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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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05-30 14:36:31, Hit : 852)
전시 5.30



오승환/유적(遺蹟)



공근혜 갤러리(02-738-7776)
2007-05-31 ~ 2007-06-16
2007-05-31 오후 6시

유적(遺蹟):내면의 고고학

인상적이고 위엄 있는 흑백 대형사진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열정적이거나 은밀한 만남을 이야기하고 과거의 지나간 교감을 이야기한다.
흑백의 친밀함 속에서 치밀한 구성, 드라마틱한 시간의 깊이, 미쟝센은 온갖 이야기를 꿈꾸게 하며 작가 자신의 그림을 이중으로 인화하여 시간과 공간 속에 갇혀있는 인물들에 친근감을 갖게 한다. 나비수집가가 가장 아름다운 나비들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세밀하게 다루듯이... 너무나도 가깝지만 유리 아래 보존되어 접근할 수 없게 다루어진 사진들처럼.

공간적 그리고 시간적인 심연이 우리가 잘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우리 사이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때쯤에는 컬러 사진이 호흡, 가까워짐 그리고 귀환으로 나타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현실에 직면해야 하는 또 다른 시련을 겪어야 하며, 사랑스러운 눈빛의 보금자리로부터 탈출하여 세상의 차가움과 고통, 현실을 직면하게 된다.
방금 전 또는 아주 오래 전에 버려진 장소들, 잊혀진 장소들 그리고 잊혀진 사람들. 계속 이어지는 유장한 구조. 컬러와 디지털이 가능하게 만든 가히 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정확성, 규모, 때로는 매우 기하학적인 이미지의 구도에 의해 재창조된 분위기 그리고 전통 옻칠한지에 의해 만들어진 신비로운 분위기가 사진을 압도하면서도 결코 길들이려고 하거나 망각하게 하지 않는다. 전세계 여러 도시에 살며 그곳에서 수집한 추억들을 촉지할 수 있는 현실에서 무엇인가를 다시 만나고 싶어하는 뿌리깊은 욕망, 한 나라의 역사, 작가가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된 도시, 더 이상 그의 것이라고 할 수 없는 도시. 자기 자신의 이야기와 보편적인 이야기를 육체적이고 구체적인 것으로 만나게 하는 일은 내가 이곳에 속하거나 이 도시가 내 안에서 존재하듯이 나도 이 도시 안에서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차갑고도 친밀하며 우리 영혼 속에 거리를 두거나 낙인되어 있는 사진들은 지나갔지만 아름답고도 고통스러운 삶의 유물로 전통 한지의 수의와 함께 그 속에 묻혀 편히 쉬고 있으며 새로운 시선을 만날 때마다 다시 태어난다.

글/이자벨 앙뷰르제(주한프랑스대사관, 조르쥬퐁피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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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ndscape-another world

이유미 회화展

2007_0606 ▶ 2007_0619



이유미_Landscap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145.5×97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도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06_수요일_06:00pm

갤러리 도스 기획




운모하 terrace
서울 종로구 인사동 154-7
Tel. 02_735_4678
www.gallerydos.com






풍경-또 다른 세상 Landscape-Another World ●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은 낯선 곳의 경관이자 또 다른 세상과의 만남이다. 익숙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평면에서 혼합하는 과정을 나타내면서 경계는 자연스레 흐려진다.




이유미_Landscap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91×116.8cm_2007



이유미_A scen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80.3×116.8cm_2007



이유미_A scen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65.1×90.9cm_2007



이유미_A scen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72.7×53cm_2007



이유미_A scen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7



이유미_Landscape-another world_캔버스에 유채_45.5×53cm_2007


첫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꿈과 현실과의 관계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데, 이전에서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의 세계를 '꿈을 꾸는 것'에 비유해 표현했다면, 이번 전시는 좀 더 구체적인 표현으로 있을법한 공간에서의 다른 이야기이다. 긴박한 현실 속에서 한 박자 느린 공간에서의 여유를 꿈꾸며 단순한 어조로 다가서려 한다. ■ 이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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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스케이프_Sidescape

2007 세오 4주년 기념 홍순명 개인展

2007_0531 ▶ 2007_0628 / 일요일 휴관



홍순명_Sidescape-Morocco_캔버스에 유채_53×73cm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세오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531_목요일_05:00pm

관람시간
월요일-토요일_10:00am-07:00pm
목요일_10:00am-09:00pm





세오갤러리
서울 서초구 서초1동 1666-12번지 꿈을 꾸는 세오빌딩 2층
Tel. 02_522_5618
www.seogallery.com






이번 4주년 개관기념을 위해 실험적이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로 주목받고 있는 홍순명 작가를 모시고 초대기획전을 개최합니다. 홍순명 작가는 회화, 설치, 비디오 등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면서 포스트모던의 선두주자로 활동해 오고 있으며 이번 전시는 〈사이드스케이프 Sidescape〉라는 큰 주제로 2005년에서부터 최근까지 지속적인 작업을 해온 작품들입니다. 개관 기념전은 저희 갤러리에서 한국 미술계뿐만 아니라 국제적인 작가로 한 획을 긋는 작가 분들을 소개하고 더욱 알리고자 하는 비중 있는 전시 사업입니다. 이번 개관 4주년의 특별기획으로 모시게 된 홍순명展은 갤러리 전관을 모두 사용하며 이 시대의 새로운 풍경화와 인물화를 통해 예술성과 시대정신을 충족시키는, 수준 높은 중진작가의 예술세계를 보여 줄 것입니다. ■ 세오갤러리




홍순명_Sidescape-Iraq, Nigeria, Iraq_캔버스에 유채_50×65cm_2006


객관적 사유 그러나 유토피아를 찾아서 ● 〈sidescape〉는 홍순명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주제로 그가 20여 년 동안 관심을 가지고 다룬 〈부분과 전체〉라는 철학적이며 과학적 명제 안에서 나온 테마다. 85년 도불 후 인간의 형상에 관한 오브제와 설치작업으로 인간과 그를 둘러싸고 있는 주변을 탐구했고, 90년도 후반부터 살아있는 동물, 곤충과 이미지의 결합으로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미스테리한 시공간의 부분적 탐험을 통한 우주전체를 다루었으며, 2000년도부터는 지금껏 탐구해온 모든 경험을 회화라는 시각예술의 근원적 장르 안에서 실험하고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화가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가장 기본적인 표현법이며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장르다. 미술의 시작과 종말까지 고하면서 미술의 역사를 이끌어왔던 회화는 여전히 화가들에게 매력적인 매체다. 회화, 오브제설치, 비디오 등 많은 실험을 거친 홍순명은 사각의 틀과 천, 물감, 붓이라는 전통재료 안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새로운 회화를 위해 고민을 해 왔듯이 그도 그림의 매력 속으로 빠져 들어 버렸다. 홍순명은 그림을 그릴수록 그 정체를 파악하기 힘이 들며 매우 신비스럽다고 말을 한다.




홍순명_sidescape-070220(Gabon)_73×60.5cm_2007


이번 세오갤러리에서 전시되는 〈sidescape〉작품들은 2005년부터 2007년까지의 작업들로 큰 캔버스 작업의 풍경화와 인물화, 관광엽서작업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그는 이 세계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요소들 즉 정치, 환경, 경제, 문화, 철학 등이 분리되지 않은 그리고 그 것을 깊이 고민하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작가의 시선이 개입되면서도 관조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세상의 이치를 회화의 문제와 함께 표현하고자 한다. 소재 역시 전통적인 풍경, 인물이란 방법론으로 그려내고 있다. 홍순명의 회화는 언뜻 보기에는 색채가 단조롭고 형태나 구성이 매우 정적으로 보이나 작은 움직임들과 약간의 변형된 구도에 의해 예사롭지 않은 사건이나 상황, 공간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루에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정보와 이미지 속에서 살고 있다. 매일 지구촌에서 일어나는 전쟁, 사건, 사고라는 크고 작은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거나 추상화시킨 풍경과 인물은 인터넷과 디지털카메라로 대치되면서 포스트모던의 작가들에게 무궁무진한 소재를 제공한다. 홍순명의 작업은 여기에서 보드리야르나 크라우스의 사진의 다수성, 사실성, 반복과 시뮬라크르라는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뛰어넘어 또 다시 원본화 시키는 형이상학적 모더니즘을 병행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홍순명_Sidescape-6425


그는 화가로서 예술의 진정성은 무엇인가? 예술의 목표는 무엇인가? 미는 무엇인가? 등 을 끝없이 고민하면서 예술자체의 미적 수준을 그대로 유지하고 시대적 작업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탐구하고 있다. 그의 작업은 사진의 복제된 부분, 포토샵에서 수정된 이미지에서 차용된 부분에서 공간을 회화의 공간으로 바꾸어 시뮬라크르의 공간과 작가의 실존적 공간을 공존하게 한다. 이것은 그의 99년도作 인 〈인섹토피아〉에서 유인등에 의해 밤에 곤충이 모였다가 흩어지는 작업과 연결되며 더 나아가 필연에 의한 우연, 우연이 불러들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것으로부터 한 단계 발전된 표현이라 본다. 〈Sidescape〉의 작업은 오리지널하지 않은 다양한 이미지가 섞이고, 공존하는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사건에서 출발해 이미지로 기호화된 사진을 다시 재 차용한 것으로 그 전부가 아닌 그것의 부분을 사용하였고 다시 회화라는 원본으로 그렸다. 실제와 이미지, 이미지와 원본, 실제공간과 회화의 공간은 서로 섞이며 원본의 개념과 작가의 작업은 서로 공존하면서 좀 더 현실적 세계로 진입하면서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고 회화로서 또 다시 관조한다.




홍순명_brazil_2006


〈La vie en rose〉의 작업은 흑백과 핑크색 모노톤의 작업이 함께 설치되어 연속된 풍경을 만들어낸다. 16cmX16cm의 작은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그려진 풍경은 이미 보도로 기록된 사진의 부분으로 사진원본의 기호로서 확인을 위해 텍스트를 써넣었다. 그러나 사건을 비켜선 작가의 자율적 의지에 의해 선택된 화면은 새로운 장소성을 부여한다. 그것은 비극적 사건의 주인공으로서가 아닌 감정이 배제 된 혹은 전복된 아름다운 관광지로서의 이미지이며 호기심의 장소로 변한다. 화면 위의 텍스트만 없다면 피상적이며 익명의 풍경이 되고 무수한 풍경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한꺼번에 같이 존재함으로 지구촌 일상의 거대 풍경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Celebrity〉의 인물작업들에게서도 작용한다.




홍순명_Postcards 작업


작품 속의 인물들은 평범한 장소에 살아가지만 어느 날 사건 안에 혹은 사건 주변에 있으면서 보도사진에 찍힌 자들이다. 그들 역시 외곽에 존재하면서 익명으로 남을 수도 있고 주인공으로 부각될 수 있다. 부분으로 차용할 때 대상이 된 인물을 홍순명은 캔버스 하나하나에 주인공으로서 다시 부각 시킨다. 그리고 유명인이라 타이틀을 붙였다. 홍순명의 인물들을 실제 유명인이 되었다기보다 하나의 기호로서 유명인이 되었다. 그들의 표정에서 읽힌 적대감, 공포감, 저항, 두려움, 웃음, 슬픔에서 사건을 짐작하게 할 뿐이다. 하나의 캔버스 안의 인물은 인종을 초월한 감정을 전달하기도하고 동시에 낯선 타자이기도 한다.




홍순명_La vie en rose_캔버스에 유채_2007


홍순명의 작업은 부분들이 각 개체로서 이루어진 전체가 아니라 연결되며 서로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카프라의 부분과 전체의 전일적 세계관과 나비효과,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의 영화 바벨(2006)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부분을 그려도 언제나 전체를 만들어버리는 회화의 본성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를 찾아 가고 있다. 포스트모던 이후 새로운 예술을 갈망하는 그의 회화는 많은 담론이 형성될 수 있다. 차용과 회화의 교배 속에서 이데올로기, 자아의 투영, 회화의 공간, 작품 스스로의 우연성, 모노톤에 가까운 표현의 절제 등 다중적인 비평을 끌어내게 된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양성과 변화뿐만 아니라 절제되면서 세련된 모더니즘을 다시 접목시키는 작업으로 새로운 회화를 실험하는 작업이다. ■ 김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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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RED

이세현 회화展

2007_0531 ▶ 2007_0714



이세현_BETWEEN RED 17_린넨에 유채_130×13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MIKI WICK KIM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531_목요일_06:30pm




MIKI WICK KIM
Binzstrasse 23 CH-8045 ZURICH
Tel. +41_44_451_4040
www.MIKIWICKKIM.com






이세현의 그림이 사람들에게 쉽게 기억되고 잊을 수 없는 선명한 인상을 남기는 이유는, 그의 그림이 붉은색 만을 이용한 흰 배경 속에 구축된 단색의 조형이며, 그것에 장대한 파노라마를 연상시키는 동양의 오랜 수묵 풍경화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세현의 작품은 관객과 작가의 시점, 기억과 실체의 차이 속에 다른 인상을 야기할 수 있다. 관객들이 그 속에서 경험하는, 혹은 경험하고자 하는 것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유토피아 일 수 있는데, 이세현 작품의 풍경 속의 조그만 암자나 지붕 아래에서 비를 피하는 자신을 상상하거나 그 안에서 조용히 차를 즐기며 자연을 감상하는 누군가를 마음속에 그리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한편 동양의 수묵 산수화는 어떤 모순되는 소유욕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묘한 풍경 속에서 유희를 즐기려고 하면서, 결코 소유가 불가능한 그 환상 속의 풍경을 소유하고자 하는 충동이다. 때문에 산수 풍경화가 고아한 선비의 서재에 걸려 풍류의 필수품으로 여겨지고 유명한 산수화를 소장하려는 치열한 경쟁이 어느 장르의 미술품 보다 더 뜨거웠듯이 사람들은 불가능한 것에 대해 더욱 간절한 소유욕을 가질 수 있다.




이세현_BETWEEN RED 1_린넨에 유채_190×190cm_2006



이세현_BETWEEN RED 2_린넨에 유채_190×190cm_2006


그렇지만 그러한 관객들의 개인적인 소망들과 달리 이세현의 그림은 본인의 기억과 그 기억의 공허한 실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세현의 작품과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그 제작 방법 면에서 유사성이 있는데, 기억을 기초로 시각적 재구성을 시도하였다는 점이다. 안견은 안평대군이 꾼 꿈을 기초로 해서 3일 동안 그림을 그렸고, 이세현은 어렸을 때 자란 고향인 거제도와 부산 앞바다의 풍경에 대한 기억을 재구성하였다. 몽유도원도는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는 환상 풍경이나, 꿈 속에서 존재하였기 때문에 그 기억을 통해 재구성 되어질 수 있었다. 이세현이 기억하는 풍경은 그가 살았던 곳으로 존재하기는 하였으나, 현재에는 도시 개발 계획으로 인해 모두 사라지고 그가 어머니와 함께 살던 집과 그 풍경은 지금은 전혀 달라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그의 작품 속의 풍경 역시 현재의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풍경의 재구성이다. 더군다나 이세현의 기억 속의 풍경이 현재에 사라지지 않았다 하더라도, 지금 기억하고 있는 풍경은 그가 오래 전 살았던 그 실제 풍경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억은 우리들의 삶과 마찬가지로 숨쉬고 자라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세현이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그 기억은 그가 실제로 살던 풍경과는 멀어졌을 것이다.




이세현_BETWEEN RED 19_린넨에 유채_90×130cm_2007



이세현_BETWEEN RED 21_린넨에 유채_90×130cm_2007


이세현이 유일하게 사용하는 붉은 색은 단순하면서도 강렬하고 기억되기 쉬운 색이다. 붉은 색은 지역이나 문화나 또 개인에 따라 다른 상징과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민족에게는 행운의 상징이지만 또 다른 문화에서는 불길한 느낌을 주고, 또한 정열과 힘의 상징인 반면에 패자의 상징이 되기도 한다. 이세현에게는 그것이 실재와 실재하지 않는 것의 사이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에 대한 색이면서도, 그가 오래 전 경험한 군사 경계선에서 야간 투시경으로 보았을 때 느끼던 붉은 화면 속의 위험하고 긴장되는 색이기도 하다. 야간 투시경 안의 렌즈를 통해 느꼈던 특별한 풍경의 이상한 침묵과 신비스러움, 그리고 그 속에서의 뭔가 갑작스럽게 불어 닥칠 어떤 암울한 경고 속의 공포와 두려움은 그 붉은 색 속에 모두 응축되었다. 그러나 색이 언제나 개인과 민족에게 상대적이어 왔듯이, 이세현에게 유토피아이며 긴장과 위험 속에 진행되었던 붉은 색은 어떤 이에게는 그들의 개인적인 삶과 기억을 그 풍경 속으로 초대하기 위한 매개가 되는 색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세현_BETWEEN RED 22_린넨에 유채_85×130cm_2007



이세현_BETWEEN RED 4, 20, 23_린넨에 유채_40×560cm, 60×300cm, 60×320cm_2006~2007


이세현의 그림은 그러한 잊혀져 가고 사라져 가는 한국의 풍경을 붙잡아, 그의 기억과 더불어 덧붙여진 상상력과 함께 선명하고 잊혀지지 않는 풍경으로 재현된 것이다. 빠른 경제 개발이나 불안전한 정치적 상황을 걸러낸 뒤에 실재하면서도 실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마음 속에 존재할 기억 속의 풍경으로 남겨진 것이다. 그것은 풍경이지만 한편 현재의 한국의 모습이며,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 저편에 묻혀진 지난 장소에 대한 이미지이다. 기억이란 늘 거리 속에서 더욱 풍부해지고 어떤 간절함이 실려 있기 때문에, 그의 기억이 한국을 떠난 먼 곳에서 그 자신에게 그리고 관객에게 더욱 생생한 이유가 되지 않았을까. ■ 유은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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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 Up

이병호 개인展

2007_0530 ▶ 2007_0613



이병호_childhood_실리콘, 컴프레서, 유리상자, 에어호스_36×31×48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대안공간 미끌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530_수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7_0609_토요일_03:00pm

문예진흥기금 선정 사업〈Who Are the Freshmen?〉네 번째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기획_대안공간 미끌

관람시간_12:00pm~07:00pm





대안공간 미끌
서울 마포구 합정동 360-17 우남빌딩 2층
Tel. 02_325_6504
www.miccle.com






우리의 삶 속에서 공기만큼 중요한 요소가 있을까? 무릇, 공기가 없다면 지구 표면은 격렬한 태양광과 태양열에 직접적으로 노출되고, 호흡이 이루어지지 않아 생물이 존재할 수 없는 환경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청각을 사로잡는 세계의 소리들 역시 공기의 순환이 없다면 공간 속에서 전파되지 않을 것이며, 물체의 연소 마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지구의 사활과 생명체의 존재여부에 직접적인 영향력을 거머쥐고 있는 공기의 중요성은, 그것이 특이 현상을 드러내지 않는 이상 우리의 삶 속에서는 그 존재감을 쉬 느낄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거센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토네이도, 빛으로 방출되는 색색의 오로라 광경, 오염된 환경을 이리 저리 옮기고 돌아다니는 스모그와 황사. 인간의 안일함은 아무리 중요한 존재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장된 형태로 재해를 일으키거나, 경외감을 불러일으킬 만큼의 현장으로 눈 앞에 드러나지 않는 이상, 그것의 존재감을 의식하고 살아갈 수 없도록 종용 한다. 손바닥을 뻗어보면, 그 위로 100kg의 공기가 존재한다고 한다. 믿어지는가?




이병호_sanai_실리콘, 컴프레서, 유리상자, 에어호스_19×14×26cm_2006



이병호_I promise_레진, 유리상자_19×14×26cm_2007



이병호_to lie_레진, 유리상자_19×14×26cm_2007


그러나 이토록 중요한 것이 공기라 하더라도, 어떤 물질들은 공기와의 접촉으로 인하여 산화와 부패, 발효의 과정을 겪게 된다. 공기라는 요소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 속에서 생명체로 하여금 호흡과 생명의 유지를 가능케 해줌과 동시에 변질과 감염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양가적인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작가 이병호는 인간이 끊임 없이 사유하고 그 자신의 자유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눈에는 쉽게 드러나지 않는 무수한 외부적 요인, 요소들에 의해 인간의 삶이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크고 작은 영향권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부모를 비롯한 외부의 자극에 의해 학습에 학습을 거듭하게 되는 인간은 어찌 보면, 이러한 일방향적 사회화의 경험을 통해 수동적인 입장에서 생을 시작하고 또 마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인간과 외부적 환경 간의 이미 정해진 운명에 대한 의문으로부터 공기라는 물질의 양가적 특성을 대입시키고, 그것을 자신의 작품을 통해 연구, 활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병호_girl's arm_실리콘, 실_44×12×35cm_2007


작가에게 공기라는 물질은 불특정한 한 사회의 문화나 전통, 관습, 유행 혹은 문학, 영화, 스포츠, 언론, 인터넷, 텔레비전 등에 이르기까지 이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무수한 문화적 매개체에 비유된다. 우리 몸에 들어왔다가 내뱉은 공기는 또 다른 이의 호흡이 되고, 또 그 사람이 내쉰 공기는 또 다른 누군가의 호흡이 되며 순환에 순환을 거듭한다. 이렇듯 우리가 내뱉은 말(사상)이 누군가에게 전해지고, 또 그 사람 나름의 해석이 부가된 말과 사상이 또 다른 사람에게 회자되는 가운데 역사는 진보하고, 인간의 사유는 확장되어 왔다. 작가 이병호는 이러한 사고의 전이가 공기의 물리적 흐름-경로와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초기 작품을 살펴보면, 그는 상당 부분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 [진공소년, 2003] 에서 그는 진공포장 방식을 통해 대상의 변질을 막고자 공기를 차단한다. 외부적인 자극을 원천 봉쇄했을 때 생명체의 본질이 회복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공기가 없이는 지구 안에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듯, 한 사회의 문화, 전통, 관습, 유행으로부터 인간을 완전히 분리시킨다면, 그 역시 더 이상 삶을 지속시킬 수 없는 요인이 되고 말 것이다. 때문에 이병호는 그 다음 작업으로 외부와 자아 상호간의 호흡과 소통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기대하며 [handshake.2003]를 만든다. 이 작품은 컴프레서를 이용하여 공기를 불어넣고 다시 빼내는 것으로, 외부의 자극에 대한 선택적(능동적)수용이라는 다소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병호_full of yellow (still cut)_레진_10×10×150cm_2006



이병호_full of yellow (still cut)_부분


최근의 작업 역시 공기의 압력차를 이용하여 물질의 변화를 구현하고 이를 지켜보는 것에 초점을 둔 것으로, 공기의 주입량과 압력에 의해 작품의 모양이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데 여기서 공기를 인간의 삶에 미치는 외부적 환경 요소들로 비유, 상기하여 작품을 바라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즉, 작가는 관람객으로 하여금 그의 작업을 통해 공기라는 물리적 특성이 특정 대상에게 꾸준히 영향을 주고 변화와 변질을 일으키는 과정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도록 한다. 그의 작업에서 공기는 대상의 안팎을 드나들며 대상의 형상을 일그러뜨리고 복구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병호_full of external_실리콘, 실_7×6×15cm


과연, 이 사회를 살아감에 있어서 원하는 순간에만 공기를 주입하고 차단할 수 있는 그의 작품처럼 능동적이고 독립적인 자유의지만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가능할까?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감을 무시하며 살아갈 수 없는 이 세계의 공기라는 요소처럼 우리가 살아가는데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외부적 환경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 역시 좋은 선택은 아닐 것 같다. 우리는 이병호의 작품 속에서 공기의 압력차와 주입량에 의해 변화 와 변질의 과정을 겪어나가는 대상을 지켜보며, 외부 자극에 의해 끊임 없는 변질과 복구를 거듭하며 생명을 유지하고 살아나가는 인간의 본질과 순수성에 대해 또 다른 관점을 가져볼 수 있을 것 같다. ■ 유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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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ding My other self

김지희 회화展

2007_0530 ▶ 2007_0618



김지희_지난 밤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 II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마블링_130x162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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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30_수요일_05:00pm

진흥 New Artist 2007 선정작가 초대展

관람시간_10:00am~07:00pm / 일요일 휴무





진흥아트홀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104-8번지 진흥빌딩 1층
Tel. 02_2230_5170
www.jharthall.org






'반항'과 '일탈'의 카타르시스 ● 김지희 작가는 20여 년 동안 착한 딸로서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보수적인 가정에서 삶을 살아온 전형적인 '한국의 딸'이다. 그녀는 집안에서 '금기' 시 하는 것에 대해서 성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망설임과 두려움이 앞서는 '착한 맏딸'이다. 이러한 '금기'는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해 주는 울타리이기도 하지만 성년이 된 작가에게 벗어버리고 싶은 거추장스러운 옷과도 같다.




김지희_지난 밤 수영장에서 있었던 일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마블링_82x100cm_2007



김지희_파란 나라를 보았니?_판넬에 연필, 아크릴채색, 마블링_73x104cm_2007


작가의 작품에서 주로 등장하는 것은 '여성'과 '말' 혹은 '얼룩말'이다. '여성'과 '말'은 성적인 동일한 코드를 지니면서도 서로 상충되는 일면을 지니고 있다. 먼저, 동일한 면으로 지적되는 점은 '성적인(sexual)' 관능미와 부드러운 곡선에 의한 이미지의 연상에 있다. 물론 이것이 '남성'의 시각에 의한 면이 일견 있긴 하지만 곡선에 의한 아름다움과 관능미는 매우 닮은 점이 많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판단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두 객체는 서로 다른 이미지를 갖고 있다.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남성의 물리적 힘에 비해 약하고 사회적으로는 순종적인 이미지를 주는 반면에 '얼룩말' 혹은 '말'은 '반항'과 '일탈'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얼룩말'의 튼실한 근육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힘을 지녔고 '말'의 긴 주둥이와 이빨은 사나운 기세로 어느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으려는 야만성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처럼 '여성'과 '얼룩말' 혹은 '말'은 서로 동일한 이미지를 갖고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모습이 하나의 동일체로 보여주는 데서 작가의 작품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김지희_Desperate House Wive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마블링_72x130cm_2007



김지희_Happy Together_판넬에 아크릴채색, 마블링_73x103cm_2007



김지희_난 너의 여왕이 될테야 !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x84cm_2007


작품에 나타난 '그녀'는 '얼룩말 얼굴'의 이미지를 차용함으로, 보이지 않는 '금기'의 굴레에 대해 거침없이 '일탈'을 감행한다. 가끔은 '음탕'한 생각과 '불순한 생각'을 하며 순종보다는 반항을, 일상보다는 일탈을 당연시한다. 그녀는 명화 속에 등장하는 품위 있고 도도한 여성이 되어 보기도 하고, 자유로운 낙원에서 뛰놀기도 한다. 그녀는 앙큼하고도 음흉한 성적(sexual)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그녀는 욕망을 있는 그대로 발산한다. 곧 '얼룩말의 얼굴'을 가진 '여성'은 현실의 세계와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또 다른 자신을 상징하는 것이다.




김지희_네가 누구든 난 상관 없어_판넬에 아크릴채색, 마블링_60x84cm_2007



김지희_욕망의 샘을 가진 갈색 눈의 그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62x84cm_2007



김지희_나는 네가 터키탕에서 한일을 알고있다_종이에 펜, 연필_148x210cm_2005


단순하게 처리된 형태와 원색적인 색은 만화적인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작가가 꿈꾸는 또 다른 세계로 빠져들게 하고 즐거운 상상으로서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또한 이러한 '일탈'과 '반항'은 전혀 외설적이지 않으며 광폭한 분노의 그것도 아니기에 거부감 없이 '그녀'의 또 '다른 세계'로의 상상에 동참할 수 있는 즐거움을 준다. 우리시대에 누구나 한번쯤 아니 매번 감행할 수 있는 '일탈'과 '반항'이기에 충분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 구자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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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 레르마 개인展

José Lerma solo Exhibition

2007_0525 ▶ 2007_061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연필, 아크릴채색, 유채_259.7×198.8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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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25_금요일_6:00pm




아라리오 서울
서울 종로구 소격동 149-2번지
Tel. 02_723_6190
www.arariogallery.com






아라리오 서울에서는 스페인 출생의 페인터인 호세 레르마(Jos Lerma) 의 개인전을 개최한다. 호세 레르마는 1971년 스페인 세비야에서 태어나 푸에르토리코에서 성장하였고 이후 미국으로 이주해 정치학과 법학, 그리고 미술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성장 배경은 그의 작품에 라틴, 유럽, 미국의 문화의 영향이 고스란히 녹아져 있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추상성, 목탄, 유화, 등 다양한 재료의 사용, 만화 같은 이미지, 텍스트, 등의 다양한 요소가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03.2×172.7cm_200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82.9×152.4cm_200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228.6×167.6cm_200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82.9×152.4cm_2007


무엇보다 그의 작품의 두드러지는 특징은 물감의 속성을 증명이라도 하듯, 여러 겹의 물감 덩어리와 거친 붓질로 캔버스를 채워나간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재현의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인물들은 신체의 명확한 구분 없이 이루어져 있으며 눈, 코, 입은 여러 겹의 물감으로 덩어리째 표현되고 있다. 사실 호세 레르마의 페인팅은 1950~60년대 미국 미술계를 풍미했던 액션 페인팅의 영향이 담겨있다. 실제로 추상표현주의의 강한 브러시 스트로크에 몰두했던 그는 추상표현주의의 표현 방식인 강한 몸동작이 그것을 매우 공격적인 것으로 오해 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러한 붓질이 극단적으로 느리고 조용한 회화기법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겼고 이를 자신의 작업에 반영하는데 실제 그의 작품에서의 붓질은 매우 통제되어 있다. 그의 회화에 대한 실험은 물감의 거친 마티에르의 대담함 그리고 반추상의 이미지가 유발하는 정서적이고 포근함 사이에서 발생하는 부드러운 긴장감이 캔버스 표면에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는 그 구체적인 형상을 알아볼 수는 없지만 매우 현대적인 인물화를 보는듯한 느낌이 든다.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182.9×152.4cm_200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50.8×40.6cm_2007



José Lerma_Untitled_캔버스에 아크릴채색, 유채_50.8×40.6cm_2007


2002년 후반에 호세 레르마는 회화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설치, 비디오, 사진 작업을 과감히 포기하였고 이후 그는 2005년 뉴욕으로 이주하여 벨기에와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2006년 뉴욕의 Andrea Rosen Gallery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다양한 실험을 통해 드라마와 아이러니, 멜랑콜리, 부조리 사이를 끊임없이 부유하고 있는 호세 레르마의 작품을 한국에서의 첫 개인전인 아라리오 서울 전시를 통해 경험하시길 바란다. ■ 아라리오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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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령 회화展

2007_0526 ▶ 2007_0601



김미령_진실의 이름 김미령은 문제아中_캔버스에 유채_72.7×60.6cm_2006




초대일시_2007_0526_토요일_05:00pm

2007 갤러리 NV 공모선정展




갤러리 NV
서울 종로구 인사동 186번지 3층
Tel. 02_736_8802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고 현실과 과거의 끊어진 연결고리를 찾아내고자 함이 내 작업의 중요한 쟁점이다. 나의 존재의 배경에 있어 절대 분리 시킬 수 없는 요소는 가족인데 그런 의미에서 가족도는 나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을 밝혀주는 지도를 그려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김미령




김미령_돌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6



김미령_지금 이 순간의 현실_캔버스에 유채_178.8×145.5cm_2006



김미령_나는 큰어미가 아닙니다. 나는 작은어미도 아닙니다. 나는 OOO입니다._캔버스에 유채_90.9×72.7cm_2006



김미령_생각없이 살고 싶습니다. 감정없이 살고 싶습니다. 걱정없이 살고 싶습니다. _캔버스에 유채_130.3×251.6cm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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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

정인숙 사진展

2007_0530 ▶ 2007_0605



정인숙_1997제주성산_흑백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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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530_수요일_06:00pm




인사아트센터 2층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정인숙 -풍경의 의식 ●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세잔
아름다움이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들지 못한다. 다만 자연이 아름다움을 낳고 인간은 그 아름다움에 가닿을 뿐이다. 자연에 이미 들어와 박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이란 결코 인간에 속해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으로 간다. 그곳에 인간에게 부재한 절대적인 미가,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현기증 나는 신비가 피어난다. 그러나 사실 그 아름다움조차 인간의 몫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발견하고자 하지만 자연은 결코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얼핏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항상 살아있고 약동하며 수시로 변화한다. 우리들 시선이 눈을 주는 대로 자연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정될 수 없고 정지 시킬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매력이다. 그것은 영원히 포착되기를 거부하고 지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한다. 사진은 감각을 끌어 모으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연에 도달하려한다.




정인숙_1999경기도양수리_흑백인화


정인숙은 자신의 작업실 주변인 양평과 그 주변, 혹은 이곳저곳을 여행하고 소요하고 그렇게 떠돌다가 문득 만난 이 땅의 자연을 찍었다. 너무 아름답고 황홀하기에 찍었다. 찍고 또 찍다 보니 자연은 거대한 텍스트였다. 자연의 이치가 눈에 들어오고 식물의 생애와 농사짓고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애가 겹치고 생태와 환경문제 등 이런 저런 상념들이 어지러이 선회한다. 1995년부터 지금까지 그렇게 남한 전역을 다니면서 눈에 보이는 것들을 촬영한 것이 지금 우리가 보는 이 사진이다. 경기도 양평과 남한강, 북한강, 인천 백령도, 강원도 정선, 홍천, 인제, 고성, 평창, 삼척, 양양, 충남 서천, 보령, 금간, 홍성, 새만금 갯벌, 전북 무주, 전남 구례, 광양, 소흑산도, 경남 함양, 경북 영덕, 섬진강, 제주 협제와 한림 등이 작가가 찍은 장소다. 특정 지역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발 닿는 대로, 머무는 대로 촬영했다. 그러나 사진 속에는 그 지명과 관련된 어떠한 시각적 정보도 없다. 특정 장소를 표상하는 사진이 아니라 그 장소에서 흔하게 접하는 자연의 모습이다. 우리 산천에서 흔히 보는 그런 비근하고 일상적인 장면이다. 풍경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풍경적인 것이 별도로 자리하는 게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그럴듯한 경관을 찾거나 관습적인 풍경의 프레임을 반복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 풍경은 검은 색조의 무한한 계조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받으며 뒤척이고 일렁인다. 그러나 낭만적이거나 숭고하지 않다. 관념적이거나 개념적이지도 않다. 솔직하고 소박하다. 바로 지척에서 건져 올린 시선에 의해 그것은 무엇보다도 당당하다. 개념에 따른 자연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이전의 자연대상을 낚아챈다. ‘사유에 따른 판단의 그물에 걸려들기 전의 생생한 자연, 인간의 사유가 폭력을 가하기 전의 그 날것으로서의 자연’이다.




정인숙_2000경기도양평남한강_흑백인화


화면 가득 대상이 가득 차지하고 있다. 수평으로 자리한 대지의 신체에 육박해 들어간 시선이다. 바닥을 훑고 나간 궤적과 시간이 느껴진다. 이 시선은 무심하게 수락하는 자연의 너그러움을 보여준다. 그것은 또한 오랜 보행과 소요의 길고 착실한 이동의 경과에 따른 시선이다. 원근적 시선이 아니라 대지의 시선, 이동의 시선이다. 그로인해 사진은 생성과 소멸의 시간을 아늑하게 풀어놓는다. 얼핏 동양의 산수화를 보는 듯도 하다. 알다시피 동. 서양의 공간구도의 근본적 차이는 사물을 보는 눈의 위치를 어디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 눈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가시적 공간을 구성한다.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 혼융상태에 있다. 자연의 형태란 다만 고정된,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특질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 동양인들이 깨달은 공간, 세계였다. 서구인들처럼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원근법에 의해 프레임 안으로 걸려들거나 카메라 뷰파인더 속의 사각형 속에 갇힌 이미지일 뿐이다.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 부터(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 (주체로서의)실체 또한 사상되는 것이 그래서 동양의 그림이다.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인 셈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결국 그 응시 법은 다원적 시점이고, 움직이는 시점이 된다. 아울러 복판에 내재한 시점이다. 시점을 풍경의 복판으로 옮겨가는 것 즉, 그림 안에서 움직이는 관점인 것이다. 바로 정인숙의 사진에서 보는 그런 시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존의 시선’이다.




정인숙_2000새만금_흑백인화


별반 특이하거나 유난스럽지 않아 보이는 대상이지만 빛을 받아 스멀거리면서 일어서는 자연은 신비스럽고 황홀하다. 빛이 비로소 자연을 자연이게 한다. 작가는 그 빛에 마냥 매료되었다. 빛은 자연의 표면을 편애한다. 작가 또한 그 편애한 빛을 추종한다. 그러면서도 표면 아래 은폐된 심층, 내부가 그 빛과 함께 떠오르기를 원한다. 황홀의 기억이 사진으로 가 멈췄다. 땅과 풀, 나무와 바위, 그리고 흐르는 물과 대기가 온통 빛으로 인해 부감된다. 촉각적인 사진이다. 작가는 저 자연의 미세한 율동, 리듬, 호흡, 그리고 모락거리는 기운, 비늘처럼 반짝이고 뒤척이는 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을 보는 이에게 감각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작가는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풍경의 의식을 가지고 풍경에 대해 발설한다. 풍경 스스로가 말하게 한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도저히 가늠하기 어려운 시간과 역사가 자연에 내장되어 있다. 단단한 질료와 희박한 질료 사이를 오가며 자연은 인간의 언어로 형언할 수 없는 색들을 시시각각 발산하고 있다. 이 싱싱하고 파득 거리며 날것으로서 뒤척이는 자연의 몸, 물 자체가 손에 감촉될 것 같다. 정인숙의 사진은 감각덩어리로서의 자연, 그 빛을 잡아 놓는다. 사진이 결국 빛이라지만 빛을 이렇게 아늑하고 따스하고, 차갑고 예리하면서도 다채롭게 보여주는 사진은 드물다. 인간의 언어로 포착되기를 거부하는 자연의 색과 빛은 그저 희희낙락할 뿐이다. 작가의 눈과 마음도 그 흐름에 기생한다.




정인숙_2001경기도양평북한강_흑백인화


이 풍경은 한국인의 삶이 터전이고 그들의 생과 사가 온전히 하나로 묶인 공간이다. 이곳에서 농사짓고 생을 영위하다 그 땅 어딘가에서 조용히 썩어갔을 수많은 목숨들은 알 수 없지만 분명 그 자리에 나무와 풀과 꽃, 돌과 물은 변함없이 피고 지고 흐르다가 머문다. 땅은 그 안에 모든 시간의 기억과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어디선가 발원한 물줄기가 지표의 변화를 일으키고 자국을 드러낸다. 작가는 흙바닥에서, 나무와 풀과 꽃 그리고 자연 대상 모두에서 엄청난 이미지의 발화를, 몽상을 자극하는 자취를 듣고 만난다. 이 사진 속 자연에는 사람의 그늘이나 흔적이 부재하다. 모든 문명의 상징들은 지워져있다. 오직 나무와 풀과 물, 그리고 바람과 햇살만이 가득하다. 일렁이고 흐르고 스치면서 시각과 청각에 잠시 머물다가 이내 또 다른 감각을 자극하며 산개한다. 그 사이 어딘가에 작가의 시선과 렌즈가 슬그머니 들어갔다 나왔다. 그 결과 한 장의 사진이 문득 알처럼 빠져나왔다. 보이는 자연과 보는 자, 느끼는 자 속의 자연이 한 몸으로 결합되는 데서 사진의 삶이 성립한다.




정인숙_2001금강하구_흑백인화


대부분 땅과 물이 있는 풍경이다. 바닥에 붙어 다닌 시선에 의해 포착된 대지는 흙의 질료 성을 드러내거나 풀에 가득 덮여있거나 물에 잠기거나 물이 스며들어있는 모습이다. 정인숙의 사진에서 유독 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다와 강, 논 그리고 땅에 스민 물의 자취들이다. 땅은 늘 물과 함께 자리한다. 물의 경계가 땅이고 땅의 변방이 물이다. 작가는 그 접점에 주목한다. 강을 건너지 못하는 땅과 땅을 덮지 못하는 물들이 경계를 만들고 공간을 구획하고 그 어딘가에 인간들의 삶의 자리가 부려진다. 동양에서 이 물은 모든 사유와 철학의 근간을 제공했다. 농경문화와 주어진 자연조건 속에서 그 같은 인식이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형태의 다양성과 이미지를 생성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갖고 있는 물은 자연이 이치뿐만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는 일반적인 우주 원리들을 개념화하는 주요한 모델을 제공했던 것이다. 덧붙여 물에서 자양분을 제공받는 식물은 특별히 인간을 포함한 생물의 본성을 이해하는 뿌리 은유로서 사용되었다. 그래서인지 물을 그린 그림, 물이 들어간 그림이 동양 전통회화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은 우주자연의 이치를 함축하고 있는 존재며 인간사유와 행동의 근거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정인숙은 논과 대지에 들어오고 나가는 물의 자취를 담았다. 촉촉한 물기가 대지에 스며든다. 모들이 고개를 내민다. 물에 박힌 모, 생명체들이 물과 함께 대지에서 자라난다. 촘촘히 떠있는 수초들이 모습은 부표 같다. 직선으로 흐르는 물과 수직으로 자라는 풀들이 표표히 떠돈다. 물의 주름과 풀들의 신체가 마치 드로잉처럼 자리했다. 매력적인 드로잉이다. 잔잔한 물의 피부의 흐름에 총총히 떠있는 풀들은 부드럽고 유장하고 아늑하면서도 슬프다. 수면에 밀착시킨 사각의 프레임은 오로지 물의 신체와 주름, 촉각적인 동시에 물리적으로 밀려들어오는 시간성을 부드럽게 자극한다. 막막하다. 그러다가 시선은 다시 물가로 나간다. 전면에 물만 가득하다. 수면은 구름과 햇살, 하늘과 움직임에 의해 변화무쌍하다. 짙고 번들거리며 마냥 흔들린다. 수면에 솟은 가장 높은 물의 피부가 지렁이의 신체를 닮은 선을 만들고 떠간다. 물은 이렇듯 다변하다. 물가 저쪽으로 풀밭이 가득하다. 작가의 시선은 땅에서 물가로, 다시 바다로 몰려갔다가 이내 뭍으로, 개펄로 다시 풀 섶과 논바닥과 흙더미, 버려지고 섞어나가는 배추밭으로 움직이고 이동한다. 훑고나간다. ● 아울러 정인숙의 사진은 한국인의 공간, 한국의 자연에 대해 사유하게 한다.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산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탄생한다. 모든 공간은 그러니까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인 셈이다. 인간의 감각활동이 하나인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주어진 공간에 제약을 받고 그 공간에서 파생된 삶의 체험과 감각, 느낌의 결정체를 말한다. 아울러 예술은 역사적, 지리적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객관화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사진이미지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 볼 것인가가 모든 예술행위의 근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유일한 생의 조건이다. 우리는 모두 내 육체 앞에 놓여진 모든 것들을 일정한 조망, 퍼스펙티브 속에서 바라본다.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예술에서 보는 것이란 본다는 것의 여러 가지 의미에도 불구하고 직관을 의미한다. 이 직관은 지적 지식이 아니라 지각에 의해서 대상의 내부에 뚫고 들어가 대상이 가진 내성과 합일하는 공감이다. 일정한 조망의 거리, 퍼스펙티브를 확보했을 때 인간은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한다. 그런 거리감이 결국 공간, 풍경에 대한 하나의 사고일 것이다. ● 정인숙의 사진은 너무나 ‘사진적’이다. 한 장의사진에 담긴 자연풍경은 아름답고 고혹스럽다. 정직한 사진이다. 이런 사진은 작가의 인성과 마음에서 나온 것이고 소요의 결과이자 수없이 많은 작업 양과 프린트의 숙련에서 비로소 가능한 작업이다. 사진이 사진을 이길 수 없다. 풍경이 풍경을 넘어설 수 없듯이 말이다. 작가의 이 흑백사진은 모든 예술의 단순화의 원리를 새삼 일깨워준다. 흑백의 화면에서처럼 자연의 소리와 빛을 단순하게 듣고 보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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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경(Bordering North Korea)

이정 사진展

2007_0601 ▶ 2007_0629



이정_접경#2_디지털 프린트_102×127cm_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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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01_금요일_05:00pm




스페이스 바바
서울 강남구 신사동 514-1 5층(포토피아 5층)
Tel. 02_3442_0096




접경 ( 은둔의 왕국 또는 감춰진 코미디 ? ) ● 우리에게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은 어떤 존재일까? 북쪽에 존재하며 우리를 항상 위협하는 집단 이면서도 우리가 끌어안아야 하는 우리의 가족(특히 탈북자 들이나 이산가족에게는 더욱 절실할 것이다.) 쯤으로 여겨질까? 반공 이데올로기가 사회적으로 팽배하던 시절, 초등학교에 보이던 붉은 색의 반공 이라는 글씨는 어느새 멸공 이라는 구호로 바뀌어 있었고, 북쪽 사람들은 거대한 괴수나 뿔 달린 도깨비 정도로 느껴지던 시절이 있었다.




이정_접경#4_디지털 프린트_102×127cm_2006



이정_접경#7_디지털 프린트_102×127cm_2006


세월이 흘러 우린 서로 민족의 화합을 외치고 있고 남북 교류를 통해 민족 간의 화해를 시도하는 사이가 되었지만 그들이 괴수가 아니거나 뿔 달린 도깨비가 아닌 우리와 같은 민족 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보다 가난 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 말고는 그들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차단 되어있고 우린 그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티브이에서 하는 북한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프로 하나 정도를 접할 때 그들이 경직된 사회에 살고 있고 가난한 모습이지만 자존심을 지키며 살고 있구나 하는 정도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어쩌면 우린 그 이상의 어떠한 것을 알고 싶어 하지 않으며 그 존재를 막연히 멀게만 느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더욱이 우리가 아닌 외국의 경우라면 더욱 북한에 대해 아는 것도 또는 알 것도 없는 신비한 나라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인가 북쪽은 그들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나 국가적 신념 또는 지도자의 생각 등을 외부로 알리고 싶어 하고 외국인 들을 동원하여 그러한 개념을 담은 문장들을 영어로 번역하고 홍보한다.




이정_접경#8_디지털 프린트_102×127cm_2006



이정_접경#10_디지털 프린트_102×127cm_2005


거기에서 이정의 작업이 시작된다. 이정은 선전을 위한 문장들이 갖는 의미를 북쪽의 풍경과 결합시켜, 본다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보는 것이 믿는 것 이라는 신뢰는 이미 많은 부분에서 그 의미를 잃었다. 디지털의 등장은 사실 우리의 믿음에 많은 흠집을 내었지만 또 그것과는 다른 전략에 의해 이정의 작업들은 보는 것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린다. 사진이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하는 것이다. 사진은 그냥 사진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우리에게 다시 되묻는다.




이정_클럽겐키#2_디지털 프린트_90×120cm_2002



이정_클럽겐키#5_디지털 프린트_90×120cm_2002


그의 사진이 취하는 어떤 상황에 대한 성실하고 착실한 재현 방식은 오히려 우리가 갖는 부족한 정보로 인해 대상을 왜곡시키고 신비화시킨다. 이러한 것은 서구인들이 동양 여성을 보는 시선에서도 마찬가지 인데 그들은 동양 여성에 대한 환상이 단지 그녀들에 대한 왜곡된 정보를 통해 만들어진 시선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지만 작가는 그것을 간파하고 의문을 던진다. 모든 동양 여성이 그러할까? 언젠가 신문을 통해 본 기사가 생각난다. 미국의 지하철에서 한 미국청년이 동양 젊은이를 뒤에서 밀어 기차에 치는 사고를 당하게 만들었다. 이유를 물으니 동양 사람은 이 소룡처럼 무술을 잘해 그 상황에서 살아날 것이라는 그릇된 환상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그릇된 생각과 왜곡된 정보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즐비하다. 이번 이정의 작업들은 그러한 사고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들이 정말 맞는다고 생각하니? 라고. 그것들이 어디서부터 온 것이며 왜 형성된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한다. 그리고 사진은 어느새 허구를 만들어 내고 왜곡시키는 도구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적어도 그녀가 보여주는 아름다운 북한 풍경들과 선전 문구들을 통해서 우리는 사진이라는 정직한 매체가 우리를 어떻게 우롱하는가와 북한이 어떤 곳 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아주 조용히 아름답게 보여 지는 그 사진들은 결국은 우리의 머리를 뒤흔드는 혼란의 사진이 된다. 독재와 폭압의 정권이라고 떠드는 전략보다는 그래 너희들은 마지막 지상낙원이야 라고 믿어주는 전략은 우리에게 더 많은 생각을 하게하고 그것들을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 방법은 직접적 방법보다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뒤흔들어 놓지 않을까? ■ 스페이스바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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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dy resemblance

김일용 조각展

2007_0601 ▶ 2007_0626



김일용_Body resemblance_합성수지_32×60×59.5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1109b | 김일용 조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01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_11:00am~7:00pm_월요일 휴무




더 갤러리
서울 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367-13 W&H빌딩 B1
Tel. 02_3142_5558
www.gallerythe.com






극적인(劇的) 몸 ● 김일용이 다루고 있는 인체는 긴장감 가득하다. 거울을 통하지 않고서는 직면할 수 없는 신체를 조각내어 평면처럼 보여준다. 펼쳐진 육체는 작위적으로 잘라져 있고, 사각으로 잘라진 피부조직으로 인해 단순화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각형이 주는 단순함은 그리 길지 않다. 펼쳐진 평면적인 몸에서 극적으로 살아 숨쉬는 듯한 숨구멍과 털, 그리고 살결의 적나라함은 보유하고 있던 내 몸이 아닌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의 몸을 목격하고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더구나 잘라낸 지점이 주는 극적인 느낌은 더욱 팽팽한 긴장감을 조성한다. 민감한 신체부위인 유두와 배꼽사이의 아스라함이 그러하며, 생식기 근처 쉽사리 드러나지 않은 체모의 노출이 또한 너무도 극적이다. 작가의 연출은 여기가 끝이 아니다. 신체를 펼쳐서 예리한 시각적 판단으로 잘라내는 것을 넘어, 작업이라는 행위가 지나고 난 후, 관찰하는 우리의 시선을 잡아내는 것까지 다달아야 김일용식 연출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것은 또한 인위적으로 흉내 내어 만들어진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 위에 빠른 손놀림으로 캐스팅된, 김일용이 명명한 라이프 캐스팅의 힘이기도 하다.




김일용_Body resemblance_합성수지_30×10×41cm_2007


구조적인 몸 ● 생명체의 種을 나눌 때 머리, 몸통, 팔, 다리의 유무와 붙어 있는 방법을 그 기준으로 삼는다. 김일용이 캐스팅하여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해석을 만들어 낼 수 있지만 나는 그저 人種 구조로서의 몸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그는 말한다. ● 사람의 생태를 얼굴같이 일반적인 것만으로 얘기할 필요는 없다. 세포랄까 신경이랄까 하나의 근거, 신체의 근거가 오히려 더 사람일수도 있다.…‘사람’이라는 명사보다도 ‘신체’, 그야말로 Body. 감정이 배재된 몸 자체가 더 사람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몸이라는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며, 내가 생식기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생명의 근거와 연장의 통로로 보기 때문이다. 그게 더 소중하다. 생명의 연장이 더 소중하다._김일용 ● 적나라한 생식기가 드러난 작품의 발표가 힘든 현실에서 그의 작업실에는 적나라한 그것의 라이프 캐스팅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그가 그것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생산, 그 생산으로 이어지는 인류의 유지다. 그것은 정신성 이전의 세포의 유전. 유전자의 기록인 셈이다.




김일용_Body resemblance_합성수지_30×10×41cm_2007


몸인 몸 ● 보여지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배운 학습에 의해 그럴싸한 의식적 사유로 되새김질하기 좋아하는 識者들의 습성은 오히려 진정한 부분을 놓치게 한다. 몸. 김일용 그가 말하는 몸 자체는 더 이상 어떠한 미사어구나 새로운 해석을 요하지 않는다. 그것 자체가 生이며, 天이다. 즉 우주이자 생명의 근원이다. 바라보자. 바로보자. 김일용이 제시하는 몸뚱이를 새로운 시선과 억지스런 해석을 통한 곡해로 보지 말고 그저 보자. 몸은 그 어떤 언어보다 평등한 세계 공용어이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제 일의 구조이며, 그 구조가 있어야만 비로소 마음도 담기고, 정신도, 인류 자체가 영원으로 유지되는 것이다. 게다가 김일용은 몸 세포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그것들이 형성해 놓은 구조물, 즉 몸인 몸을 목격한다. 몸이 가지고 있는 생명성, 정신과 대응시키며 끊임없이 폄하, 혹은 하위구조로 분류되었던 몸에 대한 진정한 가치부여, 그것이 김일용이 몸을 대하는 지점이다. ● 김일용의 몸. 우리가 애써 모른 척하는 몸. 자꾸만 불필요한 해석이 따라 붙는 몸. 그러지 말자. 김일용이 보여주려는 것은 재인식된, 재해석된 몸이 아니라 몸인 몸! 바로 그 자체다.
■ 김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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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정선 회화展

2007_0606 ▶ 2007_0612



최정선_봄소녀_장지순지에 담채_51D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인사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06_수요일_05:00pm




인사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Tel. 02_736_1020
www.ganaartgallery.com






근대기 동양화단으로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많은 작가들이 일상을 테마로 다루고 있다. 자신의 삶의 풍경이자 타인과 공유하는 영역인 일상은 구체적인 생활과 감정, 정서의 기반이자 모든 사유가 뿌리내리는 현실적 토대이다. 더욱이 미술이 특정한 형식적 논리나 거대 담론에서 벗어나면서부터 더욱 자전적 삶과 일상을 다각도로 재현하려는 시도 및 고현학적 탐사들이 두드러졌다.




최정선_honeybee-낮잠_장지에 담채, 깃털_31×37cm_2007



최정선_honeybee2_장지에 담채, pompom_47×73cm_2007


최정선이 다루는 일상은 가족구성원이 풍경을 이루는 그런 삶의 장면이다. 동시에 자신의 자의식과 가정, 가족구성원과의 관계에 대한 서술이기도 하다. 사적 생활의 중심인 가족, 가정이란 공간에서 겪는 삶의 체험과 느낌을 건져 올려 그린 이 그림은 경험과 환영,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전개된다. 구체적인 일상의 체험과 그로인해 빚어 나오는 여러 상념의 편린들이 실제와 몽상의 뒤섞인 차원에서 재현된다. 그것은 일상의 소묘이자 일상에 드리운 여러 감정의 교차에 대한 시각화이고 독백이다. 아이들의 엄마로서, 주부로서 겪는 생활이 중심이 된 이번 그림은 그러니까 일종의 생활도이자 가족그림의 전형으로 다가온다. 일관되게 가족을 다루어 온 작가는 가족구성원의 기록적 재현이나 정물적 묘사에 머물지 않고 가족과의 삶 그리고 일상에서 수시로 번져 나오는 여러 감정과 단상들을 형상화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작가는 자신의 숨가쁘고 고단한 일상에 천착하면서 그 일상을 전면화 시켜 그림의 대상으로 전환시켜내고 있다. 그것은 자신의 생활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작가에게 일상의 대부분은 가정생활, 아이들의 양육이며 그 어느 자투리 시간에 숨을 고르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 여기서 그림은 무엇보다도 일상의 경계에서 피어나며 그림 그리는 시간과 순간이 일상에 잠식된 자신의 시간과 삶에 유일한 위안과 그늘을 드리운다. 일상에 대한 반성적 시선이 투명하게 반짝인다. 작가의 그림은 그런 의미에서 자기 생애 위에 드리운 그늘이 되고 상처받고 쓸쓸한 마음에 치유의 손길이 되고 ‘우울한 생애를 위한 도금’으로서 존재하고자 한다. 바로 그런 이유로서의 그리기가 자존하다. 동시에 일상의 순간들을 따뜻한 분위기로 그려냄으로써 인간과 삶에 대한 긍정적인 기운을 고양하고자 하는 의도도 숨기지 않는다.




최정선_지인의 여름_장지순지에 담채_25×40cm_2007



최정선_구름잠옷_장지에 담채_91×116.7cm_2007


모필 특유의 선 맛과 수묵의 은은한 번짐, 약간의 담채로 물든 색상, 현대사회를 상징하는 키치와 팬시한 오브제들의 연출은 동양화의 전형적 특성과 현대의 일상과 문화를 상징하는 두 축이 결합된 그림이다. 장지에 수묵담채기법으로 그려진 인물들은 무엇보다도 맑고 담백하다. 작가가 바라보고 이해하는 인간/가족에 대한 애정이 그 기법에 힘입어 온기처럼 번져 나온다. 모필의 예민한 선으로 포착된 인물의 실루엣은 간결함이 주는 섬세함을 감각적으로 운치 있게 그려내고 있고 상대적으로 시원하게 자리한 여백과 가벼운 재료로 이루어진 오브제들의 콜라주기법이 맞물려서 화면을 다층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이 다층은 다양한 소리(내용)와 연결되고 다기한 감정, 사고의 유출과도 관계 맺는다. 단일한 시공간이 존재하는 화면이 아니라 여러 겹의 시공간, 상황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의식의 흐름, 감정의 유동을 그리기 위한 배려이기도 하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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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활용주식회사 Recycling Inc.

2007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주제기획展

2007_0608 ▶ 2007_0725 / 월요일 휴관



고원_시시하다 La dolce vita_시, 액자_설치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08_금요일_05:00pm

참여작가_고원_박용석_Sasa[44]_사성비_신현중_유영호_이미경_이윤경_정재철_홍경택

관람시간_11:00am ~ 08:00pm
관람료_1,000원 (노인 및 장애인 무료) / 교육프로그램 별도
전시설명_전시기간 중 주중 오후 2시, 4시 / 주말 오후 2시, 4시, 6시





아르코미술관 전관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2
art.arko.or.kr






예년보다 여름이 일찍 다가온 올 6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위원장 김병익) 아르코미술관에서는 재활용을 주제로 한 전시와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 아르코미술관은 주제기획전을 통해 매년 여러 작가들과 함께 현재 제기되고 있는 이슈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고 동시에 그 해결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 “재활용 주식회사”전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재활용의 순환, 흐름을 이야기하는 전시이다. 일상과 예술이 서로를 재활용함으로써 야기하는 무형의 가치를 판매하는 회사로서, 관객이 전시를 관람 후, 일상으로 돌아갔을 때, 작가의 작품과 상호 교류한 경험이 유머와 아이디어가 가득 찬 일상으로 재유통 되도록 하고자 하는 전시이다. 그래서 초대작가들(고원, 박용석, Sasa[44], 사성비, 신현중, 유영호, 이미경, 이윤경, 정재철, 홍경택)과 함께 일상과 예술의 경계에 대해 지금의 조형어휘로, 다시 물음을 제기하며 “선택, 수집, 소유, 소비, 재생산”의 과정에서 나오는 현상들의 다양한 경로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박용석_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_전구_설치_2007


재활용 주식회사의 “재활용” 의미와 방향 ● 경제성장에 모든 초점을 맞춰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던 우리의 20세기는 경제적 효율성과 획일성을 기준으로 모든 것이 존재하고 배열되었다. 소위 문화와 감성의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21세기는 효율성 너머로 상상력을 통한 개방성과 유희성, 임의성으로 가득한 다원성을 수용하고자 한다. 다원적 태도는 결국 배타적인 자세를 거부하자는 것인데, 미술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만이 아니라, 작가들의 작업 안에서 이미 존재하는 주변의 여러 현상들이 발견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과거와 현재, 동양과 서양, 중심과 주변,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상호교류하고 재활용하면서 또 다른 가치들을 생산한다. ● 일반적으로 ‘재활용’은 용도 폐기되거나 파손된 사물들을 재가공하여 이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아르코미술관에 들어선 “재활용 주식회사”에서는 사물을 포함하여 인간의 사고와 행위 또한 재활용되는 과정을 거친다는 부분도 끌어 들인다. 우리의 삶이 지속되기 위해 일어난다고 볼 수 있는 끊임없는 사회적 세포분열과 그 연쇄작용의 한 고리로서 ‘재활용’을 간주한다. “재활용 주식회사”의 (재)생산 라인에 위치하고 있는 작가들은 관객에게 감상의 행위가 삶 속에서 재활용되어지도록 유도하는 것을 시작으로(유영호), 자신에게 배달된 기존의 우편엽서를 다시 활용하여 또 다른 누군가(관객)와의 소통의 통로를 만들거나(신현중), 편집증적 방법으로 하나의 소재와 관련된 각종 과거 자료를 수집 (Sasa[44]), 실제로 폐기되거나 버려진 것들을 모아서 재조합시키는 방법(박용석, 정재철, 홍경택), 관객의 움직임을 모아 기존의 음악에 오버랩시키는 작업(이윤경), 자신의 실제 거실을 통째로 미술관의 오브제로 전환하는 방법(이미경), 디지털 환경에서 수집한 것을 아날로그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사성비)으로 섞거나 엮어서 재생산을 이뤄낸다.




Sasa[44]_위대한 탄생_혼합재료_387x1162cm_2007


“재활용 주식회사”전 - 엮음과 섞음의 공간 구성 ● “재활용 주식회사”는 일상에서 수집한 것들을 가지고 재활용하는데 있어 크게 두 가지의 방법이 제시하게 된다. 엮음(재활용 제1라인)과 섞음(재활용 제2라인)이 그것인데, 이 둘을 중심축으로 하여 기존의 것들이 원재료화되어 또 다른 구성으로 진행된다. 재활용 제1라인에서는 작가가 직접 발로 뛰어서 수집한 것들을 과거에서 현재로, 지역에서 지역으로, 누군가에게서 누군가에게로 이동시키면서 현상들이 엮어지는 재활용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재활용 제2라인에서는 수집한 것들을 원래의 제작방식과 달리하거나, 다른 종류의 것을 섞어서 새롭게 탄생시킨다.




사성비_B브랜드-아르코지점_쇼윈도 설치_2007


전시공간 연출 및 작가 작품 설명 ● 미술관 외부 ● 관객은 아르코미술관 매표소(유영호)에서 기존의 티켓형식의 일회용 종이 대신 속이 빈 상자와 비닐백을 입장권으로 받는다. 관객은 재활용 주식회사의 생산 라인들을 이동하는 동안, 신체의 감각을 최대한으로 열고 확장시켜 반응하면서 얻은 영감을 빈 상자에 넣어서 일상에 순환시킨다. ● 외부공간에서 제1전시실 - 재활용 제1라인(엮음) - 으로 들어가는 통로에는 사람이 한명 들어갈 정도 크기의 빨간색 우편 부스가 3개 놓여 있다. 빨간색 우편 부스에는 신현중이 세계 각지를 돌면서 수집한 코카콜라 캔과 지난 전시에서 관객들이 상상과 염원이 담긴 엽서들이 담겨 있다. 미술관 안쪽에는 우체국 사무소가 설치되어 있는데, 관객들은 이곳에서 받은 우편엽서에 각자의 소망을 적어 작가에게 보낸다. 작가는 이 우편엽서에 일일이 답을 해 다시 관객에게 돌려준다.




신현중_신씨 우체국 Shin's Office_재활용 우체국 설치_2007


전시공간 연출 및 작가 작품 설명 ● 제1전시실 ● 재활용 제1라인으로 들어서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긴 복도공간에는 정재철이 오랜 기간 수집한 액자들이 공간을 따라 하나의 띠를 형성하고 있다. 액자 안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접 실크로드를 이동과 그 과정에서 전달한 폐현수막의 활용을 보여준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는 우리나라에서 버려진 폐현수막을 수집, 세탁, 포장하여 중국, 인도 파키스탄, 네팔의 지역민에게 전달하고 그들의 일상에서 그것이 활용되는 모습을 다시 수집한다. 실크로드 프로젝트를 통한 폐현수막의 이동 경로를 보면서 하나의 사물이 다른 문화, 제도의 틀 안에서 어떻게 유통되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 전시 공간에 만들어진 좁고 어두운 통로를 지나면 박용석이 철거지역을 돌면서 수집한 400여개의 전구들이 바닥에 틈 없이 촘촘히 깔려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 전구들이 빛을 내며 환하게 비추는 공간은 존재하나 ‘사라지는’ 것들에 대해 ‘기념’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형광등의 수명이 다하여 꺼짐으로써 ‘사라지는’ 것에 의해 변화되는 공간을 체험케 한다. 또한 박용석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보는 TV의 채널을 돌리는 와중에 보이는 찍찍거리며 순간 발생하는 빈 공간을 포착하여 존재하지만 스쳐 지나거나 사라지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채널과 채널의 사이공간을 활용하여 ‘사’, ‘랑’, ‘합’, ‘니’, ‘다’라는 일생에서 하이라이트적인 단어를 소리로 입힘으로써 생명을 불어넣는다. ● 반대편에는 Sasa[44]가 국민가수 조용필을 작업의 시발점으로 삼아, 시대적 사회적 맥락을 작가 고유의 치밀한 조사와 편집증적 수집 방식을 통해 ‘조용필 아카이브’를 구축한다. 짙은 초록색으로 칠해진 벽면에는 최초로 조용필을 소재로 회화를 그린 작가 이동기의 조용필 인물화가 걸려있고, 이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조용필 아카이브’에서 선택된 조용필의 인상적인 이미지들이 배치된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법한 고전적인 수제 금장 액자 안에 넣어져 있는 이미지들은 우리 시대의 단면을 드러내는 묘한 힘을 발휘한다.




이윤경_스트링 리액션_피아노, 센서 설치_2007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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