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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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04-15 03:07:10, Hit : 820)
전시 4.14



도심-자연-인간 속 예술

도심 속 미술 공간 조성 프로젝트

2007_0420 ▶ 2007_05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서울문화재단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20_금요일_06:00pm

김도명_김래환_김미인_김병진_류신정_백연수_서정국
양태근_유영운_장지영_정만영_정우용_한선현

책임기획_이서우

후원_서울문화재단





서울문화재단
서울 동대문구 청계천로 517 (용두동 255-67)
Tel. 010_9172_9942
www.sfac.or.kr






서울 도심의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는 청계천은 서민들의 희로애락이 살아 숨쉬고 있는 역사의 산물이자 문화의 중심지다. 문화 메카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서울문화재단은 시민들 곁으로 더 가까이 한발 다가가 문화 공간을 조성 하기위해 지난 해 말 청계 9가 용두동에 둥지를 틀었다. ● 이번 전시는 사옥 이전 후, 시민들 뿐 만 아니라 예술인들에게도 아직은 낯선 공간인 서울문화재단을 알리고, 일상생활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친근한 소재의 작품을 재단 곳곳에 설치해 재미있는 문화 놀이터를 만들고자 한다.




양태근_운구차_스테이플러, 철, 사진_400×140×240cm_2007



유영운_미디어의 역습_종이, 전단지, 잡지 혼합재료_2006



한선현_외다리위의 꽃을 문 염소_가변설치_2006



김미인, 서정국_신종생물 _FRP에 채색, 가변설치_2004


따스한 봄볕 사이로 청계천이 흐르고, 청기와로 물들어있는 한옥 촌이 한눈에 들어오는 용두동은 할머니 텃밭의 그윽한 흙 내음으로 가득하다. 자연 한복판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전시장 안으로 시민들의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먼저 전시장 로비에 위치한 양태근의 거대한 ‘운구차’는 관람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유영운은 ‘엘비스 프레슬리’와 ‘슈퍼맨’ 등 친숙한 캐릭터을 선보여 작품과 관람객의 거리를 좁혀준다. 한선현의 염소 친구들은 ‘십자 위에 평화’를 빌며, ‘외다리 위의 꽃’을 선물하고, 김미인ㆍ서정국의 ‘신종 생물’들은 관람객을 이상한 나라의 동물 세계로 초대한다.




정만영_종이 박스 속의 하얀 숲_석고_55×15×25cm 2006



김도명_1심방 3심실_포장용 골판지,흙,씨앗_설치 2006



백연수_Animals on Animals(초록껍데기)_소나무, 아크릴채색_45×50×85cm 2005



김병진_껍질을그리다(집)_철용접_가변설치 2007


계단을 따라 올라간 2층에는 정만영의 ‘하얀 숲 속 도시’ 이야기가 펼쳐지고, 통유리로 보이는 김도명의 골판지 화분 속엔 ‘흙’이 살아 숨쉬는 소리가 들리고, 그 고요한 숨소리를 들으며 백연수의 ‘동물들이’ 조용하게 서있다. 2층 야외 데크 공간에는 ‘껍질을’ 주제로 기억의 조각을 그리는 김병진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류신정_Pink contamination_혼합재료_240×650cm_2007



정우용_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들_애니메이션_2007



장지영_사람은 언제나 외롭다_가변설치_2002



김래환_자리찾기_폴리, 아크릴칼라_110×40×77cm_2007


류신정은 ‘생명’의 원초적 본능에 대한 생각을 ‘자연’을 통해 바라보며, 작은 방에서 새어나오는 빛줄기를 따라가면 정우용의 ‘하늘에서 떨어지는 선물’을 만나고, 장지영의 3차원 공간 속 ‘드로잉’ 세계도 감상할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공간으로 이동하면 김래환의 ‘자리 찾기’ 작품을 통해 도심 속 우리의 모습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자연과 인간을 소재로 한 회화, 영상, 설치, 조각 작품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각박한 도심 속에서 마음의 여유를 찾아, 소박한 감동과 행복한 이야기를 관람객 모두가 담아가길 기대해 본다. ■ 이서우

■ 교육프로그램_‘나는 미래의 조각가를 꿈꾼다.’
● 일시_2007년 4월 22일(일), 총2회
1회 - 오후 2시 ~ 3시 20분
2회 - 오후 3시 30분 ~ 5시
● 대상_초등학교 2학년 ~ 4학년 20명 남, 녀 어린이 (선착순 마감)
● 참가비_무료
● 문의_010-9172-9942
[ 1회 ] 내 마음대로 조각가 - 조각가 한선현
음매~~ 염소를 사랑하는 한선현 조각가와 함께 철사를 이용해 내가 좋아하는, 또는 내 머릿속 상상의 동물들을 끌어내어 돌리고, 감고, 자르고, 뚝딱 뚝딱 쉽고 재미있게 작품을 만들어 본다. (준비물-색실, 털실)
[ 2회 ] 잡지의 변신은 무죄 - 조각가 유영운
휴지통 속의 작은 반란, 네모난 종이들이 변신을 선언한다. 오리고, 접고, 붙이고, 한 장 한 장의 종이들이 모여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을 한다. (준비물-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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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ng Moment

정강 개인展

2007_0420 ▶ 2007_0519 / 월요일 휴관



정강_HOW ARE YOU?_Video projection Approx_00:15:00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정미소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20_금요일_06:00pm

작가와의 대화_2007_0504_금요일_03:00pm

갤러리정미소 기획초대전
전시관람_11:00am ~ 08:00pm
위치_혜화역 2번 출구 방송통신대학교 뒤편 월간객석건물 2층

협찬 및 후원_월간 객석_운생동 건축사무소_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갤러리 정미소
서울 종로구 동숭동199-17 객석B/D 2층
Tel. 02_743_5378
www.galleryjungmiso.com






갤러리정미소는 2003년 개관 후 한국의 젊은 작가 발굴, 해외교류, 다양한 문화 네트워크 프로그램 참여 등을 위해 개인전, 외부기획자 초대전, 해외교류전시, 프로젝트, 아카이브, 강연, 잡지 출간 등을 추진하고 있다. 또한 매년 Emerging artists들 발굴과 Young Artists의 소개를 위해 경쟁방식 세미나와 비평회, 매니지먼트 차원의 전시 후속 프로그램 기획 등을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전국각지의 역량 있는 작가를 모색하고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소개하고자 주력하고 있다. ● 갤러리정미소 기획초대전, 정강 개인전은 4월 20일부터 5월19일까지 개최되며, 작가는 지난 2006년 하반기에 실시된 2007 기획공모에서 선정된 작가이다. 사진과 비디오라는 매체를 통해서 현대인의 삶을 조망하는 현대 미술 작업 중에서, 작가 정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들을 전시를 통해 소개하고자 한다. ● 정강은 이번 전시로 한국에 첫 개인전을 갖는다. 정강은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사진학과【?사진을 전공하였으며, 1999년 졸업 후 미국 캘리포니아 예술대학(California institute of the arts)에서 사진으로 MFA를 수여받았다. 이후 시카고 예술대학(school of arts institute of chicago)에서 비디오아트를 전공하면서 작품의 폭을 넓혀 다양한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이미 뉴욕, 시카고, 캘리포니아 등지 외에 일본과 중국의 각종 전시에 참가하여 영아티스트 대열의 합류를 준비 중이다. ■ 갤러리 정미소




정강_HOW ARE YOU?_Video projection Approx_00:15:00_2006


비(非) 전체- 제안 ● 정강의 작품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들은 나름대로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거나, 하지 않는다. 가령 〈How Are You, 2006〉에서, 인물들은 일상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요즘 어때요?’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한다. 대답엔, 거의 특별한 것이 없다. 그 내용에는 심오한 의미도 없으며, 은근히 기대해 본 어떤 과거지사를 토로하는 것도 아니며, 희망찬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그들은 ‘이야기’한다. 스치는 이야기들을. 그리고 또 한편에서 그들 중 누구는, “너 차 마실래? 말 좀 해봐. 이거 가질래?” 등의 사소한 제안을 한다. 어쩌면, 정강은 우리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을 자연스럽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우리 일상은 어떠한 절박함, 어떠한 욕망의 분출, 판타지도 없고, 티브이 드라마에서 나오는 그러한 불륜도, 끈적함도 없는 게 아닌가. 아니 적어도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일상 속에서 누군가가, 성큼, “차 한잔 할래요? 혹은 이거 가질래요? 심지어 요즘 어때요?” 라는 질문을 툭, 던진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쾌한 파장이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묵묵한 일상에의 위반일지도... 어쩌면 가볍게 보이지만, 결코 인사치례는 아닌, 애매한 경계에서, 정강은 우리에게, 제안을 하는 셈이 된다. 조금 가볍게, 그리고 약간은 경쾌하게, 그렇지만 어떠한 강박적 제스쳐는 없이, 굳이 어떤 대답을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반향은 기대하면서...




정강_SAY_Video projection Approx_00:10:00_2006/2003


무언으로 말하기 ● 반면에 〈Say, 2006/2003〉에서 등장인물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단지 표정과 배경으로 그/그녀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그것은 연기인지, 그 등장인물들의 어떤 사적인 배경을 암시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결국 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는 그 무엇, 하지만 그들은 분명,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려하는 것 같다. 그들은 무언(speechless)으로, 혹은 우물우물 웅얼거리면서(마치 복화술처럼), 끝내 우리를 응시하고(gaze), 원하고(need), 그리고 욕망(desire)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던지는 파장은 우리 내부에서 일어난다. 그들의 불완전하고, 불안한 응시 속에 응축되어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욕구의 찌꺼기는 고스란히 우리의 몫으로 던져지는 것이다. 그들의 조용한 응시와 대면하면서, 우리는 오히려 우리 자신의 내부에서 무엇인가를 불러오게 된다. 가령, 그/그녀는 우리에게 그들의 고립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표현하는 것일까. 아니면, 상처를 치유하고 있는 중일까.. 등등.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오히려 평소에 일상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혹은 말하지 않는, 그 무엇을 더욱 많이 풍부하게 듣고 있고,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일상적인 자잘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How Are You〉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Say〉는 같은 지점에 있는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표면적으로는 아무것도 이야기해주고 있지 않지만, 그 이면에는 어떤, 무엇을 건네거나, 이야기하거나,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정강_SAY-도서관에 Jeff_C-type light-jet print_100×100cm_2003


비(非)전체로서의 현실의 외양, 반복 ● 정강의 〈How are you〉나 〈Say〉가 다큐적인 촬영과 스케치, 그리고 몇몇 연출된 장면들이 촬영되고 나서 이후에 편집된 결과를 보고 있노라면, 그것에 공통된 어떤 요건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작업의 주제적 측면에서도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정강의 작품들은 현실의 반복과 일상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낼 뿐만 아니라,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 또한 암시하고 있다. 즉 정강의 작업 방식에서 드러나는 매체적 특성은 〈엘리펀트, 2006/2002〉에서 드러나듯이 짧은 순간들과 미결정된 소리들, 그리고 그것의 반복에 의거하는데, 바로 그 점이 우리 현실이 구성되는 방식과 유사하다. 작품 〈엘리펀트〉는 어떤 전체가 조망되지 않는 전체, 그것의 거대함과 재구성할 수 없는 불가능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현실 자체가 그 거대한 엘리펀트처럼 재구성하기에 불가능하지만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비(非)전체임임을 암시한다고 해석해볼 수 있다. 사실 현대의 어떠한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발생하는 데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사건은 항상 어이없는 어떤 지점에서 발생하며, 그것의 원인, 그것의 범인, 그것의 해결이란 있을 수 없다. 오히려 현실에서의 사건의 비극성과 필연성은 우연하게 결합한다. 게다가 정강은 그 어떤 사건도 매개해주지 않는다. 그것은 고스란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정강_Elephant_4 channel video installation, Approx_00:07:00_2006/2002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돌출되는 object a ● 작품의 모든 인물들로부터, 우리는 현대인의 존재성, 존재성의 인식의 순간을 생각하게 된다. 존재는 어떻게 해서 존재가 되는가. 그리고 언제 주체로 호명되며, 또한 그들은 어떤 사건들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또한 우리 삶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이토록 반복되는 우리 일상, 사소하고, 어떠한 거창한 일들도 벌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대끼면서 살아가고, 그 속에서 존재성, 타자성을 삶의 영역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우리들 사이에는 도대체 무엇이 교환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사실 자신의 존재성에 대한 인식이란 것은, 그것이 정체성의 이름이건, 호명의 이름이건, 주체의 이름이건, 어떻게 불리어지든 간에, 타자와의 상호성과 회귀 속에서이다. 우리의 시선과 이야기는 어떤 왜곡된 거울과 같은 것에 반사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온다. 그것은 항상 어긋난 반향이고, 왜곡된 거울상이며, 기대하지 못한 의외성으로 되돌아오는 그 어떤 것이다. 그것에 타자성(otherness)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자성은 항상 내게 되돌아오는 원환(circle)을 구성하고 있다. 아마 그 원환은 나, 타자, 그리고 타자에의 혹은 타자로의, 타자로부터의 어떤 화살들이 내게로 꽂히도록 하는 그러한 원환일 것이다. 그 화살은 응시일수도 있고, 어떤 제안일수도 있으며, 타자와 주체사이의 그 어떤 것(object a)일 것이다. 어쩌면 정강의 끊임없이 말하고, 움직이는 인물들, 혹은 무언으로 표정하는 인물들로부터 받는 그런 제안 혹은 욕망 속에 존재하고 있을지도...

재구성을 위한 조건들, ● 만일 적극적인 우리들 중에 관람자가 있다면, 정강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어긋남을 잡아챌 것이다. 그것은 매체적 어긋남, 관객과의 조우에서의 실패, 현실과 연출된 장면의 교차 편집으로 야기되는 상황간의 간섭과 어긋남 뿐만이 아니다. 또한 정강의 작품에서 웅얼거리거나 수다를 떨면서도 이야기하지 않음에 맞부딜칠 것이다. 그것은 일상적인 이야기들의 무의미함, 말하지 않음 자체이다. 정강의 작품에 등장하는 연기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알 수없는 등장인물들의 제스쳐는 어쩌면 왜곡된 거울상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국에 되돌아오는 자기 자신의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은 우리들의 초상이 된다. 그 것을 대면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왜곡된 거울상과의 응시의 경험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의외의 타자성, 즉 우리 현실은 우리가 보는 대로 구성되고 있지 않다는 의외성은 그/그녀-우리로 하여금 그/그녀에게 되돌아오는 ‘어떤’ 혹은 ‘무엇’의 화살(object a)의 시발점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반복된다. 그 화살은, 사후적으로 하나의 우발적 사건을 통해서 우리 현실이라는 비(非)전체를 재구성하는 요건이 된다. 의미 또한 항상 사후적으로 재구성되며 그것은 원인을, 허구적, 상상적, 이데올로기적, 판타지적으로 수반하면서 재구성된다. 이제 우리가 본 이미지들과 들은 소리들은 일종의 이 사후적 재구성을 위한 조건임이 명백해진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조건으로 우리의 내러티브와 사건과 의미를 조직해야한다는 것이다. 이제 정강의 “long moment”는 우리에게 ‘지속, 반복 되는’ 불특정 사건과 비(非)전체라는 상에 대한 ‘조건-계기’로 해석될 것이다. ■ 이병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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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홀의 건축

정재호 회화展

2007_0418 ▶ 2007_0501



정재호_적산타워_한지에 채색_182×227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51201b | 정재호 회화展으로 갑니다.

정재호 블로그_nardoldol.egloos.com




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6:00pm

후원_서울문화재단




관훈갤러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5
Tel. 02_733_6469
www.kwanhoongallery.com






위태로운 기념비의 매혹 작가 정재호는 공덕 로터리에서 멀지 않은 아파트에서 산다. 그가 사는 아파트는 마포구 일대를 뒤덮다시피 한 어느 대기업 상표의 아파트이다. 정재호는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을 그리는 걸로 알려져 있지만 정작 자기 동네 주변에 수 년 전부터 대규모로 조성된 말끔한 아파트들이나, 시시각각 공덕 로터리 일대를 뭉개고 들어서는 고층 건물들은 그리지 않는다. 또, 아파트라도 한강변에 줄줄이 들어서 있는 아파트나 신도시에 건설된 아파트는 그리지 않는다. 대신에 도심에서 떨어진 곳에 자리한 채 스러져 가는 아파트나 낡은 건물과 주택을 그린다. 그는 현대 도시 문명을 대표하는 입방체들에 관심이 있는 걸까? 그건 아니다. 만약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었다면 서울 시내에 자리한 으리으리한 건물들을 얼마든지 그릴 수 있었을 것이다. ● 정재호의 시선이 좇는 것은 일단 두 가지로 나눠 볼 수 있다. 첫째는 스러져 가거나 오래 된 건물, 둘째는 그런 건물에 깃든 삶의 자취. 이들을 바라보는 정재호의 시선에는 애상(哀想)이 가득 담겨 있다. 이 작가의 눈빛을 흔들리게 하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 타인의 삶에 대한 1蒐�일�? 아니면 지난 기억의 편린일까?




정재호_창신타워_한지에 채색_182×227cm_2007


그림을 그리기 위해 정재호는 낡은 아파트들을 돌아다녔지만 정작 그곳에 사는 각각의 입주자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만약 개별적인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입주자들이나 동네 주변 사람들의 모습을 초상화 비슷한 형식으로 그린 그림이 섞여 있을 텐데, 아파트를 비롯한 건물에 주목한 이래 그는 아직껏 입주자를 직접 그린 초상화를 보여준 적이 없다. 아파트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을 그리는 대신 그는 생활공간 밖으로 비어져 나온 세간을, 복도와 공터 귀퉁이를 그렸다. 이들 세간이란 것도 입주자들의 직업이나 취향을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것들은 아니고, 대부분 흔하고 누추한 살림의 단면일 뿐이다. 정재호는 아파트의 입주자들과 그다지 친해지지 못했다. 입주자들에게 그는 의도를 알 수 없는 수상한 침입자, 관찰자일 뿐이었고, 작가 자신도 의심을 가득 품은 이들에게 자신의 작업이 지닌 의의를 간명하게 설명하기 어려웠다.




정재호_아현빌딩_한지에 채색_130×194cm_2006


애초에는 전통적인 원근법에 충실한 풍경화를 그리던 정재호였지만 2004년과 2005년을 거치면서 건물의 정면이 화면에 고스란히 들어가는 구도에 주력하게 되었다. 작가 자신이 〈2005년 가을에 웹진 〉〈플라잉넷(www.flyingnet.org)〉〉과의 인터뷰에서도 말했듯, 이런 구도는 작가가 직접 본 모습을 옮긴 것이 아니다. 건물과 건물 사이가 그리 넓지 않아서 건물 앞의 한 지점을 기준으로 삼고 보려 하면 건물을 모두 볼 수가 없다. 작가는 화면을 구획으로 나누어 건물을 재배치했다. 작가 자신이 발을 딛고 서서 건물을 바라본 시점을 없애 버린 이 구도를 도입하면서 그는 일반적인 풍경화와 선을 긋게 되었다. ● 그런데 이렇게 건물을 정면으로 가득 담은 결과는 ‘창문으로 가득 담긴’ 화면이었다. 이는 자못 흥미로운 대목이다. 작가는 창문을 가득 그리고 싶어서 정면성을 취한 것일까, 아니면 정면성을 취하다 보니 창문에 공을 들이게 된 것일까? 바꿔 말해, 작가는 어느 창문이고 흐릿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건물 전면을 화면에 담은 것일까, 아니면 아파트 건물을 정면으로 돌려놓고 보니 표정이 풍성한 수많은 창문들이 작가를 맞이한 것일까?




정재호_소공로빌딩_한지에 채색_130×260cm_2007


정재호의 작품을 볼 때, 작가 자신이 사물을 묘사하면서 느꼈을 법한 즐거움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부분이 창문과 현관문 등의 묘사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하나의 아파트 건물에서 창문은 세대 단위로 모두 같은 모양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들 창문이 제각각 다름을 공들여 묘사한다. 어느 집 창문은 반쯤 열려 있고 어느 집 창문은 닫혀 있다. 베란다의 경우에도 에어컨 실외기가 놓인 집이 있고 빨래를 널어놓은 집이 있다. 복도형 아파트를 복도 쪽에서 바라본 그림에서는 복도에 내놓은 세간 뿐 아니라 심지어는 현관문의 색깔과 재질마저도 제각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건물에서 같은 단위로 된 각각의 부분이 서로 닮지 않은 이유는 상당 부분, 세월이 건물에 부여한 퇴락함 때문이다. 어쩌면 이 때문에 정재호는 말끔한 신축 건물을 그리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 ● 커다란 화면 위에 이들 구획을 하나하나 채워 나가는 중노동을 작가가 견딜 수 있었던 건 각양각색의 ‘문’들을 그려 나갈 때 느끼는 쾌감 때문이었으리라. 정재호의 그림에는 어떤 의미에서는 그림이라면 당연히 지니고 있으리라 기대되는 매혹이 있다. 이는 현대 미술이 복잡한 담론과 전략의 경연장이 된 탓에 종종 잊혀지곤 하는 매혹이다. 정재호의 그림에는 애초에 그림을 그리는 자가 목탄이나 붓을 든 손을 빈 화면으로 옮겨서 거기에 선을 긋게 만드는 원초적 욕구가, 바꿔 말해 대상이 뿜어내는 매혹과 그것을 그리는 자가 반응하면서 형성하는 감정적인 자장이 오롯이 드러나 있다.




정재호_동대문아파트_한지에 채색_170×259cm_2007


정재호가 그린 건물에 의지해서 사는 이들은 앞으로 조금씩이나마 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조금씩이나마 더 좋아질까, 아니면 점점 더 나빠질까? 이런 질문에는 이미 실천적인 요구가 실려 있기 때문에, 어느 쪽 답을 고르든 대답하는 쪽에서는 스스로의 공적인 관심과 참여가 미흡했음을 의식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그다지 환영받지 못하는 이런 질문이 작가 정재호에게는 여전히 그림자처럼 들러붙어 있다. 그는 자신이 필연적인 어떤 감정이 아니라 계급적으로 비껴난 예술가의 여유로운 시선으로 퇴락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자문을 거듭해 왔다. 하지만 이처럼 고민하고 저어하면서도 그는 풍경에 매혹되어 왔고, 이런 매혹은 줄줄이 늘어선 창문 위로 ‘에누리 없이’ 겹쳐졌다. 그의 그림 속 창문은 하나의 단위 안에 자리 잡은 각양각색의 삶을 암시한다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암시에 머무를 뿐, 그림 속에서 이들 개별적인 삶의 실상이 뚜렷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정재호_청계타워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6


건물을 부분적으로만 그려야 할 때(건물을 소재로 삼은 소품을 그릴 때), 정재호는 창문이나 출입문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건물의 표정이 가장 잘 드러나는 부분이 창문과 출입문이니까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을까? 작가는 문을 열고 건물의 내부를 들여다보거나 내부로 들어서는 대신, 작가 자신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삶을 매개하는(연결하기도 하고 차단하기도 하는) 존재로서의 ‘문’ 자체에 매혹되었다. 고전주의적 회화의 세계에서 창문이 회화의 강고한 지위를 드러내는 은유였다면, 정재호의 그림에서 창문은, 대상과 몸을 섞는 대신 대상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게 하며 대상과 관찰자를 매개하면서도 차단하는 회화의 숙명을 암시한다.




정재호_현대오락장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7


정재호는 개별적인 살림살이의 단편들을 주의 깊게 좇았지만 살림살이의 내부에까지 파고들지는 않았고, 대신에 그런 단편들을 어루만지며 사람이 누구나 겪게 되는 숙명적인 소멸에 대해 생각해 왔다. 구체적인 인물이나 일상이 부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그림은 보편적인 감정을 환기시킬 수 있었다. 정재호가 보기에 삶은 신산하고, 언제 바닥이 꺼질지 모르는 불안한 것이며, 결국에는 무너져 내려앉고 휩쓸려 사라질 것이었다. 고달픈 생활을 겪어 본 사람, 붕괴와 소멸에 대한 불안을 품은 사람은 정재호의 그림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터이다. 정재호는 서울 바닥에서 중류층으로서의 삶의 틀을 유지하는 일은 녹록치 않으며, 한 발짝만 헛디디면 누구나 삶의 터전에서 유리된 채 표류하는 존재가 될 거라고 느낀다. 그렇다면 그의 그림에 담긴 풍경은 낭떠러지의 초입인 셈이다.




정재호_종로빌딩_한지에 채색_194×130cm_2007


사실 이런 식으로 정재호의 조형적 연원을 살펴보자면 초현실주의 화가 키리코(Giorgio de Chirico)를 빼 놓을 수 없을 것이다. 키리코의 그림에서 풍겨 나오는 음울하고 기묘한 소외감은 정재호의 그림 속 벽돌 사이사이에 스며들어 있는 느낌과 멀지 않은 친척이다. 한동안 변두리의 아파트를 주로 그리던 정재호는 요즘, 도심에 속하지만 번화가에서 조금 비껴난 공간에 자리 잡은 낡은 건물들에까지 손을 뻗었는데, 이러면서 그의 그림에는 더욱 미묘한 뉘앙스가 담기기 시작했다. 명동과 소공로의 낡은 건물을 그린 최근의 작품들은 대도시의 후미진 부분에 숨은 어둠을 조심스럽게 가리키고 있다. 붉은 원과 푸른 원이 그려진 창문으로 가득한〈현대 오락장(2007)〉같은 그림은 건물 자체가 사람을 삼키려 도사린 올무 같은 느낌마저 준다.〈종로빌딩(2007)〉,〈아현빌딩(2006)〉,〈소공로빌딩(2007)〉등의 벽면 뒤, 저 기묘한 표정의 창문 뒤에는 대체 뭐가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살 길을 도모하면서 움직이고 있을 공간에 대해 필자처럼 ‘도시전설(urban legend)’마냥 접근하는 태도는 경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정재호라는 작가의 감성이 새로운 단계를 암시하고 있음은 짚어 봐야겠다. ●〈창신타워(2007)〉와〈적산타워(2007)〉같은 그림은 정재호의 최근 작품들 중에서는 이례적으로 낮은 주택을 그린 것이다. 이 그림들에서 작가는 여러 채의 주택들을 화면 속에서 쌓아올려 크고 높은 덩어리로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거대한 집적물이 종종 등장하는 미야자키 하야오(宮崎駿)나 오토모 가쓰히로(大友克洋) 등의 애니메이션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들 그림은 초현실적인 느낌을 더욱 짙게 풍기는 한편, 정재호의 그림이 지녀 온 ‘기념비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드러냈다.




정재호_북극성_한지에 채색_91×61.5cm_2006


기념비적인 성격은 앞서도 언급한 대로 2004년 무렵부터 정재호가 건물의 정면을 화면 가득 담기 시작한 이래 그의 그림을 규정해 왔다. 작가는 아파트나 고층 건물처럼 그 자체로 높은 건물들 뿐 아니라 앞서 언급한 〈창신타워〉나〈적산타워〉처럼 낮은 주택들까지도 화면 속에서 높다랗게 쌓아올렸는데, 이는 작가가 은연중에 기념비성을 의식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허물어져 사라지는 건물을 그리는 화가가 영속적인 기념비를 추구한다는 설명은 모순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원래 안정에 대한 희구와 소멸에 대한 동경은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긴장을 증폭시킨다. 폴란드의 유명한 초현실주의 화가 벡신스키(Zdzislaw Beksinski)의 그림에 종종 등장하는 거대한 형상들처럼, 혹은 큐브릭(Stanley Kubrick) 감독의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2001 : A Space Odyssey)〉에서 문명의 힘이 잠재된 존재로 등장한 ‘모노리스(monolith)’처럼, 기념비적인 것에 대한 추구는 근원을 동경하고 신비로운 섭리를 명상하는 태도에서 파생하곤 한다.




정재호_다지류_한지에 채색_59×44cm_2006


한때 정재호는 자신이 평면에 그리던 아파트 건물들을 입체물로 제작했는데, 이들 입체물은 조형적인 일관성을 해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기념비적인 성격에 비춰 본다면 그가 건물을 입체물로 제작한 것은 논리적인 귀결이다. 돌이켜 보자면, 이 작가는 아파트 건물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생각은 했지만 아파트 건물에 담긴 구체적인 생활의 모습을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게 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작가의 관심이 어느 쪽을 향했는지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 2003년에 열었던 개인전〈〈인천여행〉〉에서는 작가 정재호의 ‘영탄(永嘆)’이 두드러졌지만, 이후 아파트들을 바라보며 기념비성을 분명하게 의식하기 시작한 작가의 눈빛에는 조금씩 다른 색채가 스며들었다. 초기 작품들에서 진하게 배어 나오던 애상과 회한(悔恨)의 느낌은 점차 잦아들고, 이제 그의 그림은 조금은 냉정하고 음울해 보이지만 뉘앙스는 더욱 풍성해졌다. 심연(深淵)을 바라보는 사람은 외로울 수밖에 없다. ■ 이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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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의 기억

권기동 회화展

2007_0418 ▶ 2007_0430



권기동_데미안 허스트가 있는 풍경_캔버스에 유채_162.2×130.3㎝_2006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김진혜 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5:00pm




김진혜 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49번지 2,3층
Tel. 02_725_6751
www.kimjinhyegallery.com






“일상(혹은 풍경)에 대한 폭력적 시선” ● 과거 2005년 전시도록은 인상적이었다. 특히 앞면의 디자인이 그랬다. 표지에는 전시제목이나 작가의 이름대신 작가의 판화작품 중 하나를 보여주는 것이었고, 이것은 어떤 문구보다 선언적이었음을 기억한다. 두 겹으로 접어서 안쪽은 자동차 백미러에 비쳐진 작가의 안경 쓴 두 눈과 거울의 그림자를 그리고 바깥쪽은 이 형상의 윤곽을 따라 잘라내어, 속의 이미지를 투과시키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그 시선은 단견에 몰래보는 시각(Scopophilia)의 표상으로 이해되었다. 표지의 형식을 문제 삼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가 백미러로 반사시켜 보여준 그의 시선이 궁금할 뿐이었다. 그 눈은 응시(gaze)하는 눈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선은 반사를 통해 누그러지기는커녕 더욱 날카롭게 대상을 향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시선으로 그는 자신의 주변을 관찰했었고, 또한 재현의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시선이 무엇을 향했는지는 전시도록 내부에 그리고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이 설명하겠지만, 혹시 작가 자신에게로도 향하지 않았는지 생각된다.




권기동_데미안 허스트가 있는 풍경_캔버스에 유채_162.2×130.3㎝_2006


호기심이 향한 다른 지점은 바로 그 눈에 서린 다중적인 정서였다. 가린 눈으로 인해 한 특정한 존재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그 감정상태가 중화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 눈만으로 드러난 작가의 심리적 상태 또한 정확히 정의 내리기가 어렵다. 뒤따라온 차를 성가시게 바라보는 것인지, 무심코 지나친 것에 대해 관심이 발동한 탓인지, 아니면 뒷좌석의 동행인을 쳐다보는 것인지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상황은 매우 암시적이다. 단지 그의 시선이 왠지 긴장돼 보이며, 약간은 피곤해 보인다. 한편으로 매우 무관심한 시선으로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선이 주목한 대상에 대해 ‘폭력성’도 읽혀지는 것은 왜일까? ● Seoul 2005, Central Pennsylvania 그리고 다시 Seoul로 나뉘어져 제시된 작업들은 아마도 그것들이 지닌 지리적 그리고 시간적인 위치를 지시한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대리하는 작품들은 어떤 특정한 장소와 시간의 풍경이며, 더 나아가 작가가 재해석한 감정의 기억들이다. 대체로 장소에 대한 기억은 생생하게 그려진 건물과 길 그리고 주변의 환경들로 나타나지만, 시간과 결부된 기억의 표상들인 사람들은 부재(absence)와 현존의 중간현상으로 처리되어졌다. 붉게 칠한 면 위에 중복된 인물들 아니면 굵은 선의 실루엣으로만 그려진 형상들 혹은 거친 붓질로 쓸려나가 반쯤은 지워진 상태로 남은 얼굴이나 몸들이 그런 예이다. 형상들은 시간과 결부된 풍경 속에 현존과 부재의 중간지점에 있다. 그런 풍경 속에서 작가는 역사와 사회 속에 숨겨진 폭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아니 - 롤랑 바르트의 입을 빌리면 - 그것을 보고 있었던 그의 눈(시선)을 보여주었다.




권기동_8월_캔버스에 유채_189.4×91.9㎝_2006


최근 ● 압구정동. 건물사이 빼곡이 자리 잡은 5층 건물 옥상에 그는 3평도 채 안 되는 작업실을 마련했다. 둘이 들어서면 비좁은 공간 속 한켠에서 그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구석에는 이번 전시를 위해 그려진 그림들이 대충 쌓아져 있었고, 20호 정도의 그림이 작은 이젤 우에서 막 그려지던 참이었다. 작업실 밖 옥상 위에는 아래 층 고기집이 설치해 놓은 배기통이 쉴 새 없이 모터소음을 내며, 타는 냄새를 내뱉고 있었다. 그런 환경에서 그는 유화로 (유화로만!) 풍경을 그려내고 있었다. ● 사실적이며, 회화적인 특성이 강한 유화들. 사실 그의 그림을 보면 그리다만 혹은 다시 그리기 위해 둔 극장 간판을 연상시키는 ‘말초적인’ 채색방식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두껍게 발라진 안료의 층위를 간단히 덮어버리는 색들은 그 공격적인 대비로 인하여 그려진 상황에 긴장감을 유도하는 원초적인 기능을 수행한다. 이러한 방식은 고유색에 비해 한 채도 혹은 한 명도 높은 색을 구사함으로서 발생하기도 하고, 중간 톤을 생략한 명암처리로 사물의 형상을 드러내는 데에서도 찾을 수 있다. 작가는 이런 색 정서를 구식영화, 즉 technic color로 프린트된 영화의 그것에 비유했다. 더 나아가 작가는 밀려진 칠로서 거친 표면효과도 만든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유화를 보다 회화답게 만들어준다는 데에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이것이 리얼리즘을 구축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사실에 대한 회화적 반응이라는 점이 더 올바른 판단일 것 같다. 사실 그가 쓰는 채도 높은 색들은 자본주의의 욕망을 뒤집어쓴 도시의 외관에 적절하게 상응한다. 보색과 형광의 높은 대비로서 드러나는 간판들이 그렇고, 건물의 외장도 다르지 않다. 가히 외설적이라 할 수 있는 도시의 외장들 속으로 작가의 응시는 빠르게 진입한다. 넓은 도로 위에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행렬과 그 속도로 다가오는 건물들은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질감으로 우리의 시지각에 마찰한다. 그는 정말로 도시의 속성을 잘 표현할 줄 아는 작가다.




권기동_봄_캔버스에 유채_116.8×91.9㎝_2006



권기동_커밍쑨_캔버스에 유채_116.8×91.9㎝_2006


작가의 응시에는 방향성과 속도가 함께 느껴진다. 작가는 시점 혹은 포커스를 두고 그림 속의 시각을 조인다. 그리고 그 속으로 향한 시선은 매우 가파르다. 그러나 작가는 그림 속에 통일된 소실점(varnishing point)을 두지는 않는다. 몇몇의 작품들은 여러 개의 초점으로 분산된 그리고 시차를 두고 본 한 장소를 붙여놓음으로서 시공의 불완전한 결합을 보여주며, 때론 원근법적으로 통일되어 보이는 작품에서조차 정확한 물리적 관계를 왜곡하거나, 불안한 공간을 구성해 낸다. 더욱이 느닷없이 나타나는 대상들, 예를 들면 서울대 미술관이나 데미안 허스트의 거대한 조형물 따위들이 평온할 것 같았던 풍경을 이질적으로 만든다. 이렇듯 권기동의 회화는 풍경을 이성적으로 재현한 결과가 아니라 즉흥적이며 자의적인 조작이고 그래서 낯설다.




권기동_The Night_캔버스에 유채_233.6×80.3㎝_2007



권기동_8 AM_캔버스에 유채_162.2×112.2㎝_2006



권기동_5 PM_캔버스에 유채_162.2×112.2㎝_2006


익숙한 풍경을 보는 낯선 시선 작가 권기동의 풍경은 우리에게 익숙한 곳을 보여준다. 정확히 어디인지조차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작품의 제목이 장소를 지칭하기도 한다. 제목이 없어도 알만한 낯익은 풍경들. 그러므로 작품들은 특별한 관심을 보여줌이 아니라 단조롭기조차 한 일상적인 풍경이며, 실명(實名)의 풍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익숙해진’ 우리의 지리적 정보와 기억에 대해 작가는 낯선 시선을 보낸다. 그 시선이 닿은 풍경은 이제 더 이상 평범하지 않다. ● 낯설게 보기는 비판적인 시각 태도이다. 친근한 대상에는 비판도 없다. 작가는 일상적인 풍경을 낯설게 보여줌으로서 그려진 대상을 다시 한번 재고하게 만들고, 대상과 보는 주체와 관계를 재설정하게 한다. 그렇다고 작가의 비판성에 정치적 해석을 가하는 것은 어려울 것 같다. 그의 정치성은 -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 기존의 단순한 이분법적 혹은 당파적 논의로 간단히 해결되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의 비판의식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그리고 더 나아가 감정의 바닥에 쌓아진 충동적인 분노에서 직접적으로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분노는 대안이 없음에 탈 정치적이고, 의식의 공동체를 형성하기에는 논리적 구심점이 빈약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선은 불온하게 보인다. 그런 그의 시선을 대리하는 풍경은 작가의 개인적 경험과 감성을 집약하면서 바라보는 것들에 시비를 거는 발언 행위가 된다.




권기동_War Memorial Painting_캔버스에 유채_324.4×130.3㎝_2006


Hardboiled Landscape ● 권기동의 풍경화는 싸구려 극장 간판이나 이발소그림에 가까운 통속적인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키치적인 재현은 아니다. 작품들은 자극적인 화법으로 대상을 낯설게 하고 더 나아가 보는 관객에게 모종의 불안감을 준다. 그러나 키치들과는 달리 이러한 불안감이나 통속성으로부터 안전한 심적 거리를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끊임없이 대상에 대한 관심과 함께 거부감을 유발시킨다. 어떤 의미에서 그의 작품은 도발적이라고 해야 옳겠다. 도발하는 것에는 키치가 담을 수 없는 감정이 있다. 키치의 태도는 대체로 설득하는 것이다. ● 이와 유사한 것을 우리는 이미 80년대 민중미술에서 보았었다. 권기동과 이전의 민중작가들과의 결정적인 차이는 그가 그린 그림이 어떠한 교화적 혹은 제안적인 수사(修辭)를 결하고 있다는 점이다. 권기동의 풍경은 폭력적인 그의 시선과 등가를 이룬다. 그리고 필자는 그의 풍경을 하드보일드 풍경이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것은 그가 보여준 그림들이 어느 정도의 개연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작가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던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재해석 때문일 것이다. 잠정적으로 결론을 내리자면, 권기동의 회화작업은 사실성과 즉물적 성격을 적당히 함유하고 있으며, 그것을 뛰어넘는 불온한 상상력으로 구축된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 낯선 세계를 보는 시선은 거대하고 제도화된 폭력 앞에 무력하고 일상에 지친 피곤한 눈을 가진 한 개인의 비판적 상상력이다. 나는 그의 상상력과 시선을 지금까지 일상 속에 잊혀져버린 그러나 그것을 향한 폭력의 한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 김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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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nney & Strange

William Wegman 개인展

2007_0330 ▶ 2007_0722



William Wegman_Opening_Pigment Print_19×13inch_2001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성곡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30_금요일_05:00pm

주관_성곡미술관
후원_산업은행, 삼성, 국민은행, LG





성곡미술관
서울 종로구 신문로 2가 1-101번지
Tel. 02_737_7650
www.sungkokmuseum.com






큐레이터 노트 ● 윌리엄 웨그만의 전시를 위해 작품을 고르는 일은 매우 즐거운 일이었다. 작업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와락 달려드는 그의 애완견들은 웨그만의 유쾌하고 별난 작업을 대변해 주었다. 윌리엄 웨그만은 애완견을 의인화하여 사진을 찍는 작가로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특히 1970년 6살된 바이마라너 애완견 만 레이를 갖게 된 후 1982년 만 레이가 죽을 때까지 그의 사진기는 늘 ‘만 레이’와 함께 했고, 그는 만 레이를 예쁘게 치장시켜 주기 위해 집에 있는 물건들을 포함하여 중고 가게에서 산 온갖 물건들로 장식하였다. 그 후 웨그만의 애완견들은 늘 웨그만과 함께 했고, 텔레비전이나 광고, 달력과 책을 통하여 평범하고 익살스러운 그의 관심은 그의 애완견들을 통해 나타났다. 무엇보다도 나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웨그만의 회화를 보고 더 이상 그의 애완견 사진에만 매달리지 않았다. 그는 우연히 회화의 소재로 엽서나 연하장을 발견하게 되는데, 엽서에 그려진 이미지보다는 그 엽서가 어떻게 사용되었는지, 그 엽서나 연하장에 적혀있는 내용들을 떠올리며 그려나간 회화들은 대담한 터치와 강렬한 색을 더해 무한한 상상의 세계를 불러 일으켰다. 회화 작업에서 보여주는 우연에 의한 불완전성의 효과는 그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보면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내가 어렸을 때 내 방은 해적이 그려진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는데, 그 벽지의 그림은 잘못 그려져 있어서 해적의 얼굴과 윤곽선이 어긋나 있었다. 사다리에 매달려 있어야 할 해적이 공중에 매달려 있는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나는 엄청 고민을 했었다. 내 작품도 이런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한 주변의 것들이 늘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때로는 엉뚱한 곳에 있는 그런 상황을 표현한 것이 내 작품이다.”




William Wegman_Leafy Vale_Pigment Print_30×24inch_2005


잘못 인쇄된 벽지의 그림이 이상한 시각적 효과를 내게 된 원인을 고민하면서 그는 허공 속을 떠다니게 되고, 벽지 속 해적을 상상하며 결국 일상적인 소재들을 어긋나게 배치하는 도발성을 보여주게 된다. 의도적으로 물감을 뚝뚝 흘리거나 얼룩지게 하기도 하고, 꼼꼼한 것 같지만 빠른 붓질로 대범하게 표현된 그의 회화는 엽서 속 이미지와 함께 서사적 스토리를 보여준다. 윌리엄 웨그만은 재미난 유머와 말장난 그리고 기발한 감각을 가지고 우리에게 유쾌하면서도 엉뚱함을 자아낸다. 그의 전시제목 중 하나인 ‘Funney & Strange’에서만 보더라도 우리는 Funny의 스펠링이 Funney가 아니라 Funny임을 알고 있다. 그는 가벼운 유머로 즐거움 -Funny(Funney-Ha Ha) & 어둡고 인간적인-Funny(Strange)를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삶의 어둡고(Strange) 힘든 면을 가볍고 즐거운(Funny) 것으로 풀어나가고자 한다. 어쩌면 비논리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상황은 우리를 더 웃기고 재미있게 만든다. 비디오, 설치, 조각, 해프닝, 퍼포먼스 등 자유로운 작업 방식을 추구했던 웨그만의 작업은 1972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더욱 절정기를 맞이하게 된다.




William Wegman_Blue Hat_Pigment Print_24×30inch_2006


초기에 그는 기록으로서의 사진과 퍼포먼스를 하였다면 이제는 각색된 시나리오 속에서 우스꽝스러운 사진들을 만드는 데에 주력하게 된다. 그는 흑백 사진들과 단편 비디오 작업으로 호평을 받은 후 1970년 후반부터는 원래 웨그만의 전공인 회화를 다시 살려 드로잉 작업에 주력하게 된다. 연필과 잉크를 사용하여 단순하다 못해 미숙하게까지 느껴지게 표현된 그의 드로잉은 종이와 연필과 간결한 선이 만들어 낸 최고의 걸작품이다.




William Wegman_Tall Hat_Pigment Print_44×36inch_2005


윌리엄 웨그만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1979년부터 찍기 시작한 24x20인치 크기의 대형 폴라로이드 사진이다. 그는 폴라로이드사에서 제작한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여 뚜렷하고 강렬한 색으로 마치 인쇄된 광고처럼 매력적으로 표현하였다.




William Wegman_Leaf Line_Pigment Print_44×36inch_2005


또한 “비디오는 TV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중략) ... TV와 다르게 제작비가 들고 직접 만들어야 하지만, 관람객과 함께 있지 않아도 그들에게 작업을 보여줄 수 있어서 비디오 제작은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다”는 웨그만의 솔직한 유머를 가진 비디오 작업은 NBC 방송국의 ‘생방송 토요일 밤(Saturday Night Live)’과 PBS 방송국의 ‘쎄서미 스트리트(Sesame Street)’ 등으로 대히트를 하게 되고, 2004년 노키아와 15초짜리 핸드폰 광고로 상업광고에까지도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William Wegman_Untitled_Altered Postcards_22×30inch


그는 또한 어린이들을 위해서 그의 애완견들을 캐스팅하여 다양하게 연출하여 신데렐라, 빨간 모자, 농장의 일상, 깜짝 파티 등 수많은 책을 출판하여 많은 어린이들에게 사랑 받고 있다. 지난 겨울 뉴욕에서 웨그만을 만나고 서울로 돌아오기 위해 공항으로 가던 중 한바탕 웃음을 쏟아내었다. 택시기사에게 나는 ‘JFK’라고 해야 하는데, ‘KFC’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 에프 케네디 공항을 가자고 해야 하는데, 캔터키 프라이드 치킨에 가자고 한 것이다. 아마도 한 편의 연극 같은 그의 작품을 보고 난 후유증이 아니었나 싶다.




William Wegman_Funney & Strange展_2007_전시광경


웨그만은 단순히 재치만을 보여주지만은 않는다. 그는 그의 작품 속에서 그의 재치를 적당히 비켜가면서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고민하고, 이해하고, 배우고 그러한 과정을 통하여 그의 작품을 아주 깊이 이해하도록 유도한다. 이번 전시를 준비하며 나는 그 동안 웨그만이 비디오, 에니메이션, 드로잉, 회화, 콜라주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작업해 온 모든 과정들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놀라움과 괴로움과 기쁨을 동시에 주는 웨그만의 작품을 통하여 재미난 상상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더불어 이번 전시회를 위해 함께 작품 선정에서부터 마무리 과정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준 윌리엄 웨그만과 그의 아내 크리스틴 버진 그리고 스튜디오 식구들(제이슨, 에밀리, 에리어)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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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풀

성민우 회화展

2007_0418 ▶ 2007_0424



성민우_흔한풀_비단에 수묵과 금분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노암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418_수요일_05:0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금빛으로 그려내는 생장과 번식의 아름다움 ● 성민우는 식물의 생장과 번식의 영고성쇄를 형태와 이미지로 추출하여 표현한다. 대체로 금빛으로 그려내는 풀의 이미지는 과도한 크기와 형태의 반복, 색채의 강렬한 대비와 함께 절정의 이미지를 제공한다. 나고 죽음을 반복하는 지상의 모든 생명의 순환처럼 시간과 기억, 사물과 사물의 공간에 대한 느낌과 암시를 통해 우리는 사물이 시공간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 그러나 성민우가 주목하는 것은 그러한 시공간에 존재하는 본질현상에 대한 추구이다. 기법이나 양식의 문화적 기억을 최소화 하면서 형태의 순수성, 생장의 추상적 성격을 그려낸 그의 작업은 형태미와 조형이념에서 생명의 이상과 원형이 만나는 순간의 광휘를 화폭에 전개시키고 있다.




성민우_흔한풀-겨울여뀌_비단에 수묵과 금분_161×485cm_2007



성민우_흔한풀-겨울쑥_비단에 수묵과 금분_161×485cm_2007


성민우는 비단에 수묵과 금분, 혹은 채색으로 망초, 돼지풀, 민들레, 질경이, 왕고들빼기 등 너무나 흔한 풀들을 금빛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히 금빛으로 그려내는 생장과 번식의 아름다움처럼 생명의 본��?에너지를 ‘아름답다’고 하고 그 ‘아름다움’을 찰나에 보이는 금빛으로 묘사한다. 생명과 함께 죽음을 반복하고 절정의 순간을 직관한 이미지는 강렬하고 압도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러한 금빛 이미지는 전통의 청록산수 및 금벽산수, 또한 화엄경 변상도나 벽화의 관음보살상에 나타난 강력한 이미지를 계승하고 있다.




성민우_흔한풀-큰방가지똥_비단에 채색과 금분_165×200cm_2006



성민우_흔한풀-왕고들빼기_비단에 채색과 금분_165×200cm_2006


금번 작업에서 보이는 성민우의 화면은 필선이 굳세면서도 세밀하다. 수묵과 농채를 사용하면서도 세부묘사를 확대시키고 사실적이면서도 사실을 넘어서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준법과 농담, 시각의 다채로운 바라보기를 통해 깊이를 표현한 전통의 화면 대신 평면화된 화면에 장식적이고 단순강렬한 형태와 색채를 가미해 절정의 형태감을 전달한다. 여기서 성민우가 표현하는 절정의 이미지는 청록산수 및 금벽산수의 기법과 양식전통이나 문화적 서사를 벗어나서 개인적인 시각을 이루게 되는 경험과 양식화, 형태미를 추구한다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성민우_흔한풀_비단에 수묵, 채색, 금분_2007


과도한 크기는 압도적인 이미지를 나타내고 자극한다. 형태의 반복은 그러한 이미지를 고정시킨다. 금빛이 바탕이 되는 보라색과 보색의 색채는 강렬한 대비를 이뤄 메시지를 발산한다. 형태를 더욱 뚜렷하게 하고 색채는 강렬하게 나타내는 그의 작업은 동양화 일반의 서사와 관념을 일정정도 단절시킨다. 산수에서 보이는 형태의 골격과 율동, 그 속에서의 미감체험을 시간 속에서 축적하는 전통의 동양화 관념과는 다르다. 시간의 지속을 제거하고 바라본 형상의 직관을 통해 형태미의 추상을 추출해 낸다.




성민우_흔한풀-겨울여뀌비단에 수묵과 금분_100×100cm_2007



성민우_흔한풀-겨울쑥_비단에 수묵과 금분_100×100cm_2007


성민우의 작업은 관계의 맥락이나 비유적인 이미지로부터 단절되고 현실로부터 격리된 이미지를 통해 특정한 지각인상을 나타내려하고 있다. 관습적 현실을 넘어서서 현실이면서도 초현실의 공간을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사물과 공간, 현실의 일상성과 항구성을 흔들어 놓고 관습적 사유를 탈각하려는 노력은 이러한 양식화와 형태미를 통해 제공되고 있다. 사고의 정형성을 탈피하고 감각적 지각인상을 고도화하여 이미지의 폭발적인 힘을 제공하려는 성민우의 작업은 세대의 새로운 전통을 형성하면서 현 동양화 공간에서 실험중이다. 그 실험이 성민우에게는 과도한 형식파괴보다는 관념과 이미지의 순수형태와 조형감으로 점진적으로 진화해 가고 있다고 하겠다. ■ 류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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