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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bel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3-03-27 23:06:59, Hit : 821)
[펌]못말리는 화가들 - 노성두 글

예나 지금이나 예술가의 길은 고달프다.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의 삶을 정리한 전기를 살펴보면 당시 화가의 삶은 그들의 예술적 성취와는 달리 순탄치 못한 삶을 살았다. 오죽했으면 결혼 기피 대상 영순위라는 오명까지 얻었을까. 그러나 그들의 예술적 열정은 무덤 속의 시체를 몰래 해부해 소묘 연구를 할 정도로 뜨거운 것이었다. 르네상스시대 화가들의 숨겨진 일화를 들여다본다.

 

콜레인 데 코테르 <마돈나를 그리는 성 루가> 135×106cm 1490~1500
화가 바르톨로메오 토리(?∼1554)는 … 되지도 않는 해부학을 공부한답시고 시체에서 끊어낸 사지 토막을 침대 밑이나 온 방 안에 늘어놓고 살았다. 그러니 방에만 들어가면 악취가 코를 찔렀다. 정작 본인은 남들이야 어떻게 보든 상관하지 않았다. 옛 철학자들이 주위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별나고 지저분하게 살았지만 불멸의 명성을 얻은 것을 흉내내서 자신의 남루한 몰골을 자랑스럽게 여기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맛이 가고 말았다.”(바사리)

르네상스시대에는 해부학을 모르면 무식한 화가 취급을 받았다. 공부는 해야겠는데, 벌이가 시원찮던 화가들 형편에 잘생긴 시신은 꿈도 못 꾸고, 어쩔 수 없이 쓸 만한 학습교재를 직접 조달해야 했다. 매일같이 삽을 들고 공동묘지에 출근도장을 찍으며 남의 눈을 피해서 쓸 만한 물건을 찾아다녔다.

“실비오 코르시니(1495∼1547)는 어느 날 밤 공동묘지에 가서 그 전날 교수형 당한 죄인의 시체를 파 와서 해부했다. 예술과 학문의 갈증을 달래기 위해서였다.”(바사리)

“파올로 귀도티(1560∼1629)는 해부학 연구가 어떤 것인지 궁금해서 견딜 수 없었다. 밤마다 일삼아 공동묘지를 둘러보면서 싱싱한 시체가 어디 없나 살피곤 했다. 그러다가 이거다 싶은 대박을 발견하면 곧장 파낸 뒤 한적한 장소로 가져가서 해부를 하고 연구에 필요한 소묘작업
을 했다. 콜로세움의 맨 위층이 그런 일을 하기에는 정말 딱이었다.”(발디누치)

떳떳치 못한 일이니만큼 보란 듯이 횃불을 환히 밝히고 작업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십중팔구 보름달이 뜨기를 기다려서 작업에 들어갔을 텐데, 구멍 숭숭 뚫린 콜로세움의 으스스한 폐허 꼭대기에서 교교한 달빛을 받으며 숫돌에 칼날을 갈고 있는 화가의 모습을 상상하면 어째 꿈자리가 뒤숭숭할 것 같다.

콘디비가 기록해 둔 것처럼 피렌체 산토 스피리토 교회의 납골당에서 유황불 심지를 돋워가며 시신을 열고 더듬었던 미켈란젤로, 그리고 교황의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시신 30여 구를 낱낱이 분해해서 무려 779점의 해부학 소묘를 남긴 레오나르도는 이 분야의 선구자였다. 레오나르도보다 앞서 알베르티는 화가가 인체를 그릴 때 먼저 뼈를 그리고 근육과 힘살을 그 위에 붙인 다음 마지막에 피부를 씌우고 옷을 걸치는 순서로 작업을 해야 한다고 귀띔한 적이 있는데, 그의 당부가 씨가 먹혔던지 해부학은 배움의 과정에 있는 화가들에게 주요 학목이 된다. 덕분에 수도원장들도 교회 납골당의 시신을 예술가들에게 남몰래 제공하면서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로도비코 치골리(1559∼1613)는 산 로렌초 교회에 밀실을 차려 두고 해부학 공부를 위해서 심심하면 시체를 지고 들어와서 피부를 벗기고 이리저리 분해하곤 했다.”(발디누치)

예술의 진보를 위해서 사회적 터부조차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관용적인 분위기는 이탈리아 특유의 것이었다. 그러나 북유럽 화가들도 배움에 목마르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령 1590년 할렘을 떠나 1591년 초 로마에 도착한 홀란드의 동판화가 헨드리크 홀치우스(1558∼1617)는 길거리에 널려 있는 시체들을 보고 이게 웬 떡이냐 싶어 무릎을 친다.

“그 당시 이탈리아에는 기아가 창궐해서 시민들이 떼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길거리마다 굶어죽고 기진해서 죽은 시신들이 즐비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지독해서 머리가 핑글 돌 정도로 어지러웠지만, 홀치우스는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소묘를 그려댔다. 무서운 열정이었다.”(발디누치)

썩어서 진물이 흐르는 시체들을 보고 입맛을 다시다니, 화가가 되려면 비위도 튼튼해야 할 것 같다. 아직 쌀쌀한 계절이라 날파리는 뜸했을 것이다.

그 당시 화가들은 그림만 그려서는 먹고 살기 어려웠다. 간판, 깃발, 문장, 벽화는 기본이고, 축제 행렬이나 잔칫집에 쓸 이벤트 소품과 결혼식 함 그림과 관 장식, 나무로 깎은 후추통 그림까지 온갖 잡다한 일들을 도맡았다.

“안드레아 스키아보네(1434∼1504)는 가난을 견디다 못해 … 산 마르코 광장에 판을 벌려 놓고 나무상자에다 넝쿨 장식, 그로테스크, 그리고 손재주를 부린 재미난 문양을 그려서 팔곤 했다.”(바사리)

또 대부분의 화가 공방에서는 청동 주물을 굽거나 대리석 분수대 조각 같은 조각공방을 겸하고 있었다. 무늬만 화가 공방이지, 공방 한쪽에다 도가니를 짓고 끌로 긁어 대는 소리,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했다. 교회 첨탑에 매달 쇠종을 구웠다가 전쟁이 나면 다시 녹여서 대포를 만들었다. 장화에 붙이는 박차, 찌그러진 주전자 뚜껑까지 일감이 들어오는 대로 군소리 없이 뚝딱 해치워야 실력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일감을 덮어쓰는 처지는 안정적인 급여를 받는 궁정 화가도 비슷했다. 의전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마다 의상코디와 디자인, 무대장치와 연극 연출까지 맡았다. 가령 피카소가 무대 디자인에 샛눈을 판 것은 스포르차 궁정의 축제 이벤트 담당이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흉내냈을 가능성이 크다.

화가 공방이라고 다 잘 나가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 화가들은 풀칠이나 하면 다행이라서 처녀들 맞선 대상으로 기피 영순위였다. 잘 나가는 꽃미녀 프리네를 집 안에 들여앉힌 고대 조각가 프락시텔레스나 아름다운 상아 조각이 따끈한 여인으로 변신하자 곧장 아내로 삼았다는 피그말리온은 그야말로 신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였다. 뵐플린이 르네상스 삼대 거장으로 꼽은 레오나르도, 미켈란젤로, 라파엘로가 하나같이 총각귀신으로 죽은 것만 보아도 대강 그때 사정을 알 만하다. 대책 없이 늙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프라 바르톨로메오나 필리포 리피처럼 아예 굳세게 마음먹고 수도원 화가로 나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제법 이름깨나 날리던 화가들도 추위에 헐벗고 끼니마저 거르며 며칠씩 지새우기 일쑤였다.

“마사초(1401∼1429)는 무얼 믿고 그러는지 만사태평이었다. 세상사와 담을 쌓고 옷가지도 안 걸친 채 작업에 전념했다. 쌈짓돈이 완전히 바닥나기 전에는 남들한테 돈 꿔준 것도 잊고 지나치기 일쑤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미친 인간’이라는 뜻에서 ‘마사초’라고 불렀다.”(바사리)

“우첼로(1397∼1475)는 … 연구에 빠져들면 꼭 은둔자처럼 집 안에 콕 박혀서 나올 줄 몰랐다. 몇 주, 몇 달이 지나도록 코빼기도 안 비쳤을뿐더러, 세상 돌아가는 데는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이처럼 혼신을 쏟아 열정을 바쳤건만 그의 인생은 명성보다 빈곤으로 점철되었다.”(바사리)

로소 피오렌티노 공방에 있다가 나중에 바사리 작업실에 들어와서 함께 동료로 작업했던 크리스토파노 게라르디(1508∼1566)는 최소한 옷가지쯤은 챙겨 입는 축이었다.

“아침에 해뜨기 무섭게 작업에 착수하곤 했는데, 정신을 딴 데 빼놓고 다니는지 옷도 안 입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침대 밑에 던져 둔 신발을 허둥지둥 짝짝이로 찾아 신는가 하면, 옷을 거꾸로 입고 모자까지 안팎을 뒤집어 얹고는 태연스레 어슬렁댔다.”(바사리)

번듯한 작업실도 따로 잘 곳도 마땅치 않아서 작업실에 침낭 깔고 먹고 자는 일도 있었다. 자코포 폰토르모(1494∼1557)는 작업실에다 복층을 지어놓고는 매일밤 나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서 잠을 청했다고 한다. 라파엘로의 스승 페루지노(1450?∼1523)는 자취비와 난방비를 절약하느라 몸에 딱 맞는 맞춤형 나무 상자를 짜놓고 그 안에 들어가 잤다고 한다. 페루지노는 결국 착실하게 목돈을 모아서 늘그막에 따끈한 처녀 장가를 가는 데 성공한다.

‘미친인간’이라는 뜻의 ‘마사초’


왼쪽·〈제욱시스와 크로토나 섬의 다섯 처녀〉 세밀화 15세기
키케로 선집에 들어간 이 그림은 그리스 화가 제욱시스의 작업실을 보여 준다. 제욱시스가 세상 최고의 미녀 헬레나를 그려 달라는 주문을 받고 크로토나의 빼어난 처녀 다섯을 모델로 데려다가 제각기 가장 빼어난 부분을 골라내서 그림을 완성했다는 일화를 보여 준다.

오른쪽·아카데미 교육과정, 조반니 스트라다누스의 그림을 보고 코르넬리스 코르트가 새긴 동판화 44.1×30.1cm 1578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뉴욕
이 그림에 들어 있는 소묘, 회화, 동판화, 벽화, 조각, 해부학, 비례 이론, 건축은 모두 16세기 미술 아카데미의 교육과정을 집약한 것이다.

근대 화가들의 작업실 풍경을 엿보면 청소도 안 하고 살았는지 한마디로 발 디딜 곳이 없다. 베르메르나 벨라스케스의 화실 풍경은 예외였던 모양이다. 붓, 안료덩어리, 기름병, 눌어붙은 팔레트, 작업대, 돌절구, 대야, 부러진 토르소, 인체 사지를 떠낸 석고 본 같은 작업도구나 소품들부터 땔감으로 쓸 장작까지 흩어져 있어서 이런 곳에서 예술작품이 나온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현재 남아 있는 작업실 풍경 대부분은 17∼19세기에 그려진 것들이다. 르네상스시대의 작업실 풍경은 거의 없다. 작업실 분위기를 희미하게나마 전하는 단서로는 화가가 제 얼굴을 그린 자화상이 고작이다. 전통적으로 예술적 창조의 요람으로서 화가의 작업실은 ‘성 모자의 환영을 그리는 성 루가’, ‘제욱시스의 작업실’, ‘여성화가 마르치아’, ‘화가의 자화상’ 같은 주제를 걸치고 등장한다. 화가들은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그들이 상상하는 예술의 이상, 회화의 의미, 예술 실행의 현장, 화가의 교육과정, 고대의 이상과 자연의 모방 사이에 오가는 예술적 반성, 예술이 추구하는 방법과 목적을 이야기한다. 또 꽁꽁 닫아 두었던 비밀의 방을 열어 보이면서 화가의 사회적 신분에 대한 과시나 미술생산자로서의 주체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이와 더불어 화가의 아틀리에 풍경 안에 회화예술의 알레고리가 붓을 든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것은 모두 화가의 예술적 실행이 재현의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것, 그리고 르네상스 이후 화가의 창의와 상상력이 시인의 지적 창조성과 비교해서 결코 모자라지 않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회화를 여덟째 ‘자유 학예’에 편입시키려는 노력과 함께 나타났다.

공부 안 하면 화가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이들을 학습 현장으로 내몰았다. 자연이 감추고 있는 아름다움의 원리, 고금의 거장들이 실현했던 아름다움의 비밀을 파헤치려는 학구파 화가들에게 가장 좋은 실습현장은 로마였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손을 맞잡고 로마의 폐허를 몇 달씩 답사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들은 간단한 막대자와 집게자 그리고 펜과 종이쪽지를 지참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고대 예술가들이 남긴 기둥머리나 들보를 공부했다.

알베르티가 콜로세움을 보고 피렌체의 루첼라이 저택 정면부를 설계한 것이 훗날 르네상스 건축의 교과서가 된 것은 코흘리개들도 아는 상식이었다. 또 전기작가 프란체스코 다 홀란다는 이런 시를 지어서 예술가들 허파에 바람을 불어넣었다.

“화가, 조각가, 건축가 / 그 누구도 로마를 보지 않고서는 / 될성부른 작품을 내지 못하리.”

또 로마의 바티칸에 식스투스 4세가 조성한 벨베데레 조각공원은 디귿 자 열주회랑의 그늘과 중앙 분수대를 에워싼 고대 수집품들이 명실상부한 조각박물관의 위용을 갖추고 있어서 화가와 조각가들의 훌륭한 사랑방이 되었다.

고대의 희미한 예술뿐 아니라 르네상스 거장들의 생생한 작품들도 본보기가 되었다. 우선 거장들끼리 서로 경쟁하면서 베껴댔다. 레오나르도가 그린 성 안나와 성 모자 소묘를 보고 미켈란젤로가 한숨을 쉬는가 하면,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천장 벽화를 반쯤 그리다 말고 작업 비계를 철거했을 때 마침 바티칸 스탄체 벽화 아테네 학당을 그리던 라파엘로가 살짝 들여다보고 놀란 나머지 그날부터 지금까지의 화풍을 때려치우고 미켈란젤로 화풍으로 돌아섰다는 이야기에 뒤이어 거장들의 숨소리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배움의 열정이 로마를 뜨겁게 달구었다.

“카를로 마라티(1625∼1713)는 바티칸 스탄체에 라파엘로가 그린 벽화를 연구하기 위해 생쥐 풀방구리 드나들 듯했다. 아침에 일착으로 와서 저녁에 마지막으로 나갔다. 추위와 더위, 그 어떤 불편도 그의 발길을 막지 못했다. 겨울에는 온기 하나 없는 냉방에서, 여름에는 햇빛이 아깝다고 낮잠 잘 시간을 아끼며 공부에 파고들었다.”(벨로리)

낮에는 붓과 씨름하고 밤에는 시인, 인문학자, 수사학자, 음악가, 수학자들과 사귀며 예술의 고단한 길을 걷는 화가들은 비록 빈곤과 천대를 운명처럼 걸치고 살았지만 자부심 하나만큼은 하늘을 찔렀다.

레오나르도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의 수도원에서 〈최후의 만찬〉을 그리다가 작업진행이 더디다고 수도원장한테 잔소리를 듣자 스포르차 공작에게 이렇게 응대했다고 한다.
“배신자 유다의 얼굴을 아직 못 그리고 있는데 … 종내 못 찾으면 저 악착 같고 거만한 수도원장 낯짝으로 대신할까 생각중입니다.”

미켈란젤로도 시스티나 제단 벽화에 〈최후의 심판〉을 그릴 때 바티칸 의전관이 성스러운 예배소에 웬 알몸 잔치냐고 시비를 걸자 뱀에게 꽁꽁 묶인 미노스에 그의 얼굴을 붙여서 지옥에 던져 넣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또 조각가 도나텔로한테 덜 떨어진 귀족 하나가 작업실까지 찾아와서 구시렁대다가, “나도 이쪽 동네에선 당신이 당신 동네에서 하는 만큼 하네요”라고 보기 좋게 당한 이야기(폴리치아노), 라파엘로가 그린 베드로와 바울을 구경하던 성직자들이 성자들 얼굴이 너무 빨갛게 된 게 아니냐고 까탈을 부리다가, 당신네 같은 분들이 교회를 주무르는 게 창피해서 저 분들 얼굴이 상기되었나 보네요” 하고 한방 맞은 이야기(카스틸리오네)는 예술가의 신분이 이제는 어제 같지 않다는 증언들이다. 화가 노릇하기도 어제보다 더 힘들어진 것은 사실이지만, 바로 여기서부터 미술은 진보의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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