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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5-01-06 21:50:31, Hit : 1292, Vote : 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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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용's T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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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용의 작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아래의 텍스트만으로도, 충분히 배울만한 구석은 있어보인다.   명징한 것은.
머리는 생각을 하라고 있다는 것.   뭘 배우기만 위해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질문을 옳게 할 때 해답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 - 비트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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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회고시스템 위에 세워진 자서전적(自敍傳的) 궤적(軌跡) / 1990
이건용


1. 예술의 예외적 개념, 그리고 모더니즘 갈증

나는 어렸을 적부터 그림에 관하여서는 스스로 자신감을 가졌었다. 그 최초의 미술의 개념은 사물을 묘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라 부모님이 사다 주신 책들 속에 묘사된 그림들을 관찰하면서 비슷하게 그려내는 일에서이다. 이러한 관심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였는데 주변의 풍경이나 사물을 그린다는 것은 관심이 없었고 남의 그림을 흉내내는 것이 초대의 관심사였으며 그 그림들 속에 나타나는 어떤 기법들이 나를 감동시켰다.  6.25때(8살 때) 우리 식구들은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어느날 바닷가에 나갔다가 너무나 큰 군함을 보고는 이것이 환상이 아닌가 하고 입안의 침이 마를 지경이었다.

이 때도 그것을 그린다든가 만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단지 사람이 만든 것으로서 예상을 초월하는 크기와 정교함과 완벽함이 환상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나중에 제주도까지 갔다가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는데 산동네에 레이숀 깡통을 펴서 집 전체를 붙인 판잣집들을 보고 이것이 꿈속에서 보는 집이 아닌가 하였다. 이것 역시 최초에 군함을 보았을 때처럼 황혼 무렵에서 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 많은 깡통을 펴서 정교하게 붙였을까 하는 생각이 나를 감동시킨 것이었다. 그리고 서울로 수복 후 초등학교 6학년때 최초로 전국초등학교 사생대회에 참가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그때 우리학교에서 오직 한 명이 입선했는데 나는 그 친구의 수법을 흉내내고 있었으며, 나는 생각하기를 보다 좋은 그림을 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낙선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중학시절은 온통 새로운 그림을 관찰하고 연구하기 위해서 매우 열성적이었으며 중학생이 건방지게 국립이나 시립도서관에 있는 미술관계 도서를 모두 찾아다녔다. 그리고 나름대로 어찌나 그림을 많이 그렸는지 중2년때는 개인전을 가져야겠다고 기염을 토할 정도였다. 그 그림들은 풍경이거나, 눈이 이상하리만큼 큰 초상화들이었다.

무엇을 그리건 - 심지어 스케치하는 경우라도 - 모두가 왜곡하거나 과장, 생략된 내 멋대로의 새로운 기법의 그림이었다. 나의 그 당시 관심은 2차대전 이후의 뉴욕파나 프랑스의 앵포르멜회화에 이르기까지 최첨단의 작가들과 일종의  경쟁을 하고 있었다.  가끔 비가 오는 날이면 뚝섬의 둑 위에서 수채화를 그렸는데 - 아마도 이것이 나의 최초의 퍼포먼스(performance, 行爲美術)가 아니었나 한다- 겨울이면 영하의 날씨에도 물을 끓여가지고 수채화를 그리면 켄트지(화용지)에 성에가 낀 것처럼 얼면서 묘한 효과가 나듯 비오는 날의 비 맞으며 그린 수채화는 묘한 그림이 되곤 하였다. 소를 몰로 가는 농군이나 동네 사람들이 그런 내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도 미친놈 정도로 생각했을 것이다.  

나의 부모님들은 나를 이웃 학교인(나는 배재중·고를 다녔다) 예술고등학교에 보내 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별로 불만은 없었다. 생각하기를 그런 학교에가 보았자 더 이상 새로운 그림이나 그간 내가 찾아본 것 이상의 미술 정보를 보리라는 기대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건방진 고등학교 시절은 너무나 지루하고 무의미한 나날이었다. 대개의 경우 사생대회에는 빠지지 않고 참가하였는데 될 수 있는대로 상을 받고 싶어서 다른 아이들과 같은 기분으로 그리기를 의식적으로 노력했는데 가끔은 상을 받거나 낙선을 하였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는 그간에 그린 수채화를 교사 뒤의 고목 나무 밑에서 전부 불을 질러 나 친구들을 놀라게 하였다. 이러한 공연한 짓이라도 하지 않으면 더 어떤 일을 저질렀지 않았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초조해 하였다. 그 당시 건방지게도 예술에 대한 한 개념을 스스로 규정하고 있었는데 '예술이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개념들과 다른 예외적 개념에 속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가치기준에 비추어 쓸데없는 짓을 더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때 더 예술적일 수 있다'라는 생각이었다.  대학시절에는 화단전체가 마치 앵포르멜계열의 추상화나 조각을 판을 치듯 하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 많은 갈증으로 허덕였다.

그것은 앵포르멜 회화나 조각에서 느끼는 것은, 책에서 읽은 장황한 이론을 빼고 인간의 감정이나 필력 또는 거기에 동원된 물질들이 나를 매료시키기에는 구체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가장 최첨단적인 미국의 팝아트는 한국의 현실이 대중 매스 미디어화 되거나 산업화되지 않았기에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나의 예술적 방법론의 끝없는 변증법적 요구가 더 이상 채워지지 않는 상태에서 지도교수님의 칭찬이나 받아 보자는 심사에서 물고기도 아니고 여인누드도 아닌 환상적인 그림을 실기 시간에 그리곤 하였다. 그러나 방과후에는 날을 새워 캔버스에 별의별 짓을 다 하였는데 별 신통한 수 없이 졸업하고 말았다.  
졸업 후 나는 모 교수님의 화실에서 데생과 수채화를 지도하는 조교생활을 했는데 나를 괴짜라고 가끔 놀려대던 동기동창 김복영(미술평론가, 예술학 박사)은 그 당시 「현대미술의 차원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고 그와 함께「S·T(시간과 공간) 조형미술학회」를 조직하여 해외의 새로운 미술이론들을 주제로 토론회를 공개적으로 R자곤 하였다. 그때 내 눈을 크게 트이게 한 글이 두 개 있었는데 이우환(재일작가, 미술평론가)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과 조셉 코슈스(미국의 개념예술의 대표작가, 미술이론가)의 「철학이후의 예술」이었다.

전자의 글은 70년대의 일본의 모노파라는 전후 획기적인 미술운동의 이론적 근거가 된 기념비적인 글로서 나에게 매우 신선하게 와 닿았고 후자의 글은 역시 서양의 70년대 큰 흐름인 개념예술의 바이블과 같은 글이었다. 나는 이미 고등학교때부터 현상학과 언어분석철학에 대하여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고 특히 비트겐슈타인에 관하여서는 그의 언어논리의 토토로지에 미쳐 있다시피 하였다.  

사실 코슈스의 예술론은 언어분석철학자들의 말들을 짜깁기식으로 이어 맞춘 것에 불과하였지만 이제까지 예술과 예술품을 동격화하여 왔던 논리에 대하여 예술(개념)과 예술품을 분리시켜 '예술의 사고시스템'을 예술의 본질로 보았다는 것은 새로운 이론이었다. 극단적으로 시각예술을 보이지 않는 예술로 규정하거나 읽고 생각하는 사고 자체로만 보겠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볼 때 초등학교때부터 그 당시까지 '미술이란 무엇인가'하면서 새로운 변증법적 논리의 갈증을 지녀 왔던 나로서는 그 갈증의 전원을 코슈스가 명쾌하게 논리화시켜, 비트겐슈타인이 말한 바 '질문을 옳게 할 때 해답은 이미 주어진 것이다'가 실증된 것 같았다.  

그러나 이우환의 동양 노장사상과 메르로 뽕티의 현상학은 기조로 하여 '장소론'과 '신체성'을 결합시킨 그의 모노파적 이론은 서구의 현대예술이 고수하여 왔던 주관적 대상화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박진감이 있어 더 큰 동양적 상상력을 안겨주는 데가 있었다.

이 두 개의 예술론은 서로가 예술의 존재 양태에 있어서 사고(개념 또는 본질)와 존재(物 또는 현상) 사이에 갭이 있는 것 같지만 이미 이우환의 예술론은 그 자체가 동양의 자체이나 그리스시대로부터의 장소론이 새롭게 해석되어 '예술의 새로운 개념'이라는 면에서 코슈스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양면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더구나 메르로 뽕티의 신체론은 나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였고 내가 생각해 왔던 기법→이미지→개념 회로에서 나를 밖으로 밀쳐냈던 것이다.

2. 신체(身體)와 행위(行爲), 그리고 삶으로서의 예술

1971년 여름, 나는 국립현대미술관(당시의 경복궁) 맨 마지막 방에서 강사로 나가는 고등학교의 운동부 학생들과 거의 7시간의 작업을 하고 있었다. 마지막 방이라고 하였지만 실은 입구로 볼 때는 오른쪽으로 가장 가까운 방이었고 100평에 가까운 큰 방이었다. 작업은 처음부터 난항이었다. 경복궁 정문부터 싣고 온 한 트럭분의 진흙은 들여올 수 없어 나무만을 옮겨야 했다. 그것은 며칠전부터 비가 오고 있었기에 경내의 정초된 흙바닥이 약해서, 더구나 흙을 실은 트럭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내의 흙을 쓰기로 하였다. 이 작품은 「身體項-71」이라는 것이었는데 아름드리 나무가 약 2m에서 잘려지고 그 뿌리는 흙 속에 심겨져 있는 지층체(사각의 입방체)로 전시장에 옮겨 놓은 듯한 구조물이었다. 나무는 당시 고속도로를 건설하는 현장에서 뿌리째 뽑혀진 것을 구하였다. 작업은 미리 제작한 판넬 궤짝에 뿌리를 넣어 세우고 흙과 돌을 통 속에 넣어 깔아 가며 지층을 만들었다. 다음날 흙이 굳어졌다고 생각되어 외곽으로 판넬을 묶었던 철사를 끊어내자 폭음을 일으키며 판넬들은 약 5cm씩 흙으로부터 물러났다. 그것은 작업시 흙을 다져 가며 지층을 쌓아 갔기 때문에 축적된 흙의 힘이 일시에 작용했기 때문이었다. 판넬은 모두 제거하고 나니 상상했던 대로 사각의 지층째, 나무를 옮겨 놓은 대로였다.

이 순간을 혼자서 보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벅찬 감홍이었다. 나는 순간 중얼거리기를 "오! 메르로 뽕티, 나는 당신이 주장했던 '신체항'을 지금 실현하고 말았습니다. 당신이 지금 이 자리에 나와 함께 있다면 그 큰 눈이 더욱 둥그레졌을걸"하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일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그만한 용기를 갖기까지 신경과민(?)인 비트겐슈타인의 '사물을 떠난 언어'를, 그리고 노자와 장자와 얼마나 대화(?)를 나눴던가. 비트겐슈타인이 사물과 언어를 떼어내어 언어 자체를 반성하였듯이 나는 언어로부터 사물 자체의 신체를 떼어내어 '신체 자체'가 매개항이 되는 '세계 자체'를 열어 현전시키는 장소를 실현시켰다고 확신하였다. 그 큰 껍질체의 나무, 뿌리가 심겨진 상상 속의 지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장(場), 장자가 나에게 속삭였다. :

"자네 앞에 '現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네가 보고 있는 것은 나무냐, 지층이냐." 그러자 곧 뽕티가 속삭였다. "세계란 자기자신을 매개로 하는 신체항으로 만나는 것을 아느냐?"고.  나는 73년 「제9회 빠리국제비엔날」에도 동일한 아이디어로 참가하였는데 조르쥬 브다유(비엔날 총책임자, 미술평론가)가 프랑스의 공원수 하나를 구해 주어서 실현 가능하였다. 당시 문예잡지인 『뉴벨 르테르지』에서 장자크레베크(미술평론가)는 논평하기를 "세계를 보는 새로운 지평의 한 기념비를 정초하였다"고 평하면서 "이건용은 특히 감추어진 삶의 의식을 지리학 또는 지질학에 의해서 표명하고 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귀국후에도 신체성을 드러내는 입체작업은 계속하고 있었으나 한편으로 나 자신의 몸(身體) 자체도 예술의 미디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75년 백록화랑과 현대미술관(당시는 덕수궁)에서 「로지칼 이벤트(Logical Event)」라는 행위미술을 실현하기 시작하였는데 79년까지 50여 가지의 행위를 하는 의욕을 가졌었다.  

이렇게 초창기에 속하는 75년 현대미술관에서 행한 5개의 행위를 소개하면 ① 일정한 지점으로부터 반복적으로 왕래하며 다섯 걸음씩을 걷고, 멈춘 지점의 발 앞에 백목선을 하나씩 긋는 일, ② 건빵을 오른손으로 집어서 입으로 가져가는 행위였는데 반복할 때마다 팔의 마디를 기브스하여 그 일 자체를 의식시켜 주는 일, ③ 일정 거리를 뛰어서 열 번 왕복하며 녹음기 앞에 올 때마다 한번, 두 번……하는 식으로 열 번까지 세어 녹음하고 마지막에 녹음기를 재생하여 구령이 나오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한번 갔다와서는 "한 번"하고 외쳤을 때 녹음기에서는 "열 번"하는 것, ④ 두 사람이 마주보고 서서 걸어와서는 만나는 시점에서 잠시 서 있다가 되돌아가곤 하는 일을 계속하다가 갑자기 만난 지점에서 보조자의 따귀를  갈긴 후 다시 되돌아갔다가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만나서는 관중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일, ⑤ 녹음기를 틀고 거기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에 맞추어 녹음기와 같이 하나, 둘, 셋……이렇게 서른넷까지 세어 나가다가 행위자는 세기를 멈추고, 그러나 녹음기에서는 계속 그 이상의 숫자를 세어 나가는 일 등이었다(서른넷은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이를 두고 박용숙(미술평론가)은 '이건용은 관중의 기대를 완전히 배신하고 그들에게 아무런 의미도 주지 않고 비정하게 사라진다'고 하면서 일상적인 행위에 돌연 고장을 일으키게 함으로써 지금까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시선으로 행위 그 자체, 이른바 즉물화된 행위를 깨닫게 하여 '곧 자기(행위)가 자기(행위)를 확인케 하려는 현대 미술의 논리성이 자기동일성의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 외에 대표적인 몇 개의 이벤트를 소개하면 같은 해 「A·G 4인전」에서 발표한 「장소의 논리」1977년 서울화랑에서의 「나뭇가지 잇기(안과 밖)」 78년 대구 강정에서의 「이어진 삶」 79년 「제 15회 쌍파울로 국제 비엔날」에서의 「달팽이 걸음」 등이다.  「장소의 논리」는 나의 「로지컬 이벤트」의 대표적인 작품이 아닌가 한다. 행위는 관객들이 웅성거리고 있는 홀안의 중앙으로 갑자기 나타나 조용히 허리를 굽혀 일정면적의 원을 하나 긋고 원 밖에 잠시 서 있다가 중심을 향하여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기"하고 외치고 중심 안으로 들어가서는 발밑을 향하여 "여기"하고, 걸어 나가 자신의 뒤에 있는 원을 향하여 손가락을 어깨 위로 펴서 가리키며"저기"하고 외친다. 몇 번 반복한 후에 백목선을 밟으며 원을 따라 "어디, 어디, 어디··"를 계속 외치다가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은 장소가 몸이 움직임에 따라 관계의 개념이 달라지는 것을 보여주며 최종적으로 "어디"를 반복 외침으로써 장9場)의 논리를 교란 내지 증폭시켜 자문하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개하는 이벤트는 삶과 관련된 것들이다. 「나뭇가지 잇기(안과 밖)」는 사람들이 붐비는 오후 시간을 이용하여 화랑공간에서 생목가지들을 끈으로 이어서 화랑 출입구로 내보내는 것으로서 화랑 안의 관객은 나의 행위만을 보지만 결국 교통순경이 찾아와서 로터리의 교통이 방해된다고 저지시키려는 바람에 이어진 나뭇가지들이 차도까지 깊숙이 침범되어 화랑의 안과 밖이 원시적인 나뭇가지들에 의해 관계항이 이루어졌음을 알게 되는 행위였다.  「이어진 삶」은 대구 낙동강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서 - 나는 관중들과 강가의 숲 사이를 걷다가 갑자기 허리를 굽혀 큰 나무의 뿌리가 드러나도록 손으로 모래흙을 열심히 파내기 시작한다. 서서히 뿌리는 뻗은 방향으로 드러나기 시작하고 손으로는 더 이상 팔 수 없는 한계에 이르자 하던 일을 멈추고 그곳으로부터 나의 소지품들을 이어나갔다. 최종적으로 나의 몸까지 이었다.

잠시후 소지품들을 모두 회수하고 뿌리도 덮은 다음 뿌리가 시작한 부분으로부터 손가락으로 선을 그으며 멀리 사라졌다. 이렇게 함으로써 오래전부터 거기 서 있던 나무와 나는 관계항이 이루어졌다.  이 외에도 나는 여러 가지 이벤트를 실현하였는데 79년 「제15회 쌍파울로 국제비엔날」에서 보여준 「달팽이 걸음」은 지구상에서 생활을 영위하는 인간의 삶의 족적을 보이는 행위였다. 이 행위는 전시 오프닝 날 큰 홀 안의 구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진적으로 이동하여 그 반대 끝인 입구를 향하여 쪼그리고 앉아 발바닥으로 조금씩 움직이면서 발 앞에는 백목선을 좌우로 무수히 그어댔다. 오랜 시간이 경과하면서 백목선의 띠는 이어져 나갔고 발바닥이 문대고 지나간 두 개의 선이 생겨났다. 그것은 손과 발바닥이 작용하여 신체가 만들어 간 흔적에 불과하지만 시간과 더불어 이어진 생명의 호흡과 같은 족적이 생겨났다.

3. 역사,문화의 회고시스템으로서의 예술양식

나는 78년 서울의 생활을 모두 청산하고 대전의 톨게이트 근방,  비래리로 부족(식구)들을데리고 내려왔다. 이렇게 80년대까지 3년간의 생활은 대학강사 생활이 어서 돈이 생기면 연탄과 쌀을 샀고 식초 간장에 담근 마늘쫑이나 푸성귀 등으로 연명하던 생활이었지만 그 공생이 나를 어떻게 통과하였는지 모르던 시절이었다. 길거리에서 주워 놓은 돌이나 나뭇가지, 끈, 또는 백목선 몇 개로서도 충분한 예술적 언표(言表)가 가능했던 시절이 아니었는가 한다.81년, 국립군산대학의 교수로 가면서 생활이 안정을 찾았고, 아카시아 나무와 은행나무를 사용하여 보다 확고한 입체 작품을 만들었고, 신체 드로잉을 캔버스에 유화로 제작하는 일로 날이 새는 줄도 몰랐다. 다라서 83년부터 매년마다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86년 「서울·요꼬하마교류전」이 있어 나는 요꼬하마와 동경 「사운드획토리」에서 퍼포먼스를 모두 9개나 발표하는 의욕을 보였다. 이때부터 나의 퍼포먼스는 관객과의 대화가 중요한 부분으로 나타나기 시작했고 삶의 의미를 용해시키면서 역사와 문화와 일상사의 회고 시스템 안에서 풍부하게 표출되었다.  동경에서의 행위는 그곳에서 만난 일인(日人)들의 명함을 이용한 것도 있었는데 하나하나의 명함에 관련된 내용과 살아 있는 내 몸이 그곳에 옴으로써 관계된 다양한 문제들을 총체적으로 반응하는 퍼포먼스였다.

그것은 70년대의 즉물적인 단일행위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는 것으로서 하마다(일본의 행위미술가)는 신문에 쓰기를, 어떻게 보면 콘셉츄얼한 행위지만 서구의 뉘앙스와는 다른 유머가 풍부한 퍼포먼스였으며 일본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다고 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설치작품(installation, 立體物로 이루어진 공간 내의 설치물)에서도 동시에이루어졌는데 88년 나우갤러리에서의 설치전에 출품한 「물(水)로부터」는 재미가 있었다. 투명플라스틱 음료수 병을 뉘어서 윗부분을 오려내어 개방하고 그 끝을 낚싯줄로 천정으로부터 매어 달고 물을 채운 다음 금붕어를 넣고 줄기가 늘어진 식물을 길게 병에 꽂아서 늘어뜨린 것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해에 발표한 「예술의 소멸」은 내가 오래전에 발표한 기존 입체작품들과 주방이나 세면장의 도구들을 벽에 일렬로 걸고 20년 묵은 아버지 서재의 신문을 쌓아 놓고 화초나 물 바께쓰, 거울, 메달 등을 동원하였다.

이러한 류의 작품들은 어떤 논리적 공간에 의해 단일하게 폐쇄된 상황에서 벗어나 문화적 상황 안에서 대립되는 어떠한 것이라도 삶과 역사의 총체성 안에서 자유롭게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예술은 보다 많은 사람들과 소통되고 사용됨으로써 어떤 양식이 고집되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고 그 소멸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야 할 것이다.  같은 해 여름, 친구인 이케다 이찌(일본의 행위미술가)와 나는 한국, 동경, 뉴욕을 연결짓는 '동방으로부터의 제안'이라는 3년간의 전시 프로젝트를 수립하였는데, 그 첫 전시가 「동숭아트센터 갤러리」에서 있었다.

나는 대형의 기존 드로잉(하나는 물고문을 주제로 한 것인데 발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고 또 하나는 그것보다 전에 제작된 「탄생」이라는 임부를 주제로 그린 것이다(을 방의 구석 양벽면에 붙이고 4대에 걸쳐 사용하여 왔던 독 8개가 놓여지는 설치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작품의 제목은 「항아리 속의 文化」였다.  

나는 또한 이 설치물을 이용하여 퍼포먼스를 하였는데 그중 제일 큰 독에 들어가서 독이 갖고 있는 가족과의 관계라든가 이것은 한국의 '어머니 문화'를 대변하는 것으로서 한국인의 삶의 가장 중심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150년 묵은 것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서서히 다리를 굽혀 완전히 독 속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내 말이 잘 들리느냐고 묻고, 밖의 소리가 이곳에서 잘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도 우리의 단절된 문화의 역사의 소리를 듣고 있다고 하였다.

이 역시 모든 대화들은 다시금 서서히 몸을 일으켜 독 위로 몸을 세우면서 하는 행위였다.  나는 그해 12월 「나우갤러리」에서 개인전을 하였는데 30평의 화랑 천장에 플라스틱 물통(한강물을 채웠음)을 150개 매달았고 바로 그 아래에는 빨래비누를 놓았으며 그 사이 공간에 독 몇 개를 위치시켰다. 오프닝에는 한강물로 머리를 축이고 비누거품을 만들어 항아리의 주둥이에 바르면서 물로 생긴 최근사의 한국인의 아픔을 되새겼다. 이러한 일련의 작품들은 모두가 한인의 역사와 문화를 소생시키기 위한 <삶의 회고시스템> 위에 위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90년 동경 사가쵸화랑에서의 퍼포먼스도 맥을 같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전시를 위해 큰 독 7개와 자배기 하나를 가져갔다. 독은 주변에 놓여졌고「자배기」는 두 귀에 로프가 묶이어 천정 4m 위의 앵글에 연결하였고 「자배기」에는 동경의 물이 가득차 있었다. 그리고 머리에 비누거품을 만들고 독에 문대기 시작했는데 "'문화와 역사의 회고시스템'은 우리가 어디로부터 왔으며 우리는 누구인가를 알려 줄 것이다"하고 외쳤다. 그리고 로프를 잡아당기기 시작했는데 자배기 속의 비누거품은 그것이 매달리면서 전시장 바닥으로 쏟아졌고 무거운 자배기는 공중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까마귀 소리를 세 번내었다. "이 까마귀는 20년전 내가 제주도 피난 시절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 있는 것을 동경의 첫날 아침에 창 밖의 정원에서 보았다"고 하였다. 일본은 섬나라였기에 도심 안에서도 까마귀를 볼 수 있었다.

나는 또 말하기를 "그 놈(까마귀)들은 20여년전의 모습 그대로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문화적 회고시스템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지는 않지만 그러나 우리는 우리들의 문화적 회고시스템을 회복할 시기가 왔다"고 말하였다. 자배기는 내가 잡아당긴 로프에 의해 3m 50cm까지 올라갔고 그 로프를 고정시켜 팽팽하게 된 로프를 만지면서 계속 이야기를 했고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날카로운 칼로 잘라 버렸다.

순간 자배기는 폭음을 일으키며 비누거품 위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래서 퍼포먼스는 다 끝났지만 관중들은 5초간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잠시 후 40대의 한 여인이 달려와서 나를 끌어안으며 눈물을 흘렸다. 뒤이어 여러 사람들이 나에게로 달려와 끌어안거나 손을 잡았다. 나는 그들이 왜 공감하는가를 알고 있었다.  귀국 후 나는 또 「판문점과 브란덴부르그 1945∼1990」이라는 전시에 참가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시간적 여유가 없었지만 주제가 마음에 들어서였다. 올해는 해방 45년, 6.25 40년, 4.19 30년이 되는 해이며 독일이 통일이 되는 해이다. 한국이라고 남북이 통일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나는 이 퍼포먼스를 위하여 남북군사 분계선의 폭인 4km를 상징하는 고무줄을 동원했고 그것을 1945개의 선으로 화랑 안의 두 기둥 사이를 위에서 아래까지 마치 발처럼 촘촘히 감았다. 그리고 네모난 쇠북을 벽에 만들어 걸었으며 각기 그 위에 1945년, 1950년, D.M.Z. 1960년, 1990년을 녹색으로 썼다. 그리고 해방 45년을 상징하는 45개의 빨랫비누를 준비하였다. 행위가 시작되자 고무줄 사이로 손을 느린 속도로 내밀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 내용은 우리들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민족의 분단이 왔다는 것과 그 역사 과정에서 세계 도처에 흩어진 한인들과 잠식되어 버린 사람들과 우리 전부를 위해 한국의 예술은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고무줄에 온 몸을 부딪혔고 그 몸이 앞으로 빠져나와 고무줄 한가닥을 길게 잡아당겨 입구까지 가서 건닥카로 고정시키고 협조자들에 의해 온 홀 안이 흰 거미줄처럼 고무줄로 가득 차도록 기둥 사이의 고무줄을 자아 당겼다. 그리고는 철판 북이 있는 곳에서 45개의 빨랫비누를 던졌는데 마치 큰 종처럼 울렸고 대형거울이 바닥에 깔려 있었는데 튕겨나온 비누들에 의해 깨졌다. 최종적으로는 기둥의 한쪽 부분의 고무줄을 칼로 잘라냈기에 기둥과 벽들에 온통 고무줄이 튕겨 나가 매달리고 말았다.

4. 결언

나는 이 글에서 될 수 있는 한 행위의 현장성을 강조하여 이 글을 대하는 독자들에게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도록 애를 썼다. 그러나 제한된 지면으로 15년간의 나의 퍼포먼스 행적을 그린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구나 설치작품, 드로잉, 행위 등 다양하게 작업해 왔던 나로서는 행위미술로서만 따로 분리시켜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려움도 있었다. 그리고 사진의 충분한 도판이 들어가야만 실감을 도울 수 있을 것인데 그렇지 못한 점 또한 크게 제한 받는 일이 아닌가 한다.  

이 그을 씀에 있어서 하나의 의도성을 가졌는데 그것은 일반론적인 것보다는 자서전적 기록을 통해서 한 예술가의 지적 발전 과정을 밝히고 그것이 그와 유사한 경향의 작가들이나 그 시대의 작가들이 겪는 지적 탐구의 범위에 적용되는 것을 암시하고자 했다.  나는 '문화회고시스템'이라는 말을 최근에 와서 많이 사용하였다. 사실 근대나 현대는 미래지향이나 앞서 나간다는 의미가 많이 함축되어 있고 회고나 과거라는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인식하여 왔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더니즘이 지녀 왔던 하나의 낙관론에 불과하였고 현재를 주체적으로 창조하고 살아오지 못했던 사람들에게는 자기 문화와 역사에 대한 회고시스템 위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하는 때인 것 같다.  

서양은 B.C. 1100년 도리스족이 반도로 내려오면서 먼저부터 있었던 에게해의 문화를 600년간 파괴하고 그 위에 자신들의 문화를 건설했으며, 그 후 삼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들이 문화와 역사의 중심으로부터 크게 벗어난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들은 항상 시대마다 시대적 패러다임은 달랐지만 그들의 중심에서는 벗어나지 않는 문화적 회고시스템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늘날 한국인들도 자신의 역사와 문화의 회고시스템 위에 반만년을 회고하고 그 역사 위에서 오늘의 삶을 바라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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