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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훈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2-11-21 23:19:54, Hit : 561)
미국 현대 사진 1970 - 2000 갤러리 강좌 요약 - 이영준 편




사진과 정체성의 문제는 어떤 사진이 누구의 어떤 정체성과 관계를 맺는가 하는, 특수성의 문제로 다시 쓰여야 한다. 이 세상에 보편적인 사진이 없듯이, 보편적으로 얘기할 수 있는 정체성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사진에서의 미국적 정체성에 대해서 얘기할 것인가? 현재 문제가 되는 것은 미국 사진이 아니라 미국 사진을 보는 우리들의 시선의 정체성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우리들은 일정하고 확립된 시선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고 말 할 수 없다.


우선, 한국에서의 문화적 정체성 그 자체는 극도로 혼란스럽다. 이런 불안은 언어의 혼란에서 잘 나타난다. 가까운 친족 사이에 부를 호칭이 없다는 점, 경음의 사용에서 심각한 불균형을 보인다는 점(짜장면→자장면, 꼼장어→곰장어, 각종 속어, 은어들에 나오는 경음들), 한국말 문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점, 뜻도 모르는 영어를 쓴다는 점(4F, 7E.A.) 등이 그 예이다. 그러나 언어의 혼란은 부분적인 현상일 뿐, 시선의 혼란은 더 심각하다. 예를 들어 어떤 이미지를 보고 외설이라고 할지, 예술이라고 할지, 아니면 단순한 다큐먼트라고 할지, 다큐먼트라면 무엇에 대한 다큐먼트라고 할지, 예술이라면 무엇에 대한 어떤 예술이라고 해야할지 도무지 혼란스러운 것이다.


결국은 미국의 사진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미국의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고, 그것이 어떻게 다가오느냐가 우리의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예를 들어 미국 사진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의 상품적 성격이 과잉되게 나타나는 소비문화로 나타날 수도 있고, 거꾸로 세련된 언어의 선진문화로 나타날 수도 있고, 성, 인종, 계급의 분열된 정체성의 징후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모든 윤리가 바닥에 떨어진 극단적인 퇴폐 문화로 보일 수도 있고, 시대를 풍미하고 미래를 이끌어갈 위대한 예술가들의 역작으로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상이한 시각들은 우리 자신의 시선은 다원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심지어는 분열되어 있기 때문에 미국 사진의 의미도 양가적(alterity)으로 나타난다. 이런 혼란 때문에 사람들은 정체성의 필요를 더 절감한다. 뭔가 확실하고 굳건한 토대가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의탁할 무엇인가를 찾기 때문이다.


  정체성 개념의 핵심은 타자성, 유동성, 탈중심성에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해 보수적인 정체성 개념은 근본주의와 본질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다음의 인용문을 보자.
“ 여기서 정체성이란 「본디 존재하는 참모습」으로서 다시 말하면 전통성이라는 모체를 중심으로 한 변속적이면서도 새롭게 구현된 참존재의 실체, 근원을 말하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다시금 「전통」이란 어떤 집단, 국가 등의 공동체에서 예부터 이어 내려오는 사상, 관습, 행위, 형태 등의 양식과 정신을 말한다. ” ( 최병식, “한국미술문화의 정체성 비판 - 예술의 구조걱 측면 고찰”)
본질적이고 근원적이며 불변하는 전통문화란 있는가? 없다. 개념적으로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왜냐면 전통문화란 근대성의 산물로 나오는 반성적인 실체이기 때문이다. 즉 서구 문화의 동일화하는 힘에 맞서 어떤 문화를 그것과 다른 어떤 것으로 규정하려는 과정에서 전통에 대한 강조가 나온 것이므로, 우리가 상상하는 바와 같은 전통문화란 근대화 이후에야 나온 것이다.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의 말대로, 전통은 고안되는 것(invented tradition)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한 전통이 정통성을 갖도록 고안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전통이라고 부르는 그 틀 자체가 20세기적 고안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이는 정체성이 과거의 기원이나 근본과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현재, 더 정확히 말하면 ‘조금 전의 과거(recent past)’와 관계한다. 정체성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개념은 번역이다. 우리는 항상 현재, 더 정확히 말하면 ‘조금 전의 과거’에 만들어진 패러다임을 통해 더 먼 과거를 보고 있는데, 번역은 조금 전의 과거와 더 먼 과거 사이에 개입한다. 그것은 두가지 다른 시점 사이에 끼어 있는 그물망, 스크린 혹은 채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 어떤 텍스트를 접할 수 없다. 그런데 번역의 과정은 외화(alienation)를 포함한다. 즉 아무리 자기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라 할지라도 남의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가 우리의 전통을 대하는데 번역이 필요한가? 그것은 전통시대의 언어가 오늘날 우리의 언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사랑방에 앉아서 친구들과 시조를 읊고 술을 마시지 않는데, 만일 오늘날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그것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번역이 필요하다. 그런 행위의 의미를 오늘날의 어휘로 설명해 주어야 한다. 설명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납득 시켜야 한다. 이것이 번역의 과정이다.


정체성은 타자와의 접촉을 통해서 형성되며, 유동성을 가진다. 애초에 자아의 정체성과 타자성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한쪽이 없는 다른 쪽은 상상할 수 없다. 그래서 타자의 모양이 바뀌면 정체성도 바뀌는 것이다. 글로벌한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로컬한 차원에서도 타자의 모양은 계속 변하므로, 우리의 정체성도 계속 변한다. 결국 기표들은 뒤섞이며, 어떤 것이 우리 것이고 어떤 것이 남의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식별(identification)의 문제이다. 저것이 뭔지 식별이 되야 자기와 같은 것이라고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이다. 또한 정체성은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장치를 통해 만들어지고 보급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중요한 형태인 시민적 정체성이다.


사진에서 정체성의 문제는 우리가 사용하는 사진의 어휘들이 서구나 일본에서 온 것들이고,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 어휘들을 통해서 표상하고 있는데, 거기서 ‘우리’라고 ‘식별’할 수 있는 요소가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양상은 두 극단 사이의 왕복 운동으로 나타난다. 그 하나는 그런 어휘의 존재와 영향력 자체를 부정하고, 더 근원적인 ‘우리 것’으로 들어가던가, 또 하나는 그런 어휘와 자신 사이에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설정을 하고는 철저히 서구에 동화되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정체성(동일성; 같음)이 아니라 타자성(차이)을 잘 접합해내는 것이다.







장명훈 ▒

가끔이지만, 이영준의 글을 읽다 놀라는 경우가 있다. 사실 가끔이라고 하기도 뭐할 만큼 가물지만, 그래도 그나마도 없는 평론가에 비하면 낫지 않을까. 좀....전시 평론을 이만큼 신경써서 쓰지.

  200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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