의 기질은 초상사진으로 상업적 사진의 세계보다는 예술가적 기질을 바탕으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자신의 작품에서도 예술적 심미 감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그도 급증하는 유사한 형태의 사진관과 대량의 값싼 사진의 유포는 결국 많은 양의 초상사진을 제작하게 만들면서, ‘나다르 사진관’의 질을 희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글: 이영욱(연변대학교 예술대학 사진과 교수 bonda@intize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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