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노레 도미에-파리의 풍자꾼
2008년 오노레 도미에 탄생 200주년展
2007_1214 ▶ 2008_0131 / 일요일, 국공일 휴관

오노레 도미에_철도열차 안에서 4_종이에 석판화(L.D.3299)
르 샤르바리-1864년 8월 12일
프뤼돔 씨: "질식해 죽을 위험은 있어도 암살될 염려 없는 삼등객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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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214_금요일_02:00pm
관람시간_10:00am-6:00pm / 입장마감_05:30pm / 선거일 휴관
관람요금_3000원 / 관악구민, 단체20명 이상, 예약 필수_2000원
서울대학교 학생 및 교직원_무료
교육프로그램_MoA 어린이 교육프로그램 시리즈 6(www.snumoa.org 참고)
협력_이타미(伊丹)시, 이타미 시립미술관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1,3,4,5 갤러리
서울 관악구 신림동 산56-1
Tel. 02_880_9504~5
www.snumoa.org
오노레 도미에가 태어난 1808년부터 그가 생을 마감하는 1879년 사이 프랑스는 크고 작은 시민항쟁들이 끊이지 않는 정치적 질풍노도의 시대를 경험했다. 이러한 시민항쟁들은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시민계층이 세속제의 보수왕권의 종말을 요구함과 동시에 스스로만을 살찌우기 바쁜 귀족층의 횡포에 대항하여, 노동을 할 권리와 그 대가로 빵을 살 수 있는 기본적인 생활의 보장을 주장한 것으로, 많은 시민들의 사상과 구속, 감금이라는 희생을 치르며 진행되었다. 1830년 7월 혁명, 1832년 파리폭동, 1848년 2월 혁명, 6월 혁명 등은 봉건군주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구축하려는 시민의, 나아가서는 시대의 움직임으로 기억된다. 이 격동의 중심지 파리에서 도미에는 타락한 정치가들을 풍자화로 날카롭게 비판하는가 하면 생활고에 허덕이면서도 일상 속에서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소시민들의 모습을 애정 어린 따스한 시선으로 기록하였다. 마르세이유의 액자 집 아들로 태어난 도미에는 인기를 끌지 못했던 유화작업을 대신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1829년부터 일간지에 정치풍자화를 기고하기 시작한다. 국왕의 살찐 얼굴을 서양배에 비교하여 우스꽝스럽게 풍자한 도미에의 캐리커쳐는 서민층에 많은 인기를 끌었으나, 보수파 정부에게 정치범으로 몰려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후로 도미에는 검열을 피할 수 있는 내용으로 주제를 바꿔가며, 파리시민들의 일상과 여가생활, 사랑과 자녀교육 등을 유머 가득한 필치로 그려냈다. 그는 석판공방에서 견습생활을 하던 21살 때부터 시력저하와 곧 이은 시력상실로 더 이상 작품 제작이 불가능해진 65살까지, 많게는 일년에 약 125점(3일에 한 작품 꼴)을 제작, 일생 동안 총 약 4천여 점의 석판화를 남겼다. 도미에에게 있어 이 작품들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임과 동시에 프랑스 역사의 기록이자 소시민에게 주어진 발언의 장이었으며 당대를 살아가는 한 파리지안으로서의 자화상이기도 하였다. 오노레 도미에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여 일본 이타미시립미술관과의 교류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서는 1830년 7월 혁명 직전에 제작된 작품번호 1번에서부터 1868년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전쟁을 암시하는 말년의 작품까지 총 146점의 석판화를 [모던 파리], [부부와 가족], [여행과 여가], [정치풍자]의 네 개의 소주제로 분류하여 전시하고 있다. 이 외에도 당시의 정치가들의 얼굴을 희화화해서 재현한 풍자조각, 도미에의 초기 유화양식을 엿보게 해주는 회화작품을 포함한 총159점의 작품을 만나볼 수 있다.

오노레 도미에_살롱의 관중 9_종이에 석판화(L.D.2299)_≪르 샤리바리≫-1852년 5월 14일
“경쟁자의 작품을 검토하는 예술가들”
L.D.는 Loys Delteil의 약자로 도미에의 석판화 전체 도록의 저자명이다.
모던 파리 ●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좁은 돌담골목에 오수가 흐르던 중세의 도시에서 개선문이 들어서고 방사선의 대로 불르바드가 뻗어나며 실크해트와 거대한 드레스를 차려 입은 중산계층이 도시를 활보하는 모던한 도시로 거듭난다. 도미에는 1855년 파리만국박람회와 미술전람회인 살롱, 식물원을 찾은 관광객을 비롯하여 새로이 등장한 세력인 여성운동가들의 활약상까지 빠짐없이 관찰하였다. 〈살롱의 관중〉은 ≪르 샤리바리 Le Charivari≫지에 1852년 4월부터 5월까지 연재된 11점의 프린트 연작이다. 파리에서 매해 열리는 미술 전람회인 살롱은 약 백만 여명의 방문객을 끌어 모으는 미술 축제로, 수백 명의 화가와 조각가들의 작품을 전시했다. 예를 들어, 1834년의 살롱에는 첫날에만 3만 여명의 방문객이 모였다. 두 달이라는 전체 기간 동안 총 백만 여명의 관중이 전시를 보러 왔다. 어떤 날에는 티켓 가격이 20수(약 만원)로 내리거나 무료인 경우도 있어 많은 관람객이 몰려들었다. 살롱은 새롭고 현대적이며 전위적인 미술가들에게뿐만 아니라 고전적인 화가들에게도 절호의 시장이었다. 사설화랑과의 연결이 쉽지 않은 진보적 화풍의 작가들에게는 특히 경제적으로 중요한 장소였다. 심사위원은 작가의 미래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보수적인 심사위원에 의해 살롱에서 한 번 거절당한 작가는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종종 살롱에서 거절당한 작품들로 구성된 전시가 열리기도 했는데, 1855년에도 쿠르베의 작품이 살롱에 전시되기에 너무 혁명적이라 여겨져 거절당하자, 살롱 밖에서 자신만의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보들레르는 살롱에 대해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 “우리 시대 파리에서 들라크루아에 비할 수 있는 작가는 두 명뿐이다. 캐리커쳐 작가인 도미에와 앵그르다. 이 세 작가의 공통점은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노레 도미에_결혼에 관한 풍경 7_종이에 석판화(L.D.630)_≪르 샤리바리≫-1839년 6월 9일
"결혼한 지 6개월 공감은 영혼의 결합"
부부와 가족 ● 도미에가 그리는 부부와 가족상에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한 인간의 모습이 묻어난다. 19세기파리에서도 부부는 서로를 의지하며 기쁨은 두 배로, 때로는 미움도 두 배로 증폭되어 끊임없이 다투고 화해하는 나날의 반복이었나 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둘을 잇는 것은 부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은 자식들이다. 〈결혼생활〉은 60점의 연작으로 1839년 5월 19일부터 1842년 10월 12일 사이에 ≪르 샤리바리≫지에 게재되었다. 이 연작이 발표되었을 때, 도미에는 그의 부인인 알렉산드린 다시Alexandrine Dassy와 아직 결혼하지 않았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연작에 상냥한 아내로서 여러 차례 등장한다. 당시 파리에서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그리 편하지 않았다. 남성이 여전히 과거의 전통적인 사고방식을 고수하고 있던 때에 여성 해방 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므로 이 연작에 도미에가 묘사한 사소한 말다툼이나 분쟁들은 당시 대중들에게 익숙한 것이었고 특히 이웃의 결혼 생활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었다. 도미에의 판화를 정리한 로이스 델테이유 Loys Delteil는 ≪르 샤리바리≫지의 1월 판에서 이 연작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파리의 가족들은 도미에의 작품을 통해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비판정신을 본다. 그는 일상에서 겪는 사소한 불행과 재난들을 진솔하게, 그러나 희극적으로 그려낸다. 이 예술가를 뛰어나게 하는 것은 바로 이 무자비한 솔직함이다. 독신으로서의 삶을 끝내려고 고심하는 자들에게 이 연작은 위로가 될 것이며, 모든사람들에게, 기혼자들에게도 또한 웃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 직후에 〈여성사회주의자〉와 〈청탑파 ??派〉가 등장하여 남성 우월주의를 끝내고, 남녀 평등을 주장했다.

오노레 도미에_철도열차 안에서 6_종이에 석판화(L.D.3301)_≪르 샤리바리≫-1864년 8월11일
"즐거운 여행을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여행과 여가 ● 19세기 파리의 휴일을 담은 모습에서는 더 이상 농업에 매달리지 않아도 되는 중산노동자층들의 야외 나들이가 중요한 주제가 된다. 파리외곽의 호수나 전원지대를 하루에 왕복 할 수 있게 해준 철도열차의 대중화는 도미에 이후의 인상파화가들에게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철도열차 안에서〉는 시사일간지 ≪르 샤리바리≫지에1864년 8월과 9월사이 게재되었던 6점의 판화 연작이다. 고속으로 파리와 파리 근교를 잇는 증기기관차가 등장함에 따라 여유 있는 파리인들 사이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교통수단에 몸을 싣고 교외로 나가 주말을 즐기고 돌아오는 짧은 여행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새로운 기차 여행은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만 했다. 밀폐된 공간 안에서 승객들은 자주 강도를 당했고, 때문에 이 새로운 교통수단의 이미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이 작품에서는 단둘이 일등칸에 탄 승객들이 서로를 경계하며 앉아있고 각자의 손에는 권총까지 쥐어져 있다. 당시의 열차는 차량 간에 통할 통로가 없고 밖에서 열쇠를 거는 형태였으므로 일단 출발하면 다음 정차역까지 완전한 밀실상태였다. 따라서 실제로 밀실상태의 일등칸 속에서 폭행이나 살인사건이 일어났으며 유럽의 추리소설들은 이런 사건들을 주제로 쓰기도 했다. (이타미시립미술관 ‘도미에’ 도록 77번 참조.)

오노레 도미에_L’Association Mensuelle_종이에 석판화(L.D.131)
월간석판화협회-1834년 1월
"입법부의 배.1834년 타락한 각료석의 풍경."
정치풍자 ● 도미에의 오랜 석판화 작업은 정치풍자화에서 시작하여 정치풍자화로 끝을 맺는다. 진실을 직시하고 거침없이 부정을 고발하는 도미에의 통쾌한 이미지들은 대부분이 문맹이던 당시 서민들의 뇌리에 그 어느 칼자국보다도 강력하게 각인되었을 것이다. 도미에의 정치풍자화들은 시민의식의 고양을 통해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민주화에 기여한 바가 크다. 작품번호 L.D.131은 도미에의 가장 중요한 판화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월간석판화협회에서 판매한 이 석판화는 1832년 8월에서 1834년 7월에 걸쳐 24점이 자금조달의 목적으로 기획된 것이다. (이타미시립미술관 ‘도미에’ 도록 39번 참조.) 이 판화는 이들이 대변해야 할 시민들의 민생고와는 멀리 떨어진 자아도취적이고 거만한, 스스로의 명예와 권리를 남용하는 시민대표들의 모습을 담았다. 이 판화는 1834년 입법의회의 정확한 재현으로, 구성원들은 모두 풍자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그들의 대부분은 도미에의 이전 작품에서 개별적으로 다뤄진 적이 있다. 그들은 이 극장과도 같은 공간에 한데 모여, 당시 정치계의 보수성, 부조리함, 무의미함 등을 보여준다. 관람객은 국가를 통치하는 책임을 질만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자격이 부족해 보이는 정치권의 대표들과 직면했을 때 충격을 받게 된다.이 작품의 부제가 "chambre improstituee," 즉, ‘타락한 각료석’이라는 것을 알면 더 재미있어진다. ≪라 트리뷴 La Tribune≫지의 편집장 아르망 마라가 이 표현을 만들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루이 블랑에 의하면, 그는 그가 출간하는 신문에 이렇게 썼다. “우리가 얼마나 이 매음굴에 속아왔고 조롱 당해왔는지!” 이후 의회는 ≪라 트리뷴≫을 고소했는데 재판에서 신문사에게 승소하였다. 하지만 ‘타락한 각료석’이라는 표현은 기억되었다. ≪라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지와 ≪르 샤리바리≫지의 발행인인 필리퐁 Philipon은 이 새로운 표현에 빗대어 "입법부의 배 Ventre legislatif"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 판화는 당시대를 보여주는 자료일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놀라운 작업인데, 도미에는 35명의 의원들 모두를 4열의 반원형의 의회석에 끼워 넣으면서도, 화면에 과도하게 넘쳐 보이지 않게 표현하는데 성공했다. 이 작품은 "트랭스노냉 거리 Rue Transnonain"와 함께 앞으로 일어날 예술에서의 새로운 사실주의를 예시하는 초기 작품으로 간주된다. ■ 서울대학교미술관 모아(Mo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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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Women's History through generational maturation展
2007_1215 ▶ 2008_0113 / 월요일 휴관
수나야마 노리꼬_숨 막히는 세상(A Sultry World)
천, 철골, 인체, 속옷, 방석, 아로마포트, 포프리, 소변병, 노트, 연필, 손전등_1995~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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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1214_금요일_06:00pm~08:00pm
오프닝 퍼포먼스 / 2007_1214_금요일_06:30pm~
이시우치 미야코_수나야마 노리꼬_정소연_서효정_함연주
책임기획_진휘연
후원_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트선재센터
서울시 종로구 감고당길 43 (소격동 144-2)
Tel. 02_733_8945
www.artsonje.org
딸의 생명에서 엄마의 영원함으로-여성의 역사를 기억하는 작은 축제 ● 시몬느 보부아르는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진다고 했다. 즉 ‘여성’은 생물적 정의이기 보다는 사회적, 문화적 정의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이 페미니스트들에겐 혁명의 근거가 되었지만, 여성의 삶 자체를 풍성하게 만들지는 못했다. 여성은 해방될 존재이기 보다는 축복받을 존재이기 때문이다. ● 여성이 만나는 첫 번째 여성의 모델은 그녀의 엄마이다. 엄마를 통해, 여자의 언어를, 습관을, 신체를, 그리고 문화를 배운다. 여성의 시작은 딸이고, 그의 완성은 엄마이다. 그렇게 성장한 과정 속에서 여성성은 역사가 되고 그 안에서 어떤 것보다 강한 힘을 발견하게 된다. ● 여성만이 지닌 생명력의 원천을 생각해보려는 작은 시도에서 이번 전시는 기획되었다. 여성의 삶은 딸과 엄마로 대표되는 그녀의 관계를 통해 구체화되고, 그것을 통해 무한하게 재생된다. 이것이 바로 여성을 기억하는 공유된 의식이다. ● 특히 일본과 한국의 여성 작가들은 새로운 매체와 방식으로 자아와 그들의 어머니를 기억해내고 있다. 낡은 속옷이나 구두로 남은 어머니, 남성에 의해 짓밟히기도 하지만, 깨어진 거울위로 눈부신 머리카락을 넘기는 강인함을 지닌 딸의 이미지는 단순한 기억을 넘어, 여성에 대한 섬세한 기록을 대표한다. 아시아의 여성으로서, 이들은 순종과 겸양을 미덕으로 삼으면서도, 뜨거운 열정과 예술혼을 품었다. 여성의 생태적 본질이자 관계의 형상화인 어머니와 딸이 이 두 나라 여성에 의해 흥미롭게 표현됨으로써, 새로운 문화 형성의 공유로도 이어지리라 믿는다.

이시우치 미야코_Mother's #53가슴_흑백인화_107.5×74cm_2000

이시우치 미야코_Mother's #52구두_컬러인화_19×28.5cm_2003
이번 전시에 초대된 이시우치 미야코(石內都 Ishiuchi Miyako)는 일본이 자랑하는 관록의 사진 작가이다.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을 단독으로 장식했던 「어머니의 것 mother‘s」연작은 세계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작가는 엄마가 사용하던 그녀의 유품들을 소박하게 사진 찍음으로서, 그녀의 삶을 전해준다. 그 흔적은 엄마의 몸을 둘러쌌던 사소한 물건들이기도 하고, 화상으로 얼룩진 엄마의 늘어진 젖가슴 같은 몸의 일부기도 하다. 소박하리만큼 사소한 이들은 우리의 어머니도 사용했던 그런 물건들이고 자녀를 키웠던 어머니 모두의 기념물로 변화한다.

수나야마 노리꼬_숨 막히는 세상(A Sultry World)
천, 철골, 인체, 속옷, 방석, 아로마포트, 포프리, 소변병, 노트, 연필, 손전등_1995~현재
수나야마 노리꼬(砂山典子 Norico Sunayama)는 일본 예술 댄스계의 총아로서 그녀는 거대한 드레스 「숨 막히는 세상 A Sultry World」을 입고 관객들로 하여금 치마 안으로 들어올 것을 유혹한다. 혈관을 흐르는 생명처럼 붉은, 드레스 앞에서 관객은 치마를 들치고 싶은 욕망을 강하게 느낀다. 매혹적인 치마를 드는 순간, 그러나 그것은 여성에 가해지는 성폭력이 되는데, 작가는 욕망의 극단과 성폭력에 무방비한 여성의 원초적 아픔을 대비시킨다.

서효정_기억 공유 장치로서의 자궁_센서와 폐쇄회로 카메라는 사용한 미디어 영상설치_4×4×4m_2007
일본 작가들에 비해, 한국 작가들은 젊고, 새로운 매체와 물성에 대한 관심이 높다. 서효정은 최근 인터액티브 미술로 가장 활발한 작업을 펼치는 작가 중 하나이다. 「기억 공유 장치로서의 자궁」은 그녀가 여성의 자궁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제작한 공간 안에 영상이 결합된 방식이다. 자궁은 생명의 출발지이자 모든 삶의 원형 같은 곳으로서, 우리의 보편적 경험을 환상적 화면으로 옮겨놓았다.

정소연_아날로그 복제에 의한 이미지 변조 : 숨Breath_다채널 영상설치_2000/2007
정소연은 현재 미국에서 작업하고 있는 작가로 그의 작품 「아나로그 복제에 의한 이미지 변조: 숨」은 할머니가 겪었던 자유롭지 못한 숨쉬기에 대한 기록이다. 작가의 생명의 원천이기도 한 할머니의 정열과 힘이 쇠잔해가는 안타까움은 ‘숨‘이라는 의미를 통해 전달된다. 완전한 끝으로서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의 호흡을 나눈다는 의미로서, 이어지는 생명의 힘과 가족의 연대가 느껴진다.

함연주_자화상_혼합재료_35.5cm×30cm/가변크기_2007
함연주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작품에 이용하는 작가로, 이번 전시에서도 마치 어린시절, 엄마가 빗겨주고 땋아주던 머리처럼 길게 자란 머리가 부착된 「자화상」을 제시했다. 머리카락은 여성에게 여성성을 대표하는 상징이자, 모녀가 함께 나누었던 시간의 공통분모이기도 하다. 애틋하지만, 강인한 생명력을 대표하는 머리카락을 통해 역시 끊이지 않는 삶의 기운을 느끼게 한다. ● 여기 모인 여성 작가들은 모두 자신의 뿌리와 정체성을 다양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이들의 작품은 자신에게로 향한 소박한 인정이자 박수이기도 하다. 여성 전체의 역사를 노래하는 그들의 목소리는 생명이 시작된 모체와 딸의 관계를 타고 울리길 바란다. ■ 진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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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클라인 사진전/Life is Art, Art is Life

갤러리 뤼미에르 서울(02-517-2134)
2007-12-12 ~ 2008-02-17
“나에게 사진은 무엇인가?…사진은 삶을 보는 열린 창문이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당신들이 그렇게 보기를 원한다면 나는 사진에 의해 움직이는 예술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예술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 나를 위한, 나의 욕망을 위한 사진을 재조명하기 위한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윌리엄 클라인
둥글게 이어진 통로, 붉은 색과 검정색, 강렬한 그래픽 작업이 작품을 둘러싼다. 전시는 테마가 다른 세 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공간들을 나누는 기준은 도시이다 – 로마, 동경, 모스크바, 파리 그리고 뉴욕. 가장 큰 전시관은 마치 커다란 유리창을 보는듯하다. 무관심과 욕설 안에서 살아가는 도시인들의 무질서한 즐거움이 두 개의 커다란 판에 보여진다. 활기찬 도시와 렌즈의 즐거움을 표현하고 초현실주의적인 콜라주 기법을 세련되게 이용하는 흑백 사진의 대표 작가를 파리지앙들은 만나게 된다. 이 모습은 프랑스 파리의 국립 현대 미술관 퐁피두에서 2005년 12월 7일 – 2006년 2월 20일까지 선보인 20년 만의 가장 큰 회고전, 바로 윌리엄 클라인의 전시 모습이었다. 사진가, 영화 제작가, 그래픽 아티스트와 화가인 클라인과 협력하여 열게 된 이 전시는 50년간에 걸친 그의 다양한 작품 활동을 한 곳에서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프랑스 파리의 국립 현대 미술관 퐁피두 (Centre Pompidou)에서 선보인 윌리엄 클라인의 대규모 회고전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파리에 이어 서울에서 그 전시의 감흥을 이어갈 수 있게 된 점을 영광으로 생각한다.
글 / 갤러리 뤼미에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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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art Attack
임수진 설치조각展
2007_1212 ▶ 2007_1218

임수진_Cloud Man_드로잉_목탄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1226e | 창동5기 단기 입주작가 임수진 개인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12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_10:30am∼06:30pm
노암갤러리
서울 종로구 인사동 133번지
Tel. 02_720_2235
www.noamgallery.com
'자폐증의 다양한 원인 중에서 가장 일반적인 것은 유전적인 요인에서 비롯된 선천적 자폐증이다. 후천적인 요인에 의한 자폐증세는 흔치 않지만 어릴 때 백신주사와 같은 예방 접종을 할 때 과도한 수은이 체내로 투입되어 뇌에 축적되는 것이 자폐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 어디선가 이 기사를 읽고 난 후 임수진은 그 동안 자신을 괴롭혀 왔던 모호하고 괴로운 감정들의 인이 과거 어린시절 맞았던 백신주사에 농축된 수은이 뇌에 축적되었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임수진_Cloud Man_공간설치_스티로폼_2007
임수진은 대략 20년 넘게 기억이 남아있는 생애동안 스스로 자신을 표현하는 과정에서 드러냄의 장애를 겪어 왔다. ‘나’를 드러내는 것이 타인으로 하여금 어떠한 반응을 만들어 낸다는 것에서 두려움을 느끼게 된 그녀는 공격적이고 배타적인 외부로부터의 반응을 의식한 자기표출의 장애를 겪게 된다.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고 자기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이러한 혼란과 심리, 정서적 문제들이 무엇 때문인지, 누구에게나 있는 것인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인지를 고민한 끝에 그녀는 이 혼란들이 단지 심리적인 것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 스스로를 되바라보는 목이 꼬여진 털실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이불 속에서는 계란 노른자처럼 숨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때론 누군가와의 대화 사이에서 껌딱지처럼 밟혀 있는 본인의 이미지를 연상하기도 하는 것처럼, 임수진에게 심리적이고 감정적인 상처나 의식들은 언제나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 감각된다.

임수진_Cloud Man_공간설치_스티로폼_2007
When someome attacked my heart, I got a heart attack. 누군가 나의 마음을 공격했을 때, 나의 심장은 마비를 일으키다. ● 공격당한 마음이 심장의 마비로 느껴지는 것처럼, 모호하고 추상적이면서 동시에 꺼내어 놓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감각들은 꾸물거리는 형태들로 머릿속에 자리 잡는다. 이것은 뇌에 축적된 수은 덩어리 때문에 부풀어오른 것인지도 모르는데, 그 모양은 마치 자라나고 움직이며 알 것 같은 형태지만 순식간에 변해버리고 말아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설핏 구름과도 같은 모양이다. 내뱉는 것과 동시에 내부로 쑥 들어가 버리는 말, 그리고 생각의 내용들은 마치 말하고 있는 입이 동시에 말풍선을 집어삼키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중앙의 폐쇄적 공간으로 감지되는 가슴부위 내부의 감정들은 내뱉는 말을 담을 말풍선만큼과 똑같은 크기의 말풍선 주머니를 한 개 더 필요로 한다.

임수진_People in Cloud_스티로폼_80×200×65cm_2007 / 비염적감각_드로잉_목탄_2007
나와 타인,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감각적으로만 받아들여지던 막연한 혼란과 공포는 점점 스스로의 병적인 상태를 진단하게 한다. 더욱이 자신의 감정이 자발적으로 조절 가능한 것이 아닌 신체적 혹은 외부적 상태로부터 지배 받고 있다는 의식은 점점 더 신체적인 병리증상과 자신의 심리적 장애를 동일시하는 태도를 갖게 하였는데, 자폐증세의 원인이 된 수은덩어리에 의해 부풀어진 뇌 공간의 감각 / 모호하고 추상적이면서 꺼내어 놓거나 누군가에게 설명하기 불가능하게 여겨지는 / 폐쇄적 공간으로 감지되는 가슴부위 말 덩어리들... ● 이 어쩌면 생체적이기도 하고 유기적이기도 한 감정의 물리적인 상태들을 '나'의 모양으로 꺼내어 놓고, '너'인 것처럼 바라보는 경치들은 임수진으로 하여금 단지 몽상, 혹은 집착이라 불리우는 것을 유발하는 동시에 그로부터 도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기도 하다. ■ 임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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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사이드 프로젝트 길
김범석 회화展
2007_1211 ▶ 2007_1224

김범석_고사입수도(高士入水圖)_한지, 먹, 호분, 과슈_128×9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0222a | 김범석 수묵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11_화요일_05:00pm
관람시간_10:00am∼06:00pm / 휴관 없음
길은 한 공간에서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을 주선하는 네트워크이다. 길은 새로운 만남을 매개한다. 김범석의 『로드 사이드 프로젝트 Road side project』는 트럭을 타고 몇날 며칠 동안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를 반복하면서 만난 한반도 중부 내륙 이곳저곳에 관한 리포트이다. 김범석은 길을 따라 다니며 길을 만나고 들판과 산을 만나며 집을 만나고 마을을 만난다. 그는 이 만남에서 포착한 생각과 느낌들을 그림에 담는다. 「고사입수도高士入水圖」는 한 여름 풍경답사 여행 중에 강변에 뛰어 들었던 추억을 담은 그림이다. 이 그림은 산수풍경화 자체로서도 빠지지 않은 그림일뿐더러 그 너머 김범석의 로드 사이드 프로젝트 전체의 정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태도는 관수觀水가 아니라 입수入水이다.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산수를 바라보기만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직접 들어간다. 따라서 그의 시선은 산수를 멀찍이 바라보는 대관大觀의 그것이 아니라 길을 따라 달리다가 멈춰선 곳에서 그림을 기웃거리다가, 잠을 자고, 상념에 잠겼다가 마을로 들어가고, 숲으로 들어간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이렇듯 길가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김범석_42번 국도-붉은길_한지, 먹, 호분, 분채, 과슈_128×90cm_2007
김범석 회화의 가장 큰 특징은 전면성에 있다. 김범석의 회화는 언제나 가득 차 있다. 그는 이 가득한 회화적 요소들 사이에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고 그 작은 차이를 통해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극대화하는 힘을 가진 작가이다. 대표적으로 「농원 모텔」이나 「경계에 대하여」연작 등에서 보이듯이 앞의 것과 뒤의 것 사이의 경계는 다만 경계일 뿐이다. 김범석 회화는 앞부분의 밭과 뒤편 숲에 이르기까지 거의 동일한 필치와 색채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특징은 그의 그림을 전면성으로 규정하도록 만든다. 꽉 찬 화면에 어디 하나 빠지는 데 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기표들이 화면 전체를 평등하게 주목하도록 만드는 것이 김범석의 전면성이다. 특히 그는 세로 그림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대관산수의 전경, 중경, 원경의 삼원법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간다. 따라서 그의 그림에서는 여백의 아름다움을 논할 여지가 없다. 그는 전체를 보지 않고 부분을 들여다본다. 그는 풍경 전체의 구조를 멀찍이서 바라보며 음미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의 일부분을 자신의 시선으로 바짝 다가서서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전경이 아니더라도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사물의 거리에 대해서도 그는 할 수 있는 한 동일한 시선으로 다가서려고 한다. ● 두 번째로 언급할 수 있는 김범석 그림의 특성은 그의 그림이 입체적인 스펙터클을 추구하기보다는 그것을 역행하는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풍경화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원근법을 교묘하게 어긋내는 평면성은 기본 구도로 봐서는 가까운 곳에 있는 사물과 뒤에 있는 사물 사이의 차이가 뚜렷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거의 모든 사물을 그려낸 필치는 거의 동일한 수량과 크기로 이뤄져있다. 특히 「팝니땅다」와 같은 작품은 앞의 밭과 뒤의 숲이 거의 동일하게 수평적인 필치로 이뤄졌다. 「산중유골」에서는 원경으로 완만하게 표현할만한 산의 윤곽선을 꿈틀거리는 네 그루의 나무로 대치함으로써 김범석의 그림이 극단적으로 조작된 기표들의 결합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한다. 그림의 아래쪽에 자리잡은 철골구조물과 저 뒤편 하늘 아래 경계선상의 나무들은 심각하게 불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김범석이 회화적 재현을 위해서 원근법을 적용하는 데 충실하기 보다는 자신이 발견한 풍경의 심리적 정황들을 전단하기 위해서 사물의 크기와 모양과 색채 등을 조작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범석_팝니땅다_한지, 먹, 호분, 분채, 과슈_128×90cm_2007
마지막으로 짚어볼 것은 그가 절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먹과 필은 그림을 그리는 도구이자 매체이다. 그러나 근대화나 서구화와 같은 외부의 충격과 만난 먹그림 그리는 이들은 먹과 필 그 자체를 여느 장르나 매체와의 변별점으로 부각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차별화 전략은 충분히 그 성과를 거두었거나 더 이상 어떠한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실했다. 먹그림의 본질적인 문제를 향한 내부로의 환원 전략은 더 이상 삶의 지평을 헤아리는 예술로서의 에너지를 담보하지 못한다. 김범석은 먹선 위에 호분을 바르고 다시 먹선으로 형상을 만들어내기를 반복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는 이미 김범석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이번 전시의 출품작들은 여기서 진일보해서 색을 넣었다. 그것은 짙은 은은한 미색 계열로 화면 전체의 색조를 변화시키는 경우도 있지만, 부분적으로 매우 강한 원색을 써서 자신의 전면성에 파격을 가하는 경우도 있다. 그는 하늘, 가드레일, 도로, 인삼밭, 골프장과 같이 특정 부분을 색면으로 처리하기도 하고, 철탑, 간판, 논밭 경계선 등과 같이 특별히 강조하고자하는 형상만을 컬러풀한 색으로 그려 넣기도 한다. 이렇듯 김범석은 단색조의 화면 속에 부분적으로 강렬한 원색을 구사함으로써 자신이 강조하고자하는 기표를 차별화 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김범석_Mass의 본질_한지, 먹, 호분, 분채, 과슈_128×90cm_2007
김범석은 자연 속에 자리잡은 인공의 흔적들에 주목한다. 「산중유골山中有骨」은 자연의 한 가운데 자리잡은 전기선 철골 구조물을 빨간 선으로 그려 넣은 풍경화이다. 나무와 철골과 들판 등의 사물들은 그 원래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어 작가가 의도하는 바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스프링-배추밭」은 매우 간결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노란 바탕 아래 아스팔트 도로가 삐죽이 지나가고 위에 청색 배추밭이 불안한 사선을 가르며 화면을 구획한다. 그는 주변과 동떨어진 낯선 풍경의 배추밭과 스프링 쿨러를 바라보며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속도, 효율, 땅, 노동, 인공과 자연 등등에 관한 김범석의 사유와 성찰이 매우 간결하면서도 깊게 담긴 그림이다. 김범석의 탄탄한 풍경 표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가 「리버사이드 모텔」이다. 꼬물꼬물하게 이어지는 그의 필선들은 무수히 반복되는 동일한 존재들의 연쇄를 담아내는 데 있어서 매우 효율적이다. 먹선과 호분의 점들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나오는 이러한 김범석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표현기법은 그 주변의 작은 이미지들을 유력한 서사구조로 뒷받침하고 설득력을 갖게 하는 모태와도 같다. 시원하게 펼쳐진 배추밭을 가로지르는 직선 도로 옆에 있는 휴게소 간판과 모텔 간판을 주목한다. 저 뒤편 붉은 철탑과 언덕위의 집들 또한 평범한 풍경 속에 담긴 삶의 정황을 일러준다. 이와 같이 김범석이 이번 전시에 선보이는 근작들은 자신의 저 수려한 필력 위에 한두 가지 방점을 찍는 색채 요소들을 가미하고 있다. ● 그의 그림은 종종 인공적인 구조물 속에서 생태자연을 압도하는 숭고미를 읽어내기도 한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대자연의 막강한 힘 앞에서 인간은 숭고를 말하곤 했다. 그러나 현대 사회는 대자연의 숭고를 압도하는 역설적인 숭고를 만들어내곤 한다. 들판을 가로지르며 거대하게 우뚝 솟은 푸른 교각 위로 빨간 버스가 질주하는 장면을 그린 「여주-문막-숭고」는 여주와 문막 사이를 잇는 고속도로 교각을 국도변에서 올려다보고 있다. 교각의 오른쪽은 산허리를 잘라먹으면서 이어지고 교각 저 뒤에는 철탑이 홀로 솟아 있다. 국도와 들판과 야산 각각의 면면들은 고속도로 교각의 저 장엄한 숭고미를 위해 존재하는 부속물들이다. 「녹색풍경」은 초록의 나무들 뒤편으로 거대하게 자리잡은 녹색의 구조물, 골프연습장을 그린 그림이다. 그는 이 녹색의 구조물에만 원색의 녹색을 부여함으로써 자연을 압도하는 인공의 흔적을 강렬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42번 국도」연작은 들판과 야산을 후벼 파며 꿈틀거리는 국도의 저 수려한 곡선을 각각 검은 길과 붉은 길로 표현했다. 길은 들판을 가로지르는 국도와 그 옆 콩밭과 그 너머 아스라이 사라지는 풍경을 끌어내기도 한다.

김범석_스프링-배추밭_한지, 먹, 호분, 과슈_128×90cm_2007
길이 만들어 내는 풍경에 대해 주목하고 그것을 각별한 시선으로 담아내는 것 또한 김범석 그림의 중요한 모티프이다. 그는 길의 존재 자체에 주목한다. 자연 속에 자리잡은 길의 존재를 각별하게 포착하는 특별한 시선이다. 「경계에 대하여」연작은 거의 전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먹과 호분으로 그린 단색조의 자연 이미지들 사이로 원색의 인공물의 이미지가 파고드는 형국의 작품이다. 경사진 언덕 위로 가드레일과 가로등이 슬쩍 파고들기도 하고 소나무숲 사이로 검은 아스팔트 위의 노란 선이 지나가기도 한다. 사람의 몸이 만들어낸 길은 생태자연의 순리에 크게 역행하지 않지만 산업화 시대 이후의 길은 속도라는 효율성을 위해 둑을 쌓고 다리를 만들어 직선을 만드는 데 골몰했다. 단색조의 화면에 금박 보름달을 그려 넣은 「도로와 길」은 가드레일이 있는 직선 도로와 꼬불꼬불한 옛길이 교차하고 있는 시골마을을 그린 풍경이다. 「길 위의 길」 또한 이러한 시각을 명쾌하게 드러낸다. 평지 위에 놓인 국도와 둑을 쌓아 만든 고속도로를 위아래에 그려넣은 그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려넣은 것이라기보다는 발견해낸 것이라고 말하는 게 좋겠다. 「뜨거운 질주」연작 석 점은 한여름의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량을 속도감 있는 붓질로 담고 있다. 이 연작은 한결같이 도로의 바닥을 보여주지 않고 가드레일 옆으로 질주하는 원색의 물체만을 보여준다. 가드레일은 수풀 사이에 혹은 언덕 위에 삐죽이 자리잡은 두 가닥의 선이다. 그 선을 매개로 그 뒤에 길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 길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거대한 구조물이다. 길은 대지위에 긋는 선이다. 유사 이래로 길은 인간의 이동이 지속적인 반복 속에서 만들어낸 인간 행위의 흔적이자 인간 행위를 매개하는 장치이다. 따라서 길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매우 깊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길은 변화했다. 과거의 길과 지금의 길은 그 차원이 다르다. 김범석은 그 길의 이데아와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추적한다. 김범석은 길이 연출하는 선의 묘미를 탐닉하기도 한다. 「민박집 가는 길」은 검은 길과 노란 블록이 연출하는 길의 선율을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자연의 형상을 따라 구불구불하게 전개되는 선, 그것이 인류가 수 천 년 동안 만들어 온 길의 모습이다. 「점선면-지제면」이나 「점선면-점동면」은 지제면과 점동면에서 만난 풍경이다. 김범석은 점을 찍는 것과 선을 긋는 것의 경계에 서 있으면서도 생태자연 속에 존재하는 선의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선을 살린다. 아예 붉은 색이나 검은 색으로 선을 강조함으로써 그 선의 존재를 점들과 구분하며 나아가 그 선들이 만들어 내는 면의 구획에 관해 이야기한다. 인간은 저 산허리와 들판에 선을 그어 면을 구획한다. 생태자연 속에서 인간의 문명이 작동하는 방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김범석_여주-문막-숭고_한지, 먹, 호분, 분채, 과슈_128×90cm_2007
자연의 힘은 이질적인 것들을 하나로 품어 내는 데 있다. 이질성의 공존이야말로 우리가 자연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진리 가운데 하나이다. 김범석은 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는 낯선 풍경들에 주목한다. 이질성의 공존은 자연 뿐만 아니라 인공 속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텅 빈 마당에 플라스틱 의자 하나와 간판과 화단 모퉁이만이 삐죽이 보이고 그 뒤로 주유소와 뒷산이 보이는 「이호나루 주유소」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익숙한 장면이지만 김범석의 그림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매우 낯선 풍경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의 역설은 이질적인 것들의 공존 상황에서 더욱 증폭된다. 한 줄로 이어진 농원의 나무들 사이로 직선 도로가 지나가고 그 옆에 불빛 반짝이는 모텔이 자리하고 있는가 하면, 농장 사이에 끼어있는 느티나무가든 옆에 시커멓게 자리잡고 있는 인삼밭이 낯선 풍경을 연출한다. 「이승복이 지키는 초등학교」는 시골 초등학교의 쇄락한 이미지를 담아냈다. 오래된 나무들 사이로 빼꼼하게 드러난 학교 건물은 부감의 시각을 무시한 채 올려다본 건물로 자그맣게 그려져있고 그 앞 운동장 정면에는 황금빛 이승복이 홀로 서서 이 한적한 시골 초등학교를 지키고 있다. 「자본의 풍경」 연작은 한 그루당 수천, 수만, 수십, 수백만의 화폐가치로 환원될 예정인 묘목들을 기르는 나무농장의 풍경을 담고 있다. 「오, 남한강」 연작 두 점은 근경과 중경과 원경 모두에 고르게 분산된 작가의 시선 속에 도도히 흐르는 남한강 줄기를 보여준다. 한강은 거대서사를 견인하는 큰 물줄기, ‘오! 한강’이 아니던가. 그러나 김범석이 발견한 한반도 중부 내륙에서의 한강, 즉 남한강은 수풀과 과수원과 논밭과 마을과 길 사이를 비집고 꾸불꾸불하게 흐르는 물줄기이다.

김범석_뜨거운 질주 1_한지, 먹, 호분, 과슈_128×90cm_2007
김범석의 그림은 땅에 관해 묻고 답한다. 땅은 생태자연을 존재하게 하는 근본이다. 삶을 존재하게 하는 기초인 땅을 대하는 인류의 문명은 그러나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는 땅의 본질이 그대로 드러나는 벌목현장을 보여준다. 「매스의 본질」은 민둥산 군데군데 잡초와 잡목이 들어서 있고 제대로 자란 나무 한그루 없는 벌목된 산의 풍경을 담고 있다. 김범석은 땅을 사고파는 사회의 관행을 새롭게 들춰낸다. 그가 보기에 땅은 이제 도시뿐만 아니라 농촌에서조차도 화폐가치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대상으로 전락했다. 붉은 하늘과 검은 나무 아래로 노란 화면 속에 땅이 있고 그 위에 길다방 건물이 있다. 땅 위에는 ‘땅’이라는 글자가 있는 간판이 있다. 「땅 위의 길다방」은 길을 따라가며 동시대 삶의 지평을 헤아리고 했던 김범석의 로드 사이드 프로젝트를 압축하는 풍경이다. 우리는 모두 땅 위에 살고 있고 그 위에 길이 있다. 땅 위에 땅 간판이 있고, 길 가에 길다방이 있다. 김범석의 역설적인 유머는 땅과 길을 성찰한다. 「팝니땅다」 또한 땅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 아래서 농사일에 한창인 농부 옆에 간판 하나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붉은 글씨로 ‘땅’이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주변에 있는 검은 글씨 ‘팝니다’와 섞여서 ‘팝니땅다’로 읽히는 이 간판은 사적으로 소유 가능한 땅의 본질과 현실을 시니컬한 유머 감각으로 되묻고 있다.

김범석_이승복이 지키는 초등학교_한지, 먹, 호분, 분채, 과슈_128×90cm_2007
김범석의 그림은 전면성과 평면성으로부터 한 걸음 나아가 색채를 얻었다. 또한 그는 생태자연을 바라보는 관찰자로부터 생태자연 속에 뿌리내린 삶의 정황을 헤아리는 리포터로 진화했다. 그는 수묵실험이나 필선의 묘미, 색채의 절제 등과 같은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 예술가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그 속에서 인간의 삶과 동행하는 예술가의 김범석은 인공적인 기계미보다는 생태적인 자연의 모습을 그리는 작가이다. 그는 늘 농촌의 풍경을 그려왔다. 그러나 그는 생태자연의 모습만을 그리지 않는다. 그는 자연 속에 틈입한 인공의 흔적을 포착한다. 따라서 그가 그리는 자연은 인공을 배제한 자연이 아니라 인공과 공존할 수밖에 없는 자연이다. ● 김범석이 로드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서 발견한 자연과 인공이 공존하는 풍경은 ①자연 속에 존재하는 인공의 흔적들을 담고 있으며, ②생태자연을 압도하는 인공구조물의 역설적인 숭고미를 발견하기도 하고, ③길이 만들어내는 독특한 풍경 자체에 빠지기도 하며, ④자연 속에 공존하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선 자체에 탐닉하기도 하며, ⑤이질적인 요소들이 공존하는 낯선 풍경에 주목하기도 하고, ⑥나아가 그는 우리의 삶을 담보하는 땅에 관해 매우 근본적인 차원에서 묻고 답하기도 한다. 요컨대 김범석은 길을 따라 다니며 만난 풍경들을 통해서 생태자연의 아름다움을 말하려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 김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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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회화
나인주 개인展
2007_1207 ▶ 2007_1215 / 월요일 휴관

나인주_바람둥이 S씨(개)_합판, 아크릴채색_115×91×2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30408a | 나인주·장지영 설치展으로 갑니다.
별도의 초대일시가 없습니다.
관람시간_11:00∼06:00pm / 월요일 휴관
대안공간 반디
부산시 수영구 광안 2동 169-44번지
Tel. 051_756_3313
www.spacebandee.com
한국 사람은 각자 태어난 해에 따라 12 가지의 특정 동물의 성향을 닮는다는 토속적 신앙을 내재하고 있다. 그 동물들은 우주의 기운의 변화를 계산하여 만들어놓은 사이클로써 각자의 운명을 상징한다. 우주의 기운을 계산하여 사람마다의 성향을 파악하고 이해하려는 것은 결국 인간에 대한 관심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해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같은 성향을 지니는 것은 아니다. 태어난 월, 일, 시에 따라 또 세분화된 성격과 운명을 받는다.

나인주_바람둥이 S씨(개)_합판, 아크릴채색_115×91×20cm_2007
나인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가지고 태어나는 동물의 탈을 쓰고 있다. 물론 그 동물들의 대표적인 성향을 이야기하는 것도 있지만 작가가 잘 알고 있는 한 인물을 대상으로 분석한 총체적인 삶의 모습이나 그들의 삶의 한 사건의 일부분을 가져다가 작가의 시점에서 봐라보는 이미지를 입체적인 화폭으로 담아낸다.

나인주_게임의 고수(뱀)_합판, 아크릴채색_115×91×20cm_2007

나인주_등교길(소, 닭)_합판, 아크릴채색_154×140×23cm_2007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화학적인 작용들은 보이지 않는 완충관계나 상충관계를 형성한다. 그래서 그것은 바라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똑같은 한 사람을 놓고도 해석은 달라진다. 그리고 한 가지의 성격을 두고도 누구에게는 단점으로 보이고 누구에게는 장점으로 보인다. 예전에 어떤 판사로부터 사건의 전황을 살펴보면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은 모든 가해자의 입장이 이해되지 않는 것이 없다 말을 들었을 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되새기게 된다. 자신에게 피해를 끼친 사람의 죄만 들고 파고들면 그 죄 속에서 자신도 헤어나지 못하고 병들게 되지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다보면 어느 순간 그 사람을 연민하게 되고 그것이 결국은 스스로를 치유하게 되는 것을 느낀다. 삶이라는 여러 폭풍을 헤쳐 나가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난 인간은 모두 위대하면서도 나약한 존재다.

나인주_외할머니(돼지)_합판, 아크릴채색_51×93×4cm_2007
나인주의 그동안의 작품들은 실존의 공간과 가상의 공간을 통한 실존과 허상, 가시적인 것으로부터의 이해와 오해 또는 착각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저변에 깔린 고민은 같지만 재료나 방법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번 작품은 전체적으로 회화에 가깝지만 부조형식의 조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착안은 홀로그램이 보여주는 입체적인 느낌을 회화에 담아보자는 것에서 왔다. 그것은 어쩌면 기능적인 면에서 조소를 전공한 작가가 회화를 조금은 다른 형식으로 보여줄 수 있는 흥밋거리이기도 하다. ● 홀로그램은 평면의 이미지를 몇 개의 레이어로 나누어 렌즈의 굴절에 의해 양 눈의 각도에 따라 만나는 상에 의해 입체로 보이게 하는, 실체는 없는 환영이다. 나인주는 그것과는 무엇인가 다른, 그림과 조각의 사이에서 환영도 아니고 완전한 실체도 아닌 가장 작은 공간에서 사실감을 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예전 작품 중 홀로그램으로 제작한 것이 있는데 공장에서 일반 사진을 레이어로 나누어 필름의 굴절을 이용해 위치를 달리하여 원근감을 주는 것을 보고 이것을 회화에 접목한다면 그림이지만 조각이 가지는 공간감을 주어 입체적인 느낌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번 작품에 시도하게 되었다.

나인주_날다(용)_합판, 아크릴채색_184×140×25cm_2007

나인주_내가 잡아줄까?(원숭이)_합판, 아크릴채색_153×150×25cm_2007
그런 중에 새롭게 느낀 것은 그림은 한 면만 볼 수 있지만 나인주의 (그림이라고도 조각이라고도 명할 수 없는)작품은 측면에서 봤을 때 정면에 가려 감춰진 부분을 다시 봄으로 해서 이해되는 재미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바람둥이 S씨’의 작품 정면에서는 개의 탈을 쓴 한 남자가 수신되어 온 전화를 들고 불안함으로 촉각을 세워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보이지 않는 침대 속에 있다. 측면이나 위에서 보면 그 침대에 토끼의 머리를 한 여인이 누워 있고 이 남자는 그녀와 수신자 사이에서 무엇인가 갈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 상황을 관람자는 다각적인 시선에서 보면 좀 더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 나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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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ign Home_이방의 집
이민경 사진展
2007_1213 ▶ 2008_0103

이민경_이방의 집-아버지의 방_디지털 프린트_82×10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갤러리 보다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1213_목요일_06:00pm
갤러리 보다 기획전
갤러리 보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1461-1번지 한라기산 B/D 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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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지칭하는 장소 place란 단어는 ‘장소, 공간’이라는 명사와 ‘위치하다’라는 동사의 의미 둘 다를 내포하고 있다. ● 장소라는 단어자체가 이미 움직이며 장소에 위치하기 위한 동작도 포함하는 것은 상황에 의해 장소가 정해지거나 혹은 그 반대의 상황이 자주 연출되는 나의 현실을 아이러니 하게도 반영하고 있는 듯하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장소를 옮겨 다니며, 스쳐 지나갔음직한 낯익고도 생경한 장소를 대면해야 했던 경험과 함께 장소는 마치 기억처럼 분명 존재했으나 그 존재의 현실성은 희미해진다.

이민경_이방의 집-일시적 쉼_디지털 프린트_57×110cm_2007

이민경_이방의 집-그의 방_디지털 프린트_68×110cm_2007
역시 장소들은 누군가가 그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전까지는 무명의 텅 빈 공간이다. 비워진 공간은 소비되고 있는 상업적인 물건들처럼 매우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쉽게 변하는 어떤 것이다. 그렇게 비워진 공간은 사회적 지위나 문화적 메시지도 없이 지극히 중립적이다. 이러한 장소 가운데로 살아가기 위해 들어간다. 장소와 장소를 옮게 다니면서 살고 있는 ‘나’는 본향을 잃은 디아스포라_diaspora이다.

이민경_이방의 집-미시간_디지털 프린트_67×169cm_2007

이민경_일시적 공간_디지털 프린트_65×100cm_2007
본래의 공간을 사진을 통해 평면화 시키고, 그것을 다시 미니어처라는 매개로 일루전을 창조하는 과정을 통해, 양감이 존재하던 공간은 양감을 제시하는 평편하고 매끄러운 공간이 된다. 실재가 존재하지 않고, 이미지만이 투영되는 공간은 이 삶을 살아가는 ‘나’의 존재성을 암시하는 곳이다.

이민경_문이 있는 공간_디지털 프린트_94×100cm_2007

이민경_게스트 룸_디지털 프린트_106×160cm_2006
거주했던 실제의 장소에서 사진을 찍고, 그 사진들을 매개로 미니어처miniature를 만드는 것이 작업의 첫 번째 단계이다. 미니어처는 실공간과 닮아있으며, 미니어처를 이루는 모든 요소는 실공간에서 가져온 이미지이다. 이렇게 삼차원적인 공간이 카메라를 통해 평면화되고, 평면화된 공간은 다시 기억으로 재생되어진 입체적 미니어처가 된다. 마지막 작업의 단계는 미니어처에서 찍혀진 이미지이다. 실공간과 닮아있는, 종이로 만들어진 미니어처의 사진, 그것이 프린트되어 눈앞에 재생되는 것이다. ■ 이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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