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확실히.
회화가 죽었다/소용이 끝난 매체.란 이야기는 역시 게으르고 무책임한 언사라는. 이미지의 호불호를 떠나서 회화가 가지고 있는 의미는 작가가 캐내기 나름이라는 실증을 보이는 작업이다.
.'
)
+ + +
손희주(뒤쎌도르프 미술사)
뒤셀도르프 k21에서는 2004년 10월 16일부터
12005년 1월 16일까지 벨기에 화가 뤽 튀망의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에서 독일에서는 처음으로 그의 70여작품을 볼 수 있었다. 요즈음
들어서 현대작가 전시회 대부분을 영상과 사진이 채우고 있는 때에 회화 작품을 다시 접하게 된 기분이 다시금 새로왔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기분은 채도가 두단계정도는 떨어진 것 같은 환하지만 탁한 그의 그림들로 인해 이내 무겁게 가라앉았다.
뤽 튀망은 지난 20년
동안 유럽에서 소위 잘 나가고 있는 예술가일 뿐만 아니라, 회화 장르에 새로운 자극과 원동력을 불어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작가이다.
그는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와 2002년 카셀도큐멘타를 통해 국제적으로 인지도를 높이고 있다. 튀망은 사진, 신문의 기사사진, 영화의 장면,
텔레비젼의 뉴스 등의 메디어를 작품의 전단계로 사용하는데, 특히, 독일작가 게르하르트 리히터 처럼 사진을 작품을 위한 바탕으로 이용한 점은,
15년전 뉴욕의 갤러리스트 마리안 굿맨이 뤽 튀망을 „단순히 리히터를 창백하게(또는 희미하게) 흉내내는 아류작가“ 정도로 밖에 평가 못 하도록
하기도 했다.
창백하다. 이 표현은 그의 그림을 본다면 어쩜 누구나 느끼게 될 첫 인상일 것이다. 어떤 그림에서도 따뜻한 색감의
색은 찾아볼 수 없고 모든게 차고, 탁할 뿐 아니라, 더 나가서는 냉정하고 위험스럽다 라는 단어까지 사용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러한
느낌은 그가 나타내고자 하는 그림의 주제를 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작품에서 어떤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함에 대해 깊은 의문을 들어내고, 그림의 대상물들을 극단적으로 소외시키고 알아볼 수 없이 만드는 것에 반해, 뤽 튀망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들이 그림의 내용과 의미를 분명히 해주고 있다(물론 그림의 뒤에 숨어있는 역사나 상황을 알게된 후의 얘기지만). 그의 작품들은
일상생활에서 늘상 볼 수 있는 그런 정물이나 대상물이거나, 우리가 직접 경험했던 20세기의 역사적, 정치적 사실들이다. 뒤셀도르프의
전시회장에서도 식물부터 시작해서 일상용품, 예수그리스도의 두제자인 파울과 베드로의 그림 등을 지나, 홀로코스트에 사용되었던 집단수용소나 가스실,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시대 등 20세기의 역사와 더불어 가장 최근의 이라크전쟁까지의 주제가 총망라해서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튀망은 이런
주제들을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고 알아왔던 언어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절제된 색과 무광택의 표면을 통해 어둡게 숨겨져 있는 면들을 새로운 언어로
표현하고 있으며 관람객인 우리 자신들이 자신의 기억과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들을 어떻게 상관시키는지를 내심 의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난( Orchid, 1998, 유채화, 99,5x76,7cm Jay and Marsha Seeman컬렉션, 뉴욕)이란
그림에서도 튀망은 우리가 상상해왔던 향기롭고 우아한 꽃으로 난을 그리지 않았다. 뒷배경을 가리기 위해 일부러 짙게 덧칠해진 듯한 두꺼운 회녹색의
바탕에 커다랗게 그려진 난은 아름답거나 향기 가득한 꽃이 아니라, 뭔가 공격적이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앞으로 돌출되어 그려져
있다.
또 한 그림 „검은빛“ ( Blacklight, 1994 유채화 55x82cm,
De Pont Stichting voor Hedendaagse Kust Tilburg, 네덜란드)에서는 어느 한 집의 거실 장면을 드려다 볼 수
있다. 어두운 방 안에 놓은 텔레비젼이나 소파, 전등 등은 우리가 거실하면 생각나는 그런 익숙한 물건들이다. 하지만, 검은 빛 이라니… 빛이
검은색이 될 수 있을까? 회화에서 빛이란 대부분이 항상 밝고 따뜻한 색으로 표현되어 왔고, 희망을 수반하거나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요소였다.
심상치 않은 제목만큼 거실에서 점점 보여지는 것도 낯설다. 마치 암실이나 어두컴컴한 극장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다.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면서
점점 많은 것들이 보이는 듯한 효과를 준다. 소파위에 누워있는 사람형태의 대상에 점점 시선이 집중되는데, 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죽어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애매하다. 일상적인 거실장면에서 죽음이라는 섬뜩한 경험으로 생각이 전이된다.
튀망은 2004년 7월 아트매거진의 인터뷰에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조용한 그림이야 말로
좋은 그림이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얼어붙은 듯한, 감정이 배제된 상태에서의 순간과 공간의 포착으로 이루어진 작품들은 그림을 바라보고 있는
관찰자마저 싸늘하게 만들고 갑작스런 침묵상태로 이끈다. 반면 그런 상태에서 얻어진 경험은 역사나 대상물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안겨주고 충격을 더
크게하는 효과를 낸다. 그는 „프리츠 랑 영화감독의 영화 속에선 단 한 장면의 살인이나 피도 보이지 않지만, 사람들은 더욱 위협적으로 느낀다“
는 설명을 덧붙인다. 그의 그림이 주는 효과를 이 문장보다 더 훌륭하게는 표현할 수 없을 것 같다.
홀로코스트의 잔인함이나 살인,
억압 등 끔직한 역사적 사실도 한번도 직접 그림의 전면에 나타나지 않는다. 1997년작 „건축가“나 1993년작 „산책“, 2000년작 „
Mwana Kitoko- Beautiful White Man“ 에서는 누구인지 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그림 속의 얼굴들은 지워져 있거나
관람객으로 부터 등을 돌리고 서있다. 이들은 역사 속의 어떤인물들이었나?
하얀 눈벌판에 스키를 타다 쓰러져 있는 인물은 히틀러 지배시
건축자문가 였고 후에는 전쟁장관까지 지냈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해가 비추고 있는 산언덕을 걸어가고 있는 사람은 바로 히틀러를, 그리고 하얀
해군복장을 갖추고 선글라스를 끼고 서 있는 사람은 식민지였던 콩고에 도착한 벨기에의 왕 보두앵 I세이다. 다른 그림을 볼 때도 자명한 일이긴
하지만, 이 인물들이 저지른 일들을 알지 못하고, 아니면 이 인물들이 누구였는지 모르고 봤을 때의 그림과 사실을 알고 난 다음의 그림보기엔
너무나 큰 감정의 차이가 생긴다.
뒤셀도르프 전시회에 튀망이 전시한 그림중 가장 큰 작품은 2002년11회 카셀 도큐멘타
참가 작품인 정물화이다.
사과와 물병을 가운데 배열시킨 아주 커다란 세잔식 정물화는 2001년 911테러에 대한 튀망식대로의
대답이었다. 테러 당시 튀망은 부인과 뉴욕에서 카셀도큐멘타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그 때까지 그가 계획했던 모든 것을
포기했다고 한다. 그러고는 내놓은 작품이 바로 이 정물화인 것이다. 튀망은 왜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폭력을 전원시의
이상향“으로 대응시키고 싶었다고 얘기하며, 이 그림은 „일어난 사건을 위장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인다. 처음엔 푸생식의 전원적인 풍경화를
생각했으나, 결국엔 엄청난 크기(347x500cm)의 정물화로 결정했다고 한다.
유럽미술사 내에서 정물화가 이처럼 커다랗게 그려진 적이 있었을까 라는 의문을 일으키는
그림이다. 세잔식이라고 하지만, 세잔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시켰다. 세잔이 대상의 형태와 색채의 재구성에 관심을 가지고 그렸다면,
튀망은 관람객들이 가지고 있는 그림의 기저에 대한 재반의 지식을 시험해보고자 하는 의도로 이 그림을 그렸다. 각각 대상을 사진기로 찍고 오리고
재배열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인 것이다. 회반죽과 같은 희뿌연한 바탕에 물병과 각종 과일들이 마치 신기루처럼 서있다. 한편으로는 너무나 뻔한
주제이지만, 어딘가 모르게 낯설고 어디서부터 그림에 대해서 설명해야될 지 모르고 헤매게 된다.
이처럼, 튀망의 그림들은 안개
속에서 갑자기 무언가를 보았을 때 처럼 놀람과 충격 을 안겨준다. 알듯 모를 듯, 잡힐 듯 서 있는 그림 속의 대상들은 권력과 폭력, 질병과
고독 등에서 받은 상처와 타격을 관람객들에게 얘기하고 있다. 사진의 줌 효과를 암시하는 튀망의 그림들은 때때로 모든 걸 가까이에서 보여주기도
하지만, 가까이 접근할 수 없는 거리를 한없이 요구하기도 한다. 튀망은 „어떠한 것을 가장 잘 보여주기 위해서 난 많은 것들을 지워나간다“ 라고
설명하는데, 싸늘한 빈 바탕 위에 들어난 단순한 대상들은 그림의 핵심을 강조하는데는 결코 모자라지 않다.
뒤셀도르프 뤽 튀망
전시회의 참고책자에 전시회 담당자는 이와 같이 쓰고 있다.
„나는 이번 전시회에 연대순이나 주제별로 구분해서 그림을 진열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보는 관람객들이 자신의 개인적 역사적 경험들을 스스로 바라보며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는 대화의 장으로 마련하고자
했습니다.“
역사와 사물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집단의 힘을 결코 무시할 수 없지만 , 결국은 개인 개인의 사고방식이 집단적
사고를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런 관점에서 뤽 튀망이 제공하는 역사를 보는, 대상물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새로운 관점은 익숙함에
묻어 있는 우리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글 손희주(뒤쎌도르프 미술사)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