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ink & blue Project
제5회 다음작가 윤정미 사진展
2007_0614 ▶ 2007_0624

윤정미_블루 프로젝트 - 에단과 에단의 파란색 물건들_라이트 젯 프린트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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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14_목요일_05:00pm
주최_박건희문화재단
2002년부터 시작된 박건희문화재단의 젊은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다음작가상은 2006년 그 다섯 번째 수상자로 윤정미씨를 선정하였습니다. 2006년 5월 이루어졌던 제5회 다음작가상 공모에는 사진과 영상을 기반으로 작업하는 젊은 작가 54명이 지원하였고, 본 재단의 구본창 이사장을 심사위원장으로, 명지대학교 박주석 교수, 계원조형예술대학의 오형근 교수, 전시기획자이자 미술평론가인 류병학 선생께서 심사위원을 맡아 수준 높은 작품들에 대한 심도 있는 평가를 진행해 주셨습니다. 심사의 기준으로는 향후 1년간의 작업계획서가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였고, 제출된 포트폴리오는 그 실현 가능성의 기준이 되었음을 밝힙니다. 또한 보다 뜻있는 지원 사업으로 변모한다는 의미에서 다음작가상 5회부터는 한 명의 수상자를 새로운 심사방법으로 선정한다는 점과 조정된 규정에 따른 지원이 수상자에게 제공될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윤정미_핑크 프로젝트 - 다연이와 다연이의 핑크색 물건들_라이트 젯 프린트_2007
제5회 다음작가상 수상자 윤정미씨의 작업 The Pink & Blue Project는 시각적으로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사진에 보이는 이미지는 한 어린이와 그를 둘러싸고 있는 장난감, 학용품, 소지품, 옷 등의 소품들로 구성되며, 이들은 모두 그 아이가 직접 입고, 사용하는 생활 속의 대상들임이 쉽게 드러납니다. 그 평범한 배열 방식과 시각적 관점에 의해 전달되는 두 가지 테마는 색으로 구분되는 성별의 문제와 유희로 이어지는 생산과 소비에 대한 것입니다. 산뜻한 두 가지 색상으로 확연히 구분되는 어린아이의 성별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우리 사회의 이분법적 성의식을 전형적이면서도 아주 경쾌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또한 넓게 펼쳐져 아이를 둘러싸고 있는 소장품들의 대부분은 공장에서 생산된 제품들로써 현대 사회에서의 유희와 학습, 소유의 문화에 대한 작가적 사유의 자취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들은 전체적으로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근본적이고도 민감한 문제들과의 연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매우 경쾌한 시각적 재현을 보여줌으로써 가벼움 속에서의 깊이와, 현대 사회의 많은 특성들을 미묘하고도 재치 있는 시선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 윤정미씨의 이러한 감각은 지난해 다음작가상을 수상한 이후 그녀가 얻어낸 사회적 성과를 통해서도 증명이 되어왔습니다. 지난 세기의 명성을 뒤로하고 지난 5월 아쉽게도 폐간된 세계적인 잡지 〈LIFE〉가 그녀의 작품을 2007년 4월 13일자 표지로 사용하면서 소개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2006년 미국 뉴욕의 International Studio & Curatorial Program(ISCP)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하였고, 2006 International Photography Awards (IPA)에서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두드러진 활동을 통해 주목받고 있습니다. ● 제 5회 다음작가상 공모에 응해주신 작가 분들의 모든 작품들은 가치 있고, 훌륭한 수준이었기에 우열을 가리는 심사과정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지원해 주셨던 역량 있는 모든 작가 분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울러 지난 1년 동안 자신의 작업을 꾸준히 발전시키면서, 국내외에 걸쳐 활발한 활동을 보여준 수상자 윤정미씨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박건희문화재단은 향후에도 꾸준히 한국의 젊은 작가들의 든든한 디딤돌이 될 것을 약속드리며,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 ■ 박건희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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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주기, 다시보기
김승택 개인展
2007_0613 ▶ 2007_0624

김승택_개미마을_디지털프린트_106×160cm_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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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613_수요일_06:00pm
12:00pm ~ 06:00pm
갤러리175
서울 종로구 안국동 175-87번지 안국빌딩 B1(참여연대 옆)
Tel. 02_720_9282
blog.knua.ac.kr/gallery175
과연 본다는 것은 우리에게 사실을, 진실을 전해주는 것일까? ‘Seeing is Believing.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라는 명제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의구심을 가지고 질문하며 ‘본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진실을 파헤치려 노력해왔다. 하지만 주장만 있을 뿐 증명은 없다. 정답은 없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 것일까?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일까? 아니면 보는 행위 자체에 대해 맹신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승택_조형연구소_디지털프린트_106×160cm_2007
김승택의 작업은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일 수 있다. 그는 실재와 허상 사이에 존재하는 틈, 그리고 그 틈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에 주목하며, 여러 가지 실험들을 행하고 제시한다.거울에 비친 허상이라 여겨지는 〈여섯 가지 이유〉와 그 움직임을 기록한 영상물은 실재와 허상, 지각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괴리에 대한 증명의 제시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증명 방법은 인식에 대한 배신을 수반한다. 유리판을 사이에 두고 대칭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사물들은 그 유리판의 존재에 의해 실재와 허상으로 나뉘어져 인식되게 된다. 그렇게 거울에 비친 것이라 여겨지는 사물들은 실재하지 않는, 다만 빛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지로 인식된다. 그러나 뭔가 이상하다. 거울에 비친 상이라면 보는 각도에 따라 상의 위치도 조금씩 변해야 한다. 하지만 유리판 뒤의 사물은 실재이기에 움직이지 않고 허상이 아닌 실재로 떠오르게 된다. 허상이라 인식했던 관람자의 믿음에 금이 가게 되는 것이다. 작가는 유리판과 어두운 전시 공간 등 여러 장치를 사용하여 1차적으로 관람자를 속이고, 속고 있는 관람자를 텍스트를 이용해 작품에 가까이 다가가게 한 후 진실을 폭로한다. 그렇게 상처 입은 인식은 관람자로 하여금 인식 그 자체에 대해 다시금 질문 할 수 있게 한다.

김승택_작업실_디지털프린트_106×160cm_2007
유리판에 쓰여 진 그의 텍스트는 유리판을 거울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인 반면, 보는 이를 작품 속에 끌어들이는 기능도 한다. 사소한 일상에 관한 자전적 텍스트는 자신이 타인에게 ‘보여 지는’ 존재이며, 또한 ‘보여 주는’ 존재라는 것을 전제한다. 작가가 밝히는 거울을 보는 이유들은 타인에게 보여 지는 자신의 이미지를 꾸미고 다듬는 것으로, 보여 지는 이미지로서의 자기 방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거울 앞에 서있는 작가(혹은 관람자)를 떠올리게 하는 이 텍스트는 거울과 유리판, 거울을 사이에 둔 실재와 허상, 유리판을 사이에 둔 실재와 실재 사이를 복잡하고 모호하게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복합적인 생각들을 불러 오는 그의 작품은 ‘신 앞에 선 단독자’가 아닌 ‘거울 앞에 선 자신의 이미지를 바라보는 주체’로, 허상이 아닌 자신의 실제 얼굴을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운명을 가진 우리들 주체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여지를 만든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다고 믿는 우리에게 자신의 실제 얼굴을 결코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결코 우리 자신 또한 알 수 없는 것이 아닐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만 우리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뿐이지 않을까?

김승택_희미한 기억_싱글체널_00:03:12_2006
그의 드로잉 작업은 컴퓨터 마우스에 의해 그려진다. 그렇게 선으로 그려진 공간은 이상하게 구부러지고, 굴절되어 있다. 중국의 산수화와 미래파의 그림에서 보여 지는 것처럼 다양한 시점이 존재하기도 한다. 그런 그의 드로잉 과정은 복잡하다. 실제 공간의 부분 부분을 디지털 카메라로 촬영하고, 컴퓨터상에서 그 이미지들을 겹치거나 이어 붙인다. 즉 디지털 이미지들의 콜라주(Collage)인 것이다. 어떤 방, 길게 늘어져 있는 작업실, 그리고 홍제동 문화촌의 풍경들은 부분부분 촬영되어 결합된다. 그렇게 이어진 그의 공간은 이상하게 구부러져, 위에서 내려다 본 장면이나, 하나의 띠처럼 보여 진다.

김승택_반사-글쓰기_싱글체널_00:03:29_2006
한 장의 사진속 공간을 볼 때는 왜곡된 굴절을 발견하기가 힘들다. 하지만 렌즈를 통해 모아진 사진 속의 빛들은 언제나 인간이 실제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굴절되어있다. 한 장 한 장 속의 굴절들은 눈치 채기 어렵지만, 수십 장의 사진이 겹쳐지고 이어지면 그 굴절은 증폭되어 비틀어지거나 구부러져 보이게 된다. 기존 사진의 것과는 다른, 또 다른 ‘파노라마(Panorama)’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김승택의 파노라마 사진은, 컴퓨터 마우스에 의해 그 윤곽만이 그려지게 되고, 공간을 지시하는 지표로서의 사진은 그 특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하나의 드로잉이 된다. 그리고 이 드로잉은 실제 공간의 지표였던 사진의 또 다른 지표가 됨과 동시에 사진 그 자체 대신 픽셀로 만들어진 가느다란 선으로 덮여 원본 사진을 대체, 혹은 부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윤곽과 드문드문한 색 면 만을 보여주는 그의 드로잉은 실제의 기록이라고 여겨지는 사진 속 왜곡을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직접 눈으로 보는 행위 또한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안고 있고, 그것에 대해 고민하는 작가에게 매체를 통해 한 번 더 걸러지는 이미지의 진실성은 당연히 짚고 넘어가야 되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김승택_6가지 이유_혼합재료_33×42×19.5cm_2007
단순하지만 많은 시간이 요구되는, 게다가 펜 마우스도 아닌 일반 마우스로 그려진 그의 드로잉은 노동집약적이라고 할 수 있다. 확대, 축소가 가능한 디지털 프린트의 특성으로 인해 구불구불하게 그려진 선은 축소됨으로써 곧게 보이게 된다. 그 노동의 흔적, 곧은 선과 더불어 인간의 물리적 흔적이 제거된 흰 화면(기계에 의해 출력된)으로 인해 그의 드로잉은 또 다른 미학적 요소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 서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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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데이타베이스
이영준展
2007_0607 ▶ 2007_0626 
고입수험지 합격생 1972년 10월호 (진학사)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포스갤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607_목요일_06:00pm
포스갤러리 2관 서울 종로구 관수동
159-2번지 포토스페이스빌딩 3층 Tel. 02_2268_1114 iphos.co.kr
〈사물데이타베이스〉를 통해 본
사진의 겹표상 ● 〈사물데이타베이스〉는 사물의 이미지에 대해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는 전시다. 사물이란 뻔하게 주어져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사물이란 이미지와 텍스트와 관습 등의 겹표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러니까 사진 한 장 가지고 사물을 재현했다고 소리치는 것은 지하철에서
파는 천원짜리 중국제 GPS처럼 좀 허풍일 가능성이 크다. 사진가는 사물에 대한 겹표상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가 예술사진가든 사진관
사진가든 보도사진가든 말이다. 우리의 현실 속의 소통방식은 단표상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물어보는데 익숙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알기 쉽게 설명해 달라구!" 이 말 자체가 이미 모순을 품고 있는데, 설명이란 사태의 이치를 풀어서 논리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즉 어떤 정황이 왜 그렇게 됐는지 원인과 근거와 전제를 찾아서 남에게 알려주는 것이 설명인 것이다. 그런데 원인과 근거와 전제라는 것이
워낙 복잡하기 때문에 한 마디로 말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사물의 단표상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대신, 우리는 겹표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영준_산악사진의 영고성쇠_낭가 파르밧
루팔벽

이영준_산악사진의
영고성쇠_마터호른

이영준_산악사진의 영고성쇠_지리산
주능선
데카르트가 말한 개념 중에 연장(extension)이란 것이 있다. 이 세상에 모든 것은 다른 것에 닿아
있다는 말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책상은 방바닥에 닿아 있고, 방바닥은 벽에 닿아 있으며, 벽은 문에 닿아 있고, 문은 통로와 닿아 있고,
통로는 폐쇄가능성과 닿아 있으며, 폐쇄가능성은 다이나마이트와 닿아 있고, 다이나마이트는 취급주의와 닿아 있고, 취급주의는 실존주의와 닿아 있는
식이다. 이런 잇닿음에는 끝이 없으니, 인간이라면 누구도 거기다 끝을 낼 수 없다. 설사 그가 강력한 말이나 무서운 표정의 권위로 닿음을 끝내려
해도 사물은 뒤에 숨어서 계속 열심히 닿고 있는 중이다. 데카르트가 말 한 건데 누가 감히 거역할 것인가.

잠사
1972년 3월호 (대한잠사회)

전세계에서 온 친구들에 둘러싸인 마오
주석_1959
사물의 겹표상이란 바로 이런 닿음에 대한 것이다. 하나의 표상은 다른 표상에 닿아 있으며, 그 다른
표상은 또 다른 표상에 닿아 있으니,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단지, 시간이 없다거나 당장은 처리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대어 잠시 유보할
수는 있다. 그러나 강물을 유보할 수 없듯이, 겹표상의 닿음을 유보할 수 없다. 설명을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설사 그것이 어린 아이가 그릇을 엎은 아주 단순한 사태라도 말이다. 거기에는 천지의 조화를 꿰뚫는 신명스런 이치가 서려서 그런 사태가
난 것이니, 그것을 어린 아이의 유치함이나 그릇의 잘못된 디자인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물의 이치들의 닿음을 끊어버리고자 하는 무모한 시도일
뿐이다.

음식과
이데올로기_네덜란드 정물화

음식과 이데올로기_미국 육군

음식과 이데올로기_한국
육군
〈사물데이타베이스〉는 서로 닿아 있지 않은 사물들이 어떻게 표상의 차원에서 닿을 수 있는지 보여준다. 마치
꿈속에서는 불가능한 것들이 서로 닿듯이, 사물에 대한 표상은 사실은 우리들의 혼몽한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에서는 지네들끼리 마구 닿고 있는
중이다. 그게 너무나 광폭하고 혼란스러우니까 우리는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봄들판에 피어난 순진무구한 한 떨기 미나리아재비
꽃의 수술 끝에 묻은 꽃가루 한 개가 일반상대성이론과 닿아 있다면 누가 그런 무시무시한 사태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물론 표상들이 닿아
있다고 해서 사이좋게 닿아 있는 것은 아니다. 표상들은 가재미 눈깔처럼 맞닿아 있지만 서로 못내 꼴 보기 싫어서 각축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개념예술가 조셉 코수드가 사진, 텍스트, 사물로 된 세 가지 다른 상태의 의자를 보여주었을 때, 그는 표상들이 서로 다투는 꼬라지를 보며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코수드가 불쌍하고 순진한 쌈닭들을 싸움 붙이는 투계꾼 처럼 심보가 고약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물의 표상들은
인간이 안 보는 곳에서도 지네끼리 싸우고 있는데 코수드는 얘네들이 싸우니 와서 좀 보라고 커텐을 열어젖혀 보여준 것뿐이다.

풍경데이타베이스_부감시-聖蹟圖後學錄

풍경데이타베이스_이발은 예술

풍경데이타베이스_티벳 너
꼼짝마!
사진은 무엇과 닿아 있을까? 다른 사진과 닿아 있다. 이 세상에 사진이 딱 하나만 있는 일은 있을 수
없으니 말이다. 사진은 사진하고만 닿아 있을까? 사진은 그림에 닿아 있고, 그림은 말과 닿아 있고, 말은 담론에 닿아 있고, 담론은 실천에 닿아
있고, 실천은 권력에 닿아 있고, 권력은 지구력과 닿아 있고, 지구력은 화성력과 닿아 있고..... 겹겹이 닿아 있다. 드로잉은 예술과만 닿아
있는 것이 아니라 기계제도와 닿아 있고, 설계도와 닿아 있고, 지도와도 닿아 있고 지도는 구글 어스와 닿아 있고 구글 어스는 야후와 닿아 있고
야후는 피씨방과 닿아 있고 피씨방은 성수동과 닿아 있고, 성수동은 성수대교에, 대교는 사장교에.... 모두는 모두의 친척인 것이다. 그게 사진의
겹표상이다. 그런데 그 겹표상끼리의 관계는 어떤 것도 스트레이트하게, 즉 있는 그대로 주어져 있지 않고 베베 꼬여 있으니, 이 세상이 원래 그런
건데 누굴 탓하겠는가. 사물이 피사체로 승격되고, 그것이 사진으로 승격되려다가 살짝 삑사리가 나서 드로잉이 되고, 그것이 예술적 드로잉이
되려다가 또 삑사리가 나서 기계적 드로잉이 되고, 기계적 드로잉은 매뉴얼이나 핸드북에도 실렸다가 국정교과서에 실리기도 하고, 이미지비평가나
기계비평가의 손으로 넘어와서는 평론의 담론에 실려 해석의 대상이 됐다가, 심지어는 이렇게 평론가의 개인전이라는 기이한 이벤트의 전시품목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겹표상들의 삑사리와 방랑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고 할 수 있겠다. 겹표상들이 그렇게 얽히고 뒤집히는 일은 실은 일상에서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일이나, 우리가 그간 모른 척 하고 있었을 뿐이다.

Maschinen_서울에서 마지막 남은 전차의
해체, 주간경향 1968년 12월1일호 (경향신문사)

Maschinen_아폴로11호 코맨드 계기판
ⓒNASA

Maschinen_주간경향 1968년 12월1일호
(경향신문사)
사물의 겹표상들을 풀어헤쳐 보면 우리 문명의 속성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물의 본질은 사물을 떠나
저 멀리 하늘 꼭대기에 초월적인 차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겹표상들이 얽혀 있는 그 양상의 네트워크에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데이타베이스〉는 다양한 소스들로부터 모은 이미지와 글들을 엮어서 겹표상의 관계들을 겨루는 한 판이다. 학문이 하는 일은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본디 겹표상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우리들 눈이 게을러서 단표상으로 보이게 되어 있는 것을 눈의
게으름을 걷어 버리고 그 속에 감춰진 복잡한 본래 모습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이 문장을 줄이면, 학문은 원래 보여야 하는데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Technical Drawing_940년까지
증기선의 크기성장, Dock and Harbour Engineering, Vol.1, The Design of Docks, Henry
Cornick, Charles Griffin & Company Limited, London, 1968

Technical Drawing_산업용 X레이
사진에 쓰는 코닥 필름의 특성곡선, Radiography in Modern Industry, Eastman Kodak Company X-Ray
Division, Rochester, NY, 1957

Technical Drawing_에틸렌의
결합혼성궤도함수와 π결합 궤도함수, 인문계고등학교 화학 1981년 (문교부)
〈사물데이타베이스〉는 학문은 아니다.
그것은 겹표상을 다루는 가상의 학문에 대한 시뮬레이션이다. 딱딱한 문체에 근엄한 그림으로 가득 차 있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맨 학문이 아니라,
위에는 오리털 파카 입고 아래는 몸빼바지 입은 대책 없는 퓨전 학문이다. 사물과 표상들을 한 줄로 세우는 무겁고 우울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같은 학문이 아니라 즐겁고 여러 줄의 표상들이 규칙을 무시하고 마구 뒤섞이는 괘씸하고 발랄한 학문이다. 만일 옥스퍼드대학 총장이 와서 여기다
어디 감히 학문이란 말을 붙이냐고 따지고 들면 나는 말 할 것이다. 당신은 그 잘난 학문으로 용돈이 적다고 아들이 엄마 따귀 때리는 집안의
흉흉한 기운을 다스릴 수 있냐고. ■ 이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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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과 소망사이 Dream Space 展

갤러리나우(02-725-2930)
2007-06-06 ~ 2007-06-19
2007-06-06 오후 6시
욕망과 소망사이, Dream Space
오늘날 인간은 무한한 욕망을 소망의 공간으로 순화하여 이상의 세계(유토피아)를 만들어낸다. 즉, 환상에 불과한 유토피아 세계를 현실 속에서 욕망의 실상과 허상을 이상화함으로써 우리가 갈망하는 소망의 공간으로 표현한다. 그 현실과 이상, 실재와 환상은 욕망과 소망의 사이에서 풍부한 상상력과 감성을 통해 새로운 현실을 구성한다. 이때 환상은 인간의 내적세계의 욕망과 소망 공간 속에 감정이입을 통하여 자연스럽게 왜곡이나 과장을 함축하고 표현함으로써 새로운 대안적인 꿈의 세계를 창조해 나간다. 이렇게 인간은 비현실적인 이상과 소원을 걸러내지 않고 숨김없이 환상과 욕망을 잠재의식 속의 꿈으로 이끌어 낸다. 이번 욕망과 소망사이, Dream Space전은 욕망과 소망사이에서 드러나는 꿈과 이상을 새로운 사유의 상상력으로 환상을 만들어 내보이고 우리가 현실에서 접할 수 없었던 비현실의 세계, 소망의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비논리적이고 낯선 느낌을 이미지로 자연스럽게 재창조하여 주관적인 감성과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
Dream Space “ Utopia”
구성연은 동화 ‘재크와 콩나무’의 한 장면을 보여주듯 인간의 욕망으로부터 식물을 해방시켜 상상의 공간으로 재구성한다. 동시에 인간의 욕망공간을 잠식시켜버린 무성한 덩굴식물을 통해 본질적인 소망을 담아 화분으로 순화하여 이상적인 소망의 공간을 보여준다.
원성원은 “ 12명의 소원의 방 ” 이미지를 포토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그들이 동경하는 유토피아세계를 현실과 환상, 욕망과 소망의 공간으로 이끌어 낸다. 동시에 이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풍경적 공간들은 각각 인간들의 소망들을 상상할 수 있는 몽환적인 이미지로 다가오게 한다. 즉 실재 주거공간을 비현실적인 오브제와 함께 공존시켜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도록 컴퓨터 작업을 통해 완벽한 동경세계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Dream Space “ Digitopia ”
이진영은 인간의 이상적인 욕망 공간을 엿 볼 수 있는 모델하우스, 호텔과 같은 대상을 캔버스와 사진을 통해 실재와 가상, 현실과 이상의 요소들을 각각 작품으로 분리하고 조합하여 교묘하게 가상의 공간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즉, 인간의 상상 속 욕망들을 사진이라는 매체를 통해 화려한 공간의 실재성과 페인팅 프로세스의 추상적 표현을 허구적으로 드러내며 이질적인 공간, 또 다른 낯선 세계로 소망과 이상을 보여준다.
난다는 인간들의 유일무이한 존재성과 시공간의 욕망을 디지털 공간의 복제성으로 일률적인 패턴의 세계를 보여준다. 동시에 디지털 공간의 아바타를 통해 관념적인 실재 공간을 넘어서 재현된 과거와 미래를 연출하고 이상의 세계를 표현한다. 즉, 디지털 세계의 상상적 사유들은 인간의 욕망을 드러내고 소망을 표현함으로써 캐릭터화된 공간의 환상적인 꿈의 세계를 보여준다.
글/조진원(갤러리 나우 큐레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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