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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4-07-25 19:08:58, Hit : 1439, Vote : 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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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성민 전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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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의 난점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인상이 깊었던.
그래서 꼼꼼히 읽고 싶었지만...잘 읽히지 않는 글이라는.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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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 픽션 . 불순한 현실-이미지의 세계



홍성민. 곰과 여자 / 폴리, 입체(키네틱),영상 150X175x200
영상;The Persistence of Memory, 기억의영속8min.
싱글채널비디오, 영화‘피고인’ 발췌, 작가에 의한 오디오더빙. 2004




강수미 (미학)

 

 


* 이 글은 <월간미술> 2004년 7월호에 게재된 글로, 지면 사정상 축약되었던 원문을 전문 재수록하였다.


한 작가의 면모에 더해 그의 작업들을 물리적으로가 아니라 인식적으로 중첩시켜 놓고 보면, 하나의 세계가 어렴풋하게 떠오른다. 지금 막 미술가로서 활동을 시작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어느 정도 자신의 작업을 축적해 왔고 그것을 세상 속에서 내보여왔으며 그렇게 해서 타인들의 감각과 사고를 촉발시켜 왔던 작가들을 두고 하는 생각이다. ‘그 사람’과 ‘그 작품’이라는 사실의 나열 위로 떠오른 ‘그 세계’는 추상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이지만, 언제나 현실과 관계 맺는 세계이다. 미술가들이 자신의 독특한 지점에서 각자의 세계를 생산해 내면 낼수록 현실세계는 두 배로, 세 배로 부풀어 올라 나중에는 현실이 가려질 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의 현실을 덮는 가상의, 그러나 현실(real)과 태생적으로 연결 된 세계를 상상해본다면!
홍성민이 축적해 온 미술-세계도 그 중의 하나가 될 텐데, 그 세계는 말의 직설적인 의미에서 현실에 탯줄을 대고 있다. 그는 현실에서 작업의 모티브를 얻어 오고, 그의 발화는 현실에 대한 것이며, 작품이 발화하는 내용은 현실의 문맥 속에서 읽혀져야 하기 때문이다. 또 형식의 의미에서 그가 전공한 “타임아트(time art)”는 1990년 대 멀티미디어를 이용한 작업들을 지칭하는 새롭게 부가된 미술의 고유명사이기보다는, 끊임없이 흐르는 현실의 시간(동사)을 동반 혹은 한계조건으로 하는 미술의 부사에 가깝다. 그의 작업들은 현재 시간에 플레이되고,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기억 속으로 사라진다.(물론 그 때 기억은 감상자의 기억일 수도 있고, 필름이나 CD형태일 수도 있다.)
이외에 홍성민의 작품이 발화하는 내용이 현실 문맥에서 읽혀져야 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그것이 현실에 상존하는 이미지와 그 이미지들이 구성하는 현실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름붙이자면 그의 작업은 80년대 민중미술과 같은 리얼리즘이 아니라 리얼(현실)을 구성하는 이미지, 그렇게 해서 다시 이미지로 된 리얼을 비평하면서 가상화하는 ‘현실환타지(real fantasy) 미술’ 쯤이 되지 않을까? 그의 1993년 작 은 마치 이러한 해석에 준비된 답처럼 여겨진다.(실제로는 작품으로 인해 해석이 가능해지지만)
미국의 팝 아티스트 로이 리히텐쉬타인의 만화작품이미지를 차용해 와서 각각의 망점을 물감이 아니라 스피커로 대치한 이 작품은 작가의 말처럼 “차용의 차용”이다. 남녀가 키스하는 기성 만화이미지를 차용한 리히텐쉬타인의 그림을 홍성민이 작품에 재 차용해 왔다는 설명은 방법론에 입각한 것이다. 우리는 당시 전 세계에 불어 닥친 에이즈 공포가 현실이 구성한 하나의 이미지, 즉 이성애에 입각한 공포이미지이고 그것이 나중에는 기정 사실-현실이 되었다는 점을 기억한다. 그렇게 볼 때 홍성민의 <차용>은 현실의 이미지(리히텐쉬타인이 쓴 만화/에이즈에 대한 일반인식)를 가지고 옴으로써 허구적 현실(그의 미술/구성된 공포)을 비평하고 작품으로 다시 가상화한 ‘현실 환타지 미술’이라는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때 환타지는 현실이 이성이나 도덕 혹은 ‘당연함’이라는 이름으로 빚어낸 것들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을 다시 미술로 비틀고 직조하여 빚어낸 환상이라는 이중 의미를 획득한다.

 

 



홍성민. Rational Geography / 플라스틱완구, 분재화분. 70x30 ea.


홍성민의 작업은 주로 멀티미디어를 이용하는 것으로 인지되어 왔지만 그의 작업 이력을 쭉 보건데, 그는 자신의 몸에서부터 남이 소지하고 있는 핸드폰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구상한 작업에 필요한 요소이면 별 편견 없이 동원해 왔던 것 같다.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것과 현실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그것이 시각이미지이든 이데올로기든)가 많은 만큼, 홍성민의 작업도구와 소스도 넘쳐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그가 본격적으로 소개되기 시작한 90년대 초반의 작업들까지 포괄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 시기 작업들은 내용에 있어서 여전히 현실에 ‘대한’ 코멘트가 줄거리를 이루고 있지만 다소 강도가 약하고, 당시 특수한 매체, 즉 본격적으로 그 가능성이 모색되기 시작한 영상미디어라는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인다. 현실을 담아 문제시할 수 있는 가장 사실적인 매체가 영상이라는 측면에서 그 방식은 상당히 유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에게나 감상자에게나 작업이 새로운 매체와 테크놀로지의 신선함 측면에서 좀 더 조명되면서, 작업의 내면을 흐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접근이 상대적으로 빈약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 미술계 조건이 멀티미디어 아트가 보편화되는 식으로 바뀐 것만큼, 홍성민의 작업은 ‘어떤 매체를 쓰느냐’는 부수적 조건이 되었고, 서두에 언급했던 것과 같은 내용이 전면으로 부상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미술가라면 매체를 다루는 기술은 기본이며 무엇을 담을 것인가가 작업의 핵이라는 내 생각에 그러한 진행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리고 꽤 오랜만에 접하게 된 홍성민의 작품들(<異夜記>개인전)은 그의 작업 이력이 하나의 세계를 구성할 정도로 강도 있어 졌음을 실감케 한 계기였다. 물론 이 세계는 반복되지만 기성의 현실로부터 솟아나, 그 현실이미지와 홍성민의 지각이 겹쳐 직조된 세계다. 전혀 ‘별나라 환타지’가 아니라는 얘기다.


홍성민. A Promise of Live Fish, 활어의약속 / 5min.
싱글채널비디오, 비디오영화 ‘웰빙섹스’ 발췌, 작가에의한 오디오더빙.유리에칭.



이성의 양탄자를 밤 새워 풀어헤치는 자는 누구인가?
홍성민의 <異夜記>는 문자 그대로 풀면 ‘다른 밤들의 기록’이다. 그 기록은 작가가 1년간 오산에서 살면서 소소한 사건들로부터 밤에 길어 올린 이야기. 그에 좀 더 확장시켜 예술적으로 풀면 『천일야화(千一夜話)』의 신비와 환타지 문학성을 냉소적으로 ‘여기 다른 현실’에 대치한 시청각미술이며, 비평적으로 풀자면 그 문학구조를 차용해 ‘열림’, ‘인과성에서 자유로움’, ‘유동성’과 같은 예술의 긍정적 성격을 고무하는 미술이다. 그런데 어떠한 ‘이야기’, 어떤 ‘천일야화’인가?
『천일야화』는 천일하고도 하룻밤을 더한 ‘천 하루 밤’의 이야기이다. 우리에게 『아라비안나이트』로 더 잘 알려진 이 야화는 그러므로 영어 표현 ‘영원에 하루를 더한(forever and a day)’이 무한한 시간을 암시하듯, 진짜 이야기는 끝없이 하루를 연장하면서 이어질 수 있다. 다음 날 아침이면 죽어야 할 소녀, 세헤라자데(Scheherazade)가 목숨 줄을 쥔 술탄에게 동양의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삶의 시간을 무한으로 연장하는 수 세기 전의 이야기. 이 무한한 밤의 수다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빛바래지 않고 아름다운 이유는 시간에 있어 무한으로 열려 있다는 것, 내러티브가 인과율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것, 중국 상자처럼 이야기 속에 이야기를 포섭한다는 점 때문이다. 홍성민의 “異夜記” 또한 이 구조 속에 포함될 수 있으며, 천 하루에 ‘다른 밤’들을 보태며 유한성을 지연시킬 수 있고, 세상에 떠도는 속된 일화와 이미지들을 작품 속에서 직조(texture)할 수 있다. 다만 홍성민의 텍스추어는 이미 사회적 이성이 경제적으로 직조한 웰 메이드 기성의 올을 풀어, 그 이성의 표리부동과 물화(物化)를 비판적으로 짜깁기한다는 것이 특이하다. 밀란 쿤데라는 『소설의 기술』에서 소설을 정의하기를 “신학자와 철학자와 학자들이 전날 짜 놓은 양탄자를 밤을 새워 풀어헤치는 것”이라 했다. 그런 의미에서 홍성민은 소설가는 아니지만 미술가로서 이성 해체의 지평에 있다. 그는 세헤라자데 같은 밤의 이야기꾼이 아니라 사실과 픽션을 밤에 풀어 다시 엮는 편집자/비판자이며, 그의 작품들은 내러티브-창작이 아니라 스크립트-각색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작품 <활어의 약속>을 보자. 기성 포르노 영화의 한 부분을 거두절미하고 따와서 “선녀와 나무꾼”(또는 마네의 <풀밭 위의 점심>을 언어화한) 식의 대화를 더빙한 싱글 채널 비디오 영상. 그에 더해 단체(한국도로공사/동부화재) 로고와 횟집 간판의 도상(예의 물고기가 솟구치는)을 새긴 유리 조각이 한 세트인 이 작품의 소재는, 설명한 문장 속에서 다 드러나듯 한국 현실 이미지라는 ‘활’어(活魚)다. 그러므로 나는 <활어의 약속>을 세상이라는 속된 바다에서 차용과 각색의 예술그물이 건져 올린 ‘활어 같은 이야기’라 말하고 싶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정사를 벌이는 그녀의 대사처럼, ‘저는 어쩐지 겉으로 잘 만들어진 기성이미지만 보면, 각색이라는 칼로 그 공허한 약속의 표피를 얇게 회 뜨고 싶어져요’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리고 작품은 감상자가 현실 문맥을 읽을 수 있을 때 빛날 것이다. 이 그물질과 회 뜨기, 독해 과정 속에서 기정 사실(이라 믿었던 것들)이 갖는 허구성은 발췌되며, 픽션의 진실성은 이 허구성을 논박한다.

 


 


홍성민. 7 Characters / 싱글채널비디오, 6min. 2004



‘케세라 세라’의 유연성과 ‘해피 투게더’의 공동체 의식
물론 지금도 작가 홍성민은 영상 매체 작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1990년대 중반 영상 테크놀로지 아트의 부흥기에 그의 활동이나 그가 받은 각광에 비하면 다소간 퇴색된 듯 하다. 그래서 혹자는 이 작가가 교수작가의 현실적 안락함에 안이해진 것은 아닌지, 또 다른 혹자는 신세대론과 뉴 매체라는 속성상 홍성민과 같은 작가의 작업은 쉽게 소비되기 때문은 아닌지 재고해 볼 것이다. 작가에 따르면 가르치는 것에 좀 더 집중했던 것이 이유라고 함으로 일단 수긍하고, 나는 작가의 개인사와 다른 맥락으로 그의 작업들에 접근해 보고 싶다. 글을 쓰는 현재 그의 이전 작업으로 인상 깊이 남아 있는 것은, 지난 98년 아트선재센터에서 박화영, 서현석과 공동 작업한 싱글 채널 비디오 <빠지다, 빠지다, 빠지다>와 2002년 ima(동아일보 舊 윤전소)에서 행한 핸드폰 사운드 퍼포먼스이다. 전자는 비디오 설치 작업이 보편적이던 그 때, 싱글 채널 영상 작업의 속성과 수용의 가능성을 꽤 흥미롭게 제시한 협업작품으로 기억한다. 후자는 전자의 ‘작가끼리 협업’이 ‘작가-실행자-감상자의 협업’으로 전이한 실시간 현장 미술이었다. 4년이라는 간극 속에서 이 두 작품의 이행은 현재 홍성민의 <異夜記>로의 당도에 있어 상당히 유효한 비교점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98년 어딘가 테크놀로지에 대한 강박과 고립된 관음증이 감지되던 영상이미지와 내러티브는 2002년 퍼포먼스로 오면 16화음 핸드폰이라는 기성 테크놀로지를 유연하게 차용하여 일시적으로 관객과 실행자와 지휘자를 묶어 내는 공동체의 유쾌한 사건으로 변이한다. 강박적으로 뉴 테크놀로지를 디스플레이 하는데서 벗어나 그 기술 자체를 내러티브화 하기, 관객의 머리꼭지나 배후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 바로 작품 속에 투입되기, 비록 시니컬할지라도 작품에서 유쾌함을 잊어버리지 않는 것. 이러한 성질들이 2002년 작업에 전경화 되었고, 지금 <異夜記>를 촘촘하게 직조하는 씨실과 날실로 보인다. 그래서 앞서 맥락으로 돌아가자면, 그의 공백 혹은 덜한(?) 각광은 부정적이기보다는 그의 작업이 거품을 가라앉히고 그를 둘러싼 현실을 유연하게 끌어안아 다르게 발설하기 위해 필요했던 시간, 좋은 약이라 생각된다.
현재 홍성민의 작품이 갖는 유연성과 공동체적 끌어안음은 이번 전시의 싱글 채널 비디오 작품 <7 Characters in Andalou>에서 잘 나타난다. 이 영상물의 배경 음악은 “케세라 세라(Que sera sera)”와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이다. 자의적이나마, 이 노랫말을 작품에 대입해서 풀어 보자면 “될 대로 되겠지”하는 심정으로 살다 보면 “모두 함께 행복해질 거야”정도나 될까? 옥천 군청 ‘송알이’, 우체국의 마스코트 등 지방 자치단체의 특산물과 공공기관의 캐릭터를 형상화한 인형머리를 쓴 ‘모여라 꿈동산 언니’들이 이 노래에 맞춰 경쾌하게 율동하는 영상을 보고 있자면, 어느새 6분은 후딱 가버리고 다시 리플레이 된 영상을 보게 된다. 그 만큼 이 작품은 관객을 유쾌하게 끌어들인다. 경쟁적으로 특화된 지자체의 특산물과 기관의 캐릭터들은 영상에서 보듯 그 목적에 반하여 ‘모두 그게 그거’로 평준화된 개성만을 뽐내고 있고 분명 작가는 이들을 작품 속에서 희화화하고 있지만, 간혹 끼어든 외국 액션 영화 스틸을 발로 차 버리는 그 캐릭터 언니들을 보고 있자면 박수를 치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론 미끈한 다리의 섹스어필이 이 작품에 관객을 끌어들이는 또 다른 요소이기도 하지만. 대중 캐릭터의 통속성을 ‘케세라 세라’의 발랄함으로 유연하게 비판하는 것, 한국성의 클리쉐 집합 같은 그 캐릭터들을 대안도 없으면서 비판만 해대는 문화이론과는 달리 발랄하게 비틀면서 끌어안는 것이 <7 Characters>의 미덕이며, 홍성민 같은 미술가들의 불순하지만 유효한 실천이다.


홍성민. West/Middle/East / 7min.
2채널비디오 인스털레이션뷰, 방송국 어린이 합창단 실황 발췌, 변조.



사실을 찾아서
앞서 나는 홍성민의 <異夜記>를 『천일야화』에 대입시키고, 그의 작품-이야기가 ‘사실의 허구성’과 ‘픽션의 진실성’을 직조한다는 논지를 내세웠다. 이는 자의적 읽기가 아니라, 홍성민의 작품이 주장하고, 그 작품들이 실행되는 마당에서 간취되는 개념이다. 예컨대 작품 는 어린이 방송프로그램의 일부를 80% 정도 느린 속도로 재편집한 2 채널 영상작품인데, 한 쪽 모니터에서는 우리나라 지방의 어린이 합창단이 아라비안나이트 의상을 입고, 그에 맞는 율동과 노래를 ‘느려 터지게’ 흔들며 부르고 있다. 또 라는 작품은 식물 화분 위로 ‘GREEN’ 플라스틱 알파벳 글자들이 ‘BLUE’를 쓰면서 다시 ‘RED’로 조합되는(즉 모니터 삼원색) 설치물이다. 이성의 RGB는 밑에 설치된 일년생 풀들과 함께 이성을 이탈하며 자란다. 또 다른 작품 <곰 위의 소녀>는 대웅제약의 곰이 구명튜브를 목에 건채 동아제약의 “판피린 에프” 소녀를 태우고 원형무대를 돌고 있는 조형물이다. 이것은 영상작품 와 하나인데, 조디 포스터가 출연한 영화 <피고인(Accused)>의 영상에 “곰이 어쩌고”식의 픽션이 더빙됨으로써 만난다. 작가는 이 조형물과 영상을 하나로 구성하여 우리 무의식의 근저까지 건드리려 했다고 하지만, 그러기에는 이미 판피린 에프 소녀, 대웅의 곰, 조디 포스터 같은 기표가 우리 의식 밑바닥까지 지배하고 있다. 현실이미지에 기성화 된 우리는 기성이미지를 인지하고 그것이 어떻게 픽션화되고 있는지 쫓기에 바쁜 것이다.
여기에 홍성민 작업 세계의 특수성과 한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홍성민이 <異夜記>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현실은 언제나 허구와 만날 수 있고, 사실 그 자체가 픽션 같은 현실/현실 같은 픽션에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예컨대 한국어린이의 아라비안나이트 춤과 노래는 동양/중동/서양의 구분법만큼 근거 없는 원천을 사실화하는 순진하지 않은 방송-현실퍼포먼스이다. 녹색이 파랑색, 빨강색으로 명명되는 모순은 각 모니터 상태나 언어의 자의성만큼 현실의 자의성을 함축한다. 이러한 현실의 허구와 자의성을 추출해 내어 하나의 작품으로 직조해 내는 것이 홍성민 작업의 특수성이라면, 그것이 이미 현실이라는 설정된 범위 안에서 문맥의 의미를 획득할 수밖에 없다는 측면에서는 한계이다. 그러나 이 한계는 홍성민의 작업세계가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돌파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서두에서 썼듯이 홍성민의 세계는 직설적으로 현실에 탯줄을 대고 있고, 그렇게 해서 현실을 두 배, 세 배 비평적으로 부풀리기 때문이다. 홍성민의 이 ‘현실환타지’작품들을 보면서, 누군가는 제프 쿤스의 키치작품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내가 홍성민의 작품에는 있지만, 제프 쿤스의 작품에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성’과 ‘대항성’이다. 즉 홍성민의 작품들이 그 외형적 가벼움과 속됨에도 불구하고 즐길만한 내러티브를 갖고 있고, 그 내러티브가 현실의 허구를 폭로함으로써 ‘사실성’을 획득하는 동시에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대항성’을 견지한다면, 쿤스의 작품은 현실에 잘 미끄러져 들어간다는 것이다. 폴란드 태생의 유대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예술적 픽션의 소명은 모더니티의 기술-과학적 문화, 그리고 명료한 구별과 동어 반복적인 훈육의 문화에 맞서는 아이로니컬하고 불경한 대항문화에 있다”고 했다. 홍성민의 작품들은 동어 반복의 기성 문화를, 기성의 내러티브를, 모순 되게 접붙이고, 불순하게 섞음으로써 예술이 할 수 있는 무언가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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