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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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6-11-12 05:18:54, Hit : 526)
전시 11.12
강기원 / 기억의 팔렝프세스트와 사진적 행위
갤러리룩스(02-720-8488)
2006-11-08 ~ 2006-11-14



기억의 팔렝프세스트와 사진적 행위

사진은 있는 대상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러나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언제나 특이한 형태를 재현하거나 그 상징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사진은 오히려 심리적 재현 장치로서 예견치 않은 대상으로부터 추상적이고 심정적인 것을 재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럴 경우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사진 이미지는 상황 그 자체의 설명이 아니라 최초 작가가 포착한 극히 주관적이고 원인적인 무엇(생성)을 암시한다.

이러한 심리적 장치에서 사진은 더 이상 대상을 복제하는 도구가 아니라 어떤 형이상학적인 것을 재현하는 정신적 이미지가 된다. 특히 “사진은 기억적인 은유(필립 뒤봐)”라고 단언하듯이 사진 이미지는 과거 지나간 장면의 시각적 재현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자신이 과거 경험한 기억은 언제나 장면 그대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경우 불확실하고 모호한 기억을 암시하거나 재구성하게 하는 어떤 단편적인 사물로 위장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위장은 무의식적인 심리기능에서 “응축”이나 “이전(移轉)”으로 설명된다. 응축은 예컨대 과거 첫사랑의 달콤한 기억이 그 여인의 스카프로 축약되어 나타나는 경우를 말할 때, 이전은 특히 꿈에서 촛불의 불꽃이 한편으로는 꽃봉오리로도 보이고, 예쁜 젖가슴으로도 보이고, 심지어 산봉우리처럼 보이기도 하는 경우인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꽃봉오리, 젖가슴, 산봉우리는 공통적으로 연상자 자신의 억압된 욕구와 무의식적 충동에 관계한다는 사실이다.

프로이드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일상에서 보고 들은 것들은 쉽게 잊어버리지만 어린 시절의 특별한 충격이나 사건들은 다소 분명히 기억한다”라고 언급하면서, 의식에 떠오르는 단편 이미지들은 단순히 시각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단편적 사물이 이끌고 있는 과거 기억적인 인상이나 음색에 관계한다고 설명한다. 사실상 과거 어떤 상황이나 사물에 각인된 인상이나 음색은 평소 우리의 의식에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인상은 예견치 않은 어떤 단편적인 자극물에 의해 언제 어디서든 의식에 돌출되는데 사진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자극물들 중 탁월한 자극물이 된다.

여기 보여주는 작가 강기원의 꽃과 풀 사진들은 바로 이러한 위장된 기억의 단편들이다. 물론 그의 사진들은 첫 눈에 얼핏 꽃무늬 장식이나 도안을 위한 모자이크 패턴 혹은 작가의 모든 서정성을 비우는 유형학적 식물도감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라도 사진은 작가 자신의 경우를 떠나지 않는다. 사진들은 정 반대로 작가 자신의 기억적 단편으로서 과거 각인된 심리적 인상(impression)에 대한 정신적 흔적이나 자국으로 이해된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짙은 어두운 색조의 흑백 이미지는 희미하게 사라지는 기억의 은유를 더욱 분명하게 한다.

작가가 “나의 작업에는 거의 20년 가까이 보낸 나의 고향 산골마을의 어렴풋한 기억들이 나를 따라 다니면서 언제나 마음속 깊이 내재하고 있다”라고 진술하듯이, 사진으로 나타난 이미지들은 의심할 바 없이 바로 작가 자신의 이야기들이다 :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온 가족이 꾸불꾸불한 논길을 따라 윗동네로 이사를 가던 단편적인 장면, 새벽의 논길에 맺힌 이슬과 질경이 억센 풀, 여름이면 소를 몰고 꾸불꾸불한 산길을 따라 가던 어렴풋한 기억, 집 뒤 대나무 밭에서 부스럭거리는 대나무소리 그리고 처음 아들에게 지게를 맞기고 뒤뚱거리는 모습을 보며 웃음 짓던 아버지의 정겨운 미소가 지금도 눈에 선하다”(작가 노트에서).

이와 같이 작가의 사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진 읽기의 특별한 개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미지가 은닉한 메시지는 작가 고유의 내부적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미지들은 단순한 도안이나 유형학적 자료가 아니라 작가 자신의 어떤 발생적인 존재가 물질 이미지로 이동하는 개념적 전이물(轉移物) 즉 심리학적 관점에서 아주 특별한 인상이나 강렬한 여운이 만드는 일종의 은폐기억(souvenir-écran)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지시적인 특징을 가지는 사진 이미지는, 찍혀진 대상과 그 지시대상 사이의 논리적인 유사 관계가 아닌 물리적 원인 관계(지표 index)에서, 의미로 해석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있게 한 상황적 원인성으로 응시자 각자의 경험적 상황에 따라 유추될 뿐이다. 이때 사진은 기능으로 위장된 진술일 뿐 사실상 그것이 지시하는 것은 물질적인 결과가 아니라 무기표의 신호로서 작가 고유의 “내재적 공명(共鳴)”이 된다.

작가가 독백 형식으로 우리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것은 자신의 삶에 투영되는 현재와 과거에 대한 존재론적 의문이다. 작가가 오랫동안 집착해 온 것들, 더욱이 노동과 일 그리고 직업으로서 몰두해 온 소재들 예컨대 계절이 바뀌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수많은 꽃과 이름 모를 풀, 어딜 가도 볼 수 있는 길가 하찮은 잡목 더미, 반복되는 장판 무늬와 같이 아무렇게나 돋아 있는 잡초들은 단순한 대상의 시적 감동이나 자연 예찬이 아니라 바로 작가 자신의 경험적 존재의 증거로서 부유(浮遊)하는 기억의 단편들이다.

결국 작가의 사진들은 단순히 무엇을 설명하기 위한 사진이 아니라 보이는 세상(le visible)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상(l`invisible)을 “누설하는” 사진들이다. 그것들은 또한 작가의 은밀한 기억이 무의식으로부터 의식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이미 가변적으로 위장되어 나타나는 기억의 단편들임과 동시에 우리 모두의 공통된 삶의 애환이다. 그때 직감적으로 감지되는 형용할 수 없는 무엇의 순간 포착은 과거로 소급되어 드러나는 삶의 침전물로서 오랜 세월 동안 내면 깊숙이 침전된 욕망과 믿음, 더 이상 이룰 수 없는 아쉬움과 더 이상 볼 수 없는 얼굴들에 대한 일종의 반복적인 주술 즉 동어반복 형식으로 출현하는 기억의 팔렝프세스트1)이다.

1)팔렝프세스트(palimpseste) : 씌어 있던 글자를 지우고 다시 글자를 써넣는 양피지.

글 / 이경률 (사진이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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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형근 개인전
금호 미술관 (02-6303-1919)
2006-11-09 ~ 2006-11-19
2006-11-09 오후 5시




국내외로 활동중인 사진작가 박형근 개인전이 금호미술관에서 시행하는 금호 영아티스트에 선정되어 열린다. 본 전시회는 2003부터 최근에 이르기 까지 박형근이 추구해온 풍경사진들에 대한 탐구이다. 작가는 그 자신이 설정한 현실이해방식, 즉 현실세계와 지각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불일치를 작가의 상상력에 기대어 사진 이미지로 펼쳐 보이고 있다. 2003부터 최근까지 제작된 `Untitled무제` 시리즈와 ‘Tenseless 텐슬리스’ 시리즈에서 보여지는 자연 공간에서는 인간 존재감이 종종 암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부재한 듯 보여지며, 이는 작가 자신에게 미스터리하고 강력한 경험으로 다가온다. 그 곳에서 숨죽인 적막과 조작되어지고 변형된 장면들, 마치 환각을 불러 일으키는 것 같은 강한 컬러들은 사진 장면 속에 은밀하게 감추어 진 내러티브, 사건성 그리고 역사들을 건드리면서 그의 사진들은 관람객들을 상상의 세계 속으로 유도한다.
박형근은 한국에서 광주대학교 학부와 대학원에서 예술사진을 졸업하였으며 2002년 영국으로 건너가 런던대학 소속의 골드스미스 컬리지에서 시각미술 대학원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하고 MA이미지 & 커뮤니케이션과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하였다. 박형근의 작업들은 유럽 주요 사진 잡지인 Portfolio포트폴리오 매거진과 Eyemazing 아이매이징을 통하여 소개되어진 바 있고 국내에서는 2002 신세대 흐름전(한국 문예진흥원), 제 5회 가나 사진페스티발, 웰컴 투 더 정글(갤러리 잔다리), 비트맵(대안 공간 루프), 대구사진 비엔날레와 영국 뉴아트 갤러리 워셜(개인전), 이탈리아 토리노, 독일 프랑크푸르트, 미국 휴스턴 포토페스트2006 비엔날레, 슬로바키아 Fotofo 2006 등의 해외 전시회에 참가하였다.

글 / 금호미술관

FORWARD

정체불명의 찌그러진 공 하나가 오랫동안 고여있는 듯 보이는 연못 한복판에 놓여있다. 섬광처럼 반짝이는 이 연못의 표면은 현실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녹색의 수중식물들과 수초로 뒤 덮여있다. 이 사진의 구도상 정 중앙에 가깝게 위치하고 있는 그 볼은 모호한 내러티브를 표출하고 있는 이사진에서 점점 중요한 화자로 부각되어 결국 우리의 사고가 끝내 도달 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영역 속으로 미끄러진다. 그렇다면 그 공의 정체는 무엇이며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공 놀이하던 어린이가 잃어버린 후 흘린 눈물자국의 단편인가? 수풀 속을 찾아 헤메이던 강아지가 결국 포기하고 만 바로 그 공인가? 과연 이 일은 언제 그리고 어떤 다른 사건들이 이 장면의 배후에서 발생했던 것일까?

박형근의 사진들은 그러한 긴장과 드라마로 가득하다. 그의 사진에서 주로 보여지는 대상이 풍경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진정한 주인공은 자연이 아니다. 이 사진들에 포착된 장면들을 찾아내기 위하여, 작가는 무수한 시간을 런던의 햄스테드 히스와 같은 도시 근교의 공공장소와 숲에서 보냈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러한 장소의 주변부는 질서와 안정이 카오스(혼돈)와 마주하는 상태 안에서 공존하며 인간의 활동과 간섭이 목격 되어지는 곳이다. 그의 사진에서 인간들의 현전이 종종 암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실체를 발견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의 사진이미지들은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한 영원성을 품고 있다. 심지어 흐트러지고 소란스러운 비둘기들의 움직임조차도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 영구적으로 포착 되어진 채 얼어붙은 듯 하다. 작가가 선택한 컬러들은 강렬하고 아름답다. 그렇다면 이 컬러들은 작가가 촬영과정에서 그 장면에 직접 개입하여 변화시킨 것인가? 아니면 디지털의 기술력에 의하여 조작되고 강화시킨 것일까? 사진 속 장면들에 대한 이 작가의 물리적 개입과 관여는 때로는 우리의 시선 앞에 드러나는 듯 보이나 그의 세심한 손끝에서 나온 결과물들은 이러한 의구심들을 사라지게 만든다. 그렇다면 정녕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판타지인가?

이미 예술사의 많은 작가들이 그의 이전에 고민하고 실험하였듯, 박형근의 작업들은 현실세계를 이해함에 있어 우리의 시각적 믿음에 의존한 일차적인 재현방식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논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현실의 본성은 훨씬 다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박형근에게는 무한한 상상력이 주요한 역할을 한다.

그가 창조한 이미지들은 어둡고, 모호하며, 유동적인 동시에 강렬한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 관객에 입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볼수있는 가에 대한 확신에 찬 기대보다는 볼 수 없음으로 인한 즐거움에 더욱 깊숙히 매료된다.

글 / 데보라 로빈슨.(더 뉴아트 갤러리 워셜, 전시 총괄 큐레이터)



Tenseless-19, The electronic wires, 2005, 125x100cm, Light jet C print



Untitled-12, In the twillight, 2004, 125x100cm, Light jet C print


박형근의 시학(Poetics)
풍경이 주 대상으로 등장하는 사진에 대한 이론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자. 우리들은 아마도 대부분의 풍경사진에서 익숙한 미래지향적 성향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특히 이러한 유형들의 사진들은 전형적으로 가옥들, 도로들 그리고 온갖 종류의 인공구조물들을 보여주며 우리들을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사건들에 대한 관심에 접근하도록 유도한다. 주거공간은 인간들을 악천후와 위험요소로부터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하기 때문에 지어야 할 타당성이 있고, 도로는 또한 우리들을 원하는 목적지로 향할 수 있도록 한다. 종교적 건축물에서 보여지는 첨탑과 성채는 오직 우리의 상상안에서만 다다를 수 있는 머나먼 미래를 지시하고 있다. 우리들은 이러한 이론들을 위대한 19세기 풍경화에서 묘사하고 있는 운하들, 철로들 그리고 대농장의 풍유로움에 손 쉽게 적용 가능하다. 그러나 그런 도식을 세상 모든 곳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를 테면 한 그루의 나무는 그 나름의 고유한 계절성과 시간감각에 따라 살아가며 저 넓은 바다는 스스로의 원칙에 따라 쉼없이 움직이고 변화하고 있다.
우리들이 박형근의 사진 작업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미학적 고려가 요구될지 모른다. 예를 들어 소나무 가지들과 디기탈리스 나무 곁에 퍼져있는 붉은 액체 웅덩이를 우리는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단순히 초여름에 흔하게 보여질 수 있는 보편적 상황이 아니며 그 빨간색의 실체는 지구상의 어떤 것을 직접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사진에 찍혀진 장소는 여우 굴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와같은 무미건조한 설명은 우리의 궁금증과 욕구에 크게 부응하지 못한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원래의 장면을 조작, 강화시켜서 지표면의 모습을 마치 흐르는 용암속에 존재하는 상태처럼 보이도록 변모시켰다. 이장면에 대한 더욱 적절한 이해는 우리의 상상력이 개인의 고유한 참조물에 독립적으로 의존, 작동하고 동시에 우리의 사고력이 그 사진안에서 보여지는 여우굴에서 부터 마침내 녹아흐르는 지구의 중심핵에까지 최종적으로 다다를 수 있게 하기 위한 장치라는 설명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아마도 이 사진에서 보여지는 붉은색의 꽃들이 그러한 가능성을 표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꽃들이 강렬하게 불 타오르는 토양 내부세계로부터 발산하고 있는 뜨거운 열기를 암시하고 있다고 하자. 그럴 경우에 우리는 여전히 인과관계(cause and effect)에 의한 접근법을 다루고 있는 것이되 그 누구라도 실제로 이와같은 연관성(connections)을 창조하고 싶은 이가 있다면, 이는 오직 전지전능한 신만의 그 창시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들은 일상적인 삶 안에서 당면한 현실 문제들에 근심하며 살아간다. 그러함으로 진정 신만이 우리에게 전혀 익히 알려지지 않은 차별성있는 초월적 능력에 기대어 이러한 가능성을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근의 작업과정은 관객들을 그의 작품 영역 내로 초대하기 위하여 형식적 요소들 스스로가 제시되어 있으나 그 이상의 구체적인 설명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여기 초록색의 수초로 뒤 덮인 연못 한 가운데에 찌그러진 플라스틱 공 하나가 놓여있는 장면을 포착하고 있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 이미지를 일반적인 사건의 과정하에서 추론할 때 우리는 그 볼의 위치가 누군가에 의해서 재조정 되었을지도 모를 가능성에 대해 상상할 수도 있다. 반면에 우리가 실제로 사진에서 보여지는 장면처럼 볼의 위치를 원하는 어떤 장소로 움직이려고 시도 할 경우, 우리의 육신은 아름다운 녹색의 수초들로 엄밀하게 위장되어진 그 깊이를 짐작하지 못하는 늪의 심연속으로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즉, 극복 불가능한 인간의 육체적 한계가 암시하고 있는 죽음에 대한 필연적인 숙명성, 그리고 그 사후의 영원한 세계를 반영하기 위한 사진적 형식임을 관객들은 이제 재빨리 이해하게 된다. 작가가 의도한 사건성들이 무한대의 문을 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작가는 보편적인 가치 판단 기준으로는 비교불가능한 감각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한장의 사진에서 우리의 시선에 와 닿는 활짝 피어난 튜울립들과 수선화들의 모습은, 이사진이 봄철에 묘지를 찍었을 것임을 짐작하게 한다. 이 봄꽃들은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짧은 기간 동안 피어있으며 이로 인하여 우리에게 계절의 변화를 암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를 기독교적인 맥락하에 위치시켜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죽음과 재림 그리고 부활절에 대한 상징성을 내포하기도 한다. 이 사진이미지를 추정가능한 의미로 전환시킬 때 우리는 수평의 십자가와 뒷 배경에는 기울어진 묘비석의 후면에 완벽하게 수직으로 교차점을 이루는 묘비석의 모습을 인지하게 되고 이 사진 장면의 오른쪽 배경에 똑 바로 솟아있는 탑 하나가 이러한 이행을 완결짓는다.
영국 태생의 가장 시적인 사진가로 불리는 빌 브란트(Bill Brandt)가 1940년대 스카이 섬에 있는 공동묘지에서 찍은 사진 작업들은 박형근의 사진과 매우 유사한 접근법을 보인다. 여기에서 기울어진 묘비석은 불완전한 인간의 조건을 지시하는 동시에 보다 낳은 삶에 대한 기원과 염원을 상징하고 있다. 박형근이 이사진을 통해서 그 무엇보다도 심도있게 다루고 있는 측면은 일상적 삶을 둘러싸고 있는 보편적 상황들에 대하여 우리들은 적극적인 고려없이 늘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쉬운 것임에 비해 작가는 그저 평범하고 반복적이기 쉬운 현실의 층위로 부터 가장 본질적이고 고유한 의미들을 자각하고 있는 부분일 것이다.
묘 주변을 장식하고 있는 화초들은 물론 기념비적(memorial)인 것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그 꽃들은 짧은 순간의 생을 마감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운명에 있으며, 묘비에 쓰여진 문구들도 이와 같이 시간의 흐름에 의하여 점차 퇴색되고 결국에는 읽을 수 조차 없게 될 것이다. 묘비문에는 과거의 생을 정리, 기념하여 미래의 시점에 기억되어 지기를 바라는 기원과 축복의 메시지가 쓰여 있다. 그러나 삶의 세세한 과정들을 총체적으로 모아내기란 극히 힘든 일이며 이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억들이 미래에까지 존속하리라는 확신은 그 어디에도 없다. 이를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작가는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적인 결론처럼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시간들이 서로 얽히고 공존하는 길을 예를 들어 제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는 이러한 기대가 실현 불가능하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지만 말이다. 그는 이러한 순간에 강한 매력을 느끼고 있으며 동시에 혼란을 가하고 있다. 여기에 작가가 `추상적인 옷`-Abstract clothes이라고 제목 붙인 한장의 흥미로운 사진이 놓여있다. 이사진 속 상황은 설치 또는 구성된 장면으로 보인다. 그 사진에서 우리는 남성의 것과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옷가지들 그리고 한권의 책과 알약 케이스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에덴의 동산에 대한 이야기들은 사실 추론적이지만, 저 책 한권, 일반적인 범위 안에서 그책은 아마도 지식과 연관된 무엇인가를 재현하고 있으며 그 알약들은 산아제한을 암시한다. 이사진 속 장면에서 보여지는 저 옷들은 버려진 것들이며 이는 하나의 선과 악에 대한 앎의 결과들 중 하나였다. 결국 이곳을 만약 에덴의 동산이라고 가정한다면 운명적 사건들이 역전되어 발생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거나 혹은 아담과 이브가 시간을 거슬러 되돌아가 무대의 뒤 편 어딘가에서 사악한 악마의 방해를 받기 전의 시원적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 사진의 다양한 양상들을 고려할 때 그 특징을 표면화 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그에 대한 한가지 예로, 마치 눈 위에 놓인 새하얀 풍선과 같은 가벼운 스타일의 사진들은 이른바 일본 현대 사진을 연상시킨다. 그런가 하면 북미 사진가들의 호의적인 의도가 정책적으로 숨어있는 사진풍이 있다 - 이런 작업들은 차라리 19세기의 살롱사진에 가깝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박형근은 하나의 심층모델로 묘사할 수 있는 1920대와 1930년대의 초현실주의 경향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이번 전시에서 보여지는 작품 중에 작가가 `두 그루의 나무`-Two trees라고 제목 지은 사진이 있다. 이 사진에는 빽빽한 사이프러스 나무에 의해 거의 가려지다시피 한, 커튼이 드리워진 창문이 포착되어 있다. 당신의 기억력을 뒤로 되돌릴 때 당신은 아마도 빌브란트가 어떤 공간을 위하여 그리고 미스테리한 누군가를 위하여 존재하고있는 창문의 거리감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음을 상기하게 된다. 박형근의 시학은 빌 브란트의 사진세계와 유사하다. 특히 두 작가 모두 우주적 자각을 내포하고 있는 점에서 그렇다. 빌 브란트의 초기사진 중에서 이른 아침, 런던의 한 가정집 현관문 입구에 놓여 있는 우유병과 세계의 반대편에 위치한 뉴지랜드 행 편도 항공편을 실은 신문이 보여지는 사진이 있다. 이와 유사한 관점에서 박형근은 가을녁에 그림자에 반쯤 가리워진 하얀색 베리들이 무성하게 우거진 수풀에 걸쳐져 쉬고 있는 지구의 모습에 주목한다. 이것이 바로 이 작가만의 방법론 즉, 지구의 움직임을 묘사하고 빛의 밝음과 어둠을 구분하기 위한 그만의 표현법인 것이다. 이는 즉각적이고 현상적으로 대상들을 지각하지 않고 사물에 대한 통찰력과 감화력(epiphanies and emanations)으로 다가가는 박형근 만의 세계인 것이다. 그러함으로 해서 그는 아주 간단히, 현대 사진에서 중요한 예술가의 한사람이다.

글 / 이안 제프리, 2006,6월 (미술사, 미술비평)




Untitled-11, Abstract clothes, 2004,150x125cm, Light jet C print



Untitled-1, Red hole, 2004, 100x75cm, Light jet C pr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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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명 / Ferris Wheel(대관람차)
갤러리카페 포스(02-2268-1114)
2006-11-09 ~ 2006-11-30
2006-11-09 오후 6시




Ferris Wheel(대관람차)

동그라미가 있는 풍경을 보고 싶다. 거기에 대 관람차가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뚝딱 뚝딱 지어지고 공장에선 크고 길게 줄지어 서서 물건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모든 것을 표준화 시키고 사각형화 해야 만이 빠른 시간 내에 좀 더 많은 것은 만들어 낼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사진가가 그것을 바라보며 좋던 나쁘던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고 객관적 입장에서 그려가고 있다.
이젠 아방가르드니, 포스트모던이즘이니, 미니멀이즘이 이런 것은 별로 중하지 않게 되었고 그 사물을 어떻게 관찰하며 어떤 것을 창조할 것인가를 더 중요시한다.
정 사각이나 직 사가형의 작은 도형적 평면이미지에서 이 도시는 탄생하였다 그것들은 좀더 쉽고 편하게 자기의 영역을 하나하나 잠식해 나갔고 그것은 점점 커져 하나의 그리드와 구역으로 변하였고 그것은 점점 그물처럼 확장되어 그 확장 안에서 네트워킹이라는 시스템을 가지고 오늘날의 국제적 그물망인 인터넷을 창출해냈다.
그것은 이 도시를 이루는 근간이 되고 하나의 중심체가 되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묵는 우리도 알 수 없는 힘이 되어 버리고 한인간이 도저히 감당 할 수 없는 무언가로 변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모든 것은 모두 획일화 되어가고 그것은 우리 인간이 결정 내려지기 이전에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그러한 도시와 풍경 속에서 동그라미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신선함을 주기까지 한다 그것들이 낡고 사람들이 찾지 않는 구조물 이지만 자연과 도시와 어울리는 모습은 남다르게 보인다 아마도 그것들의 모습이 우리내 얼굴과 닮아 있어서가 아닐까 한다

이제 대관람차 이야기다.

우선 대관람차의 역사를 보면기록에는 18세기초 러시아 모스크바의 이즈마이로프공원에서 사람이 그물을 걸쳐 놓고 돌리는 것이 최초라고 한다 근대적인 철골과 전기로 움직이는 대관람차는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아 만국박람회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설계자 죠지 게일 페리스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페리스 휠˝이라고 한다. 이 관람차는 직경 75미터에 60명이 탈수 있는 곤돌라가 36개가 달려 있어 한번에 2,160이나 탈 수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대관람차는 만국박람회나 놀이공원 유원지의 상징 이였다. 우리 어릴때는 자연 농원 가는게 소원 이였고 어쩌다 한번 부모님이 큰 맘먹고 데려간 곳이 놀이공원 이였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밤비행기 타고 홍코 가서 쇼핑하고 하루 자고 오는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때만 해도 놀이동산 가는게 지금 해외 여행가는 것 보다 어려웠다
그리고 막상가면 어린나이에 공원에서 놀이기구를 아무거나 탈수 없었고 맨날 이상하게 천천히 하늘로 올라가는 둥근 통안 으로 밀려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천천히만 돌뿐이지 너무나도 무섭게 하늘로 올라가는 대관란차는 역시 나에게는 한동안 공포의 대상 이였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
현재 우리나라의 대관람차의 수는 15개정도이다 확인된 바로는 몇 개의 대관람차는 손님이 없다는 이유로 허물어 지거나 폐쇠 되었다
저멀리 대관람차가 보이면 지루한 차안에서의 피로가 싹 가시며 아 멀지 않은 곳에 놀이공원이 있구나 했던 공원의 상징물이 이제는 채산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어지거나 혹은 폐쇄되는 상황에 처해 졌다
마치 서커스의 커다란 거인을 구경거리에 질려버린 관객이 외면한다는 이유로 갈 곳을 잃고 한곳에 머물러 발 딛을 틈 없는 인간 세상을 네려다 보거나 아님 자신의 모습과도 너무나 다른 것들이 사는 곳에 그만이 홀러 남겨져 그 형상과 존재를 유지하려는 울 부짐을 보는 듯 하다

글 / 박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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