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다소 우울한 하루입니다.
결박
나는 살이 찌고 싶지 않다. 먹성이 좋은 편이지만 천만다행으로 살이 잘 찌는 체질은 아니다. 그러나 살이 잘 붙는 체질이었다면 매일을 다이어트 강박에 시달리며 칼로리가 적은 식단을 꿰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해전인가 뚱뚱한 사람들을 다룬 해외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뚱뚱하다고 하면 으레 떠오르는 것들. 게으른데다 움직임은 굼뜨기 짝이 없으며, 끊임없이 먹을 것을 탐하는 '돼지 같은' 모습. 잘 빠지고 건강한 신체는 국가의 경쟁력일 뿐 아니라 개인의 경쟁력이기도 하다. 한 친구는 말한다. "뚱뚱하다는 건 기본적으로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는 거야." 딴은 맞는 얘기다. 뚱뚱한 이가 유능하다거나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기는 힘들다. 차라리 그것은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하지 못한 패배자의 초상에 가깝다. 아, 나는 다큐멘터리 얘기를 하려 했다. 다큐멘터리 속 그들은 패배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활동에 있어 정력적이면서도 여유있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는 말라빠진 바게뜨를 오물오물 씹으며 모니터 너머 그네들의 풍성한 식탁에 한 자리 끼었으면 했다. 등장인물 가운데 퍽 흥미로운 인물이 하나 있었는데, 그는 부러 살을 찌운 사람이었다. 뚱보를 자처한 이유인즉슨, '뚱뚱함'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는 거다. 이성과의 사귐에서도 그는 지나치게 풍만한, 소위 '뚱녀'만을 골라 사귀었단다. 어떻게 뚱뚱함이 아름다울 수 있는가? 통상적인 미학적 기준과 동떨어져 있는 그의 관점에 저럴 수도 있구나, 싶으면서도 끝내 그것에는 동의할 수 없었다. 하기야 '타인의 취향'이란 것은 '동의'보다는 '인정'을 요한다. 자유주의 사회의 모범적인 시민이 되고자 하는 나로선 차이에 대한 '인정'쯤이야 그닥 어렵잖은 문제다. 물론 뚱뚱한 이를 보며 유능하다거나 아름답다는 인상을 받기는 힘들지언정. 그런데 곧잘 취향이란 것은 가치판단으로 이어지기 마련이라 바로 그 부분이 고민스러웠다. 어떤 취향들은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변태'소리를 들으며 배척당하기 십상이니 말이다. 해서 한때는 날씬함을 미의 기준으로 삼는 자신이 한심스럽다 못해 죄스러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날씬하고 잘 빠진 남녀들에 열광하는 자신을 보면서 나는 속수무책으로 투항했다. 기실, 그 기준에 제대로 맞서보기라도 했었는지.. 고백하건대, 뚱뚱한 이가 아름답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다.
나는 여전히 살이 찌고 싶지 않으며, 혹 살이 찌게 된다면 다이어트에 돌입할 용의도 있다. 나는 친구에게 말한다. "내 미의식은 '오염'되어 있어. 타인의 취향을 '인정'할 수는 있지만 결국 나는 그것들을 줄 세우게 될 거고, 다만 이런 나의 태도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없길 바랄 밖에."
얼마 전 외국인 노동자가 에이즈 보균자일지 모른다는 것을 빌미로 성매매 지역에의 출입이 금해진 사건이 있었다. 이밖에 천안에서는 에이즈를 비롯 성병 위주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검진을 실시하여 논란이 일었고 이를 기사화 했었다. 기사가 나간 후로는 전혀 생각도 못하고 있었는데 한 여성단체에서 문제제기가 들어왔다. 기사의 부제나 이미지의 배치가 남성중심주의적 사고에 젖어있다는 거다. 기사의 부제는 그네들의 지적대로 성매매 피해 여성들 스스로가 다른 소수자들에 대한 차별에 앞장섰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는 것이었다. 물론 성매매 지역의 여성들이 주체적으로 그러한 결정에 개입할 수 있으리라고 순진하게 생각할 이는 별로 없겠지만 말이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성매매의 장에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이들에 대한 '차별'로 본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핵심은 현실에서 그러한 것을 작동시킨 차별의 근거들이었다. 소수자들의 출현과 질병을 연계시키는 그 오랜 방식에 대한. 여성단체에서 또 하나 제기했던 것은 사진이미지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남성이라는 점이었다. 외국인 노동자가 모두 남성이 아닌 바 마치 남성인 외국인 노동자가 차별당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전부인 것처럼 오도될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쩜 이리 무디고 둔한가? 몇몇 지나치게 민감한 반응이라고 생각되는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기실 나는 아득했다. '윤락녀'라는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쓰다니.. 어째서 그 단어가 자체 검열을 통과할 수 있었는지 의아스러울 지경이었다. 일상에 침투하여 체화되지 못한 채 겉도는 '의식'들라니. 자신도 알지못할, 얼마나 정밀하고 교묘한 방식으로 구조는 '나'와 이종교배하며 그 유지와 재생산을 획책하는가. 권력의 육중한 몸피도 결코 아름답지는 않거늘. 내가 기대고 나를 구성하는 결박들에서 '탈주'하기란 언제나 쉽지 않다. 나의 시선, 나의 취향, 나의 언어, 나의 몸, 나의.. 그것이 정말 '나'라고? 책상머리에서의 안락한 '회의'로는 충분치 않다. 習을 재구성해내는 훈련이 필요하다. 다만, 미아리텍사스촌에서의 사실과 관련하여 내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었어야 했는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개념 미술의 대가라는 요셉 보이스의 전시를 보러갔던 날. 환경보호에 관심이 많았다던 보이스의 전시 작품 중 하나는 사슴 모피 코트를 입은 셀프 포트레이트였다. 가죽 점퍼를 입은 내가 비웃는다. "이런 게 환경론자란 말야?"
오늘 따라 거리의 네온이 유독 밝고,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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