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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omepage]님께서 남기신 글 (2007-03-19 16:07:42, Hit : 762)
전시 3.19


Turn, Turn, Turn

안정주 영상展

2007_0322 ▶ 2007_0415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금호미술관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22_목요일_05:00pm

2007 금호 영아티스트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돌고 돌고 돌고 ● 모든 것은 돌고, 돌고, 돌아갑니다. 계절이 바뀌듯이, 돌고, 돌고, 돌아갑니다. 하늘 아래에는 각각의 목적을 위한 때가 있습니다. 태어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고 씨를 뿌릴 때가 있으면, 거둬들일 때가 있습니다. 싸울 때가 있으면, 화해할 때도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면, 눈물을 흘릴 때도 있습니다. 돌고, 돌고, 돌고 버즈 (1965) ● 두 개의 방으로 나누어진 전시공간의 한쪽 벽면에서는 위풍당당한 건축물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고, 다른 방의 벽면들을 가득 채우고 정신 없이 돌아가고 있는 공장의 생산라인에서는 쉴 새 없이 무언가가 생산되어 나오고 있다. Turn Turn Turn 이라고 이름 붙여진 안정주의 이번 전시는 이렇게 소멸되어가는 것과 그 쓰임을 다한 것이 일련의 (재활용) 과정을 거쳐 새로운 무언가로 다시 생성되어 나오는 과정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순환의 고리를 따라 압도적인 스케일의 영상과 음향을 반복한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Breaking to Bits .four channel video(DVD), four channel sound.2007 얼핏 연결된 듯이 보이는 4개의 이미지를 동일한 벽면에 나란히 병치시킨 4채널 비디오 설치작업 〈Breaking to Bits (2007)〉는 광주에 위치한 송원재단의 교사(校舍) 철거현장에서 篤되?것이다. 인부들이 부지런히 창틀과 바닥재를 뜯어내고, 굴삭기로 외벽을 허무는 소리가 각자의 음가(音價)를 지니고 리드미컬한 음악을 변주해내는 가운데, 화면 전체를 차지하며 당당히 서있던 학교 건물은 어느덧 앙상한 골조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뿌연 연기 사이로 힘없이 무너져 내린다. 안정주의 이전 작업들에 비해 다소 가라앉은 톤과 템포를 유지하고 있는 〈Breaking to Bits〉에서는 소멸해가는 것에 대한 작가의 센티멘탈한 감상이 묻어나는 듯 하다. 그러나 다소 정적인 이러한 감정은 바로 다시 〈The Bottles (2007)〉의 경쾌한 멜로디와 리듬을 따라 소생한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서로 비껴서 마주보도록 설치된 2채널 비디오 〈The Bottles〉는 장성에 있는 소주 공장에서 분당 1,600병의 소주가 생산되는 제작공정을 촬영한 것으로, 거대한 스케일과 빠른 속도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기계와 그 기계가 토해내는 엄청난 소음을 작가에게, 그리고 관람객에게도 익숙한 노래로 변주해낸 작업이다. 빈 병들을 수거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을 골라내어 세척하고 여기에 다시 소주를 담고 포장을 하여 출하하는 기계화된 작업과정은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돌아가는 기계와 병들의 속도감, 병과 병이 부딪치고 기계가 돌아가면서 만들어내는 소음, 그리고, 심지어는 소주의 알싸한 맛과 냄새까지 더해지는 듯하여 다소 관조적인 〈Breaking to Bits〉와는 대조적인 경험을 관람자에게 제공한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The Bottles〉에서 감지되는 멜로디이다. 영상을 보면서 즉각적으로 알아챌 수는 없지만, 작가가 만들어 놓은 공간 속에서 머무르는 사람들은 어느 순간 익숙한 멜로디를 흥얼거리게 된다. 안정주는 현장에서 녹음된 실제 소리를 늘이거나 빠르게 조작하여 병 이 만들어내는 소음으로는 멜로디 파트를, 기계 가 움직이는 소음으로는 비트 파트를 연주해낸다. 자신이 촬영한 영상과 음향을 일정한 단위로 분할하여 작위적이고 자의적인 속도로 반복하던 이전의 작업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번에는 그 소음을 각각의 음가(音價)로 치환하여 음악으로 다시 재생산해낸 것이다. 자극적인 소리와 어지러운 화면으로 가득 찬 이 공간이 만약 익숙하게 느껴지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관람자가 이 익숙한 멜로디를 감지하고 같이 흥얼거리게 되는 바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순간 작가와 관람자는 동일한 공기를 호흡하며 특정 상황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접점에서 조우하게 된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안정주는 작업실을 벗어나 세상으로 나가서 채취해온 영상과 음향으로 여전히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있다. 이전 작업과는 달리, 영상과 음향의 단위들을 자의적으로 쪼개고 강박적으로 반복하는 대신, 조금은 관조적으로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고는 있지만, 기존의 객관적인 체제나 시스템에 대해 주관적으로 개입하려는 작가의 의지는 그의 작업 전반에 걸쳐 여전히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일상의 모든 소음과 평범한 풍경을 영상으로 변주해내던 그의 관심은 이번 전시를 통해 소멸과 생성의 순환과정 이라는 조금은 거창하지만,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러티브로, 좀 더 커다란 시스템으로 열려가고 있는 듯 하다. 더불어 보다 보편적인 음악을 통해, 특정 상황에 대한 작가의 이해를 관람객과 공유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의 세계는 타인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관람객, 나아가 타인과 이해를 공유하는 접점을 발견하기 위한 도구이며, 그의 작업과정은 영상과 음향을 변주하는 기준 을, 자신의 호흡 을 발견해가는 과정인 것이다.




안정주_Breaking to Bit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안정주_The Bottles_다채널 비디오, 사운드_2007


비록 소극적이기는 하지만, 작업을 통해 개개인을 통제하는 규범이라든지 체제와 같은 획일화된 구조에 대해 저항하거나 이를 희롱해온 안정주가 이번 전시 제목으로 버즈(The Byrds)의 돌고, 돌고, 돌고(Turn, Turn, Turn) 를, 기계 소음들의 변주곡으로 비틀즈(The Beetles)의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 를 선택한 것은 우연만은 아닌 듯하다. 기존의 질서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던 1960년대를 풍미했던 그들의 노래가 시각화된 공간, "삶은 계속된다(Life goes on)"라는 낙천적인 후렴구의 멜로디가 쉼 없이 흐르는 그의 영상에서는 이전의 작업들에서와는 달리 한결 편안해진 작가의 태도가 읽혀진다. 그래서인지, 그의 세계로 초대받은 나 자신도 편안하고 즐겁다. ■ 김윤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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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신체화된 시선과 환상이 거세된 스펙터클

김수영 회화展

2007_0322 ▶ 2007_0415



김수영_한국일보사_캔버스에 유채_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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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일시_2007_0322_목요일_05:00pm

2007 금호 영아티스트




금호미술관
서울 종로구 사간동 78
Tel. 02_720_5114
www.kumhomuseum.com






탈신체화된 시선과 환상이 거세된 스펙터클 ● “사물에 대한 전(前)인간적인 시선이 곧 회화의 시선의 표식이다.” -메를로-퐁티- ● 시간에 풍화되지 않는 좋은 작업이란 대개 그것을 감추면서 드러내는 미묘함에 있다. 이는 그리스인의 진리 개념을 떠올리게 한다. 진리에 대한 그리스어 표현인 알레테이아(aletheia)는 ‘탈은폐성’이라 번역될 수 있는데, 그것은 ‘은폐되어 있지 않은 상태, 은폐가 제거된 상태’를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진리가 은폐와 탈은폐의 변증법적 메커니즘의 방식 속에서 태어난다는 사실과 통한다. 푸코에게 보낸 마그리트의 편지 내용 중 “우리는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더 중요성을 부여할 근거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 의해 환기되는 긴밀한 긴장관계일 것”이라는 언급이 떠오르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김수영의 작품은 왜 은폐와 탈은폐의 개념을 환기시키는 것일까?




김수영_한국일보사_캔버스에 유채_2007


김수영이 다루는 대상은 극도로 장식이 배제된 차갑고 건조한 근현대 건축물들이다. 그녀는 성장 위주의 도시개발 계획의 일환으로 건조된 도시의 건축물을 관찰하고 파악하기는 하되, 그것을 재구성하지는 않는다. 사실 김수영의 건축물들은 현대미술의 미시담론이 그렇듯이 낯섬과 낯익음의 변증법적 관계의 대상 혹은 무관심적 주목의 대상으로서의 그것에 가깝다. 따라서 그녀의 회화는 단순히 도시 속 건축물의 구조를 관찰하고 묘사한 것이 아니며, 현대 도시문명의 비판이나 풍자를 담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르꼬르뷔지에 류의 근대건축물에 대한 오마주라고 볼 수도 없으며, 또한 철저히 미적이며 조형적인 요소의 집결체로서의 건축물을 묘사한 것만으로도 해석될 수 없다. 그것은 김수영의 작품이 리얼리즘적인 동시에 추상적이며, 풍경화인 동시에 정물화이며, 회화인 동시에 건축이라는 경계선의 개념에서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_낭뜨 서민주택_캔버스에 유채_2006


탈신체화된 시선 ● 김수영에게 건축물은 도구적 사물이 아니라 미적 향수의 대상인 동시에 무관심적 주목의 대상이다. 작가는 외부환경에 대해 자기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거나 내적 동요를 표현하는 대신, 지적인 반응으로 대응한다. 이를테면 순수한 이성으로 감정적 낭비 혹은 망상들을 잠재우고 형식의 엄격성을 견지하면서 견고하고 구조화된 화면을 탄생시킨다. 이 때 작가는 회화적인 깊이감보다는 선과 색면이라는 형식에 치중하면서 사선의 역동성과 같은 명증한 측면과 더불어 색을 통한 평면성의 측면을 노정한다. 김수영의 화면은 육체성이 배제된, 즉 탈신체화된 시선으로부터 산출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의 작품에는 소위 메를로-퐁티가 세계의 살(flesh)이라고 즐겨 부르는 존재가 누락되어 나타나게 된다. 촉각과 같은 다른 감각의 사용이 철저히 배제된 시각적인 것의 순결화라고 해야 할까? 이러한 주체와 대상과의 ‘관조적 거리’는 그 사물을 휴머니티가 배제된 ‘스펙터클’로 만든다. 이처럼 김수영의 작품은 질적인 주제들보다는 오히려 추상적이고 양적으로 개념화된 공간과 구조가 더욱 흥미롭게 나타난다. 그런 까닭에 그녀의 작품들은 탈내러티브화(de-narrativization)나 탈텍스트화(de-textualization)의 회화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김수영_라팔미르 서민주택_캔버스에 유채_2007


김수영의 이런 태도는 마치 추상미술의 형식주의의 주요개념인 ‘의미 있는 형식’(클라이브 벨)을 만들어내는 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의미 있는 형식이란 재현된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미적 가치를 부정하고, 형식 그 자체를 목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6가지 순수 형식요소, 즉 선, 양감, 공간, 명암, 색채, 시선에 따라 표현된다. 이를 모티프로 하는 예술가들은 삶은 더 이상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형식을 통해 순수성을 찾아야 한다고 보면서 작품을 초월해있는 일련의 특성을 추구한다. 그들은 예술작품이 일상적 삶에서 느끼는 정서가 아닌 순수형식으로부터 환기되어 삶의 경험으로 환원될 수 없는 독특한 정서를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으로 믿는다. 이러한 과정에서 예술가는 삶과 예술을 철저히 분리하고 일상적 삶을 넘어 초월적 실재를 추구하는 등 형이상학적으로 승화된 정서를 체험하게 된다. 김수영의 회화가 리얼리즘적 재현을 근간으로 한다고 해도 그린버그류의 모더니즘 회화의 평면성과 매체성을 환기시키는 것도, 그녀의 회화가 리얼리즘적인 소재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내용을 제거해나감으로써 추상화되기에 이르렀기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_마르세이유 서민주택_캔버스에 유채_2006


클로즈업과 블로우업 ● 김수영은 사물을 파편화시켜 확대(blow-up)시키기는 하지만 그것을 클로즈업(close-up)하지는 않는다. 클로즈업은 대상에 대한 주체의 지배가 두드러지는 것으로 특정한 방향성을 강요하고 화면의 구심점 기능을 하면서 화면을 응축시키지만, 블로우업은 오히려 비가시적인 외부로의 지향성과 더불어 무한대의 화면으로 확산하는 미적 체험을 환기시킨다는 점에서 변별된다. 어쩌면 블로우업은 건축물이라는 사물, 그것도 유니트가 강세인 근대건축물이 갖는 깊이의 부재의 한계를 상쇄시키는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이를 포함하여 김수영의 화면 속의 조형적 요소는 매우 균질적이며 민주적인 시각성을 부여받는다. 김수영의 작품은 이러한 측면에서 프랑스 영화감독 자크 타티(Jacques Tati)의 영화 <플레이타임 Play Time>(1967)을 연상시킨다. <플레이타임>은 몇 년 전 필름포럼이 기획한 제4회 시네클럽: “보는 것의 영광과 퇴폐”라는 세미나와 함께 마련된 영화로, 현대의 도시적 경험의 포착을 포함하여 모던한 라이프 스타일에 대한 풍자를 중심으로 근대의 시각과 시각성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던 꽤나 독특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영화는 특별히 유리와 창문, 철재와 골조로 이루어진 근대건축 양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한편, 극단적인 디테일과 투명한 심도 등 다양한 시각적 요소로 가득 차 있어 시종일관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혼란스럽고 난감했던 영화다. 이미 데카르트적 원근법이 소멸되고 파노라마적 시각으로 펼쳐진 영화의 화면은 전경만이 아니라 중경, 후경을 동시에 살펴야만 그 묘미를 파악할 수 있을 정도다. 어떤 것이 특별히 중요해 보이지 않는 만큼 관객은 그 어떤 것에 집중하도록 종용되지 않으며, 그저 관객의 선택과 투사에 의해 화면은 그 풍부함을 보장받게 된다. 이러한 시각적 민주성이 시선의 중심을 소멸시킨 김수영의 화면에서도 고스란히 담보된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김수영_베를린 서민주택_캔버스에 유채_2007


표면과 심층: 무의식과 반복강박 ● 김수영은 자신의 시각적 체험의 개별적인 특성을 음미하고 유형화하되, 그것을 알레고리화하거나 상징화하려는 유혹에 저항한다. 그것은 그녀가 자신의 화면에 심리적이며 서사적인 요소의 개입을 충실히 배제하는 것과 연관된다. 김수영에게 이러한 심리적이며 서사적인 요소에 대한 혐오는 거의 일종의 억압과 강박으로 느껴질 정도인데, 그녀의 작업이 사실 대상의 재현 그 자체로만 보여지지 않고, 미적 조형요소의 단일한 결합체로만 여겨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김수영이 지속적으로 다루는 건축물의 반복적 유니트는 환상이 거세된 강박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그것은 어떤 세계를 은폐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 은폐는 억압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환상이 거세된 화면이란 심리적이고 서사적인 세계를 지속적으로 배제하면서 강박적일 정도로 반복적인 유니트를 묘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어쩌면 기계적일 정도로 건조하게 재생산되는 반복적인 구조적 특성 -그것들이 나름대로의 다양한 변주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은 실재(the real)를 감추는 베일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반복은 실재적인 것이 재현될 수 없으며, 반복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 같다. 라캉에 따르면 반복은 복제가 아니다. 그것은 지시대상의 재현이나 순수한 이미지, 즉 독립된 기표의 시뮬레이션이라는 의미에서 의 복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건축물을 표현하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반복은 외상적인 것으로 이해되는 실재적인 것을 가리기(screen) 위한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사실 우리는 하나의 문화가 외부의 이미지를 고수할지라도, 개인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나타낼수록 그 아래에 무언가 의미심장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앤디 워홀의 반복적인 화면은 그저 무관심한 표면일 수도 있지만, 그것을 근본적인 어떤 것 즉 실재를 가리는 베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해석한 할 포스터(Hal Foster)의 언급을 신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김수영의 화면 역시 실재를 가리는 동시에 드러내는, 표면이 곧 심층이 되는, 은폐와 탈은폐의 경계적 맥락을 지니는 어떤 것은 아닐까?




김수영_브리에 엉 포레 서민주택_캔버스에 유채_2006


인간에게 심리적 외상(trauma)의 결과는 반복적인 꿈으로 나타나며, 이런 강박적인 반복은 쾌락의 원칙과 관련된다. 김수영은 자아의 과도한 긴장을 통제하고 그것을 파편화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 역시 강박적인 반복을 통해서 욕망의 충족을 지속적으로 지연시키며, 죽음충동을 삶충동으로 바꾸는 것은 아닐까? 김수영의 작품을 보면서 이제는 무서운 깊이 없이는 아름다운 표면도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는 니체의 말과, 표면이 곧 심연이라는 들뢰즈의 말을 오버랩시켜 본다. 이들 아포리즘은 김수영의 작품과 진정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일까? ■ 유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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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타임즈

홍승현 사진展

2007_0321 ▶ 2007_0327



홍승현_흑백인화_15×19"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선 컨템포러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21_수요일_05:00pm




갤러리 선컨템포러리
서울 종로구 소격동 66번지
Tel. 02_720_5789
suncontemporary.com






현대성의 가면 벗기기 ● 홍승현의 사진들은 단사진들이 아니다. 그가 보여주는 사진들은 두 장씩 짝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짝짓기는 보는 이들에게 친숙함이 아니라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 그건 나란히 병렬된 변기들과 수도꼭지들을 묶어서 보여주는 한 쌍의 사진처럼, 서로 짝 지워진 두 장의 사진이 얼핏 보기에 서로 아무런 관계를 지니지 않는 이질적 오브제들을 포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 다시 말해서 홍승현의 사진 짝짓기 안에서 개개의 사진들은 서로 이미지의 충돌을 일으키고 그 충돌 효과는 보는 이의 시각적 경험을 연속적이 아니라 불연속으로 만든다. 이러한 충돌적이며 불연속적인 이미지의 짝짓기는 홍승현의 사진 보기에서 두 가지를 의미한다. 우선 홍승현의 사진들 안에 특별한 메시지가 있다면 그 메시지는 각각의 사진들이 아니라 두 사진들 ‘사이’에 내장되어 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 메시지는 두 사진들의 순접효과가 아니라 충돌효과를 통해서 전해진다는 것, 다시 말해서 이미지들 사이를 연결하는 모종의 관계를 보는 이가 스스로 발견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우리가 홍승현의 짝사진들을 통해서 발견하게 되는 것들은 무엇이며 그 발견의 경험을 통해서 마지막에 만나게 되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홍승현_흑백인화_15×19"_2007



홍승현_흑백인화_15×19"_2007


홍승현의 사진들은 우선 보는 이로 하여금 짝 지어진 두 장의 사진들을 자세히 ‘비교’하게 만든다. 일상 속에서는 서로 무관한 목적과 용도로 분리되어 있어서 하나로 묶어 주목할 필요가 없는 공간 혹은 사물들이 홍승현의 의도적인 사진 짝짓기를 통해서 서로 꼼꼼히 견주어 보아야 하는 비교 대상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 일단 그렇게 특별한 비교 대상으로 짝 지어지면 사진 속의 두 대상들은 더 이상 개개의 무관한 사물이 아니라 모종의 관계를 지니는 오브제들로 보는 이에게 다가오는데, 그 모종의 관계를 추적하는 가운데 우리가 제일 먼저 발견하는 건 두 오브제들 사이의 ‘시각적 유사성’이다. 예컨대 무심코 커피를 뽑아 마시는 커피 자판기와 아무 생각 없이 타고 내리는 엘리베이터, 줄지어 늘어선 공중 전화기들과 나란히 병렬되어 부착된 전기 개폐 스위치들은 서로 용도가 다른 별개의 사물들임에도 불구하고 외형상 얼마나 비슷하게 닮아 있는가. ● 하지만 두 오브제 사이의 그러한 유사성이 다만 외형상의 닮음에 대한 시각적 확인에서 멈추는 건 아니다. 그 시각적 유사성을 응시하는 사이 우리는 곧 그 유사성이 단지 외형상의 유사성이 아니라 매우 엄격하게 개개 사물들의 속성을 규정하는 ‘구조적 기능성’에서 비롯하는 필연적인 결과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채굴된 석탄을 실어 나르는 광산의 운송 통로와 높은 곳을 쉽게 오르내리도록 완만한 경사면으로 축조한 도로가 기능상 아무런 차이가 없듯이 사람을 실어 나르는 지하철 선로와 화물들을 운송하는 콘베어 벨트 사이에도 아무런 기능적 차이가 없다. ● 이처럼 시각적 유사성과 구조적 기능성의 발견을 거쳐 우리가 홍승현의 사진들 속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하게 되는 건 사진 속의 다양한 오브제들을 예외 없이 통제하고 있는 사물관계, 즉 ‘획일적 시스템’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물관계의 시스템에 대한 확인은 우리가 편하게만 여겨왔던 일상의 환경이 구석구석 획일적인 기능성으로 시스템화되어 있으며 그에 따라 우리들의 일상적 삶 또한 사물들의 기능관계에 맞추어 빈틈없이 획일화되어 있음을 놀라움으로 깨닫게 만든다. ● 하지만 사물관계의 획일성에 대한 놀라움은 일상 환경의 획일성에 대한 놀라움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놀라움은 더욱 증폭되어 미처 우리가 홍승현의 짝사진들 속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또 하나의 사실, 즉 ‘인간의 부재’라는 암묵적 메시지와 만나게 만든다. 홍승현의 사진들 속에는 그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이 주인인 사물공간에서 사람의 흔적을 의도적으로 지움으로써 소외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사진들은 물론 많다. 그러나 그러한 사진들이 대부분 단사진들 안에서 사물과 인간 사이의 소외관계만을 테마화 하고 있다면 홍승현의 짝사진들이 불러일으키는 소외효과는 사물과 사물들 혹은 사물과 인간 사이의 소외관계를 깨닫게 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 일상 공간 안에서 사람의 흔적을 지워버린 그의 사진들은 자연스럽게 사물들 사이의 소외관계를 사진들 자체에서는 생략되어 있는 또 하나의 관계, 즉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로까지 확장시킨다. 사물관계로부터 인간관계로 접속되는 그러한 시선의 확장을 통해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헐벗은 진실은 그러나 매우 가열하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의 차이를 없애고 오로지 기능성만으로만 획일화 된 사물관계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너와 나에게 강요되는 생존 방식 - 저마다 개인임을 주장하지만 사실은 개개인의 고유성이 아니라 주어진 역할의 기능으로만 존재하고 또 그렇게만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는 우리들 실존의 맨 얼굴을 직접 목격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 헤겔은 일찍이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서 역사의 유토피아를 꿈꾸었다. 인간은 이성과 기술의 도움으로 자연에의 예속을 벗어나 자유와 행복의 이상향을 스스로 완성하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헤겔의 예언대로라면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모던 타임즈는 유토피아의 시대이어야 하고 우리는 당연히 그 유토피아의 주인이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현대라고 불리는 테크노롤러지의 유토피아 안에서 우리는 과연 주인인가? 아니면 빈틈없는 기능성으로 통제되는 획일적 환경 속에서 사물관계를 따라 맹목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사물일 뿐인가? 현대성의 가면을 벗겨내면서 현대적 일상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홍승현의 짝짓기 사진들은 그러한 가열한 질문을 메시지로 던지고 있다. ■ 김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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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s View

서기환 수묵展

2007_0321 ▶ 2007_0327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_145.5×112.1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학고재 홈페이지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21_수요일_05:00pm




학고재
서울 종로구 관훈동 100-5번지
Tel. 02_739_4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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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화가 개인의 초상화로 그려질 경우 형사의 바탕위에 그 대상의 신(神)이 확연하게 드러날수록 기운생동하는 그림이 된다. 그러나 개인적 신의 범위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사람이 활동하는 분야, 계층에 공통되는 보편적 신의 표출로까지 나아가고자 한다면 그림에서 형사는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에 구체적인 묘사로부터 점점 추상화되며 이에 따라 선적인 묘사보다는 오히려 먹의 번지기 즉 회화적 묘사가 적절한 표출수단으로 부각된다. 전자의 대표적인 예로 윤공재의 자화상을 들 수 있고 후자의 예로는 양해의 발묵선인도와 같은 일품화가 머리에 떠오르는데, 기운생동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포착된 것이다. 이와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대상의 신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화가의 주관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문인화에서 인물화는 산수화보다 그 중요성이 현격하게 떨어진다. 그러나 인물에 대한 정확한 파악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에 대한 화가의 자제된 감정을 세련되게 표현하고자 하므로 주관성으로의 변환을 시도한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채색_65×90cm_2007


서기환의 사람 풍경은 사람 자체에 대한 물음을 주제로 하고 있다. “사람이란 무엇인가?” “왜 사람들은 삶의 과정에서 소외된 채 혹은 소외되었다고 느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타자의 멍에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적 삶이 필연적으로 요구되며 비이성적인 사고나 행동에 연유한 삶은, 결국 사람을 고난의 길로 인도하고 마는가?” 이와 같은 의문은 호기심을 넘어선 숙명적 과제로 받아들여지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발견하기 위해 끈질기게 사람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디지털 카메라로 그들의 모습을 잡아서 화폭에 옮겨 놓는 작업을 계속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을 보면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의문이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이러한 작업을 계속하는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주제는 한시도 그의 뇌리에서 떠난 적이 없으므로 시간이 지날수록 문제의 핵심에 더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이 시도된다. 한 두 가지 실마리가 잡혔다는 징표가 보이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실마리를 잡지 못한 절망의 표현이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위에 기술한 인물화의 역사적 변천이 그의 그림에 상당한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 주묵_91×116.7cm_2007


서기환이 중국에서 갓 돌아와 그린 그림에서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군중을 즐겨 그 대상으로 그리는데 이러한 인물화에서조차 초상화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치 초기 네덜란드 집단 초상화처럼 각기 뚜렷한 형태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고자 한다. 각 사람의 형태와 성정에 주목하다 보면 일정한 공감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고도의 통일성을 유지하지 아니할 경우 오히려 우리의 시선은 흐트러지고 쉽사리 권태를 느끼게 된다. 감상자들은 각 개인의 특성을 하나하나 파악하기보다는 단일한 통일성을 요구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을 찾기 어려울 때 권태를 느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국 유학 직후의 그림에서 많은 사람들이 중국풍이라고 지적할 때, 바로 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_91×116.7cm_2007


그가 한국성 혹은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그림의 변환을 시도할 때 제일 먼저 변하는 부분은 대상의 확실한 형태를 나타내기 위한 선적인 묘사에서 회화적인 묘사로의 이동이다. 그리고 담묵에 의한 실루엣만을 드러내는 배경의 인물군상을 통해 전면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포인트를 부여한다. 이러한 점에서 일품화의 정신이 서기환의 그림에 반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며 서로 겹쳐지기도 하는 것이, 과도기에는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백묘 등 선적인 묘사에 대한 선호가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최근의 그림에서 그는 또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담채_91×116.7cm_2007


감상자들은 이제 그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그렸는지 전혀 짐작할 수 없다. 사람들은 전체적인 윤곽 혹은 덩어리만으로 사람인 줄 알게되고 그들이 도시의 거리 혹은 지하철 속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뿐이다. 서기환은 수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축적된 구체적인 감정을 지닌 대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화가가 그들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점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많은 화가들은 타인의 마음을 읽어보고자 노력하고 그 결과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세계의 비밀을 밝히는 것이면서 아울러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의 확보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과연 가능할까? 여기에서 사람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그들이 지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는 답을 제시하기보다는, 화가 자신이 그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표현하려는 자세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볼 경우 그의 인물 군상이 지니고 있는 문제는 바로 화가 자신의 문제이고 그의 그림은 결국 화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는 것이며, 사람들이 소외되었다고 느끼는 감정은 화가 자신의 소외로 귀결된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소외되었다고 느낄 뿐 그 소외의 정체가 무엇인지, 소외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_60×130cm_2006


소외는 화면의 인물이 처해있는 거리나 지하철과는 완전히 구별되게 흰 바탕 그대로 나타난다. 인물의 한 부분이면서도 흰 바탕이 아닌 경우 주위환경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유사한데, 이는 소외를 감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소외를 극복한 것이 아니라 환경에 완전히 동화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할 뿐 자신의 개성을 확고하게 구축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은, 본질이라고 하는 것은 없다고 하는 화가의 주장을 대변하는 것이리라. 화면의 주조색인 회색이 망각을 의미하는 것이라는 화가 자신의 언급과 또 작품의 제목을 모두 동일한 ‘사람풍경’으로 정한 화가의 고의성에서도 이러한 특성을 엿볼 수 있다.




서기환_사람풍경_수묵담채_60×130cm_2006


서기환은 인간 본래의 면목을 찾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끝없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노력이 계속되더라도 본래의 면목을 찾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 원래 사람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참모습은 없다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변화를 이루고자 하는 그의 모습에서 아직 해답을 발견하지 못하였다는 안타까움을 느끼면서 동시에 그의 성실한 모습에서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해답을 발견하여서가 아니라 끝없이 노력하는 과정에서 바로 서기환 만의 독자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답게 될 수 있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我之爲我, 自由我在)”는 석도의 말은 여기서도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는 명언임을 알 수 있다. ■ 백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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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라미

윤기언 수묵展

2007_0321 ▶ 2007_0327



윤기언_動(move)_한지에 수묵채색_72×72cm_2007

● 위 이미지를 클릭하면 이미지 속닥속닥 Vol.051109a | 윤기언 수묵채색展으로 갑니다.




초대일시_2007_0321_수요일_05:00pm




갤러리 가이아
서울 종로구 관훈동 145번지
Tel. 02_733_3373
www.galerie-gaia.net






시지각적 경험이 선사하는 가볍고, 흥미진진하며, 때론 짜릿한 심미적 쾌(快) 윤기언의 그림에 다가서면서 우리는 시지각적 경험이 어떻게 군침이 도는 심미적 묘미로 화하는지에 관해 알게 된다. 단언하건대, 눈은 결코 사물의 외관을 확인하기 위해 부득불 주어진 도구적인 기관 이상이다. ● 몇 발자국 떨어졌을 때, 윤기언의 이미지는 단지 구슬들을 꿰어 만든 두 개의 목걸이거나 평면 위에 질서정연하게 배열된 동그랗고 작은 일련의 패턴 이상이 아니다. 하지만, 그림을 향해 한 두 걸음을 옮기는 순간, 그것들은 예기치 못했던 마술이 되어 시선을 붙잡는다. 가까이 다가섰을 때, 그것들은 더 이상 모두가 동일하며 중성적이고, 무표정한 기하학적 도형이 아니다. 그것들 하나하나는 표정까지 생생하게 묘사된 사람의 얼굴로 화한다! 심술궂은 얼굴, 잔뜩 심통이 난 얼굴, 호쾌한 웃음과 불만, 그리고 꾸벅거림까지… 다만 작은 동그라미들에 불과했던 것들(그들) 모두는 정교하게 울거나 웃고, 시무룩하거나 지루해하고 있다. 같은 맥락에서, 단지 비정형의 윤곽을 지닌 작은 입자처럼 보였던 것들은 만발한 국화송이가 된다. 반면, 하나의 커다란 꽃봉오리를 묘사한 듯 해 보이는 것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의미를 담은 손짓언어들의 군집임이 드러난다.




윤기언_動_한지에 수묵채색_70×70cm_2007


관객들은 자신이 인식적 차원의 오류를 범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시지각에 관련된 게임에 초대되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결국 작가의 의도는 적중됐고, 그들은 그가 의도한 덫에 걸려든 셈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험은 어떤 거짓에 넘어간 것과 같은 기분상하는 종류의 것과는 무관하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속음’의 경험은 관객들에게 매우 심미적인 것으로 소통된다. 관객들은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바짝 다가서 그 세부를 요모조모 살피기를 되풀이하면서, 그 같은 경험을 - 덤덤하게 말하자면 시지각체계의 어떤 조건적 한계와 관련된 경미한 오류와 관련된 그 경험- 거부하기보다는 기꺼이 즐긴다. ● 이는 우리의 지각체계가 지극히 협소한 조건들의 조합 안에서만 작동한다는 사실, 즉 그 예민한 조합의 범주 밖에서는 결코 세계와 만날 수조차 없다는 명백한 한계에 대한 존재론적 차원의 자각과 깊은 연관이 있다. 바로 이러한 자각의 경험이 심미적 울림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진정한 심미성은 우리의 자아가 끝없이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는 우리의 본성 곁으로 가까이 나아갈 때 가슴으로 전해오는 심오한 느낌이다. 우리의 둔해진 감각이 각질을 벗고, 예민함을 회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주어지는 내적인 충만함의 경험이다.(…) 이처럼 심미적 추구는 진리의 추구와 무관하지 않으며, 그것을 추구하는 성찰의 심오한 감각이 회복되고 고양되는 경험과 무관치 않다.” 이처럼, 윤기언의 작업은 우리 시지각의 한계를 즐겁게 드러냄으로써, 그것이 어떻게 미학적 효용성을 지니는가에 대해 일깨워준다.




윤기언_動_한지에 수묵채색_72×72cm_2007


윤기언의 <운동>연작은 형상의 부재에서 형상이 만들어지고, 부재 속에서 의미가 생성되는 단면을 보여준다. 부분들이 전체가 되고, 전체는 다시 부분들로 분할되고 연결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형상은 비형상적인 실현들 속에서 잉태되고, 불확정성적인 차원으로 존재한다. 선들은 자유분방하게 움직이면서 때론 동일한 질서체계를 따르는 동심원구조를 만들기도 하고, 어느덧 사람의 얼굴과 신체를-또는 그 일부를- 만들기도 한다. 조형적 자유분방함이 어느새 닫힌 이미지의 필연적 요인이 되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부재와 현존, 비형상과 형상의 구분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이것은 윤기언의 세계를 이루는 매우 중요한 근간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 윤기언의 그림에서 형상과 비형상의 구분은 모호하다. 사실과 패턴의 경계 또한 분명해야 할 이유가 없다. 따라서 이미지가 질서고 이미지의 부재가 무질서라는 식의 이분법 또한 통용되지 않는다. 패턴적인 질서가 선호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전혀 일목요연하지 않은 각양각색의 내면 또한 탐구의 대상이 된다. 동그라미라는 기하학적 질서와 복잡한 내면을 드러내는 천태만상의 표정이 하나의 신체 안에 동거한다. 차가운 도형에 실존의 온갖 뜨거운 지표들, 표정과 스타일과 감정의 편린들이 오버랩된다. 도상과 심리, 초단순성과 복잡계가 하나의 동일한 정체성에 기대고 있는 것이다.




윤기언_動_한지에 수묵_142×71cm_2007


윤기언의 세계는 화해하기 어려운-어렵다고 간주되고 있는- 두 세계의 상극이 소음 없이 해소되는 한 방식을 소개한다. 대척점에 있었던 두 세계 사이의 모듈은 이제 더 이상 서로를 상쇄시키는, 냉담과 적대주의의 방향이 아니다. 이로서 우리는 윤기언의 융합적이고 상보적인 접근이 기실은 매우 전통적이고 심오한 미학과 영감의 원칙에 가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미학의 역사가 입증하는 사실에 따르면, 창조적 영감은 언제나 상호 무관해 보이거나, ‘비정상’으로 보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추구되지 않는 두 질서의 관계를 유추해내는 것과 관련 있어 왔다. 물론, “창조는 언제나 비정상을 불신하는 인간의 버릇 때문에 저해를 받아왔다.”(부르스터 기셀린,Brewster Ghiselin) 예컨대, 조르주 루오 같은 화가만 하더라도, 언제나 지각 할 수 있는 세계에 대해 눈을 크게 여는 것과 그 지각 가능한 세계를 지배하는, 보이지 않는 질서를 보기 위해 눈을 감는 모순된 두 세계 사이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는 유물론자-리얼리스트들이나 관념론자-추상주의자들 같이, 한쪽으로 경사된 사유의 주관자들로서는 도달하기 어려운 조화와 균형의 차원이다.




윤기언_話(talk)_한지에 채색_50×72cm_2007



윤기언_話(talk) 부분확대


진실을 다루기 위해 늘상 심각해야 한다는 것은 균형을 잃은 세대의 편견에 지나지 않는다. 웃음과 흥미를 지적 천함으로 분류하는 행습도 유감스러운 오류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의 가장 지독한 오해는 예술이 언제나 도를 넘어 앞으로 튀어나가야 한다는 맹목적인 미학적 급진주의다. 미술대학의 조각 전공자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클레이 애니메이션 <웰레스와 그로밋>(1997, 90분)의 제작자이자 감독인 닉 파크(Nick Park)는 그가 미술대학에서 언제나 들었던 다음과 같은 강령을 환기한다 : "보다 급진적인 태도를 취하고 당신의 예술에 대해 그럴 듯한 말을 붙이라는 압력 같은 것을 항상 받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지난 세기의 수십 년 간, 그리고 현재까지도 미술대학에서 우리가 만나왔던 예술수업의 관행적인 풍경에 다름 아니다. 이런 류의 편견과 오해가 추방해온 값진 것들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 다행스럽게도 윤기언의 세계는 이 시대의 폐해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작가는 시각적인 쾌가 품위를 잃지 않는 즐거움의 통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붙잡고 있다. 이처럼, 이념적 급진성에 몸을 맡기거나, 말초감각이나 벅벅 긁어대지 않으면서, 그리고 관념의 늪지에 숨지도 않으면서 지각의 점잖은 유희를 제안하는 것이 무엇보다 윤기언 작업의 매력이다. 원죄감 없이 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것, 일테면 시지각의 가능성과 한계의 경험이 제공하는 성찰과 심미성의 변증적인 게임에 기꺼이 몰입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상실해온 것이자 다시 복원해야 할 지표로서, 지금과 같은 미적 재난의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아직은 충분히 아름답고, 존재와 사물들의 사이에서 발견을 기다리며 남아있는 유추의 빈 공간들은 무궁무진 널려 있다. 시간과 사물들의 세계는 여전히, 아니 더욱 절실하게 자신을 탐색하고 탐미할 창조적인 영혼의 소유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모든 것들이 아직 드러내지 않은 의미들, 자신만이 그 원료가 되어 생성해낼 수 있는 독특한 미지의 내러티브를 선보이기 위한, 예기치 못한 만남의 계기들을 고대하고 있다. 윤기언은 지금 동그라미와 심리학 사이의 어딘가로 난 하나의 오솔길을 실험하고 있지만, 직사각형이나 아라비아 식 무늬가 그 원료라 한들 또 어떠랴? ● 이러한 길로 나서는 것은 궁극적으로 주어진 생의 조건들을 깊이 긍정하는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윤기언의 세계 앞에서 관객들은 어떤 이념적 동조를 강요받지 않아도 된다는, 특히 이 시대에는 드문 미학적 가벼움으로 서 있을 수 있다. 지식과 기억의 보따리를 풀어 뭔가 난해한 주석들이라도 끄집어내야 하리라는 타자화된 긴장감에 자신을 내어줄 필요도 없다.




윤기언_話_한지에 수묵_63×62cm_2007


윤기언의 예술은 난해한 관념이나 급진적 이념, 미학적 도그마의 표방과는 무관하다. 그것은 편하고, 가볍고, 흥미진진하며, 때론 짜릿하기도 하다. 우회적인 성찰이 빗은 심미적 쾌가 있고, 이 모든 것들을 떠받치고 있는 그의 ‘화가-장인’으로서 뛰어난 솜씨가 있다. 윤기언이 이 기름진 영토에 또 어떤 식물들을 심고, 경작해 나갈지를 기대해보아도 될 이유는 이처럼 충분하다. ■ 심상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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