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번째여행
김윤호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귀국보고展
2007_1128 ▶ 2007_1204

김윤호_다섯번째여행_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전시장면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아르코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8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1:00am ~ 08:00pm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미술관 제1전시실
서울 종로구 동숭동 1-130번지
Tel. 02_760_4602
art.arko.or.kr
2006-7 독일 쿤스틀러하우스 베타니엔 스튜디오 프로그램 ● 현대 시각예술작가에게 1년 간 독일 베를린 Kunstlerhaus Bethanien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가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작품 창작 공간 및 전시 기회 제공, 각국 작가들과의 상호 교류를 통해 세계 예술계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 젊고 실험적이며 혁신적인 각 국의 현대미술 작가들(독일 및 외국작가 25여명)에게 전용 작업공간(개별 스튜디오)을 제공하고 작업과정 개방을 통해 작가 상호간의 교류를 촉진하며 ● 참가작가들의 BE매거진 소개 및 전시회 개최 등 다양한 통로로 참가작가가 유럽 미술계에 집중 소개되는 기회를 부여하고 있다. ● 1975년 시작되어 지금까지 30개국 600명 이상의 작가가 참가(호주, 뉴질랜드, 네덜란드, 노르웨이, 포르투갈 등)하는 이 프로그램은 공동 후원자인 각 국의 정부나 재단의 후원에 의해 운영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2005년부터 후원자로 참여를 시작했다. ● 김윤호의 독일 베타니엔 스튜디오 프로그램 참가는 2006년 3월 15일부터 2007년 3월 14일까지 1년간이었다. ■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국제교류팀

김윤호_1,000대의 관광버스들 부분_c-print_90cm×130cm_2006~7
로드 무비 처럼 성찰 하는 김윤호의 로-테크 기행기 ● 뮌헨 ‘렌바흐 시립미술관Stadtische Galerie im Lenbach-Haus’에 내걸린 안드레아스 구르스키Adreas Gursky의 2007년 신작〈James Bond Island〉 연작 세 점은 팡아만(灣)Phang Nga Bay 위로 비현실적으로 부유하는 바위섬의 비경을 종심 깊게 초대형 포맷으로 옮겨왔다. 과연 그다운 상상력이었다. 나는 그 작업을 지켜보며, 소위 작품의 문맥을 따질 것조차 없이 잡티 하나 없는 압도적인 인화물의 위력을 새삼 체험했다. 또 수년 째 국내 사진계를 뒤흔든 뒤셀도르프산(産) 유형학적 사진의 광풍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요즘 이름깨나 올리는 국내 사진가치고 이런 혐의에서 자유로울 이가 적진 않으리라. 그러나 이중 대다수는 대한민국 고유의 유형성을 탐사하고 성찰하기보다, 초대형 포맷 속에 피사체의 중성적인 인상을 옮겨오는데 더 충실한 것 같다. 2002년 박건희 문화재단이 개설한 작가 지원 프로그램 ‘다음 작가상’의 1회 수상자 2인 가운데에 겨우 대학원을 막 졸업한 30대 초반의 김윤호가 포함되었다. 수상금으로 이듬해 발표한 〈지루한 풍경 The Tedious Landscape〉는 대한민국이라는 특정 사이트에만 관찰되는 유형들이 기록되었다. 지자체들이 유치하는 명칭 조차 민망한 갖가지 미인대회를 추적한 〈지루한 풍경 2〉는 사이즈에서는 못 미쳤지만, 그 안에 담긴 콘텐츠만은 지방 소도시들에서 발견되는 판에 박힌 지역주의의 유형성이 잘 열거되어 있었다. 〈지루한 풍경 1〉은 수도권을 벗어나 국도로 접어들 때 시야로 펼쳐지는 단조롭고 천편일률적인 간판 문화의 일단을 6*17 배율 파노라마로 담아, 그 기나긴 행렬을 고의적으로 지루하게 극대화시키고 유형화 시켰다. 한국적 유형주의였다. 그렇지만 유행과도 일치한 작가의 시도와 수상 경력이 국내 무대에서 등판할 기회가 되어주진 못했다. 가장 큰 요인은 2003년 ‘다음작가상’ 전시 직후, 외유(영국 골드 스미스 유학)을 떠나 공백을 만들어서다. 2006년 귀국 직후에는 다시 1년간 베를린 레지던시 참가 차 출국해 또 다른 공백이 생겼다. 이런 공백기와 더불어 등판 기회가 많이 주어지지 않은 또 다른 까닭은 그가 2002년 무렵 고국에서 단서를 찾은 비정상적 유형성에 대한 탐사가 이내 국제적인 보편성과 연결되었고, 그것이 다시 작가의 자신의 자의식에 질문을 던지면서, 고유한 스타일 개발보다는 콘텐츠에 대한 성찰에 전력을 다한 탓이 크다고 나는 본다. 김윤호가 국내에서 출품자로 이름을 올린 몇 안 되는 전시 중 ‘청년미술제’(서울시립미술관 2005)를 통해 2002년 수상 작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여전히 유형성을 채집 중이라는 연결 고리가 그나마 단서라면 단서랄까.

김윤호_예술가를 위한 시각표_c-print_120cm×190cm_2006
2004년 무렵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3분여의 영상물을 보면 초기작과의 격차가 훨씬 크다. 지난 8월 김학량이 기획한 〈이상한 나침반〉이 열린 창덕궁 앞 ‘갤러리 눈’의 벽면에 붙어 있던 초소형 모니터를 떠올려본다. 저해상도의 영상물 옆에 붙어있는 명표로 김윤호가 적혀있었지만, 나는 그만 동명이인이려니 하고 넘겨짚고 말았다. ‘귀국 보고전’ 성격을 지닌 이번 개인전의 출품 목록을 살피면 〈엽서 시리즈〉부터 모니터 작업 3편과 프로젝션 2편까지 그간의 고민과 변화를 포괄적으로 모아 놨다. 디스플레이 완결 이전에 집필된 글이니만큼, 나는 그저 예측만 할 뿐이지만, 아마도 시선을 사로잡을 작품은 〈죽기 전에before you die〉(2006-7)와 더불어, 긴 벽면 하나를 통째로 차지한 〈1,000대의 관광버스들A thousand different buses which I met in Berlin〉(2006-7)이 아닐까. 디아섹으로 번들거리는 표면 위로 제목이 말해주듯 무려 1천대의 버스를 파노라마 격자위에 조합했다. 때문에 〈1,000대의 관광버스들〉은 2002년 무렵 작가의 초심을 가시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작품이기도 하다. 대오를 정확히 정렬(整列)한 백색 ‘현대 관광’ 버스 19대의 각 잡힌 주차장면〈357-960〉(2002)의 모자이크 버전이며, 공사 현장 양철 가벽 위로 주저 없이 부착된 ‘제우스 관광 룸크럽’ 포스터의 기다란 시각 폭력〈420-030〉(2003) 혹은 ‘안전제일’을 소리 없이 외쳐대는 노란색 가드 〈425-323〉(2003)의 연장된 고민이다. 1천대의 버스 좌측면들의 집합은 전 세계에서 군집한 관광버스의 디자인을 수집하는 괴상한 취미로 치부될 수도 있겠다. 그저 길게 늘어진 색 점들의 장관으로 ‘감상’해도 무방하다(어쩌면 다수의 관객은 이 같은 관람 태도에 친숙해있다). 2002년 작가가 천착했던 문맥을 숙지한 관객이라면 좀 더 작품에 근접해서 관찰해보자. 대상과 배경이 대개는 상이한 1천개의 버스의 면면을 확인하고, 패키지 된 추억의 동형성이 버스들의 열거를 통해 반복된다는 인상에 다다를 것이다. 1천개의 직사각형 블록 안에 갇힌 1천대의 개별 버스들은 사이즈와 지면과의 높낮이를 포토샵 편집처리로 통일감을 높였고 덕분에 모자이크 스펙터클을 형상화한 반들반들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비록 외형은 상이하지만, 각 1천대의 버스가 실어온 탑승자들은 동형적인 추억꺼리를 필름과 메모리 카드에 담아갖고 귀국할 것이다. 〈엽서 시리즈〉는 현지에서 관광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명승지 장면이 담긴 엽서와, 엽서 안의 장면을 최대한 동일한 각도와 위치에서 재촬영한 작가의 인화물 동일한 사이즈로 병렬시키는 구성이다. 이 작품에 대한 첫인상은 이렇다. 비록 다른 시간대에 촬영되었다지만, 동일한 장소의 모습 치고는 상호 편차가 너무 크다는 것이다. 블루 스카이 안료같은 선명도를 유감없이 증폭시킨 엽서 속의 모든 창공과 또렷한 색감은 최적의 기상조건 선정, 기대치의 필름 카메라로 촬영되었기에 얻어진 결과다. 어쩌면 인쇄과정에서 인위적 색보정까지 가세했을 수도 있다. 반면 소위 작가의 채집 결과는 실망스럽다. 03년식 5백만 화소 디지털 카메라 Canon G5가 담아낸 명승지의 모습은 엽서가 재현하는 명승지의 기념비성을 훼손하고 정전화(canonization)된 가치마저 속수무책으로 만들었다. 임시주차 중인 노변의 차들은 노트르담 성당의 입구를 막아섰다, 철근과 가림막으로 스페인 광장의 명물은 위용이 반감되었다. 비수기에 촬영된 탓인지 그저 한산할 뿐인 광장의 잿빛 전경은 이곳이 과연 〈로마의 휴일〉의 낭만을 보조해준 장소가 맞나 싶을 정도다. 작가가 촬영한 가우디의 ‘성 가족 성당’은 보수 공사 때문에 첨탑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서 크레인이 성당의 위용을 제어한다. 엽서 속에서 일몰이 만들어낸 아스라한 역광을 뒤집어 쓴 동상과 희뿌연 에펠탑의 판타지도, 작가에 의해 심도 깊은 피사계로 을씨년스런 잿빛 배경에 던져진 동상과 에펠탑의 차가운 장면으로 제시된다. 마치 하나는 실험군 다른 하나는 대조군같다. 현지 조달된 관광 엽서는 모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이국에서의 추억을 윤색하고 다듬어 놓은 환상적 실험군이라면, 현지에서 실상을 작가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아온 것은 실험군의 허구를 폭로하는 대조군으로 기능한다. 대조군의 견제 속에 여지없이 환상이 산산조각 난다. 보편적 관람객의 두 손에는 이런 똑딱이 디카가 쥐어져 있을 터다.

김윤호_Brandenburger Tor(엽서시리즈 중)_diptych_각11cm×16cm_2006
전시 될 영상물의 공통점은, 영화에 방불케 하는 소요시간과 화질을 담보하는 동시대 미디어 작업들의 일반적 요건을 전부 포기했다는 점이다. 로-테크로 깎아내려도 할 말 없게 생겼다. 소요시간은 3분 내외로 엄격히 통제되었다. 입자는 산산이 부서져 때론 식별조차 곤란할 만큼 저화질이다. 잘 나가던 시절 미술을 때려친다고 선언한 직후 앤디 워홀이 메가폰을 잡고 쏟아낸 문제적 실험 영화 가운데, 〈Empire〉(1964)의 상영시간은 무려 8시간 5분이었다. 그것은 카메라를 고정시킨 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저녁 8:06부터 새벽 2:42까지 8시간여 촬영한 것이었다. 이걸 누가 볼까? 워홀의 제작 목적은 영화 제작의 고유성인 관람을 관객 스스로 자진 포기하게 만든 것이었을 게다. 소요시간은 비할 바 못되지만, 3분여로 제한된 김윤호의 영상물들의 지루함도 만만치 않다. 2002년 〈지루한 풍경〉의 파노라마를 모니터로 옮겨온 것 같다. 고정된 프레임 위로 변화래 봐야 보행자들의 이동과 플래시의 점멸이 전부이니, 이 역시 20초만 관람하면 전체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Empire〉와 원리가 흡사하다. 생태적 복원보다는 관광단지 조성과 정치적 홍보를 목적으로 복개된 청계천 변을 거니는 시민들의 방문(〈Pilgrims〉(2005), 〈A moonlit night〉(2005))이나, 지역 랜드 마크를 반영구적으로 저장하려고 무차별적으로 플래시를 눌러대는 템즈 강 건너의 비가시적인 인파 〈20times small & 6times big flashes〉(2004), 코펜하겐의 인어동상 앞에서 약 5초 내외로 포즈를 취하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중국 관광객의 판에 박은 모습〈A spot〉(2006)등이 이와 비슷한 원리를 답습한다. 이 모두의 소요시간은 상대적으로 짧으며, Canon G5에 내장된 동영상 저장기로 촬영된 만큼 저 화질일 수밖에 없다. 이 모두는 그 영상이 담고 있는 여행객들의 처지와 닮아있는데, 다음 행선지를 찾아 분주히 바쁜 걸음을 옮겨야 하는 그들의 심리 상태나 보행 속도와 흡사해서다.

김윤호_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거니?_lightbox_37.5cm×50cm_2006
〈Glitter〉(2006)는 특정 피사체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일군의 관광객을 원거리에서 촬영한 건데, 화면 정중앙에 흰색 티의 남성이 유독 눈에 띌 것이다. 그가 터트린 플래시가 눈을 사로잡는다. 그의 손에 들린 카메라의 플래시는 비상시 거울의 반사로 신호를 주고받던 구시대 커뮤니케이션을 연상시킨다. 수초간의 사진기 플래시 점멸은 관광객들(송신자)과 그들이 담아내려 했던 피사체(수신자)사이를 연결하는 임의적이고 일방적인 신호체계처럼 보인다. 설령 귀국 후 열어본 이미지는 현지에서 구매한 엽서의 그것과는 밀도와 질감에서 큰 차이를 보일 테지만, 개의치 않고 계속해서 송신을 날린다. 그게 여행객의 숙명이다. 때문에 관광객과 여행지 사이의 기형적 관계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가담이 주조한 측면이 크다. 〈Untitled〉(2004)는 보다 진지하다. 화면도 개중에서 가장 많이 깨졌고, 식별의 난이도가 가장 높으며 소요시간도 길다. 마치 요즘 출시되는 휴대폰마다 탑재된 폰카의 조악스러움 마저 느껴진다. 얼핏 CNN이 실황중계 하는 중동지역 공습 장면이 연상된다. 침침한 화면 상단에 좌에서 우로 이동하는 작은 불빛은 그래서 마치 폭격기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Untitled〉는 런던에서 매해 11월5일 개최되는 가이 폭스 나이트Guy Fawks Night의 폭죽 축제를 원거리에서 작가가 예의 자신의 G5로 담은 것이다. 1605년 신교와 제임스 1세를 제거하고 영국 국회의사당을 폭파하려던 가이 폭스와 로마 구교도의 책략을 기념할 목적으로 정례화 된 행사였다. 그러나 한시적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던 작가의 눈에 비친 이국땅의 불꽃놀이는 이벤트성 기념일의 본질이 그렇듯, 어떤 흥청망청의 그럴듯한 동기부여 같았을 것이다. 심야를 가르며 수직으로 치솟는 폭죽 세례는 우리가 악착같이 매달리는 추억의 일시성과 닮았다.

김윤호_죽기전에(전시장면)_dvd_projection_2006~7
축제 현장에 ‘나도 왔다 간다’는 낙서를 남기는 몰취향의 증거물이랄까. 그렇지만 폭죽장면은 제 3자의 눈에는 공습을 원거리에서 몰래 촬영한 국제보도단의 영상물과 헷갈리게 된다. 효과는 다르지만 〈죽기 전에〉의 1/24초 만에 벽면위로 투영되는 기념품들- 하도 빨리 지나가서 야간에 항공 촬영된 사진으로 오인할 수도 있다 -의 잔상조차 없는 조악한 기념물의 병렬 투사는, 당신이 죽기 전에 황급히 다녀가야 할 강박적 여행지 목록을 조악하게 제작된 미니어처로 ‘일시적으로’ 보여주고 암전시킨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도 〈Untitled〉와 동일 선상 위에 있다. 국도변을 따라 피사체를 추적했던 작가의 긴 여정은 로드 무비의 스틸 버전 같은데, 그의 지난한 노정은 지방도시를 거쳐, 서유럽, 청계천 같은 특정 지명을 순례하다가, 결국 작가의 자의식으로 귀환한다. 2004년 이전 작업이 주제의 명료성에 집중했다면, 2004년 이후 작업은 문제 의식은 견지하되, 접근법 전부를 수정해야만 읽어낼 수 있다. 이전에는 “이걸 봐라”하면서 디테일까지 선명하고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식이었다면, 귀국보고전이 보여주는 이후의 작품 동향은 집단 사기극의 지독한 전략과 그 본질을 취급한다는 점이 다르다. 이전 작업이 작가가 관찰자(혹은 관객)의 시점에서 천편일률적이고 지루한 풍경을 관객과 나란히 관람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작업은 군중들이 스스로 가담하는 키치적 태도를 원거리에서 지켜보고 그 결과물을 군중이 가담하는 방식대로 기록해서, 고스란히 그들의 면상에 던져놓는 것이다. 때문에 명색이 사진가지만, G5같은 2003년식 5백만화소를 택했다. 무리에서 이탈한 김윤호의 자의식은 매우 예민한 상태인데, 이것이 투영된 것이 이번 전시의 전체 그림에서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100% 포토샵 작업 〈예술가를 위한 시각표Timetable for artists〉(2006)다. 날림으로 급조된 시각 이미지(광고판, 미인선발대회, 기념엽서, 관광버스의 동형성)가 우리의 지각과 인식에 폭격을 가하는 국면을 줄기차게 관찰하던 중, 시각 이미지를 제조하는 바로 자신의 작가적 삶에 대한 성찰로 관심이 이전된 것이랄까.

김윤호_A spot_dvd 모니터,연속재생_2006
〈예술가를 위한 시각표〉는 비엔날레를 개최하는 각국 도시 지명을 열차 기착지에 일람했다. 행사의 비중에 따라 순위도 매기고 폰트의 크기도 차별화 했다. 광주(비엔날레)는 무려 3순위로 올려놓았는데, 그건 고국에서 개최되는 대표 비엔날레가 다른 비엔날레에 비해, 작가와 지리적 정서적 거리는 물론 참여 기회 면에서도 인접해있다고 셈을 한 것 같다. 출발시간, 경유지, 목적지가 선명히 기재된 테이블로 제시한 건 작가의 조급한 심정이 반영된 탓이 크다. 〈예술가를 위한 시각표〉는 여행마냥 꽉 짜인 일정과 경력을 관리하고 소화해야 생존이 보장되는 관료적 미술계와, 이런 폐단을 창작의 소재로 삼는 작가의 직무가 충돌한 지점이 도표라는 절충적인 형식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이런 자기분열적 혼란은 자의식이 강한 모든 예술가가 직면하는 고비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김윤호는 그가 탐사했던 초기 관심사가 형태를 변형해서 자신에게 질문으로 되돌아왔다는 점이다. 이런 고민의 일단이 금번 귀국보고전의 전모다. 수년 후 김윤호는 시각표에 표시된 몇 번 승강장 앞에 서있을까? ■ 반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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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xel Krause solo exhibition
악셀 크라우제 회화展
2007_1127 ▶ 2007_1218

악셀 크라우제_Das Bad(2) (bath)_hard masonite에 아크릴, 유채_160×218cm_199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LM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7_화요일_06:00pm
갤러리 LM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565-18 자스미 빌딩 지하1층
Tel. 02_3443_7475
www.gallerylm.org
갤러리 LM에서는 라이프치히 화파의 대표 작가인 악셀 크라우제의 개인전을 11월 27일부터 12월 18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최신작을 포함 총 17점의 작품이 선보인다.

악셀 크라우제_Zimmerflucht (Suite of rooms)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70×240cm_2007

악셀 크라우제_Der Plan(The Plan)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130×160cm_2007
1958년생으로 독일 할레 출신인 악셀 크라우제는 현재 라이프치히에서 활동하고 있다. 회화의 부상과 함께, 회화 전통의 맥을 이어온 독일 회화는 현대 회화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 그 중에서도 라이프치히 화파, 즉, 라이프치히 그래픽과 북아트 대학(또는 라이프치히 시각 예술 대학) 출신의 작가들은 출판으로 유명한 라이프치히라는 지역적 배경과 함께 사진으로 또한 유명한 학교에서의 다양한 매체 교육을 통해 독창적 작품 세계를 이룸으로써 큰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들은 현 시대의 다양한 이미지 생산 방식을 자신들의 회화에 반영한다. 또한 이들의 작품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있어서 회화의 존재성에 대한 깊이 있는 탐구의 결과물이며, 그 이미지의 내용에서도 변화하는 사회상을 그들만의 방식으로 담고 있다. 선대의 전통을 이으면서도 현 시대에 대한 민감한 대응을 보여주는 라이프치히 화파의 이러한 특성은 그들을 세계적으로 주목 받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악셀 크라우제_Nachmittag on Bord(afternoon on deck)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65×82cm_2006

악셀 크라우제_Die Reise, (The Journey)_캔버스에 유채_160×200cm_1998
라이프치히 그래픽과 북아트 대학에서 수학하고 10년간 교직 생활을 했던 악셀 크라우제는 그러한 라이프치히 화파의 특징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가이다.
악셀 크라우제는 오랜 세월 동안 이미지의 숨겨진 의미를 추적해왔다. 그는 잡지부터 20세기 초까지 다양한 이미지들을 찾아 자신의 작품에 담는다. 그는 이미지의 사실적 정보가 아닌, 이미지에서의 모호함, 확실하지 않은 부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말로 된 설명을 거부하고 이미지로써 보여주고자 한다. 이러한 그의 성향은 특히 콜라쥬 성격이 강해진 근작들에서 더욱 잘 표현된다. 이전 작품들이 하나의 풍경을 담는 성향이 강했다면 회화적 콜라쥬를 보여주는 근작들에서는 서로 다른 공간과 이미지들이 함께 조합되어 있다. 다양한 이미지들이 한 공간 안에서 합쳐지고, 창문, 연속적인 문, 거울, 액자 등의 형식으로 다른 공간들이 함께 녹아 들어 간다. 서로 다른 차원들이 한 캔버스 안에 겹쳐지면서 자유로운 상상력의 회화가 완성된다. 견고하지만 투명한 그 표면은 움직이는 중간에 포착되었을 때마저도 경직된, 악셀 크라우제의 특징적인 인물상들, 그리고 인물들이 있는 실내 또는 실외의 공간과 긴장감을 자아낸다. 왜곡된 비례와 원근은 그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악셀 크라우제는 그러한 표면 안에 이야기를 숨겨둔다. 그리고 회화는 그 자체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 갤러리 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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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ion of Reality
사비네 크리스트만 회화展
2007_1123 ▶ 2007_1216

Sabine Christmann_Untitled (Ocean Bag Big)_캔버스에 유채_140×20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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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3_금요일_05:00pm
가나아트센터 갤러리 미루 I
서울 종로구 평창동 465-5
Tel. 02_720_1020
www.ganaart.com
이미지 뒤에 숨어있는 이미지들 : 사비네 크리스트만의 작품 세계 ● 기독교 도상학에서 파란색은 성모 마리아를 나타내며, 흰색은 순결과 처녀 수태를 의미한다. 사비네 크리스트만이 쇼핑백들을 그리기 위해 많은 색들 중 파란색과 흰색을 선택했다는 것이 우연일까? 귀한 보물이나 성스러운 유물을 담고 있을 지도 모르는 훌륭한 봉지들. 봉지의 공식적인 정의는 ‘작고 헐거운 물건들을 담아두는 유연한 용기’이다. 사비네 크리스트만이 그리는 봉지들 중 많은 수가 책, 즉 지적인 글이나 박물관에서 구입한 작은 아트 상품들, 즉 형태를 가진 아이디어를 담고 있다. ● 파울 클레 Paul Klee가 주장하기를 예술은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게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비닐 봉지를 정물의 형태로 제시한다. 이는 봉지를 효과적으로 고정시키고 그것의 기본적인 임무를 박탈함으로써 궁극적인 기능이 눈에 보이도록 한다. 결국, 쇼핑백들은 단지 ‘물건들을 담기 위한 유연한 용기’에서 벗어나 소비산업사회의 성향을 나타내며, 개인적인 만족을 상징한다. 쇼핑백에 쓰여진 글은 광고의 목적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나, 본질적으로 그것은 쇼핑백을 들고 있는 사람을 특별한 문화적 집합체로서 정의한다. 내용물이 아닌 쇼핑백 자체가 바로 당신이 소비에 참여했다는 증거이고, 당신이 성공적인 사회 구성원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기념물인 것이다.

Sabine Christmann_Untitled (Cow 46)_나무에 유채_20×15cm_2005

Sabine Christmann_Untitled (Red-White 4)_나무에 유채_20×20cm_2006
니체에 따르면 예술은 종교가 쇠퇴하는 곳에서 자라난다. 종교적 사회는 믿음에서 의미를 얻는데 반해, 현대 소비 사회는 소비에서 의미를 얻는다.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이러한 소비 사회의 표장이 그려질 가치가 있다고 선언한다. 작가가 순수한 미학적 기준을 가지고 선정하는 쇼핑백들은 개별 상표를 대표하며, 특정한 방식을 나타낸다. 십자가가 기독교를 상징하는 것처럼, 쇼핑백은 사회안에서 개인의 위치나 개인이 자신을 위치시키는 지점을 나타낸다. 그것이 할인 매장에서 왔든, 박물관 서점에서 왔든 각각의 쇼핑백은 무엇인가를 의미하며, 그것을 들고 있는 사람은 이 의미를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이용한다. 구겐하임 미술관의 쇼핑백을 들고 있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문화 시민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고, 서점의 쇼핑백은 교육, 권력의 사용, 그리고 생각이 깊음을 상징한다. 쇼핑백들은 명백한 지위의 상징이다. ● 이런 쇼핑백들이 소유자의 분신, 그리고 현대 세계의 대표가 되기 때문에, 사비네 크리스트만의 그림은 작품 자체의 아우라가 가지는 광휘뿐 아니라 마치 모델이 관객 앞에서 자신을 뽐내듯이 자신들을 보여주고, 서로 경쟁하거나 숨기도 하고, 때로는 지쳐서 무릎을 꿇기도 한다. 작품을 보는 관객은 쇼핑백이 사람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대신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국 사람들의 정체성은 오직 그들이 구매하는 상품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Sabine Christmann_Untitled (Guadalquivir)_캔버스에 유채_50×60cm_2003

Sabine Christmann_Untitled (Snackige Zeiten)_캔버스에 유채_100×70cm_2004
사비네 크리스트만의 작품은 이러한 물질적 효력의 과시를 반영하고 표면적인 효과를 작품의 주제 자체로 삼는다. 그러나 작가는 실제와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고심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물은 거울처럼 작용하는 반짝이는 표면에 위치하며, 이러한 이차적 단계를 통해 미적인 환영, 즉 일상적 사물들의 독특한 힘을 반영한다. 이런 방법으로 크리스트만은 모방의 차원에서 추상적?개념적 공간으로 옮겨간다. 그녀의 예술은 단지 현상(現象)을 확실하게 보이게 만들 뿐만 아니라 외형, 관객 자신의 반영, 그리고 환영을 가지고 게임을 하고 있다. ● 동시에,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회화 그 자체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 작가는 의도적으로 자신을 예술적 전통 안에 위치시킨다. 한 편으로 그녀는 아주 자세하고 시각적으로 즐거운 자극이 되는 훌륭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매진한다. 또한 작가는 대상을 표현하는데 있어 빛의 효과를 면밀하게 다듬는데, 마치 인상주의 조각가가 대상을 표현하기 위해 복잡한 주름과 자국을 비추는 각각의 빛줄기를 하나하나 조각해 내듯이 말이다. 바로 이런 주름의 표현이 작가의 작품을 고딕적으로 보이게 한다: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이전 시대의 예술가들이 성모 마리아의 그림에서 옷의 주름을 표현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열정으로 대상을 표현한다. 낡은 쇼핑백의 하나하나의 주름들은 작가에 의해 솜씨 있게 그려지는데, 마치 쇼핑백이 값비싼 천 또는 비단이나 금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가는 쇼핑백이 사용된 흔적을 촉감과 청각적 인상이 일깨워질 정도로 감각적으로 변화시킨다. ● 마찬가지로, 흰색이나 파란색-흰색 줄무늬로 서로 꼬인 직물에서는 볼륨감과 존재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정확성과 재질의 조각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니체가 다시 한 번 인용될 수 있을 것이다: 고딕 양식의 주름은 종교를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더 이상 종교를 주제로 하지 않는 회화는 순수하게 미학적인 경험이 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한다.

Sabine Christmann_Untitled (St. Paul’s)_캔버스에 유채_90×140cm_2007

Sabine Christmann_Untitled (Ocean Bag)_캔버스에 유채_90×200cm_2007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전통적인 예술의 형식을 이용하나, 그 주제를 바꿈으로써 긴장을 만들어낸다. 궁극적으로, 우유 상자를 그린 그림에서 관객이 보는 것은 동물들이지만, 이러한 묘사는 또 하나의 시사점을 갖는다. 소의 초상 ? 즉 관객의 현재적 인식 ? 은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주로 간접적으로 인식된다. 심상(心像)이란 사이에 낀 것으로서, 상업적인 목적을 가지고 정보와 감정을 결합하는 이미지이다. 크리스트만은 현대 사회에서 실재로 인식되는 것은 사실 미디어나 대상의 상업적인 반영이라고 주장한다. ● 사비네 크리스트만이 그리는 유리병들은 바로크 양식 정물화에서 인기 있었던 바니타스 Vanitas의 상징들을 반영한다. 유리는 깨지며 일시적이다. 그러나, 바로크 시대의 한량이 사치스럽게 꾸며진 탁자 위에서 아름답게 장식된 유리잔의 독한 포도주를 마시고 푸짐한 음식을 먹으며 죽음이 모든 것을 가져가기 전까지 삶을 즐겼다면, 사비네 크리스트만의 정물들은 절제의 유혹을 불러일으킨다. 21세기의 건강 전도사는 자신의 절제를 시도하며, 순수하고 맑은 생수는 건강과 동의어이다. 이것이 죽음을 막아주지는 못하더라도 늦출 수는 있다. 동시에, 그녀의 유리병 그림에서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일상 문화를 보존하고자 한다. 규격화된 플라스틱 물병에 점차 자리를 내 주고 있는 독특한 유리병들을 그림으로써 후대에 전하고자 하는 것이다. ● 그러나 일상과 소비, 외형과 과시에 대한 탐구에 덧붙여, 사비네 크리스트만의 회화에는 항상 시적인 요소와, 실용성?기능성과 분리된 섬세한 아름다움이 있다. 작가는 일상성으로부터 미학적인 요소를 드러내고, 그것을 눈에 보이게 하며, 물질적 세계의 기능성에서 벗어나 감각적인 특성 역시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최소한의 색과 형태로 그려진 대상에서 작가는 최대한의 회화적 감동을 만들어낸다. ● 사비네 크리스트만은 자신의 경험의 흔적을 드러내는 것보다 숨기려고 한다. 작품의 대상은 시공을 초월하여 현실에서 동떨어진 듯한 사물로써, 마치 그것이 거울 뒤편의 요정 이야기 같은 세상인 것처럼, 우리의 현실을 벗어난 신비로운 세계의 조용한 영웅들처럼 다가온다. ■ 아드리에네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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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lation
신미경 조각展
2007_1123 ▶ 2008_0203 / 월요일 휴관

신미경_Looking through Glass, Asia House, London_2006_설치 장면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몽인아트센터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27_화요일_05:00pm
몽인아트센터
서울 종로구 삼청동 106
Tel. 02_736_1446~8
www.mongin.org
런던과 서울을 오가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작가 신미경의 개인展 『Translation』이 2007년 11월 23일부터 2008년 2월 3일까지 종로구 삼청동에 위치한 몽인아트센터에서 마련된다. 비누를 조각의 재료로 이용하여 독특한 작가적 재해석을 시도해온 신미경은 이번 전시에서 21세기를 살아가는 아시아 작가로서 자신이 경험해온 다양한 종교적, 역사적, 문화적 문맥에 대한 ‘번역(translation)’을 도자기와 불상이라는 특정한 도상을 통해 드러낸다. 더불어, 이러한 작가의 재해석이 전시장을 찾은 관람자들의 서로 다른 다양한 조건과 상황에서 그들 개개인이 존재하고 있는 종교적,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통해 다시 한번 ‘번역’되기를 작가는 기대한다. ■ 몽인아트센터

신미경_Translation-Vase_비누_25×25×40(h)cm_2006

신미경_Translation-Vase_비누_25×25×30(h)cm_2006
‘Translation’은 문화와 언어의 영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유기적 소통의 방식이다. 여기서 말하는 유기성이란 각 문화의 독특성, 그 문화권 속의 일원들, 시간 속에 벌어지는 것들의 관계를 말한다. 나는 비누라는 일상적 재료를 통해 문화의 상호 침투와 전이, 그리고 독창성의 문제, 복제와 재생산 등에 관한 관심사들을 다루어왔다. 소위 ‘유물’이라 일컬어지는 오브제들은 각각 고유의 장소성과 시간성을 지니고 있는데, 나는 이러한 것들이 시간과 장소 속에서 옮겨지면서 생겨난 시차와 낙차에 주목해 왔다. 지난 10여 년간의 작업은 이러한 이야기를 비누라는 재료를 통해 풀어온 ‘Translation’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미경_Translation-Vase_비누_60×60×50(h)cm_2006

신미경_Translation-Vase_비누_30×30×40(h)cm2006
비누는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재료이다. 그러나, 쉽게 닳아 없어지는 특성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이미지와 실재의 구분을 두드러지게 하는 향기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오랜 시간에 걸친 문화의 이동과 전이, ‘Translation’에 관한 나의 관심사를 풀어내기에는 무엇보다도 적합한 재료이다. 나는 런던과 서울, 또는 그리스와 인도 등을 여행하면서 각각의 장소들이 가지고 있지만 이미지로는 전달될 수 없는 어떤 것들에 주목해왔다. 즉, 작업실에서 어떤 장소의 이미지를 보면서 상상하는 것과 직접 그 장소에 가서 보고 체험하는 것, 그리고 작업실로 돌아온 후 다시 사진을 통해 그 장소를 떠올리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들이다. 실재로부터 분리된 이미지는 마치 향기가 빠져나간 빈 껍질처럼 보인다. 이미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문화 역시 서로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전달과 이동, 향유는 각각의 맥락을 지니고 있다.

신미경_Translation-Toilet Bodhisattva_비누_93(h)cm_2006
서양의 돌 조각을 비누로 재현했던 이전의 작업들과는 달리, 이번에 보여지는 신작은 도자기를 주제로 한다. 주로 중국과 한국의 장식적인 도자기들을 비누로 상감하고 채색하여 재현했는데, 이러한 도자기 시리즈는 진품과 위조품의 논란에서 자유로운, 내가 ‘Translation’해낸 온전한 진품이다. 새로이 만들어진 독창적인 「Translation-Vase」는 한국과 중국, 영국을 오가며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관객들을 만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관객들이 지닌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이해도에 따라 또 다른 방식으로 그들에게 번역되어 이해될 것이다._작가노트 중에서 ■ 신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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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mory theater
강선영 사진展
2007_1129 ▶ 2007_1212

강선영_Memory theater-융건릉_디지털 프린트_24×36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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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129_목요일_06:00pm
갤러리 보다 기획전
갤러리 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1-1 한라기산 B/D 2F
Tel. 02_3474_0013
www.bodaphoto.com
밀랍 판에 눌러 새겨가면서 기억을 기록하고자 했던 고대부터 지금까지 망각과 변형에 대한 두려움, 온전히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이 다양한 기억 수단을 만들어냈듯 내가 경험한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소유하고자 하는 나의 집착은 망각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다. 누구나 마음속에 자기만의 밀랍판을 소유하고, 그곳에 기억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그 밀랍판은 거칠 수도, 딱딱할 수도, 매끄러울 수도 있다. 나는 항상 단단하고 견고한 그것을 희망했다. 단단하다는 것은 상(像)을 새겨 넣기는 힘들지만 그만큼 쉽게 지워지지도 않을 테니까. 하지만 내 것은 지나치게 무르고 지나치게 깊다. 쉽게 눌려 자국이 남고, 그 위에 다시 눌리고, 세월에 마모되고, 충격에 찌그러진다.... 지워지고, 겹쳐지고, 변형되면서 더 이상 찍혀진 상의 의미를 읽어낼 수가 없다. 그것은 결국 내게는 기억하기 위해 집착해야할 실재(實在)가 아닌 것이다.

강선영_Memory theater-태권도장_디지털 프린트_24×36cm_2007

강선영_Memory theater-광교산_디지털 프린트_24×36cm_2007
사람들은 사진을 통해 기억을 고정시키고 기억을 어둠속에서 건져내어 ‘있는 그대로’ 소유하려 한다. 그리고 사진을 통해 기억의 실재성에 대한 믿음을 부여 받는다. 사진은 하나의 창(窓)일 뿐이며, 사진 찍힌 대상의 강력한 존재감은 ‘의미’ 이전에 벌어진 ‘사실’을 말하도록 만든다. 우리는 사진을 보며 사실을 진술하고, 그것은 하나의 내러티브를 가진다. 그리고 사진의 내러티브는 ‘이미 일어난 실제 사건’을 지시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진의 ‘의미’는 과거의 반복이며 ‘재구성된’ 내러티브이다.

강선영_Memory theater-다리밑_디지털 프린트_24×36cm_2007

강선영_Memory theater-창룡문_디지털 프린트_24×36cm_2007
스트레이트한 사진으로 기록된 장면들은 단편적인 시각적 기억을 합성하여 대상의 이미지를 재현하므로, 그것은 불가피하게 어느 정도 관념적이다. 현상은 사건이지만 기억속의 합은 변조의 내러티브인 것이다. 공간은 현실의 특정한 장소인 것 같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현장성은 변색되고, 초현실적이고, 방부제의 냄새를 갖게 된다. 그 공간속에서 인물들을 등장, 배치시키면서 ‘도치된 내러티브’를 만들어 나갔다.
■ 강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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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lancholy
김성수 회화展
2007_1130 ▶ 2007_1229 / 일요일 휴관

김성수_Melancholy_전시설치광경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카이스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30_금요일_05:00pm
카이스 갤러리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02_511_0668
www.caisgallery.com
카이스 갤러리는 2007년 한 해를 마감하는 전시로, 현란한 문명사회 속에서의 현대인의 정신적 결핍과 우울을 화려한 색채와 감각적인 형태로 표현 한 김성수 작가의 『Melancholy展』을 마련하였습니다. 전시는 크게 인물연작과 꽃연작의 두 파트로 구성됩니다

김성수_Melancholy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6

김성수_Melancholy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6

김성수_Melancholy_캔버스에 유채_130×194cm_2006
형광 빛의 화려한 배경을 바탕으로 공허한 시선과 무기력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인물연작은, 점점 더 화려해지고 비대해져 가는 도시의 모습과 그와는 반대로 갈수록 황폐해져 가는 인간 정신의 결핍과 부재, 그에 따른 우울을 한 화면에 오버랩 시키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곳곳에서 넘쳐나는 도시의 네온 빛은 빠르게 점멸하며 수많은 정보를 발산하지만, 그 강렬한 빛에 현대인들은 자신의 감각이 무뎌지고 혼동됨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합니다. 이처럼 네온이 난무하는 현대 도시와 그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은 김성수가 유학한 프랑스 디종의 회색빛 거리 풍경과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모습이었을 것이며, 또한 훌쩍 커버린 한국 미술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헤매고 있는 작가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성수_Bad flower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7

김성수_Bad flower_캔버스에 유채_162×130cm_2007
비슷한 맥락으로서 꽃연작은, 소비문화의 열기 속에 전이되어가는 자연의 개념을 의미하는, 소비를 위한 인공적인 오브제로 등장합니다. 대표적 자연소재인 꽃은 김성수의 작업을 거쳐 화려하고 아름다움이 과장되어 번들거리는 그로테스크한, 그래서 더욱 부자연스러운 꽃으로 변신합니다. 김성수의 작업에서 나타나는 꽃은 그러므로 더 이상 자연의 것이 아니라 그것이 소비문화를 거쳐 물질가치로 변모된 하나의 상품을 뜻하며, 동시에 시들어가는 형태를 통해 작가는 물질적 풍요와 거대한 소비욕망 속에 사그라져가는 개개인의 정신상을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카이스 갤러리가 준비한 이번 김성수 작가의 『Melanchory展』을 통해, 관람객들은 모처럼 진지한 사유를 바탕으로 세련된 감각을 표출한 작품들을 만나보실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 카이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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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풍경
박상희 회화展
2007_1130 ▶ 2007_1229 / 일요일 휴관

박상희_일상의 풍경-상동_아크릴과 시트지컷팅_91×116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카이스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130_금요일_05:00pm
카이스 갤러리_C art Cafe
서울 강남구 청담동 99-5번지
Tel. 02_511_0668
www.caisgallery.com
카이스 갤러리 1층 C art Cafe는 2007년 한 해를 마감하는 전시로, 한국 사회만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풍경을 플라스틱 시트지를 오려내는 작업으로 표현한 박상희 작가의 『일상의 풍경展』을 마련하였습니다.

박상희_일상의풍경-여고앞_아크릴과 시트지컷팅_91×116cm_2005

박상희_일상의 풍경-코비 한의원_아크릴과 시트지컷팅_91×116cm_2007

박상희_일상의 풍경-신세계앞_아크릴과 시트지컷팅_91×116cm_2007
박상희는 한국 사회가 보여주는 독특한 풍경, 특히 여기저기 어지럽게 널려있는 간판들이 만들어내는 복잡한 풍경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캔버스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30대 후반의 박상희가 한국에 살면서 보아온 풍경들은, 우리가 서양 고전회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자연풍경이 아닌 개발도상국의 산업현장이며 삶의 현장이었습니다. 범람하는 산업화의 흔적이 작가에게는 너무나도 현실적이고 인위적인 모습이었지만, 오히려 너무나도 현실적인 그 모습 속에 숨어있는 땀의 흔적들과 어쩔 수 없는 혼돈은 색다른 정감과 삶의 애착을 불러일으킵니다.

박상희_토이스토리_아크릴과 시트지컷팅_100×100cm_2005
혼돈 속에 피어나는 애뜻한 정서의 표현을 위해 박상희는 우리의 간판문화에 주로 사용되고 있는 플라스틱 시트지를 주 재료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박상희가 만들어내는 친숙한 일상의 풍경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아련한 추억과 감흥을 불러일으키며, 서양 고전회화가 지니고 있는 숭고한 아름다움 못지않은 감동을 전해줍니다. ■ 카이스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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