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자주 언급하는 것같아....좀 그렇긴 하지만, 베를린 전을 보고서 한국의.....도시를 바라본다는 것에 많은 자신감이 생겼다. 뭐랄까....개발중인 혹은 마이너로서 존재하는 도시를 관찰한다는 것이 생각보다, 많은 상업성 코드를 가질 수도....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베를린을 마이너적인 공간이라고 하긴 힘들겠지만, 그 전시의 베를린은 권력/메이저 로서의 베를린은 아니었다. 굉장히 막연하고 관심없는 류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대상에 대한 관심이 우리나라/나 에게만 있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많이.....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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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시간과 공간
글:이 동 석(미술평론, 부산시립미술관 학예사)
프롤로그
지금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지만, 그 옛날 골목 곳곳에서 볼 수 있었던 오렌지색 공중전화를 기억하시는지. 10원짜리 동전으로만 걸 수 있던 그 투박한 전화통이 가끔 다시 보고 싶지 않는가. 잠시 과거로 돌아가 기억의 서랍을 열고 어느 골목 어귀에 있던 그 전화통을 생각해 보라. 그러면, 언제였던가, 땡볕 아래 서성거리며 여러 번 전화를 돌렸건만 끝끝내 통화를 할 수 없었던 몇몇이 다시 보고 싶어질 지도 모른다.
그것은 단순히 연상작용이 아니다. 기억은 언제나 공간과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고 그 공간 속에서 대상의 부재는 다시 '부재의 기억'을 부른다. 드 세르토의 말처럼 "기억은 우리를 그 장소에 얽어맨다……. 그것은 사적인 것이어서 다른 사람에게는 흥미롭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한 구역에 영혼을 부여하는 것은 결국 그 기억이다."
그래서 도시의 풍경 속에는 많은 것들이 유보되어 있다. 그냥 스쳐가는 무심한 풍경 속에도 말없는 사람들의 은밀한 기억과 "아무도 읽을 수 없는 과거"와 "내부로 돌아드는 역사"가 숨겨져 있다.
이처럼 기억이 미로처럼 얽히고 사건들이 지층처럼 퇴적된 도시는, 지도상으로 확인하거나 고층빌딩의 전망 라운지에서 조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도시는 평면적으로 계량화될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이 아니고, '묵주의 낱알같이 서로 분리된 감각적 지각과 이미지들'의 집합도 아니다. 도시는 과거와 미래로 이어지는 시간적 지층을 지니고 그 속에서 전후방으로 작용하는 의식적 지평을 가진 공간이다.
부산을 본다. 부산이라는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그러나, 지금 부산에 살고 있지만 나는 이 곳에 관련된 특별한 기억이 없다. 그러나 부산에서 축적된 기억이 없다는 것이 이 도시가 나에게 '타자'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상적 공간에 대한 지각은 언제나 주체의 기억과 무작위로 결합하여 그 공간적 질서가 지닌 '고유의 의미'를 대체해 버린다. 마치 게쉬탈트 심리이론에서 '오리'와 '토끼'를 결코 동시에 볼 수 없는 것처럼, 시간과 공간에 대한 지각적 경험도 기억과 상상의 차원에서 역동적인 계열을 부른다. 그래서 어린아이가 한 마디 두 마디씩 말을 배우듯, 그냥 살다보면 부산이라는 거대도시의 숨겨진 이야기를 조금씩 읽어낼 수 있다. 배움은 시간적으로 또 공간적으로 이웃을 보는 데에 있고, 친밀성이란 어차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점진적으로 발전되는 관계이다.
1.
비트겐쉬타인은 도시를 언어에 비유했고 바르트는 도시를 하나의 실재하는 담론이라고 말했다. 만약 도시가 언어이고 또 실재하는 담론이라면 부산은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강점과 전쟁이라는 현대사의 격동기가 만든 상처의 더께, 압축 근대화가 야기한 소외와 불균형, 중산층의 획일화된 문화와 평준화된 취향, 상업화 과정에서 분출된 통제되지 않은 욕망들. 이런 어둡고 답답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들이 먼저 생각난다.
실제로 부산이라는 도시의 역사는 한국의 근대사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도시 구조에 있어서도 부산은 그 격동기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타의에 의해 개항한 부산은 제국주의의 수탈의 관문이라는 식민지형 근대도시로서 태어났다. 부산이라는 대도시가 형성되는 과정도 일반적인 도시가 계층적으로 성장하는 양상과 사뭇 다르다. 부산이 거대도시로 팽창하기 시작한 것은 해방 직후의 귀환동포와 한국전쟁의 난민들이 밀물처럼 유입되면서였다. 범일동과 수정동, 좌천동과 부민동 등지에는 아직도 그 때의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부산에는 유난히 큰불이 많았다고 한다. 다닥다닥 붙은 판잣집에 일어난 불은 드센 바다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대형화재로 이어지곤 했다.(부산에서 여고시절을 보냈던 어머니는 아득히 먼 동네의 불구경을 하다가 잠이 들었지만 잠시 뒤 황망하게 깨어나 세간을 챙겨 피난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본격적으로 '조국근대화'의 슬로건 아래 '속도전'이 시작되고, 부산은 신발과 합판 산업의 노동력이 급속히 유입되면서 산업도시로 확대되어 재편된다. 이전까지는 부산은 불가피한 사회적 상황에 의해 우발적으로 팽창했다면 이때부터 부산은 기획된 개념에 의해 기능화된 도시공간으로 개발된다. 그러나 시간당 투입의 산출효과를 노린 '속도' 위주의 도시 개발은 공간을 괴멸시키고 그 공간이 성립시켰던 조건마저 붕괴시켰다. 기능 위주의 도시개발이 남긴 가장 큰 폐해는 도시의 모든 구성요소를 시스템 내의 단위 요소로 환원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관계 속에서 위치되는 존재의 의미를 완전히 증발시킨 데에 있다.
낙동강과 아름다운 해안을 끼고 있는 인구 400만의 대도시. 그러나 축복 받은 자연환경을 지닌 이 도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파국에 대한 불안한 예감이다. 도시경관의 문제만 보더라도 지금, 여기에 어디 한 곳이라도 사람에게 정감을 주는 공간적인 여백이 있는가. 사람을 먼저 생각하여 닦은 길이 하나 있는가. 아우성을 치고 있는 간판들, 수평선과 해안선을 잔인하게 허무는 대형빌딩들. 관공서마다 육교마다 걸린 썰렁한 구호들. 국적이 불분명한 가로시설물과 무분별하게 조성되어 방치된 조경, 우중충한 건물 구석에 꾸어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서있는 미술장식품들. 이런 거리를 걷고 있으면 왠지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것은 부산뿐만이 아니라 우리 나라 대도시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한국의 대도시에서는 거리가 사람을 철저히 소외시키기 때문에 '걷는'다는 것은 단지 '점에서 점으로' 이동하는 절차로서 언어의 핍진을 강요하는 진공화의 과정이다.
사실 우리 나라의 도시의 생성과 팽창과정을 돌아보면 개발은 곧 공간의 파괴를 의미했고 재개발은 바로 공간의 약탈을 의미했다. 속도는 축적을 허용하지 않는다. 기능성만, 아니 기능성마저 제대로 고려하지 못한 도시구조물과 수익성을 지상목표로 한 건축물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조악하게 복원된 역사물, 공동체의 합의가 전제되지 않은 채 급조된 기념물들과 상징물. 이 또한 도시를 절망적인 상황으로 몰고 간 요소들이다.
2.
시간과 공간은 인간 경험의 불가결한 조건이며 감각과 지각이 배치되는 틀이다. 도시 문제를 이야기 하다보면 시간과 공간의 관계를 해명해야 하는 난해한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사실 수학적으로 정식화된 시간이나 계량화될 수 있는 공간은 인간이 추상적으로 설정한 하나의 개념에 불과하다. 아무도 시계나 지도를 보고 시간과 공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 시간과 공간은 시계와 지도에 의해 기계적으로 조절되고 통제되고 관리된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이나 경험적 인식에 비추어 보면 시간과 공간은 일종의 관계 연관을 가지는 복합적인 것이며, 단선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중층적인 두께를 지니고 있다. 또 시간과 공간은 전방과 후방에 의식적 지평을 지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에 대한 전체적인 인식은 단편적인 시간과 공간의 총합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편, 시간과 공간은 역사성에 대한 인식이나 실천적 행위와도 결코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다. 가령 데이비드 하비 같은 사람은 일종의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사회적 행동과 별개로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고, 안토니 기든즈 역시 시간과 공간 관계의 특징을 분석하지 않고는 사회적 실천과 구조의 역사성에 대한 체계적 지식이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과거에는 철학적으로도 시간과 공간은 결코 분리되어 설명될 수 없다는 시각이 보편적이었다. 여기서 시간은 공간 속에 놓여 있으며, 공간은 시간이 정적으로 외화된 데에 불과하다. 그러나 근대성과 탈근대적 징후를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시간과 공간은 분리시켜 그 불연속적인 관계를 고찰하는 시도가 최근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기든즈는 시간을 단순히 '진화론적 순서'로 파악하고 공간을 수동적 환경으로 한정하는 시각이 서구 근대성의 한계였다고 지적한다. 그는 시간이 일상, 제도, 개인 등 복수의 층위로 구성된 것이며, 시간이 반복되거나 재생산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역적 성질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시간은 단선적 진행의 관점에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전후방으로 상호작용하는 역동적 '지속'의 개념이며, 역사성의 한 축을 이루는 공간 역시 존재의 외부에 있는 환경이 아니라 사회적 상호작용의 틀을 형성하는 계기로 본다.
더 나아가 기든즈는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근대의 시공간적 관계를 재조직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시간-공간의 '원격화(distanciation)가 급진전됨으로써 시간과 공간의 분리가 근대성의 결정적인 구성요소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근대 이전에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있어 특정한 '장소'를 지정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연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표준화된 시간이 형성되면서 시간과 공간은 어떤 특정한 장소에 고정될 필요가 없어졌다. 시간은 분할되어 관리될 수 있는 것이고, 조절하거나 통제하여 사용될 수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람 사이의 일상적인 대면(對面)작용이 가능한 특정 장소의 의미는 사라지고 그 부재의 자리에 사회적 관계(계급 관계와 국가의 통제, 자본과 국제관계 등등)가 감시와 통제 체제를 작동시키고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시간과 공간의 (재)조직화는 권력의 발생과 그 메커니즘에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사실은 자본의 재편이나 계급의 구조화가 공간적 분리를 동반한다는 사실만 이해해도 충분하다. 또 냉전과 권위주의적 국가체제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에서 국가의 감시 체계와 사회적 통제를 이야기할 때 굳이 푸코를 호명할 필요가 있을까?(물론 한국의 경우 무모하고 무자비한 봉건적 억압과 미시적이고 정교한 통제 장치가 동시에 작동했다는 차이가 있겠지만.)
특히 도시공간의 (재)조직화에 있어 국가의 개입은 보다 폭력적이고 직접적이다. 서구 역사에서도 실업자는 미치광이와 함께 감금되거나 격리되기 일쑤였고, 도시 안의 빈민가를 해체하여 외곽으로 추방하는 것은 늘 관료나 도시계획자의 일관된 관심이었다.
푸코의 전언처럼 공간은 권력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에 공간의 재조직은 항상 권력의 재조직을 뜻한다. 공간을 지배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은 공간의 (재)생산이다. 하비의 표현을 빌자면 공간은 자본에게는 열린 놀이마당이지만 노동자에게는 굳게 닫혀진 지형이다. 따라서 공간을 재생산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은 끊임없이 분할되는 도시의 변두리로 내몰리고 그 공간이 창출하는 경제적 이윤에서도 영원히 소외된다. 부산의 경우에도 한국전쟁 이후부터 60년대 말까지 도심의 판잣집을 철거당한 주민들이 사하구 신평동 일대로 끊임없이 내몰렸다. 그 이후 사하구 일대는 기본적인 주거여건도 갖추기 전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빽빽히 들어선 공업지역으로 변해버렸다.
앞에서 기든즈가 시간은 공간이 서로 분리하여 고찰했지만 그것이 서로가 각각 따로 작동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분리된 시간과 공간은 구체적인 삶이 현장에서 재결합하여 구조로 내재화되고 모든 사회적 행동과 행위의 틀이 된다. 여기서 시간과 공간이 대척점에 서거나 분리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서로가 서로를 약탈하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된다. 시간과 공간은 서로가 흐름과 변화에 있어 템포를 맞추며 상조하며 지속되어야 한다.
가령 오래된 거리나 건축물을 지키려는 우리의 욕망은 공간이 성립시킨 시간성을 온존시켜 자아를 지키려는 욕망과 다를 바가 없다. 반대로 사람들이 거대한 모뉴멘트를 세우는 것도 시간의 풍화를 견디는 공간을 확보함으로써 한정된 자아를 영속시키려는 욕망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혼돈 속에서도 과거를 보존시켜 개인적 정체성을 확보시켜 주지만, 후자의 경우 미래의 시간을 박제하기 위해 공간이 시간을 억압함으로써 욕망의 무모함과 시간의 덧없음을 확인해줄 뿐이다. 재앙은 항상 균형이 깨어질 때 일어난다.
3.
다시 공공미술을 생각한다. 두 말할 것도 없이, 공공미술은 도시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대리물이나 삭막한 경관을 위장하고 분칠하는 장식이 아니다. 공공미술은 개인에게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공중에게 '향유'되는 것이며, 도시를 구성하는 그 모든 요소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져야 하는 '전체로서의 부분'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공공미술은 아직까지 기능적 도시공간의 단조로움을 중화시킨다는 60, 70년대 서구의 목표를 가장 나쁜 행로를 통해 답습해오고 있다. 먼저 우리 나라 공공미술의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는 것은 삭막한 도시공간에 다소간의 활기나 시각적 청량감을 불어넣고자 한 순진한 발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무엇보다 개방적이고 확산적 개념이어야 할 공공미술이 '미술장식품'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용어로 정의되는 것처럼, 제도나 제도 운영에 대한 연구나 공공미술의 컨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출발한 우리 나라의 공공미술은 태생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퍼센트 법'의 조급한 시행이 공공미술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이해 당사자들의 불합리한 관행을 만들어 지금까지 파행을 부르고 진정한 '공공미술'의 정착을 더디게 했다고 볼 수도 있다.
우리 나라 공공미술이 지금까지 파란을 거듭하며 이 지경까지 온 것은 일차적으로 미술계의 책임이다. 상황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보이기보다 저마다 잇속을 쫓아 '껌딱지 조각'을 양산한 작가들, 덤핑과 리베이트 관행을 일삼은 브로커와 일부 에이전시, 행정의 파트너로 기획과 운영에 참여한 철학 없는 전문인들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공공미술이 정착하지 못한 데에는 제도와 제도운영상의 문제점에 더 큰 원인이 있다.
따라서 일차적으로는 공공미술의 불합리한 절차와 비문화적인 관행과 제도의 개선에 노력이 모아져야 함은 당연하다. 넓은 의미에서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개선을 통해 미술의 공공성을 확장하려는 이런 일체의 노력 자체가 공공미술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공공미술의 대안적인 역할과 실천적 좌표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일단 언어와 사회적 실천이 불가분의 관계 있다고 전제한다면 공공미술은 도시공간과 일상적 실천을 매개시키는 유력하고 생산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나아가 공공미술은 도시공간 내의 문화적 요소를 재배치하는 동력이 될 수도 있고, 공간의 억압적 전유와 통제에 대항하는 저항적 증후를 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다.
물론 문제가 간단하지는 않다. 도시문제에는 도시의 생성과 팽창의 메커니즘, 도시경제의 구조와 그 속에서 작동되는 권력과 자본의 생리, 경제적 구조와 도시공동체의 이해관계, 제도와 그 운영의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공공미술의 진로 역시 이러한 실타래처럼 얽힌 문제들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하비의 말처럼 어떤 사회에서건,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실천은 사회관계의 재생산 및 변모과정과 아주 밀접하고 복잡하게 관련되어 있다. 또 사회변동의 역사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인식의 역사이다. 따라서 사회를 변혁하려는 모든 기획은 공간적이고 시간적인 개념 하에서의 실천적 변혁이라는 복잡한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우선 공공미술은 실천적 담론의 형태로 도시의 시간과 공간에 개입하여 체계 내에서의 모순과 갈등을 노출시키고 그 대안적 해법을 상상력의 수준에서 제시할 수 있다. 또 공공미술의 실천적 담론은 분리된 시간성이 박탈한 특정한 장소의 속성을 복원하여 도시 내의 시공간적 거리와 격막을 해소하는 데에 기여할 수도 있다.
드 세르토는 '보행'을, '국지화'되는 것 아니라 '공간화'되는, 일종의 '발화 공간(space of enunciation)'으로 정의했다. 그 의미는 '보행'이라는 공간에 대한 실천적 진술이 '도시의 계획체계가 규정한 의미에서 일탈하는 행위'로서 공간에 대한 해방의 가능성을 담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공공미술 역시 시간과 공간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 가는 바로 그 과정 속에 있고, 실천을 통해서 장소와 시공간의 의미를 회복해 가는 노력이다.
또 공공미술의 실천은 개별 주체의 행위나 행동을 넘어 사회구조적 속성을 시간과 공간 속에 내재화하는 과정이다. 만약 공간의 실천적 역사를 인식한다면 공공미술이 지향해야 할 방향과 차원의 변별이 한층 쉬워진다. 여기서 공공미술의 실천적 수준은 르페브르와 하비의 논의에서 기본적인 시사점을 얻을 수 있다. 먼저 르페브르는 공간적 실천을, 첫째, 경험적 차원에서의 '물질적 공간 실천(material spatial practices)'과 지각 차원에서의 '공간의 재현(representation of space)', 그리고 상상 수준에서의 '재현의 공간(space of representation)'이라는 세 가지 차원으로 분류하여 유형화하였다. 사실 공공미술은 어느 차원에서도 능동적인 접근이 가능하다. 이러한 '경험-지각-상상'으로 이어지는 세 가지 차원은 각각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연속체를 이루며, 서로가 서로에게 극적인 긴장을 이루는 변증법적 관계들이다. 가령 공간에 대한 상징적이고 신화적인 담론을 이루는 '재현의 공간'이 잠재적으로 '공간의 재현'에 영향을 미치고, 이는 곧 공간적 실천과 관련하여 물질적 생산력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공공미술 역시 이러한 세 가지 차원에서의 동시적이고 연속적으로 개입할 수 있다면, 도시의 시간과 공간에서 그 실천적 공명 효과가 전방위로 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에필로그
시간-공간이 자아와 행복하게 통합되어 있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세계에 대한 향수를 부르는 모든 기억들의 토대가 된다. 여기서 하비는 묻는다. 그 원초적 기억은, 국가와 도시, 사회와 이웃에 대한 우리들의 이미지에 영향을 주는 '장소귀속적 향수'들에 관한 모든 표현형태들의 집단적 기억의 도태가 아닌가?
그런데, 기든즈는 근대성이란 '장소 귀속탈피성(disembedding)'으로 규정된다고 단언한다. 장소 귀속탈피의 대표적 기제인 화폐와 '기능적 분화'는 모든 개인들의 시간과 공간을 괄호쳐 버린다. 그렇다면 이러한 '장소귀속적 향수'와 '장소 귀속탈피 기제' 사이의 어긋남과, 그로 인한 자의식의 분열이 근대성의 비극일 것이다. 오늘날 개인과 집단이 느끼는 불안과 위협, 무력감과 위기감 역시 이러한 단절과 불일치에서 파생되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간과 공간의 격막과 격리 속에서도 "공간적 기억으로 충만된 존재는 공간의 생성을 능가한다". 시간은 그냥 흘러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경험된 장소와 공간에 대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이다. 비록 그 장소와 공간이 부재하더라도.
언젠가 나는 산불감시에 동원되어 '안창마을'이라는 곳에 가본 적이 있다. 부산에서 주거환경이 최악으로 손꼽히는 지역 중의 한 곳이다. 경사가 급한 산등성이를 따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움막 같은 집들. 처음엔 그 열악한 주거환경에 꽤나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그 비좁고 불편한 공간에서 이내 친밀감을 느꼈다면 그 곳에서 사라져 가는 모듬살이의 흔적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비탈에 모여있는 그 남루하고 작은 집들이 어느 순간 의연하게 보였던 것은, 무엇보다 근대화라는 성취적 억압에도 불구하고 개인주체들이 삶의 형식으로 도시의 시간성을 온존시킨 공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비좁고 가파른 골목길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어쩌면, 나는 그 아이들의 얼굴에서 수십 년 전의 바로 내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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