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프 월 보러 갔다가....웬...생각지도 않은 석고덩어리에 뻑이 간 기억으로 올리는 기사입니다. 뭐....그냥 극단적 감상으로 말하면...최근에 본 입체물중 가장....아름다웠다는 ...기억입니다.

레이첼 화이트리드<무제(서고)>
전시광경 소격동 국제화랑에서 제프 월(Jeff
Wall)과 레이첼 화이트리드(Rachel Whiteread)가
함께 전시되고 있다. 현대미술의 선두에 있지만 성격이 판이한
두 작가를 한 공간에서 본다는 것이 흥미롭다. 대체로 외국에서는
전시 형태에 있어 단독전이 아니면 특별전으로 구성하여 전시하는
대규모 그룹전이 보통인데 이 같은 2인전은 실상 보기 드물다.
그런데 ‘왜 두 작가가 함께일까’를 염두에 두고 전시를 보는
것이 이번 월과 화이트리드 전시에 의미를 배가한다는 생각이다.
캐나다 출신의 50대 남성작가 월은 사진을 매체로 활동하며,
영국의 30대 여류작가 화이트리드는 조소분야에서 활동한다. 세대와
성, 활동무대가 다르고, 무엇보다 매체가 다르다. 그런데도 국제화랑
아래층의 화이트리드와 위층의 월을 본 관객은 양자의 차이를 아우르는
공통된 컨셉트를 발견할 수 있다. 한마디로 일상을 그 그림자로
보기, 혹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는 (또는 낯선 것을 익숙하게
하는) 시각언어이다. 프로이트의 말을 빌려보면, ‘언케니(uncanny)’라고
하는 이 묘한 감정은 화이트리드의 일관성 있는 이른바 ‘뒤집기
구조(inverted structure)’로 인해 대상에 대해
역전된 시각에서 충격을 드러나고, 또 월의 사진에서는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근본을 거스르는 예리함과 기치로 표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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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화이트리드의 작품 10점이 전시된 국제화랑에
들어서자 처음 마주치는 작고 투명한 주조물은 실은 2001년, 런던의 트래팔가
광장(Trafalgar Square)에 설립된 화이트리드의 대좌(Plinth)
기념물을 위한 모형이다. 영국을 대표하는 중심부에 위치한 네 번째 대좌를
위한 이 〈기념물〉은 함께 경쟁한 무려 275개의 안을 물리치고 당당히
채택될 정도의 비중을 갖는 것이기도 하다. 화이트리드는 평소에 무시되는
것들에 사람들의 관심을 글기 위해 이를 제작했다고 한다. “나는 이미 존재하는
대상에 작용하고 사물들을 전복시킨다(subvert).” 150년 이상 광장을
지켜왔던 대좌 받침대를 주조하여거울의 반영처럼 거꾸로 그 위에 얹은 〈기념물〉은
작가의 말 그대로다. 런던의 슬레이드 미술학교(Slade School of
Art)를 졸업 한 후 198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보인 화이트리드는
물체의 내부 공간을 주조하여 그 빈 공간에 대상성(objectivity)을
부여하는 작업에 열중해 왔다. 개념적으로 말해, 하나의 오브제를 ‘뒤집어’
주조하는 방식인데, 이 과정에 대해 비평가 존 버드(Jon Bird)는
‘본래의 대상은 하나의 공간, 즉 무(無, void)이다’라는 시적 표현을
했다. 화이트리드가 안과 밖을 뒤집은 오브제는 자신의 귀·물통·옷장·방
그리고 급기야 3층 집(1993년 Turner Prize의 수상작인 〈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비슷한 맥락에서 그녀는 하나의 대상에서 잘 보이지
않고 간과되는 공간을 주조한다. 의자 아래의 공간, 침대의 먼지 쌓인 밑부분,
볼 수 없는 마루 밑 공간, 그리고 집 자체보다는 집 안의 공간이 관건이었다.
그리고 이같이 음각으로 주조된(negative cast) 오브제는 대체로
늘 인체의 흔적과 자취를 담고 있다. 때문에 화이트리드의 진정한 관심은
인체와 공간 사이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인체의 부재이고,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며 죽음이라고 한다. 공간이, 부재(不在) 자체가 단단한 덩어리로
시각화되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데, 이 역전의 메커니즘에서 작품 표면은 이전의
본래 물체와 새로이 구현된 대상 사이의 경계면이다. 여기에 작가는 머리카락이나
신체 분비물, 몸이 남긴 자취 등을 보존한다. 주조된 작품에 남아 있는
인체의 부재 및 죽음의 흔적은 강한 향수를 자아내면서 그 오브제와 인체가
동일하게 인식되곤 한다.
작품의 색채를 인체의 체액이나 살·뼈 등의 느낌이 나도록 하는 것도 이런
의도에서다. 미니멀리즘의 차가운 통제 아래에서도 인체의 흔적을 심층적으로
간직하는 화이트리드의 주조 작품에는 표면의 냉정함과 대비되는 지극히 인간적
혹은 감성적 부분이 역설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전시에서 보는 시체 안치대에서 고안된 형태인 〈무제(쌍)〉(1999)는
브론즈에 셀룰로오스 물감으로 지나치게 깔끔하게 처리된 하얀 표면이 죽음의
냉정함과 오싹하게 완벽한 정지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오목과 볼록의 이분법과
그 신체적 은유는 2000년경부터 제작한 브론즈 용기 작품들에서도 명백한데,
이번에 2점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본 전시에서 주된 작품은 역시 석고로
제작한 〈책장〉 연작이다. 1996년부터 시작되어 2000년에 완성한 〈유태인
대학살 추모비(Holocaust Memorial)〉에서 고안된 일련의 책장
작품 중에서 1999년의 초기작과 올 해에 제작된 최종작을 전시에서 볼
수 있다. 초기의 서고에는 책에 남겨진 손자국, 좀이 슨 구멍, 낡은 책장들의
재현적 묘사들이 거칠고 사실적으로 처리된 반면, 후자에서는 미니멀리즘의
단순한 형태와 매끈한 표면 아래로 감춰져 있다. 구체적 기억은 이제 추상적
기억으로 변형되어, 기억의 뼈대만이 무표정하게 남아 있는 듯하다. 기억의
자취와 존재의 흔적을 지우는 익명성과 무표정성은 도리어 그 빈자리를 크게
하는 역설로 작용한다.
전시에서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워낙 다양한 재료와 색채를 다루면서도 일관된
주제와 관심을 보이는 작가이기에 이같이 단편적으로 전시하는 것은 그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에 그칠 수밖에 없게 한다는 갓이다. 해외에서 열리는 화이트리드전에서
보통 그렇듯이, 비디오 등 시각자료를 활용해서 작품의 스케일로 인한 운반이나
그 외 전시의 어려움을 보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2층으로 올라가면 화이트리드의 묵직한 흑백의 덩어리 오브제와 대조적인 제프
월의 밝고 구체적인 사진 이미지를 접할 수 있다. 캐나다 출신이기는 하나
영국 코톨드 인스티튜트(Courtauld Institute Galleries)에서
연구원으로도 활동한 제프 월은 1960년대 말의 개념주의의 형성에 참여하였고
1970년대 후반에는 본래 미술사를 공부한 작가답게 회화사에 중요한 작품과의
관련을 적극 활용했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월은 명백하게 의도된 드라마와
연극적 연출의 전개로부터 일상에 잠재되어 보이지 않는 드라마를 추출, 표면화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1980년대를 거쳤다. 1977년, 사진의 배경에서
빛을 발하는 라이트박스의 도입은 기존 사진 담론에 대한 혁신적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미술작품의 아우라(aura)와 직결되는 빛의 효과가 아우라를
지닐 수 없는 복제 메커니즘의 사진에 도입될 수 있음을 제시한 셈이다.
이번에 전시된 1997년과 2001년에 제작한 작품 7점도 그러한 전반적
흐름에서 볼 수 있으나 연출이 훨씬 정적이고, 의도된 드라마가 아닌 기존의
기호들이 구성하는 우연하고 찰나적인 장면을 발견하듯 제작되어 있다.
일상의 장면을 면밀하게 처리한 〈사무실 복도〉(1997)는 지극히 평범한
사무실 복도의 일상적 장면이기에 도리어 관객의 주의를 끈다. 연출된 인물의
익명성을 강조하기 위해 얼굴에 분을 발라 튀지 않게 할 정도로 시각의 미세한
효과를 노렸다. 보통 사람에게 스며들어 있는 현대인의 고독이 겸허하게 담겨
있고, 보는 이의 거울 이미지로 실감을 자아낸다. 결국 이렇게 ‘일상과
같이 연출된 일상’은 실재보다 더 일상적이다. 월은 이를 “연극적인 것과
실재 사이의 회색 영역”이라고 묘사하였다. 장 보드리야르가 제시한 시뮬라크르의
개념, 즉 가공된 것이 원본보다 더 실재적이라는 의미를 월의 조작된 사진의
기호 체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명백히 재현적 요소가 심도 깊은 상징적
내용과 만나고, 연극적 작위성이 일상의 자연성과 어느새 연결된다.
화이트리드의 작품에는 그 고통스럽게 느린 작업 과정과 같이 심도 깊은 성찰이
요구되0고, 월의 개념과 상징이 많이 개입된 이미지에서는 순간의 지연이
필요하다. 오늘날에는 오랜 시간 작품 앞에 서 있기 힘들거나 그럴 필요조차
없는 미술작품도 많다. 화이트리드와 월은 그런 면에서 보기 드문 작가다.
작품 앞에서 오래 생각하고 자세히 훑어볼수록 읽을거리가 많은 두 작가를
다시 보면서 현대미술에 대한 희망을 굳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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