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그냥 중국 작가이지만....대선에 알맞는 성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1990년대 이후 세계적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 중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조류를 대표하는 아티스트 왕칭송(王慶松)은 회화는 물론 사진, 비디오 등의 뉴미디어 작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중국의 팝아티스트라 소개되는 그의 작품들은 서구 대중문화와 중국적 정서가 혼합된 독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독립큐레이터로 활동하는 김정혜씨가 이메일을 통해 왕칭송과 가진 인터뷰를 소개한다.
<인터뷰>
김정혜(이하 ‘김’으로 표기): 무엇보다 앞서, 페인팅 대신 사진으로 전환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사진 작업을 하는 구체적인 이유와 사진이 당신에게 주는 가치는 무엇인가?
왕칭송(이하 ‘왕’으로 표기): 1996년 이전까지는 오일페인팅 작업을 하면서 주위 환경에 대한 느낌, 중국 전통 문화 그리고 1970년대 후반 개방과 더불어 밀려온 대중 문화에 대한 관심을 표현해 왔다. 사진의 파워에 매료된 것은 1996년 말이다. 사진은 중국 전역을 휩쓴 대중 문화와 근대화에 대한 내 생각을 직접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었다. 나에게 사진은 하고 싶은 말을 가장 빠르고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파워풀한 도구다. 이에 반해 오일페인팅은 훨씬 약하다.
김: 음악, 무용, 연극, 문학 등을 포함한 예술계 전반에 걸쳐 존경하는 인물이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있는가?
왕: 나는 전시 카달로그 외에 무엇보다도 잡지와 신문을 자주 보고 거기에서 수많은 흥미로운 생각과 시각을 발견한다. 어떤 생각들은 내 작품의 중요한 개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이런 식의 ‘폭발’ 같은 것을 매우 좋아한다. 예술인 중에 히어로라고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뒤샹과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좋아한다.
김: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중국의 작업 환경에 대해 듣고 싶다. 우선, 정치적, 경제적인 면이 궁금하다. 작업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있었는지, 반대로 정부 지원 같은 것이 있었는지.
왕: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에는 소위 자본주의자들이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 이는 모든 사람들이 꿈과 이상에 들뜨게 하는 여유 있는 상황을 만들었다. 일례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20년 후에 만납시다”라는 노래 즉, 2000년에 세상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두고 보자는 의미를 담은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노래의 한 소절을 보면, “영광은 1980년대 사람들의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20년 후에는 196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의미다. 나도 2000년에는 물질적으로 나아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1989년 학생운동으로 인해 모든 이들이 기대했던 영광의 미래는 산산조각이 났다. 우리는 모두 좌절했고, 결국 더욱 더 돈 버는 데에만 몰두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 그토록 갈망하던 꿈의 환상을 잃어버린 것이다. (작업 환경 면에서는) 넓은 의미로 볼 때, 정부로부터는 개인적인 지원도 억압도 없었지만, 정부가 통제 권력을 쥔 이후로는 아주 헐거워진 그네처럼 느슨해지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긴장되기도 했다.
김: 정신적, 심리적으로는 어땠는가? 당시 작가들 사이의 특별한 분위기가 있었는지, 그들 사이에 가장 많이 논의되었던 문제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왕: 그 시기 작가들은 영웅주의와 미래에 대한 기대감으로 작업했다. 서양의 철학서적을 많이 읽고, 더 나은 미래를 기대했다. 1980년대에는 누구나 만나면 종종 “얼마나 많은 철학가들의 책을 읽었습니까?”라는 질문을 하곤 했다. 한편 1990년대에는 “돈을 얼마나 버셨나요?”라는 질문을 하게 되었다.
김: 당신의 작품은 때로 “팝아트”라고 불리는데, 중국 본토의 “팝아트”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 나에게 팝아트란, 타인의 응용이나 변형을 거부하지 않는, 일조의 자유를 허용하는 미술형태다. 나는 어떤 전통이나 고전주의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내 작품에 도움이 된다면, 사회를 풍자하거나 때로 찬사를 보내기 위해 이러한 형식을 사용한다. 일단 작품에 사용된 이후에는 그것이 원래 어디서 온 이미지인지 완전히 잊어버리기도 한다.
김: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작품에서는 형광색 분홍, 파랑, 빨강 등 컬러가 매우 눈길을 끈다. 이러한 색채들은 중국의 전통 이미지 혹은 대중적인 감수성을 반영하는 듯한데, 의도한 것이었나?
왕: 나는 의도적으로 눈에 띄는 색을 선택한다. 그것은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모호함으로 가득한 “단순함”을 보여준다. 나는 저속한 삶과 의식을 경멸하기 위해 이러한 색을 사용한다. 표면의 완벽함은 침식되어가는 내면의 중심을 감추고 있다.
김: 중국의 색채, 중국인들 사이의 컬러센스라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왕: 전통적인 중국의 색채는 매우 밝게 빛나는 빨강과 초록으로, 대단히 시선을 끄는 색들이다. 한편, 문화혁명 기간에는 회색이 가장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색으로 여겨졌다. 사람들도 당시에는 모두 같은 색의 옷을 입고 다녔다. 경제개혁 이후에는 외국의 상품과 문화가 수입되면서 중국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이때부터 패셔너블한 옷을 입기 시작했는데, 대부분 번쩍이는 컬러와 과감한 헤어스타일을 선호했다.
김: 2000년도 작품인 “또 하나의 전쟁”은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과 메시지에 대해 궁금하다.
왕: 2001년 “또 하나의 전쟁” 시리즈는 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연작은 어릴 때 봤던 본토 수호에 관한 옛날 영화에서 부각되었던 애국주의와 영웅주의 스냅샷 이미지에서 영향받은 것이다. 나는 아직도 “지뢰전”, “게릴라전”과 같은 영화에서 신중국의 해방을 위해 영웅들이 목숨을 바치는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웨이웨이가 쓴 글에서는 영웅을 ‘가장 사랑받는 인간’으로 그렸고, 그래서 나는 군인, 즉 사랑받는 인간이 되는 꿈을 꾸곤 했다. 지금까지도 이 꿈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근래에는 경제 개혁과 근대화가 마치 빠르고 강렬하게 진행되고 변화하는 전쟁과도 같다. 이러한 전쟁 속에서 나는 중국 전통 문명과 근대 서구 문명 사이의 충돌에 직면해야 한다. 작품에서 나는 이러한 충돌과 모순을 “또 하나의 전쟁”이라고 부른다. 비록 총은 없지만, “조국의 국방”을 위한 이 전쟁에서 나는 나 자신을 패잔병으로 묘사한다. 작품을 통해 마침내 나는 사랑받는 인간이 된다. 역사에는 결코 남지 않지만.
김: 작업을 지속하는 힘은 어디서 오는가?
왕: 내 생각에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사회가 나로 하여금 계속 작품을 만들게 하는 것 같다. 이처럼 급격한 카오스의 시기에는 끝없는 창조의 동인이 생겨나는 것 같다.
김: 지금까지 가장 인상적이었던 전시는 무엇이었나?
왕: 2000년도에 있었던 BIG TORINO Biennale for Emerging Artists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이 아트 페스티벌에는 연극, 패션, 퍼포먼스, 그 외에 다양한 시각예술이 함께 참여하여 즐거움이 가득했다. 35살 이하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초청되었다.
김: 제3회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했을 때의 인상은 어땠는가?
왕: 제3회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에서 매우 중요한 전시였다. 하지만 너무 보수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국제적인 큐레이터들의 강력한 힘을 느끼기 어려웠고 그다지 개방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어, 전통적인 오일페인팅이 너무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보수적이라고 보는 것은 아시아와 유럽을 분리한 점에서다.
김: 전세계적으로 비엔날레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 이러한 대규모 아트 페스티벌이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중국의 경우에 대해 알고 싶다.
왕: 그렇다. 수많은 비엔날레가 생겨나고 있다. 중국에서는 7-8개의 비엔날레를 해마다 기획하고 있다고 한다. 10년 후에는 중국의 모든 성에서 비엔날레를 열만한 자본과 힘을 갖게 될지도 모른다. 2년에 한번씩 열리는 아트 페스티벌은 “모더니티”를 의미하는 것 같다. 하지만 작가의 수가 한정적이어서 한 작가가 세개의 비엔날레에 참여하기도 하고 심지어 계속 수상하기도 한다.
김: 한국미술에 대해 알고 있는가?
왕: 한국 현대미술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 못하지만 전시 카달로그나 해외 초청전시를 보면,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남성 작가의 작품보다 훨씬 강력한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미술은 다른 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의 상황과 마찬가지로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것 같다. 사회가 작가들에게 생각할 만한 자양문을 충분히 주기 때문에 매우 창의적인 작업이 나오기도 한다. 솔직히 한국미술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김: 작업 과정과 방식에 대해 궁금하다. 하루 중 어떤 시간이 작업하기 좋은지.. 작업할 때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지.. 혹은 동료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면서 아이디어를 얻고 실제 작품은 아주 짧은 시간에 완성하게 되는지 등.
왕: 일반적으로, 어떤 작품을 만들가를 먼저 결정한다. 대부분 내 작품의 아이디어는 실제 작업에 착수하기1년 전쯤 탄생한다. 사진 촬영을 위해 미리 준비를 해야 하는데, 이것은 소규모 건축 프로젝트와도 같다. 이 작업은 청사진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런 이후, 재료를 구입하고 인부를 고용한다. 최종적으로 가장 어려운 작업은 나 혼자서 모든걸 다 해야 한다는 점이다. 소품을 사고 모델을 구하고, 스튜디오를 예약하는 등이 일. 이것은 작품을 보다 완벽하게 완성하는데 필요한 요소를 마련하는 부가적인 작업이다. 그런 다음에는 “제거”의 방식을 취한다. 소품을 줄이고 장면과 모델을 조정해야 한다. 물론 친구들과의 토론도 도움이 많이 되긴 하지만 보통은 모호한 의견들 뿐이다. 언젠가 그러한 생각들이 다시 떠오르면, 앞으로의 작업에 도움이 될 것으로 여기고 기억해 둘 것이다. 나는 생각보다 그다지 작업을 빨리 하지 않는다.
김: 꿈이 무엇인가?
왕: 내 작품이 세상에 알려지는게 꿈일 것이다. 몰론 내 작품 자체가 점점 더 좋아지기를 바란다. 작품이 관객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면 많이 흥분될 것 같다.
김: 작업 이외에 주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왕: 작업을 하지 않을 때 대부분의 시간은 친구들과 얘기하거나 전시에 가고, 파티를 하고, 아기를 돌보는 등의 일을 한다.
김: 작가가 가져야 할 세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왕: 작가는 의식이 있고, 부지런해야 하며, 지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왕칭송(Wang Qingsong)
1966년 중국 호북성 출생
사천미술대학 졸업
1993년 이후 현재 베이징에서 거주하며 작업
이미지(위로부터):
1. “생각하는 사람”(Thinker), 1998, 사진, 180 x 90cm
2. “말을 잃은(Speechless)- Small Work #2”, 1996, 캔버스에 유채, 45cm x 35cm
3. “백수보살”(百手菩薩, 100-hand Soliciting Buddha), 1999, 사진, 180x110cm
4. “신여성”(New Women), 2000, 사진, 120x220cm
5-1. “노율야연도”(Night Revels of Lao Li), 2000, 사진, 120x960cm
5-2. “한희재야연도 ”(Night Revels of Han Xizai), 당대(唐代), 수묵채색, 33x281cm
6. “또 하나의 전쟁(Another Battle Series) no. 7”, 2000년 초, 사진, 120x220cm
7. “거지”(Beggar), 2001, 사진, 120x200cm
8. “환생”(Incarnation), 2002, 사진, 190x120cm
인터뷰: 김정혜(독립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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