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hemian edition
홍지윤展 / HONGJIYOON / 洪志侖 / photography
2008_1001 ▶ 2008_1007

홍지윤_Goddess in the garden_C-프린트, 디아색_210×150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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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01_수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00am~07:00pm(하절기) / 10:00am~06:00pm(동절기)
갤러리 나우_GALLERY NOW
서울 종로구 관훈동 192-13번지 성지빌딩 3층
Tel. +82.2.725.2930
www.gallery-now.com
Bohemian ● 떠돌던 영혼의 울림 한 자락 / 가슴이 흔들리고 있을 때, / 맴도는 바람으로부터 / 잊고 지내오던 우리의 약속이 들려온다. / 가끔 아주 조금씩 작은 목소리로
● 사과나무에 걸려있는 달콤한 대기의 향기 / 비가 내린 후, 풀섶마다 꽃잎마다 방울 맺힌 그녀의 온기 / 강물 위에 동그랗게 춤추는 찬란한 햇살 그리고 별빛 / 거리마다 부유하는 소음과 흐르는 노래 한 소절 / 골목 안, 이름 가졌던 영혼들의 조용한 발자국 / 대게는 그러한 것들. ■ 홍지윤

홍지윤_Goddess in the garden-Reading a poem_C-프린트, 디아색_210×150cm_2008
홍지윤_Blowing in the wind-The Sea_C-프린트, 디아색_210×150cm_2008

홍지윤_Bohemian in the garden_C-프린트, 디아색_210×150cm×2_2008
문화의 비빕밥-홍지윤의 퓨전 동양화 ● 바야흐로 ‘퓨전’의 시대다. 음식도, 예술도, 문화도 여러 이질적인 요소들이 뒤섞여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색다른 것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우리말로 융합을 의미하는 ‘퓨전(fusion)’이란 현상은 이웃간의 경계가 분명하여 서로 왕래가 없던 시절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이 지배하는 현대에는 이러한 현상이 불가피할 수밖에 없다. 지구촌 자체가 하루의 생활권에 들어와 있고, 이메일을 이용하면 하루에도 수십 번이나 소통하는 환경에서 자기 것만이 최고라고 고집하는 태도가 전혀 미덕일 수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 홍지윤이 소위 ‘퓨전 동양화’라는 것을 들고 나와 자신의 소명으로 삼은 지도 몇 년이 지났다. 그 작업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최근 북경 따산즈 798에 있는 컵갤러리에서 본 그의 작품에 대해 말해야겠다.

홍지윤_Bohemian-Dazzling daylight and starlight_C-프린트, 디아색_210×150cm_2008
방 두 개로 나누어진 컵갤러리 전시장은 비록 크진 않지만 그의 화려하기 그지없는 수묵화 대작들과 동영상 작품들로 인하여 꽉 찬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뭐랄까, 작품이 공간을 압도하고 있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에 그 작품들은 인근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의 페이스갤러리 개관기념전에 출품된 바스키아나 앤디 워홀, 중국의 왕광이 등의 작품보다 더 힘이 있어 보였다. 홍지윤은 거대한 크기의 한지에 노란 국화꽃을 크게 확대해서 화면에 꽉 차게 그리고 여백에는 시를 써넣었는데, 이 방식은 퓨전 동양화를 지향하는 그가 최근 몇 년간 심혈을 기울여 추구해 온 양식이다. 마찬가지로 무지개 바탕에 시와 그림을 병행하여 그린 그림들이 또한 출품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그 호방한 스케일에 못지않게 내용 또한 대범한 것이어서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 그러나 정작 내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그가 추구하는 정신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품은 궁극적으로 어디에서 출발하고 있는가. 나는 문인화의 오랜 전통인 ‘시서화(詩書畵)’ 삼위일체 사상에서 그 뿌리를 찾고 싶다. 시와 글씨, 그림이 하나의 화면에서 만나는 이 동양화의 오랜 전통은 서양의 회화 전통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서양의 경우 문자의 등장은 20세기 초엽에 피카소가 ‘journal’을 암시하는 ‘jou’와 같은 특정의 단어를 기입한 것이 최초다. 동양과 서양의 서로 다른 뿌리에서 출발한 이 전통은 곰브리치가 ‘예술과 환영’에서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동양의 회화가 지닌 독자적인 풍미다. 홍지윤의 퓨전 동양화는 당연히 동양의 이 유구한 전통에 기대고 있다.

홍지윤_Bohemian in the rainbow_C-프린트, 디아색_150×210cm×2_2008

홍지윤_Bohemian-The bird on the street_C-프린트, 디아색_80×120cm_2008
방향이 정해진 이상 홍지윤의 행보는 거침이 없다. 그녀의 작품세계는 마치 비빔밥과도 같다. 사발의 맨 밑바닥에 밥이 있고 그 위에 다양한 나물과 고명을 얹는다. 밥이 동양 혹은 한국의 정신이라면, 그 위에 얹는 나물이 동양의 것이 됐던 서양의 것이 됐던 무슨 상관이랴. 또 사진이면 어떻고 퍼포먼스면 어떠랴. 매체에 자유롭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다. 다양한 이미지와 글씨, 사진이 한데 어울려 컴퓨터의 합성을 통해 중첩된다. 그것은 마치 각양각색의 금속품을 넣어 제련하는 용광로와도 같다. 그것이 바로 퓨전이 아닌가. 생활 속에서 발견한 사물의 모습에 대한 단상을 비롯하여 사랑에 관한 시, 새, 꽃, 여인의 아름다운 이미지, 독창적인 타이포그래피로 쓴 한글, 한문, 영자 등등 한데 어울려 독특한 분위기를 내뿜는다. 그것은 매우 화려한 세계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하다. 시각적으로 강할 뿐만 아니라 내용적으로도 강렬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 이 패셔너블한 세계가 바로 홍지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용광로처럼 뜨거운 열정과 삶에 대한 강한 긍정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 강렬한 색채의 향연이 장차 더 큰 세계의 무대에 나갈 수 있는 출구를 열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 윤진섭

홍지윤_Bohemian-Goddess on the book_C-프린트, 디아색_85×120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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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UNGWOOK
김정욱展 / KIMJUNGWOOK / 金貞旭 / painting
2008_1002 ▶ 2008_1102 / 월요일 휴관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168×116.5cm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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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02_목요일_06:00pm
갤러리 스케이프 기획展
관람시간 / 화~금요일_10:00am∼07:00pm / 토~일요일_10: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스케이프_GALLERY skape
서울 종로구 가회동 72-1번지
Tel. +82.2.747.4675
www.skape.co.kr
세상을 보여주는 얼굴 ● 무척 ‘쎄고’ 좀 으스스한 여자상이 다양하게 도열해있다. 단독으로 혹은 둘, 셋이 모여서 정적과 고독 속에 침잠한다. 정면을 응시하는 것도 있고 측면을 보여주는 얼굴도 있다. 조금은 무섭기도 하고 괴기하기도 하지만 또한 귀엽기도 하다. 기존에 익숙하게 보았던 인물과는 무척 다르다. 그 얼굴은 분명 누군가의 얼굴로부터 파생되어 나와 작가의 기억에 의해 재구성되고 변형, 해체 혹은 작의적인 훼손으로 변질(?)된 얼굴이다. 작가는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자신의 직관에 의해 파악된 그 어떤 느낌을 회임하고 일정한 시간을 기다려 출산하듯 하나의 얼굴을 그렸다. 눈과 입, 눈물과 피, 머리카락만이 부동의 몸에 균열을 일으키며 상처처럼, 아픔처럼 응고되어 있다. 대부분 먹만으로 그려지고 칠해진 화면은 묘한 어둠 속에 가라앉아 있다. 그 어두운 배경, 바탕을 등지고 크고 둥근 얼굴이 달처럼 부풀어오른다. 동공이 사라지고 온통 검게 칠해진 인형을 닮은 커다란 눈, 사라진 눈썹과 귀, 반듯한 가름마, 잘 빗은 머리, 안면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조리 삼켜 버릴듯 증식을 거듭하며 자라는, 숲처럼 무성한 머리카락, 작은 코와 콧구멍, 그만큼 작은 입술과 더러 벌어진 입술 사이로 보이는 치아, 퉁퉁한 살을 거느린 몸, 모나리자가 입은 주름이 잡힌 드레스를 연상시키는 흰 옷이 그 얼굴과 함께 다가온다.

김정욱_한지에 먹_162×112cm_2008
이콘이나 성화의 익숙한 도상이나 불상의 의습이 떠오른다. 관습적인 종교화의 도상을 빌어 기이한 얼굴을 오버랩 시키고 있다. 그런가하면 아프리카나 네팔의 가면 같기도 하다. 단순화시킨 얼굴에 눈만 구멍처럼 뚫려 까만 응시를 전한다. 인물들은 한결같이 먹으로 채워지고 적셔진 눈을 지녔다. 김정욱은 눈을 통해 자신이 보고 읽은, 감지한 인간을 형상화한다. 기술한다. 더러 마스카라 번진 까만 물이 눈물과 함께 흐르고 ‘피눈물’같은 것들도 얼룩처럼 스며들어있다. 인간의 얼굴에서 눈은 감정을 드러내는, 감출 수 없는 치명적 부위다. 세상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내보이는 눈, 그래서 너무 많은 시간과 그 시간의 양만큼 눌린 기억과 상처를 간직한 눈을 본다는 것은 좀 슬픈 일이다. 얼굴이 아니라 눈이 결국 이 인물들의 내면이랄까, 마음과 정신, 굴곡 심한 사연과 주름잡힌 상처의 결들을 찰나적으로 보여주다 멈춰있다. 커다란 눈이 먹을 머금고 침침하다. 보는 이들은 그 눈에서 눈을 뗄수 없다. 강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보는 이를 마냥 빨아들일 것도 같다.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162×130cm_2008
보는 이들은 그 눈에 함몰된다. 빨려 들어간다. 그것은 깊고 가늠하기 어렵고 신비하고 공포스러운 구멍이다. 자궁같은 눈, 텅빈 구멍 같은 눈이다. 그림 속 얼굴의 시선을 통해 나는 대상이 되었다. 타자와의 만남은 내가 대상이 되거나 아니면 그가 대상이 되는, ‘시선의 싸움’이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지는 자는 눈이다. 이 그림 앞에서 나는 부득불 눈이 된다. 하나의 대상으로 자꾸 얼어붙는다. 얼굴 이미지가 주는 강도 못지 않게 나는 수묵과 모필의 매력을 극대화시키면서도 그것을 자신만의 독자한 그림 안에 조율하는 작가의 힘을 느낀다. 그 힘에서 새롭고 신선한 수묵화의 매력을 환기 받는다. 먹색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고 모필을 유희하는 감촉이 견고하다. 기존의 다소 상투화되거나 습관적인 먹의 쓰임이나 모필의 활용에서 벗어나 수묵이란 재료를 자기가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펼쳐내는 쪽으로 몰고 간다. 여기서 수묵이란 재료는 당대의 삶의 감수성이나 그녀가 보고 읽어낸 얼굴, 그 얼굴로부터 번져나가는 또 다른 세계의 비전을 보여주는 쪽으로 환생한다. 그리고 이런 측면이 우리 조상들이 초상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했던 정신/전신傳神과 만난다. 김정욱은 사람의 얼굴에서 모든 것을 읽어나간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전생에 무당이나 심령술사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녀의 작업실을 나오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이는 도대체 내 얼굴에서 무엇을 감지하고 읽었을까?” ■ 박영택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114.5×129cm_2008
김정욱의 ‘잔혹동화’ 이후 ● 2006년 개인전 이후, 김정욱이 새롭게 그리기 시작한 인물화에는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얼굴이 화면 꽉 차게 차지하는 이전 그림과 달리, 인물의 상반신이나 전신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고, 한 인물이 화면 전체를 장악하기보다는, 다수의 인물이 화면 속에 포진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인물에 대한 단서가 많아지고 인물들 사이에 일정한 관계가 형성되면서 화면 안에서 들려오는 이야기가 좀 더 길어진 느낌도 든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인물화는 작가가 90년대 후반 즈음에 주로 그렸던 그림에서도 꽤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인물의 생김새나 전체적인 배치방식 그리고 공간구성의 결과는 영판 다르지만 말이다. ● 예컨대 90년대 말의 그림에는 주변에서 흔히 보는 가구나 소품이 등장하고 인물의 복장이나 헤어스타일도 약간의 변형은 있지만 현실에 있음직한 모습을 하고 있다. 핵심적으로, 이들은 너무 스키니하지만 어쨌든 아직 ‘사람’인 것이다. 그에 비해 완전히 블랙 아웃된 배경화면에 주로 성장盛裝을 하고 나타나는 요즘의 주인공들은 부풀어 오른 인형의 얼굴과 인조 몸뚱이를 갖고 있다.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게 용인된다면, 변형의 효과가 전자에서는 표현적이었다면 후자에서는 흡수적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화면에서 우리 쪽으로 무언가 배출되는 기운이 강했다면 이제는 화면 안으로 빨아들이는 힘이 훨씬 더 쎄졌다는 말이다. 한편, 앞의 화면구성이 실존적 리얼리즘을 확보하고 있다면 뒤의 것은 일상적 판타지를 건드린다고 할 수 있다. 20대의 황폐한 심리상태나 팍팍한 현실의 국면들이 앞의 그림들에서 감지된다면, 이제 뒤의 그림에서는 자폐적인 세계 나름의 질서정연한 독자성이 그 국면들 사이사이에 끼어들어서 반짝거리는 순간들이 자주 포착되기 때문이다.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90년대 후반의 그림들이 구술하는 이야기들은 저마다의 개별적인 사연이 변조된 팩션의 성격이 강하다면, 최근의 것은 일련의 그림 전체가 그 층위가 다른 몇 가지 내러티브로 연결되는 메타 픽션에 기초한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김정욱_한지에 먹, 채색_145×75cm_2008
막상, 작가는 앞의 그림이나 뒤의 그림이나 모두, ‘관계’에 대한 것이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결국 어떤 관계이냐가 그 차이의 요체를 이룰 텐데, 요컨대, 앞의 그림들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언급이라면, 뒤의 것은, 내가 보기에, 그것(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과 그림 사이의 관계에 대한 사유까지를 촉발한다. 작가가 했던 말 - “인형이 인형만은 아니잖아요.”라는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인형은 사람의 모습을 본떠 만든 것이지만, 일단 만들어진 다음에는 사람 곁에 두고 보고 만지고 결국은 사라지게 되는 사이클을 따라, 인형 자체의 존재감과 생명력 심지어 예지력도 같이 순환하게 된다(고 우리는 믿는다). 같은 맥락에서 사람의 입체 초상representation에 해당하는 인형은 재현representation의 세계를 다루는 그림에 대한 일종의 메타포로서도 차용될 수 있다. ● 물론 이 경우, 그림의 재현적 측면은 복제나 유사성이라는 미술사적 의미보다는 다시 쓰거나 말한다re-present는 문화적 실천의 영향력을 더 강조한다. 2006년 이후 김정욱의 그림에서 부각되는 인형의 눈동자나 의상의 드레이프, 강도가 한층 세진 피와 눈물 또는 피눈물, 그리고 피부 위의 크고 작은 상처와 금세라도 부서질 듯한 몸통의 크랙 등은, 그의 재현적 실천이 동화나 순정만화 또는 하이틴로맨스 소설에 대한 또 다른 ‘잔혹’버전임을 직감하게 한다. 대표적으로 잔혹동화의 비판성은, 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라기보다는 정신분석적으로 도발적이며, 솔직히,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충격요법에 의한 각성효과를 노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욱의 ‘잔혹’버전은 그림의 각본을 다시 구성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거기서 더 나아가, 화가답게, 그것과 맞물려있는 그림의 구조와 작동 방식까지 함축적으로 재구성하는 쪽으로 업그레이드된다. (중략)

김정욱_한지에 먹,채색_161.5×129.5cm_2008
화면 속에 등장한 사람의 레플리카 혹은 신인동성동형의, 이들 복수複數의 인형은 역설적으로 인간 존재의 특이성을 목도하게 한다. 사람이란 좀처럼 단독자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인 자조차도 그 전후좌우엔 항상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가, 드러나 있는 나에게 간섭하고 개입하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것이 그림자이든 거울이미지이든 아니면 하이드이든 도플갱어이든 혹은 때때로 조상신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므로 빙의憑依는 김정욱의 그림에서 별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김정욱의 그림이야말로 현실세계로의 빙의, 곧 옮겨 붙음이다. 표구방식을 자세히 보라. 그의 그림은 프레임된 것이 아니라 프레임을 덮어씌우면서, 비로소 3차원에 속하게 된다. ● 동화의 결말. 눈이 먼 채 숲속을 헤매던 왕자는 라푼젤의 눈물이 닿으면서 치유된다. 물론 김정욱의 그림에도 피/눈물이 흐른다. 그러나 그의 그림이 단순히 세련된 괴기취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사람과 그림, 시각적 재현과 문화적 ‘번역’, 심리적 재생산과 자발적 치유의 다양한 이항관계들을 둘러싸고 전개될 이야기들의 포석을 미리 놓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주목해야 되는 것은 그림 속에서 하이라이트 되고 있는 아주 작은 손이다. 피/눈물의 찐득한 액체에 조응하는 이 단단한 ‘화가의 손’은 점토로 구운 구체관절인형의 그것처럼 섬세하며, 잠깐, 온기마저 느껴진다. ■ 백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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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여정
류승환展 / RYUSEUNGHWAN / 柳承煥 / drawing
서울 / 2008_1002 ▶ 2008_1031
파리 / 2008_1004 ▶ 2008_1105

류승환_Life Cycle Series-통섭 統攝_종이에 펜_100×40cm×2_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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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8_1002_목요일_06:00pm
정신의 여정: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Quand lësprit voyage : une simulation de données
후원_(재)서울문화재단
관람시간 / 11:00am ~ 06:00pm / 월요일 휴관
갤러리 와_GALLERY WA
서울 강남구 삼성동 59-2번지
Tel.+82.2.516.9898
www.gallerywa.co.kr
Galerie LUMEN
20, Rue de Thorigny, 75003 Paris. FRANCE
Tel.+33.(0)1.7713.2210,(0)6.6393.4837
www.galerielumen.com
류승환-정신의 여정, 정보의 시뮬레이션 ●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화실 한 켠에 놓인 제도책상 같은 곳에 앉아있다. 구두수선공이나 활판인쇄공, 목도장 파는 이처럼 아주 작은 공간에 앉아 등이 굽어가는 소리를 들으며 하루 종일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린다. 책들의 행간과 행간, 말과 문자 사이에서 소리와 공간과 형상을 떠올리고 이내 그것을 마치 양피지에 신의 음성을 공들여 필사하던 중세의 수도사들처럼 종이 위에 빼곡히, 집요하고 탐닉적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하루 동안 자신이 읽고 보고 듣고 느끼고 상상한 것들을 긴 두루마리 용지의 일부를 조금씩 밀어나가면서 ‘새까맣게’ 만든다. 0.3mm의 가는 펜으로 하루 동안 그가 채우는 면적은 약10cm×40cm의 공간이다. 그러니까 그 공간에 그려진 흔적은 그가 보낸 하루치의 삶의 기록인 셈이고 그의 영감이 육화되어 내려앉은 곳이다. 가는 펜과 작은 손이 함께 한 시간의 누적이기도 하다. 주어진 화면을 몇 개의 층으로 분할해 음과 양,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너무 큰 것과 너무 작은 것, 밝음과 어두움, 질서와 카오스 등을 상징했는데 흡사 그것은 어둡고 깊은 숲처럼 다가온다. 숲/어둠에서 선들이 빠져나와 이런저런 이미지를 안개처럼 피워낸다. 그 이미지의 근원은 그가 읽어나간 모든 책들이며 또한 작업실 환경에서 영감을 받는 한편 ‘전파, 인공영상, 진동, 레이저, 시뮬레이션, 고대문화, 언어, 미생물, 상대성, 소리, 수학과 기하학, 이동수단, 조직’ 등에서도 작업의 모티브를 제공받는다고 한다.

류승환_Life Cycle Series_종이에 펜, 수채화_36×1000cm_2005_부분

류승환_Life Cycle Series_종이에 펜_40×460cm_2004_부분
책에서 눈을 떼고 그리던 손이 잠시 멈추면 문득 창 밖으로 하늘이 보이고 바닥에는 여러 종류의 식물을 키우는 ‘잡초정원’ 이 있어 그 안에 살고 있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생태를 관찰하게 된다. 음악소리, 물소리, 새소리 그리고 작은 정원안의 바글거리는 생명의 수런거림을 듣는다. 그는 자연을 그런 식으로 자기 신체에 연결시켜놓았다. 그것들은 팔을 뻗으면 닿는 거리, 시간 안에 있다. 책과 자연, 자신의 몸을 유기적으로 연결시켜 놓았다. 스스로 자신을 '위리안치' 하고 그 같은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 그에게 작업실은 세상의 변방이자 스스로 유폐시킨 감옥이다. 그는 매일 작업실로 유배된다. 동시에 작업실은 세상의 지식을 탐닉하는 곳이자 정신과 마음을 수양하는 선방이며 하루치의 삶을 수행하고 기록하는 곳인 동시에 자신의 관심과 사유를 배출해내는 곳이다. 받아들이고 배출하고 들이키고 쏟아내는 곳이다.

류승환_Life Cycle Series-우리는 모두 하나다_종이에 펜, 오리엔탈 잉크_35×190cm_2007_부분

류승환_Life Cycle Series_종이에 펜_40×273cm_2007_부분
그는 매일 일용할 양식처럼 책을 읽고 주변의 자연, 생태계를 본다. 그로인해 부풀어 오르는 온갖 생각과 상상을, 환시와 환청과 환상을 종이 위에 기록한다. ‘전 우주가 돌아가는 참 이치’(책, 말씀)를 깨닫고 이를 내재화해서 그것들이 머리와 가슴에 흘러넘쳐 온갖 자극으로 파득거리고 뒤척이면서 연쇄적인 반응을 할 때, 그것들을 가지고 일종의 ‘시뮬레이션’하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그림이다. 따라서 그의 기이하고 혼돈스러워 보이고 중심도 주변도 없이, 시작도 끝도 없으며 그저 흐르고 겹치면서 온갖 상상을 자극하게 해주는 그림은 그가 접한 지식, 받아들인 세상의 온갖 데이터, “머리 머릿속에 잔뜩 껴있는 그 데이터를 빼내는” 일이자 이를 시뮬레이션한 것이다.

류승환_Life Cycle Series_종이에 펜_40×273cm_2007_부분
거의 무위에 가까운 상태에서 그려낸, 써나간 자취는 보는 이의 추억, 상상에 따라 자유롭게 읽혀진다. 그림은 무엇을 지시하거나 강변하지 않고 따라서 목적적이지 않다. 검은 색 얇은 펜이 섬세하고 집요하게 종이의 표면을 잠식하고 있는 형국이다. 까만 흔적이 감각적으로 유영한다. 단일한 펜, 색에서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이 연출된다. 그것은 이미지 이전에 색상과 감촉과 질감으로 전이된다. 화면은 캄캄하고 혼돈스러운 공간, 면에서 조심스레 실타래 같은 선들이 빠져나오고 그것들이 ‘그 무엇’ 같은 형상을 암시하다 사라지고 지시하는 것 같다가 이내 다른 존재로 돌변하고 기생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파편적이고 분열되어 보이는 낱낱의 장면은 어느덧 또 다른 존재로 연결되고 이내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다시 다른 몸으로 이전된다. 지상의 모든 문양과 도상이 다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생명체를 연상하는 유기적 선들의 지속이 있고 나아가 인간이 상상해낼 수 있는 이미지의 여러 변주가 죄다 감행된다는 느낌이다. 비교적 구체적이고 인지 가능한 형상에 기생하는 환각적인 장면의 연출과 연계는 기이한 상황으로 보는 이들의 눈과 마음을 끌고 간다. 익숙하면서도 낯설고 구체적이면서 동시에 초현실적인 장면들은 한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별개의 세계가 아니라 하나의 세계이고 이원적인 공간이 아니라 통합적 공간이다. 현재의 시간과 과거의 시간이 공존하고 구체적 세계와 비가시적 세계가 마구 뒤섞여있기도 하다. 상이한 것들끼리 만나서 또 다른 장면을 만들고 다시 어디론가 이동하는 이 장면은 흡사 정처없는 생을 보내는 인간의 운명, 화가의 생을 은유하는 듯도 하다.

류승환_Life Cycle Series-식물의 꿈Ⅱ,Ⅲ,Ⅳ_종이에 펜_35×37cm×3_2008_부분
이 드로잉은 문학적 감성과 상상력, 작가의 환시와 환청에 기인한다. 그는 ‘눈을 감아도 보이는 세계, 귀를 닫아도 들리는 세계’를 그린다고 한다. 그래서 화면에는 침묵으로 절여진 어두운 공간이 대부분 자리하고 있다. 그로부터 다시 무엇인가가 출현한다. 그것은 목적없는 충족적인 선의 유희 같다가도 모종의 이미지를 만들다가 지우고 다시 어떤 것을 연상시키다가 이내 스러진다. 그것은 완결되어 있거나 독립적이라기보다는 미완의 상황성이고 비결정성이자 여전히 생성중인 순간을 안긴다. 손이 가는대로 그려놓은 하나의 흔적으로부터 발생하는 예기치 않는 사건들이 연속되고 증식된다. 흡사 생명체의 번식과 새로운 변종들이 파생되어 나가는 형국과도 유사하다. 한 눈에 명료하게 다가오기 보다는 가까이 혹은 멀리, 부분적으로 뜯어먹는 시선에 의해 다가오는 이상한 생명체, 미지의 존재, 우리 눈이 판독하기 어려운 미시적인 또는 언어로 규정하기 어려운 무엇인가가 가득 그려져 있다. 그것은 또한 거대한 ‘이야기’그림을 연상시킨다. 문자가 없는 시대에 그림으로, 선으로만 채워진, 정확한 판독이 불가능한 그런 상형문자로 채워진 이야기그림이다. 그 안에는 무궁무진한 서사가 그려/쓰여있다. 이 서사는 두루마리에 펼쳐진 끝날 수 없고 끝을 알 수 없는, 다만 작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까지만 지속될 그런 그림이다. 그것은 오팔카의「숫자쓰기」처럼 다분히 실존적인 뉘앙스도 지닌다. 그래서 그림이기 이전에 작가의 몸과 정신, 의식/무의식의 흐름이자 이동, 시간, 노동의 흔적들로 다가온다. 무모한 노동을 탐미하듯, 그리기와 함께 자신의 모든 것을 의탁하고 기꺼이 그것과 함께 소진되어 나가는 여정 같다는 생각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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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UNGKYOUNGYEON
정경연展 / CHUNGKYOUNGYEON / 鄭璟娟 / mixed media
2008_1002 ▶ 2008_1030 / 일요일 휴관

정경연_블랙홀08-20_캔버스에 혼합재료_80.3×100cm_2008
초대일시_2008_1002_목요일_05:00pm
2008 세오 5th 개관기념 초대 ‘정경연, 작가30년 기념展’
관람시간 / 10:00am~07:00pm / 일요일 휴관
세오갤러리_SEO GALLERY
서울 서초구 서초1동 1666-12번지 꿈을 꾸는 세오빌딩 2층
Tel. +82.2.583.5612
www.seogallery.com
‘장갑’의 파노라마와 블랙홀의 파장 ● 2008년 작업을 만나기 위해서 정경연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 새로운 패턴의 작업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블랙홀시리즈들이 인상적이었지만 그 카테고리는 여전히 ‘장갑’ 이었다. 그녀와 ‘장갑’은 30여년 동안 일체화된 이미지로 인식될 만큼 대표적인 상징이 되어버렸다. ● 1979년 미국에서 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국에 귀국하여 정경연이 선보인 것들은 매우 생경한 탈영역의 작업들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 「Untitled 79」로부터 시작되는 당시 「무제」시리즈는 그의 전공이었던 섬유미술을 근간으로하는 염색기법을 활용하면서도 강렬한 컬러와 스틱으로 창출된 오브제를 만들어갔다. 당시 공예와 회화의 영역을 넘나들었던 작업들은 「Untitled 80-8」,「Untitled 80-9」등으로 잇달아 실험적인 작업들을 발표했고 1976년경 처음 선보였던 장갑시리즈가 발표되면서 「Untitled 81」이 제작된다.

정경연_블랙홀08-47_캔버스에 혼합재료_60×130cm_2008

정경연_블랙홀08-48_캔버스에 혼합재료_60×130cm_2008
침염(浸染)기법과 원형의 신비 ● 이후 1985년경까지 「Untitled 83」과 같이 강렬한 컬러를 사용하면서 섬유조형을 넘어서 설치작업과 오브제의 형태를 자유롭게 포괄하였고, 미니멀적 관념 추상의 세계와 구상성을 다양하게 체험하게 된다. ● 이 과정에서 흥미로운 것은 「Untitled 84-3」등에서 볼 수 있는 늘어뜨린 섬유막대들이다. 치렁치렁 각기 층을 이루면서 늘어져있는 이 원시정글의 넝쿨과도 같은 이미지들은 천으로 일일이 제작된 스틱들로서 당시 미니멀리즘의 트렌드와 연결되면서 원형의 신비를 세례했다. 그의 이 원시적 시리즈는 침염(浸染)기법으로서 염액(染液)을 끓인 후 천을 넣어 염색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 물론 이외에도 파라핀을 사용하거나, 먹물, 물감 등을 직접 칠하고 염색하는 과정을 거치지만 이러한 과정들은 평소 자신이 수학했던 염색기법과 동서양화의 회화적 수학경험을 적용한 것으로 당시 화단에서는 신선한 실험의식으로 평가받았다. ● 정경연의 작업에서 다른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이와 같은 샤먼적 표출과 함께 1983년부터는 보다 강력한 단색주의가 등장한다. 거의 흑백만으로 작업된 검은 장갑이나 손끝만을 여백으로 남겨놓은 작업들, 「Untitled 1988」에서 보여준 타피스트리나 섬유작업들의 형식과 연계되면서도 단색화된 작은 스틱들이 늘어져 있는 새로운 국면들을 연출한다. ● 당시 모노크롬의 현상을 보여주는 단색조에 대하여 그는 ‘불가(佛家) 인연’과 매우 밀접하다는 것을 언급한 적이 있다. 수백개의 장갑이 뒤엉켜 입체를 이루는 설치작업이나 화려한 색상이 혼재된 장갑들은 단순히 장갑의 의미를 넘어 어느 곳에서도 편재되지 않은 ‘평등’을 표현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실제로 작품 제목을 ‘중생’으로 정한바 있으며, 색채나 전체 작업의 근간에 있어서도 막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정경연_어울림06-09_캔버스에 혼합재료_72.7×60.6cm_2006

정경연_어울림07-74_M캔버스에 혼합재료_72.7×60.6cm_2007
색즉시공(色卽是空) ● 그녀의 작업은 평면과 입체, 강렬한 색채와 흑백, 형상과 비형상을 넘나들면서 ‘장갑’에서 ‘손’으로, ‘손’에서 인간의 단상으로, 대중과 구원, 염원, 화합, 평화, 소통, 희망, 평등, 관조 등의 다양한 언어로 변환해 왔다. ● 모태신앙이기도 했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더욱 몰입하기 시작한 불가의 인연은 이러한 다의적 작업내용과 함께 무색계열의 절제, 강렬한 색채와 조형적 요소를 넘나들면서 정경연의 심상을 유지해온 중요한 키워드이기도 하였다. ● 그 중에서도 『반야심경(般若心經)』의 한구절인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사상은 작가에게 적지않은 영향을 미친듯하다. 「Untitled 87」에서 「Untitled 90-D」「Untitled 90-0」「Untitled 90-L」까지 이어지는 모노톤의 변화도 그렇지만 “삼천배를 하고 산을 내려오면 작업이 많이 달라집니다. 색인지 무색인지 그 경계도 모호하구요...” 그녀 스스로도 즐겨 사용하는 불교적 용어들 중 바로 이 용어는 핵심적으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 2003년에서 2005년 사이 제작된 바 있는 ‘중생’종이작업시리즈는 실과 박음질 등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작업이다. 꼴라주처럼 덧붙여 박음질을 해가면서 염색된 종이 조각들을 하나씩 이어나가는 작업은 ‘인연’과 ‘인연’으로 이어진 인간들의 ‘연기설’을 조형적으로 말해주는 듯한 연관성을 지닌다. ● 한편 이번 전시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렌티큘러(Lenticula)’가 가미된 「블랙홀」시리즈들은 전혀 색다른 패턴으로 와 닿는다. 가운데의 렌티큘러를 중심으로 장갑들이 나선형으로 원을 이루면서 마치 우주의 블랙홀, 기의 파장 등을 연상케하는 시리즈들이 새롭게 탄생하고 있다. 바탕은 흑과 백으로 선택되고, 다시 마티에르를 추가하거나 역시 침염기법을 이용한 염색작업이 마치 수묵화의 발묵(潑墨)현상을 연상케 할 정도로 자연스러운 선염을 이루고 있다. ● 작가와의 대화에서도 확인된 것이지만 이 시리즈의 해석에서 ‘기(氣)’의 의미를 전제할 수도 있으나 귀결되는 ‘원’이나 여백, 선염기법 등을 비롯하여 거대한 불교미술의 ‘혜안’ ‘천수관음’을 연상케하는 많은 손 시리즈들은 불가적 인연과도 멀지않다.

정경연_어울림08-2_캔버스에 혼합재료_162.6×130.3cm_2008
‘함몰’과 ‘확산’의 경계에서 ● 정경연의 작업은 지난 30년 동안 ‘장갑’이라는 일관된 메디움(medium)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가 던지려고 하는 메시지나 형식은 다양했다. 여러 형태와 재료, 1차원에서 3차원을 넘나드는 유형을 구사했으며, 1990년대 초반부터는 이상에서 언급한 시리즈 이외에도 모놀리스(Monolith)처럼 거대한 입방체 작업이나 병풍처럼 입체화된 「Untitled 87」, 「Untitled92-A」를 제작하였고, 2004년 종이작업을 선보이면서 구멍이 뚫린 입체시리즈를 제작한다. ● 도조(陶造)작업을 통한 브론즈제작을 시도하고 타피스트리, 판화, 유화, 테라코다를 제작하기도 한다. 백남준을 기리기 위하여 자신이 직접 연희하는 장면이 삽입된 「Harmony」시리즈의 비디오 설치 등이 선보이기도 한다. ● 나의 작업 속에서 나타난 갖가지의 매재-섬유, 흙, 금속, 종이 등-는 섬유에 의했던 장갑을 단순히 다른 재료에의 번안이라는 논리에서가 아니라 작품자체에 내재하고 있는 생성의 적극적인 구현을 위해 확산될 수밖에 없었던 결과이다. 또한 그러한 확산 속에서 장갑이라는 기본단위는 나를 매재에 함몰시키거나 무모한 실험으로 끝나버리는 와중으로부터 나의 조형언어를 정제시켜주는 하나의 단서로 계속되고 있다.(정경연) ● 그렇다. 정경연의 작업은 ‘장갑’이라는 오브제를 통한 ‘함몰’과 ‘확산’의 경계를 반복하는 특수성이 있다. 매재, 즉 메디움 자체의 사용이 소재이자 주제적 성격을 동시에 수반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와 같은 단일코드만으로 30년간의 미술계 흐름과 연결하는 과정에서 더욱 강하게 요구되었던 것이 바로 ‘다의성’의 해석이다. ● 이번 블랙홀작업에서 보여주는 장갑의 새로운 변신이나 백남준을 위한 「Harmony」시리즈 역시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정경연_Harmony installation_영상설치_가변크기_2007~2008
‘바느질의 미학’과 부드러운 조각 ● 많은 사람들은 그가 다루는 장갑이나 일체의 재료들이 기성제품을 사용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장갑을 비롯한 스틱 등 일체의 메디움들은 직접 디자인하고 생산라인에 주문하게 된다. 제작과정 역시 실의 짜임이나 마감 때문에 직접 참여하는 경우가 많아서 사실상 구상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전과정이 작가의 노력이 없이는 어렵게 된다. ● 보존문제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장갑이라 하더라도 재료가 ‘실’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완전한 보존이 어렵다. 이러한 문제가 보완되지 못했던 과거의 작업들과는 달리 최근에 들어서는 바니쉬(Varnish)처리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상당히 오랫동안 보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 작업과정을 변환하고 있다. ● 이와 같은 제작과정과 재료를 살펴보면서 간과할 수 없는 다른 하나의 정경연이 발견된다. 즉 ‘여성성’의 논의이다. 그의 작업은 외형적으로 보면 물질성이 강하면서도 역동적이다. 그러나 그 역동성의 배면에서는 ‘실’ 과 ‘바늘’로 한땀 한땀 바느질, 박음질해가는 섬세함과 매재와 매재간의 끌고 당기는 조율이 있다. 여기에 침염 등의 반복과정 역시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이라 말했던 바대로 여성적 감성을 빼놓을 수 없다. ● 30여 년간의 작업들을 되돌아보고 중간정리의 의미를 갖는 정경연의 이번 전시는 신작들과 함께 과거 작품들이 동시에 출품되고 있다. 1970-80년대 만해도 그녀는 미술계에 ‘일대사건’들을 저질러왔다. 이러한 1970년대 후반 시절부터 여정을 되짚어보는 이번전시를 통하여 그가 횡단해온 아방가르드 정신과 일관된 실험의식, 여성적 감수성 등을 읽을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되고 있다. ●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정경연의 선언과 열정이 현재도 진행형이라는 점이다. 새롭게 구상되는 여러 시리즈들이 또 하나의 거대한 파장을 형성하는 ‘블랙홀’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 최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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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된 풍경
윤은숙展 / YOONEUNSOOK / 尹垠淑 / photography
2008_1003 ▶ 2008_1016

윤은숙_양평_디지털 프린트_50×77cm_2008
초대일시_2008_1010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10:30am~07:00pm
갤러리 브레송_GALLERY BRESSON
서울 중구 충무로1가 고려빌딩 B1
Tel. +82.2.2269.2613~4
cafe.daum.net/gallerybresson
카메라 렌즈를 통해 어떤 대상을 주시한다. 이것이 내가 대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다. 이번에는 렌즈너머 사각의 프레임에 풍경을 바라본다. 이상하게 그냥 눈으로만 보면 늘 보던 것, 익숙한 풍경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파인더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익숙한 듯 하지만 참으로 낯선 모습을 하고 있다. 풍경의 이미지들이 나와 관계를 맺고자 한다. 파인더 너머에서...

윤은숙_경부고속도로_디지털 프린트_50×105cm_2008
예로부터 풍경화는 그리는 자에게 철저히 선택된다고 할 수 있다. 서양의 풍경은 인간의 시점과 원근법적 구도에 매우 충실한 프레임의 외적 전형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구현하는 산물이기도 하다. 반면 동양의 풍경은 다양한 감각과 관념적 산물이라고 한다. 보는 사람의 마음가지도 생각하는 프레임의 내적 전형이라 여겨진다.

윤은숙_양평_디지탈 프린트_35×100cm_2008

윤은숙_양평_디지털 프린트_28×100cm_2008
풍경은 정돈되지 않은 자연 가운데 흐르는 시간과 공간을 잡아내어 동시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 속에 오랜 세월 변화 되어온 생명의 터전들이 보여진다. ● ‘관계된 풍경’은 프레임의 유연함을 통하여 프레임 안의 풍경과 주변의 원활한 소통을 도모하고자 한다. 또한 프레임의 공간과 시간도 원활히 소통되고자 한다. 단순하게 한 시점이 아닌 시공간의 다양한 시점을 표현하고자 했다.

윤은숙_양평_디지털 프린트_50×91cm_2008
홀가의 시선은 무심한 듯 흐르듯이 이 경치를 담는다. 눈을 현혹하는 디테일이나 화려한 풍경의 구속에서 벗어 날수 있다. 그 속에는 공간과 공간이 그리고 시간과 시간이 중첩되면서 정방형의 프레임은 다양한 시점을 취해 좀 더 다양해진다. 시간도 여유로워진다. 무심한 듯 흐르는 구름, 땅, 물 그리고 시간들이 서로 어울려 흐른다. ■ 윤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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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도시_Botanopolis
김제민展 / KIMJEIMIN / 金濟珉 / drawing.printing
2008_1003 ▶ 2008_1016 / 월요일 휴관

김제민_암벽등반_한지에 연필과 수채_76.5×57.5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51205c | 김제민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03_금요일_06:00pm
가갤러리 기획초대展
관람시간 / 11:00am~06:00pm / 월요일 휴관
가갤러리_GAGALLERY
서울 종로구 원서동 141번지
Tel. +82.2.744.8736
www.gagallery.co.kr
“싱거운 유머 속에 탑재된 쓴 개념들” ● 김제민은 찍기(printmaking)도 하고 그리기(drawing)도 한다. 가끔은 사진이나 비디오 영상을 작품으로 내밀기도 한다. 하지만 어떤 장르를 가지고 작업을 한다 해도 그의 발언과 표현은 거의 같다.

김제민_군자의 덕목3-땅빈대_한지에 먹과 과슈_50×35cm_2008
대개 식물들의 모습을 의인화해서 보여주거나, 아니면 식물의 본성을 빗대어 인간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식물을 비유하여 자기를 비롯한 인간의 행태와 생활상 그리고 더 나아가 사회상을 담는다. 여기까지는 그렇게 관심을 끌지 않는다. 이런 언사를 보다 흥미롭게 하는 것은 그의 독특한 화법이다. 인격화된 식물들의 모습은 애처롭게도 우습다. 그냥 인간을 흉내냈다기보다는 그 대상에 연민과 (비)웃음을 불러 일으킬만한 ‘아닌’ 모습으로 그리고 있어서다. 이런 이미지는 작가의 냉소적인 표현술과 화법이 낳은 결과물들인데, 그 태도가 관객에게 부정적으로 비치거나 경망스럽게 보이지 않는다. 그 냉소적 유머는 작가의 노련한 - 작가는 아직까지도 어린 축에 속한다-이미지에 대한 사고와 사회와 자신의 삶의 환경을 이루는 주변에 대한 성실한 관찰에 기인한다. 그러므로 김제민의 그림은 비교될만한 작품 군(群)들, 이를테면 네오 팝과 같은 유사한 형상성을 가진 작품들과는 품격이 다르다. 평가를 먼저 하자면, 그의 작품에는 진지함과 사물(특히 식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막연한 애정과 연민이 분명히 탑재되어 있으며, 그것을 단순한 감성으로 마무리짓지는 않는다. 그래서 작품 속 이미지에는 경박한 (즉 얇은) 이미지 층과 그 밑에 깔린 두꺼운 의미 층이 함께 존재한다. 물론 후자를 인식하려면 작품을 보는 시간을 조금은 더 할애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 의미의 지층이 어렵게 찾아지지는 않는다. 작가의 문법은 누구나에게 친절하게 의미로의 문을 열어준다. 그리고 그 의미 층 밑에는 보다 깊은 반성과 성찰을 위한 개념의 바닥이 존재한다. 여기까지 가야만 김제민의 그림은 그 함유한 내용물을 모두 털어놓을 수 있다. ● 그의 유머가 단순히 웃기지 만은 않은 것은 작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그려진 이미지들은 순진해 보인다. 이렇다 할 조형적 구축은 대체로 절제된 편이며, 그렇다고 그 절제가 세련된 형태로 보이지 않는다. 정말로 내키는 대로 혹은 어떤 구애도 없이 솔직한 표현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꾸밈 따위의 혹은 조형적 수준을 억지로 끌어올리는 등의 잡스런 추가는 완벽하게 지양된 상태이다. 그래서 김제민의 우스개 그림들은 이전 민중미술이나 현재의 사회비평적인 작품들에 비하면 덜 전략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것도 일종의 수사학적 방법론일수 있겠다. 조금 더 신중히 살펴보면, 직설적인 언어구사처럼 보이는 언변 속에 교묘히 설정된 비유가 함께 작용하는 것처럼 그의 유머가 번복해서 읽혀진다. 직유법적 이미지의 활용은 비록 유치하고, 때론 허탈해 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것을 정련하거나 보다 세련된 방식으로 바꾸었다면, 설득력은 배우 감소되었을 것이다.

김제민_군자의 덕목4-방동사니_한지에 먹과 수채_50×35cm_2008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다. 예를 들면 <군자의 덕목 시리즈>는 대략 난감한 한문으로 비굴한 인생의 처세에 대해 말한다. 거대한 담론이나 거시적인 도덕은 일단 보류된다. 식물은 여기서 비유로서 텍스트를 의역(paraphrase)한다. 텍스트의 가벼운 난독을 해소해 주는 역할과 함께 의미를 보강해 준다는 뜻이다. 벽에 달라붙어 기생적인 삶으로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는 넝쿨나무나 아스팔트 틈에서 억세게 삶을 키운 잡초에서 혹은 철거 반대를 몸으로 쓰는 식물들의 모습은 스스로를 겨우 지켜가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거울처럼 비추어 준다. 식물들은 어떤 억압과 통제에 대한 말없는 반항과 힘없는 절규를 대변한다.

김제민_가지금지_캔버스에 아크릴채색_53.2×41cm_2008
여기에서 냉소는 작가가 관객(혹은 우리)에게 보내는 감정적 메시지는 아니다. 냉소적인 유머는 사실상 현 사회의 모순과 모순 속에 질경이처럼 삶을 보존하고 지키려는 존재들을 향한 슬픔처럼 느껴진다. 비애와 인간미는 그의 웃긴 이미지 놀이에 웅크리고 있다가 그것과 만난 우리의 입가에서 지어지는 냉소로 전이되어진다. 비교적 오랜 동안 작가를 지켜본 필자는 그가 유머로 철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이것은 항상 내 기억 한 켠에 잠재되어 있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리고 그가 욕으로 철학을 했으면 좋겠다고 토로했던 것을 함께 기억하면서, 그런 완벽한 언사의 차원이 우리에게도 허락될 것인가라는 의혹에 빠진다. 교양과 학식이라는 그다지 믿을 만하지 못한 배경으로 얼마나 많은 속물주의가 미술과 문화 속에 퍼져있는가? 그런 상황 속에서 김제민의 그리기는 더욱 빛나고 순결해 보인다.

김제민_알묘조장.초지일관_한지에 먹과 수채_36.5×22.5cm_2008
허술한 그의 작법과 웃기지만 결코 끝까지 웃을 수 없는 그의 유머는 작가의 눈과 마음이 세상을 바라보며 가슴 속에 묻었던 아픔처럼 전달된다. 그가 던지는 허무한 농담처럼 사회와 삶의 억지와 모순이 해소될 기회와 가능성이 약간이라도 있다면 좋겠다. ■ 김정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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溫故知新_비움
강용면展 / KANGYONGMYEON / 姜用冕 / sculpture
2008_1003 ▶ 2008_1130

강용면_溫故知新-부귀(富貴)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173×137×53cm_2008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70810d | 강용면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8_1003_금요일_06:00pm
갤러리 노랑_gallery norang
서울 강남구 도곡동 454-14번지
Tel. +82.2.575.2285
Taking a lesson from the past-비움_오채(五彩)의 변주 시리즈 ● 무속(巫俗)을 비롯하여 민족적 정서를 근간으로 한 고전적 모티브에 현대적 시각효과를 유발하는 프로젝트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킨 강용면이 또 다른 볼거리로 관객의 시선을 모은다. 전통과 현대, 회화와 조각, 구상과 추상, 중심과 주변의 경계 허물기는 수많은 작가들이 시도해 온 동시대적 창작의 주요 과제였다. ● 이러한 시류와 더불어 혹은 시류와 차별화된 작가만의 저력의 결과물은 전통을 기반으로 한 기발한 아이디어와 참신한 소재의 만남에서 엿볼 수 있다. PC(polycarbonate), 아크릴, 자동차 외장 도료, LED 등을 활용하면서 그가 지향하는 예술성을 담보로 한 대중조각의 진수를 선보인 것이다. 그로 인해 작가는 명멸하는 빛과 화려한 색의 변주로 표현된 신(新)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매력을 가감 없이 연출하면서 강용면식 조형의 담론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강용면_溫故知新-삼신할머니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90×30×25cm_2008

강용면_溫故知新-lndecision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73×23×12cm_2008
그의 조형어휘의 요지는 빛과 색(色)으로 집약될 수 있다. 금번 전시작들은 빛보다는 색을 중심으로 하여 익살과 풍자가 깃든 아기자기한 조형물들 이를테면 다소 공예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색감이 돋보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것들은 과거와 현재, 일상에서 채집한 아이콘들로서 현대 사회의 시사성에서 발아된 이미지들과 함께 ‘옛 것을 익혀서 새 것을 안다’는 온고이지신이라는 테마와도 부응한다. ● 전시작들의 주요 이슈는 무소유(無所有), 즉 버림으로 대변된다. 이는 앞서 언급 했듯이 현재라는 시제에 맞추어 실존적 지평에서의 자기 정체성의 탐구로부터 기인하는 작가의 세상읽기와도 상통하는 대목이다. 본래 무소유에서 무(無)란 ‘가지고 있지 않음’을 의미하되 공(空)의 개념과도 유사하다. 공은 논리적인 타당성이 불허되어 자아와 타자는 물론 허공자체도 빈 절대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이다. 그러나 공즉시색(空卽是色), 공과 색은 하나라고 하지 않는가. 작가의 공은 색을 포용한다.

강용면_溫故知新-Sugar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55×45×35cm_2008
한낮 하루살이 같은 미물로서 인간이 지닐법한 욕망의 파편들, 예컨대 남과 북의 군인, 권투선수, 사천왕, 소련 혁명탑 등은 이념과 이해관계를 넘어선 화해와 용서 혹은 지킬 것과 버릴 것의 상징물로서 허심(虛心)을 향한 의지의 표상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한 일련의 메시지는 오채(五彩)의 혼합으로 인한 보다 다채로우면서도 온화한 중간색조의 운용과도 동일한 맥락에서 취합, 해석될 수 있다. ● 에어브러쉬를 활용한 색의 파노라마, 굵고 가는 선묘와 스밈과 번짐의 효과는 우연성의 개입으로 일구어진 아늑한 탐미적 분위기와 세련미를 발현한다. 이는 브러쉬의 작동이 무작위의 기교에서 발아하는 비정형적인 미감을 구현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PC판의 성형과정이나 도료의 분사는 그저 단순한 행위로써 물화(物化)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서 응축된 기(氣)와 운(韻)의 조응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오밀조밀한 조형물들은 세속적 욕망의 무화를 겨냥한 무심(無心)어린 매스(mass)에 다름 아니다.

강용면_溫故知新-Gaius Julius Caesar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125×50×53cm_2008

강용면_溫故知新-Nilke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108×77×67cm_2008

강용면_溫故知新-kim_합성수지에 혼합재료_105×55×55cm_2008
결국 그의 ‘비움 시리즈’는 ‘낮춤’을 주제로 한 조형적 실험의 연장선 위에서 세계를 관상(觀想)하고 심기(心氣)를 정화하고자 하는 자아실현의 대리물로 비유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시작들에서 보여 지는 오색의 변주와 무소유의 관조적 풍경은 작가의 창작내용과 형식의 행보가 빠르게 진화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이벤트이다. ■ 손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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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사계
제2회 Plastic展 / 조영표_고용수_유진미 / painting
2008_1003 ▶ 2008_1009
고용수_빛 운반자_딸기 케익 이후의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_72.7×90.9cm_2008
초대일시_2008_1003_금요일_06:00pm 관람시간 /
평일_10:00am∼06:00pm / 일요일_12:00pm∼06:00pm
갤러리 성_LUXURY gallery CASTLE 서울 마포구 창전동 6-136번지 Tel.
+82.2.324.9913
리비도(Libido) 혀-도발적 메커니즘
●작품의 근본적 동기, 목적은 ‘자아’라는 존재에 대한 확신의 절대적 필요성이며, 인간의 포괄적인 정서를 아우르는 변이적 욕망의 표출이다.
자아에 대한 지나친 관심-자아 리비도의 한계-는 시선을 외부로 향하게 한다. 다른 존재를 통하여 혹은 다른 시선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세계 속의 자아 혹은 타자, 대상과 자아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조영표_Libido-implicit
metaphor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8
성욕이란 정확히 무엇이라고 환원시키기 어렵다. 성욕은
몸의 현상만큼 그 경계를 객관화시키기가 불가능하다. 몸이 대상이 아닌 만큼 그 명확한 경계가 없듯이 성욕도 대상이 아니기에 그 객관적 영역을
고착시키기가 힘들다. 성욕은 그 자체대상이 아니기에 그것은 이미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연관되어 나타난다. 그것이 우리의 존재 전체에
연계되기도 하고 우리의 역사 전체와 상감 되어 있기도 하다.

조영표_Libido-dead
metaphor_캔버스에 유채_60.6×72.7cm_2008
“그 자체 폐쇄적인 성욕이 없듯이 성욕의 근본도
없다.”● 욕망은 늘 다른 어떤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환유적 운동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리비도는 대상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방향성을 취하게
되는 것이다. 다분히 공격적이고 자기방어적인 혀를 내미는 행동을, 리비도적 행위에 맞물려 관철한다. 원천적 성적 욕망과 접지된 화면 속 인물의
도발적 표정들이, 현 시대를 향한 외침이며, 몸과 마음에 육화된 자신의 변이적 예술 지론에 대한 채찍질이다. ■ 조영표

고용수_빛
운반자_후렌지 딸기파이 이후의 딸기_캔버스에 아크릴과 유채_90.9×72.7cm_2008
유난히 유난히 맑은
활주로-빛 운반자 ● 달콤한 딸기 케익이 있다. 딸기 케익을 만들면서 인간과 기계 그리고 많은 생산물들은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었을까.
혼란과 시련 속에서 딸기는 활주로를 향해 차갑고 사라지지 않는 빛을 발하며 뛰쳐나왔다. 그 빛은 phosphorus가 처음 발견 됐을 때 발하던
것과 같았고, 그 빛은 마치 독과 같았다. 그런데 그곳은 수많은 사람과 기계, 다양한 감정과 사건들이 교차하는 활주로였다. 너무나 힘들고
답답했던 ‘이후의’ 딸기의 빛은 빛 운반자에 의해 옮겨질 준비를 한다. 보이지 않는 감정의 공격을 준비한다. 그러나 나는 공격을 불가능하게 하는
교신 불가능 상태, 비행 불가능의 상태들을 만든다. 그래서 그날은 그 빛이 따뜻하게 되어 사라졌고, 하늘은 유난히 유난히 맑았다. 오늘도 내일도
하늘이 맑았으면 좋겠다. ■ 고용수

유진미_Hawaii로 갈 준비-내 얘기 좀
들어볼래?_캔버스에 유채_116×90.5cm_2008

유진미_Hawaii로 갈 준비-동맹_캔버스에
유채_116×90.5cm_2008
이야기-Hawaii로 가겠다는 어른이 되버린 토끼 ● 어른으로 변해
가는 토끼는 부지런히 걷는다. 완전한 어른이 되기 전에 도착해야만 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고갱이 도착한 그 곳처럼 어른토끼도 그 곳을
원한다. 알지 못해서 더 웃음 지어지고, 가지 못해서 더 흥분되는 매력적인 Hawaii로 부지런히 걷는다. 고갱은 타히티에서 자기 자신에게
정직했고 자신의 사랑과 본능에 대해 정직했다. 타히티에서 새로운 시작을 한 마흔 살의 고갱은 순수라고 표현하기에도 어색할 만큼 야만적인 삶과
정서의 여인들과 사랑하기 시작했고 그의 화필도 급격해 변했다, 타히티처럼. ● 어른토끼도 그 곳에서만이 영원할 수 있을 것 같아 걷는다고 한다.
■ 유진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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