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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푼크툼(punctum): 존재의 시간 - 조 성훈글




III. 푼크툼(punctum): 존재의 시간



                                                                                      조 성훈(pamuun@ripplet.net)



  바르뜨가 사진에 관한 몇 가지 단상들을 통해 최종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미 사진을 방법으로서 접근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말했었다. 이는 결국 사진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이며 동시에 사진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의 문제라고 말이다. 그러므로 이 책 전체를 훑어보면서, 나는 사실 특정한 주제에 향해 있었다. 그리고 아마도 바르뜨 역시 이 주제를 가장 흥미롭게 혹은 가장 중요하게 언급하려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이 주제는 의외로 단순한 구분에서부터 출발하는데, 그것은 사진이 발생시키는(혹은 우리가 발견하는), 서로 층위가 다른 두 가지의 상반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사진을(혹은 예술작품) 보면서 그것의 일반적인 관점에 대해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진의 주제라든지, 작가의 의도나 관점, 혹은 사진의 내용이 우리에게 던지는 담론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러한 관점들을 통해 사람들은 예술 작품을 서로 공유한다. 그래서 이 때의 예술작품은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를 위험하지 않은 방식(즉 개인들의 사회적 관계를 공고히 하거나 보존하는 방식)으로 표현하며, 이렇게 개인들은 자신의 사회적 욕망을 예술작품에 투사한다. 예술작품에 담긴 일반적인 관점을 명시화함으로써, 우리는 예술작품과 우리 자신을 파괴하거나 위험에 빠뜨리는 모험을 하지 않고도 예술을 향유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표현된 우리의 욕망은 교육으로 내면화된 길들여진 문화적 감정을 보여줄 뿐이다. 그것은 마치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느끼는 친근함이나 호감과 같은 중화된 욕망과 같다. 이는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코드가 허용하는 한에서, 우리 자신의 목숨을 내걸지 않고,  약간의 노력만으로도 획득할 수 있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문화적 계약 관계 속에서 나누는 감정"인 것이다. 또한 이 감정은 이렇게 담론으로부터 파생되는 감정인 동시에 담론 자체를 생산하는 감정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지식과 정보들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이 지식을 내면화하면서 사물에 일정하게 반응하거나, 이를 토대로 예술 작품에 대해 자의적인 해석을 마음대로 운용할 수가 있다. 사진에서 이러한 합리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것을 바르뜨는 스투디움(studium)이라고 말했다.



예술에서 스투디움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고, 작가의 의도와 표현된 내용의 조화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예술작품의 스투디움을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신화적 삶을 비추는 조명(enlightenment)을 발견한다. 스투디움은 예술과 사회를 "화해"시키는 것이다. 예술은 이때에 사회적 기능을 부여받으면서, 파괴적이고 혼란스러운 열정과 그 위험으로부터 사회를 중화하고 구제하는 심미적인 테크닉으로 발전한다. 이 테크닉은 응집된 형태의 설득력과 문화적인 깔끔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엔 초과적인 고통이나 극단적인 쾌락이 없다. 제한적 기쁨으로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개인들은 삶의 아름다움이라는 소극적(negative)인 정서를 최고의 미덕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개인들은 예술을 인정하고 어느 정도는 따르지만,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거나 숭배하지는 않는다(스투디움에 관한 내용은 30∼33 참조).



그래서 바르뜨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사진에서 가시적으로 드러나 있는 작가의 의도나, 작가가 이리저리 짜놓은 담론의 의미가 아니다. 그것들은 독자로 하여금 일정한 형식의 취향과 문화적 반응만을 초래할 뿐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스투디움의 목적은 사진을 통한 담론의 유포이다. 이것은 소통과 교육을 전제하기 때문에 예술작품은 티없이 완전하게 짜여진 구조물이어야 한다. 반면 독자의 관점에서 스투디움의 발견은 작품의 완전한 이해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의도도 포함되며, 사진의 이러저러한 주제들과 객관적인 통찰이 요구된다. 따라서 우리가 작가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하는 한, 이것 역시 소통과 구조의 문제로 귀결된다.


작가와 독자는 각자의 비밀을 대리자를 통해 나누는 것이다. 둘 모두의 경우 사진은 교환하고 공유하는 담론구성의 매개로 기능한다. 이렇게 매개로서의 사진은, 확립된 가치들의 설명이나 심미적인 표현으로,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테마들을 견고하게 만들거나, 혹은 이 가치들을 적당한 구성으로 비판함으로써 정치적 테마들을 불러온다. 이런 의미에서 스투디움은 독자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에서 오는 감정이 아니라, 타자들로 구성된 집단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감정은 개인과는 거리를 두는(물론 여기에도 열광이 있기는 하다) 재현된 파토스이다. 스투디움은 대리인의 담론에 의해 짜여진 감정이다. 그래서 또한 이것은 중화된 욕망이며 위험하지 않다. 즉 아무런 자극이 없다.



예술 작품에서 느끼는 스투디움과는 반대로, 이 예술 작품을 하나의 총체로서 보려는 우리의 의도를 방해하는 요소가 있다(아마도 이것은 예술(특히 사진)에서만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닉하다). 그것은 예술의 문화적 속성을 제거하고, 공유와 교환의 손때에 묻혀 무디어진 예술작품의 본질을 날카롭게 복원한다. 사진에서 이 요소를 발견하게 될 때, 우리는 가혹한 감정의 극한을 체험한다. "이 요소는 스투디움을 파괴(혹은 함께 나눔)함으로써 발생한다. 이번에는 내가 그 요소를 찾는 것이 아니라(스투디움에 내가 나의 지고한 의식을 부여한 것처럼) 그것이 스스로 마치 화살처럼 사진에서 떠나와 나를 관통한다. 라틴어에는 이처럼 뾰족한 물체에 의해 받은 부상, 상처, 흔적 등을 지칭하는 단어가 있다. 이 단어는 강조 구두점이라는 말을 연상시켜 주고 또 내가 언급하는 사진들도 결국은 점(点)들, 때로는 얼룩반점, 예리한 점들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마음에 드는 단어이다. 정확히 말해서 앞서 말한 대로 낙인들, 상처들은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스투디움을 분산시키는 두 번째 요소를 나는 푼크툼(puctum, 라틴어로 '점'을 뜻한다)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푼크툼이라는 단어가 주사, 작은 구멍, 작은 반점, 작은 상처, . . . 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의 푼크툼은 나를 찌르는(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극을 주는) 우연성이라고 할 수가 있다"(31∼32).


사진에서 발산되는 푼크툼은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우리의 시야와 피부에 미세하지만 깊은 상처를 남긴다. 그것은 존재에 깃든 모종의 흔적이며 부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더 이상 사진이 담고 있는 내용과 그 의미를 조작하거나 짜집을 수가 없으며, 그것이 내게 난입한 그 순간 나는 마치 얼어붙은 조각처럼 저항하지 못하고 굴복해야만 한다.

사진에서 스투디움은 우리에게 우정을 촉발한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감정을 문화적 코드로 변환하면서, 우리의 정신에 일종의 신화의 사상(寫像)을 남긴다. 또한 이 잔영은 삶의 빛으로서 조명이 된다. 이 조명 아래에서 우리는 예상된 평화와 계획된 안락을 만끽하게 될 것이다. 사진을 보면서 내가 발견하는 이 모든 의도된 해석들과 담론들(스투디움)은, 내가 찾아낸 혹은 나를 찾아낸, 교육이 내게 주는 선물(길들여진 감정)이다. 그러나 푼크툼은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게 한다. 그것은 밝은 조명아래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러나 아마도 그로부터 희미하게 떠오르는 진한 어두움(혹은 빛)이다. 그것은 깊은 상처(또는 죽음)를 통해서만 우리가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삶이다. 그것은 삶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푼크툼을 통해 촉발되는 우리의 감정은 한마디로 말해 어찌해볼 도리가 없이 굴복해야 할 우리의 물적 조건들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는 푼크툼의 윤곽만 그려보았다. 아니 그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푼크툼의 감정론이라 할까? 사실 푼크툼이 불러일으키는 우리의 다양한 감정의 정학(靜學)과 같은 논의는 이차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결과로서 감정에 관한 이러저러한 정태적 의미이기보다는, 이것이 어떻게 발생하며 무엇을 통해 촉발되는가에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미 방법론에 대해 말하지 않았던가?



바르뜨는 1926년에 제임스 반 데르 제(James Van der Zee)가 찍은 흑인 『가족사진』을 보면서, 흑인들에 관련된 사회적 담론("책임감, 가족의 유대, 보수주의, 성장"과 같은)에는 관심이 별로 없다. 물론 이 사진의 주제는 백인이 아닌 흑인으로서 이들이 사회적 신분과 관련하여 노력한 감동적인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 주제가 독자로 하여금 사진 속의 인물들에 애착을 느끼게 하는 커다란 요소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담론의 역사가 이들을 살아있게 하지는 못한다. 우리는 아마도 이 사진의 주제를 통해서는 이들의 이름조차 알 수가 없는 것이다(그럴 필요도 없으며 궁금하지도 않다). 그 보다 오히려 바르뜨에게 "연민에 가까운 감동"을 주는 것은 옆에 서있는 한 여인의 "큰 허리띠"와 "끈 달린 신발"이었다(47-49). 또 다른 예가 있다. 케르테즈(A. Kertez)가 찍은 사진(1921)을 보면서, 바르뜨는 소
년이 맹인 바이얼린 악사를 인도하는 모습에서 울퉁 불퉁한 땅을 딛고 있는 악사의 신발에 시선을 집중한다. 혹은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e)의 1954년 작품인 뉴욕의 『이탈리아인 거주 지역』의 소년들 사진에서 한 소년의 썪은 치아. 듀안 마이클(Duan Michael)의 1958년 작 『Andy Warhol』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앤디 워홀의 깡마른 손끝의 넓적하고도 굳은 오른쪽 손가락. 루이스 하인(Lewis H. Hine)의 1924년 작 『어느 학교의 지진아들』에서 대조적인 두 기형아들 중 소년이 입고 있는 옷의 옷깃(당통이 즐겨 입던 풍)과 큰 소녀의 손가락을 감싼 붕대(49-55). 이외에도 아주 많은 부분대상들이 있다. 이 부분적 대상이 내뿜는 연민과 감동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일까?



푼크툼은 우선 세밀한 부분으로부터 출현한다. 특정한 사물이나 개체가 시간 속에서 드러나는 순간적인 세밀함 혹은 섬세한 순간. 우리는 이를 특징이나 징후라고 부르기도 한다(혹은 부분대상). 그러나 세밀한 부분 즉 부분대상으로서 푼크툼은 엄밀히 말하자면 실체(substance)가 아니다. 어떤 점에서 실체라는 개념은 시간을 배제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우리가 사진을 보면서 포착하게 되는 푼크툼은 특정한 대상(목걸이나 신발 끈과 같은)들을 보거나 감지하면서 시작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푼크툼이 그 대상 자체라고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이것이 아마도 푼크툼이 물신(fetish)과 다른 점일 것이다(물론 바르뜨는 사진을 보면서 어느 정도는 물신주의자가 된다고 말하지만, 이것은 푼크툼을 단순하게 파악한 결과일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수준에서 이 세밀한 부분으로서 푼크툼은 실체가 아니라 형식으로서 차이이다. 물신은 주체로 하여금 대상물을 통해 고착하거나 퇴행하도록 하는 매개가 된다. 물신숭배자는 특정하게 선택된 대상물(물신)을 통해 그에 조응하는 관념적 환타지로 되돌아간다. 따라서 세계는 그의 환타지 안에서 이차원적 이미지로 중화되어 영원히 보존되는 것이다. 환타지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이런 식으로 물신을 이용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은 그 자체 물신이거나 혹은 물신숭배이며 사진 작가는 물신 숭배자이다.



그러나 푼크툼의 경우엔 그 반대이다. 푼크툼은 부분대상이 되거나 그것과 관계하면서, 부분대상을 소유하고 있는 개체(전체)를 살아있는 것으로 보이게 한다. 사물이 살아있다고 느끼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시간 속에서 표현되는 차이를 감지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대상의 차이를 포착하는 순간, 다시 말해 그것이 무언가 다르다고 감지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이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세계를 이차원적 이미지(물신)로 중화한 것이 사진이라면, 푼크툼은 반대로 이 이미지를 풀어헤친다(혹은 파괴한다): 물신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감아 세계를 거부하게 하지만, 푼크툼은 자아를 터뜨려 눈을 뜨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르뜨가 사진 속에서 본 허리띠와 끈 달린 신발 그리고 옷깃과 손에 감긴 붕대는, 이들을 포함하거나 소유하고 있는 개체(여자, 악사, 소년, 소녀 등)가 사진을 벗어난 삶의 존재라는 것을, 순간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녀는 어떤 연유로 그 어색한 허리띠와 끈 달린 신발을 갖게 되었을까? 그 소녀는 무슨 이유로 손에 붕대를 감은 것일까? 그들의 이름은 무엇일까? 피사체가 되기 전에 이들의 동작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들은 누구인가? 사진 속의 대상물 자체에 강렬한 애착을 갖게 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푼크툼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언가 다르기 때문이다.



사진은 보는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눈과 카메라가 그렇듯이, 사진과 시각은 서로 동형이체(同形異體)이다. 그렇다고 해서 푼크툼이 시각소(視覺素)의 기능에 불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왜냐하면 바르뜨의 책에서 볼 수 있듯이, 사진과 관계하는 감각이 반드시 시각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푼크툼의 환기효과는 일차적으로 시각에서 비롯되지만, 그것은 일차적 기능을 넘어서 있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케르테츠의 1921년 작품인 『바이얼린 주자의 선율』을 보면서, 바르뜨가 포착한 푼크툼은 흙으로 굳어진 땅과 바로 그 위를 딛고 있는 바이얼린 악사의 신발이다. 더 나아가 길을 인도하는 소년의 맨발, 그리고 그들의 땅 아래에 길게 마차가 지나간 흔적이 보인다. 이 푼크툼들은 우리에게 보는 행위를 통해 실제로 땅을 딛고 있는 느낌을 가지게 한다: "울퉁불퉁한 땅의 모습"(49). 푼크툼은 시각(모습)을 촉각(울퉁불퉁)과 같은 다른 감각적 활동에 연결 짓는다. 아니 오히려 이와 같은 공 감각적 종합의 결과로서 푼크툼이 발생한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렇게 감각활동들을 종합하면서 푼크툼은 일정한 형태의 은유를 발생시키는 씨앗이 된다. 그것은 이질적인 사물들과 활동들을 연결 지으면서 종합의 경계를 이루거나 혹은 여기에 빗금을 그어 내리는 것이다: 푼크툼은 조각 난 사물들이 가까워지면서 그어진 일종의 빗금(사선)이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시각이 다른 감각활동을 불러들이는 것일까? 바르뜨는 악사의 신발을 보면서 어떻게 땅의 울퉁 불퉁한 감각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일까? 감각뿐 아니라 존재들은 어떤 매개를 통해 혹은 어떤 형식으로 서로 조응하게 되는 것일까? 우선 그것은 기억이나 추억을 통해 나타난다. 악사가 딛고 있는 땅과 그의 신발은 바르뜨에게 "중앙 유럽에 있다는 생각을 불러일으켜 준다"(49). 푼크툼은 이런 의미에서 푸르스트(M. Proust)의 주제와 상당히 근접해 있다. 형태적으로 볼 때, 푼크툼은 비자발적인 기억과 흡사한 것이다. 내가 지금 바라보고 있는 하나의 특정한 점(물신)은 내 안에 잠재해 있는 과거 전체를 불러들이면서 나의 의식 안에 지나간 시간을 펼쳐놓는다. 이 경우 푼크툼은 과거를 살아있는 것으로 부활시킨다: "나는 그 사진을 보면서 오래 전에 헝가리와 루마니아를 여행하면서 지나갔던 작은 마을들을 온몸으로 느끼는 것이다"(49) . . . "반 데르 제의 사진을 보면서 . . . 나를 감동시키는 요소(는) . . . 성장한 흑인 여인이 신고 있는 신발 . . . 그런데 그 사진은 나의 마음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가 후에 그 사진의 푼크툼은 사실 그녀가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 . . 그 목걸이(가느다랗게 꼬아 만든 금 목걸이)는 나의 가족 중 누군가가 걸고 있었던 목걸이였던 것 . . . 나의 고모가 사망한 후, 대대로 내려오는 우리 가족의 보석 상자 속에 보관되어 있는 . . . 시골에서 외롭게 살고 있는 고모를 볼 때마다 서글픈 마음이었다" (57).



기억을 불러들이면서 푼크툼은 내가 현재에 느끼는 감성을 시간으로 확장하기도 하며, 바라보는 피사체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함으로써 존재로 나아가게 한다. 푼크툼에는 수많은 시간선들이 내재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나의 의식을 촉발하는 현재의 순간은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고 있다. 현재에는 과거와 미래뿐 아니라 실재하는 것들의 모든 시간이 잠재한다. 푼크툼은 감각활동뿐 아니라 시간의 종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식의 수준에서 볼 때, 실재하는 것은 환유와 은유의 형식을 통해 현실화한다. 이것이 의식에 있어 시간의 종합형식이다. 사물의 본질은 이와 같이 시간의 종합에 의해서만 출현한다. 사진에서 보게 되는 푼크툼의 경우, 형태상으로는 환유적이며 의미상으로는 은유적이다. 세밀한 부분으로서 푼크툼은 다른 전체적인 기억을 강렬하게 끌어당기는 동시에 다른 부분적 대상들과 강렬한 친화성을 갖는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보면서 특정한 대상을 떠올리기도 하며 동시에 특
정한 대상을 살아있다고 감지하는 것이다. 이것은 실재하는 것을 긍정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아마도 스투디움이 부정의 파토스로 이루어져 있다면, 푼크툼의 파토스는 긍정일 것이다.



푼크툼은 저자의 의도와는 관계가 없고, 독자의 해석활동과도 관계가 없다. 저자나 독자를 예술의 담론으로 끌어들이는 문제는 푼크툼에서 두 번째 주제라고 할 수 있다. 그 보다 푼크툼은 반쯤은 사진의 내용 깊숙한 곳에, 그리고 반쯤은 독자의 촉발능력(감성, 기억, 관찰 등과 같은)에 닿아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다 보니 푼크툼이 환기하는 효과는 사진의 내용에 의존하지 않고, 또 전적으로 나의 능력으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사실 푼크툼은 사진의 내용이나 작가의 의도가 감추려는 곳에 숨어 있다. 그것은 의도되지 않은 일종의 흠집과도 같다. 그래서 그것은 우연적으로 출현하는 것이다. 이 흠집을 통해 우리는 존재의 표피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를 볼 수 있으며, 혹은 존재의 후면을 포착할 수가 있다. 푼크툼을 통해 죽지 않고 살아있는 밖의 세계를 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텍스트 밖의 세계. 즉 푼크툼은 사진에 찍혀진 구도와 내용들 속에는 없는 다른 세계를 불러들인다. 매우 비밀스럽게 활동하면서.



또한 이 비밀스러움은 언제나 나와 관계하는 한에서 짜릿하다. 그것은 나의 자아 속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나의 자아가 다 숨길 수 없는 비밀스러운 부분에 살짝 그러나 강렬하게 파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랑의 파문! 여기서 오는 감동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 기억처럼 나의 본질적인 것이 드러나면서 발생하는 감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의 대상물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은 바로 내가 살아있음을 깨닫는 과정이다. 푼크툼의 비밀스러움이 내게 던진 그 파문은, 나와는 아주 먼 곳에 있지만 동시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나의 감성을 두드린다는 점에서, 아마도 나와 가장 가까운 관계를 맺게 해준다는 점에서, 가장 진한 흔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게 있어 가장 진한 흔적. 푼크툼은 '우리'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 맙소사! 푼크툼에서 나타나는 시간은 모든 존재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꽉 들어 차 있는 공간으로서의 시간이 아니라, 오히려 개개의 존재들 안에서 활동하거나 긴 잠이든 시간들이다. 이 시간 속에 다른 어떤 존재가 들어올 공간이라고는 털끝만큼도 남아있지 않다. 이 시간은 나의 몸에만 딱 맞도록 재단되었기 때문이다. 밀도가 매우 높은 헐렁하지 않은 시간. 이 시간은 존재에 깃들어 있으면서, 어느 순간 부지불식간에 특정한 물신을 만나게 되면 이를 통해 밖으로 터져 나온다.



푼크툼을 언제든지 튀어나올 준비가 된 잠재적 시간이라고 이해하자. 아주 작은 흠집에 숨어있기 때문에 조명 빛이 비출 수 없는 영역. 어두운 죽음의 영역. 차갑지만 강렬한 시간. 질료의 시간.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이 어두운 영역을 통해서만 비로소 우리는 살아있다고 느끼게 되니 말이다. 분명히 사진은 살아있는 시간을 두 개의 좌표로만 구성된 평면에 사영(射影)시켜 버린다. 그것은 마치 조형예술의 망상과도 같다. 그러나 일단 이 사영된 무늬들이 모두 다 숨기지 못하는 어둠의 영역이 드러나기 시작하면, 마치 그림자가 걷잡을 수 없이 튀어나와 내게로 달려들 듯이, 마치 옷깃에 가려진 속살 한 구석이 살짝 드러나면서 그녀의 알몸이 이 옷깃을 뚫고 내 시야로 한껏 들어오듯이, 사진 속의 존재는 우리가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영역을 넘어버린다. 빗금(좌표) 하나(혹은 그 이상)가 더 그어진다. 그래서
푼크툼은 초과적이며 과잉된 시간, 넘쳐흐르는 시간인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는 초월적이기까지 하다. 이제 애정이 시작된다: 이름이 무엇일까? 무얼 하고 있던 것일까? 왜? 언제? 어떻게? 등등.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그리움. 사랑: "외출용 의상을 차려 입은 흑인 여인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로 인해서 나는 그녀의 초상 외부에 존재하는 삶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60).



참고문헌

바르뜨, 롤랑. 『사진론』. 송숙자 옮김. 현대 미학사. 1994.

Barthes, Roland. Camera Lucida: Reflections on Photography. trans by Richard Howard.
New York, Hill and Wang, 1981.



(이론문화에서 퍼옴: 이론 문화 사이트 http://www.theoreticulture.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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