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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zabel(2005-04-02 12:07:40, Hit : 1055, Vote :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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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생과 몰아, 마인드 커넥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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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르프스키를 절대,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영화쪽에서 '작가'라는 분류를 넣으라면 내 입장에선 그외에 다른 대상이... 없기는 한다. 물론 작가란 단어/사람들도 그닥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어쩌면 개인적인 클리쉐일지도 모르고.
뭐 근대스런 작가들이 흔히들 하는 이야기 있잖은가. "내 작업엔 아무 의미도 없다." 혹은 "작품 감상 능력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재능에 달려 있다." 같은.
희생이나 다시 궈놔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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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코프스키에게 <희생>을 묻다
[옛날 영화를 보았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1986)

김남준기자




하품을 참으며

솔직해지자. <희생>은 졸린 영화였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는 말이다. 그런데 넓혀 보면 나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1995년 이 영화가 우리 나라에 처음 개봉되었을 때 인구에 회자된 우스개 소리를 기억한다.

"졸다 졸다 깨도 안 끝나 있더라."
"<희생>은 관객의 엄청난 희생을 요구하는 영화다."

장르 영화의 단순 명료한 공식에 익숙해 있던 관객에게 <희생>의 말 걸기 방식은 너무 낯설었다. <희생>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단지 보여줄 뿐이다. 그것도 숨기면서 보여 준다. 이 '애매한 그림'들을 관객이 수동적으로 쳐다보기만 해서는 헛것밖에 안 보인다. 스스로 찾아내고 해명해내는 적극적 참여가 요구된다. 자연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게 된다. 이 교감 방식에 익숙지 않은 관객은 이내 탈진하거나 아예 등을 돌려 버리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그 내용은 얼마나 황당무계(?)한가. 하녀 마리아와 동침하고 집과 가족을 다 버리는 '희생'으로 이미 발발한 3차 세계대전이 사라지는 기적 같은 '구원'을 얻는다니…. '정상적' 서사와는 멀어도 한참 멀다. 무엇보다도 '희생'이란 주제 자체가 우리, 아니 나에겐 '멀어' 보였던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희생'이란 말을 쓰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한번 따져 보자. '희생'은 '스스로 버림'이라는 능동과 '강제로 빼앗김'이라는 피동의 쓰임새를 겹으로 지니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빼앗김'으로서의 '희생'이라는 단어만 살아 있지는 않은가. 가령 "왜 내가 희생 당해야만 해?" "아무도 희생 시키지 말라!" 식의 쓰임새만 익숙하지 않은가. '아름다운 희생' '희생을 자처하다' 식의 용례는 얼마나 보기 힘든가. 빈도를 셈해 보라. 단순한 말장난이 아니다.

<소유냐 존재냐>의 저자 에리히 프롬은 현대인의 소유 집착적 정신병리 징후를 지난 수세기 동안 일어난 언어 사용 습관의 변화에서 찾았다. 그에 따르면 사람들은 '사랑'과 '증오'와 같이 '존재의 방식'을 나타내는 말들마저 점점 더 '소유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즉 '사랑을 갖고 있다' '증오를 갖고 있다' 식으로 명사화, 대상화 시키는 언어 사용 양태에서 소유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일그러진 자화상을 읽어낸 것이다.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다. 훗날 사전 속 '희생'이라는 단어에 '스스로 버림으로써 헌신함'이라는 뜻은 온 데 간 데 없이 '강제로 헛되이 빼앗김'이라는 풀이만 남아 있게 될 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혹여 '희생 당할까' 두려움만 커진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마당에 희생하라고 외치는 영화는 얼마나 낯설었겠는가. 윤리 선생님 식의 일장 훈화는 얼마나 고루하고 지루해 보였겠는가.

오프닝 신. 바흐의 <마태수난곡> 중 아리아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동방박사의 찬미>(아래)를 카메라가 훑으며 천천히 위로 올라간다. 이윽고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위)에서 카메라는 멈춘다. ⓒ1986 타르코프스키


10년만에 다시 본 <희생>은 난해한 영화였다. 이번엔 졸리지는 않았다. 받아 들이기에 덜 부담스럽고 덜 낯설었던 것일 터. 등장인물 오토의 말대로 '설명이 안 되는 진실'이 생각보다 많이 있다는 걸 나이를 먹어 가며 깨달았기 때문일까. 10년 동안 타르코프스키를 조금은 더 알게 된 덕도 있을 것이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분석'의 잣대를 들이대서는 제대로 '체화'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기에 조바심내지 않고 몸을 적셔 보았다. 산문적 분석이 아닌 운문적 명상으로 다가가려 해 보았다. 알려고 달려들지 않고 느끼려고 가다듬어 보았다. 효과가 좀 있었다. 감독이 온축해 놓은 이상향의 귀퉁이가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 들어가려 벌거벗고 고해성사를 하고 있는 나의 북받치는 느꺼움이 피어 올랐다. 하지만 시적이고 몽환적인 세계에 자욱하게 낀 모호함의 안개는 쉬 걷히지 않았다. 조금 알 것 같자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타르코프스키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하지만 또한 그를 시험해 보고픈 음충 맞은 속내도 있었다는 걸 부인하지 않겠다. 작품에 대한 궁금증은 작가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생각해 보라. "희생하자" "희생하라"는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과연 스스로는 얼마나 고결한 영혼을 가졌길래 그 무시무시한 '선동'을 하는 걸까. 이토록이나 순결한 영화를 만든 이의 영혼은 과연? 그 도덕성의 담보 여부도 알고 싶었던 것이다. 나의 '가상' 인터뷰는 이같은 지적, 윤리적 호기심에서 이루어졌다.


죽비를 맞다

- 왜 이렇게 영화를 어렵게 만드는가?
"되묻고 싶다. 극장 좌석에 편히 앉아 있으면 아드레날린과 엔돌핀을 자동으로 주사해 주는 그런 영화를 원하는가? 예술은 정신적 의미에서 인류를 익사 시키지 않으려는 본능으로서 존재한다. 나는 이상을 향한 동경을 품고 있으며, 이상을 추구하는 과정을 표현하는 그러한 예술의 신봉자이다. 관객들이 시간 때우려 보는 상업영화를 만드는 장사꾼이 아니다."

- 쉬운 예술도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은가?
"내 영화가 그토록 어려운가? 내 영화를 보고 감동 받았다는 편지를 보낸 러시아 동포들 중에는 학식, 교양 수준이 높지 못한 노동자들도 많았다.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은 별로 없다. 아름다움과 착함을 미학적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민감하게 깨어 있는 영혼이 다만 필요할 뿐이다. 내가 보기에 작품 감상 능력은 인간의 지적인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재능에 달려 있다고 생각된다."

그는 러시아 관객들이 보냈다는 편지들을 보여 주었다. 그의 작품 <거울>을 본 각계 각층 사람들의 반응을 알 수 있었다. "이 영화로 나는 살아가고 있다"는 감사, "적어도 몇 시간 동안 진정한 삶을 산다는 것, 진정한 예술가 그리고 인간들과 함께 산다는 것에 전율한다"는 감격 등 저마다 절절한 사연이었다. 물론 전혀 이해하지 못해 불쾌감과 당혹감을 느낀다는 항의 시위성 편지들도 있었다.

- 당신 영화를 이해 못하는 사람들은 지적인 문제가 아니라 미적, 도덕적 무감각이라는 장애를 지니고 있는 것이라는 말로 들린다.
"그런 측면이 있지 않을까. 물론 이는 그들 탓이라기보다 자본주의(사회주의도 마찬가지다) 체제 탓일 것이다. 대중들의 예술 감각을 틔워 주고 계발 시키기는커녕 끔찍한 대용물로 '사육' 시킨 결과인 것이다. 예술 영화가 관객들에게 감정과 사고를 유발시키는 반면, 상업 영화는 관객들에게 그나마 남아 있는 감정과 사고들을 남김없이,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소멸 시켜 버린다. 아름다운 것과 정신적인 것에 대한 욕구를 이미 상실한 관객들에게 영화란, 목마를 때 마시는 한 병의 코카콜라와 다름 없다. 결국 오로지 눈앞의 쾌락과 이익만 좇게 하는 물질문명의 가공할 획일적 전제주의가 영적 무능을 낳은 것이다."

- 벗어날 수 없는 물질 문명의 사회를 사는 태도치고는 너무 결벽주의적이지 않은가? 관객들의 편을 갈라 자기 편이 아닌 관객들을 지나치게 무시한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결벽주의라….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무시라니. 나는 관객들을 너무나 존중하기 때문에 관객들을 속이는 일은 저지를 수가 없다. 나는 관객들의 영혼과 상상력을 신뢰하며 따라서 내게 가장 중요하고 가장 가치 있는 것만을 이야기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럼으로써 스스로 수준 있는 관객의 반응을 얻게 되고 또 관객의 수용 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편 가르고 무시하는 게 아니라 임의의 관객들을 상대로 한 차원 높은 소통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마침내 마리아와 하나가 되는 장면. 인간을 옭아매는 모든 현실의 중력을 떨쳐내고 둥둥 떠오르는 이 몽환적 장면은 <솔라리스>(1972)와 <거울>(1975)에도 이미 등장한 바 있다. 나무 장면과 함께 이 '그림' 역시 그를 사로잡았던 '형상'임에 틀림없다. ⓒ1986 타르코프스키


- '희생'은 어떤 연유에서 당신에게 그토록 중요하고 가치 있는 테마였는가?
"서방 세계의 물질적 진보라는 것을 접하면 접할수록 그 반대 급부인 정신적 황폐화를 뼈저리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희생'으로 역사의 이 미친 수레바퀴를 되돌릴 수 있다. 인간은 배부른 소비 돼지로서의 삶을 꾸역대든지, 아니면 고매한 정신적 책임감이 충만한 삶으로 회귀하든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는 것이다. 남을 위하여 혹은 어떤 일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에게서 최소한 경미한 정도로도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을 중단한 사람이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노스탤지아>(1983) 제작을 마친 뒤 서방 세계로 망명했다. <희생>은 잉그마르 베르히만 감독의 작품 대다수를 찍은 스벤 닉베스트 촬영감독과 호흡을 맞춰 스웨덴의 고틀랜드에서 만들었다.

- '희생'의 테마라면 전작 <노스탤지아>에서 도메니코의 분신 자살로 이미 형상화한 바 있다. 파멸을 향해 질주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경고의 의미였다. <희생>에서 보인 알렉산더의 희생은 도메니코의 그것과 목적 의식은 비슷하지만 그 양태는 퍽이나 달라 보인다. 집에 불을 지른 알렉산더는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정신병원에 끌려가면서도 끝내 왜 그랬는지 입을 열지 않는다. 희생의 티를 안냄으로써 아무도 그가 희생한 줄 모른다. 도메니코의 '보이는 희생'에서 알렉산더의 '보이지 않는 희생'으로의 진화. 희생을 다루는 당신의 태도가 한 발짝 더 나아간 것이라고 보아도 되겠는가?
"바로 보았다. 그가 기울인 노력을 오토 말고는 아마 어느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이 세계의 조화는 바로 이와 같은 숨은 희생의 노력들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 이 영화 속에서 3차대전은 일어나기는 한 것인가?
"일어났을 수도, 안 일어났을 수도 있다. 외적인 사건의 흐름, 음모, 사건의 연관성 등에 관해 나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내가 가장 관심을 갖고 매달린 것은 인간의 내면 세계였다. 어떤 사람들은 알렉산더의 기도에서, 핵에 의한 파멸이 오지 않는 이유를 볼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그가 전향해 간구한 기도에 신이 응답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다른 관객들은 '마녀'같은 하녀 마리아와의 사랑이 다음 장면들을 설명해 주는 핵심적인 장면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관객들에게는 핵전쟁이란 분명히 없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쯤 미쳐버린 이상한 녀석의 병적인 환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 그렇다면 알렉산더의 말 못하던 손자 고센이 클로징 신에서 말문을 트는 것도 마찬가지인가? 목수술 뒤 단순히 회복된 것일 수도, 벙어리의 말문이 기적처럼 트인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인가?
"상상에 맡기겠다. 한 작품이 여러 방향으로 달리 이해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졌다는 것은 나로서는 즐겁기 짝이 없는 일이다."

- 희생으로 내적 구원을 얻는다는 데서 그쳤다면 수긍은 더 쉽게 갔을 것이다. 희생 뒤에 왜 꼭 기적이 일어나도록 설정해야만 했는가?
"인간이 믿음을 상실한 그만큼 현대문명의 대부분은 기적에 대한 이해 역시 상실하고 말았다. 오늘날 인간들은 경험 논리에 모순되는, 깜짝 놀랄 만한 분기점을 희망할 줄 아는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기적에 대한 강철 같은 신념이 있어야만 황폐화된 물질문명 속 피폐해져 가는 인간정신의 패배주의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핵전쟁이 터지자 카오스로 치닫는 사람들. 신이 긍휼히 내려다보듯 버즈 아이 뷰(birds eye view)로 보여준다. 타르코프스키는 컬러 영화에서도 흑백, 암갈색 등 단색 톤을 즐겨 섞어 사용했다. 그는 총천연색의 부박(浮薄)함을 단색으로 가라앉힘으로써 색채의 균형과 안정감을 얻고자 했다. ⓒ1986 타르코프스키


- <희생>에서 불과 물이 상징하는 바는 무엇인가?
"없다. 내 작품에는 어떤 상징이나 비유도 들어 있지 않다고 수없이 말해 왔지만 관객과 비평가들은 쉽게 수긍하지 않더라. 비, 물, 불, 이슬, 그리고 들판,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물질적 환경의 한 부분들이며 굳이 말하자면 삶의 진실인 것이다. 따라서 아무것도 상징하지 않는다. 또는 달리 말하면 모든 것을 상징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 그러나 내러티브가 선명한 모습을 취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상징, 비유를 찾아 의미를 건져 올리려는 노력을 하게 된다.
"의미 찾기를 좋아하는 관객들은 화면이 주는 인상 속에 자신을 감정적으로, 미학적 의미에서 직접적으로 동화, 함몰 시키지 못한다. 불이 타고 있으면 불을 느끼고, 비가 내리면 비를 느끼면 된다. 각자가 지닌 삶의 진실 속에서. 그러나 이런 관객들은 동화되어 느끼는 대신 항상 '왜?' '무엇 때문에?'라는 질문을 부단히 던지면서 작품을 감상하지 못하고 마는 것이다."

순간 뜨끔했다. 이는 바로 내 얘기였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의미를 물어 영화를 스스로 더 어렵게 만드는 자충수에 빠지는 관객. 그렇다면 난해하다는 느낌의 책임소재는 절반 이상이 내게 있다는 말?

- 쉽게 믿기지 않는다. 당신 영화가 너무 어렵다는 비판의 책임을 관객에게 전가시키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풀기 어려운 암호 문제를 내 놓고 관객을 씨름하게 한 뒤 "아무런 암호도 아니었다"고 발뺌하는 건 아닌가? 너무 허탈해서 그렇다.
"결코 그렇지 않다. 나는 관객에게 어떤 특별한 의도도 감추지 않으며 관객들과 장난하지 않는다. 나는 관객들에게 이 세계를 내 눈에 가장 인상 깊게 보인 그대로 정확하게 보여 줄 뿐이다."

- 당신 눈에 인상 깊게 보인 장면이라는 것들이 관객 눈엔 너무 모호한 성격으로 다가온다.
"그럴 수밖에 없다. 명백한 뜻풀이를 허용하지 않는 형상을 빚으려 했기 때문이다. 형상은 그 의미하는 바가 무한하게 풍부하거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암시해 주는 경우에만 진정한 예술적 형상이 될 수 있다."

- 너무 어렵다. 쉽게 설명해 달라.
"일본의 하이쿠(俳句)를 예로 들어 보겠다. 단 3구 17음절로 된 그 단시(短詩)의 형상이 그토록 우릴 감동시키는 것은 그 무한히 열린 의미 때문이다. 하이쿠는 형상을 다루는 데 있어 순전히 그 자체만을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많은 것들을 의미하도록 하여 그 최종적, 궁극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분명하고 궁극적인 의미를 추출하는 것이 불가능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한'을 보게 된다. 이런 무한과 영원을 포착하려는 것이 훌륭한 예술작품의 지고한 목적 아니겠는가?"

그의 말을 들으니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그 신비한 미소엔 악마적 사악함이 비치는가 하면 천사 같은 온유함도 깃들어 있다. 순결한 수줍음에 매혹되는 동시에 타락한 유혹에 전율하기도 한다. 어느 하나의 의미로 결코 규정할 수 없는 형상. 소쉬르 식으로 말하면 하나의 기표(시니피앙, 표현)에 수없이 많은 기의(시니피에, 내용)들이 내려 앉았다 날아가 버리는 황홀경. 기의가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표 위로 무한의 그림자가 드리운다는 것.

"이런 맥락에서 나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원칙을 거부한다. 몽타주는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본 것을 자기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여 소화해내도록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감독이 의도한 상징과 비유를 강제함으로써 관객 나름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가능성을 앗아가버린다는 점에서 전제주의적이다. 결국 내게 있어 훌륭한 영상이란 감독에 의해서 표현된 이런저런 의미가 돼서는 안 되고, 비유하자면 한 방울의 물방울 속에 반사되는 온 세상이어야 한다."


대화 중인 인물들의 시선은 제각기 다른 곳을 향해 있다. 한 가족 같은 사람들인데도 하나 하나가 다 고립돼 보인다. 그들의 황량한 내면과 단절된 관계를 암시해 주는 듯하다. 영화 전편에 걸쳐 그들을 한 화면 안에 배치할 때 이같은 미장센은 반복돼 나타난다. ⓒ1986 타르코프스키


- <희생>은 인물들의 심리와 관계 역시 명징하게 드러내지 않아 작품 이해를 더 어렵게 한다. 이 모호성도 그같은 맥락에서 의도한 것인가?
"그렇다. 배우에 의해 표현되는 한 인간의 심리 상태는 반드시 은밀하고 비밀스런 측면이 들어 있어야 한다. 내 작품에서 배우들은 자신조차도 등장인물간 관계의 전개방향을 모르는 채 연기했다. 자신의 향후 운명을 이미 알고 있다면 '지금 여기'의 심리 표현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순간적이고 일회적인 내면의 진실성을 미묘함 그대로 표현해 내지 못하고 왜곡 시켜 버리게 된다."

이 영화에선 인물들에 대해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다. 관계 설정도 직설적으로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를 세밀히 보아 가며 인물들의 캐릭터와 그들간의 관계를 관객 스스로 구축해내야 한다. 이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 이 영화엔 당신 전 작품들을 통털어 가장 긴 6분짜리 시퀀스 쇼트가 있다. 집을 불태우는 그 장면을 그토록 롱테이크로 촬영한 이유는 무엇인가?
"관객들을 이 무의미하고 부조리해 보이는 행동 속으로 감정적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의도였다. 관객들은 이 미친 행위에 직접 참여하여야만 한다. 실제의 현실에서 체험할 수 있도록 중간에 잘라 편집하지 않고 불타는 리얼 타임 그대로를 보여준 것이다."


무신론자였던 알렉산더는 "전쟁이 사라진다면 집과 가족 등 모든 걸 희생하겠다"고 신에게 약속했다. 실제로 기적이 일어나자 그는 약속대로 집을 불태우고 정신병원으로 끌려간다. 처음 이 장면을 찍을 때 카메라가 고장나 집만 태워 먹고 아무것도 못 담았다고 한다. 절망을 딛고 불과 며칠 만에 다시 집을 만들어 '기적' 같은 재촬영을 해냈다고 훗날 감독은 밝혔다. ⓒ1986 타르코프스키


- 당신 영화에서 음악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일차원적인 그림 설명의 차원에 머무르길 원하지 않는다. 똑같은 형상과 내용에 대해 새롭고 질적으로 변화된 인상을 줄 수 있도록 선정하고 배치한다. 이를 테면 서정시의 후렴구처럼 작용하는 수법을 선호한다."

<희생>에선 바흐의 <마태수난곡>이 오프닝 신과 클로징 신에 반복해 흐른다. 이 영화의 처음과 끝 장면은 모두 '나무'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 <동방박사의 찬미> 속 잎이 우거진 나무에서 시작해 고센이 물을 주는 죽은 나무로 끝난다. 타르코프스키가 말한 '음악에 의해 질적으로 변화된 인상'을 이 마지막 나뭇가지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후렴처럼 나타나 앙상한 가지를 휘감고 흐르는 멜로디가 첫 장면의 무성한 잎을 환기시킨다. 생명의 율동감을 몰고 온 음악이 가지 사이로 부시게 빛나는 물비늘과 어우러져 마치 나무가 살아나고 잎이 무성해진 듯한 풍요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희생>을 통해 결국 당신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인가?
"파멸 위기의 세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책임 의식을 복구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깨어 있는 양심에서 희생이 나올 수 있는 것이며, 이 희생이 자신은 물론 세계까지 구원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했다."

- 마지막으로, 좀 도발적인 질문을 하겠다. 당신은 '희생'해 보았는가?
"내가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작품 <거울>을 끝낸 후 난 영화 작업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엄청나게 많은 관객들의 격려 편지를 받고 보니, 그토록 과격한 조치를 취할 권리가 내겐 없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이 내 영화를 필요로 하고 있다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화 작업을 계속해야 할 의무가 내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 활동을 통해 인류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클로징 신. 오프닝 신과 대칭 구조를 이룬다. 죽은 나무에 물을 준 뒤 누워 있는 고센(아래)을 비추며 올라가던 카메라는 앙상한 나뭇가지(위)에서 멈춘다. 이 나무 장면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를 놓고 봐도 거대한 수미쌍응 구조를 이룬다. 그의 첫 작품 <이반의 어린 시절>(1963) 역시 나무에서 시작해 나무로 끝난다. 카메라의 이동도 같은 식이다. ⓒ1986 타르코프스키


잠에서 깨어

인터뷰를 마치고 <희생>을 다시 보았다. 세번째 본 <희생>은 불편한 영화였다.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결벽적일 정도로 순결한, 범접하기 힘든 영혼을 가졌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전 존재, 전 영혼을 거는 정직함으로 마주 앉으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영혼을 시험해 보려 했던 부끄러움까지 밀려와 나를 곱으로 불편하게 만드는 영화로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예술영화들은 많다. 삶의 잠언을 던져 주는 예술영화들도 많다. 하지만 <희생>은 삶의 잠언들을 자상히 챙겨 주는 영화가 아니다. <희생>은 한발짝 더 나아간다, 아니 다가온다. 영적 혁명을 대놓고 요구한다. 타르코프스키 자신이 전 영혼을 거는 정직함과 성실함으로 영화를 만들었기에 관객에게 떳떳이 동참을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정직하지 못한, 그래서 떳떳하지 못한 관객은 보는 내내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다.

그의 일기가 <타르코프스키의 순교 일기>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멋모르던 나는 '순교'라는 숭고하고 거룩한 표현에 짐짓 삐딱한 의혹의 시선을 보냈었다. 얼마나 고결한 희생의 삶을 살았길래 한 영화감독의 삶에 '순교'라는 거창한 말을 갖다 붙였을까 하는. 그런데 이제 보니 그 표현은 합당했다. 그는 영화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순교자였다. <희생> 속 등장인물 오토는 "희생 없는 선물은 가치가 없다"고 했던가. 타르코프스키는 자신의 삶을 '희생'해가며 그의 영화를, 아니 그의 영혼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기고 간 순교자였다.

하이데거는 "세상에서 가장 죄 없는 일이 시 쓰는 일이고 죄 없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라고 했다. 타르코프스키야말로 스크린 위에 죄 없는 시 7편(<이반의 어린 시절>(1963), <안드레이 루블레프>(1969), <솔라리스>(1972), <거울>(1975), <잠입자>(1979), <노스탤지아>(1983), <희생>(1986))을 써놓고 간 시인이었다. 그는 영화감독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시인이었다. 한없이 정직한 윤리적 태도로 깨끗한 아름다움을 빚어낸 시인이었다. 그에게 미(美)와 선(善)은 투명하게 포개진 하나였다.

그는 암과 싸우며 <희생>을 만들었고, 완성된 해인 1986년 이 영화를 '유언'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유언에 오롯이 담겨 있는, 그가 동경해마지 않았던 이상향. 아, 그의 이상은 너무 높다. 높아서 멀다. 따를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그 유언 앞에서 죄 많은 우리는 그저 숙연해질 뿐이다. 속수무책으로 죄스러워질 따름이다.



덧붙이는 글

가상 인터뷰 속 타르코프스키의 대답 부분은 그가 저술한 책 <봉인된 시간>의 내용을 토대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의 말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그대로 쓴 문장이 있는가 하면, 그의 본뜻이 왜곡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범위 안에서 필자가 첨삭, 수정 등 가필한 부분도 있습니다.


2005/04/01 오전 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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