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게임1) 과 관련된 중요한 철학적 주제 중 하나가 ‘가상현실’이다.
오늘날 - 전문적 또는 좁은 의미로서의 - 가상현실이란 컴퓨터가 이미지 합성에 의해 실재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재현해 낸 것이다.2) 때문에 이러한 가상현실을 경험하려면 컴퓨터에 연결된 특수한 장치가 필요한데,3) 이것들을 통해 컴퓨터에 ‘접속되어’ 컴퓨터가 제공하는 ‘합성공간’에서 원하는 ‘감각적 경험’을 하는 것이 가상현실이다.
컴퓨터는 가상을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해 또는 감각적 경험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인간의 모든 감각 - 즉 시각·청각·후각·미각·촉각을 가능한 한 통합적으로 재현한다.4) 그리고 이를 통해 사람들은 사실상 그렇지 않지만 효력 면에서는 실제적인 사물이나 사건, 곧 가상현실을 경험하게 된다.
그 예로는 이미지 몰입 기술을 이용하여 조종사를 훈련하는 미 공군의 비행 시뮬레이션이나 원격현전 기술에 의해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환자를 수술할 수 있는 의료기술을 들 수 있다. 그 밖에도 이러한 여러 가지 기술을 종합한 가상현실을 통해 공상과학 영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자기가 원하는 시공’에서, ‘자기가 원하는 인물’과, ‘자기가 원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가상현실 게임’이 머지 않은 장래에 상용화할 전망이다.
이러한 게임을 통해, 예컨대 한 평범한 청년이 저 멀리 황홀하게 흐르는 은하수 밑으로 푸르고 아름다운 지구가 내려다보이는 우주정거장에서 기네스 펠트로와 함께 저녁식사와 섹스를 나눈 다음, 동료 브래드 피트와 지구를 구하는 우주전사로 활약하는 로맨스와 모험을 체험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가상현실을 한층 폭넓은 의미로 다루고자 한다. 웹스터 사전은 가상현실이란 ‘형상적으로(주관과 독립해서 객관적으로)는 인지되거나 허용되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또는 효력을 미치는 면에서는 존재하는’이라는 뜻의 가상(Virtual)과 ‘실제적인 사건, 사물 또는 일의 상태’라는 의미의 현실(Reality)이라는 말이 합성하여, ‘효력 면에서는 실제적이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은 사건이나 사물’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가상현실이란 새로운 단어일 뿐 새로운 개념이 아니며, 컴퓨터의 이미지 합성에 의해 재현된 현실로 국한되지도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가상현실 속에서 살아오고 있다. 예컨대 화폐에 의한 모든 경제활동은 하나의 가상현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화폐야말로 ‘효력 면에서는 실제적이지만 사실상 그렇지 않은 사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학문과 예술은 또 어떤가. 학문이란 그것이 어느 것이든 심지어는 물리학이나 수학까지도 전문개념으로 구성된 하나의 가상세계에서 일어나는, 그러면서도 실제적으로 효력을 미치는 현실이 아니던가? 예술도 역시 그것이 미술이든 음악이든 아니면 시든 소설이든 작가가 창조한 하나의 가상세계에 의해서 구축되고, 감상자가 그 세계에 접속함으로써 성립되는 것이 아니던가? 또 종교는 어떠한가. 모든 종교는 - 구원이든 해탈이든 - 각각 가상의 가치세계 안에서 인간을 결집시켜 왔다.
결국 인간의 정신은 본래 가상현실을 통해서 그 보편적 성격과 가치를 구축하고 유지해 왔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이든 예술이든 아니면 종교든 우리가 그 어떤 보편적인 것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이미 그리고 언제나’가상의 세계를 전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때문에 가상현실은 문명의 본질이자 특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게임도 예외가 아니다. 게임이란 술래잡기 같은 재래식 게임이든,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 같은 인터넷 게임 또는 플레이스테이션에 의한 전자오락이든, 아니면 이제 곧 다가올 가상현실 게임이든, 그것들은 모두 나름의 가상현실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디지털 게임에 관한 철학적 문제를 논하고자 할 때, 그것이 곧바로 가상현실에 대한 논의로 귀착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논의의 본질은 컴퓨터에 의한 새로운 게임, 곧 디지털화된 새로운 가상세계가 생겼고 그것이 놀랍도록 빨리 확장되어 간다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이 새로운 가상세계의 성격이 그 동안 우리가 머물러 왔던 가상세계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는 데 있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커다란 차이이며, 수많은 문제점을 예상케 한다.
이미 자주 논란이 되는 것으로 ‘실재’에 관한 문제가 있다. 우리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 중 그 어느 것을 실재, 곧 참으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2400년이나 해묵은 문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일찍이 플라톤은 우리가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사물과 세계는 실재가 아니고, 오직 이데아(idea)와 그 세계만이 실재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5) 따라서 오늘날 가상현실의 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찾으려는 많은 사람은 플라톤의 이데아세계에서 그것을 발견하려 한다.6) 그러나 사실인즉 이러한 논란은 플라톤 이후 지속되어 오고 있는 공허한 지적 유희에 불과하다.
디지털 게임과 관련해서 가상현실의 문제가 제기되어야 하는 진정한 이유는, 디지털 게임에 몰두한 사람에게는 가상세계가 현실세계와 똑같이 실재적으로 인식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들에게는 가상세계가 현실세계보다 더 ‘이상적’으로 인식된다는 데 있다.
그래서 이들은 자연히 현실적 사물과 세계를 혐오하고 그것에 절망하며 이상적인 사물과 세계인 가상현실로 자꾸만 더 자기 자신을 밀어넣으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이 디지털 게임 중독증의 본질이다!
이들에게 있어 인간의 육체란 불결하고 불편한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고, 현실세계란 자유가 억압되고 평등이 짓밟히며 온갖 불순과 모순이 만연하는 ‘저주받은 땅’에 불과하다.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에는 이러한 사람들과 그들의 세계에 대한 탁월한 묘사가 들어 있다.7)
때문에 이들의 현실세계 기피와 혐오는 단순히 기네스 펠트로와 섹스를 즐길 수도 없고, 브래드 피트와 우주전사로 활약할 수도 없기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다. 어둡고 혼란스러우며 불결하고 불편한 현실세계로부터 벗어나 이상세계로 향하려는 초월에 대한 꿈은 모든 종교의 염원이었고, 플라톤 이래 모든 종류의 플라톤주의가 지향하는 바가 아니었던가!
플라톤을 비롯한 고대의 초월론자들이 꿈꾸던 이상세계도 오늘날 우리 관점에서는 하나의 가상세계에 불과하다. 가상현실 옹호론자들은 현실세계에 대한 평가절하 내지 부정, 가상세계에 대한 추구와 몰입을 제공한다는 면에서, 디지털 게임에 의해 창조되는 가상현실과 고대의 초월론자들이 꿈꾸던 가상현실이 본질적으로 같다고 주장한다.8) 그리고 여기에서 신-초월론자로서 자신들의 존재에 대한 철학적 근거와 정당성을 찾는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에는 중대한 과오가 은폐되어 있다! 현실세계에 대한 평가절하는 플라톤 이래 서구문명의 주축이었고, 그것을 통해 인류가 발전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면, 몇몇 사교집단을 제외한 고대의 초월론자들이 현실세계의 실재성과 그것의 가치를 부정했을 때, 그들은 새로운 이상과 가치의 세계로 인류를 이끌고 가려는 숭고한 목적을 갖고 있었다.9) 그것의 정당성에 대한 논란 여부 또는 성취 여부와 무관하게 그들이 추구했던 가상세계는 한결같이 사회적·도덕적·종교적 이상세계였다.
오늘날 디지털 게임이 만든 가상세계로 몰입하려는 사람들도 - 기꺼이 현실세계를 떠나려 한다는 점에서는 - 초월론자들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몰입하는 가상세계는 ‘가치의 세계’가 아니고 ‘감각의 세계’이다. 가상현실에 대한 이들의 열정 또한 에로스적이라고 주장하지만,10) 그것 역시 감각적·쾌락적 에로스에 불과할 뿐, 결코 소크라테스가 경탄했던 ‘불멸의 영약조제사(靈藥調劑師)’가 아니다.11)
우리는 이 차이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물어야 하는 것은, 오늘날의 신-초월론자들에게도, 예컨대 플라톤처럼 우리를 이끌고 갈 이상세계에 대한 확실한 신념이 있으며, 만일 있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과연 바람직하냐는 것이다. 즉 이들의 현실부정에도 우리의 삶을 값있게 할 보편적 가치를 확정하고, 그곳으로 우리를 이끌고 갈 의도가 준비되어 있는지를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12)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새로운 초월주의가 내포하는 문제와 위험에 대해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 염려스러운 것은 이들의 현실세계와 그 가치에 대한 부정·기피·단절이지만, 그 밖에 중독성의 문제도 있다.
인터넷 게임이나 전자오락에서 볼 수 있듯이, 사실 마음대로 조작되는 가상세계에 갇히기는 쉬운 일이다. 가상현실 게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즉 모든 종류의 디지털 게임이 창조하는 가상현실은 21세기의 새로운 ‘전자마약’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종전의 어떠한 화학적 마약보다 더욱 강하고 교묘한 마약이다.
따라서 디지털 게임과 관련하여 우리가 비판적으로 고찰해야 하는 것은, 게임을 개발하고 가상현실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시장만 노린 나머지,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제지상주의의 노예이자 향락주의의 전사로서 인간성과 인간적 가치를 말살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또한 게임을 통해 가상현실에 몰입하는 사람들이 단지 그것이 제공하는 감각적 쾌락, 무책임한 자유, 하향조절된 평등, 즉각적 편의성 등에 빠져서 현실세계와 그것이 지닌 가치에서 점점 멀어지게 하는 신-초월주의의 순수한 희생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종류의 현실부정론자, 초월론자, 사교숭배자 그리고 이들의 주변에서 이윤을 남기려는 무리는 지난 역사에도 수없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끌었던 유토피아는 언제나 디스토피아였다. 디지털 게임과 연관하여 오늘날 철학이 염려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
주)
1) 본문에서 디지털 게임이라고 할 때는, ‘스타크래프트’나 ‘디아블로’와 같은 인터넷 게임, 플레이스테이션에 의한 전자오락, 아니면 이제 곧 다가올 가상현실 게임 등 컴퓨터가 운용하는 모든 종류의 게임을 포함한다.
2)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연구는 원래 1966년경, 미국 가상현실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이반 서덜랜드가 MIT의 링컨연구소 동료들과 함께 다양한 종류의 HMD(시각화 장치를 위한 헬멧)를 가지고 실험한 것이 시초다. 그러다가 1980년대 대규모 군사훈련을 위한 가상환경을 개발하기 위해 군사적 이해관계로 맺어진 컨소시엄, 주로 미 국방성 고등연구기술처(DARPA:the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ducts Agency)에 의해 이 연구가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작동장비들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에 몬테카를로에서 이미지 합성에 의해 재건축된 클뤼니 수도원을 두 사람이 방문하는 실험이 성공하고부터였다.
3) 투구처럼 쓰면 이미지들과 눈을 연결하는 헤드-마운티드-디스플레이(Heah - Mounted - Display : HMD)와 행동을 연결시키는 데이터 글러브(Data Glove), 촉감을 연결하는 데이터 슈트(Data Suit) 등이다.
4) 때문에 프랑스 ACROE의 회장인 클로드 카도즈(Claude Cadoz)는 가상현실을 ‘통합적 재현(re-pr럖ention int럊rale)’이라고 규정 했다. 클로드 카도즈 저 , 가상현실, 심윤옥 역, 영림카디날, 1996, 참조
5) 플라톤에 따르면, 그가 ‘참으로 있는 것(ontos on)’이라고 거듭 반복해서 말하는 이데아만이 단일, 불변 영원한 실재다. 현실세계란 이데아가 개개의 사물들에 들어와 있음으로 해서 개개의 사물들은 그것으로서 존재하며, 그 이름도 얻는다는 것이다. 예컨대, 책상이 책상인 것은 그것에 책상의 이데아가 들어와 있기 때문이고, 그래서 책상이라는 이름도 얻는다(Phaidon p.100∼103 참조).
6) 마이클 하임,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이명숙 역, 책세상, 1997, p.141∼206 참조
7) W. 깁슨은 더 이상 컴퓨터 매트릭스(가상세계) 속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주인공 케이스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사이버스페이스에서 육체를 떠난 환희를 좇으며 살아온 케이스에게 이것은 낙원으로부터의 추방이었다. 그때까지 유능한 카우보이로서 드나들던 바에서는, 엘리트답게 처신한다는 것은 육체를 은근히 무시할 줄 안다는 뜻이었다. 육체란 단지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그런데 케이스가 바로 그 육체라는 감옥에 처박혀 버린 것이다.” W. Gibson, Neuromancer, New York : Ace Book, 1984, p. 6
8) 실제로 이들은 인간의 육체를 ‘고깃덩어리’로 부르며, 인류의 미래는 현실세계(RL)가 아니라 가상세계(VL)에 있다고 믿고 있다.
9) 플라톤은 - 흔히 오해하고 있듯이 - 단순히 초월적 ‘천상의 세계’만을 동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지상의 세계’를 진정 사랑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 헛된 것을 참된 것으로 끌어올리려는 - 지상적 목적의 수단으로 하여 도덕적·정치적 교훈들을 유도해 내는 일에 전념했던 사람이다. T. 모어의 유토피아든, F. 베이컨의 신아틀란티스든, 사회주의든, 자유주의든 모든 종류의 계몽주의 역시 그것들의 현실세계 비판에는 - 각각 차이는 있지만 - 이러한 목적이 언제나 함께 하였다.
10) 마이클 하임, 가상현실의 철학적 의미, 이명숙 역, 책세상, 1997, p. 145∼153 참조
11) 플라톤의 대화록 《향연》에 의하면, 에로스(Eros)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Poros)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Penia) 사이에서 태어났다. 에로스는 어머니를 닮아 결핍된 자이지만, 아버지를 닮아 언제나 풍요를 그리워하며 그것에 이르려는 중간자(中間者)로서 영원한 동경과 열병적 연모를 그 본성으로 한다. 때문에 에로스는 우선 감각적 아름다움을 사랑하지만 거기에 멎지 않고 거짓을 벗어나 참됨에, 악함을 벗어나 선함에, 추함을 벗어나 아름다움에 이르려는 열정을 가졌다. 이를 통해 에로스가 궁극적으로 하는 일은 우리 영혼을 본향인 ‘이데아 세계’로 귀환시키는 것이다. 에로스는 이를 위한 ‘혼의 날개짓’이고, ‘상승적 창조자’이다. 그래서 예언자인 무녀 디오티마가 에로스의 존재를 소크라테스에게 알렸을 때, 그는 에로스를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을 불멸, 영원한 존재로 승화시킬 영약조제사(靈藥調劑師)로서 파악했던 것이다(Platon, Smtliche Werke 2, Symposion, Rotwohlts, Hamburg, 1968, 203d-e).
12) 물론 오늘날 철학에는 고대 및 중세의 절대주의, 근대 이래의 각종 계몽주의 등 모든 종류의 유토피아주의(utopianism)가 지닌 위험성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날카로운 경계와 예민하고도 부정적인 반응들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들은 본문의 논지를 비껴 간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다루는 신-초월주의는 그 자체가 새로운 유토피아주의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의 ‘너그러운’ 품에조차 안길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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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는 1952년 출생.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과 튀빙겐대학에서 철학·신학을 전공했다. 저서로 《알도와 떠도는 사원》, 《영화관 옆 철학 카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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