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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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6-11-23 16:29:14, Hit : 384)
전시 11.23



Lifescape

이성희 사진展

2006_1122 ▶ 2006_1208



이성희_Still 1-bush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온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122_수요일_06:00pm




갤러리 온
서울 종로구 사간동 69번지 영정빌딩 지하1층
Tel. 02_733_8295
www.galleryon.co.kr






더욱 더 먼 시선의 거리- 이성희의 사진 속 ‘그들’과 ‘우리들’ ● 사진에는 움직임도 없고, 소리도 없다. 사진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력으로 보여줄 수도 없으며, 거기 그 시간에 실제 존재하는 것을 부재(不在)로 만들 수도 없다. 이렇게 부정 어법으로 사진을 정의하면, 사진은 별로 힘 ‘쎄’ 보이지 않는다.(그러나 현실에서 사진의 힘은 아주 ‘쎄’다. 온갖 현란한 멀티미디어 영상이미지의 원천이 바로 사진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진이 한 명의 미적 감상자에게든 사회 집단에게든 어떤 특별한 효과를 거두려면, 작가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답은 사진을 찍는 작가 주체마다 다를 것이고, 사진의 감상자-수용자-사용자-소비자가 사진에 대해 기대하는 바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장의 사진이 개인의 내면을 관통하고 사회의 집단의식을 흔들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면, 그 이유는 사진가가 사진 속에서 자신의 심미적이거나 정신적인 활동과 사진 찍기에 수반되는 물리적 활동을 엄밀하게 교차시켰기 때문이다. 즉 그러한 사진에는 작가의 주제의식이나 의도만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찍기 위해 특정한 시간과 장소를 찾아 헤매고, 오래 기다려 발견하고, 대상에 밀착해 들어간 작가의 실천이 필수적으로 현상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사진이 그 매체의 특수한 조건, 즉 현실(reality)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기인한다. 디지털 사진의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것은 ‘일단, 사진이란 존재하는 것만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것을 찍기 위해서 사진가는 그 존재에게로 움직여 가야한다. ● 한 장의 사진이 진정 어떤 언어, 어떤 감수성, 어떤 행동을 보는 이로 하여금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은, 거기에 사진 찍는 이의 ‘현재 상태’가 현상되어 있어서다. 그/녀가 어느 장소의 어느 자리에서 어떤 사고 혹은 심정으로 피사체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그것을 찍었는지 알알이 감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진은 보는 이를 예민하게 만들고, 자신이 있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무엇인가를 하도록 충동질한다. 그런 의미로 나는 이성희의 《Lifescape》 연작 사진들을 보고 있다. 핑크빛 셔츠를 입은 남자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는 한강고수부지 사진(〈still 6-stickers〉)은 그 남자의 사연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을 자극하고, 그 남자의 허약한 목덜미나 그 머리 위로 지저분하게 붙어있는 스티커들 같은 세부에 주목하게 하는데, 어쩌면 내 마음은 이미 한강의 그 거대한 교각 밑으로 달려가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상상 속에서. 그런데 이것이 또한 사진의 딜레마이다. 사진은 나를 움직이도록 충동질하지만, 또 그와 동시에 실제로 움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이미지를 자세히 관찰하고 심미적으로 감상하는데 그치게 한다. 마치 사진가가 어떤 정황을 찍기 위해서는 그 사건에 개입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사진은 그것을 감상하는 주체에게도 ‘필연적 거리’를 강제하는 것이다. 이때의 ‘거리(距離)’는 물리적으로 대상과 떨어짐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심미적·지각의 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앞으로 보겠지만, 이 거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성희_Still 6-stickers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_Still 4-cigarette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4


《Lifescape》 사진 연작에서 두드러진 점은 피사체와의 극복할 수 없는 ‘거리’이다. 이 거리가 물리적으로는 ‘멀리’, 심리적으로는 ‘가까이’, 변증법적으로 작동하면서 이성희 사진에서 특정 효과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연작 사진들은 작가가 삶에 대해, 타인에 대해, 풍경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 그녀의 눈과 카메라가 어떤 관점에 위치해 있는지, 그녀의 가슴과 머리가 리얼리티 속에서 무엇을 느끼거나 생각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우리 감상자에게 별다른 과장도, 거짓도, 윤색도 없이 그것을 노출시킨다. 사진에서 보건데, 이성희는 피사체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고, 사진 속 인물들을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관심이 있고, 그들이 있는 곳으로 (심정적으로) 다가가고 싶어 한다. 대형카메라로 찍은 정사각형 프레임의 사진 속에 고립된 점처럼 존재하는 ‘그들’은, 모두 혼자이고, 어느 정도는 넋을 놓고 있으며, 예상컨대 ‘잘 나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이라는 단어는 물리적으로 저기 먼 곳의 사람들이고, 심리적으로 ‘우리들’과 가깝지 않은 낯선 ‘타자들’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 단어는 말의 어감상, 실제로는 중심에서 벗어난 존재들, 혹은 주도적인 것으로부터 소외되거나 배제된 어떤 존재들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이다. 단적으로, ‘그들’은 마이너리티 타자들에 대한 지시어이다. 이성희가 찍은 ‘삶-풍경(Life-Scape)’은 이 사회화된 언어, ‘그들’이라는 낱말의 뉘앙스를 ‘우리들’의 삶 속에서 찾아내고 현상하는 사진들로 보인다. 이 사진들은 역설적으로 ‘우리들’ 안에 ‘그들’이 있음을, ‘그들’이 삶-풍경의 일부임을 딱딱한 프레임의 평면 위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이 사진들을 보며, 현실사회의 세속적 체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그들에 대한 소외와 배제가 보다 큰 차원, 즉 인간과 그 인간을 둘러싼 주변세계라는 체계로 보자면 성립되지 않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말의 편의상 또는 습관상 ‘그들’이라고 부르는, 사회로부터 고립된 ‘이 사람’은 작가 이성희의 사진에서 보면 환경에 둘러싸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핑크빛 셔츠를 입은 고개 숙인 남자는 회색빛 한강과 그와 유사한 빛깔의 서울 대도시의 하늘, 콘크리트, 비둘기에 둘러싸여 있다. 그는 다만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있을 뿐, 그를 둘러싸고, 받치고 있는 것은 이렇듯 많다. 공사장 인근 수풀만 우거진 공터 속의 한 남자도(〈still 1-bush〉), 대낮 복도식 아파트의 난간에서 구부정하게 아래를 내려다보는 다른 남자도(〈still 4-cigarette〉), 송도 리조트의 텅 빈 공원에서 홀로 벤치를 지키는 어느 젊은 청년도(〈still 5-ring〉), 모두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다질적(多質的)이고 다양한 사물들의 세계 속에 있다. ●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이성희 《Lifescape》사진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 작가가 위치해 있는 사진의 ‘현재장소’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그녀가 찍은 이 사진들은 ‘그들’을 피사체로서 멀리 떼어두고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알고 싶고, 다가가고 싶은 욕구를 자극하는 사진들인 것이다. 또한 이 사진들은 ‘사회로부터 배제되거나 소외된 그들’이라는 개념을 주제화할 목적에서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 ‘삶의 풍경’을 존재하는 상태로 보여주는 사진들인 것이다. 이는 이성희가 위치하고 사진 찍은 ‘현재장소’가 대상으로부터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같다. 물리적 거리가 상당하기 때문에 사진에는 모티브일 법한 ‘홀로 외로이 있는 사람’만 부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를 둘러싼 주변 환경, 가능하면 모티브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삭제하고 싶은 부수적인, 그러나 엄연히 현존하는 풍경들이 모두 고스란히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겨지게 된다. 예컨대 저 멀리 건설 공사 현장의 크레인이라든가 일률적으로 그어진 주차구획선이라든가 전경에 드리워진 시커먼 나무 그림자라든가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착되어 있다. 이것들은 만약 작가가 ‘혼자 있는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그들에게로 전진해 카메라를 들이댔다면 프레임 안으로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들이다. 만약 그랬다면, 우리는 사진에서 어떤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미를―사회적 소수자의 입장, 실업·파산·노숙자 등등의 사회 문제에 대한 제도적 개선―읽고, 그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 사진들을 소비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이 지점에서 당신은 연말 의례적으로 열리는 〈보도사진전〉의 사진들에 클로즈업으로 표상된 지친, 슬픈, 분노한 얼굴들을 떠올려 보아도 좋다.)




이성희_Still 5-ring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_Still 9-boats_디지털 프린트_100×100cm_2005


이성희는 삶의 풍경을 찍기 위해 카메라가 설 자리를 더욱 더 멀리 뒤로 물려버림으로써 피사체와 물리적 거리를 만든다. 이 거리가 감상자의 심리와 지각의 차원에서는 변증법적으로 전도되어 가까워진다. 즉 이미지에 대한 감상자의 미학적 향유를 부추기는 것이다. 동시에 지적 소비 혹은 사회비판적 의미의 투사를 막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바르트는 대상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둔 사진, 즉 “사회적 시선”이 드러난 사진이 “섬세한 미학의 중계”를 거치게 되면서 그 비판성을 소실해 버린다고 논한 적이 있다. 우리가 그러한 사회비판적 사진에 예술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써, 그 정치적 힘을 무효화시켜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지극히 타당한 말이지만, 지금과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비판들이 상투화되어 버렸고, 그것이 예술창작에 있어서까지 하나의 전형이 된 시점에서 우리는 다른 생각과 모색을 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진으로부터 전형화 된 모티브 채집이나 주제의식을 걷어내는 것, 나아가 사진을 이미 익숙해진 담론의 독법으로 읽어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이성희의 《Lifescape》 사진들을 보면서 도심 곳곳에 넋을 잃고 앉아있는 마이너리티들의 처지를 말할 수 있다. 직장을 잃고, 가족으로부터도 도외시된,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해진 ‘그들’에 대해 우려스럽게 떠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수다 속에서 실제로 ‘그들’의 문제는 휘발되어 버리며, ‘우리들’이 속해 있는 복잡다단한 현실은 추상(抽象)되어 버린다. 이 지점에서 나는 오히려 작가에 의해 섬세하게 미학적 중계를 거친 사진의 가능성을 생각해본다. 그러한 사진은 성공적인 경우, 우리 감상자를 생각에 잠기게 할 것이다. 그 생각이 당장에 어떤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라도, 앞서 분홍빛 셔츠를 볼 때의 나처럼 상상 속에서만 행동할지라도, 우리는 이미지를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길 필요가 있다. 바르트가 또 논했던 바, “결국 사진은, 두려움을 주거나 격분시키거나 상처 입힐 때가 아니라 생각에 잠기게 할 때, 파괴적인 힘을” 갖기 때문이다. ■ 강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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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욱 회화展

2006_1124 ▶ 2006_1226



김정욱_×한지에 먹_74.5×101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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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6_1124_금요일_06:00pm




갤러리 스케이프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
Tel. 02_747_4675
www.skape.co.kr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며 또 너무 많은 것을 말하나, 꼭 맞게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엄청난 상황을 단한마디로 요약하는 저 불투명한 하이쿠(俳句_haiku:일본의 단시로 자연이나 인간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선명한 인상으로 그려 표현 하는 일본의 단시短詩). - Roland Barthes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74.5×108cm_2006


작가노트 속 메모처럼 김정욱은 자신의 작품을 강렬하지만 모호한 것들을 하나의 상황이나 사람으로 함축하여 표현해 내고 있다. 동시에 알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현실 속에 환상,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확언을 내릴 수 없는 [중간지점]쯤 되는 부분의 새로운 관계형성 가능성도 열어 놓으려 한다. 이것에 관한 한 더 할 수 없이 좋은 표현은 역시 작가노트 속, 옮겨 적은 메모에서 발견할 수 있다. ● 하이쿠는 형상을 다루는 데 있어서 자기 자신만을 다루는가하면 동시에 많은 것을 의미하도록 하여 그 최종적 궁극적 의미를 파악 하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하는 수법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형상을 그 어떤 개념적이고 사변적인 양식으로 담아내지 않으면 않을수록 형상은 자신의 올바른 모습에 그만큼 가까워지는 것이다. - Andrai Tarkovsky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74.5×101cm_2006


보여 지는 것과 드러나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들의 조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예민하고 민감한 지점은 그의 작화법을 보다 실존주의처럼 보이게 하여 진짜 사람을 그리고자 하는 김정욱의 그림은 해가 가면 갈수록 오히려 익숙하지 않은 인물들을 창조해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본질적 지점에 가깝지 거죽의 닮고 닮지 않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정욱이 집중하고 있는 그 응축의 순간들은 눈이라는 신체기관을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보이지 않거나 또는 존재하지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작가적 사고를 수면 위로 부상시키는 행위로 다소 과장된 표현을 과감하게 사용하기도 한다. 눈이라는 신체기관은 미묘하지만 나름대로의 버릇과 자세, 모양새가 제각기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흔히 즐겁거나 분노하거나, 우는 등의 행위를 눈만 보고도 판가름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며 김정욱은 바로 그 미묘한 지점을 날카롭게 포착해내고 있다. 동시에 보여 지는 것들에 대한 관심도 놓지 않음으로 인해 인물들의 머리카락이나 상처, 입고 있는 옷 따위 등의 묘사가 신중하게 화면에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과장과 생략이 혼용되어 운용된 조형적으로도 밀도 있는 화면을 만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김정욱의 눈을, 아니 그러한 눈을 가진 사람들을 단순히 말랑말랑한 감정의 덩어리들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예측할 수 있지만 확언이 불가능한 일련의 인간사 전반을 다루고 있거나 얼굴에 난 상처들을 통해 개인의 사건이나 증후들이 읽힐 수 있는,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개별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김정욱이 오랜 시간 공들여 생각한 사고의 자락이며 이번 전시 역시 그 오랜 탐구이자 화두인 이야기들의 변화된 방식일 뿐이다.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74.5×108.5cm_2006



김정욱_한지에 먹_75×106cm_2006


이렇게 진행 중인 김정욱식 사고는 언제나 강렬하게 보는 이의 발목을 붙들어 놓는다. 그의 새로운 그림을 보면서 몇 번이나 느꼈던 감정적 자극을 통해 좀 더 작가적 속내를 볼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렇지만 오히려 나를 바라보게 되는 김정욱이 그려낸 눈들, 아니 사람들이다. 작가가 수없이 이야기하는 그 알 수 있음과 없음 그리고 그 사이사이의 공간들, 아이의 얼굴에서 보여 지는 초연한 듯한 눈빛과 새로 생긴 핏빛 상체기가 주는 생생한 상처들과 오랜 세월이 지나 허옇게 자국으로 남아 버린 개인의 흉터들...눈가의 주름하나 더 닮게 그려 사람이 더 사람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김정욱이 포착한 사람의 풍경 속엔 수많은 이야기가 강이 되어 흐른다. 어떠한 방식으로도 확언될 수 없는 사람다운 사람이 말이다. 그리고 그 낯선 이들로 인해 내 가슴이 움직이고 있음을 느끼고 만다. ■ 김최은영

■ 찾아오시는 길_지하철 3호선 안국역 2번출구 북촌미술관 방향 7~8분 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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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 물 그리고 풍경

장지옌 회화展

2006_1117 ▶ 2006_1130



장지옌_창안지예(長安街)_캔버스에 유채_250×140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가나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117_금요일_05:00pm




가나아트센터 2층 미루 전시장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5-5
Tel. 02_395_4419
www.ganaart.com






장지옌(章劍,1968)은 3세대(1970년도 전후반 출생)를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이다. 3세대는 개혁개방을 추진하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고 민주화 열기가 가장 고조되었던 80년대 후반에 대학을 다니면서 천안문사태를 경험하였다. 2세대 작가들인 장샤오강, 왕광이, 위에민쥔, 팡리쥔 등이 전체주의 사회 속에서의 개인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이들은 정치나 사회문제 보다는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것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 작품경향_장지옌은 스쳐 지나가는 일상이나 순간적인 형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유미주의자이다. 작렬하며 사라지는 빛을 통해 존재의 무상한 아름다움을 표현한 초기의 인물작품들,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번지는 물결을 통해 순간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을 내면화시킨 호우하이 시리즈, 이러한 작품들이 작가가 칩거한 미의 세계를 표현한 것이라면, 먼 지평선으로 한 점이 되어 사라지는 천안문(창안지예 시리즈)에는 현실에 대한 작가의 의식이 담겨 있다. 그러나 그 의식 역시 서정적이다. ● 작품유형_초기에는 인상파적 경향의 인물을, 2000년대부터 호수나 북경의 상징적 장소를 주제로 하는 풍경작품을 그리고 있는데, 풍경작품으로는 호우하이(後海 Hou hai: 자금성 뒤 북해공원의 호수)시리즈, 창안지예(長安街 Changanjie: 천안문이 위치한 베이징의 중앙 도로)시리즈, 상하이를 소재로 한 와이탄(Haitan)시리즈가 있다.




장지옌_햇빛찬란한 날_캔버스에 유채_180×110cm_1995


인물시리즈 ● 대학시절 인상파의 영향으로 실외에서 실제 모델을 대상으로 자연광 속에 인물의 미묘한 느낌과 빛의 변화를 정밀하게 표현한 인물작품을 그렸다. 30대에 접어 들면서(2000년대) 대상의 묘사 자체에서 벗어나 대상에 대한 느낌을 내면화시키게 되는데 이때부터 화면은 점차 평면화되고, 단색화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화사하고 밝은 빛 속의 인물들은 어딘지 몽환적이고 우울한 느낌을 준다.




장지옌_호우하이(後海)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5



장지옌_호우하이(後海)_캔버스에 유채_140×120cm_2005


호우하이 시리즈 ● 호우하이(後海 Houhai 혹은 北海 Beihai)시리즈에는 작가가 추구하는 미적 세계가 잘 형상화 되어 있다. 작가에게 있어 예술은 불안한 현실세계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마음의 안식처이다. 물은 그의 이러한 내적 심리를 가장 잘 표현해주는 매체가 된다. 빛이 세상 혹은 예술을 향한 작가의 강한 열망을 표현했다면, ‘물’은 내면으로의 관조와 무위를 의미한다. 세상에 대한 강렬한 열정도 없지만 냉소도 없다. 예술적 형상을 위한 어떤 작위나 집착이 느껴지지 않는다. 노자가 말하는 ‘자연’자체이다. 정적이고 고요한 화면 가득 물 흐르듯 세상을 대하고자 하는 작가의 여유로운 마음이 느껴진다.




장지옌_창안지예(長安街)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6



장지옌_티옌안먼(天安門)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6



장지옌_상하이 와이탄(上海外灘)_캔버스에 유채_200×150cm_2006


창안지예 시리즈 ● 천안문, 광장 등을 소재로 하는 창안지예(長安街 Changanjie) 시리즈는 최근 주목 받고 있는 작가의 새로운 경향이다. 민주화 열기가 고조된 80년대에 청소년기와 대학시절을 보낸 3세대 작가들에게 천안문광장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 곳은 혁명과 민주의 성지요, 피의 광장이자, 희망의 상징이다. 작가는 천안문광장을 자주 찾고 그곳을 찾은 사람들을 화폭에 담는다. 그러나 중국현대사의 상징적 장소인 천안문을 먼 지평선 위로 사라지는 붉은색 점으로 표현해낸 그림들에는 어떠한 정치적 메시지도 담겨있지 않다. 정치적 기호에서 일상화된 장소로 변한 천안문, 그 천안문을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에는 3세대가 경험한 정치적 상실감과 아픔이 담겨있다. ■ 권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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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에서 - 현실과 상상의 경계점

이우림 회화展

2006_1123 ▶ 2006_1203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금호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6_1123_목요일_05:00pm

21st Young Artist 이우림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이우림은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공간 속에 7.80년대 여염집 이불 호청에서 볼 수 있었던 원색의 촌스러운 패턴의 직물들을 삽입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해 왔다. 이들 직물은 주로 인물들을 감싸고 있으며, 그가 그리는 인물 또한 무엇인가를 갈구하는 듯한 무표정한 자태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나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현실에 실재하는 것들이다. 현실의 인물들을 모델로 그렸으며, 숲이나 계단과 같은 현실의 공간 그리고 꽃무늬 직물 등 모든 것들이 실상에서 존재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그의 그림은 상상의 공간, 상상의 인물처럼 보이며, 보는 이들에게 묘한 긴장감마저 느끼게 한다. ● 이번 전시에서 그는 숲 속의 이야기를 테마로 삼았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숲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편안함을 주는 휴식처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예측할 수 없는 위험을 주는 공간이다. 예측할 수 없는 일이 금방이라도 생길 것 같지만 또한 숲에서 나오는 공기와 자연의 다양한 소리들은 동시에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이면적인 요소가 공존하는 숲은 작가가 지금까지 현실과 상상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집약하기에 가장 적절한 장소인 듯 하다.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6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6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6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94×259cm_2006



이우림_흰 꽃_캔버스에 유채_130×162cm_2006



이우림_숲길에서_캔버스에 유채_162×112cm_2006


이러한 모호한 성격의 숲 속에서 인물들은 동물들과 함께 휴식을 취하거나 사색에 잠겨있다. 조용하고 안락한 숲이지만 어딘가 신비스럽고 불안한 요소가 내재된 듯한 공간에서 인물들마저 무표정하고 고요한 듯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거나 깊은 사색에 빠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리고 이전까지 작가의 그림에 등장했던 구두, 축음기와 같은 사물들을 배제하고 조금 더 깊숙한 숲 속에 인물들만이 등장해서 더욱 몽환적인 분위기는 강조된다. 그림에 자주 등장했던 ‘계단’ 이라든가 ‘문’과 같은 차가운 공간에서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지점의 모호한 공간인 ‘숲’으로 그 범위를 좁혔다. 작가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점의 숲 속 풍경과 인물들을 통해 현대인의 고독, 권태, 휴식, 안식과 같은 이야기들을 전개시키고 있다. ● 자연스럽게 작가만의 몽환적인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이우림의 그림은 특별히 세련된 형식의 페인팅은 아니지만, 숲속의 인물들이 휴식을 취하듯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작가의 그림 속 공간에서 머무르게 한다 ■ 금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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