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산수_Artificial Landscape
김종숙展 / KIMJONGSOOK / 金宗淑 / mixed media
2008_1115 ▶ 2009_0110

김종숙_Red Drawing_캔버스에 혼합재료_80.3×116.8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80419c | 김종숙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115_토요일_05:00pm
관람시간_10:00am ~ 07:00pm
갤러리 무위_GALLERY MUWI
서울 성동구 성수동 2가 281-12번지 에딘버그 골프클럽 1층
Tel. +82.2.461.0070
blog.naver.com/gallerymuwi
인공산수, 차용된 이미지 ●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특정성 즉 회화의 본질은 무엇보다 재현을 들 수 있다. 그 논리를 바탕으로 해서 제작된 그림이 재현회화이다. 대체로 이는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닮은꼴의 형태로서 나타난다. 하지만 이런 닮은꼴에도 불구하고 재현회화가 대상의 전체 국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거라고는 말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건 사실 불가능하다. 엄밀하게 말해 어떤 대상을 재현하는 행위는 그 대상의 전체가 아닌 어떤 특정의 국면만을 재현하는 선택의 소산인 것이다. 그러니까 대상이 지닌 구조적인 특질이나, 빛과 사물이 부닥치면서 만들어내는 유희, 그 표면질감이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환기나, 대상이 떠올려주는 상징적 메타포 등 대상으로부터 어떤 국면만을 취사선택한 것이다. 이런 선택행위는 의식적인 층위에서 이뤄질 수도 있고, 무의식적인 층위에서 부지불식간에 행해질 수도 있다.

김종숙_Artificial Landscape 11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2cm_2007
김종숙의 그림은 작가에 의해 ‘선택된 드로잉’이라고 명명된다. 이는 작가의 그림이 기존의 이미지(자신이 그리지 않은)들 중에서 어떤 이미지를 선택해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며, 또한 그 이미지의 전체 국면이 아닌 어떤 부분만을 선택해 그린 그림이라는 의미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의 그림은 두 번의 선택행위가 중첩된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그 이면에서 회화의 본질로서의 재현이 갖는 속성과 차이에 대한 인식을 드러내며, 그 과정에서 비롯되는 선택행위를 주지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원본과 사본, 모본과 부분과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엿보게 한다. 작가에게서 이런 원본 혹은 모본에 해당하는 이미지는 전래하는 문인화와 민화이다. 문인화와 민화의 특정 부분을 차용 각색하는 방법으로써 이를 자기화하고 있는 것이다.

김종숙_Artificial Landscape 13_캔버스에 혼합재료_53×73.5cm_2008
김종숙의 그림에서 동일한 모티브를 다양한 버전으로 재구성해내고 있는 예는, 작자 미상의 민화 금강산도 10곡 병풍 그림을 부분적으로 차용해 그린 일종의 드로잉화에서 보다 적극적인 형식을 띠게 된다. 3개 화면이 한 세트를 이루는 그림, 그리고 6개 화면이 한 세트를 이루는 그림에서의 각 화면들은 세트 그림으로서 뿐만 아니라, 그 자체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그림으로도 존재감을 지닌다. 여기서 작가는 원화에서의 이미지 전체를 차용하는 대신에 그 부분 이미지만을 차용해서 그린다. 이 시리즈 그림에는 여타의 다른 그림보다도 소위 선택된 드로잉이라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 있으며, 그만큼 근작에서의 메인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흥미로운 점은 작가가 원화의 부분 이미지를 옮겨 그린 정도가 수치로 환원되고, 이는 그대로 각 그림의 제목으로 붙여진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제목 이상의 특정성을 그림에다 부여해주는 행위로서, 원화와 차용된 이미지 사이에 작가가 얼마나, 어떻게 개입했는가를 암시해준다. 말하자면 원화를 차용하고, 변형하고, 마침내는 이를 자기화하는 의식적인 행위자로서의 작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다.

김종숙_Yellow, Blue, Pink Drawings_캔버스에 혼합재료_194.5×390.9cm_2007
이 일련의 그림들은 특히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 이후 한 창작 방법론으로서 인식되고 있는 패러디에 연계돼 있다. 주지하다시피 패러디는 작가의 그림에서 보듯 기존의 이미지(작가의 경우에는 민화)의 전체 혹은 일부를 차용해서(탈맥락화), 이를 자기화하는(재맥락화) 과정을 거친다. 이는 그 이면에 원본과 사본 즉 원작과 이로부터 유래한 이미지와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패러디는 흔히 원작 혹은 원본이 간과했었을 수도 있는 어떤 의미를 일깨워줄 수도 있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원작이 억압하고 있는 어떤 혐의를 주지시킬 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원작을 부연설명하거나 다른 의미를 덧붙임으로써 원작을 풍요롭게 하기도 한다. 패러디는 말하자면 원작의 부수장치이거나 보조 장치로서의 의미와 함께, 원작에 대한 일종의 주석행위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다.

김종숙_Artificial Landscape 12_캔버스에 혼합재료_130.3×130.3cm_2008
이처럼 패러디는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하기보다는 기존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과 더 친숙한 신세대 작가들의 생리에 부합한다. 또한 이는 온갖 이미지들로 넘쳐나는, 이미지가 없는 곳으로 눈을 돌리기가 사실상 불가능한 시대환경과도 맞물리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종숙의 패러디 그림들은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획득하기 위한 한 방편이면서, 동시에 그 이면에는 이미지가 존재하는 당대적 방식에 대한 논평마저 내포돼 있는 것이다.

김종숙_Artificial Landscape 22_캔버스에 혼합재료_90×55cm_2008
작가의 그림과 원화와의 차이는 특히 화면을 축조하는 방법에 의해서 현저하게 두드러져 보이는데, 원화에서의 먹그림이 생경할 수도 있는 인공적인 재료로 옮겨져 있는 것이다. 예컨대 펄 성분의 안료(거의 가루 수준의 인쇄용 유사 크리스털 알갱이)로 바탕을 처리한 후, 그 표면에다 투명 실리콘으로 드로잉을 한다. 그리고 그 드로잉을 따라 일종의 유사 보석(극소형의 유사 크리스털 보석과 유사진주구슬)을 입자처럼 덧붙여나가는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림은 마치 원화에다 먹지를 대고 가장자리 선만을 따라 그린 듯한 최소한의 형상으로 축약되고, 원화의 유기적인 형상은 선 그림으로 변형된다. 더불어 그 표면질감은 빛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한편, 빛이나 시점의 각도에 따라 마치 무지개와도 같은 일종의 프리즘 현상(빛의 스펙트럼)이 나타나 보이기도 한다. ● 이렇듯 김종숙은 일종의 차용된 이미지를 통해 전통의 맥락 속에 개입하여, 전통을 변형하고 마침내는 이를 자기화하는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시각적 이미지를 촉각적 이미지로 확대 재생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 고충환

김종숙_Small Paintings_캔버스에 혼합재료_20×20cm×20_2005~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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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命의 그물코
이윤기展 / LEEYUNGI / 李允基 / painting
2008_1217 ▶ 2008_1230

이윤기_청자상감 자원봉사자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후원_경기문화재단
2008_1217 ▶ 2008_1223
초대일시_2008_1217_수요일_06:30pm
관람시간 / 11:00am~07:00pm
영아트갤러리_YOUNGART GALLERY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5번지 2층
Tel. +82.2.733.3410
www.youngartgallery.co.kr
2008_1224 ▶ 2008_1230
관람시간 / 11:00am~05:00pm / 성탄절 휴관
수원 한대우물 문화공간
수원 팔달구 남창동 23번지 B1 전시실
Tel. +82.18.379.1990
연기緣起적 세계를 위한 희망 - 이윤기의 청자회화에 깃든 생명론 ● 도법스님이 말했다. “부처님이 깨달은 법이 연기법이다. 모든 게 그물의 그물코처럼 연결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 연기적 세계관을 이해하게 되면 너 없이 나 못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물·산소·부모 없이 태어날 수 없다. 내 노력만으로 사는 사람도 없다. 그런데도 자기 혼자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전도몽상(뒤바뀐 생각)이다.” 라고. 생명평화결사가 탁발순례를 마치며 마련한 ‘생명평화의 길을 묻다’란 즉문즉설에 나서서 그랬다. 모든 생명이 그물코로 연결돼 있다는 것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이 현실적 테제를 망각하게 되면, 해일이 일고 전쟁이 터지며 죽음이 난무한다. 현재, 인류는 이 그물코의 파괴로 인해 치유 불가능한 세계로 치닫고 있다. 어머니 자연은 훌륭한 어부여서 찢겨지고 뭉친 이 그물코를 언제나 본래의 상태로 되돌려 놓았지만, 이제 그 한계에 직면한 것은 아닌지 두렵고 무섭다. 얼마 전 태안 기름유출 사고가 생긴지 딱 1년이 되었다. 1년 동안 태안의 바다와 육지는 우려했던 두려움과 무서움이 무엇인지 죽음에 가까운 체험을 치러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은 바로 ‘우리’에게서 왔다. 사람들은 ‘벌떼처럼’ 달려들어 기름찌꺼기를 걷어냈다. ‘벌떼’는 긍정의 표현이 아니다. 공격적이며 파괴적인 ‘저항’의 언표다. 그런데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환경재앙을 불러 온 이 기름의 폭력에 맞서 벌떼처럼 달려가 저항했던 것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셈이다. 태안은 이제 서서히 살림의 기운을 되찾고 있다.

이윤기_청자상감 소식을전하는사람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작가 이윤기는 해안이 시커멓게 타 들어갔던 바로 그 태안에 다녀왔다. 방제작업을 도우면서 그는 그 검은 바다에 떠 있는 흰 옷의 사람들을 발견한다. 수를 헤아리기 힘들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제복을 입고 석유를 걷어내고 있던 그 장면은 그에게 매우 숭고하게 다가왔다. 그는 화성시 동탄의 목리 작업실로 돌아와 이 때의 강렬한 기억을 작품으로 풀어내기 위해 다양한 스케치를 했다. 일차적으론 화면의 전면을 검게 칠한 후 흰 사람들을 그려 넣는 것이었는데, 사실적 재현에만 머무는 경향이 있어서 아무래도 성이 차지 않았다. 단지 기억을 회화적 재현으로 끝낸다면 작품의 상징이 커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방책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러다가 풀어낸 것이 상감청자를 화면으로 호명한 뒤 학 대신 방제복 입은 사람들을 상감한 것이다. 흰 방제복을 입고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가 펴면서 기름찌꺼기를 걷어내는 사람들의 형상은 놀랍게도 청자가 가진 미학을 현실미학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그가 청자를 떠 올린 것은 올해 통일미술대전을 준비하기 위해 개성을 방문해서 본 고려청자 때문이었다.

이윤기_청자상감 쓰레기줍는사람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우리 인식 속에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국보 제68호)이 각인되어 있어서 상감청자하면 대체로 이 청자가 떠오른다. 운학(雲鶴. 구름과 학)문양이 상감된 이 청자의 균형미 넘치는 품새가 빼어나게 아름다운 것도 한 몫 한다. 하지만 상감의 문양은 운학 외에도 양류(楊柳. 버들)를 비롯해 보상화(寶相華)·국화·당초(唐草)·석류와 같이 꽃과 풀, 열매 등 다양하다. 그 중 운학과 국화문양이 가장 많고, 지역의 특성에 따라 생김새도 다르다. 그가 본 개성의 청자는 허리가 잘록하면서 어깨 볼륨이 큰 것이었다. 청자의 빛깔도 달라서 아주 농익은 색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생김과 상관없이 상감문양에 관심을 가졌고, 그것을 태안에 모인 사람들로 바꾸고 싶었던 것이다. 청자라는 그릇은 문양이 새겨지는 하나의 대지라 할 수 있다. 이 훌륭한 모판이 없다면 문양은 한 낱 그림 쪼가리 밖에 되지 않는다. 청아한 비취색은 그릇이란 대지를 덮은 하늘이며 또한 우주다. 바로 거기에 상감해 넣은 것이 학과 나무, 꽃들인 것이다. 청자에 담긴 세계는 이 땅의 자연을 상징하는 것이며, 그 자연의 가장 응결된 미학이 함축된 세계이기도 하다. 하여 이 청자는 최근 교수신문이 연재하면서 선정한 “한국의 미, 최고의 예술품” 중의 하나로 손꼽히기도 하였다.

이윤기_청자상감 물주는어머니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그가 그런 의미들을 사유하며 작업실에 틀어 박혀 회화적 가마로 구워 낸 청자들은「청자상감자원봉사자문매병」,「청자상감쓰레기줍는사람문매병」,「청자상감소식을전하는사람문매병」,「청자상감물주는어머니문매병」,「청자상감씨뿌리는아이문매병」,「청자상감물놀이문매병」 등 여섯 작품이다. 우리 전통회화의 특징이랄 수 있는 여백을 한껏 살리면서 청자만을 그린 이 작품들은 상징을 분산시키지 않고, 청자 고유의 미학인 ‘자연미학’을 ‘현실미학’으로 전이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 현실미학이 다시 자연미학으로 합일해 나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문명의 반자연적 폭력에 대해 성찰케 한다.「청자상감자원봉사자문매병」는 본래 학이 있던 자리에 방제복을 입은 사람들을 배치했고, 구름이 있던 자리는 기름띠가 되었다. 이 청자는 본래 국보 제68호의 운학문매병이었다. 이 매병의 학 문양은 원과 원의 밖에 둘 다 존재한다. 흑백상감한 원 안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가는 학과 구름을, 원 밖에는 아래쪽을 향해 내려가는 학과 구름을 새겼다. 원의 안과 밖이 어떤 상징인가에 대해선 밝혀진 바 없지만, 원이 예술적 상징 언어로서의 미학을 테두리지은 것이라면, 밖은 자유의 몸짓으로서의 자연이 아닐까 한다. 작가 이윤기는 ‘자원봉사자’ 매병에서 이 원과 밖 경계 없이 방제복 입은 사람을 새겨 넣어 상징과 현실이 기름유출로 피폐해 졌음을 고백하고 있다. 때로 자연의 내부와 외부는 이렇듯 인간에 의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는다.「청자상감쓰레기줍는사람문매병」은 원 안의 학을 그대로 두고 그 밖에서 쓰레기를 줍는 사람을 그려 넣었다. 이것은 학으로 상징되는 자연의 속살이 치유되고 있음을 웅변하는 것이며, 자연과 환경, 그 씨알 주체의 생명은 지속되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을 드러내는 장면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삶터는 오염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자연의 밖에서 그들 스스로 불러들인 재앙의 찌꺼기를 줍고 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은 희망의 인문학에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읽는 일이 지루하고 또 무력한 것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 시들을 둘러싸고 있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또 그 시를 읽고 있는 우리들의 고통에 대해서, 좀 더 성숙하고 예민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중략) 무력한 인문학이, 게다가 연약한 한 편의 시가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무모하다. 그러나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윤기_청자상감 씨뿌리는아이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작가 이윤기가 그리기라는 회화적 상감으로 구현해 낸 이 청자들의 맥락 또한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는 불가능해 보였던 태안의 복구가 다시 사람의 힘으로 희망을 되찾아 가는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그 이전, 그러니까 평택 대추리에서 현장예술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작가다. 그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을 이러한 ‘사람에 대한 희망’이 있기 때문이기도 한 것이다. 자연의 밖은 문명이 아니라 또 다른 자연이다. 바로 그곳에서 사람들이 산다.「청자상감소식을전하는사람문매병」에서 ‘쓰레기 줍는 사람’이 우체부 아저씨로 바뀌어 표현된 것을 보라! 우체부는 기름띠가 천지인 갯벌을 가로질러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린다. 그 소식이란 무엇일까? 매명 주둥아리 위에 한 마리 제비가 앉아 화면의 정적을 깨고 있다. 제비의 귀환은 봄의 귀환이자 생명 움틈의 귀환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 작품이 타전하는 소식은 태안이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귀환하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 아닐까? 작가 이윤기는 이 작품에서 한 편의 시처럼 타인의 고통을 감싸 안은 ‘희망의 소식’을 길어 올린다.「청자상감물주는어머니문매병」은 원의 안, 힘차게 날아올랐던 학이 있던 자리에 어머니를 그렸다. 어머니는 상징이 있던 자리마저 다시 씻겨내고 있다. 원 밖의 학은 치유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다시 상징이 되어야 하고 서사가 되어야 한다는 믿음이다. 바로 거기가 시의 자궁이며, 모든 예술의 궁극의 모궁(母宮)이지 않은가. 어머니 자연은 생명 치유의 손길로 거대한 씻김의 굿판을 벌이고 있다.「청자상감씨뿌리는아이문매병」는 예술이 꿈꾸는 이상향이자 소망의 실체라 할 수 있다. 이 청자에선 원의 안과 밖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늘과 땅의 경계 없이 모두가 하나다. 아이들이 씨를 뿌리며 대지를 일구고, 흑염소가 그 대지의 지평에서 풀을 뜯는다. 운학도 자유롭게 춤춘다. 그리고「청자상감물놀이문매병」에 이르면 이제 아이들과 꽃이, 물이 완전히 동화된 세상이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란 바로 이것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이윤기_청자상감 물놀이문매병_캔버스에 유채_100×72.5cm_2008
이윤기는 회화로 구워 낸 청자를 통해 상처받은 그물코를 치유했다. 그의 회화는 이명원식으로 풀면, 연약한 그림 하나가 인간과 세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무모하다. 그러나 무모하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희망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윤기의 회화는 바로 그 지점을 우리에게 또박또박 들려주고 있다.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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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휘피展 / Johannes Hüppi / painting
2008_1217 ▶ 2008_1230

요하네스 휘피_kleiner kuss_판넬에 유채_13×18cm_1998
초대일시_2008_12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고도_GALLERY GODO
서울 종로구 수송동 12번지
Tel. +82.2.720.2223
www.gallerygodo.com
개념의 생소함, 우리와는 다른 속도인 느림, 보헤미안 같은 낭만, 극도로 존중되는 개인주의, 이해 불가능한 시대의 반영, 다소 낮 설은 유럽 각 지역적 특성화된 전통의 반영 등등이 우리가 유럽 컨템포러리 미술을 접할 때 겪는 불편하고 어려운 문제들입니다. ● 이런 우리와의 간극을 단 한 번에 해소할 작가가 요하네스 휘피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발견되는 일상적인 소재로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시각을, 어려운 것들을 쉽게 풀어내며, 구상적인 것이 추상성을 발휘하는 놀라운 경험을 안겨주며, 주관적인 것이 보편적인 경험으로 공유되고, 회화적인 것이 무엇 인가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며, 낭만은 아직도 우리에게 유효하며, 말할 수 없는 감동이 한 재능 있는 한 작가의 작품에 의해 성취됨을 목격할 것입니다. ● 갤러리고도가 2008년을 마무리하는 전시로 기획되는『요하네스 휘피』展은 이 겨울을 따뜻하게 하는 작은 선물입니다. ■ 김순협

요하네스 휘피_Badende_판넬에 유채_25.5×21.5cm_2008

요하네스 휘피_Frau im Wasser_판넬에 유채_27.5×22cm_2007
요하네스 휘피 ● 요하네스 휘피가 회화를 시작했던 1990년대에 회화는 떠들썩한 비디오 앞에 시선을 빼앗기고 사진은 뜨거운 감자처럼 만연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뭐랄까: -아방가르드라는- 20세기에서 모던은 10년 단위 템포를 따르는 동안, 이미 있었던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미리 깨달은 예술가들이 있었다. 큐비즘의 창시자인 피카소가 이 부류에 속하고, 1920/21년에 웅장한 구상회화로서 다시 사실주의 영역으로 돌아섰다. 인간: 인간존재가 중심에 섰다. ● 평론가들은 예술에서 새로운 것이 더 이상 없음을 한탄한다. 그들은 오늘날의 문화가 오락이나 즐거움 또는 아름다움으로 이해되는 것이라는 의견이다. (헤닝 리히터,「문화에서의 안락함」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인 신문 2006.5.6) ● 물론 이 새로움은 20세기의 양식사적 현상에 연관된다. 사실은 이 새로움은 30년 전 미술사적 아방가르드 이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 흐르고)-그 뒤 단지 밀도와 권위만이 의미를 갖는다.

요하네스 휘피_Handy_판넬에 유채_24×30cm_2003

요하네스 휘피_Handy2_판넬에 유채_30×37.5cm_2008
이를 엄밀히 1913년 그림들로 발튼이 그려냈고, 요하네스 휘피가 정확히 그려냈다. 회화적이고 감성적인 몰두는 미술사의 탁상공론을 몰아냈다. 두 가지 요점 중 하나는, 이전에 이미 없었던 것은 없다는 말은 개혁(혁신)적인 상황을 철저히 배제한다. 왜냐면 모든 예술가는 먼저 그가 걸었던 길을 가야만 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어떤 예술이든 기억에서 나온다. 그러나 예술가는 과거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 그는 이것들을 현재로 가져온다. 현재에 관한 사고와 의식적인 자신의 연구로부터 생생하게 그려진 과거는 예술과 회화의 욕구를 위한 청사진이 된다. 요하네스 휘피의 작품들은 단지 욕구(열정)의 표출만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가 다만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형과 색으로 농축되어 생성된 열정들이다. 항상 다시 헤아릴 수 없는 애정으로 변성하는 열정이다. 항상 남성을 배려하는 여인이다. 옷 입은 마돈나일지 모른다. 게다가 순결하다. 서빙하는 그녀는 맥주나 음식을 나른다. 그리고 여성 같은 형상이 짐승을 어깨위에 걸친다. 이 여인은 한잔의 레드 아니면 화이트와인과 함께 접시 위에 놓은 요하네스의 머리를 건네준다. ● 여성의 힘은 남자들에게 있어 공명의 방 같은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는 하나의 우울함이다. 짧게 요약하면, 남자들에게 있어서 어머니는 근원이고 여성들은 우리의 운명이다. ■ 진 크리스토프 암만

요하네스 휘피_Stilleben1_나무에 유채_34×33cm_2008

요하네스 휘피_Stilleben2_나무에 유채_34×33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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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렴_convergence
최혜민展 / CHOIHAEMIN / 崔惠敏 / photography
2008_1217 ▶ 2008_1230

최혜민_수렴공간-의_Convergence Space-Clothing_디지털 프린트, 액자_125×125cm_2008
초대일시_2008_1217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사이아트 갤러리_CYART GALLERY
서울 종로구 안국동 63-1번지
Tel. +82.2.3141.8842
cyartgallery.com
수렴의 공간-가족 ● 수렴收斂- 여럿으로 나뉘어 있는 것이 하나로 됨. /『생물』동식물의 계통이 다른 군(群)이 같은 환경에 적응한 결과, 닮은 형질을 나타내며 진화하는 일. / Convergence 수렴현상 // 가족은 탄생하는 것이다. / 장애와 차이는 가족 안에서 수렴된다._2008

최혜민_수렴공간-가족_Convergence Space-Family Praying, Feeding, Sharing 2007
_디지털 프린트, 액자_105×210cm_2008
작업은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19세기 전반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였고, 현재 사진이 인간의 감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베르그송의 말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대중은 영화, 텔레비전, 지면의 촬영된 이미지에 익숙하며,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상의 외관에 대한 감각이 사진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는 F. 베이컨의 말을 넘어 사진이 현대인의 시각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카메라의 작은 구멍을 통해 기억에 새기듯이 가족의 모습을 포착한다. 생산된 사진 이미지는 대상의 인상이자 흔적이며,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흔적이기도 하다._2007

최혜민_수렴공간-식_Convergence Space-Food_디지털 프린트, 액자_125×125cm_2008

최혜민_수렴공간-주_Convergence Space-Shelter_디지털 프린트, 액자_125×125cm_2008

최혜민_1+2+1=1_Law of Convergence_디지털 프린트, 액자_80×105cm_2008
작업은 사진 이미지를 이용하였다. 19세기 전반 사진의 발명은 이미지를 생산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공하였고, 현재 사진이 인간의 감각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는 베르그송의 말은 더 이상 낯선 것이 아니다. 대중은 영화, 텔레비전, 지면의 촬영된 이미지에 익숙하며, 사진 이미지는 인간의 경험과 기억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대상의 외관에 대한 감각이 사진에 의해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다는 F. 베이컨의 말을 넘어 사진이 현대인의 시각 그 자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나는 카메라의 작은 구멍을 통해 기억에 새기듯이 가족의 모습을 포착한다. 생산된 사진 이미지는 대상의 인상이자 흔적이며,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내 시선의 흔적이기도 하다._2007

최혜민_성소 聖所_Holy Space_디지털 프린트_210×125cm_2008

최혜민_수렴_Convergence_디지털 프린트_210×125cm_2008
화면은 여러 컷의 사진이 수평적, 수직적으로 조합된 것이다. 수렴된 이미지는 대상을 Infra-mince 즉, ‘아주 얇은’ 인상으로 재현할 수밖에 없는 사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이며 동시에 대상을 종합적이고 총체적으로 지각, 기억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 또, 흔들린 스냅사진의 사용은 화면 전체에 운동감을 부여하는데, 이는 촬영자 신체가 촬영대상과 공간 안에 소속되었음을 보여준다._2008 ■ 최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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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cles of Life_생명의 순환
최광호展 / CHOIKWANGHO / 崔光鎬 / photography
2008_1224 ▶ 2008_1230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80509b | 최광호展 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24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1층
Tel. +82.2.736.1020
www.ganaart.com
죽음도 사는 것 ● 최광호와는 친하다. 밥도, 술도 자주한다. 그런 기간이 그가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동안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말도 많이 했다. 그 집 수저와 젓가락이 몇 개인지 쯤은 안다. 사진도 많이 봤다. 글 쓰는 사람치고 나만큼 많이 본 사람도 없을 것이다. ● 그러니 그의 사진에 글을 얹는 것은 쉽다고 생각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어렵다. 글 청탁을 받고 며칠째 낑낑거린다. 결국 아침에 전화를 걸고 말았다. 답안지 힌트 좀 달라고 말이다. 장시간 통화를 하고서야 컴퓨터를 켜게 됐다. 매번 이 모양이다. ● 글을 놓고 고민한 것은 한 가지이다. 안다고 믿고 있었는데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진을 찍었다. 활동 기간이 30년이 넘는다. 그런데 그 기간 동안 무엇을 찍었지?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그는 셔터를 많이 누르는 사진가이다. 자기가 찍은 사진을 정리 할 수 없을 만큼 많이 찍는다. ● 이런 식이다. 사진이 될 때 어떻게 하면 되지? 에 대한 답은‘바로 그때가 많이 찍을 찬스야.’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진도 운동처럼 슬럼프가 있다. 이번에는 안 된다고 투덜거리면‘작업은 작업으로 풀어야 해.’라고 말한다. 잘돼도 못돼도 사진을 찍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결국‘삶 자체가 사진’이다. 그런데 그가 찍은 사진이 안 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정체성 문제이다. 이게 무슨 조화인가? 그럼 긴 시간 동안 무엇을 찍었다는 말인가? 이런저런 생각 끝에 잡히는 단어가‘생명’이다. 아하! 30년간 찍은 게‘생명’이었구나!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그의 생명은 두 개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사진 본연의 기능으로 정직하게 찍어보는 생명이다. 그게‘가족’시리즈이다.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통해서 생명의 보편성을 이야기하려 했다. 태어나고, 밥 먹고,공부하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애 낳고, 일하고, 죽어가는 삶의 신산한 모습들을 30년 동안 찍었다. 특히 죽음의 문제에 대해 천착했다. 할머니, 아버지, 누나, 동생, 외삼촌, 장인 등의 망자 사진에는 짠한 사진이 많다. ● 이번에는 은유적이고 표현적인 방법으로 생명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시리즈가 진행 중이다.‘포토그램’시리즈이다. 입방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최광호가 변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게 최광호 사진이 아니라는 것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팔기 위한 사진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천만의 말씀이다. ● 그의 포토그램은 어제 오늘 한 것이 아니다. 뿌리가 깊다. 20대 초반에‘육체’로 시작했으니 30년 넘게 해오고 있는 평생의 프로젝트이다. 한 철 유행처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진사에서 포토그램의 역사를 보면 작가별로 분명한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조는 탈보트이다. 그의 경우는 사진 자체에 대한 실험으로서 포토그램이다. 사진이 되느냐 안 되느냐에 대한 과학적 탐구이다. 그게 무슨 미학이나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크리스탄 샤드의 샤도 그래프는 감광지 위에 종이 등을 올려놓고 노광을 주었는데, 카메라 없이 사진이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던 실험용 사진 같다. 마치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해 본, 구성 같은 평면적인 포토그램이었다. ● 모호이 나지가 1922년부터 실험한 포토그램은 빛과 형태에 대한 실험으로 구성주의 성격이 강하다. 바우하우스의 정신을 재구성한 느낌이다. 이론의 구체물이라고나 할까? ● 만 레이가 실험한 레이요그램은 성격이 다르다.‘우연성’이 끼어들었다. 작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우연이 제작 도중에 끼어든 것을 놓치지 않았다. 우연성을 중요한 미학적 테제로 봤다.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이론이 사진 속으로 들어 온 것이다. 그래서 레이요그램에 오면 수다스럽다. 작가가 관여 할 수 있는 부분과 우연히 만들어진 이미지가 동거하는 형태의 포토그램이다. ● 이런 계열의 작가로는 만 레이 시절의 프란시스 피카비아, 1960년대 누보레알리즘 미술가 이브 클랭, 그리고 1940년대부터 진행 된 추상표주의 작가 젝슨 플록에서도 볼 수 있다. 의식과 무의식이 혼재 되면서 나타나는 오토마티즘의 형태의 예술이다. 그것을 스트레이트 사진으로 말하면 노 파인더 기법과 같다. 최광호의 포토그램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작가가 결과물을 통제할 수도, 확인할 수도 없다는 측면에서‘우연성’을 핵심으로 삼은 초현실주의 기법과 친족 관계를 이룬다. 태양광이나 확대기 빛을 이용한 일반적인 포토그램은 인화지 위에서 물체의 위치를 확인하고, 구성하여 이루어진다.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최광호의 그것은 통제 불능이다. 초기작인‘육체’는 작가 스스로가 포토그램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역시 결과를 확인 할 수 없었다. 이번 작품도 동일하다. 과정을 보면, 암흑 속에서 물체를 무작위로 인화지 위에 올리는 경우와 작업 중 변형이 이루어지는 얼음이나 물 같은 대상이다. 눈이 아니라 몸이 작업을 한다. 20 대 작업처럼 그의 육체가 개입되어 있다. 마지막 광원은 스트로보이다. 일시에 빛을 쏘여주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현상을 해 보아야 결과물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실패한 사진이 많다. 실패를 이기는 방법은 그의 방식대로 많은 작업양이 해결한다. 이렇게 얻은 포토그램은 자연스럽고 상상 이상의 아름다움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오토마티즘에 매혹되었던 것이 이해가 된다. 자연의 아름다움처럼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즐비하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늙고, 죽어가면서 스스로 존재 증명을 한다. 시들지 않는 것과 죽지 않는 것은 생명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이 소멸 될 것이고 끝내는 망각의 강을 건널 것이라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오늘 죽어가는 모든 것이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초원의 빛처럼, 꽃의 영광처럼 빛났던 광채들이 시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 최광호는 그가 사랑하고 좋아하는 것에 영원히 사는 생명을 부여한다. 가족이 그랬고 작업실에서 함께 사는 풀이나 꽃들이 그랬고, 사라지는 얼음과 물의 흐름까지도 그렇다.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죽음은 모든 것과 단절이 아니라 죽음 뒤에 또 다른 삶이 있다는 것을 믿고, 죽음도 사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봤지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할까요?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고 관을 묘지에 내렸지요. 그 관의 옆 자리에 장모님을 위한 빈 관을 함께 묻으며, 관마다 한쪽 끝 모서리에 둥그렇게 구멍을 뚫어놓은 것을 보았습니다. 이분 저분께 그 이유를 물어보았습니다만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그 때 노인 한 분이 일러주시더군요.‘둘이 연애 하라고’뚫는 것이라고요. 그 구멍은 사후 세계를 믿는 징표이고, 두 사람의 영혼이 오가는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최광호)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그의 포토그램은 모든 포토그램의 실험과 미학을 섭렵하고 난 후에 본인의 철학(몸, 죽음 삶)을 얹는 작업으로 나아가고 있다. 30년의 공력이 그를 점점 자유롭게 하고 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묶으면서, 스트레이트 포토로 격렬하게 몸부림치고, 때로는 암흑 속에서 단 번의 섬광에 의지해서 세상의 모든 삶, 아니 무생물까지도 견인하고 있는 것이다. ● 이 번 사진전은 가족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모두 작업실에서 함께 살고, 늙어가고, 죽어가는 모습이다. 그것이 사람이면 어떻고 풀이면, 물이면 또 어떠랴! 생명! 영원히 죽지 않은 생명을 부여 할 줄 아는 사진가와 함께 사는 것들에게 삶과 죽음의 경계를 나누는 것은 헛된 것이다. ■ 최건수

최광호_Cycles of Life_positive print_61×50.8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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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
2008_1223 ▶ 2009_0322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展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展 공식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22_월요일_05:00pm참여작가 이중섭_박수근_김환기_천경자_오지호_김기창_구본웅_이쾌대 등
105명 주최_국립현대미술관 후원_네이버
관람료 무료 * 전시관람은 무료이나 덕수궁입장료는 별도(성인기준
1,000원)
덕수궁미술관 NATIONAL MUSEUM OF ART, DECKSUGUNG 서울 중구 정동 5-1번지 덕수궁내 Tel.
+82.2.2022.0600 www.moca.go.kr
덕수궁미술관에서는 오는
2008년 12월 23일부터 2009년 3월 22일까지 덕수궁 석조전 동관과 서관에서 『한국근대미술걸작전 : 근대를 묻다』를 개최한다.
건국6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무료로 공개되는 이번 전시회는 20세기 전반 격변했던 역사의 흔적을 근대미술거장들의 작품을 통해서 만나보고,
당대의 작품이 내포하고 있는 선구적 요소가 한국근대미술의 역사 속에 어떠한 변화를 이끌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마련되었다. ● ‘1부,
근대인’에서는 20세기 전반 근대화와 식민의 경험이 중첩되었던 시대를 살아갔던 근대인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개인의 발견은 근대적 특징의 핵심으로
‘주체적인 자아의 발견’은 교육을 통해 가능했으며, 근대적 인간으로서 교육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직업적 세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당시
교육받은 지식인의 모습은 뭇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이들의 모습은 교복과 사각모,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암시되었다. 역사에 유례없이
남성과 동등하게 신식 교육을 받은 여성으로 그려졌던 신여성의 모습은 차츰 교육의 정도와 무관하게 구두, 단발머리, 여우목도리와 같은 외형적
요소로 가름되기도 하였다. 한편, 종래의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장유유서의 질서아래서는 인격체로 대우받지 못하던 아동들이 구국애족의 희망으로
부상하기도 하였다.

장욱진_길
위의 자화상_종이에 유채_14.8×10.8cm_1951
‘2부, 근대의 일상’에서는 근대인의 일상적인 삶을
살펴본다. 근대화를 통한 개개인의 경험은 일상적인 생활 곳곳에서 발견될 수 있었다. 램프, 기차, 자전거, 유리창과 같은 과학의 발달이 가져다준
새로운 문물의 수혜는 신문이나 잡지 등이 몰고 온 근대적 인식의 확산과 더불어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형성하는 장치로 도입되었다. 이러한 요소들이
등장하는 당대의 생활 모습 속에는 근대인들의 일과 휴식뿐만 아니라 희로애락이 새겨져있다. 자의식의 발견과 함께 확산된 자유연애사상, 유교적 질서
속에 강조되었던 집단적 가족의식이 점차 사랑과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내밀한 부부 혹은 가족관계로 변화하였다. 그리고 식민이나 전쟁과 같은
시대적인 고난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나타나기도 한다.

박수근_아기업은 소녀_캔버스에
유채_28×13cm_1953

김은호_간성(看星)_비단에
채색_138×86.5cm_1927
근대적인 공간의 경험은 근대인들의 인식의 변화에 기여하였다. ‘3부, 근대의
풍경’에서는 종래의 전통적인 산수로서의 자연에서 탈피하여 근대적 공간으로 묘사된 풍경을 살펴본다. 이 시기에는 전통적으로 관념산수화에 담아왔던
사의(寫意) 대신 과학적 관찰을 통한 사생(寫生) 풍경화가 등장하였다. 도원경이나 이상향이 아닌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원근법과 명암법을 이용하여
그려진 풍경화는 일상적인 공간인 근대도시와 농촌이라는 삶의 터전 뿐 아니라 여행이라는 근대적 공간이동을 통해 제작된 명승지의 풍경이나 이국풍경을
낳게 하였다.

도상봉_성균관 풍경_캔버스에
유채_72.5×90.5cm_1959
‘4부, 근대인의 꿈’은 우리 역사의 근대적 시공간 속에서 사실상 교육을 통한
자아실현과 구국애족이라는 근대인의 희망이 실현되기 어려웠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하였다. 일제가 가져온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압박으로 인해 식민지의
근대인들에게는 재능과 열정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현실 속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 대신 작가들은 유토피아를 향한
몽환적인 꿈을 꾸거나, 서구적 근대를 초극하고 동양적 근대를 구현하기 위하여 전통성의 회복을 작품화하기도 하였다.

천경자_목화밭에서_종이에
채색_114×89cm_1954
특별전 형식으로 구성된 ‘5부, 근대의 복원’은 근대미술작품의 보존과 수복을
소개한다. 근대미술작품이 제작되었던 당시는 식민과 전쟁이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보존적 측면을 고려한 재료를 구하는 것은 고사하고 작업에
필수적인 재료조차 구하기 어려웠다. 미술사적 가치에 비해 재료가 지닌 열악함은 작품의 보존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하는데, 작품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환경적 조건을 마련하고, 손상된 작품에는 과학적인 조사과정을 거쳐 적절한 수복을 시도한다. 미술작품의 보존과 수복에 대한 소개를
통하여 미술품의 보존관리에 관심을 환기시켜본다. ● 시련과 고난의 시대 속에 굴하지 않고 삶을 일구어왔던 근대인의 사랑과 열정, 꿈이 담긴
작품들을 통해 오늘의 사회와 미술을 이룬 원동력을 살펴보고자 마련된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가 풍요로운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삶의
지표를 제공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 박영란
■
전시문의 『한국근대미술걸작전: 근대를 묻다』展 공식홈페이지 www.koreamodern.com | Tel. 02.757.1800

김환기_영원의 노래_캔버스에
유채_162.4×130.1cm_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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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one's travels
이동국展 / LEEDONGKUK / 李東國 / painting
2008_1217 ▶ 2008_1223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초대일시_2008_1217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갤러리 이즈_GALLERY IS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82.2.736.6669
www.galleryis.com
누구에게나 고집스러운 부분은 있게 마련이다. 스무 살 즈음에 만난 이동국은 누구나 가진 고집스러움에서 한 2~30년의 경력을 얹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 후로 세상의 쓴맛과 단맛을 제법 느낄 때 까지 끊임없이 변화된 과정들을 "여행"이라는 부재(타이틀)를 통해 작가의 느낌과 사고를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마치 조각가가 돌 속에 깃들어 있는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필여한 부분을 쳐내는 것처럼 작가는 때로는 정교한 묘사를 때로는 거친 붓자국을 내어가면서 화법에 구애받지 않고, 하늘의 구름을 배경으로, 바다가 하늘이고, 하늘이 바다로, 날으는 물고기, 돌, 의자, 변기 등 우리일상 생활에 흔히 접하는 주위의 동·식물 사물들을 동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마지막 컷 씬에서는 어릴 적 고향과 유년의 향수에 제법 빠져 있을 법도 하건만 또다시 그는 죽음의 형상적 표현으로써 주검을 그려내고 있다.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90.9×65.1cm_2008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90.9×65.1cm_2008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90.9×65.1cm_2008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이동국_캔버스에 유채_72.7×90.9cm_2008
그가 꿈꾸어 왔던 구름의 바다위에서 주검의 배경을 만들고 시체의 눈이나 입으로 구더기가 들끓은 그로데스크한 기분의 화면을 공포감으로 걷어낸 채 즐기기도 한다. 그의 변화를 위한 정체와 정체를 준비하는 변화는 같고 또한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정체해 있으면서 변화하고 정체되어있는 작가이다. 그러니까 구태여 변화를 말할 필요가 없다. 차라리 그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불편한 세상의 많은 것들과의 화해를 시도해 보는 것이 지금도 불편한 세상의 많은 것들과의 화해를 시도해 보는 것이 어떨지를 권해 보고싶다. "이동국식" 그림을 통해 화해했던 것 같이... ■ 이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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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에 대한 고요한 탐색의 세계
김지영展 / KIMJIYOUNG / 金持榮 / painting
2008_1224 ▶ 2009_0102

김지영_定1_한지, 분채, 금분_80×180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61108b | 김지영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24_수요일_05:30pm
관람시간 / 10:00am~06:00pm / 주말_10:00am~05:00pm
한전프라자 갤러리
DIGITAL KEPCO PLAZA GALLERY
서울 서초구 서초동 1355번지 한전아트센터 1층
Tel. +82.2.2105.8190
www.kepco.co.kr/plaza
생명에 대한 고요한 탐색의 세계 ● 김지영의 그림은 투명하고 맑은 색채로 우주의 근원적 질서와 本性을 탐구하는 작업이다. 그 근원을 물과 돌(水石)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 주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물은 동양사유의 근간에서 순리의 지혜와 겸손을, 암석은 관용과 덕성을 상징해왔다. ● 老子는 上善若水(최상의 善은 물과 같은 것이다)라고 말한바 있으며 또한 물은 萬物에 이로움을 주면서 다투지 않는(不爭)다고 하여 道에 가깝다고 설파하였다. 김지영이 물에 주목한 것은 물은 모든 곳으로 흘러가면서 생명을 키우지만 조용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들을 빛나게 하는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 그러므로 김지영 그림에서 물은 돌들을 비춰주는 역할로 등장하며, 그 위에 떠다니는 꽃잎이나 식물들의 잎사귀들을 띄워 주는, 고요한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다. 즉 김지영 그림에서 물은 웅장한 기세로 떨어지는 폭포수도 아니고, 힘차게 출렁이는 바다도 아니며, 다만 고요한 계곡에서, 떨어지는 연약한 식물들의 잎사귀나 꽃잎들을 받춰 주는 넓은 들판 같은 존재이다. ● 또한 물과 같이 메인 주제로 등장하는 돌들은 물속에 잠겨서 가지런히 정렬된 모습이다. 이것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이끼나 무생물들을 키워내지만, 스스로 드러내지 않고 물빛을 통하여 감상자들에게 보여 지고 있다.

김지영_定2_한지, 분채, 금분_80×180cm_2008

김지영_물빛3_한지, 분채, 먹, 금분_130×162cm_2008
이런 水石표현방식은 김지영이 水石의 단단함이나 부드러운 조형적 외형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의 본성에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동양화의 전통적 소재인 水石을 가지고 이 시대에 소멸해가는 不爭과 관용의 생명성을, 회화적 언어로 표상하고자하는 작가의 발언이라 할 수 있다. ● 한편, 회화적 입장에서 보면 김지영의 그림은 물속풍경이다. 물속에 돌들이 잠겨있고 그 물위에 꽃잎이나 잎사귀들이 떠다닌다. 물과 돌이라는 간단한 소재를 다양한 감성의 색채로 만들기 위해 물속풍경이라는 美的장치를 구사하고 있다. 김지영 그림에서 돌들은 물속에 잠겨서, 물을 통해 관찰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 水面위로 내리쬐는 햇살과, 그 햇살이 투영되며 생기는 물그림자는, 다양한 물빛을 만들고 다양한 정감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주목되는 것은 화사하고 투명한 물빛과 물그림자의 어두운 부분을, 동양화 화면구성의 원칙인 虛와 實의 논리로 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 화면의 채움과 비어있음을, 물빛과 물그림자의 얼비침의 이중적 효과로, 시각성을 강화하면서 절묘한 회화적 美的환상을 잘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므로 감상자들은 단순한 물속의 돌들이 그려진 화면에서 다양한 회화적감성을 체험한다.

김지영_바람소리2_한지, 분채, 금분, 혼합재료_80×180cm_2008

김지영_눈의 꽃2_한지, 분채, 금분_50×75cm_2008
水石들의 묘사도 종이를 구기고 피는 작업에서 생기는 흔적들로서 묘사되어, 직접적인 붓끝으로 그려내는 방식보다, 그것들의 자연적 본성에 가깝게 표현되고 있는 점은 칭찬할 부분이다. 동양회화의 정신적 역사에서 중요했던 “도식적 人爲성의 제한”을 현대적 감각으로 변환시키고자하는, 새로운 탐색작업의 제시이기 때문이다. ● 분채를 고수하여 투명하고 습윤한 색채를 구하고 간간히 금채를 써서 미세한 생동감을 주는 작업방식도 김지영이 전통이라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고자 하는지 감지하게 하는 부분이다. 즉 김지영의 그림은 水石이라는 동양화의 전통적 주제를 가지고, 정신적으로는 그것의 생명성에 주목하며, 조형적으로는 “물에 비침”이라는 미적장치를 통하여 이 시대도 여전히 유용한 회화적 대상으로 새롭게 모색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화면에 반짝이는 셀룰로이드를 동그랗게 오려 붙이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날이 무수하게 태어나는 현대문명의 발랄함을 상징한다.

김지영_빛이 머물다1_한지, 분채, 금분, 혼합재료_50×50cm_2008

김지영_바람냄새1_한지, 분채, 금분_73×117cm_2008
그러나 그것들을 띄우고 있는 것은 水石으로, 여전히 변치 않는 무한한 생명력의 근원으로 水石의 존재성을 기억하게 한다. ● 그렇다면 김지영의 작품세계는 생명력에 대한 치열한 탐색이다. 그러나 그 치열함을 물의 고요함으로 가장하여, 화려한 색채나 도발적 오브제의 화면이 아니라 잔잔한 물속풍경으로 보여줌으로서 더욱 강화된 회화적 감흥을 유도하고 있다. 이것은 최상의 善은 물과 같은 것이라는 老子의 말과 같이, 회화적요소도 화려한 美辭麗句의 부산물이 아니라는, 이중적 상징성을 내포하면서, 김지영의 그림은 감상자들에게 동양화의 새로운 격조를 보여주는 또 하나의 제안이라고 할 수 있겠다. ■ 장정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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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홍
박수진展 / PARKSOOJIN / 朴秀珍 / ceramics
2008_1211 ▶ 2009_0104

박수진_만남_도자_40×15×15cm, 35×15×15cm
초대일시_2008_1220_토요일_05:00pm
책임기획_이진숙
관람시간 / 평일_11:00am~05:00pm / 주말_11:00am~07:00pm
한향림갤러리
HANHYANGLIM GALLERY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법흥리 헤이리 예술마을 A-1-1 2층
Tel. +82.31.948.1001
www.heyrigallery.com
한향림갤러리 기획 박수진 도예전 ‘감홍’은 신진작가 박수진의 첫 번째 개인전입니다.

박수진_길을 잃다_도자_200×100×20cm

박수진_길을 잃다_도자_200×100×20cm_부분

박수진_꽃피다_도자_130×50×50cm
박수진의 ‘사과’라는 소재는 그 동안 여성적이라고 폄하되었던 장식적이고 감성적인 취향들에서 벗어나, 그녀의 작품 안에서 만큼은 감정의 형상으로 대상화 된다. 지금까지 작가가 표현해 왔던 잉태한 여인에서 보여 지는 붉은 사과는 선악의 선택 관문인 선악과를 통한 선의 실현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때로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매개체로써 여성의 인체 형상을 통해 은밀함과 긴장감을 전해주었다. 이러한 감정과 여성성의 상징은 그 자체가 작업의 내용이 되기도 하며, 삶과 심리적 얘기들을 풀어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박수진_변하지 않는 것_도자_50×30×20cm

박수진_변하지 않는 것_도자_40×15×15cm

박수진_선택_도자_40×40×40cm, 20×20×18cm
박수진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과는 이제 더 이상 구약 성서에서의 ‘이브의 사과’가 아닌 깎아놓아도 색이 변하지 않는 성분을 가진 붉은사과 ‘감홍’이라는 특정 사과를 통해 조건이나 상황에 의해서 변하지 않는 진실, 또는 자아와 동일시함으로써, 감성의 넓은 포용력과 시간의 무한함을 전달하고자 한다. 선택된 자신만의 기준이 비록 환경과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하더라도, 박수진에게 있어 진실이라는 명제만큼은 절대 변할 수 없는, 변하지 않는 본질이자 ‘존재의 상징’임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 이진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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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bble Clinic
박건희展 / PARKGEONHEE / 朴建姬 / sculpture
2008_1224 ▶ 2008_1229

박건희_Bubble Drawing_비닐에 잉크_53×50cm_2007
초대일시_2008_1224_수요일_05:00pm
몰핀공모당선展
관람시간 / 12:00pm~06:00pm
갤러리 벨벳_GALLERY VELVET
서울 종로구 팔판동 39번지 1층
Tel. +82.2.736.7023
www.velvet.or.kr
나는 늘 아프다. 몸이 아프고, 맘이 아프다. 몸이 아프면 맘이 허약해지고, 맘이 아프면 몸으로 아픔이 전이된다. 한의학에서는 사람이 물리적으로 아픈 이유를 몸의 균형이 깨져서라고 설명한다. 즉 어느 한 부분이 허약해지면 그에 대응하는 장기가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게 되어서 병이 생기는 것이라고 본다. 한의학에서 지칭하는 장기를 확대해서 정신과 육체로 바라보면, 정신과 육체는 하나의 동일 선상에서 서로 대응하고 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을 나는 ‘마음이 아프다’와 동격으로 생각한다. 물리적 아픔은 정서적 불안함과 외로움, 고통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뒤받침 해주는 것이 동의보감 내경에 나와 있는 심자일신지주(心者一身之主)사상이다. 마음은 건강의 주인이라는 뜻으로 현대의학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병의 약 7할은 마음에 의하여 생긴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하고 있다. 결국 물리적 아픔과 정서적 외로움은 필요충분조건 속에서 발생한다.

▷박건희_접촉을 위한 장갑_비밀에 물감_35×10cm_2007
◁박건희_접촉을 위한 장갑_비밀에 물감_35×10cm_2007

박건희_접촉을 위한 스타킹_비밀에 물감_117×22cm_2008

박건희_접촉을 위한 티셔츠_비밀에 물감_105×35cm_2008

▷박건희_접촉을 위한 드레스_비닐에 잉크_178×39cm_2008
◁박건희_접촉을 위한 드레스_비닐에 잉크_178×39cm_2008_부분
나의 작업은 마음의 병에서 시작된다. 좌절된 욕망과 정신적인 결핍 그리고 그로인한 상처는 마음의 병을 유발한다. 이러한 결핍과 상처는 예민하고 상처받기 쉬운 특성을 갖고 있으며 숨겨져 있다. 상처와 욕망으로 인한 마음의 병을 나는 표현하고 싶었다. 연약하며 숨어있는 정신적 내상을 물리적 외상으로 치환시키고 물리적 외상은 극명하게 눈으로 보이는 피부에 집중하게 되었다. 피부는 그 존재 자체가 밖에 있음으로 들어낸다. 가장 표피적인 피부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의 경계에서 마음속의 아픔과 상처를 이야기 하고 싶었다. ■ 박건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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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환과 변용_循環과 變容
문병두展 / MOONBYOUNGDOO / 文炳頭 / sculpture
2008_1226 ▶ 2009_0108 / 일요일, 2.4번째 토요일 휴관

문명두_꽃이지다2-등_스테인레스 스틸_180×180×180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80315e | 문병두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226_금요일_01:00pm
관람시간 / 월~토 10:00am~05:30pm / 2,4번째주 토요일 휴관
샘표스페이스_SEMPIO SPACE
경기도 이천시 호법면 매곡리 231번지 샘표식품 이천공장
Tel. +82.31.644.4615
www.sempiospace.com
循環과 變容 ● 스스로는 자신의 존재를 확신하기가 어려운 시대에 살 고 있다. 현대사회 속에서 개인의 유일성은 횡으로 분화 하고 있다. 더 이상 유전자적 표상은 유일성을 담보하지 않는다. 네트워크 상에서 여러 개의 아이디를 갖고 다중의 존재로서 대중과 소통 하는 것은 이제 드문 일이 아니다. 자신의 존재를 확인 할 수 있는 유전적 생김마저도 미적 상징에 맞추어 성형하면서 선택할 수 있는 멀티 소비의 시대다. 바야흐로 우리는 소비의 사회에 정점에 서 있다. 현대는 생산과 소비의 테두리 속을 판타지로 가득 채우고 있으며 그 속의 소비자는 누가 주체인지도 모를 지독한 이미지의 황사에 쌓여 있다. 각자의 자존은 희석되고 스스로 완성해야할 생의 진실에서 멀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바닥을 잃고 기둥만 들고 서 있는 셈이다.

문명두_달팽이여자_스테인레스 스틸_160×60×160cm_2005
전체에 속하면 소외는 없다고 믿는 것 일까? 인류는 스스로를 산업이라는 깡통 속에 밀어 넣어 지금이 아닌 다음으로 유보된 방부의 시간을 꿈꾸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개성에 열열이 환호 하는 대중과 산업은 수많은 길들을 만들고 그 속에서 길을 잃는다. 마치 길 위에 길이 없는 것과 같이 새로움을 갈망 하는 것만으로 자위하는 듯 하다. 갑자기 눈을 뜬 장님에겐 세상은 지표가 아니라 또 다른 환상이다. 집으로 가는 길을 잃었다. 눈을 감고 다시 시작해야한다.신화가 사라진 시대에 신들처럼 인간은 현대문명이라는 애드벌룬 속에 스스로를 구속 한 채로 대지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문명두_생활의상1-코끼리_스테인레스 스틸_240×200×120cm_2006

문명두_생활의상2-올빼미가면_스테인레스 스틸_120×120×80cm_2008
이번 전시의 내용은 이런 이야기들을 자연의 은유를 통해서 순환과 변용이라는 주제로 기획했다. 종교 학자뿐만 아니라, 다수의 자연 과학자들 역시 인간이라는 포유류가 조금 더 우주를 가까운 곳에서 바라보기를 원한다. 지구라는 행성이 우주에 속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매순간 우리의 모든 삶은 우주가 개입한다. 대지에서 십 센티만 떨어져도 허공이기 때문이다. 우리와 가까운 우주,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것을 자연이라고도 하고 환경이라고도 한다.

문명두_여행하는 방-달팽이_스테인레스 스틸_200×200×200cm_2008
지구가 우주의 다른 별들과 유기적으로 교류하면서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지구상의 생명 또한 마찬가지이다. 생명이란 그 우주의 장 속에서 여기에서 저기로 옮아가는 여정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생명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가 환경이 되며 에너지로서 뭉치고 흩어진다. 흔히들 인류는 생태의 꼭짓점에 속하도록 신의 선택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스스로의 태생적 딜레마를 합리화 시킨다. 애석하게도 자연 속에서 인간의 경계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목해야하는 것은 생사를 관통하는 그 경계의 유연함이다.

문명두_뿔큰사슴-사슴_스테인레스 스틸_200×150×170cm_2008
물방울의 물리적 속성이 그렇듯 생명들은 생이 깃드는 그릇에 따라 모습을 바꾼다. 그리고 고른 지평 위에서 다양한 모습들로 존재한다. 산 것들은 수많은 죽음들로 자신의 삶을 유지하며 스스로가 다시 다른 생을 위한 주검이 될 줄 안다. 이는 포식자는 곧 피식자라는 자연의 윤리를 증명한다. 다시 말해서 개체 스스로가 끝을 통해서 시작을 만들 줄 안다는 메시지다.나의 작업은 자연에 대한 경의이다.나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무엇이 인간일수 있나? 또 무엇이 인간인가? ■ 문병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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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cidentally, but eventually
유지은展 / RYUJIEUN / 劉知恩 / installation.drawing
2008_1231 ▶ 2009_0106

유지은展_Accidentally, but eventually_인사아트센터_2008
초대일시_2008_1231_수요일_05: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
인사아트센터
INSA ART CENTER
서울 종로구 관훈동 188번지 B1
Tel. +82.2.736.1020
www.ganaart.com
그들은 우연적으로 나타난 것 같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들을 밖으로 유혹하는 것은 본인이다. 소심하게 갇혀있던 그들에게 바치는 자유시간과 공간 ● 인간으로서 항상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다 충족하며 현재의 공동체 세상에서 살아 갈수는 없다. 그렇기에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또는 자신조차 알 수 없는 곳에다가 가두어둔다. 그러나 너무 참고만은 살 수 없기에 개인적 기준으로 심의를 거쳐 세상으로 나와,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적당히 충족시켜준 후 다시 자신만의 감옥 안으로 그들을 들여보낸다.

유지은_growing_털실_가변설치_2008

유지은_The intervention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8

유지은_Them_혼합재료_가변설치_2008
이 글에서, 나는 욕구+욕망을 ‘그들’ (정확히 무엇인지 확인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삼인칭 복수 대명사를 사용하였다)이라 표현하겠다. 그들은 언제나 틈을 노리는데, 인간이 세상의 도덕적 사회적 규칙과 규범의 제한에서 잠시 벗어나 맘을 놓고 있을 때, 예를 들어 혼자만의 공간과 시간을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남의 눈, 세상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소심하게 갇혀있던 그들에게 잠시 자유를 준다. 가끔, 때론 자주 내가 잠시 방심한 틈을 타, 상상조차 허락되지 않는 그들이 내 뇌 속으로 들어와 ‘상상되어짐’을 마음껏 즐기다가 들키는 순간 도망쳐버린다.

유지은_The map #15_종이에 잉크_43.2x35.5_2008

유지은_The map #23_종이에 잉크_43.2x35.5_2008

유지은_The map #16_종이에 잉크_43.2x35.5_2008
그들로 인하여 귀찮고 불편함을 느끼지만, 억압할 수밖에 없는 인간과 억압되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그들, 양쪽 다 어쩔 수 없는 입장을 가지고 있다. 나는 나만의 방식으로 그들의 감옥 안에 또 다른 세상을 열어주어, 서로의 입장을 중재하고자 한다. ■ 유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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