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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3-11-18 22:17:54, Hit : 1436, Vote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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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펌]티어스 클리어링 에이전트



딱히 인터넷이 아니더라도 테크놀러지는 언젠가 거대 소통구조를 만들어내었을 것이지만.
진짜로 지식권력에 대항할 만큼의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현상/상황이 닥칠때마다 정말로 나는 행복을 금할 수 없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블로거 류의 현상들은 나에겐 거의 유일한 희망이자 즐거움이다.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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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거(blogger)와 평론가



김장언 (문화연구)

최근 블로그(blog)의 열기가 뜨겁다. 게시판을 중심으로 한 홈페이지 및 다양한 커뮤니티 사이트가 점점 소원해 지거나 혹은 제도권으로 편입되기 시작하자 이제 블로그의 시대라고 한다. 웹(web)에다 기록(log)한다는 의미인 웹로그(weblog)의 다른 이름이기도 한 블로그는 얼핏 보면 조악한 게시판 같기도 하지만, 용이한 참여방식과 감각적 디자인,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방식 등으로 주목받고 있다.

블로그는 기존 웹 기반 프로그램들이 보여주었던 까다로움과 번거로움을 사용자들에게 부가하지 않으면서도 어느 정도 자신의 표현 욕구를 펼칠 수 있도록 해결해 주었다. 물론 블로그 방식도 문맹의 차원이 웹 기반 프로그램 언어까지 확장된다면 매우 조악한 것으로 평가받을 수 있지만, 지금 현 시점에서 html 언어 자체가 망막한 일반 유저들에게는 매우 진일보한 대안적 매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1인 1미디로 통칭되는 블로그가 만들어낸 사회적 파장은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뚜렷하게 부각되고 있지는 않다. 사실 우리는 블로그 이전에 이러한 대안 매체의 가능성을 현실정치에서 직접 체험했고 그 가시적 성과까지 얻어냈다. 그렇기 때문에, 블로그를 통해서 좀더 자극적인 어떤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매체는 기대만큼 뚜렷한 주목을 받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이라크 전쟁 당시 살람 팍스(Salam Pax)의 블로그가 보여주었던 진실의 이면과 새로운 글쓰기 그리고 소통의 확장 가능성은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블로그를 통해 소통되는 글쓰기의 방식은 기존 웹 기반의 매체가 보여주었던 방식과는 다른 어떤 지점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 같다. 기존 웹 기반의 미디어가 고전적 의미의 매체가 지향했던 방향을 따라가면서 웹 이라는 매체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고자 한다면, 블로그는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표현의 자유를 실현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최근 미국 법원은 블로그에 올려지는 글을 포함한 모든 컨텐츠에 표현의 자유를 인정한 수정헌법 1조를 적용한다고 발표했다. 그래서 블로거들은 더 이상 자신의 블로그에 올려진 글들에 대해서 책임 질 필요가 없어졌다. 미국 법원의 관점은 블로그가 개인 뉴스 사이트라고 할지라도, 고전적 의미의 언론 매체와 같은 책임을 블로그 콘텐츠에 적용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표가 인신공격과 근거 없는 정보의 유통이라는 악영향을 허용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표현과 언론의 궁극적 자유라는 의미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예견하고 있다.

ꡐ블로거와 평론가ꡑ라는 제목 아래 블로그에 대한 이러 저러한 내용을 쓰는 이유는 이제 글쓰기의 민주주의가 완벽하게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평론의 위기가 닥쳤고 평론가라는 것은 종말을 고할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평론의 위기는 블로그 이전에 이미 우리 앞에 있었다. 이러한 위기에 대한 진단 중 단골로 등장하는 것은 비자격 평론가의 남발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문화 민주주의 가능성과 발화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 문화현상을 간과하는 것이다. 제도적 장치에 의해서 평론의 활성화 혹은 미술계 담론의 소통 방식이 활성화 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추상적 의미의 평론의 문제를 고민하기보다 우리는 이제 미술계의 글쓰기에서 소통되는 언어의 위치는 어디이며, 무엇을 소통시킬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미술 평론의 현장은 단연 개인전 도록에 있다. 작가는 일종의 사례금을 지불하고 평론가로부터 자신의 작업에 대한 평문을 받는다. 이러한 관행 역시 조금씩 변모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평론가들은 이러한 글쓰기를 통해서 자신의 경제 활동을 지속하고 자신의 지위를 확인한다. 나는 이러한 관행에 대해서 적잖은 불만이 있었기 때문에, 개인전을 앞둔 젊은 작가들에게는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기를 종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가들은 이러한 평문의 한계를 더욱 직접적으로 파악하고 있지만, 전시를 앞두고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객관적인 글쓰기를 접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작가들의 반응이 시사하는 바는 전시 도록에서 만나게 되는 서문이라는 글쓰기는 전시를 여는 작가만을 향해 열려진 글쓰기라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관행은 미술계 담론의 언어를 권위에 기대어 미술계 내부로만 지향하게 하는 의도로도 읽혀진다. 그래서 그런지 전시회 도록이 어떤 암호와도 같이 쓰여 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 다른 미술계의 글쓰기, 소통방식은 최근 러쉬를 이루고 있는 대중을 위한 미술서적 출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요즘처럼 대중적인 미술 서적 출간이 활발한 때가 없다. 출판 시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진입하게 되면 어린이를 위한 도서와 더불어 화보가 출판시장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된다고 한다. 더욱이 이러한 화보의 판매량으로 그 사회의 문화적 수준을 평가할 수도 있다는 출판 시장계의 속설을 떠올려 본다면, 최근 한국에서 부는 대중 관련 미술 서적의 출간은 의미심장한 문화현상이라고 까지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중을 위한 미술서적의 대부분은 고급문화의 하나인 미술을 일반 대중에게 좀더 쉽게 이해시키고 그로써 일반 대중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한다는 취지에서 기획된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 이면을 좀더 살펴보면, 그 소통의 방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 볼 여지를 남긴다.

최근 출간되고 있는 미술 대중서적의 대부분은 의미 있는 취지에도 불구하고, 그 이면은 고급예술과 대중예술 혹은 대중과의 간극을 더욱 고착화 시킨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다. 대부분 책들은 고상한 것들에 대한 미적 경험을 강요함으로써 고급예술로서 시각예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한다. 철저한 문화상품 혹은 문화생산물로서 이러한 도서는 고전(古典)의 재생산이라는 교묘한 복제의 메커니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러한 메커니즘에 따라 아름다움에 대한 고전(원본)의 정당성을 확인시키고, 고전(원본)의 재조합을 통해 그 속에서 상품의 논리를 정당화하며, 문화상품으로서 현재 글쓰기의 위치를 묵인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 속에서 문화적 경험이라는 모호한 가치와 새로운 삶의 방식을 선도한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글쓰기의 소통방식은 시각 예술을 낭만적으로 경험하게 함으로써 현대 시각문화현상에 대한 어떠한 답도 우리에게 제시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러한 소통방식이 갖는 최대의 문제점은 시각예술에 대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세계관을 창조할 수 있는 역동적 대중 혹은 집단을 만들어 내기보다, 자본주의적 유통구조에 의해서 구조화된 문화적 세계관, '고상한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다'라는 세계관 속으로 대중을 초대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가게 하는 즉, 이미 구조화된 세계관 내부에 대중을 배열하게 한다는데 있다.

다른 형식의 글쓰기 방식도 존재하는데, 소통의 가능성을 처음부터 상정하지 않고 무작정 써내려가는 글쓰기도 있으며, 문화 민주주의와 대중적 글쓰기의 의미를 오해하고 배설적 언어를 내뿜는 경우도 있다. 다른 방식은 중세의 필사가를 자처하고, 경전의 해석과 주해에 몰두하는 경우이다. 그 외 많은 다양한 글쓰기와 소통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에서 미술이 소통될 수 있는 언어 형식을 갖으며 건전한 효과를 생산하고 있는지는 명확히 들어나고 있지 않다. 우리는 평론가의 평문이 미학적 투쟁의 영역에서 치열한 담론의 논쟁을 형성했던 경험을 그다지 갖고 있지 않다. 논쟁의 형식은 대부분 인신공격으로 치닫거나 혹은 평행적 논의구조만을 만들었다. 그리고 미술계에도 일부 베스트셀러 작가가 있긴 한데, 그들이 만들어 내는 소통의 방식은 개인의 경제적 이득 이상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러한 지형의 심리학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대부분 심증만 있고 확증은 없다. 미술계에서 소통되는 글쓰기는 미술계라는 구체적인 경험적 사회관계 속에서 만들어지기보다, 미술계 혹은 미술인이라는 모델 혹은 상징(emblem)을 통한 징후들로 구성된 문화적 경험을 통해 생산 유포된다. 그래서 미술계 내부의 문화적 경험을 공유할 수 없는 외부인들은 미술계 내부의 글쓰기에 대해서 경험할 수 없다. 좀더 무리하게 확장해 본다면, 현대 미술 자체를 경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 징후적 경험들이라는 것은 미술계 내부로 진입하기 위한 사소한 경험들 혹은 미술계 내부의 사소한 경험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입시 미술학원 난로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거나, 대학원 수업을 위해 슬라이드 촬영했던 경험 혹은 전시 오프닝 파티에서 와인을 마시며 유학생활을 추억하는 것 등이다. 오히려 이정도면 순진한 것이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름을 미국식으로 읽어가며 농담하는 경우까지 확장된다면, 이들이 경험하고 유포시키는 미술계 혹은 미술계의 글쓰기는 미학적 투쟁의 장이 아니라 유사한 문화적 경험을 공유한 이익집단에 불과하다. 그래서 대중을 만나는 방식도 왜곡될 수밖에 없고 더군다나 우리의 글쓰기는 해독 불가능한 혹은 소통 불가능한 어떤 미지의 언어가 된다.

블로그라는 소통구조 역시 문화적 경험이 관통하는 일부 집단의 언어유희라고 말할 수도 있다. 문화적 경험은 계급과 집단, 세대를 뛰어넘어 복잡한 의미와 감정의 구조를 관통하게 한다. 동일한 문화적 경험은 경험적 접촉이 없을지라도 연대감을 부여하며, 어떤 문화적 생산물을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이러한 문화적 경험은 동시대 사회에서 공동체 혹은 집단의 기초를 제공해 준다. 그러나 그것이 제공하는 것은 구체적 생활이 아니라 오직 모델이나 상징 혹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우리는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Dean MacCannell, 1975) 그렇다면 미술계의 이러한 현상은 어쩌면 더욱 철저히 현대 사회의 전형적 집단으로써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다. 베버는 파국으로 치닫는 산업사회의 발전을 목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경고 했다.

'누가 미래에도 이 겉껍질 안에서 살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엄청난 발전의 마지막에 전혀 새로운 예언자나 혹은 옛 정신과 이상의 강력한 부활이 있을지, 아니면 - 이 둘 다는 아니고 - 일종의 발작적 오만으로 장식된 기계화된 화석화가 있을지 누구도 모른다. 만일 후자의 경우라면, 물론 이 문화발전의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옳은 것이 될 것이다. 즉 영혼 없는 전문가들과 무정한 사상가들이 그들이다.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인류가 전례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할 것이다.'(p. 145-146, 막스 베버,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블로그에서 소통되는 언어형식이 지금 미술계의 언어형식과 다른 가장 큰 차이점은 제도가 만들어내고 유포하며 권위를 부여하는 언어형식을 따르지 않는다는데 있다. 이들의 언어 형식은 다소 거칠거나 혹은 자기 연민적일지라도 소통을 위한 한 형식으로 그 모습을 자유롭게 변형시킨다. 그래서 그들의 언어 형식은 편안하며, 우리에게 잔잔한 감동을 준다. 물론 모든 블로거들이 쓰는 글이 그렇지만은 않다. 그러나 우리가 미술계에서 만나게 되는 언어 형식은 스타일화된 집단의 철저한 문화적 경험에 의해 만들어진 언어 양식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언급이 미술계 담론의 권위 자체를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베버가 말한 것처럼, 한 순간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나 그 언어 자체가 권위적 힘을 발휘하기를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서 만나게 되는 소통의 방식은 영혼이 없거나 무정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제도가 만들어낸 언어의 권위는 권위가 아닐 수 있으며, 대중은 - 물론 대중 미술서적이 유래 없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긴 하지만 - 그 권위를 용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거부의 가장 수동적이며 직접적인 표현은 바로 무관심이기 때문이다.






zabel (2003-11-22 04:40:07)  
-----------------절--------------------취---------------------선----------------
통상의 행위나 글쓰기에 관해서, 단 한번도 말리거나 제재를 가한적이 없습니다만.
언어의 큰 목적중 하나가 소통을 위한 것이라면, lurker 께선 비루하고 못난 시민을 위한 번역문/사유서를 먼저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아니면,
적어도 위에 쓰여진 글들이 누구를 위한 글인지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덜 떨어지고 무식한 사람을 위한 하급의 쉬운 언어로 말이죠.
lurker (2003-11-22 07:15:03)
dump -> lurker는 그럼 흔적을 지우고 평온한 젤라틴모텔에 불청객이었다면 죄송하단 말을 하며
아쉽지만 intuition과의 인연을 잊지 않으며 조용히(이글을 제외 ) 사라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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