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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02-22 16:02:24, Hit : 1198, Vote : 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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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칭찬] 빌비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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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가장 경계하는 것중 하나이기에 경고에 의미로 올리는 어택.   영화가 되었던 음악이 되었건, 작업에 대한 상찬은 그것이 만들어진 장소나 도록에서 이뤄져도 충분하다고 생각된다.   만듦에 대한 연원이나 정묘한 비판이 이뤄지는 것이 작가 스스로에게 독이되지 않는다면, 가뜩이나 찬사와 자본의 세례를 받는 작가에게는 독뿐이 되지 않을까.   물론 어떤 평론가의 이유와 맥락없는 비난은 말할 가치도 없지만 말이다.   김정욱 그림 좋기만 하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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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ver Story] 빌 비올라, 현대미술의 영상 시인
--- 삶과 죽음, 시간과 공간에 관한 영적 이미지
Vol. 51   2007. 2. 22~2. 28



현대미술의 영상 시인. 사람들은 빌 비올라 Bill Viola를 가리켜 이렇게 부른다. 텔레비전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한 미디어 아티스트들 중 그처럼 아름답고 심오한 영상을 만들어내는 이를 찾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고속촬영으로 만들어진 그의 영상은 우리에게 느림의 미학과 ‘본다는 것 seeing'의 역설을 일깨워준다. 움직임과 멈춤. 정반대의 하지만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의 순환을 내포한 그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이 속한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게 된다. 






<의식 Observance> 2002 ⓒ Bill Viola





비디오 아트에 관한 미학적 논의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미술사가들은 추상표현주의, 팝아트, 플럭서스 Fluxus 운동의 연장선에서 비디오 아트를 바라본다. 비디오 아트를 ‘과정 process’의 예술로 정의하는 건 이 때문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이러한 일련의 미술의 흐름은 1960년대 전성기를 맞이한 서구의 저항문화가 자리하고 있다.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으로 비디오 아트를 규정하는 건 이제 더 이상 새롭지 않을 정도로 보편적이다. 1950년대 중반부터 인류에 사회적 의미의 ‘소통’을 가져다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마셜 맥루한의 ‘지구촌’을 가능케 한 것도 텔레비전의 영향이 컸다. 지금 우리가 지겹게 듣는 ‘네트워킹’의 원조 역시 전지구적 매체로 불렸던 텔레비전 때문이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텔레비전의 가치를 제대로 간파하지 못했다. 텔레비전에 문화적 의미를 부여한 건 순전히 비디오 아티스트들 덕분이었다. 백남준의 <TV 붓다 Budda>와 <로봇가족>은 텔레비전이라는 매체에 동양적 감수성을 부여했다. 세계 각 도시에서 벌어진 예술 공연을 위성중계라는 방식으로 한데 모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1984)은 그 백미라고 할 수 있다.





<통로> 1987 ⓒ Bill Viola




하지만 텔레비전이라는 전자적 매체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작가로는 단연 빌 비올라 Bill Viola(55)가 꼽힌다. 마치 정지되어 있는 듯한 그의 초슬로우 영상은 숭고미라는 표현을 붙여도 아깝지 않을 정도다. 그의 영상이 모니터 안에 자리 잡는 순간 관객은 숨을 죽인 채 주시해야만 한다. 우리가 꿈속에서나 만날 법한 극도로 천천히 흘러가는 영상이 자아내는 아름다움은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 듯하다. 0과 1로 이루어진 디지털 기호가 영상으로 합일되는 과정은 한 편의 시를 읊조리는 듯한 낭만을 안겨준다. 그가 현대미술의 탁월한 영상 시인으로 불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 동양과 서양의 지적, 문화적 유산을 한몸에


빌 비올라는 비디오 아트에 인간의 영적 측면과 지각적 측면을 도입시킨 작가로도 유명하다. 197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친 130여 편의 영상 작품과 멀티미디어 설치작품은 미술관은 물론 텔레비전을 통해 우리에게 각인되었다. 그에게 비디오 혹은 텔레비전이란 “자아인식에 대한 통로이자 인간의 인식의 현상을 드러내기 위한 도구”이다. 서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게다가 테크놀로지에 뿌리를 둔 작가답지 않은 고백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동서양 미술은 물론 불교의 선종, 이스람의 수피교, 그리스도 신비주의 등 인류의 다양한 정신적 전통을 직접 체험하며 학습해 왔다고 한다.


빌 비올라가 영상을 다루는 기술은 그가 만들어내는 영상만큼이나 환상적이다. 물론 그의 영상은 지극히 단순하다. 대부분의 영상이 나 홀로 혹은 여러 명의 사람만 등장할 뿐이다. 얼핏 보기엔 기술의 ‘기’자조차 들어가지 않은 듯 보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의 작품이 얼마나 고도로 숙련되고 정제된 기술의 결과물인지를. 원래 고수의 일거수일투족은 공기처럼 가볍고, 물처럼 자연스러운 법이다.


빌 비올라의 영화 같은 영상이 우리의 마음을 잡아끄는 이유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빌 비올라의 영상은 마치 성스러운 종교화를 대하는 것만 같다”는 어느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그는 전시공간을 ‘제의’의 현장으로 바꾸어 놓는다. 관객은 경건한 마음으로 화면을 응시한다. 그리고 느낀다. 그가 만든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 그리고 인간이라는 여린 존재에 관해 깊은 사색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영화적 내러티브와 시간이 멈춘 듯한 종교화가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그의 대표작 <격정>에서 이는 절정에 달한다.





<낭트 삼면화 Nantes Triptych> 1992 ⓒ Bill Viola




한국에서 처음 열렸던 2003년 국제갤러리에서의 개인전에서 그는 시간의 순환, 삶과 죽음, 기억, 그리고 자아 인식이라는 자신이 고집스레 지켜왔던 주제를 들고 왔다. 그를 잘 아는 미술인들은 물론이요, 그의 작업과 처음으로 대면한 대중도 그가 풀어내는 섬세한 영상언어에 매혹될 수밖에 없었다. 모두들 비디오카메라와 비디오테이프, 녹화기, 재생기, 모니터 등 기계적 장치에 불과한 도구들이 어떻게 예술로 승화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한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그의 영상은 이미지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짐작케 해주기에 충분했다.


오늘날 텔레비전은 애증의 대상으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젖어 있으면서, 동시에 텔레비전을 향해 비난의 손가락을 숨기지 않는 양면성을 숨기지 않는다. 물론 이유는 하나. 볼거리는 넘쳐나지만 볼만한 걸 찾지 못하는 답답함 때문이리라. 어쩌면 우리는 소통이라는, 텔레비전 본래의 가치를 하찮게 여겨온 건지도 모른다. 인간이 상상하는 온갖 상업적인 생산물이 텔레비전에 가득 차게 된 것도, 그러한 비예술적 행위가 수용자의 취향이라는 말로 가볍게 무마되는 시대를 살게 된 건 결국 우리 탓인데도 말이다.


빌 비올라의 영상이 더없이 소중한 까닭은 바로 우리가 처한 우울한 현실에서 비롯한다. 테크놀로지가 인간의 유희와 욕망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한 순간, 화려하되 지루한 볼거리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는 그의 ‘영적인’ 영상은 말할 수 없는 위무를 안겨준다. 그래서일까. 빌 비올라의 영상은 텔레비전의 기술적 가치가 아닌, 그것의 감성적 가치로 우리의 시선을 옮기게 해준다. 그저 예술과 테크놀로지를 조합하고 결합시키면 새로운 예술이 완성된다고 믿었던 이들도 그의 영상 앞에서 테크놀로지를 ‘사유’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테크놀러지를 사유한다? 왠지 낯설지 않다. 그렇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친숙한 동양적 사상에 뿌리를 둔 것이다. 우리가 백남준과 더불어 빌 비올라의 작업에 유달리 마음이 끌리는 것도 이러한 그의 비서구적 사유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는 이탈리아에서 기독교 미술을, 일본에 살면서 선 Zen 사상을 공부한 그의 유목주의적 세계관이 큰 영향을 끼쳤으리라. 그의 정신과 육체를 파고든 다양한 문화의 충돌과 합일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그는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1976 ⓒ Bill Viola




빌 비올라의 비디오 작업은 기본적으로 이미지의 촬영과 재생 속도의 변형에서 출발한다. 정지되어 있는 듯, 그리하여 끝을 짐작할 수 없는 기나긴 시간처럼 다가오는 그의 영상은 정반대의 극단, 즉 고속촬영에 있다. 다시 말해 그가 틀어놓은 비디오가 실제로는 지극히 짧은 시간, 아니 순간을 잡아내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눈이 도저히 따라갈 수도, 경험할 수도 없는 속도이자 광경인 셈이다. 대단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속도의 반전을 위해 그는 작품의 소재로 ‘물’을 즐겨 사용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물은 무의식과 몽환이라는 수식어를 동반하는 대표적인 물질. 빌 비올라는 물을 빠른 속도로 떨어지게 하거나, 떨어지는 물방울에 영상을 반사시킨다. 미술평론가 조광석이 “동적인 물의 이미지에서 양감을 발견하는 작업”이라고 정의내린 이러한 방식은 <그는 당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 He Weeps for You>(1976)에서 처음 확인되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물방울이 맺혔다가 떨어지는 장면을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내고, 모니터를 통해 관객의 눈에 영상을 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단순한 이치다. 




<교차> 1996 ⓒ Bill Viola




그러나 여기에서 멈췄다면 우리가 그를 주목할 이유는 없었을 터. 관객들은 이내 자신의 눈을 파고드는 물방울에 자신의 얼굴이 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자신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물방울, 아니 자신의 얼굴이 떨어지는 순간을 목격해야 하지만 말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 순간 소리가 개입한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지점에 작은 북을 설치해 자신의 자화상이 물방울에 맺혀 떨어지는 순간을 온몸으로 느끼게 하려는 작가의 포석이 깔린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국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었던 <마지막 천사>(2002)는 어두운 물속으로 관람객의 얼굴이 아닌, 아예 사람이 통째로 떨어진다. 소리 역시 과거보다 훨씬 커져 마치 뭔가가 폭발하는 듯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개인적으로 그의 작업에서 잊을 수 없는 건 〈길 연구 Study for The Voyage〉와 <항해 연구 Study for The Voyage>다. <길 연구>는 벽에 걸린 3개의 LCD 스크린에 어디론가 나아가는 사람들을 담았다. <항해 연구>는 두 개의 LCD 스크린을 사용했다.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죽음과 소멸이 화면 가득히 배어 있다. 작은 집 안에서 한 노인이 죽어가고 있다. 그의 곁에는 두 명의 젊은이가 있다. 또 다른 스크린에서는 물가에 정박한 배에 여러 가지 물건들이 실리고 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늙은 부인은 바로 옆 스크린에서 죽어가는 남자의 여인임을 직감케 해준다. 





<기억> 2002 ⓒ Bill Viola




빌 비올라 작업의 가장 큰 미덕은 ‘본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주는 데 있다. 고속촬영으로 만들어진 영상이 갖는 느림의 미학은 ‘봄 seeing'의 역설을 새삼 일깨워준다. 움직임과 멈춤이라는 정반대의, 하지만 결코 떼려야 뗄 수 없는 시간의 순환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신이 속한 ‘지금, 여기’라는 시간과 공간을 사유하게 된다. 이러한 그의 작업은 1991년 어머니를 여의고, 동시에 둘째 아들을 가진 개인적 경험에서 더욱 원숙해진다. 명상적이고 종교적인 이미지, 이를 통해 보는 이로 하여금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는 것. 예술이 갖는 본래의 기능을 회복한 것만으로도 그의 작업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지금 우리는 ‘평평’해진 세상에 살고 있다. 예술가라고 예외는 아니다. 빌 비올라 역시 “젊은 작가들이 미디어라는 진보된 기술을 통해 전지구적 소통을 위해 노력하는” 현재의 상황을 긍정적으로 보자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전지구적 소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나는 그의 작품에서 해답을 구하려 한다. 탄생과 죽음, 인간의 존재, 시간과 공간…. 여기에 작품을 보여주는 단순한 방식도 빼서는 안 될 것 같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그의 영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가 없다는 것, 아니 깊은 감동을 받지 않는 이가 없다는 건 너무도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언젠가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이 자리할 장소는 미술관이 아닌 관객의 마음 속”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혹 그를 만날 기회가 내게 주어진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이미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 있노라고.



| 윤동희 _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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