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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5-09-06 16:20:03, Hit : 1572, Vote :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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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成斗慶. 1915∼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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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관련작업 중 유일하게 뇌리에 남아 있는 사진.   전쟁통에도, 폐허만을 다루어 사진을 만든단 단순한 발상이 얼마나 큰힘을 가지는지를 확연히 보여주는 실예.
남들과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결국, 타인들이 보지 못하는 곳을 직시하는 사람이다.   성경에도 쓰여있지 않은가, 왜 당신은 큰길로만 가려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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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현대사진연구모임. 外



성두경 (成斗慶. 1915∼1986)

사진가 成斗慶(성두경.1915∼86)은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 아니다.
火魔(화마)가 분탕질하고 지나간 1951년초 재수복된 서울 시내와 근교의 폐허 이미지를 집중적으로 담은 그의 6.25기록사진 작품들은 최근까지도 거의 묻혀 있다시피했다. 사진사적 평가는커녕 반세기 가까이 일반에게 소개되지 못했던 그의 6.25사진들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도 4∼5년전에 불과하다.

한국사진사연구소(소장 최인진)의 노력에 의해 지난 94년 그의 개인 사진집 ‘다시 돌아와 본 서울-서울 1951년 겨울’(눈빛)이 출간되고, 그해 11월 서남재단 후원으로 유작사진전이 열리면서 비로소 그의 진면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그의 사진에 붙어다니는 비평적 합의를 다소 거칠게 뭉뚱그리자면 ‘6.25를 우리 시각에서 포착한 사진’이라는 점이다. 6.25를 배경으로 남겨진 사진중 가장 뛰어난 업적으로 평가(사진평론가 박주석씨)받기도 한다.

성두경의 6.25사진이 갖는 ‘주체적 앵글’에 대한 발견은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해진 6.25사진이 대부분 미국인들에 의해 찍혔다는 부끄러움을 얼마간 덜어주는 귀중한 知的(지적) 자산의 확인이다.
사실 미국인들이 찍은 6.25사진이란 유감스럽게도 ‘이방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한국전쟁’이었다.

한국 현대사 최대의 분수령이었던 6.25를 우리 시각으로 포착한 사진이 드물었다는 점은 사실 우리 지식사회의 자부심에 흠집을 남기는, 곤혹스러운 것이었다. 사진계의 이런 사정은 사진장르 내부의 차원을 뛰어넘는 상징적인 사안이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국내 인문사회과학계 연구의 궁핍함을 예로 들어보자.
6.25에 관한 가장 잘된 저술은 지금도 국내 연구자의 것이 아니다. 그 영예는 논란의 여지가 없이 ‘한국학?국제적 수준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 연구서’로 평가받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으로 돌아간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96년 30대초반의 젊은 연구자 박명림씨가 커밍스에 필적하는 묵직한 저술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상·하,나남)을 선보이면서 부끄러움을 조금은 줄일 수 있었다. 그런 면에서 최근에 재발견된 성두경의 6.25사진 역시 ‘당대의 문화사적 사건’으로 평가할만한 요소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이제 성두경의 6.25사진을 만나보자. 우선 그의 사진에는 사람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전쟁이야말로 인간사 최대의 드라마일 터인데도 그의 작품에는 드라마틱한 요소가 철저히 배제돼 있다. 오히려 정반대의 靜態性(정태성), 혹은 脫(탈)역사적 시각이 특징이다. 주로 열전이 한차례 스쳐간 다음에 도시에 남아있던 황량하기 그지없는 폐허의 현장을 집요하게 추적했기 때문에 극도로 스산하다. 보는 이에 따라서는 황량하다는 느낌과 함께 묘하게도 서정적 아름다움이나 종교적 숭엄미마저 느껴지기도 한다는 것이 성두경의 작품이다.

사진집 ‘다시 돌아와 본 서울’에서 인상있는 평문을 남긴 사진평론가 정진국씨의 비평도 핵심을 짚는 해석행위로 주목할 만하다.
“성두경 사진의 관심사는 앵글의 변화에 의존하는 조형적 구도에 있다. 하나의 ‘완결된 공간’처럼 다가오는 그의 사진들은 슬픔의 감정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 보이는 기념비적 구도 때문에 때론 엄숙하고 종교적인 기분을 자아낸다. 성두경은 脫역사적 시각에 의해 지배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전쟁 다큐사진에 사람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별난 특징은 전쟁사진에서 흔한 것은 아니다. 이런 역설은 이 작가가-본인이 의도했건 안했건간에-정태적이고 脫역사적인 방식으로 한국 현대사의 질곡과 비극성을 효과적으로 나타내려 했다고 풀이할 수밖에 없다. 흥미로운 점은 성두경 사진은 보는 이를 결코 편치않게 몰아간다는 점이다.
‘착잡해진다’‘참담해진다’는 느낌이 그것이다. 이런 힘은 말하자면 ‘침묵의 웅변’같은 효과이다.

성두경이 서울과 근교의 폐허를 촬영한 것은 종군기자 자격이었다.
1951년 1월 그는 국군헌병사령부 司正(사정)보도사진기자로 활약하게 된다.
경기도 파주 출생으로 선린상업전수학교를 졸업한 그는 별다른 코스워크를 밟지 않고 해방직전인 1944년 全(전)조선사진연맹주최 사진공모전에 입선하면서 사진활동을 시작했다.
해방후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에서 사진재료상을 운영했고, 서울시청 공보실소속 사진촉탁으로 사진과 거듭 인연을 가졌다.
전쟁이 나자 성두경은 라이카 카메라와 필름을 피란보따리에 챙겨 남쪽으로 간다.
당시 국내 주요 작가들은 종군을 했다. 낙동강전선과 인천상륙작전에는 이건중 최계복 이경모 등이 활약했다. 성두경은 51년 1월 대구 헌병사령부의 사정보도기자로 활약을 시작, 그해 2,3월 재탈환된 서울에 올라와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적 의미가 있는 주요 작품들이 바로 이때 얻어졌다.

옛 국회의사당 옥상에서 바라본 세종로 일대, 시청앞, 서대문에서 로터리쪽, 경무대, 영락교회 근처, 명동성당 근처, 서대문 경찰서, 노량진 수원지 일대, 마포 종점 등이 그의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겼다.
“패잔병이 숨어있다가 금방 총질이라도 할 것같은 공포감에 라이카 셔터소리가 유난히 신경쓰였다”고 그는 당시의 일을 지난 80년 최인진씨에게 증언했다.

“처음 사진을 배울 때 귀가 아프도록 들었던 회화적 구도나 피사체의 선택은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 거추장스럽고 짐만 될 뿐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적인 문제를 사진의 대상으로 하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고까지 여겼던 시기였다. 회화주의가 지배했던 시기였다. 그래서 전쟁상황에 던져진 무명의 작가에게는 이런 모든 것이 생소한 피사체였다.”

성두경 사진의 해석과 관련해 실마리를 얻어낼 수 있는 중요한 고백은 바로 이 증언 다음 대목이다.

“눈에 띄는 것은 모두 폐허였다. 서울의 골목 골목을 뒤지면서 언제부터인가 이것이야말로 내가 하고 싶었던 작업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열심히 찍었다. 본래 나는 성격상 조용하고 정서적인 작품들이 많았다.
군작전 기록과 함께 작가적 관심사를 추구한 것이 폐허사진이다.
파괴된 건물을 조형적으로 나타내 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내가 조형적인 시각을 가지지도 못했고, 사진에 대해 깊이 알지도 못해 서툰 사진이 되고 말았다.”

결국 그가 포착한 폐허의 이미지들은 ‘조용한 성격 탓에’ 역사의 광기가 남기고 간 현장을 ‘조형적으로 바라보고자 했던’의식의 소산이라는 요지다.
앞의 ‘탈역사적 시선’이라는 말도 이런 점 때문이다. 거듭 살펴봐야 할 것이 이런 성두경 사진은 ‘역사적이고자 했던’ 기왕의 다큐사진들보다 오히려 더 큰 호소력을 가지고 다가선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도 평론가 정진국씨의 말은 거듭 음미해 볼만하다.

“성두경 사진은 수용하는 과정에서 더 구체적인 효력을 발휘한다.
작가가 추적하고 암상자(카메라)에 담아낸 저 풍경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 시선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우리는 과연 사진 이미지속에서 기념비처럼 되살아나는 폐허를 보면서 이미지로서, 미적인 것으로만 그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것일까. 그 가공할 폭력은 어디로 갔는가.

그 시선을 좇는 우리의 눈은 혹시 성서에 나오는 카인의 눈으로 충혈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형제와의 싸움에서 오는 허탈감 때문에 이 사진 이미지들은 그토록 공허하고 참담한 기운에 휩싸여 있는 것은 아닐까.”

6.25 사진을 남긴 성두경의 나머지 삶은 다큐사진 작가로서의 생활과 다소 거리가 있었다. 종전뒤 주간 사진저널인 ‘동방사진뉴스’를 창간해 2년간 운영했고, 55년에는 반도호텔에 ‘반도사진문화사’라는 초상사진관을 개업해 76년까지 21년간 운영했다.
77년 대한사진예술가협회장으로 피선됐던 그는 지난 1986년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전쟁 종군기자 성두경

한국전쟁 종군기자 성두경. 1915년 파평면 두포리 407번지 성氏 집성촌에서 태어난 성두경 선생은 국군헌병 사령부 사정(司正) 보도사진기자로 한국전쟁을 취재 보도하였으며, 주간신문 '동방사진뉴스'를 창간했다.

또한 한국사진작가단을 결성하여 한국사진작가협회 이사, 대한사진예술가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지난 86년 2월 숙환으로 타계했다.

1935년 선린상업전수학교를 졸업한 선생은 정자옥(丁子屋)백화점(현재의 미도파백화점) 서적 카메라부에 입 사하면서 사진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44년 전조선사진연맹이 주최한 사진공모전에 입선하면서 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선생은 45년 해방직후 동화백화점(현재의 신세계백화점)에서 사진 재료상을 운영하였으나 미군 진주와 함께 각종 물자가 들어오면서 재료상의 불경기로 문을 닫고 서울시청 공보실에 들어갔다.

동방사진뉴스를 발행하던 53년까지도 선생은 어느 사진 단체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몇 개의 사진 단체가 있었지만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의 형편으로는 사진에 대한 정보, 작품 발표 등을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고 서울 시내에서 사진 한다고 하면 서로 훤히 알 수 있을 정도로 사진가도 얼마되지 않았고, 인맥이 서로 얽혀 있어 어느 그룹에든지 소속될 수밖에 없었다.

국내 최초로 유작 사진 개인전이 1994년 사진집 발행과 함께 서남미술전시관에서 개최됐다. 미술평론가 정진 국씨는 '다시 돌아와 본 서울'이라는 성두경 사진집에서 선생의 사진세계를 이렇게 평가했다.

"성두경의 사진들을 지배하고 있는 분위기는 국군과 연합군의 힘으로 수복된 서울의 '전쟁의 화마가 오랫동안 분탕질한' 폐허가 말해주듯이 엄청난 재난이 휩쓸고 지난 뒤의 스산함과 어정쩡한 안도감, 바로 그것이다.

작가가 일관되게 구사하고 있는 원근 구도에 따른 화면의 공간감이 이런 분위기를 짐작하건대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다" "그의 사진들은 과거 참담했던 시절을 돌이켜보고 확인하는, 수용의 과정 속에서 더 구체적인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이미지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가 추적하고 암상자 속에 담아낸 저 풍경들을 지배하고 있는 그 시선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힌다"

<趙祐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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