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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urker(2005-02-16 02:21:05, Hit : 1396, Vote : 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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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AA vs. DDD

플루서의 ‘두 대화’ 라는 글에 나오는 섬뜻한 발언하나가  컴퓨터시대로부터 철학 되어지는 것은 테마의 변화 뿐만이 아닌 생각 자체의 변화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최초로 타자기를 이용해서 철학 글을 쓴 니체의 말 즉, 글쓰기의 도구가 우리의 글에 관여한다는 그의 예감과 다를 바가 없으리라 생각 합니다. 아마 필름을 스캔하는 작가의 머리 속에서도 포토샵으로 먼지를 지우는 작가에게서도 가래떡 나오듯이 뽑아져 나오는 사진을 바라보는 람다기계 앞에 서 있는 작가에게서도 공통 되리라 생각 합니다. 아직은 디지탈 카메라가 필름의 퀄리티와 눈에 보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이유로 대부분 AAA(아날로그 촬영, 아날로그 현상, 아날로그 인화)와 ADD(아날로그 촬영, 디지탈 스캔, 디지탈 프린트 또는 프레젠테이션)의 작업이 선호 되고있지만 이미 사진의 진화는 DDD의 방향으로 핸들을 틀어 버렸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퀄리티에 대한 것이 아닌 도구를 들고 있는 자의 인식의 틀에 관한 예기 입니다. 즉 이데올로기화 되어지는 테크놀로지의 엉뚱한 변종에 관한 방역을 하자는 취지입니다. 요즘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는 AAA작가와 DDD작가의 서로의 소외감입니다. 이것이 위의 첫 줄에서 말한 플루서의 섬 뜻한 눈치 입니다. 비약 하자면 맹목적 AAA는 향수병에 빠져  암실 문을 잠가버린 체 무덤에 있는 선배들의 뺨을 부비고 있고, 맹목적 DDD는 디빠가 되어 혹은 기심(機心, 머쉰 마인드)에 빠져 제품 카달로그를 들추며 얌체 짓 하느라 정신 없습니다. 예전 한참 샘플러라는 신디사이저가 초창기 유행을 할쯤 신 해철이 어느 라디오에 나와서 "눈감고 들으면 다 똑같아.. 진짜 피아노와 샘플된 피아노.. 이거 진짜 마데 인 스타인웨이 상아건반 피아노 샘플 한거야..험..음 나 잘나가는 전문간데 솔직히 구분 안가!!" 하며 음악들을 맛을 떨어뜨리며 민생을 계몽하는, 지금 안 어벙의 역할을 자처 했었는데, 작가는 이런 스스로 장님되기의 계몽주의적 쇼에서 소모적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비둘기에서 매가 되어버린 neocon(신보수주의)도 보기 싫고 libertarian에서 techno-liertarian으로 되어버린 강령의 장님도 보기 싫습니다. 왜 이런 회색 발언을 하냐 넌 누구의 입장이냐 혹시 너 ADA냐? 아님 DAD 혹은 안 아나키? 라고 양쪽에서 쏴 붙인다고 해도 전 맹목은 회색보다 더 장애라고 생각 하는 입장 입니다. 가끔은 생산적인 동어반복(tautology) 장난을 한번 쳐 봅시다.  "사진은 사진이다" 이 말은 사진을 뭐 하나의 인생을 짧게 굵게 의미심장하게 남긴 도가의 말처럼 들리나, 자세히 음미 해보면 엄청난 쓴 웃음이며 더 씹어보면 독일말로는 '에갈' 영어론 '아이 돈 케어' 국어론 '상관안해' 이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즉 이 말에는 예전 노승의 말처럼 “이 놈아 산이 산이라고 했다고 산만 보냐? 내도, 네도 좀 봐 봐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 사진만을 보며 사진만을 음미하는 자 어디 있습니까? 중요한건 필카건 디카건 몰카건 카메라에 눈알을 들이밀고 있는 사람이고 그들의 세계관 입니다. 하지만 디지털이니 아날로그니의 담론은 사진을 사진으로만 본다 이겁니다. 대부분의 사진 애호가들의 악취미가 프린트와 액자와 재료에 쏠려있지 작은 자동카메라에서 찍혀 수줍게 폭팔하는 사진의 풍크툼은 애초에 무시해 버리는 정말 울어주세요 드라마를 만들듯이 말입니다. 즉 사진을 보여 줬더니 정말 사진으로만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영역을 가난한/부자 브루조와로 또는 선민으로 보이스 카웃으로 소외 시키고 있습니다. 이런 실수가 아날로그와 디지탈에서도 일어 나는데 이건 초상화가가 초상사진가들을 혐오 또는 무시했던 그리고 비문자사회에서 갑자기 창발하는 발명된 문자를 악으로 치부했던, 또는 역으로 행해졌던, 오류 그 자체의 반복 입니다. 생업이 달린 사람들에겐 물론 다른 통로의 대화가 있어야 되지만 어떤 예술의 담론 안에선 분명히 리오따르의 거짓 큰이야기(거대담론)의 생산이라고 생각 합니다. 다시 첫 문장 플루서의 말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탈은 다른 생각을 철학하게 합니다. 그러나 우린 그 생각이 지시하는 저 사진너머의 일상과 그 지시자와 지시체와 지시당하는 나를 모두 보아야 합니다. 그것이 먹물이 해탈하는 길이고 해석이 용(지식, 화용)이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에 사진은 바르뜨의 인덱스만의 기능은 아니라고 봅니다. 인덱스 사진론은 작가를 철저히 제외시키고 소외시키고 게다가 이렇게 찍으라고 은근히 강요까지 해 되기 때문입니다. 즉 해석학의 권위 획득이지요. 이말은 유명한 구성론자들의 경구인 제가 좋아하는 하인즈 폰 푀르스터의 "화자가 아닌 청자가 의미를 결정한다"와 일맥 상통하나 (이것은 수신자 개개인의 종합적 겸헝이지 해석의 매뉴알을 통한 분석적 경험이 아님) 구성론자들의 길은 예술과 미학이 아닌 사회 시스템과 소통에 대한 얘기 이므로 여기서 생략 함이 옳을 듯 합니다. 이 둘의 좋은 예로 해석학적 앎이란 “아는 만큼 본다” 이고 구성론적 앎이란 “아는 만큼 보이는데 보는 만큼 안다”입니다. 또 다시 첫 문장으로 돌아가서 플루서와 니체 또는 하이데가 바라본 것은 기술문명의 영향/악영향 이전의 그 문명을 통해 다르게 사고 하는 자신의 모습이 였다는 것입니다. 즉 반성이 말 보다 앞선다는 얘기 이지요. 디지탈이냐 아날로그이냐는 선택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라이프니치와 연금술사 라이문두스 룰루스는 몇 백년 전에 이미 디지털적인 사고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카메라 보다 오래된 우리(서양과 그리고 동양의 음양사상)의 사고의 방법 중의 하나 였다는 겁니다. 0 1 0 1 0으로 환원 되는 것을 싫어 하면서도 0 1의 표현의 가치를 질의 가치로 은유하는 모름의 오류와 아날로그의 >제어<는 아름답고 디지털의 >조작<은 공허 하다는, 또는 반대로의, 반성 없는 드라마가 특히 사진에서는 자기 살 파먹기 라고 생각 됩니다. 왜냐면 사진이야 말로 태생이 제어와 조작을 통해서 태어난 테크놀로지의 기심(機心)의 산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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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2005-02-16 18:21:25)  
"맹목은 회색보다 더 장애"라는 말에 한표 b(-_-)d
사진만큼 타 매체/권력관계/담론에 포섭되고 활용되는 매체도 흔하지 않을텐데 난 치듯이 넘 단선적으로 다그치는 눈깔들의 문제는 더이상 언급할 가치도 없을 것같군요.
앎과 도구, 사고방식의 구조화를 사실 서둘러 밝혀얄 시점인 것도 같습니다. 반성이 말보다 앞서는 측면이 지금은 거의 걷잡을 수 없는 지경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들고요. 디지털과 음양사상, 퍼지이론과 변증법간의 실제관계에 대한 구체적 서술이 있다면 알고 싶은데요, 추천해주셔요. ^^

더불어 위에서 말씀하신 "소모적 이데올로기"에서 작가가 자유로워 지려면 시스템과 매체를 꿰뚫는 시각/자신에 대한 통찰력이 있어야 할텐데, 웬지 이런게 책만으로는 되는 것같지가 않더란 말이죠. 이런 면에서 뇌수가 배어든 땀이 필요하지 않을까 합니다. 아님 다른 방법이....?
zabel (2005-02-16 19:54:19)  
제 블로그에 옮기려 하는데 괜찮을실런지요.
lurker (2005-02-16 22:03:07)  
서양은 이미 매체의 고고학이라 하여 지금 모든 매체 또는 기계의 출현을 산업 혁명 훨씬 이전의 기원으로 추적 하려는 이론 작업들이 봇물 터지 듯이 쏟아 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온고이지신의 역 실천입니다. 예를 들면 “기술적 듣기와 보기의 깊은 시간으로”라는 부제를 붙인 지그프리드 칠린스키(현 독일의 khm 교수)의 책을 보면 중세부터 현재의 넷아트 까지 의 큰 팔레트를 펼치며 미술사에서 침묵하고 있는 현재 매체 작가들의 짓거리 들을 포괄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진에서 사라지고 있는 labor의 정신을 모든 매체예술에 디지털세대에게도 부추기고 있습니다(여기서도 맹목은 금물입니다). 물론 푸코의 역할이 컸지만 이런 경향이 철학 뿐만이 아닌 사회과학과, 매체예술 등의 모든 이론 분야에서 창발하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라는 현재 독일의 영향력 있는 매체철학가의 책이나 혹시 강의를 접해 본 사람은 시종일관 얘기되어지는 그리스 신화에 피타고라스에 공자의 삼분손익에 머리가 아플 정도 입니다. 그게 뭐 작업이랑 무슨 상관이냐 따지기 전에 현재의 정신 못 차릴 정도의 테크놀러지의 업데이트를 아니 업미뉴트의 가속을 상대적으로 늦추자는 미래의 비젼과 이내들의 기술의 멀미증을 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럼으로써 새로운 신기술에 대한 호들갑이 아닌 쿨한 태도를 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도구를 들고 있는 예술가에게 그들의 실험에 어떠한 보이지 않는 바닥 만들어주기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 한국의 이론계와 작가들은 이런 현재의 소란에 덩달아 호들갑을 떠는 것이 사실 이라고 생각 합니다. 저 밑에서도 얘기 한적 있지만 매체를 불투명하게 경험하기를 작가도 이론가도 겁내 하고 있다는 말 입니다. 즉, 핸드폰을 인터넷을 수출하는 자부심 뒤의 어떠한 우리의 큰 콤플렉스와 불안이 저에게 만 보이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위에 구성론의 얘기를 하며 “아는 만큼 보이는데 보는 만큼 알게 된다”는 엉뚱한 얘기를 했는데 그 얘기 속에는 앎도 실천이 없이는, 또는 반대로도, 작동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실천은 단지 도제식의 반복적 행함의 노동이 아닌 제한의 경험이라는 뜻이지요. 그 제한이 구성 주의 자들이 말하는 정보입니다. 즉 그들에게 정보는 유익한 것도 영양가 있는 것도 아닌 제한 입니다. 이 말을 쓴 이유가 바로 위에 말한 labor정신의 부활과 일맥상통한 뜻합니다. 누구나 암실에서 사진을 아님 화학실에서 시험관을 만져 본 사람은 지식이 어떻게 구성 되어지는 지를 불투명했던 기계가 어떻게 투명해지는지를 당연히 알 거라 생각 합니다. 바로 제한의 경험들입니다. 그럼 면에서 현대의 예술가들은 과학자들과 어떤 면에선 그리 다르지는 않습니다. 즉, 많은 현대 예술가들이 관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정보가 아닌 제한으로 또는 불안으로 장해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정보 예술이라는 기심(機心)의 망상에서 먼저 깨어나는 작가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꼭 구성론자의 얘기를 들 먹이지 않더라도 이렇게 현재 작가의 역할이 멀티미디어를 들지 않더라도 얼마나 중/다의(ambiguous, multi)적인지에 대해선 누구나 주지할 사실 이라고 봅니다. 다이안 아버스의 그녀의 작업과 소박한 텍스트(강추천)에 또는 차 학경의 혀 이전의 언어를 말하려는(공 옥진도 이런 맥락에선 중요함) 글과 작업 속에 또는 바이러스 같은 JODI의 홈페이지속엔 이런 제한을 경험하는 아름다운자의 모습이 보입니다. 자벨님의 뇌수가 배어나온 땀이란 말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발언이라 생각 합니다. 앎에 매달려있는 사람과 앎을 씹어먹고 예감하는 사람이 다르듯이 작가는 담론을 붙잡고 있는 기웃거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 위의 글의 취지 였습니다. 그리고 디지털과 음양이론, 퍼지, 변증법 등등은 차근 차근히 씹어 봅시다. 워낙 백수라 시간은 많으니…

그보다 이젠 psyvenus의 얘기좀 들을 때가 ㄷㅚㅆ는데요..ㅎㅎ. 전에 말한 *지, *지 사진에 대해 얘기 해봄도 중요할 듯 합니다. Labor에 안 맞겨도 되는 사진기술의 출현으로 곧장 렌즈가 그녀의 그의 그곳으로 먼저 향하는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게 웹에 올리는 쌩뚱맞음에 대해서요.

카피레프트 입니다. 수정또한 환영 합니다.
zabel (2005-02-17 02:49:05)  
워..워낙에 제 지식이 일천한지라... 제가 드린 질문을 같이 씹어 드릴 순 있을지 모르겠으나..--;; (공부를 해야하는 것인가..ToT)
제 보기엔 지금 한국에서 전시등속에 붙는 글들이..이론의 맥락을 위해 작업을 치장의 도구로 쓰는 경우가 많은지라, 루커님 말씀이 지금 이 바닥에서 굉장히 중요한 지점을 조지고 계신 듯한 느낌입니다.
또한 누구의 혓바닥에도 의지하지 않고, 현실 시스템 혹은 총체적 인간 생활에 의거해서 작업을 해석하는 것도 일면 필요하다고 보고요. 그러므로 싸이비너스의 말처럼, 어떤 담론에도 의지하지 않고 단지 장난/자극을 위한 소통의 방식으로 디카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현상황을 이용해서 굉장히 신선한 논점/지식의 생성을 이룰 수도 있다는 예감입니다. 이런 것도 반성이 앞선다할 수 있을런지.
문장 띄어쓰기만 조절해서, 아래 가운데 眞버튼에 링크된 제 블록에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샤!!!
p.s : 일전에 백남준에 관한 글을 보다가 어떤 1950년대 평론가가 그를 발명가 정도의 작가로 평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물론 위와같은 의미로 한말은 아닙니다만, 현대작가들이 금에 눈이 멀었으면서도 어케 만들지 당황만하는 연금술사와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같군요. 생각할 수록 흥미로운 지적이쉼다.

참!!! 답글남기느라 깜빡했습니다만.
좋은 글 남겨주신 것, 감사드립니다.(__)
psyvenus (2005-02-17 05:46:41)  
폭탄이 파놓은 현장이 너무 참혹해 마련해주신 차량에 오르기가 겁나는 군요 오늘의 기분이란, 차량에 폭탄을 싣고 저 새끼가 나쁜 새끼다!라는 말에 속아 돌진하기 보다 산 언덕에 올라 별을 보며 멀리 도시의 차량들을 보고 소주나 마시고 싶은 날입니다 한 번 붙자는 데 쫀거 아니냐구요? 당신들 자지는 '고 넘'들처럼 맨날 서 있습니까?한 젊은 매체이론 교수와 약속이 있었고 치열하게 대화를 마치고 돌아와보니 모텔에서 내란이 있었군요 그가 내가 모니터를 켜자 아니 네가 디지털로 작업하기 시작한거냐 묻길래 왜?아니 너 디지털... 우리 이데올로기를 초월하자(고 놈은 내가 이 문제로 쉽지 않게 고민해 온 걸 알고 있다 십년넘게 곡물을 바쳐온 점왕이 무너지고 수왕이 집권해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이를 믿기 어려웠던 것이다.시발 내 곡물을 돌리도-새로운 전략-곡물을 바치되 포대에 흙을 넣기(뇌수론과 맞닿음)
그럼 이 사진에 얼마나 손을 봤고 조작했냐 그렇다면 아날로그는 대체 조작과 조작이상의 무엇이지?먼지들을 좀 지웠다 하지만 난 내가 지운 게 먼지인지 다른 어떤 '더러운 것의 출현'인지 확신하지는 못하겠다 대신에 이렇게는 말할 수 있겠다 난 조작했어 너가 여태 본 '너 개인적인 취향에서 더 신뢰하고 있다고 믿는'내 아날로그 프린트들을 내가 조작해 온 만큼,네거티브를 걸고 그로부터 아주 조금 더 많이 아니면 다 말이야 중요한 것은 어떠한 톤이 사진의 현실감이라는 신뢰의 수사를 허락해 왔냐는 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내가 벽으로 투사된 네가티브 상을, 이젤위에 맺혀진 그 상을 볼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며 현재, 인공위성 위에서 내 사진을 조망하고 새로운 위계-속에서 퇴행적인 -먼지지우기-를 위해 노동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것이지 암실은 내가 사진의 역사라는 어떤 제의적인 카테고리 안에서 날카로운 인공광아래 먼지들을 식별하고 에어브러쉬로 제거하고'키는' 과정이었다면 모니터상에 떠오른 먼지는 너무나 거슬려 보이지 않니?이것들은 내 새로운 고민들이다 먼지들을 그냥 놔둔다면? 그런 질문들이 왜 사진가들에게만 던져지는 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나한테는 아우슈비츠가 바로 바깥의 스피커에 행진곡 켜놓고 모니터 앞에서 먼지지우기하던 한 사진가의 '작업중인 사진'이었고 하이데씨의 존재시간같은 사진은 먼지 다 지우고 필터링까지 한 우아한 독일식 사진아니냐
웃기지 않냐 내 존재-는 먼지같은데 나는 그 사진의 우주에서 -그것이 비록 수치적인 영상으로서 기호의 기호로서 실체를 수식하는 데는 불충분하다는 전제를 기억하고서라도-땅에 박힌 수만개의 조약돌중의 하나를 먼지냐 돌이냐 구분해야 하고 있으니 바다의 새들이 그렇지 미약해서 제거될 것들 ...사진의 위기라면서 현재 ADdA(아날로그촬영디지털스캔디지털출력아날로그식디스플레이혹은소멸)에서 볼 수 있는 초대형화한 카메라 모니터앞에 바쳐진 집념의 조작시간 출력이후, 아날로그 전시포맷을 빌려 은근슬쩍 그 담론에서 돈을 벌고 있는 메뉴얼전문가들의 장난에 계속 기생하고 싶어하는 모습은 장치는 결국 사회의 행태를 프로그래밍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특정 이해관계속에서- 있다는 플루서의 말이 떠올라 폭격의 경우도, 아군을 배치한 특정 이데올로기에 대항해 제거되어야 할 것.으로서 보여지고 폭격당한다면(아!기존 사진에서 카메라앞에 대상이 존재했음으로서 미소짓던 아련한 아우라의 시대여그대들의 부재는 격추당한 것이리로다)그럼으로서 위상에 따라 손쉽게 재배치되어질 수 있고 픽셀이라는 수치적인 단위의 격자형 아래 '정체'를 명석히 규정해 놓은 현재의 단위란 내게 엄청난 단위의 분리앞에 고심할 수 밖에 없는 내 위치감을 강요해 아니, 어쩌다가 이런 시대에 타향의 갈매기가 되었을까? 그가 갑자기 18세기의 한 떠돌이의 격언을 말해준다 나한테로 가려면 지구 한 바퀴를 돌아서 가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업 -대형카메라를 머리에 이고 숲에서 한 시간이나 그렇게 사진찍는데 -그가 기존에 보았던 한국-독일식의 사진시리즈에서 떠돌던 질문-풍경은 아니 사진은 자신을 누구로부터 찍혀있다고 생각하는가-의 한계를 인상적으로 넘어섰다고 '좋은'말해주면서 말함-나는, 내 한 오래된 사진가를 죽여버리고 싶었다 한국갔을 때 이상하게도 난 거리에서, 인파속에서 내 자신이 또 타인이 되버렸다는 느낌보다 더 강렬하게 풍경이, 이 사람들이 어떤 특정한 시선아래서 흉내내기놀이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 카메라를 머리에 얹어 버린 채 더 이상 파인더를 바라보기를 멈추고 너를 그 카메라의 광학적 결상-의 구도로부터 엇겨나 두고 있는 것이 나한테는 그 행위가 너가 여태 그러한 동작으로 바라봐왔던 것이 무엇이었는가를 보는 행동으로 여겨져-땅 바닥으로 향해져 찍힌 폴라로이드는? 13도의 온도는 거기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야 폴라로이드의 겉포장에 그렇게 씌여져 있지 거기 추워 비오고 13도 없어 그렇게 한 시간 동안 처음엔 별로 보이는 게 없어 상상이 무서운 것들을 끌어다 생각하고 내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지 라는 생각을 하다가 이거 피 안통해서 못해먹겠다 아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을 생각하다 보면 문득 아무 생각이 없어져 나한테 노출은 내가 그렇게 버티고 있던 시간의 어떤 궁극적인 적정노출-이라는 것으로 채워져 가는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노출'이 아닌 '버팀'의 동작을 통해서 그러한 적정이라고 약속된 노출의 정도자체를-이른바 '중후한'철학에서 미리 전제하는 어떤 '참된인간'을- 회의하는 데 이와 동시에 '숙고'보다는 '봄'이 우선하는 카메라라는 장치에 내재된 고속의 포착성으로부터 어긋나버린 채 이 볾의 행위를 숙고,회의, 잡스런 단상으로 풀어헤치는 데 의미가 있었어(그녀라는 사진은 너무 진지한 긴 사랑의 열정보다 내 격렬한 형용의 몸동작에 무너졌지 -매체라는 의식이 있기전 이미 수캐들의 좌절은 존재했느니) 여기서 그 긴 시간은 오히려 의식적으로 더 가벼워지고 비워지는 것을 기도하는 시간이지 , 그렇게 촬영을 마치고 뒤로 물러나 땅 방향으로 폴라로이트 셔터를 누르면 한 시간동안 어둠에 적응한 -충분히 못 -보았다고 -느끼는 눈이 폭팔적으로 많은 것들을 보게 된다 내가 서 있던 자리 내가 서 있던 발자국 어떤 밤 숲의 거대함 난 내의안에 폴라를 넣고 기다려 ,,벌써 숲이 동요하지 새들날아다니고 그 때 일기장에 썼었어 밤에 숲에 가면 발목이 너무 아프다고 보이지 않으니까 막 밟게 되는데,굴곡이 많은 그 울퉁불퉁한 바닥을 길잃으며 헤멜때는 그렇게 지나가고 지나갈 사람들의 발자국들 때문에 그렇게 굴곡이 파여새겨져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까 이건 내 발자국들이 아니야 하지만 난 그렇게 간신히 내 사진을 찍어내 그가 말했다


자지는 자신의 주인을 누구라고 생각하는가?인터넷의 끝은 진정 보지라는 새로운 구멍인가?-그렇다면 보지는 자신의 구멍을 어디를 위한 구멍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찬찬히 풀어가기로 하지요 -현재 AAA(아!아!아!)도 아닌 DDD(더!더!더!)도 아닌 체위속에서 십자포화에 놓여진 채 생업과 존재적 위기감을 절감하고 있는 내-사진가들의 전통적인 기만을 애도하면서
-lurker님 폭탄은 날이 갈수록 위력이 더 세지는 군요 zabel님, 근데 문장 띄어쓰기는 누가 고치는 거예요?우리 zabel님 어디갔어요?
lurker (2005-02-17 14:30:38)  
lurker (2005-02-17 14:28:05)
[숨좀 쉬고]

"ㅂㅗㄻ"이라는 거 오타인지 진타인지 있는 단어인지 모르지만 거의 국어사전의 개정 신단어 영순위 감이구먼. 이게 우리말의 유희와 소통의정수 아닌가? 아.. 난 개시판이 여지껏 계시판인지 알았던 dittography 또한 수정한다.

나는 나의 dittography!

[한잔 하고]

여길 보나 저길 보나 우린 상실의 시대라고 주절 되고 아마 그 상실의 리스트를 뽑아도 한 권의 단어사전이 나올 듯한데 치료약은 예나 지금이나 취함이고,

정 말 슬 퍼 하 는 가 오늘?

플루서의 화두로 시작된 타래, 그가 인간의 소통의 이유를 생의 시작과 함께 의식한 죽음으로의 잔인한 무의미를 근원적으로 의식하는 자연으로부터 판결 받은 우리의 공포를 잊기 위함이라고 쓰며 우리모두는 어쨌든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그러기에 우린 그 무의미를 더욱 잊고 싶어 더 소란스럽게 무의미를 소통한다는 그 것 말 들.
어느 시인은 유리병안에 편지를 봉하고 저 은하수 너머로 던지며 그것이 자신의 생이 였다고 혹시, 누군가 열어보고 읽어볼 수 있다면 좋겠다며 소년의 미소로 독일어로 그의 부모와 그의 삶을 망가뜨린 그들의 말을 모국어로 배운 운명과 장기간의 침묵과 잃어버릴 수 없는 모국어와 침묵할수록 쏟아지는 시와 그와 그들의 눈물과 어색한 화해와 씻을 수 없는 분노와 세느강 으로의 투신과 시인의 훈장과 팔락이는 검 은 리 본.

이 말들 실어 지지 않는 신음.
흉내내기보다 무서운 건 잊기 단, 이방인 이라는 조건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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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게시물 광고!!

싸이비너스가 폭탄 얘기가 하는 김에 진짜 폭탄테러 얘기 하나!
시간 나는 데로 올릴께요. 작년 나온 다큐 영화인데 das netz 라고 the net .. 작년 초 극장 개봉하기전 우연치 않게 보게 되었는데..정말 중요한 사건 이었음.. 현재도 진행형임..

[UNABOMB]

카진스키의 우편물 폭탄, 과학과 철학과 예술과 사회를 통합하려는 슈퍼 오르가닉 글로발 넷트워크에 향해진 그의 몸짓 그는 LSD(마약) 분과의 피 실험자 였고 유망한 수학과 교수 였으나 분노와 재앙의 예감을 테러로 분출 지금은 복역중… 우린 이런 그들의 문명 네트를 사랑하는가? 네트를 통해 사랑 하는가? 이 사건엔 우리들이 아는 대부분의 지성인들과 록그룹과 백 남준과 워홀등의 예술가들의 이름이 크고 작게 거론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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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벨님 잘 놀고 있으며 더 잘 놀자구요!! 저도 감사!
싸이비너스는 그래서 자지의 주인을 누구라고 생각 하는고? 참나. 옆에 있었으면 옆구리 한번 찔렀음! 주말에 위에 광고한 폭탄 다큐영화나 한번 보러가자.. 개봉했다!
lurker (2005-02-17 14:41:59)  
"ㅂㅗㄻ"이라는 단어가 깨지는 군요.. 본다와 안다의 합성어로 이해를 했는데.써지지가 않느군요 아무튼.
zabel (2005-02-17 21:10:12)  
별...
그나저나 AdDa란 단어 좋다. 무슨 작업단체 이름으로 하는 것이, 좋잖아 "아다"
단어 깨지는 것은 윈도문제가 아닐까 하는데요, 최군네 컴이 한글 윈 깔았다 하더이다. 잠깐 [볾].. 저도 되는 군요.
서구 모더니즘의 균열이 생기는 시점이, 무의미가 실제론 의미가 없지 않게되어갈 즈음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갑작. 근데...렌즈가 질구인지 자지인지 모르겠네, 착상을 하는 걸보면 질구라고 봐야하나.
psyvenus (2005-02-17 23:02:51)  
몇 시 몇 분을 정확하게 기입하여 정확히 G5작업시간을 나누자는 덴마크에서 온 엘리스말에 그래 다 좋은 생각이다. 그런데 난 내가 언제 죽을지는 모르겠다라고 얘기하자 또 방에 바람이 불었다 저번에 상을 받은 필립은 군인처럼 척척 먼지를 지워대며 계속 시발거리고 있었고 난 가끔씩 옆에서 이런 것이 작업이 아니지 않았던가 하는 통속가사같은 물음을 던져대고 있었다 질서와 혼돈 학교 어딘가에서 벽에 붙은 그의 수상에 대한 기사들은 그런 제목을 달고 있었다 그 때 내가 아는 한국으로 돌아간 한 사진가가 그런 제목으로 철저히 외면받고 한 은행에서 쓸쓸히 전시를 하고 있을 무렵, 독일언론은 한 모범적인 혼돈과 질서를 표창하고 있었다 창 밖에 보면 건물들이 많이 보였고 다음 시대에는 어느 누구도 그 건물안의 서류더미 앞에서 울고 있지 않을 것이다.

엄마는 부처의 웅장함과 죽음이라는 절망 윤회라는 거스를 수 없는 먼 수레바퀴여행에 대해 틈이 날 때마다 말해주었다 애미애비없는 자식이라고 준비물 준비해가지 못할 때마다 또 공포를 조성하기 위해 권력의 영광을 드러내며 본보기로 누군가를 처단해야할 때마다 애미애비없어 뒷끝없어 교단앞으로 불려나간 나는 선생의 구두발에 뺨을 눌려 교실바닥에서 왁스냄세를 맡고 있을 때도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의 흔들리는 눈빛을 보고 마음을 조리고 있었다 부처믿는다고?지랄하네 어디서 무당질이나 하는 기집주제에 자식은 저딴 식으로 내팽개쳐가지고 아 나는 그런 말들을 들을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여자애가 그래서 나를 버리지 않기만을 빌었다 엄마를 만나면 그런 건 다 에갈,아이돈케어였다 하지만 엄마가 내 전역사적인 마법적 세계와 시간을 단절시키고 거기에 부처에 의한 영토화한 성을 세워놓고자 했던 것은 그리고 거기에 지성소라는 주체화의 검은 꼭지점과 윤회라는 저주 그리고 전지전능하고 응대할 수 없는 율법적 시선장치속에 나를 가둬놓았을 때, 당신은 애미된 자로서 나를 떠나는 데 대한 찢어지는 죄책감을 그렇게 스스로 조성한 정당성 아래 달래고 싶었던 것이다 그 땅은 확정되어졌고 죽음에 의해 유한해졌으며 윤회에 의해 또 피로해졌다 그리고 엄마는 부재로서 다시 그 땅을 수탈당한 장으로 남겨놓고 없었다 쓰라림이 너무 크면 한계너머의 한 단편적인 지식의 맛을 보게 된다 중생을 구한다고 떠나는 엄마를 위한 부처에 대한 내 기도는 아주 짧았다 최고의 증오는 곧 단절이었음을 나는 그 때 깨달았다. 달팽이는 부처님한테 절도 못하고 구도도 못 받고 부처님을 아는 마음도 믿는 마음도 설법을 들을 귀도 없는 데 어떻게 다시 사람으로 태어나요?라고 묻던 내가 사람으로서 엄마아빠없는 거보다 엄마아빠있는 달팽이가 더 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던 때, 나는 애초에 살았던 땅으로 갔던 것이 아니라 그 성의 구역으로부터 빠져나와야만 했던 것이다. 프로그램은 메타프로그램에 의해 영합되고 팽창되듯이 증오와 도피 그리고 타자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이른바 비판의 논리는 애초에 성이 설계해 놓은 마구간이었다 그 마구간은 다른 별빛이 들고 파도소리는 울음소리를 닮았다 ...독일쾰른의 시내중심가에서, 까페안에 우스꽝스럽게 놓여진 미륵부처의 상을 보았을 때 나의 우상 엄마의 남자 내 아빠이자 내 우주의 한 지배자는 마침내 죽어버렸다 신들의 싸움이 있었고 세례를 받을 때도 엄마는 달려와 울부짖었다 찬송가는 군가의 변주곡이었고 성수는 인주를 닮았다 율법학자들은 다시 그녀를 십자가 위에 매달았다 목사는 주예수그리스도를 부르짖으며 나를 연단앞에 세워 다시 또다른 영토와의 계약체결을 종용했다 입으로 시인하라....난 엄마를 내려달라고 말했다 나 천국 안 갈래요 왜 내가 천국가는데 엄마를 죽여야 돼요




숲에서 작업내내 내가없는감각을독일로돌아와카메라로내리짓누르며박아라박아라땅에내리눌려라제발땅에박혀라고향은네지옥이다땅의수면위에서재처럼날아갈려그래도제발부디내리박혀라너를구원해줄곳 마침내너무추운겨울이라땅바닥이꽁꽁얼어버렸을때도울면서도내입은군가를불렀다 난 엄마가 그런 지식계약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던 가족과한국역사에고통을앓았다. 사진은-엄마가 내 꼬마때 보여줬던 사진집에서 본 듯이 부처를 찍어내는 마법적인 눈이었다
현재, 그토록 당신이 의식하던 -마침내 저승에서 무서운 판관들과 염라대왕앞에 마주하게 된다던 전지전능하고 응대할 수 없는 시선에 의해 낱낱이 드러난다는 죄과는 National Photographic Interpretation Center와 상업화한 digital globe에 의해 완성되었다 스스로 신화적인 지식아래 국가적 위계를 기꺼이 설치해 준 댓가로 되받게 된 이 종교자체의 국가적 제국주의화아래 당신의 '지식'은 그 윤회란 영원히 짐승과 토막나버린 천민의 가족사를 넘나들 뿐이겠지 우리가 살아내는 것에서부터 실천이 발원하듯이 자기를 휘두르는 무수한 손가락들의 구금으로부터 끊임없이 해방되며 그렇게 장치화되어 가고 있는 프로그램의 자동적인 구동과 증식(적은 실체가 아니라 바로 그러한 자동화며 망각이다)은 더 다양화하고 첨단화한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능동적인 신화주입의 편이성으로 영토를 넓혀간다. 미국의 국방성이 적의 개념을 더 이상 이데올로기나 영토에 국한시키지 않고 평화와 자유를 위협하는 모든 종류의 테러리즘에 대한 발본색원으로 설정했을 때, 낡은 마르크스적 장치비평에 경도된 채 머물러버린 우리들의 죽어버린 인문학은 침묵하고 있었다 십년내에 실용화할 전투로봇의 막강한 화력앞에 로봇이 인지할 적의 분별, 그 적에 대한 개념과 지식은 어떻게 이식될 것인가 우리의 모든 AAA나 DDD등에 관한 논쟁 매체가 이미 그 자체안에 가지고 있는 '의식'-(나는 매체가 의식을 부린다기 보다 매체는 이미 어떤 특정한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곧 매체에 의해 세계자체의 개념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그 매체에 대한 용도를 둘러싼 문제를 넘어서 새로 포맷화하는 사고방식체계를 비판적으로 숙고하는 데 있다고 보는 데 lurker님이 제시하신 정보의 문제 즉 정보란 제한너머의 앎과 볾의 문제다라는 제기는 매우 중요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제한과 한계. 이 어지러운 낱말들의 또 거대한 상징들이 조용히 자신들의 예배당을 건축하고 있군요 내가 다가가서 좀 쉬자 죽어서는 안되잖아 그랬더니 어떤 작가들이랑 평론가들이 헌금을 했다고 말해주더라구요 개네들이 말했데요 '제한너머 천국가자' 바로 개네들을 위한 천국을요 -




날이 흐리다 날이 맑은 날에 날이 맑다라고 쓰지 않은나는 그렇게 또 날의 흐림을 통해 세계를 공표한다.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며 동아시아의 전근대적 가치를 봉쇄해버린 서구의 노래는 0과 1사이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련을 버리세요 라고 노래부르며 정찰로봇 총살로봇 요격로봇 발본색원로봇을 개발했다 현재 아시아는 서구가 본 영토에서 꺼려하는 살육과 전쟁 수탈 참상등의 촬영을 벌이고 있는 에드워드 사이드식으로 말하면 잠깐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지는 과학실험실이다. 이 실험실엔 밤이면 가정으로 다 돌아가버린 연구원 덕택에 쥐들이 나와 실험도구들을 들춰보며 경이를 표하고 있다 하지만 쥐들은 설명해야 한다 인식과 세계관을 위한 공간은 양화일 필요도 음화일 필요도 없다는 것을 전근대라는 말은 우리가 비웃어야 할 낱말이 아니라 우리가 붙잡고 울어야 할 찢겨진 낱말들이다
lurker (2005-02-19 15:24:19)  
싸이비너스가 말하는 매체(?)또는 도구가 어떤 특정한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만들어 졌다고 보는 입장은 어딘지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어감 때문인가요, 뭔가 경직입니다. 즉 님의 발언은 오히려 소프트웨어 쪽에 치중한 이야기 이나 소프트웨어 또한 의식의 >요구<가 >강요<보단 우선 하다고 생각 됩니다. 에디슨이 축음기를 만들고 가장 고민 했던 것도 그 스스로가 축음기의 용도를 확실히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의 그의 제품광고란에 주절 주절 써 댄 것이 가족 오락용, 죽은 부모의 목소리 듯기, 다른 나라의 풍물 듯기 등등을 써 눴는데 어느 하나도 그 축음기가 엄청난 음악 시장을 만들 것이라고는 예감 하지 못했습니다. 즉, 어떤 의식을 강요하기 위해 에디슨이 그의 축음기에 무엇을 암호화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서예를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서양의 펜은 같은 글쓰기의 도구 이지만 그에게 다른 의식을 요구 하고 있습니다. 만일 강요라고 한다고 해도 펜이 어떤 한 사람의 발명가의 발명품이 아니기에 특정 의식을 강요하기위해 만들어진 그것은 없습니다. 만일 강요 되었다면 그건 서예인의 불쾌한 경험 즉, 신체적 제한(펜잡는 법) 등등 이지 그 펜과의 조우로 강요되는 의식이란 단지 이 당혹함을 묻어두고 이놈의 뾰족함의 상처내기를 계속 사용해볼까 0 과 아닐까 1입니다. 아무튼 날은 흐르고 어느날 밤, 오늘 같이 눈 오는 밤, 그 서예인은 눈처럼 쏟아지는 영감에 잠에서 벌떡 일어나 먹을 갈, 종이를 넓게 펼칠, 그럴 정신이 없는 혼미 함에 불가피하게 펜을 붙들고 “아이돈 케어!! 어.. %@# lurker ㄱㄴㄷ 철수 영희 히히 ~~ 山” 라고 쓰며, 놀라움에 떨며, 담배 한대를 물며 글쓰기의 엄청난 경험을 몸으로 합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가 경험한 타자기의 의식입니다. 위의 AAA와 DDD의 고민 처럼 사진가의 고민은 서예가의 고민과 참으로 비슷 합니다. AAA의 두려움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퀄리티 차이 이전에, 서예가의 고민 처럼, 자기가 버려야 할 제의 같은 몸짓들에 대한 것 입니다. 셔터를 누르는 감촉과 파인더를 들이다 보며 꾸겨지는 이마와 소라 같은 필름을 바디에 끼우는 손 맛과 성화를 든 것 같은 노출계와 멋진 로고가 새겨진 사진의 가방을 든 어깨의 쾌락을 그리고 암실에서의 등등을 AAA는 디지털 카메라 앞에서 고스란히 버려야 합니다. 이 당혹함이 AAA의 가장 큰 고민이라 루커는 생각 합니다. 반대로 DDD에게는 이 멋진 몸성이 그들이 알지 못하는 콤플렉스 이기도 하지요. 뭐 수동과 자동기어 쓰는 사람들의 갭도 연료 전략 이유의 뒷면에는 이런 몸성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왜 몸과 신체가 gender가 현대 담론에서 끝없이 얘기 되어지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현대인들의 의식들입니다. 니체도 타자기의 발명이 펜(권위)에서 문화적으로 소외된 >여성<들의 글쓰기가 탄생하리라는 추호도 생각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즉, 가볍고 작아지고 다양한 디자인으로 출현하는 디지털 사진기의 출현으로 또 한번의 여성 사진 작가들의 탄생이 예감 되는 것은 무리가 아닐 거라 생각 합니다. 디지털 사진기의 출현의 고민은 뒤샹의 변기가 미술계에 던진 고민과 다르다 이 말입니다. 막말로 하자면 디카로 학을 찍자니 뭔가 뽀다구가 필이 안 나오는 것 같은 몸성/제의/권위/특수성의 상실입니다. 그럼 이 서예가들의 또는 AAA의 몸짓들이 제거 되어 져 야할 동작 들일까요? 또한 DDD에겐 그럼 그들 만의 제의적인 몸짓은 없을까요? 그런 몸짓들이 사진 작업에 많은 미학적 호르몬을 생산하는 요가 일까요? 이런 작가를 포함한 담론이 두 사이의 간극을 좁히는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오웰이 “기계를 사용하는 자는 그 기계처럼 일한다”는 문구가 떠올릅니다. 어쨌든 아날로그건 디지탈이건 오웰의 구속으로 부턴 벗어 날 수 없습니다.
psyvenus (2005-02-19 23:53:25)  
Kronos Quartet이 소개하는 모턴 펠트먼의 79분은 정적이라기 보다는 연주의 쉼,긴장,팽창,극도,과잉으로서의 여백들로부터 다시 연주를 '하게되는' 반복으로서의 제시된 어떠한 -비현재성의-차별적인 투사로 전혀 색다른 시공간의 감각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음악의 정복화한 공간을 소음이 아닌 곳으로부터 변별적으로 확보해온 곳 위에 피우는 이 전통적-음의 영토성 해체를 통한 주제들로서 -음이 발원하며 어떤 영토성으로 대체화하는 시간으로의 영토화라는 -이 진부한 '사고accident(死苦)'를 배반한 -결과로 드러내보이게 되는 것은 어떠한 시간적인 스캐닝을 통해 형성되는 전통회화적 -감상의 구조가 아니라 놀랍게도 몇 배나 더 거대하게 팽창했고 퇴염해버린 시간적 공간화 공간성화된 시간적 구조화(退染)에 대한 경험입니다. 허공은 잉여가 아니라 대면하게 되는 '음악'이며 음악이었던 것에 대함 으로서 곧 그것은 자신의 현시와 메타개념을 동시에 제시하는 현대음악의 한 사례로서 듣기(청각'기관')와 감상하기(어떤집중의제의)의 동작으로 국한되었던 기존 음악의'개념'적 공간을 확대할 것과 정적을 둘러싼 음의 생성 및 형식화가 강요하였던 엄숙한 '개념'적시간을 깨부술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백남준이 연주회장에서 피아노를 도끼로 내리찍을 때, 그것은 검은 관-즉 피아노안의 '오래된'시신을 부추겨 전통을 이어내려 온 어떤 왕들과 신화로 이뤄져온-무엇보다도 방법적인- 음악적 제의에 대해 지금의 '생생한''몸'을 통한 파괴의 동작이었었습니다. 여기서 소리를 내는 것은 전치(displacement)된 연장이며 통제된 힘과 감촉은 노동적인 힘의 강도와 파괴에 대한 방식으로 피아노를 파괴하고 있습니다.연장(노동자)이 소리(굴레를 떨치고 온 세상을 얻기위해-공산당 선언문)를 내는 것 .통제된 힘이 파괴와 전복에 대한 '변용'된 힘으로 연대하여 국가부르조아들의 기계중추를 타도하는 것-이는 바로 붉은 슬로건 아래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외쳤던 마르크스의 강렬한 선언이었습니다. 바로 그에게 많은 이데올로기적 투사를 해 왔던 Theo Angelopoulos가 Eternity and a Day에서 보여주는 평생의 시어와 영감을 그토록 찾아다니던 시인 알렉산더가 모든 것이(혁명이) '죽어버린' (좌절된)고향으로 돌아와 바로 그러한 절망적인 시어를 자신의 현 삶의 위기로 경험하는 되는 주인공을 통해 말하고 있는 것은 바로 영화(투쟁의 무기로서)가 인생(막시즘에서의 계급적인 억압)을 구원할 수 있다는 그의 막시스트로서의 영화인생을 반성하는 고백적 전향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그는 대체되어질 어떤 변증법적인 대안적 가치(진리로서의 시어, 폭로로서의 시어)도 정작 알렉산더라는 한 영구회귀자의 비극으로부터 구출해낼 수 없고 시어들은 오히려 절망적인 '그'의 상황을 암시적으로 비유함으로서 곧 그(제국주의적 기계화에 대한 투쟁에서 줄곧 배제되버린 '노동자'가 아닌 그 이전의 한 존재,또한 '사진'을 둘러싼 담론에서 줄곧 배제되버린, 디지털로 장치변환화되는 담론에서 다시 촛점을 맞추는 카메라의 문제에서도 다시 배제된 '한 사진가' 가 곧 영화(system)를 구원해내야 한다는 철학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영화는 애초에 시간적 선형성을 무시한 채 -인과적 환원체계를 닫힌형태로 고정시키지 않은 채-과거와 영화의 '지금'을 오가며 과거와 환상과 부재이며 상실적인 그의 현재'를 줄기차게 가로지르며 뒤섞어 이어붙이고 있는데 '시간성'에 대한 이러한 자유로운 연결접속의 형식으로서 창발하는 새로운 의미과 감각들을 위한 '공간' 이 아닌 공간은 바로 모턴 펠트먼의 음이지만 음이아닌 곳으로부터의 발하는-음 쉼이지만 더 이상 쉼이아닌 공백아닌 어떤 팽창된 여백과 더불어 사색적으로 생성하게 합니다(특히 그의 공동작업자로서의 역사와 고고학을 공부한 Eleni Karaindrou는 다시 앙겔로풀로스의 영화카메라의 쁠랑세캉스의 영화적 리듬을 통해 영화음악의 영감을 얻는다고 합니다.감독은 영화의 directer로서 음악을 종속적으로 배치하여 쓰고 있기보다는 영화의 '주변'이었던 음악을 바로 그러한 알렉산더의 과거와 영화적 '지금'을 강렬하게 접합시키는 유동의 주질료로 쓰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는 타르코프스키의 길고 엄격한 시선적 전통으로부터 경쾌하게 결별하고 있습니다-과거의 '고정된'앙겔로풀로스의 롱 테이크는 인위적인 여백을 의미했고 전쟁으로서의 영화에(Paul Virilio) 대한 그의 형식적 대안으로서의 -화면을 하나의 시공간과 시놉시스로 통합하지 않으려는 브레히트적 소격(verfremdung)의 실천이었습니다-이는 '현재의 실재적이고도 정치적인 풍경'을 의식적으로 주인공의 뒷 무대로 드러내보이는 예를 들어,불라가 강간다하는 도로와 동생 알렉산더가 헤메는 동상들과 군부의 거리(안개속의 풍경) 율리시스의 여정과(율리시스의 시선),상대적으로 감방과 취조실의 갑갑한 미장센을 통해'검열'을 적막하게 폭로하고 있는(1936년의 나날) 그의 독특한 영상어법과 더불어 기억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상호적으로 기능하게(영화제작현장은 모든 동작들과 위계,분할의 축약적 세계다.)된 시공간에 대한 개념과 모색들 (그러니까 위계와 분활아래 이 찢겨진 분리를 다시 접속연결하는 것.위계의재편성,자기낯설음 자기준거의형성)-은 밤새 쌓인 눈으로 흐리게 개인 오늘 psyvenus가 주시하는 영역으로서 이는 무엇보다도 그의 사상적인 전향과 관련한 어떤 볾과 관련되어 있다고 판단됩니다. 하지만 아울러 여기 적을 것은-이 영화를 통해 psyvenus가 직시하고 있는 것은 지나간 세대, 한 막시스트의 전향과 말년의 작가적 고백로서 '더 이상 혁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게 끝나버렸다는 것을 나는 여러분들에게 설명하고 있다'는 고백은 그들세계에 대한 인식-의 한계적 결말이었음을 변별적으로 확인하는 데 있습니다.-Canne에서의 그의 수상은 바로 그러한 68학생운동을 '주도'한 주류합리주의 유럽지성인들의 이상의 종말이 결국 어떠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의 죽음을 선표하며 그를 포맷화하려는가를 드러냅니다 그들의 박수는 그의 전향에 대한 '공감'의것이지 반성을 위한 내일의 -우리들의 것이 아닙니다 현 시점에서 그들의 '죽어버린'마르크스 해석과 다시 주목해야할만한 마르크스는 변별되어야 합니다 물론 마르크스는 현재의 장치-매체구동과 프로그램-메타프로그램적 위계속에서의 자동적인 증식성과 새로운 방식의 정보제국주의화와 전체주의-포맷,코드전환화를 더 이상 파악하지 못하며 간과하게 된다는 플루서의 지적을 환기하면서 말입니다 )

세계에 대한 암호화된 영상으로서 개념화하는 시각기계(vision machine)의 공리 -즉 그것은 세계에 대한 모사상이며 세계 그 자체의 부호이다-그것은 세계에 대한 개념을 바꿀 것을 기대하고 있다.에서 축음기와 음악산업을 예로 들어 에디슨의 발명과 과연 그가 무엇을 암호화했는가?에 대한 lurker님의 회의적인 질문을 다시 고민하게 됩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의 돌멩이가 인간의 노동과 집적된, 조절된 힘의 집중과 배분아래 도구로 기능화하게 되었을 때, 도구는 이미 자연에 있었지만 인간의 용도로 그 사용법을 달리하게 된 가장 오래된 사례중의 하나라고 봅니다 상형문자의 발명자가-과거에 실제적 권위를 가진 예를 들어 성경-텍스트의 숭배 -지금에 있어 과학적 텍스트숭배-징후로 나타나는 텍스트 숭배의 역사를 예측할리 없었을 것이며 카메라의 발명자가 현재 우주공간에서 군사적 상업적 미학적 용도등으로 활동하고 -유도 미사일 폭격이 장착한 카메라-등의 현실적으로 기능하는 발전을 예측할리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어떤 도구와 기구 매체의 발명은 그것을 발명해 낸 한 개인의 '부여하고자 했던'혹은 '용도의 허용가능성과 전망'과는 달리 실제적으로 그 한 개인의 지식형성과 개발이 전제로 한 정치적 문화적 역사적 과학적 기반 위에 그의 발명이 위치하고 있는 것이며 다시 이는 정치적 산업적 문화적등의 논리로 용도변경된 채 '관리하에'재투사된다는 점을 강조하게되는 바입니다. 아인슈타인의 핵무기개발은 대표적인 사례로 비록 그가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나치가 핵무기를 사용할만한 것이 우려됨'이란 과학자로서의 윤리에 기초한 신념적 제안을 했음에도 정작 핵폭탄과 플루토늄은 미국에 의해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투하된 것이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봅니다.독일인이었던 그의 여자는 소련 KGB의 요원이었으며 그의 연구소가 뉴멕시코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볼 때 전에 lurker님이 지적하신 맹목에 대한 문제제기의 필요성 가장 무서운 건 잊기-이방인이라는 조건아래- 등은 오늘날에도 매우 필요한 문제제기라 여겨집니다.의식의 요구-는 바로 이 구도아래 인문학이 숙고해야 할 -그 '발명'을 부리고 있고 그 '발명'의 용도를 계획하고 실행할 산업과 국가에 대해 맡게 된사명이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거울의 개발자가 또한 카메라의 발명을 상상할 수는 없었을 것이며 그 개발자가 현재, 거울의 대용이 된 폰캠의 LCD모니터라는 '거울을 보는 자'의 극단적인 '자리'전환을 상상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전송을 전제로 폰 캠은 실제로 우리에 대한 모습을 그렇게 찍히라고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울앞에서의 원시적 지시체계와는 다른 화장과 요구를 지시하고 있습니다. 위에서 제시한 전투로봇 -적을 식별하는 개념 및 지식은 바로 그러한 카메라의 내 눈앞의 직접적인 되돌아옴의 상징적인 사례로 이는 탈산업적 전체주의 맥락안에서 '정보제국'에 소외된 즉 광학적 눈에 적응하지 못한 채 소외된 주변자(그 인풋과정에서 참작된 아군의 정보로부터-여기서 아군이란 살인기계로서의 군인들이 아니라 장치를 소지한 서구-백인-남성을 필두로 한 코드전환에 참여할 수 있는 주변국들의 '사용자'그룹들-이제는 국민도 민중도 아닌 새로운 개념이 요구됩니다. 우리들의 분석틀과 단어개념의 진화를! )들에게 가해질 새로운 종류의 살상의 기준이 될 것입니다. 인류학은 여지껏 그렇게 찍혀진 자들 또 사진을 해석하는 틀에 집중했으므로(즉 블랙박스의 인풋과 아웃폿의)그러한 '사진찍기동작'의 기만적이고 공격적인 성격을 묵과한 채- 인류를 해석해 온 -여기서 충분히 제기되오지 못한 비판들은 -또 이의 거대한 기만에 침묵해 온 사진가들은 그런 의미에서 국가산업을 기반으로 탈산업국가화한 탈산업적 사회의 '지식'과 지식인의 상징적인 모습입니다. 현재 폴 비릴리오가 말하는 인류는 현재 제 4차세계내전중이라는 지적은 바로 국가와 산업의 이미 태생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결합이 국가를 잠식한 탈산업화한 모습으로 가속화한 속도를 띄게 되었을 때의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구상에서 가장 무서운 말과 가치로 전락한 '평화''자유'의 전파를 말하는 부시의 -광학,카메라의 작동과 조작,대상의 조작성(폭격),제어할수있는변형성(권력)해석학이 기반한 문화인류학적 지반을 독점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미국의 -취임연설은 새로운 전쟁의 모습을 이미 인지하고 있는 진보한 조작자의 한 사례입니다. 즉 부시는 우리들에게 자유,평화의 미국적 개념을 전 세계가 공유하도록(편성하도록) 지시하고(선전포고) 있는 것입니다.


오웰의 “기계를 사용하는 자는 그 기계처럼 일한다”는 문구, 어쨌든 아날로그건 디지탈이건 오웰의 구속으로 부턴 벗어 날 수 없다.는 lurker님의 말씀은 오늘, 의미심장한 화두로 제가 뎐져집니다. 그렇다면 저는1946년 오웰이 쓴 '자유와 행복'이라는 글에서 주목하고 있는 자미아친의 화자D-503과 I-330의 대화가 떠오르는 군요










'당신이 지금 말하고 있는 게 혁명이라는 걸 아세요?'
'물론 혁명이죠.그래서 안 될 이유가 있나요?'
'혁명이 <있을 수>없기 때문이오. <우리의> 혁명은 마지막 혁명이었소.그러니까 또 혁명이 있을 순 없어요. 이건 누구나 다 아는 일이오'
'세상에, 당신은 수학자 아니던가요? 마지막 숫자가 뭐죠? 말해 보세요'
'마지막 숫자라니, 무슨 소리요?'
'그럼 제일 큰 숫자라고 해요. 제일 큰 숫자는 뭐예요?'
'말도 안 돼. 숫자는 무한이오. 마지막 숫자란 건 있을 수 없소'
'그럼 마지막 혁명이란 말은 왜 하세요?'
lurker (2005-02-20 05:00:34)  
위의 오웰의 >우리의< 마지막 혁명이라는 말과 그것을 부정하며 지친 자의 어깨를 떠미는 친구의 그것이 바로 모더니스트의 강령입니다. >진보의 믿음< 이 믿음으로 구원의 신앙으로 흘린 피들을 그들은 찬양합니다. 루커는 모더니스트들의 경직과 집요한 부흥회의 오르간 소리의 “울어주세요”는 싫습니다. 도끼로 피아노를 부시고 족보를 불태운들 그들이 찬양하는 건 결국 엄마의 피아노고 아빠의 족보입니다. 그들은 이미 죽은/죽을 피아노와 족보를 황급히 확인 사살하는 시늉(시물라시옹)으로 엄마/아빠를 부활시킨후 사살의 성공(디시물라시옹)으로 장례식을 치릅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은 더욱 매체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더 효과적인 피/소음을 구호를 배포합니다. 즉, 에디슨의 악몽은 그들이 만드는 소프트웨어이지 하드웨어가 아닙니다. 모더니스틀은 사상 교육을 위한 온갖 프로그램을 적과 같은 방법으로 초코드(overcode)화 했습니다. 그들의 혁명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그 혁명이 그들에 의해 반복된다면 그들을 먼저 무덤에서 다시 살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는 적이 누구냐고 알려달라고 보챌 겁니다. 현재의 적을 식별하는 로보트는 그러한 인간의 맹목의 유전이지 미국인의 발명품이 아닙니다. 그런 지친 그 들에게 또 한번의 혁명을 주문하는 오웰의 친구는 그들의 살을 피를 빨고 그들의 무덤을 파헤칩니다. 파스빈더의 “제 삼 세대” 영화속의 무력한 혁명가들의 작태는 참으로 소름 끼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건 때려 눕힐 적이지 이상의 실현이 아닙니다. 그들은 사살 로브트가 적을 구별하는 소프트웨어를 통해 적을 구별하는 것보다 더한 즉, 적을 생산 하는 자입니다. 총살로보트는 그것의 작동 소프트웨어의 프로그래머(관리자)에 의하여 적의 유형은 언제나 업데이트 될것입니다. 그 프로그래머가 바로 우리 라는 겁니다. 머지 안아 기술의 진보로 그 총살로보트는 스스로 적을 파악하겠지요. 나치가 제일 먼저 택한 그들의 효과 전략 또한 적의 생산/발명/발견 이었습니다. 이 유형과 분류가 나를 포획하고 재프로그램화 하는 초코드(overcode) 입니다.

어느날 온 가족이 교회를 갔지요. 안티-교회인 아버지를 끌고 감에 성공한 어머니는 너무 흡족함에 예수님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었어요. 아버진 너무 불편해 했어요. 그건 예수이전에 그들의 프로그램을 몸으로 거부하고 계셨지요. 기도시간 내내 눈을 뜨고 현금 가방을 그냥 옆으로 넘기고 모두 일어나 찬송 하는 시간 내내 앉아 계셨어요. 마지막 주기도문을 외우고 목사님이 축도를 올리려 두손을 번쩍들자. 옆의 티비 화면으로 목사님의 얼굴이 클로즈-업 되고 전자 오르간이 스피커를 통해 흐르자.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어요. “세상.. 조쿠나” 헉,, 그후 우린 모두 점심을 먹으로 손 칼국수 집으로 갔어요. 어머닌 내내 불쾌함으로 아버님을 타박 하고 아버님은 예수가 불쌍하다 시종 일관 하셨어요. 뭐가 불쌍 하냐고 제가묻자? “죄인들만 그를 찾으니까.. 아까 목사가 시종일관 우리 불쌍한 죄인들 우리들 어쩌구.. 하더라.” 그리곤 “루커야 너 죄 그리 많이 졌냐?” “난 평생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 했다”하시자 썰렁함에 우린 다시 아무 말없이 국수를 먹자 한참 후 아버지가 “야.. 예수님 좋다” 하시며 교회 핑계로 우리가족 모두가 이렇게 다같이 국수도 먹어보는 구나 하시며 다음주에도 오신다고 하셨다. 그러자 어머니가 “그럼 눈감는 시늉이라해요.. 이거 챙피해서 원.. 명색이 권사인데.” 하시자 아버지가 원숭이 흉내를 내셨다.. 모두를 유쾌하게 웃었다. 이놈의 흉내내기는 언제나 울타리 안에서 통용된다. 그건 유형학의 초코드고 목사님의 신도 관리데이타 베이스이다. 그 경직된 데이터 몸체에서 아버진 소음(미분류 항목)으로 존재한다.

자벨님이 말씀 하신 퍼지(fuzzy)가 바로 유형학의 안티-테제에서 출발한 서양의 대안-분류입니다. 푸코가 말한 중국의 생물 분류와 서양의 다름은 아주 중요한 발언 입니다. 분류는 곧 소외와 제거의 행함입니다. 그곳엔 시늉하는 놈도 있고 아파하는 놈도 있습니다. 서양의 오케스트라의 목관과 금관악기의 배치는 그야말로 좋은 예입니다. 나무로 만든 악기는 무조건 목관입니다. 그리고 한번 분류된 분류는 혁명이전 까지는 그렇게 의심 없이 통용 됩니다. 동양은 과연 그럴까요? 우리에겐 나무도 수만 가지의 성질로 파악되며 물도 자정의 물과 겨울 샘물과 지리산의 물과 태백산의 등등 동의 보감을 읽으면 기가 찰 정도로 정교하며 그곳엔 흉내내기를 철저히 감시합니다. 즉, 생물 진화에서의 흉내내기의 전략 또한 통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어떠한 고정된 틀을 만들어 놓지 않은 것이 바로 동양의 분류 방법입니다. 그러기에 흥나면 편성의 고민 없이 북치고 장고치고 나팔 불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열린 유영학적 사고에서 아님, 유형학이라는 말조차 필요하지 않은, 그런 우리의 세계관에서 가능 했던 것입니다. 서양의 음악에서 타악기가 피아노와 바이올린이 동등하게 앙상블로 한 곡을 연주 되게 된 것이 벨라 바르톡이라는 헝가리의 현대 작곡가에게서 의해서 라는 사실을 그것도 그들의 민속음악을 평생의 과업으로 삼았던 작곡가에 의해서 라는 것을 안다면 서양 고전 음악의 특히 오케스트라 속의 엄청난 경직과 규율을 그들이 말하는 질서속의 폭력을 곧장 터득 하실 겁니다. 루커는 한국사진에서 유행처럼 번지는 유형학에 대해서 극히 심기가 불편합니다. 그런 면에서 니키 리는 그녀의 속일 수 없는 키치히함을 통해, 아마 어설픈 유형학을 가지고 유형학으로의 역 화살을 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말하자면 식욕을 떨어뜨려 굶게 되는 다이어트 전략? 그녀는 메타-흉내쟁이 입니다.

인공지능의 베이스가 되는 신경회로망을 보면 bias라고 해서 편견이라는 변수를 프로그램속에 삽입 합니다. 즉 외부 자극으로부터 강렬히 불타는 활성화 되는 프로그램의 각인을 조절하기 위해서 입니다. 인간의 윤리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그런 변수 입니다. 싸이비너스가 말하는 총살로보트 의 0 1의 구분은 이미 자동 카메라의 노출계에서 자동 포커스에서 충분히 다져진 이내들의 기술의 내공으로 가능해진 기계의 진화 입니다. 그 안에는 위의 편견이라는 강렬한 기계식 각인을 회피 하기 위한 은유와 같은 변수가 큰 작용을 합니다. 그것이 이 기계를 항상성(homeostatic)으로 조절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진 기계의 탄생이지요. 즉, 자동차와 카메라의 자동 포커스는 다르지요. 즉 자동 포커스는 자동차와 다르게 어떠한 목적을 스스로 수행하기 때문이지요. 그 뒤엔 기계의 목적을 유희하는 믿는 인간이 있습니다. 목적을 갖은 기계는 더 이상 기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총+자동화의 총살로버트는 그리 놀래 소란스러워 할 일이 아니지요. 그건 있는 체하기의 정치 놀이 색이 워낙 짙기 때문이고 그 호들갑을 공포를 목적으로 한 뉴스이고 광고입니다. 루커에겐 오히려 안마하다가 안마기로 부인을 살해한 살인 사건이 훨씬 섬뜻합니다. 인간에겐 적이라 하면 부인이고 안마기고 모두 살인의 연극 안으로 포획 되니까요(즉, 신경회로망에선 편견의 작용, 부인의 각인을 흐리게 하는 회로망의 변수 작용). 신경 회로망의 출현으로 우리가 놀라와야 할 것은 정작 총살로보트의 상징이 아니라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의 탄생입니다. 즉 우리는 또 한번 기계로부터 소외 당하기 때문입니다. 첫번째가 산업 혁명후의 일자리의 상실 이었고 두 번째가 관리자의 역할마저의 상실 예감 입니다. 그것이 닐 포스트만이 죽는 몇 일전까지 (그의 임종날 아놀드라는 허우대 좋은 헐리우드 영화배우가 주지사가 되는 비극이…)경고 했던 뷰로그라티(관료주의)의 강화 입니다. 병원을 가셔본 분은 더 잘 아시리라 생각 됩니다. 우리의 수술 여부를 퇴원여부를 판단 하는 것은 프로그램된 기계의 결단입니다. “플래쉬 터져 말아..포커스 땡겨 말아.” 그러다 보니 가장 덕을 보는 것과 피를 보는 것도 솔직히 의사입니다. (환자야 어련하구요)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린 한없이 기계에 핑계 된다 이겁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얘기 입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는 거와 문을 닫고 말 없이 들어 가는 것은 아주 다릅니다. 구청에 같더니 컴퓨터가 다운이라며 커피를 마시며 직원이 놀고 있고, 우리 기록에 당신이 이렇게 나왔으니 추방이오 난 어쩔 수 가 없오. 당신 153km/h 로 달리고 있었어오..미안하오 유감이지만 차에서 내리시오. 이 모든 것들이 기계 관리자들이 실제는 관리가 아닌 기계의 아웃풋된 명령을 전달하는 메신저 역할을 자처 하기 때문이지요.
lurker (2005-02-20 06:08:35)  
이거 타래가 포도알이 아니라 빨래방의 빨래들 같이 널려 있군요. 형상이 그리 보기 좋지 않군요. 좀 더 생산적인 쌓임이 있었으면 하는 군요. 반성합니다. 아키브할 수 없는 선형적인 블록이 참 아쉽군요.

싸이비너스님… 마지막 타래에서.. 크로노스 쿼텟, 펠트만으로 부터 백 남준,마르크스, 앙겔포루스, Eleni Karaindrou, 쁠랑세캉스, 알렉산더, 타라코프스키, 플루서, 아인슈타인, 폴 비릴리오, 브레히트, (불라와 알렉산더), 에디슨, 루즈벨크, 루즈벨트 부인, 부시, 조지 오웰 ..

뭡니까이게? 이건 완전히 인명사전이자 엄청난 용어들의 남발로 님의 글뒤에 숨겨있는 좋은 내용을 도저히 진정코 가독이 불가능 합니다. 이것이 말로만 듯 던 그 무서운 자폭입니다. 하하. 폭탄을 너무 많이 지고 가다가 어느 길목에서.. 씨발하며 확 부시 한테 모든 핑계를 넘기며 놔버리는 느낌…그리고 오웰의 대화로 연막을 치는.. 화내지 말고 차분히 쌓아 봅시다. 정말 쌓을 수 있다면 그런 거라면 자벨님의 역할이야 말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워낙 조용한 곳이라.. 아무튼 싸이비너스는 재미있어요..
zabel (2005-02-20 16:11:58)  
조지 오웰의 픽션은 이미 현현되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프로그램에 의해 스터디를 거듭하면서 스스로 그림을 그리는 로봇을 티비에서 본 적이 있는데, 당시 생각했던 예감을 그대로 루커님께서 적어주신 것같아 매우 놀라고 있는 중입니다. 0_0 정말 이런 글들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봐요. 작업을 잘/열심히 해나가는 것이, 현실 세계를 궁극의 나아짐으로 변화시킬 수 있잖을까란 생각을 요즘 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상식적인 인간의 이해력을 넘어서 있습니다. 사건들간의 연관성을 밝혀주고, 그것을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줄 사람들은 작가, 시인, 예술가, 영화제작자들입니다.”
인도작가 아룬다티 로이의 말인데 근간에 드문 맞는 말같다눙. 그가 한 연설문이 있는 포스트입니다. http://blog.empas.com/sia0122/6339452 모텔에 가끔 들르는 시아님 블로그인데, 원 게시물은 딴 내용이고요 리플에 연설이 있음돠. 참고하시길.

참 그리고... 이런 식의 이야기를 어케 해얄지 생각하고 있는데요. 모텔의 게시판같은 형식은 당연 안될 것같고, 위키위키같은 모든이들이 수정가능한 형식도 괜찮을 것같긴 합니다만, 암래도..제 능력이..(__) 그리고 사실, 갠적으론 지금의 이야기들이 모두 그대로 다른이들에게 읽혀졌음 하는데요. 그런 면에서 위키가 약간은 그렇습니다.

재원군과 루커님 그리고 제가, 텍스트들의 링크가 자유로운 블로그를 서로 경영하면 어떨까 합니다만. 지금보다 서로가 정리도 되고, 트랙백같은 기능을 활용하면 -위키만큼의 호환성은 없겠습니다만- 좀더 밀착적인 소통이 가능할 것같은데요. 두분의 생각은 어떠신지, 아님 다른 방안이 있으심 말씀해주시고요. 블로그 경우는 모텔 ftp 아래에 독립블로그를 당장 만들 수 도 있습니다만, 일단...용량 문제가...(__) 가능하면 포털의 블로그를....^^; 제가 쓰는 엠블이 기능은 젤 낫더라는.
zabel (2005-02-20 16:26:25)  
자벨 역활, 함께해요~ ^0^
참... 써주신 조지오웰의 경구는 모텔대문으로 들어갑니다. 다시 감사.
psyvenus (2005-02-24 05:39:31)  
2005-02-19 23:53:25 이후에 급하게 기차를 타고 떠나 - 그리고 다시 현재시간,돌아왔습니다. 떠나기전의 마음이- 용어를 남발했고 또 그 마음에서 폭탄이 내 자리를 그슬려 버렸군요 저는 기차를 타고 떠났고 폭탄은 터져버렸고 인터넷과 컴퓨터 모두가 없는 그 며칠간의 곳에서 lurker님의 지적이 있었고 내 글 타래는 여전히 연기를 내며 타고 있었고 또 그 연기를 보며 119에 신고한 주민들의 고달픈 사연이 -잠 못 이루던 그리고 누군가의 분신이 -있었고 저는 두시간반여를 눈쌓인 기차밖 풍경을 보며 모두 변심하고 변절해버린 마음으로 고독한 선배들의 싯구와 모짜르트의 레퀴엠을 들으며 다시 돌아오고 있었고 지금,여기 부끄러운 마음으로 그 때 그 마음이 파놓은 물줄기가 논이 아닌 도로로 흘러버린채 교통이 정체되버린 형상을 보고 있습니다. 자폭.아마 이 자리에서 그런 발언들이 반성이,이해가 됩니다 '야 너 죽으라고 진짜 죽어버리면 어떻하냐 나는 그냥 웃자고 한 말이었는데..."

난 요즘 내가 카메라 들고 찍어왔던 데가 적도 없고 음모도 없고 아무것도 없었던 세상이라는 사실을 믿기 어려워 엉거주춤한 두 발로 이리저리 무덤을 파헤쳐 죽은 선배들을 불러내거나 기억을 벗삼아 자주 술에 취하곤 해요 내-게로 밀려있던 서류들을 다 읽어보기가 귀찮아서 그냥 어떤 봉투에 넣어 되돌려 보내버렸던 적도 많았던 것 같습니다.


여행내내 멍했습니다. 신뢰의 상실이니 상실이니 하는 말들보다 습관이 더 큰 화두군요
폭탄을 어떻게든 던질려고만 했던 동작은 이십대의 대부분을 사진찍는동작으로 불사를 뻔했던 저의 가장 큰 맹점이기도 하군요 전혀다른곳으로의-지반을 잃어버린 느낌은-그래서 다시 중요하게 요청되는 어떤 동떨어져 세상을 보는 -경험의 중요한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물론 위기의 주체는 또 다시 성급하게 낡은자폭의 도식을 '자동적으로'그려대려 하겠지만 말이죠









Leizip에서 온 기타치는 한 동생을 거기서 오랫만에 다시 만났고 베트남 스타일로 저녁을 대접했는데 소화를 못하더군요 그 손으로 연주는 째즈를 한다지만 제게는 한없이 작기만한 그 동생손을 소화되라고 주물러주면서 저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타지에서 앓는 이 만성소화불량에 대한 치료법이 이게 아님을 곧 참지 못하고 엉엉 울어버리는 동생을 보면서 내 손이 그때는 그 동생 손보다 따뜻했던게 정말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혼자서 대면하기 벅찬 고독스런 그곳으로 다시 기차 태워보내면서 안아주는 데 나도 마음이 그렇더군요 그러면서 기차에 오르는 동생한테 문득 그런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너 예술가야 잊지마. 난 그리고 눈오는 giessen에서 오후내내 저녁내내 그 예술가라는 게 대체 무슨 말이었던가를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그 말은 아마도 내가 해줄 수 있는 가장 최상의 말일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말이었던가?









기차타고 돌아오면서 창 밖 내내 눈들이 내리고 있었는데 사무적인 목소리에 표를 내밀었고 그렇게, 난 아직 기차를 탈 수는 있었습니다. 체류불안과 추방 그리고 항의하려하는 내가 서게 될 앞 -어떤 기계, 난 은행 출금기 앞에서 '노후를 대비하셔야죠 이자왕창 드립니다'웃는 여자 앞에서 혼잣말로 '웃지 말고 나 지금 좀 살려줘라'중얼거립니다.-에서 내-서류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난 내가 다루려고 하는 그 세상에 대한 어떤 말들로부터 빠져나오고 싶다 -어떤 감당할 수 없는 산책들로부터- 난 그 길었던 장편극영화의 결말이 곧 감독의 자살임을 눈치채게 되었다 나를 전율케했던 최초의 홍등방-에서의 사진인화. 희석된 현상액에서 -내가 찍은?-사진의 암부디테일이 떠오르던 때로부터 지금까지 -그때 나는- 사진을 하면서부터 더 이상 사심이 없이 나는 어떤 것도 보고 있지 않다 -라고 쓰고 있다-몸 -제의적 동작-제의를 통해 세상은 마법적인 의미를 부여받는-사진은 저주이자 티켓이었다 나는 무대를 깨달아버린, 관객이라 자신을 믿어왔던 배우의 허탈한 자각이었고(나는 왜 전면밖에 없는 세계가 뒷 면이 있다고 믿었을까?) 그것은 일단 '몸'을 실으려 하면 출발지와 목적지를 명시해야 하는 인덱스화의식의 적극적인 출발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복잡다단한 카테고리체계를 생산하면서 또한 카테고리그자체이기도 한 사진의 우주로의 -편입이기도 했다.....




여행의 피로.그리고 '적을 생산하는 자들'이라는 억양에 대해 몹시 충격을 받은 내-나찌들의 격렬한 데모등으로 오늘은 자리를 파하겠습니다. 루커님은 대포를 멀리-공중으로보다는 직격으로 쏘시는 데 그 파괴력이 더한 것 같습니다.그래서 허깨비인 그들에게 역설적으로 화력이 뻗치지 않을까 우려되는군요 ^^고맙습니다 아직은 미안하군요
lurker (2005-02-24 09:06:18)  
한잔?


떠돌이라는 거 이 거 위험한 소비 아니 대답 없는 질문 아니 부자연스러운 경청 내 나이에 팔순 오그라짐으로 스물 통쾌한 배설과 분노로 열 잔인한 순진함으로 서른 살아남은 살려는 병으로 오늘 관속 누운 시늉으로 눈 오는 풍경을 사 랑 한 다 라고 하려는 몇 천만번의 반복으로 해진 지긋함이 탁해서 (아름다운 화자 아름다운 청자 아름다운 사용자 아름다운) 내가 세상에 아는 인연은 모두 그렇게 아름다운 자 들 우리는 모두 그 러 나 그러니 아프다.

술집 맥주 노동자 상인 주인 라디오의 뉴스 오락기계의 점멸 술 나르는 발걸음 창 밖의 밤 가끔 그곳에 그 중앙에 아니 모퉁이에 우리가 앉으면 술 한잔에 담배 한 가치에 어깨를 부딪힘에 이 지긋 지긋한 없는 일상이 일상이 되고 죽은 조국이 살아나고 죽은 랭보에 한잔 권하고 직업을 가진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존경하고 아름다운 한국의 여인들을 흠모하고 한번 안아보고 싶고 그러면 그들은 이미 저 먼 곳으로 떠났고 그렇게 또 한잔 집으로의 권유 전차를 오르고 우린 말을 잃고 작은 다락방에서의 라면 한 그릇 밤새 싸구려 와인에 마른 멸치에 아베마리아 아베마리아 아름다운 끝없음

그놈은 언제나 두 가지 화두를 나에게 쑤셔 눈다. “우리만 이런 거 아닐까?” “바보짓 하다 바보 된데” 웃음 나 “나 말이야 요즘 자다가도 벌ㄸㅓㄲ 일어난다” 그놈 “우리만 이런 거 아니야?” 말없음 그놈 말이 맞아 우리만 이런 거고 우린 바보짓 바보가 된 거고 아 정말로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1월 마드리드의 여지껏 보지 못했던 그 말할 수 없는 이름 없는 하늘 유배자처럼 작업을 싸 들고 가는 유배(목)길에 어느 오래된 정원에 앉아 너무나도 그리워 했던 우리들의 웃음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 난 혼자 있을 때 더 혼자 있고 싶다 왜냐하면 수 많은 내 속의 대화들을 도청하고 있거든 그러면 나 는 나를 준거 하지 못해 몸살이 나거든 그럼 누구냐고 묻거든 나에게 내가 나를 나 이냐고 나는

말할 수 없어 하며 난 소란 이다. 그럴 땐 빨강 노랑 파랑 도 미 솔
psyvenus (2005-02-25 10:12:27)  
자벨님, 카시미론을 당분간 AAA vs. DDD로 변장시키고 309호로만 계속 쏟아지고 있는 파편과 포탄을 좀 다른 객실에 자연스레 분산되어질수 있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이거 lurker,zabel,psyvenus가 뿜어대는 포탄들이 이미 AAA나 DDD로만 치닫는 '저놈을 죽이면 된다!라는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눈치챈 고로,크로노스 쿼텟, 펠트만으로 부터 백 남준,마르크스, 앙겔풀로스Eleni Karaindrou, 쁠랑세캉스, 알렉산더, 타라코프스키, 플루서, 아인슈타인, 폴 비릴리오, 브레히트, (불라와 알렉산더), 에디슨, 루즈벨크, 루즈벨트 부인, 부시, 조지 오웰 같은 영혼들까지 몰려와 메어터져버릴 것 같은 현 객실에 대한 해법이 시급해보이는 군요

다른 숏타임 투숙객들이 미친놈들인 줄 알겠어요..한 방에 남자들끼리..뭐 위키나 비싼 '물침대 방보다 그냥 객실문 열어놓고 시원하고 넓게 놔두자구요 근데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모텔인데 당골아저씨들만 오고 여자는 안 와요?

자벨님 모텔은 좀 더 퇴폐적으로 운영하셔도 좋은 듯 합니다. 평소 드리고 싶었던 의견입니다. 사진도 자지면 자지, 보지면 보지, 사까시면 사까시 뒷치기면 뒷치기 좀 미친 말같은 컨셉으로 말이죠 개인적으론 30대의 '불순한'모텔투숙객들이 중요시하는 '외곽의'위치보다는 '10'대 원조교제까지 넘나들 수 있는 시내중심가의 활동성을 더 선호하는데 여기선 워낙 손님들이 숏타임 성격이다 보니 좀 대담한 인테리어로 오픈될 필요가 있습니다. 308호 객실을 예로 들자면, 그 객실에 DDD로 무장된 새로운 '몸'의 10대가 아저씨따라 그 먼 외곽까지 차타고 헤메다가 '기계를 사용하는 자는 기계를 닮는다'라는 무서운 다중체의 간판구호를 보고 다시 '자진지 나문지 구분이 안 가는 사진을 지나 궁서체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들어온 모텔을 다시 제발로 찾아와 줄지, 그리고 '말 해 줄 지'의문입니다.아아아 더더더 논쟁에 연루된 우리는 실은 어쩌면 열렬히 ddd처녀총각의 작지만 유쾌한 코멘트를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몸으로 글쓰기. 저 역시도 글쓰기의 엄청난 몸성에 대해 감탄하고 있는 바입니다. 최소한 우리가, 엄숙한 헛소리의 경직성을 몸으로 밀어냈다면 이제는 여러가지 체위도 뒤틀어보고 싶군요, 우리가 뽀르노를 본다면 졸지말고 봐야 합니다. 우리가 섹스할 때의 예의가, '남자로서'삽입후에 다른 여자 생각하지 말기 이며 '여자로서'지금 이 묵직한 거그의 거라 생각하지 말기가-말하기 민망하지만 어떤 최소한의 '거있잖아'-듯이

예전에 제안드렸다 씹혔지만, 여인숙이 모텔보다 낫진 않나요? 정말...한국에서도 숏타임 말고는 모텔에 가본 적이 별로 없어서 만원짜리 여인숙 아줌마가 묻네 총각 여자필요해? 이불갖다주는 아줌마는 나를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네 그때 나는 전라도에서 마지막 비둘기호를 찍고 있었지 숨겨온 냄비에 물받아 너구리 라면 끓여먹고 다시마 삼키고 나면 쌓인 정액냄세이며 투숙객들의 긴 자취냄세들이 몰려와 암튼 나는 그렇게 자고나서 '비둘기 찍으러 갔다가'철길따라 바람만 맞고 왔다네 밤이면 여인숙 내일밤도 여인숙 만원에너구리라면에뽀르노
lurker (2005-02-25 10:44:25)  
당신 지금 너구리 라면 먹었지요? 그런거지요?
lurker (2005-02-25 11:43:49)
아.. 또 하나.. 여자가 안오는 이유는 님이 더 잘알듯? 맨날 썼다 하면 100줄에 한번은 자 지 보 지 거리니 내가 여자라도 또 오더라도 혹여 또 읽더라도 또 관음만 하겠소.

[맹눈이 연극]

여인 : "뭐 저런 놈탱들 보아하니 분명 백수이건만 뭐 기계가 어쩌구 아날로그가 어쩌구 당근 컴맹일꺼야.. 난 구청에 홈피 만들기 강좌 등록도 했는데.. 불쌍한 놈들...게다가 여긴 챗팅도 안되네 썅"

초딩 : "싸이~ 아저씨..새 됐어 가수 맞지요? 그리고 왜 이방엔 검은 벌레 들만 날라다니죠?"

데릭 케르코프 : "나 맥루한 제자 임다. 인터넷의 영혼이 블로그 맞지요? 알지요?"

칠린스키 : "나 한국의 싸이를 찾으로 여기까지 흘러 왔오.. 싸이? 제이? "

들뢰즈 : "앞으로 내이름 팔면 죽어"

딱귤이 :"여긴 너무 딱딱해.."

딱배 :"딱귤아 너 껍데기 같다 여기 안 까진다"

김 삿갓 : "난 안다 니들 마음"

정 도령 : "내글 퍼지 말아요. 불법 링크 입니다. 이건 경고!!"

김 앗싸 : "1등"

알아리오 : "너무 고민 마라.. 아저씬 너희들을 사랑한다"

페터 바이블 : "형님 왔다 고개 숙여라"

브레히트: "어흠"

진영지연: "내 이럴줄 알았어"
zabel (2005-02-25 14:28:58)  
루커님 정말 쵝오! ^0^ ㅋㅋㅋ

80년이후 태어나신 분들 경우, 여인숙 자체를 모르기도 하고 그곳의 개념/애환의 인식부터가 없으므로.. 그런 생경스런 단어자체가 열분들의 출입을 저어하잖을까 싶군요.
일전부터 모텔의 활동성에 대해 논의가 많이 있어왔지만, 이곳의 생김이...문제가 되어서 사람들이 들고 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싶습니다. 물론 구체적으로 비줠 변경에 대한 안이 있으면 저도 심히 바꾸고 싶구요 (갠적으로 지겹기도 해서리...-_-)

모텔에 대해 다른 분들께 여쭤보면 한70% 정도는 하는 말이 "심각"보다는 "어렵다"고... 하더라는. 문장/단어의 어려움보다 다루는 주제의 생경함도 한 몫하지 싶습니다만, 우리가 나누는 언어가 다른 이들의 관심과 거리가 있다는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 곳의 주제들에 관심이 많은 분들을 찾아내야는 것도 제 임무겠지만, 깜냥의 내공이 아직 부족한 고로...-_-a

뭏든, 가능한 억셉트 용이한 말들로 논의를 진행해나가며 이에 관심있는 분들을 찾아가면...쫌 더 활발한 게시물이 생성되겠죠... 생각해 봅니시다.
lurker (2005-02-25 15:54:40)
워낙 담론이란 것이 하나의 주제로 고정하다 보면 어려워지고 또 넓히 다 보면 방대해져 난삽해지고..

글이라는거 말이라는거 어차피 인간의 컴플랙스 아닙니까? 누군가가 말로 되어질 수 있는 것은 3개의 단어로 설명 가능하고 모르면 침묵하라고 했는데 그말을 하기 위해 그 또한 몇백페이지의 책을 썼고 도는 말로 되어질 수 없다고 시작하는 도가의 경전은 그 자체가 역설입니다. 자벨님의 말씀처럼 이런 글들이 어렵고 난해하고 졸렬하다 한들 그것이 뭐 문제 되겠습니까? 중요한건 격식없이 유희하는 광경이 있을때 그 글씨들이 그 검은 벌레들이 도깨비풀 의 꽃 처럼 이곳을 지나는 이들의 옷깃에 붙어 이리 저리로 퍼져 또 하나의 물음표로 느낌표로 심어 지겠지요.. 제가 위의 글을 시작한것도 만인의 연인이고자 하는 환상도 망령도 아니고 유아론에 빠져 나 밖에 모르는 동굴안 의심쟁이의 투덜도 아닙니다. 나의 작업 또한 정직 그러기를 꿈꾸고 [최소한의 사람들]이 솔직하고 투명하게 공유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계속 될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지 풀에 지쳐 검은 벌레들은 의미 없이 흩어 지겠지요.. 정말이지 하나의 단어가 글이 남을 향해야 하지만 그것이 이해의 목적 이전에 저절로 나오는 어떠한 신음일 수 도 눈물일 수 도 기쁨일 수 도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가 모텔이건 여인숙이건 뭐 그리 중요하지 않을 듯 싶군요. 아무튼 맘에 드는건 uebergang 즉, 여러 이유로 잠시 들리는 곳 그러기에 소중 하겠지요.

그리고 위의 테마에 관심이 있으신 분에겐 josef weizenbaum의 "컴퓨터의 권력과 이성의 기절" 이라는 책을 권해 드리고 싶습니다. 번역판이 나와 있는지는 모르겠는데요. 그 책의 따끔한 후리킥 땜에 미국에선 절판이 되었다는 후문을들었습니다. 더 자세한 정보를 원하시는 분은 말씀을 하시구요.

세글자로 그 책을 요약 하자면
"컴퓨터 맹신 금지요망"
psyvenus (2005-02-25 23:21:47)  
Balzac는 우리가 무에서부터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마다 물체로부터 유령의 껍질이 하나씩 벗겨져서 사진에 전이되는 것이며 그래서 사진을 거듭해서 찍을때마다 유령의 껍질들이 불가피하게 다 벗겨져서, 생명의 알갱이가 빠져나간다라며 사진찍힐 때마다 몹시 두려워했다고 합니다. 나다르는 그의 친구였던 발자크의 이러한 사진찍히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짗궃은 투로 자신의 전기에 기록하고 있는데 psyvenus는 사진사 초기에 촬영에 대한 발자크의 공포나 당시의 비평가들이 다게르형 현상작업을 검은 마술이라 불렀던 것이나 긴 노출시간 때문에 머리를 들이밀면 몇 초동안 그렇게 자세를 고정적으로 잡아주는 틀로 인해 '살아 있으'면서 먼저 죽은 것처럼 가만히 있어야 하는 찍혀지기 위한 동작들에서 무언가 사진은 죽음에 관한 의식과 관련한 행위로 여겨졌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나다르가 찍은 보들레르의 표정이나 발자크의 눈빛에서 그러한 일말의 '새로운 의식'앞에서의 불안을 보게 되는 것은 당시 초상사진가들이 '재미를 본'죽음의 유품(死者를 찍어주고 유족들은 이 시체의 영정을 보면서 '기억의 연장'때문에 위로를 받았다고 함)과 '유령을 성공적으로 찍을 수 있습니다'라고 광고한 뒤 떼돈을 번 '이중노출'(산사람들이 죽은 자들과 교류하는 모습의)을 이용한 사업등의 성행을 비교적으로 고려할 때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당시의 '표정'이었습니다.

lurker님이 2월19일에 지적하고 계신 어떤 제의적인 몸성의 전환에 대한 요청 -제의/권위/특수성의 상실에 대한 의견은 흥미롭고 숙고할만한 지적이셨습니다. 하지만 psyvenus는 플루서가 말하는 '현대인들은 유치함을 상실해버렸다'는 말이나 닐 포스트먼의 어린이들의 죽음 그리고 제의를 통해 세상은 마법화된다는 문구와 나로인한 사건들의 단상속에서 문득, 사라진 labor가 상징하는 욕망자체에 대한 새로운 자리전환-에의 강요와 대면케 됩니다. AAA의 몸성은 암흑속에서 무언가 무대뒷면에 이 장치의 조작자가 있을 거라 믿었던 근대적인 의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그들은 그 위대하고 불길한 신의 조작자의 흉내를 내며 '공포에 떨었던'발자크의 음화상을 '어둠의'라보어에서 바라보며 '빛'이 있으라 하며 빛이 있었다는 창세기에서의 영감대로 그에게 posi화상된 이름을, 성격을 가죽옷을 입히고 있는 것입니다.여기서 포커스는 발자크에게 보여졌을 그 사진자체-(그가 자신에 대한 '개념'을 수립하고 조종하게 될-이 부분에 대해 한국최초의 사진들이 로웰이나 미군 일본인들에게 찍혀지고 '엽서'처럼 유포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우리는 거기가만히 서있어.라는 지시대로 엉거주춤한 두려움 섞인 모습으로 '혼 뺏아간다'는 걱정으로 명백히 진기한 동양인들이라는 서양인의 시선으로 찍히고 바로 그러한 시선으로 되보여졌다-이는 로웰이 찍은 기이하고 엉거주춤한 고종의 모습과 당시 지운영이 찍은 '위엄스런'고종의 모습을 대조해 볼 때 확연하게 구별된다)가 아니라 그러한 제의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그러한 결과-를 위한 제의의 필연적 요구와 맞물려 '벌어진'그 제의 자체에 대한 욕망과 쾌락에 대한 문제입니다.





북한산 아래 산으로 사방이 둘러쌓인 한 절집에서 태어난 그가 잠실에 살던 케이와 사진을 처음 같이 찍으며 시내로 외출하는 일이 잦게 된 것은 '보아왔던'영상들의 주 출처가 바로 그곳이었으며 카메라를 든 자들을 매혹시키는 사건들이 '사진촬영될'형태로 제공되어지는 주무대 역시도 도심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하방에 살던 엘과 그 정릉집에서 쫓겨내어져 이주된 그가 철거민들의 도심투쟁과 그러한 이데올로기적 절차에 동화감을 쉽게 느꼈던 과정은 '예정된'것이었을 만큼 자연스러웠습니다.점차 도심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구호들의 시위에 촬영을 나가던 그들은 문득 서로 따로 떨어져 있는 '몸'의 분리가 잦아지면서 이게 어떤 이데올로기적 차이에서 연유한 것이 아니냐 서로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그는 더욱 용감한 포지션으로 돌과 화염병사이를 방독면없이 마스크 하나만을 두른 채 뛰어다녔고 프레스라 찍힌 흰철모에 방독면까지 착용한 저는 경찰쪽에 서자니 학생들이 나쁜 거 같고 학생쪽에 서자니 경찰들이 무서워 보이는 원시적인 고민속에서 이리저리 헤메다가 때로 학생들에게 얻어맞고(저새끼 쁘락치아냐하면 곧 수많은 발길질이 쏟아집니다)때론 백골단의 곤봉을 막아야 했습니다. 촬영을 끝내면 엘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자신의 과감성과 광각렌즈로 '유혈의 참상을'가까이 들여댔던 용기를 말하며 너 어딨었냐 보이지 않더라 놀리곤 했습니다.저는 그럴 때마다 형이었던 엘에게 일말의 부끄러움을 느꼈고 그에 대해 나의 용기없음에 대한 스스로의 자책속에서 점차 시위행태에 적응해갔고(돌과 화염병의 투척동선) 노련해져갔습니다(촬영을 위한 '몸'의 절약). 엘은 카파와 던컨 유진스미스류와 통신사 기자들의 강렬한 사진들을 좋아했습니다.그러다가 그는 주로 '다큐멘터리'사진들의 방향으로 자신의 노선을 정리했고 저는 점차 싫증과 회의를 느껴갔습니다. 5월18일이었던 1995년, 종로 5가에서 벌어졌던 시위에서 아들의 영정을 든 눈물흘리던 한 어머니 앞에 서른개가 넘는 광각렌즈와 스트로보가 터져될 때, 이 경쟁적인 촬영의 몸싸움에서 엘은 로이터 통신 기자와 몸싸움을 벌이고 말았고 현장에서 뺨을 얻어맞게 되는 데, 그 날 술을 마시며 그는 통신사 기자가 되어야 겠다고 말했고 그가 그렇게 촬영하던 때 -흠칫 물러나 이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며 카메라를 내리고 고개를 돌리던 제가 -이제는 그러한 시위에 나가지 말아야 겠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당시 시위판에서 만나게 된 사진기자들만큼이나 많이 알게 된 전대기련(전국대학생기자연맹) 소속 혹은 그 외의 자발적인 사진기자들이 실은 쁘락치일을 하며(대열의 관점에서)화염병을 들고 있는 모습은 15만원이고 투척하고 있는 모습은 25만원이고 라며 같이 하자라고 우리에게 제안하던 때, 선봉대가 조국을 떠올리고 반미독재타도를 외치며 백골단과 맞설때 뒤의 지도부가 경찰에게'오늘 몸치기 5분하다가 불꽃(화염병)나갈겁니다 200개 정도 될거구요 끝나면 자체해산할거예요' 사전협의하고 있다는 것을 마침내 알게 되던 때, 범민족 대회의 마지막 피날레로 장충단 사건이 있었고 이에 참석한 그와 나는 점차로 전경의 진압방식이 극한적인 완전포위형태로 좁혀오는 것을 보고 의견을 나누었다 '여기남자'마침내 집회가 끝나자 경찰은 진압을 시작했습니다. 엘과 나는 떨어졌고 백골단은 학생들을 모조리 연행하다 옆에 있던 중앙일보사진기자도 패버렸고 한겨레기자는 방독면을 벗고 싸웠고 저는 워낙에 법에 씨니컬하지만 오늘은 사진기자들도 일단 다 놔주지 않는 날임을 깨달았습니다'물론 기자들에 대한 폭행도 제 카메라에 촬영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완전히 포위되버린 망속에서 엘을 걱정했습니다.왜냐하면 '증으로 따지면 나는 고등학생이었고 그도 재수생인 고로 우리는 곧장 닭장차행이었거든요.중요한 건 필름이었습니다. 구속이야 늘상 각오했던 거지만 필름소유문제에 대한 관점은 엘과 내가 달랐습니다. 헤메다가 만난 엘에게 '한겨례기자가 같이 빠져나가재 연대로 이동할 것 같다고 그리로 가자'라고 했더니 '너 또 도망칠려그러냐 '우리 계속 촬영해야 되잖아''너나 가라 비겁한 새끼''여기 지금 다 잡히는 분위기란 말이야''내가 여기 도망갈려고 왔냐''대열이 파하면 나도 파한다''필름지켜야 되잖아'......그리고 나는 한겨례기자랑 차량을 타고 빠져나왔고 연대를 지나 한대앞에서의 마지막 가투를 촬영한 뒤 만신창이로 되돌아왔습니다. 그것이 엘과의 마지막 촬영이었습니다. 엘은 장충단에서 백골단에게 붙잡힌 채 차례대로 증을 검사받고 필름을 압수당한 채 신문사 기자들은 통과 학보사 기자들은 필름압수-과정에서 앞에 서 있던 서울대학보사 기자가 한 대 얻어맞고 필름을 뺏기고 나가는 걸 본 뒤 까짓거-하다가 그만 재수생이라 돌림빵으로 맞고 필름 다 뺏기는 수모를 겪고 내보내어졌습니다. 그 뒤 우리는 격렬한 싸움이 있었고 멱살을 잡았습니다. 저는 다시 비겁자였고 그는 전사였습니다. 그의 몸은 격렬하게 활보했고 또 격렬한 파열들을 사랑했습니다. 사진사들은 실은 진보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다. 사진사들은 어떤 개연적인 사건을 고대하고 있고 그러한 서건이 고대된 곳에 또한 사진사들의 운집이 발생합니다. 나는 그 후 철거민들이 다 떠나버린, 혼자 남은 아주머니가 법정에서 삼성이라는 거대한 피고를 상대로 싸우며 텅 빈 채 울부짖고 있던 미아리고개를 촬영했고 그는 상계동 철대위에서 아예 기거했다 -그는 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경찰들의 철거깡패들의 침탈을, 골리앗위에서 그는 담배를 피웠고 사건이 터지면 이번에는 필름을 화염병처럼 시뮬레이션 한 통에 담아 먼 가옥으로 던져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감방에서 나와서 다시 찾으면 될 거 아니겠냐고 왜? 죽을수도 있잖아 형 카메라는 어떻게 하고?철거깡패들이 다 때려부술 거아냐 아무도 안 찍잖아 누가 이 현장을 찍겠냐 저 철거민들은 어떻게하고?이 사람들 다 어디가냐고 근데 왜 형이야 우리 계속 같이 사진 해야지 오늘 자고가라....그냥 갈래? 무서운 가 보구나 낼 새벽엔 침탈 안 들어와 그러니까 걱정하지마....난 형이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래도 이건 아니야..가자....너나 혼자 가 비겁한 놈...


엘은 훈련소를 파하고 춘천에서 오는 배를 바라보며 하늘을 올려다봤고, 인제산악특수부대로 배치받았고 그의 '몸'은 군사적 지형도로서의 산에 길들여져 훈육되었고 제대한 뒤 스타크래프트에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더 이상 사진을 말하기가 줄어드는 대신 독일군 전차 프라모델 얘기와 스타크래프트의 낮과 밤을 모르는 전투 항공전투 시뮬레이션 된 게임등에 미쳐버렸는데 저는 그 때 멍하니 모니터속의 전투에 빠진 그를 보며 어쩌면 그가 기대했던 것은 진보가 아니라 사건이었으며 그가 즐겨했던 것은 -그가 즐겨쓰는 표현대로-어떤 진실에 대한 고뇌의 것이 아니라 바로 몸의 활약과 긴장 팽창에 대한 강렬한 유희가 아니었을까 -그가 말하던 대열은 '우리'로서 함께 결집해낸 한 깃발아래의 큰 군중의 몸체가 아니라(나치는 적을 생산생산조작사살시킨 '눈'과'입'을 가진 거대한 '몸'체였다-사진가들은 결코 대열이 될 수 없습니다.그가 대열에서 왔다고 해도 실은 그는 대열을 조종하고 있는 채널에 종사하고 있습니다.)그의 몸의 격렬한 활동에 단지 수사를 부여하는 가치들의 단순한 발화로서의 장은 아니었을까



AAA의 제의적 동작은 그 자체의 신체적 활동,유희를 통해 사진에 대한 어떤 제의적 의미를 고취시키게 되는 회로를 따라가게 됩니다. 현장을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이 실은 예술로서의 사진을 수행하는 사진사들보다 더 많은 말을 -여기 이 사진 속 세계에 대해-하고싶어하는 까닭은 신화적 의미를 산출하며 어떤 내재적 가치를 상승시키려는 의도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사진촬영에 전제된 도식에서 필연적으로 감당할 수 밖에 없었던 그의 '몸'이 -거기서 무엇을 -보았다 -에서 기인합니다.(그리고 몸이 유희했다) 즉 그들은 사진만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으로 몸의 경험을 동시에 제시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사진은 단순한 검열유통체계의 선별-을 통해 유포되지만 몸은 -텍스트화한 르뽀르타쥬의 형태로 묶여 보다 엄격한 관리하에 첨가되는 형태로 사진을 수식하게 됩니다..

정리하여, AAA의 제의적 동작,몸짓,제스처,몸으로써의볾,은 단지 '정보'로서의 사진생산에 국한될 종속적인 절차가 아니라 그 자체가 욕망과 유희의 장으로서 결과가 될수도 있다는 것

'몸'으로 가혹하게 집중되었던 -가시적으로-권력의 영광을 드러내는-형벌의 역사가 판옵티콘이라는 권력의 비가시성을통한 자체적인 몸의 규율적 내제화-로 전이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있는 푸코의 저작에서 보듯이 (모더니스트들의 혁명은 광장과 도로를 점거한 거대한 몸체들의 운집과 결집을 통해 '보이는'권력을 타도했다 -따라서 그들이 주류가 된 오늘날에 몸에 대한 욕망과 유희가 '거대해진 모니터와 작아지고 결합한 몸체'앞에서 통제받게 된 징후는 동작을 적게 시키고 봄에 치중하게 된 현재 권력의 억압방식과 관련되어 있다) 몸은 '가혹'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나 단지, '가혹한'보여짐 앞에서다.

개인적으로 암실과의 결별을 아쉽기도 하지만 홀가분한 기분도 드는군요 하지만 암실과의 결별이 '사진을 함'에 어떤 거대한 결단을 요구하고 있는 느낌이 드는것은 위에서 언급드린 대로 사진은, 사진을 만들어 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과정'의 제의들 자체가 주는 화두들과의 접촉이 컸기 때문입니다 암실보다 촬영에 더 비중을 둬왔던 저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더 DDD를 반가워할 수도 있는 제가 선뜻 시작하기 어려운 까닭은 그래도 현상탱크를 온도에 맞춰 교반하며 어두컴컴한 암실에서 내가 찍었던 것들과 내가 갔던 곳들을 상상하며 기대하고 또 발견했던 어떤'잠상'의 시간들이, 세상들이 제거되버렸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찍는 게 목적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들 자체가 던졌던 철학과 상상력과 또 다른 의미에서의 유치함들이 현대사회가 간과해버리려 하고 있는 -아웃포커싱된- 배경들이라는 것을 물론 인지하고 있습니다.어떤 의미에서 AAA에서 DDD로의 전환은 그리 큰 변화가 아닙니다. 전통적으로 사진가들은 그 '보여짐'에 치중했고 바로 그렇게 감탄해왔기 때문에.. 이런 시점에 DDD에 관심을 가진 채 아직 AAA의 경험과 프로세스를 가지고 있는 사진가들은 자신들이 종사해왔던 거대한 '보여지는기계'에서의 노고들과 철학들을 -또한 간과해 온 경험에 입각한-미학들을 진술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여러모로 절박하게 요구되는 새로운 기계들을 둘러싼 의식적 요청에 제공될 수 있는 중요한 지반으로 참고되어질 것입니다.
lurker (2005-02-26 16:11:56)  
얘기 되어야 될 하나는 바로 싸이비너스님의 >>강요<< 라는 어감입니다. 싸비님이 말하는 강요라는 것이 바로 시스템입니다. 전 그러나 그것을 (시스템=강요)라고 보는 것에는 언제나 조심스럽습니다. 강요라는 말은 문장 속에서 언제나 그 문장을 청자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라지는 labor와 그 자리전환에의 강요”를 말씀 하셨는데 그것이 누구의 강요이고 누가 labor를 사라 지게 하는 겁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매체와 도구의 담론에선 그 담론에 포함된 >우리들<이 (전 극단적으로 자신이라고 생각함) 결국은 책임자 입니다. 위에도 말했지만 바로 그러한 책임 회피가 바로 기계를 이용하는 관료주의자들의 전략입니다. “모든 크레타인섬의 사람들은 거짓말쟁이라고 하며 자신은 발뺌하는 크레타섬 노인의 역설입니다”
(여창가곡 우락에 나오는 도련님을 기다리는 여인의 맘을 이해 하신다면…)

컴퓨터의 보급이 얼마나 많은 타자기 회사를 도산하게 했을까요? 그럼 그 타자기 회사의 직원들은 아직도 타자기로 업무를 보고 있을 까요? 그러면서 타자기의 빈자리 위에 어떠한 강요를 받고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타자기 회사들이 전동타자기로 그리고 팩스기로 그리고 복사기로 수 없이 모습을 바꾸며 그들의 생존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물론 도태된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아마 그 빈자리를 강요로 얘기 할 수 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그들의 강요라는 단어를 이해 할 수 있습니다(마음으로). 그러나 여기의 우리의 대화는 결정 난 것들에 대한 부검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의 우리의 태도와 의식에 관한 반성이기에 강요보다는 요구라는 말이 참여와 실천을 꺼내는 더욱 적극적인 단어라 생각 됩니다. 무슨 말꼬리 잡기냐 할 수 있겠지만 이 매체 담론은 기계를 창조의 신으로 또는 마술의 도깨비로 또는 전쟁의 악마로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유치함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고모 집에 놀러 가면 그 순간 그 집의 시스템을 몸으로 건 언어로 건 흉내내며 익혀갑니다. 뭐 눈치라고도 할 수 있고 아무튼, 그리고 어느 순간 자연스레 익숙해 지고 그러면서 슬슬 장난치다 한번 또 된통 혼나고 그래서 다시 경직하고 반복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집처럼 자유스러워지죠.. 또 반대로 꽁하고 가만히 있으면 고모집이 저의 시스템(나의 환경)에 맞추려 먼저 변화를 시도 합니다 그럼 나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지 하며 슬슬 재롱을 이쁜짓을 떱니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간의 소통 또는 조율입니다. 거기엔 대화보단 동물적인 춤(para-language)들이 있지요. 바로 nonverbal의 역활입니다. 내가 이 글을 쓰며 미친 발광의 춤을 추고 있다면 님들은 믿겠습니까? 정말로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에는 나의 발광이 안타깝게도 들어 나지 않는군요 들어 난다 해도 지금의 나를 보시면 기절 하실 듯. 그러나 저에겐 이 발광이 없으면 지금 글이 써지질 않는군요. 바로 이것이 아마 싸비님이 말한 작품에 들어 나지 않는 몸성의 유희 이겠지요. 중요한건 그럼 몸성이 사진가들의 포즈 뿐만이 아닌 이런 게시판 글쓰기에도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상의 시를 패로디 하자면 타자 치는 손은 연필을 쥐고 있는 손보다 때로는 나비처럼 가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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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락

바람은 지동 치듯 불고 궂인 비는 붓드시 온다. 눈정에 거룬님을 오날 밤 서로 만나자 하고 판척 처서 맹서 받았더니 이 풍우에 제 어이오리. 진실로 오기 곧 오량이면 연분인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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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venus (2005-02-26 21:07:51)  
저는 앞으로 나-로부터 책임회피된 그- 분리된 시스템의 '강요'에 있어, 의식적으로 '요구'라는 '나'를 개입시키고 또한 내 자체이기도 한 책임감 있는 연습을 통해 비판적인 의식을 들어내어 볼 계획입니다. 루커님, 수줍은 억양과 몸짓으로 고백드리지만, 습관때문입니다. 봄은 오는데 나는 겨울자음 풍우모음만 쓰다 그만 하염없이 겨울오기만만 기다보고 있는 형국입니다.경쾌하게 뛰어놀다 유쾌하게 웃어대다 고개들면 해내리쬐고 있을 것을 풍우방황타 바람따라 되가버린 말입니다.

난 요즘 몸서리쳐지려해요 변덕이 나보고 이별하자고 하더군요 네 애인기계는 너무 구식에다 관절까지 넌 그마냥 굳어버려서 더 이상 솟구치는 근본적인 회의와 탄식들을 감당할 수가 없을 거라구요 카메라 붙잡고 곧장 추방된 그 내나라를 소중하게 복원하고 싶다고 그 나라의 다른 인덱스들을 껴안고 내팽개치고 싸우다보면 다른 재치에도 웃개 될 거라고 철새처럼 끝에 뉴욕으로 뻗어있던 기차노선을 너는 왜 회의해 본적이 없냐고 나는 기차에서 벌떡 일어나 먹던 계란과 소금을 집어던지고 어디강나오면 뛰어내릴까요 이 기차는 경유역도 없대네 습관. 네 년이 젤못된 기생년이구나 근육 네놈은 누굴위해 그리 굳었노

카메라는 언제나 저 기 를 문 제 적 이 다 라며 생긴모양처럼 자체규율적인 명령을 예기하고 입습니다. 또한 서구를 꿈꾸게 했고 조롱했고 우리를 공격했고 속여버린 '메타포(교통)'로서의 상징적인 장치의 기원이기도 했구요

가장 단단한 프레임으로 분노까지 첨가되어 프레임을 거의 난공불락의 요새로 착형시킨 '국가교육(군복무)'의 절정기시절 굳어진 프레임이 독일와서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하여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보았고 퍼프레이션을 보았고 마구찍어댔고 순진해졌고 유형학을 경멸했고 아, 그렇지만 왜 나는 종이위에서만 헤메었을까요 내 손과 눈과 머리로 꽉 붙잡고 있던 카메라가 이젠 붙어버려서 내 몸인줄 알고 그랬나봐요 난 그렇게 배치받고 저기탓만 하는 그리 부름받은 유령일수밖에 없었던걸 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lurker (2005-02-27 09:50:05)
그렇습니다, 메타포는 그리스의 지하철 이름입니다. 어디론가의 전송. 은유.....프랑스의 드 세토의 재미있는 얘기는 공간(space, raum)과 장소(place, ort)의 구분 이지요. 즉 기표와 기의의 공간으로 확장 시킨..
많은 매체 예술가와 공간 작업 하시는 분들의 지침이 자주 되곤 합니다. 자벨님이 하신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바로 공간과 장소의 담론이지 않은 가요..
zabel (2005-02-27 19:14:03)  
메타포는... 노출계 이름이 아니던...-_-;;;
공간과 장소의 담론으로 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사실 또다른 헤게모니의 장으로 보는 것이 더 맞잖겠냔 생각도 듭니다. 공간과 장소의 담론으로 확장이 일어나는 계기로 삼아야 오아시스의 의미가 살아나는 것일텐데 현실 투쟁의 한 목적으로만 논의되는 면이 없잖아서... 그런 면에선 정말 많이 안타깝습니다. 진정한 투쟁/혁명은 발전가능한 새로운 개념/담론을 반드시 장착해얀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모텔에서 논의되는 모든 작업에 대한 이야기들도 실제 작업과의 접접, 그리고 대안/발전이 겸비된 지속적인 담론이어야 할 것입니다. 만들었으면, 써먹을 수 있어야지요. ^^
lurker (2005-02-27 22:38:25)
바로 그 해게모니가 자리 잡는 곳이, 예, 바로 장소이지요. 즉 법이 집행되는 곳 패권이 장악 되는 곳이요. 안방과 방의 차이이고 집(장소)과 건물(공간)의 차이 블로그와 모텔의 차이 입니다. 대부분의 스쿼트가 장소보단 공간의 목마름으로 시작 되고 아마 그래서 오아시스 라는 매타포가 사용 되었겠지요. 그러나 오아시스 프로젝트는 저는 잘 모르지만 장소를 갈망 했던 것 같은 즉 급하게 스스로 이슈와 패권의 s.o.s를 알림을 통해 빈 공간을 빈 기표를 그 놀이 공간을 이슈의 장소로 기의화 시켜버려 애초부터 공간이 신기루로 사라져 버린. 대부분의 스쿼트가 경찰이 오기 전 까지 그들은 행복했다고 하는 친구들의 얘기는 아마 오아시스와는 다른 듯 합니다. 즉, 작업 공간 보다는 시위와 담론의 장소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드는 군요. 어쩌면 그것이 목적 이였을 수도 있겠지요.


제가 이곳에 온 것또한 공간의 갈망이지 장소(제도)의 목마름이 아니 듯이요. 이곳의 담론 또한, 님의 말씀처럼, 지속되어 져야 이 공간이 자연 스럽게 실천되어 지는 건강한 장소/공간으로 변모 하겠지요. 전 24시간 실천 하려 합니다. 써먹는 다는 것은 뭔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전 작업과 식사와 글과 산책과 성교와 기도를 분리 해본적이 없기에요. 나무는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게 자랍니다. 그럼 바람이 불어도 흔들리는 소리나는 것들이 있겠지요. 그것이 우리 할아버지들이 말씀하던 체와 용이겠지요. 즉 용하기전엔 체가 있어야지요..
zabel (2005-02-28 00:38:46)  
어떤 것이든지
지속을 가능케하는 것은 축척된 담론이 발화되는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좆이 건실해도 쓰지 않으면 불알이 썩듯이 지속스레 숨쉴 수 있는 가능한 도구가 그 쓰임/발화 란 것이죠. 물론
루커님 말씀대로 생활과 작업의 합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만, 제 말은 이런 모텔에서의 대화들이 곧바로 우리(혹은 다른 이들)의 작업/생활으로 전이될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말이 행동으로 옮겨지기까지의 프로세스를 어떻게 조직하겠냐는 것.
물을 사용하려면 담을 용기가 있어얀다는
psyvenus (2005-02-28 02:06:29)
좆을 쓰는 건 한 남자고,그가 좆을 유용하게 쓸 수 있기 위해선 조직화된 여성에 대한 경험과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손으로 정성스레 검토된 자위경험의 바탕을 기반으로 여성의 여러가지 제스처와 개별 상황적 징후에 대한 인지적 해석능력과 아울러 그러한 동물적인 춤(para-language)들에 대한 다양한 차원의 능동적인 적응력,대응력,유도력 들이 요구됩니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위에 다양한 여성과의 지속적인 접촉,소통,모색,시도,자기반성,자기준거,유희의 시도,정성스런 애무등은 필연적으로 요청되는 지반들이 되는 것입니다.자벨님이 리스펙트를 갖고 계신 E.J.Bellocq의 사진들은 그가 창녀들과 나눈 그러한 '대화'들이 어떻게 그들을 사회적인 장소의 지위로부터 이끌어내, 권력화된 카메라 앞의 장소를 파괴해버린 채 그의 공간안으로, 회복된 '여성'들로서,그들을 세워둔 채 사랑했는가를 보게 되는 좋은 작업의 한 사례입니다. 자벨님, 자벨님께서 그의 사진들을 '내 인생에서 최고의 사진가'라고 말씀하시는 까닭도 바로 그러한 저주같이 '예정되어진' 장소의 권력을 깨부순 공간으로 그 나-체들을 피워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요

이미 썩어 사라져버린 것은 오히려 우리들의 자기-입과 눈과 의식들이 아니던가요 섹스(사진)하는 것은 좆(카메라)이 아니라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노력을 기울인 또 한 사람들과의 만남 소통 대화, 우리를 섹스로 이끌어낸 그리고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무수한 교감들의-사고들과 사랑들의-연습 들이었습니다. 좆(카메라)은 필름없이 빈 셔터로 돌려될 때 그래서 빨리 고장나나 봅니다 기약도 기다림도 없이 추억을 쌓는 흉내를 내니까요

담을 용기가 있어얀다뇨 전 자벨님덕분에 루커님덕분에 그리고 말없이 지켜봐 주시는 많은 분들덕분에 눈이 가득쌓여 흘러 넘치는 용기를 가지고 있는 걸요 해가 나서 녹아도 또 거기 가득 넘쳐나는 물을 보게 되겠죠
lurker (2005-02-28 02:24:59)
님의 말씀대로 생활과 작업의 무분리라는 것이 바로 저에겐 이러한 글쓰기 자체가 작업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글들이 작업으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라 작업과 분리 될 수없는 또 하나의 작업 이란 겁니다. 즉 말도 행동이고 생각도 행동입니다.(피아제) 그것의 분리가 작가와 평론의 괘리된 위상을 만들고 삶과 철학을 소외 시키고 시와 정치와 생활을 경계 짓는것이라고 생각 합니다. 위의 paul celan 이라는 시인의 삶을 짧게 쓴 글중에 빈병에 편지를 넣어 은하수 넘어로 던지다고 했는데 바로 그런 소망이 저에게도 있습니다. 생각의 용기(그릇)가 바로 글입니다. 그 그릇에 물을 담는 자가 있고 마시는 자도 있고 다른 그릇으로 옮기는 자도 뒤집어 엎는 자도 있습니다. 님의 쓰임/발화 라는 것이 바로 화용인데 그건 지식입니다. 데이타가 정보로 그리고 지식으로 변화 하는 것이 어쩌면 님이 말씀 하신 프로세스 이겠구요. 글자 독점(alph-numeric monopol)의 세상이라지만, 그림도 온라인에선 글씨(binary), 자신의 얘기를 하는 글을 쓰는 자가 몇 있습니까? 그러기에 자신의 생각과 삶을 담은 글이 있는 이곳을 만드는 것이 아마도 첫번째 실천이라면 실천이겠지요. 그 다음은 오프입니다. 바로 모니터 를 바라보는 내 머리 뒤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 이러한 글들과 일상을 가끔은 대질하는 것입니다.

아마 이곳에 님과 나 그리고 싸이비너스님 셋만이 오가는 곳이 아니기에 어느 날 다른 이들과 이런 생각과 경험들을 공유하는 그런 날이 있을때 술 한잔으로 그리고 사진으로 음악으로 또는 다른 작품으로 웃음으로 이어지는 인연이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전 님의 질문엔 당황 스럽습니다. 지금 글타래 하나로... 약간은 조급 하시다는 느낌만이 솔직한 저의 심정 입니다.

저도 이곳에서 좋은 친구를 만나 그들의 넉두리도 들어 보고 싶군요. 이곳의 사람들이야 말로 진정 lurker 입니다. 슬금슬금 다니는 자.. 하하 솔직히 부럽 군요.. 통신을 한지 18년 그 18년을 루커로 슬금슬금 기기만 하다가 모텔에 떨어지게 된것이 참으로 기연입니다.
psyvenus (2005-03-10 20:53:48)  
3월인데도 날씨가 늦가을부터겨울처럼마냥흐리다 기차를 타고 먼데를 달려왔고 몇 개 노래를 들었고 뭔가를 썼고 왜 혼자되면나는 공포의기억에 포획당하고 인격을 버려둔 채 맹점을 자각하는 것이 얼마나 허망하고 나쁜 일인가를 깨닫다가 나는 진리보다 감히 대화를 사랑하며 나는 이상보다 감히 사회를 더 아끼고 싶노라고 생각했다.나는 사회없음을 메어지는 찢어지는 느낌으로 마음에서 경험한다 나는 유목의 티켓을 구입하기엔 너무 가난했고 이주의 차편 맨 싼 칸에 실려있다. 난 가난이 저주와 불행의 결정적인 시나리오라고 생각한다. 이 통곡에 목이 쉬어 내 목소리는 오페라를 싫어한다. 비뿌리는데 종이에 포장한 폴라로이드 액자를 들고 왔다 도착한 집은 삭막하다. 편지들은 모두 저주다 오늘날,고지서들은 그렇다 액자를 골랐던 몸짓은 경직됨 자체다 내가 사진에서 의미에 대해 외치며 항의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물질적인 감촉이 지불해야만 했던 경로에 대한 경험적 생경함때문이었다 전차에서는 우울한 표정의 독일인들이 숨을 쉰다 내 표정을 앗아갈까봐 나는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고 이 바람과 체류와 알 수 없이 답답한 불행에의 의식이 내 성욕을 식욕을 물욕을 만족을 감각을 사랑을 차분히 앗아가고 있음을 본다 너무나 많은 살해와 너무나 많은 즐거움들이 있었다 줄곧 나에게서 죄는 너무 고독한 시간이 길다는 것에서 유래했다 나는 상당히 많은 소문들이 모두 허황된 것들이며 상당히 많은 가치들이 근거있는 허무에 대항하기 위해 유포된 것임을 느낀다

한 큰 건물이 철거됐고 창에서는 대성당이 보인다. 두 개의 첨탑.첨탑들은 오늘날 로켓으로 진화되었다 신의 없음에 대항하기 위해 신이 있음이 만들어졌고 무의미에 대항하기 위해 찢어낸 그림들이 문자들이 영상들이 개발되었다 라보어는 사라졌지만 나는 컴컴한 라보어안에서 가만히 확대기스위치를 켠채 내 네거티브가 얼마나 빛나는 화상을 만들어줄 것인지 기도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내음화는 더욱 어두울수록 밝은포지화상을 낼테고 다계조의 섬세한 인화지는 조용히 남아있던 검은붉은검은암등을 꺼버리게 한다 숫자로 암호화한 과학적 텍스트의 모사상을 들여다보며 촬영하는 디지털 방식은 텍스트를 통해 신과의 담합을 흉내내며 통치자로서의 권위를 획득한 고대정복자의 정복,관리체계로부터 그 기원을 두고 있다.텍스트와 숫자의 개발은 곧바로 국가장치와 통치의 전면적인 발생을 의미하였고 텍스트의 해독 유포 커뮤니케이션은 국가보존과 유지에 결정적인 사안이었다. 자연을 더욱 정확하게 묘사하기 위해 값비싼 광학과 거대한 기계를 지불하던 근대를 지나 결국 상당히 비판능력과 해독능력이 결여된 채 또다른 상형문자의 시대로 접어든 이른바 탈근대는 우리의 존재구조를 근본적으로 변혁시키려 했는가의 질문에 대해 알아들을 수 없는 회의적이고 퇴행적인 목소리로 대답한다. 이때 주체와 진리에 대한 물음이 인공지능앞에서 무의미한 질문이 되듯이 기존 사진의 가치와 의미의 존재방식또한 변화를 겪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지 형이상학적 실체에 대한 색인이었던 텍스트의 추상적 바탕위에 개발되어진 사진의 특성에 따라 그것은 세계에 대한 색인(rosalind krauss),존재했음에 대한 징후적 색인(roland barthes),’일련의’표상으로 인지된 것들에 대한 색인(digital)으로 진화해가고 있을 뿐이다. 나는 사진이 가치가 덜해진 시대에 살고 있다 나는 아날로그 사진이 자신의 존재적 위기를 절감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사진은 인쇄술의 발달로 암호가 해독되버린 문자언어의 진화적 모습과 닮게 스스로 암호해독 되었다고 말한다. 가치경시는 유통과 관련되어있고 존재적 위기는 큰변혁속에 혼란스럽게 제기되는 가치들에의 -위계에 대한 -물음과 연루되어있다.하지만 이 암호-해독에의 욕구는 다시 요청되어질 것이다. 그때 사진은 자신의 암호체계와 존재방식을 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게 될 요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진은 디지털이 그 인지된 표상으로 참고한 모델이 자신으로부터 유래하였다는 것을 현재 잊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듯이 사진은 존재했다와 존재할 것이다를 동시에 제시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이 철학자가 영상자체의 현상학을 넘어 죽음자체에 대한 명상으로 전개시키고 있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 그가 주목하고 있던 사진이라는 것이- 세계에 대한 또한 존재적 구조에 대한 자체-암시적 상징들이 아닐까 하는 근원적 질문들이었다는 데 있다. 이 종류의 질문들에 보다 명확하게 투쟁하기 위해 우리는 저-기를 응시하는 검은 -라보어가 이미 장착된 –기계를 통과해야만 한다. 현재, 따로 떼어져 내어(잠상들이 내재된 필름) 검은 라보어로 전송되어 다시 회수되던 비밀화된 저-구조를 극복하기 위해 자체후면에-동시간으로 액정화면에 나타어짐으로 진화됨은 보다 세련되게 접근이 어려워진 탈산업적 사회의 장치비평의 난관이다 즉 권력은 검은라보어(현상절차의 거대한 산업적 기계,정밀한 화학적과정을 담당하는)에서 프로그램화한 영상을 제공하고있는기계(과학적텍스트의생산자,계발자)로 이동하였다. 이 기계는 자체만으로는 해독되기 어렵다.혹은 무의미하다. 이 기계는 영상을 통해 벌어지고 있는 장애들의 ‘현대’에 대한 고발적 사태로서만 역으로-도전되어져 폭로되어질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기계를 통해 어떠한 발견을 어떠한 한계를 그 아웃풋된 정보를 통해 돌파하느냐에 관건이 있는 것이다. 거기서 신체는 자유롭지 못하다. 아날로그적이든 디지털적이든 우리의 신체는 ‘불행’을 피하고 ‘행복’하기 위한(자본주의의 구호) 산업적인 동작과 명령의 사진촬영에 관성화되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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