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초이사진전/ 내 마음이 머무는 곳
인사아트 제3전시장(02-736-1020) 2005-04-20 ~ 2005-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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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enses-헤이리 5개의 공간, 9개의 시선
주관 기획_구름 프로젝트 2005_0401
▶ 2005_0420
www.gooroom.co.kr 초대일시_2005_0402_토요일 9 Senses전 갤러리 투어_갤러리 이비뎀에서 출발_03:00pm 오프닝 리셉션과 음악회_북하우스_05:00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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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소: 인사아트쎈타5층(02-736-1020) 전시일정: 2005년4월20일 ~ 4월26
일까지
전시서문
피안(彼岸) NIRVANA
1970년대부터 줄 곳 동양적, 아니 우리사진이란 탯줄을 잡고 작업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하는 전시도 역시 그 동안 해 오던 “기운생동, 무념무상”의 동양적 사고의 큰 틀 속에서의 연장입니다.
피안(彼岸)이란 자아에 대한 집착이나 생각으로부터 벗어난 득도(得道)의 상태로서 아무 생각이나 형태마저 떠오르지 않는 무념무상(蕪念蕪想)의 경지와 맛 물려 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피안의 경지는 차안과 대치되는 심상의 형이상학적인 세계로서 삶과 죽음마저도 초월한 상태입니다.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IDEA)와는 다른 개념으로 피안은 바로 나 자신 안에서의 변화되는 어떤 상황일 것입니다.
글/ 이완교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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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ltaleDreams and Memories
2005_0413 ▶ 2005_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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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13_수요일_05:00pm작가 특강 1차_2005_0413_수요일_03:00pm / 2차_2005_0414_목요일_04:00pm
장소_이화여자대학교 조형예술대학 A동 524호
이화아트센터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 11-1번지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 건물 2층 Tel. 02_3277_2482
0. Introduction ● `telltale' 단어는 원래 바다에서 항해 하는 `보트의 방향'을 제시하는 `꼬리돗' 이라는 뜻이다. 이는 말하다의 tell과 이야기의 tale가 함게 어울어져 만들어진 조어로써, 이러한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우리는 또다른 언어게임을 생각하게 된다. 이 tellale 전시회는 여러 다른 '이야기'가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사고의 흐름을 따라 하나의 맥락을 만들듯 그렇게 형성되었다. 이렇게 형성된 큰 이야기인 본 telltale전시회는 각각의 이야기의 방향과 상관관계가 복잡하게 연계되어 있다. ● 이 글은 그를 무리하게 설명하며 관람객을 설득하려 하기보다 '개별적인 작가들의 개인적인 이야기들'의 해석을 돕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현장에서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지는 내용들, 즉 개인의 서사narrative와 기억memory와 연관된 작업경향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기 위하여 씌어졌다. 이러한 내러티브에 대한 이해와 흐름은 뉴 미디어의 발전 이후 21세기 현대미술 내에서 과연 내러티브는 어떤 지표로 작용할 것이가에 대한 탐구를 시도하는 전시이며, 그의 방향성을 다시한번 생각해 보게 될 것이다.
1. Maker of Tales ● 우리는 모두 많은 이야기를 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구석기 시절부터 사람들은 모닥불 앞에 모여앉아 그들의 삶을 서로서로 이야기하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오랜 과거의 이야기들은 단지 '말'로만 되어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하는 톤, 표정이나 손동작, 몸짓 하나까지도 그 이야기를 전하는 중요한 `서사narrative'의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즉 이야기란 단지 `언어'로만 이루어지지 않고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표현수단이 동원되는 것이다. ● 그러면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이야기란, 심지어 아주 단순한 하루의 일상을 이야기할 때도 그것은 매우 추상화되거나 `실제 사실'에 대해 상당히 개인적인 표현으로 장식되어진 것이기 쉽다. 예를 들어 한 사냥꾼이 자신의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사냥은 매우 용맹스러운 것'이라는 내용을 전하고 싶어서 그럴듯한 분위기를 위해 과장된 많은 요소들을 동원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이야기 혹은 전설fable을 말하는 행위'는 개개의 표현이 담긴 '이야기 메이커maker of tale'가 되는 셈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유도한다 -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이야기를 만드는가? 바로 우리의 꿈과 기억memory들이다.
2. Tales, Dreams and Memories ● 우리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삶과 연결된 기억들이 있다. 그러한 기억들은 그 형태가 어떠하든 우리 삶에 매우 중요한 흔적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기억'은 강한 문화적 창작의 근원과 힘이면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예술의 형태들, 즉 문학이나 미술, 음악 등 전반적인 분야에 빼놓을 수 없는 단골손님과 같은 주제가 되었다. ● 기억memory이란 단순히 내적인 이미지를 회상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20세기 초 푸르스트Proust가 열망하며 찾던 것처럼 시간의 흐름으로 잃어버린 오감적 체험과 감정을 다시 느낄 수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푸르스트의 열망은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에서 잘 드러난다. 찾고자 하는 기억을 아무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어 함들어 하던 주인공 마르셀(자아)은 쁘티마들렌(작은 불란서빵)을 차에 찍어서 먹는 순간 겉잡을 수 없는 기쁨과 환희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는 그 이유도 모르지만 그러한 배경에는 마르셀의 어린시절 중 가장 기뻤던 시간이 이 빵의 냄새, 그리고 맛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프루스트에 의해 탐구된 시간과 기억의 개념, 그리고 그에 따른 '서사(narrative)'는 20세기초 초현실주의자들을 비롯한 모더니스트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 가장 최초의 모더니스트 작가로 불리는 구스타브 플로베르는 왜 `마담 보바리'를 6년에 걸려 쓸 수 밖에 없었는가. 그는 도대체 무엇을 추구하기에 바람난 유부녀의 치정과 같은 이야기를 서술하는데 6년이란 시간이 걸린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그가 추구하는 최상의 문학적인 가치인 '보편적인 미학'을 위해, 즉 객관적인 시각과 그 어떤 접근으로도 읽혀질 수 있는 글을 쓰고자 했던 그의 노력으로 보인다. 더욱이 불어로 그러한 시도를 한 것이기에 숱한 시간을 요한 것 같다. ● 또 20세기 서양미술사를 입문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처음으로 읽어내야 하는 두 권의 책이 있다면 그것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찿아서'일 것이다. 그 책을 읽은 사람이나 최소한 읽으려 시도한 사람이라면 처음 시작할 때의 그 어마어마한 절망감에 대해 아마도 동의할 것이다. 그것이 영어나 불어여서가 아니다. 두 책의 첫 페이지는 단지 한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문장의 마침표까지 가는 시간이 상당히 길다. 글을 읽는 독자는 도중에 그들의 의식적인 사고의 흐름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없다. 마침표 하나로 책의 한 페이지를 채웠던 그들의 고뇌는 무엇이었을까? 특히 제임스 조이스의 장편소설 'Finnegan's Wake'와 '율리시스Ulysses'는 각각 하루밤의 이야기와 하루의 이야기를 서술하고 있다. ● 그들이 추구했던 것, 그들의 사고와 비젼은 20세기 현대미술에 입문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거쳐야 할 고뇌가 아닌가 싶다. 2002카셀도큐멘타의 공동 큐레이터인 사라 마하라지에 의하면 마르셀 뒤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피해갈 수 없다 한다. 즉 그들이 한정된 언어인 '글'이라는 형태로 도달하고자 했던 고지는 단순한 서사narrative가 아닌 오감과 감정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진 상태이며 그에 의해 보편적 인간의 개인적 스토리를 가장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함이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이러한 서사narrative의 개념은 현대미술에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 미술에 있어서도 지난 수세기를 걸쳐 가장 중요한 주제인 이 서사는 모더니즘시기를 거쳐 지금은 어떠한 형태로 보여지는가? 문학적으로 탐구로써, 해방된 시간적 공간적 개념의 서사는 어떻게 나타나는가? 또한 이러한 서사narrative의 개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맥을 넘어서 과연 보편적인 미학common aesthetics의 가치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인가? 또한 작품과 관객의 상호소통이 더욱 중요한(모더니즘 시기에는 이 소통조차 부정되었다) 이 시대적 환경에서 관객을 어떠한 반응을 보일 것인가?
3. Narrative form in Contemporary Visual Art ● 미술은 거의 19세기까지 여러가지의 서사narrative를 주제나 배경으로 많은 형식적 방법안에서 발전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중세시대의 종교화들이나 Bayeux의 tapestry, 르네상스의 알레고리 페인팅, 종교개혁이후의 많은 정물화와 역사화들이 모두 그러한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그림들은 각기의 시간성들이 어떤 원칙과도 같이 배경에 면면이 흐르고 있고 그 시간적temporal 흐름 안에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양한 시간의 흐름도 설명되고 표현되었는데 때로는 인물의 소지품에 담긴 이야기가 시간을 은밀히 제시하기도 하고 한 장면에 다른 시간의 흐름을 병치하여 서사의 내용을 더욱 강조하기도 하였다. ● 18세기 독일 미학자인 레씽(Lessing)이 정의한 서사, 즉 내러티브narrative는 시간적temporal/ 공간적spatial적인 것으로 구분되어 나누어져 있었다. 곧 시간적인 것은 문학적 텍스트로 나타나고 공간적인 것은 회화적이라 불릴 수 있는 것으로 나뉘어졌다. 이러한 구분은 오랫동안 내러티브에 대한 정의로 읽혀졌으며 19-20세기에 들어서도 중요한 지표로써 작용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린버그적 모더니즘이론(회화의 평면성이 가장 최고로 강조되었던)이 공간적 내러티브의 최상의 정제된 형태가 아닌가 한다. 또한 그러한 모더니즘적 개념이 20세기에 시간적/공간적 내러티브 형식을 동시에 보유한 영상과 사진 매체가 순수미술의 영역에 진입하는 것을 더디게 한 이유라는 것은 이미 많이 논의 되었던 터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미디어의 보급과 확장은 결정적으로 작가들이 새로운 내러티브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 그들의 언어로 새로운 작업을 창출하게 한 요인이 되었다. 과거 18세기 이후 지속된 내러티브의 시간적/공간적 구분은 이제 그 다른 서사가 결합된 작업으로 방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4. Contemporary Visual Art and Tales ● 이러한 20세기의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통한 미디어의 발달을 말하기 전에 그 시대적 상황에서 등장한 중요한 비평이론을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프로이드Freud의 무의식세계에 대한 연구이론이다. 하지만 매우 과학적 심리학에 치우친 나머지 자신의 무의식세계(self unconsciousness)이외의 다른 spirituality를 배제시킴으로 인해 프로이드의 심리학은 우리가 언제나 무의식적으로 접하는, 또 다른 외부적인 영향을 받고 사는 인간을 연구하는 부분에 있어 상당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해 비해 동시대 사람으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고자 한 융Jung의 이론은 설득력이 있다. ● 융은 개인의 자아의 무의식세계 이외에 그 주변을 둘러싼 환경과 인간 삶의 보편적인 무의식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이론을 제시했다. 이러한 이론적 내용을 초현실주의라는 새로운 미술의 마니페스토로 풀어낸 사람이 마르셀 뒤샹과 초현실주의자 작가들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은 그때까지 강력히 지지되어 시공간적인 제한을 받던 내러티브의 구분도 넘어설 뿐 아니라 작품을 생산하는 기존의 미디어 자체도 극복하고 넘어선 작가들이었다. 융에 의하면 우리는 개인적인 신화와 스토리fable가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가 자신을 돌아볼 때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각각의 삶 속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을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의 꿈과 무의식 중에서 때로는 보편적인universal/common 것들을 경험하게 되며 이것이 우리의 내면세계에까지 연결되는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현대미술의 내러티브와 그 흐름을 볼 때 매우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 작가의 개인적인 신화나 삶의 기억들은 그들의 문화와 환경의 다름을 넘어서 인간의 보편적인 질(quality)을 공유하는 내러티브를 이루게 된다. 작가들의 무의식세계와 정제된 상상력의 세계는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마술적인 연금술 과정을 거쳐 그들의 작품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본 전시 텔테일telltale은 그러한 작업에 나타난 서사와 개인적인 기억에 대한 탐구이다. 어떻게 작가들이 개인적인 이야기를, 그들의 미디움을 통해, 우리의 기억과 환치할 수 있는 '이야기'로 풀어내는가를 살펴보는 전시인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와 사회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의 개별적인 기억들이 공공의 서사적 가치로써 소통되는 장은 흥미로 가득할 것이다.
5. Telltale

자독 벤 데이비드_Art School_혼합매체_2002
자독 벤 데이비드 Zadok Ben-David (Yemen, Israel)_작가는 '아트 스쿨'이라는 제목하에 오래된 미술대학 시절을 이야기한다. 같은 스튜디오를 사용하던 영국학생이 청소부Morris에 의해 다시 제조된 작업으로 학교 최고의 작가로 인정되는 아이러니한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이방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과 그러한 미술계의 구조와 작품성에 대한 비평의 시각을 제시한다. 작은 암실의 바닥은 소금으로 채워지고 그 위에 투영되는 바닷물결 위에 떠 있는 작가 자신의 형상은 마치 피터팬이나 또 다른 세상의 엘프elf와 같은 모양으로 그 이야기를 전한다.

피터 칼레슨_Birds trying to escape their drawings_90×128×6cm_2005
피터 칼레슨Peter R. Callesen (Denmark)_한장의 A4 용지에서 마치 마술과도 같이 생성이 되는 피터 칼레슨의 작업은 자신의 어린시절 추억과 환타지fantasy를 소개한다. 주어진 종이 한장에서 시작되어 그 빈 종이 안에서 엄청난 변화와 이야기를 끌어내는 피터의 작업은 종이의 섬세함과 연약함으로 인해 더욱 감정의 고조를 가져온다. 다리가 하나 부러진 병정인형은 한 다리로 서 있는 무희와 사랑에 빠지며 한번도 그들의 사랑이 확인되지 않은 채 벽난로에 던져져 죽음을 당하지만 그 둘은 불속에서 합쳐진다는 아름답고 슬픈 안델센의 동화이야기가 그의 작업에서 흘러나온다. 하지만 종이 한장의 양 끝에 서서 결코 만날 수 없는 이 두 개체는 그러한 안타까운 감정을 더욱 고조시키는 상황을 재현한다. 그 뿐아니라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불가능한 비상을 하는 수많은 나비와 새들의 몸부림은 인간과 그 모든 생명있는 것들의 삶의 현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또다른 맥락(context)을 창조한다.

아나 카트리나 돌븐_The girl's room_비디오_2004
아나 카트리나 돌븐A K Dolven (Norway)_스칸디나비아의 인테리어의 느낌이 느껴지는 선명한 코발트블루의 벽지로 장식되어진 방은 어느 노년의 여인에게 상당한 위안을 주는 장소인 듯하다. 물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과 장소이지만 그곳에서 그 노인은 평안함을 느끼고 동심의 나라로의 갈망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잔잔히 느껴지는 시간의 흐름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움직임으로 우리에게 전해진다. 물론 이러한 밝은 분위기 안에서 우리는 또한 매우 암울한 느낌을 얻게됨을 배제할 수 없다. 마치 정신 치료를 받고 있는 듯한 느낌도 주는 아나 카트리나의 작업은 노인의 과거 동심을 향한 기억인가, 아니면 어린 소녀의 예언과도 같은 꿈인가?

워사 엘젠_Crystallizing Chandelier_유리 어항, 소금물, 샹들리에i_61×61×61cm_1998
워사 엘젠 Asa Elzen (Sweden)_어느 물체가 물 속에 침강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이미 많은 서사를 담고 있다. 특히 20세기 초반에 북유럽 스웨덴에서 발견된 샹들리에의 침강과 그에 맺혀진 크리스탈은 시간과 시대적 역사성과 같은 상징성을 가진 작업이다. 2004년 광주비엔날레에서 제작된 웨딩 드레스의 크리스탈라이징 작업과 마찬가지로 이 샹들리에 작업도 작가의 행위에 의해 만들어진 즉,`생성된' 생산물이지만 침강이 주는 죽음의 의미와 순결한 결정체라는 크리스탈의 탄생은 매우 대조적인 아름다움을 창조한다. 또한 가장 환상적이고 파티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러한 샹들리에나 웨딩드레스와 같은 소재는 개인적이면서 동시에 공동체적인 기억들과 연결된 팬터지로서 관객을 연결시키는 고리가 된다.

아비쉬 케브라쟈데_Sweet child in time_Edition 1/3_229×305cm_2005
아비쉬 케브라쟈데 Avish Khebrezadeh (Iran)_3장의 종이에 그려진 연필드로잉에 투과되는 아비쉬의 애니메이션은 매우 시적이고 섬세한 느낌을 전달한다. 한 구석에 앉아 자장가를 불러주는 아이는 마치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어린왕자Petite Prince의 이미지이다. 그 어떤 특정한 문화적인 코드가 드러나지 않는 무명의 아이는 아무런 `장식적'(fabulised)이지 않은 표현으로 조용히 노래를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은 잠이 든다. 현실과 꿈 사이의 공간과도 같은 이 투명한 공간은 언어로 쉬이 설명될 수 없는 수 많은 이야기를 담고 관객에게 다가온다.

신미경_Translation-toilet project_비누_2004
신미경 Meekyung Shin (Korea)_복제와 재생산을 즐기는 현대미술의 양상 속에 오리지날리티의 이슈를 다시 만들어낼 수 있는 독특성uniqueness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비누로 된 보살상은 공동체에 의해서 종교적인 염원 형식의 votive sculpture가 되어 만져지고 사용되면서 그 시간적 과정 속에서 마치 고대 조각과 같은 아우라로 변형된다. 비누의 강한 냄새는 머리 속에서 그려지는, 보살상이 놓여질 법한 사찰의 내음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또 하나의 일시적이며 선별적인 기억을 선사하는 것이다.

제인 심슨_Virgin Queen_흰가죽_92×160×75cm_2004 제인 심슨_Ice Storm_혼합재료_2003
제인 심슨 Jane Simpson (Britain)_영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영국의 전통적인 가구인 체스터필드 가죽 소파는 그야말로 매우 `영국적'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이는 이미 국제화된 코드로 이 존재 자체가 영국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전한다. 하지만 이것이 `Virgin Queen' 이라는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순간 그 기능성과 문화적 코드가 배제 되고 그에 또 다른 이야기가 부여되는 것이다. 소파의 기능은 앉기 위한 것이지만 이 흠하나 없는 흰색의 소파는 일상적 소파가 제공하는 것과는 달리 쉽게 앉을 수 없는 어떤 금기의 느낌을 준다. 또한 작품의 제목이 암시하듯 이 작업은 `처녀성'이라는 순결의 느낌이 흰색에 의해 더욱 강조가 되고 있으며 고급스런 가죽냄새와 더불어 이러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메모리에 의해 선택된 조각적 물질과 자신을 신이라 칭한 절대군주인 엘리자베스의 이미지는 이 작품을 통해 동시에 교묘하게 연결이 된다.

안성희_TV Garden 0503-6, 12, 9, 22, 16, 38_디지털 인화, 라이트 박스_2003
안성희 Sung-hee Ahn (Korea)_시간의 암시를 주는 오래된 텔레비젼 위에 병열적으로 여러가지 꽃병들이 서있다. 이 꽃병들은 작가의 사진작업을 위한 인위적인 진열이 아니다. 이 병들은 각기 다른 여행이나 삶의 체취를 담은 시간적 서사를 담을 뿐 아니라 여전히 하루하루 반복적으로 꺽어지는 마당의 장미송이들이 담는 공간이기도 하다. 즉 이 병들은 집주인의 취향을 그대로 전달하는 것이다. 꽃들은 17세기 정물화의 memento Mori를 연상케 하는 동시에 각기 다른 시간들의 움직임이 한장면의 사진으로 존재함으로써 공간과 시간적 서사적narrative 만남을 가능케 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시아 톰슨_무제_혼합재료_27×23cm_2005
마르시아 톰슨 Marcia Thomson (Brazil)_마르시아 톰슨의 작업은 작은 메모패드나 빈 오선지와 같은 공간에서 시작된다. 수많은 글들과 음악 노트들 안에 작가는 연필드로잉으로 반복된 선을 그리고 있다. 때로는 아크릴 박스와 같은 규정된 공간에 페이트 튜브를 짜넣어서 채워넣는 작업을 하는가 하면 레이스의 뚫린 공간으로 페인트를 흐르게 하여 만드는 조각sculpture 등 그녀의 작업은 기존의 형식적 공간에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물질을 부가함으로써 새롭게 변형시키는 전이(transferential point)의 상황을 경험케한다. 매우 작고 섬세한 연필드로잉과 알 수 없는 이미지로 연결되는 마르시아의 영상작업은 모더니즘의 공간적 내러티브(spatial narrative)에 반복으로 인한 시간적(temporal)흐름이 덧입혀지는 양상을 전개한다.

세실리아 웨스터버그_Sara and Tobias_애니메이션 장면_2004
세실리아 웨스터버그 Cecilia Westerberg (Denmark)_작품의 제목인 사라와 토비아스는 덴마아크에서는 매우 흔한, 마치 우리의 철수와 영희와 같은 이름이다. 즉 일상의 모든 남녀를 상징하는 사라와 토비아스의 이미지는 작은 애니메이션의 움직임들로 인해 그들의 정신적 상태와 관계를 암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 지는 많은 관계들 사이에서 소망하는 것과 현실적 상황, 바라는 것과 바랄 수 없는 상황 사이에서 끊임없는 긴장감이 전해진다. 작품의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정제된 슬픔이 내재되어 느껴지는 작업이다. ■ 이지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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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cycle Girl박정원 회화展
2005_0419 ▶ 2005_0428
박정원_자전거소녀_판넬에 아크릴 채색_120×120cm_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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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5_0419_화요일_06:00pm
다빈치 갤러리
서울 마포구 서교동 375-23 카사 플로라 지하
Tel. 02_6409_1701
blog.naver.com/64091701
生의 한가운데, 소녀들의 한가운데 ● 박정원은 자신의 그림들에 대해서 ‘가학적’이라거나 ‘병적’이라는 일탈(逸脫)적인 평가를 가장 많이 들어 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그림에는 ‘남자가 없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곧 남자가 보이지 않는 그녀의 ‘일탈적인’ 그림들을 지켜보다가 조금씩 안타까워져 갔다. 내가 소년이었을 때, 그림 속의 소녀들처럼 잘려지고 뒤틀려진 불구이거나(거의 모든 소녀들), 목마를 타는 대신 척추에 봉이 꽂혀져 목마처럼 돌아가고 있거나(목마소녀), 항문에 바퀴가 움푹 꽂혀 있는데 양 다리를 양 손으로 붙잡아 태연히 올리고 있거나(자전거 소녀), 다리가 셋인 기형이거나(수상한 다리들), 땅따먹기를 하는데 공기돌 대신 노란 알약들을 한 움큼 움켜쥐고 있는(땅따먹기) 소녀들을 못 만난 것이 진정 후회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결국 모든 소년들은 그렇게 결여와 뒤틀림으로 인한 불구이거나 자연스런 성적 욕망으로 사회적으로 불온해진, 혹은 동시적으로 그녀들의 웃음과 무중력 상태로 뭇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소녀들을 못 만나고 만다.

박정원_의자소녀_판넬에 아크릴 채색_120×120cm_2004

박정원_목마소녀_판넬에 아크릴 채색_120×120cm_2004
눈을 감고 ‘소녀’라는 단어를 발음해보라. 그 발음에서 번져 오르는 ‘소녀’의 하얗고 순결한 시니피에는 봉에 꽂혀있거나 다리가 셋인 그런 다정의 화냥 같은 소녀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래서 소녀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백설 공주를 꿈꾸는 소년도, 남자도 모두 쫓겨나 있다. ‘남자가 쫓겨난’ 그림 속의 소녀들은 인간 존재에 대한 안이한 선입견을 그 근저에서부터 뒤흔들어주며 대개는, 사물들과 교접하고 있다. 아마도 사람들은 그러한 교접이 내뿜고 있는 전복적인 상상력 속에서 ‘가학적’인 그리고 ‘병적’인 것의 절정들을 본 것 같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지만, 가학적이거나 병적인 것이 양식화 되어있는 것처럼 재미없는 것은 없다. 아방가르드에서 추구되었던 형식의 파괴나 실험도 양식화 되면서 고답적인 역사가 된 것이다. 박정원의 그림들은 그런 점에서 아직 양식화 되어 있지 않은 생의 한가운데에 있고, 부정한 것들을 다시 부정함으로써 긍정의 차원으로 지양시키는 일반적 길항의 과정을 전혀 수행하고 있지 않아서 더욱 재미있다. (만화 같지 않은 작품을 보고 재미있다는 표현을 하면 실례인가?) 그 재미란 가학적인 것과 편안함, 병적인 것과 관능 사이의 경계에서 형성되는 긴장감의 지속적인 미해결에서 발현된다.

박정원_두루미소녀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90×72cm_2004

박정원_이상한 도송빌 부인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62×130cm_2004
세계는 암담하고, 소녀들은 의자나 바퀴 같은 외계에 기이하게 꽂혀져 있지만, 소녀들의 표정은 병적이기 보다는 도리어 휴식을 잘 취한 건강한 짐승 같은 냄새를 풍겨내고 있는 것이 박정원의 고유한 작품 세계이기도 하다. 특히 「넘실넘실 소녀들」의 행복한 표정은 거의 완벽한 것이어서, 말로 떠드는 설명이고 개념이고 프로이트고 개나발이고를 일절 떠난 채, 물론 도덕적인 문제 제기는 스며들 틈도 없는, 그 곳 지상 2m 쯤의 공중에서 부유(浮游)하며 소녀들은 제 자신을 완성하고 있다. 그 소녀들의 한가운데에서는 마치 생의 비의처럼, 아니면 초경(初經)처럼 붉은 과실들이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종 교접된 소녀들의 표정이 매우 구체적이란 것이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담보해주고 있다. 즉 자전거 바퀴와 교접된 소녀의 그로테스크하게 편안한 표정은 바로 그것이어서, 과실과 교접된 ‘넘실넘실 소녀들’의 열락에 가까운 표정과는 결코 바꿔치기 할 수 없다는 것을 각각의 작품들은 선험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있다. 기이하고 불온한 교접들 속에서도 소녀들이 온전하게 간직하고 있는 저 방치에 가까운 행복의 표정들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일찍이 메를로 퐁티가 갈파했듯이, 몸이란 자신한테 귀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외계와도 이어져 있다는 양의(兩義)성에 대한 진정한 인식과 경험은, 기실 우리를 무한하게 즐거우면서도 불안하게 만들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 표정들은 아이와 여성 사이에 존재하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아우라를 계속적으로 생산해 내고 있다. 그 아우라는 알아도 설명해서는 안 되는 것이기도 하다.

박정원_넘실넘실 소녀들_판넬에 아크릴 채색_160×120cm_2004

박정원_수상한 다리_캔버스에 아크릴 채색_145×112cm_2004
박정원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말로 표현하기 위해서 프로이트의 'Uncanny'란 개념에 주목한다. 집(Canny)처럼 낯익고 편안한 공간이 이방인에게는 문득 낯설고 기이한 곳이 될 수 있다는 것, 즉 미학적 매혹의 본질들 중의 하나에 해당하는 개념이다. 하지만 박정원의 그림들은 거꾸로 낯설고 기이한 것들을 낯익고 편안한 것들로 만들어 주는 주술적 힘도 포함하고 있다. 그런 힘은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다만 화가의 작업실에서 나오는 길에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작업하면서 많이 우세요?” 그녀는 “예”라고 대답한다. 그렇게 물어 본 것은, 그림의 소녀들 속에서 물감을 개면서 울고 있는 검은 여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녀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조금 더 늙는다면, 그래서 자신의 그림들에 서사적 깊이를 조금 더 확보한다면, 그 그림들은 화가 자신이 아니라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의 어떤 生의 장면까지 필경 투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무서운 이야기이지만, 예술의 오래된 힘이기도 하다. ■ 이찬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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